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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와 東夷에 관한 참고 글 모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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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와 東夷에 관한 참고 글 모음

부르칸 2013. 2. 7. 14:48

 

1.《설문해자》의 이(夷), 만(蠻), 융(戎), 적(狄).

▶ 자료 출처 :《說文解字經》段玉裁 著. 臺灣 蘭臺書局. 1977.

<夷>

【東方之人也從大從弓】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 ‘大’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弓’에서 유래하였다.】

各本作平也從大從弓東方之人也淺人所改耳今正韻會正如是羊部曰南方蠻閩從虫北方狄從犬東方貉從豸西方羌從羊西南僰人焦僥從人蓋在坤地頗有順理之性惟東夷從大大人也夷俗仁仁者壽有君子不死之國按天大地大人亦大大象人形而夷篆從大則與夏不殊夏者中國之人也從弓者肅愼氏貢楛矢石砮之類也出車節南山桑柔召旻傳皆曰夷平也此與君子如夷有夷之行降福孔夷傳夷易也同意夷卽易之假借也易亦訓平故叚夷爲易也節南山一詩中平易分釋者各依其義所近也風雨傳曰夷悅也者平之意也皇矣傳曰夷常也者謂夷卽彝之假借也凡注家云夷傷也者謂夷卽痍之假借也周禮注夷之言尸也者謂夷卽尸之假借也尸陳也其他訓釋皆可以類求之.

각 판본에는 「평평하게 함(平)을 뜻하며, ‘大’에서 유래하였고 또한 ‘弓’에서 유래하였으니,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 하였는데, 이는 생각이 얕은 사람(?)이 고친 것일 뿐이므로 지금에 와서 바로잡는다.《운회》에도 바로 이와 같이 되어 있다. 羊部에 이르기를 「남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蠻’ 또는 ‘閩’은 곤충(虫)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북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貉’은 벌레(豸)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羌’은 양(羊)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남의 종족을 가리키는 ‘僰人’과 ‘焦僥’는 평범한 사람(人)에서 유래된 글자들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땅에 순응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못 그 땅의 이치에 따르는 품성을 지니고 있는데 오직 동방의 夷만이 ‘크다(大)’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니 대인(大人)이라 할 만하다. 이인(夷人)의 풍속은 어질다고 하는데 ‘어질다’함은 곧 장수를 의미하므로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생각컨대, 하늘은 크고도 존귀하며 땅도 크고도 존귀하며 사람 역시 크고도 존귀한 것이다. 크고도 존귀함을 나타내는 ‘大’자는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인데, ‘夷’자의 전체(篆體)가 ‘大’자에서 유래된 것인 까닭에 ‘夷(동방)’가 ‘夏(중화)’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 ‘夏’라 함은 중국사람을 말한다. ‘弓’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숙신씨가 고시 또는 석노 같은 것을 헌납한 것을 말한다.《시경》의《出車》·《節南山》·《桑柔》·《召旻》등의 毛箋에서는 모두 ‘夷’를 ‘平’이라 하였다. 이러한 것과, ‘군자가 만일 공정히 했더라면’․‘평탄한 길이 남으니’․‘복을 내려도 매우 크리라’ 등의 모전에서 ‘夷’를 ‘易’이라 한 것은 같은 뜻으로서 ‘夷’는 곧 ‘易’의 假借字임을 말한다. ‘易’ 역시 글자의 뜻이 ‘평평히 하다’인 까닭에 ‘夷’자를 빌어서 ‘易’의 가차자로 삼았음을 말한다.《시경․절남산》의 시에서 ‘平’과 ‘易’을 나누어 풀이한 것은 각각에 그 가까운 뜻에 의거한 것임을 말한다.《시경․정풍》의《風雨》에 「夷는 常이다」라고 한 것은 ‘夷’가 곧 ‘彝’의 가차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무릇 주석에서 「夷는 傷이다」라고 한 것은 ‘夷’가 곧 ‘痍’의 가차자임을 말하는 것이다.《주례》의 주석에 「夷는 尸를 말한다」라고 한 것은 ‘夷’가 곧 ‘尸’의 가차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尸’는 ‘펼쳐 놓음’을 말한다. 그 외의 뜻으로 풀이한 것들도 모두 이러한 유형에서 그 뜻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蠻>

【南蠻】

【남방의 종족을 말한다】

職方氏八蠻爾雅九夷八狄七戎六蠻謂之四海王制云南方曰蠻詩角弓如蠻如髦傳曰蠻南蠻也采蠢爾荊蠻傳曰荊蠻荊州之蠻也.

<직방씨>에서는 ‘여덟 부류의 남방종족’이라 하였으며,《시경․이아》에서는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고는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왕제》에서 말하기를 「남방을 일컬어 ‘蠻’이라 한다」하였으며,《시경․소아》의 각궁에서 「오랑캐 같은 행동을 하니」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蠻’이란 남방의 만인(蠻人)을 말한다」하였으며,《시경․소아》의 채사에서 「어리석게 준동하는 형땅의 오랑캐」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형만이란 형주의 만인을 말한다」하였다.

【它穜從虫】

【뱀의 종류로서 ‘虫’에서 유래되었다】

說從虫之所由以其蛇種也蛇者虫也蠻與閩皆人也而字從虫故居部末如貉之居豸末狄之居犬末羌之居羊末焉.

‘蠻’자가 ‘벌레(虫)’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蠻’이 뱀의 한 종류임을 말하는 것이다. 뱀이란 벌레를 말하는 것이고 ‘蠻’이나 ‘閩’은 모두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글자가 ‘벌레’에서 유래한 까닭에 해당 부수의 끝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貉’이 豸부의 끝에 놓이고 ‘狄’이 犬부의 끝에 놓이고 ‘羌’이 羊부의 끝에 놓이는 등이 같은 것이다.

<戎>

【兵也】

【병장기를 말한다】

兵者械也月令乃敎於田獵以習五戎注五戎謂五兵弓矢殳矛戈戟也按周禮司兵掌五兵鄭司農云戈殳戟酋矛夷矛後鄭云此車之五兵也步卒之五兵則無夷矛而有弓矢兵之引申爲車卒故戎之引申亦爲卒旅兵可相助故引申之義小雅烝也無戎傳曰戎相也引申爲戎狄之戎又民勞傳戎大也方言戎大也宋魯陳衛之閒語又鄭詩箋云戎猶女也猶之云者以戎汝雙聲而通之也戎有讀若汝者常武之詩是也又有讀若輮者常棣之詩是也.

병장기란 무기를 말한다.《월령》에 「이에 사냥을 하면서 가르치게 하고는 그로서 다섯 가지 병장기의 용도를 익히게 하였다」라 하고는 그 주석에 다섯 가지 병장기란 다섯 가지 무기로서 활과 화살 곤봉 일지창 가지창 미륵창 등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생각컨대,《주례》에서 병장기를 맡은 관리는 다섯 가지 병장기를 맡아 주관한다 하였는데, 정사농이 말하길 그것은 가지창 곤봉 미륵창 장창 평창 등이라 하였으며, 후에 정씨가 말하길 이는 수레전투에 사용되는 다섯 가지 병장기라고 하였다. 보병이 쓰는 병장기는 ‘평창’이 없는 대신 ‘활’과 ‘화살’이 있다. 병장기(兵)로 부터 파생된 뜻에서 ‘수레전의 병졸’이 되었으며 그와 같이 병장기(戎)로 부터 파생된 뜻 역시 ‘병졸’이 되었다. 군사와 병장기는 상호간에 보조적인 역활을 하는 까닭에 서로간에 의미의 응용이 가능하다.《시경․소아》에 「그럴 때는 우릴 돕지 않는다네」라 하였는데, 그 모전에 가로되 「‘戎’이란 ‘相(돕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파생된 뜻에서 변방민족을 뜻하는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하였으며, 또한《시경․민로》의 모전에 가로되 「‘戎’은 크다는 것을 말한다」라 하였다. 방언에도 ‘戎’은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송․노․진․위 등의 지방 사이의 말과 또 정씨의 시전에 가로되 「‘戎’은 ‘女’와 같다」고 하였는데 ‘…같다고 하였다’라는 것은 ‘戎’과 ‘汝’가 쌍성으로서 통한다는 것을 말한다. ‘戎’을 마치 ‘汝’와 같이 해석하여 읽는 것은《시경․소아》상무의 시가 바로 그것이며, 또한 ‘輮’와 같이 해석하여 읽는 것은 상체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從戈甲】

【‘戈’와 ‘甲’에서 유래되었다】

金部曰鎧者甲也甲亦兵之類故從戈甲會意.】

金부에 가로되 ‘鎧’란 갑옷이라 하였다. 갑옷 역시 병장기의 종류인 까닭에 ‘戈’와 ‘甲’의 글자를 합하고 그 뜻도 합하여 글자를 만든 것이다.

<狄>

【北狄也】

【북방의 종족을 말한다】

北各本作赤誤今正赤狄乃錯居中國狄之一種耳許書蟲部曰南蠻曰東南閩越大部曰東方夷羊部曰西方羌豸部曰北方貉則此必言北狄狄與貉皆在北而貉在東北狄在正北釋地曰九夷八狄七戎六蠻謂之四海八蠻在南方六戎在西方五狄在北方李巡云五狄者一曰月支二曰穢貊三曰匈奴四曰箄于五曰白屋王制明堂位皆言東夷南蠻西戎北狄.

‘北’은 각 판본에 ‘赤’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된 것이기에 지금에 바로 잡는다. 적적(赤狄)은 이전에 중국에서 섞여서 정착하여 살던 북방종족의 일종일 뿐이다.《설문해자》의 蟲부에서는 남방의 종족을 ‘蠻’이라 하고 동남방을 ‘閩’ ‘越’이라 하였으며, 大부에서는 동방을 ‘夷’라 하고, 羊부에서는 서방을 ‘羌’이라 하였고, 豸부에서는 북방을 ‘貉’이라 하였는데 곧 북방의 ‘貉’이란 필시 북적(北狄)을 말한 것이다. ‘狄’과 ‘貉’은 모두 북쪽에 있으나 ‘貉’은 동북쪽에 있었고 ‘狄’은 정북쪽에 있었음을 말한다.《석지》에 가로되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였는데,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 여덟 부류의 만인(蠻人)은 남방에 있었으며, 여섯 부류의 융인(戎人)은 서방에 있었으며,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은 북방에 있었다. 이순이 가로되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이라 함은 그 첫 번째를 일컬어 월지(月支)라 하며, 두 번째가 예맥(穢貊)이며, 세 번째가 흉노(匈奴)이며, 네 번째가 비우(箄于)이며, 다섯 번째를 일컬어 백옥(白屋)이라 한다」고 하였다.《왕제》의 명당위에서는 모두 ‘동방의 이인 · 남방의 만인 · 서방의 융인 · 북방의 적인’이라 하였다.

【本犬穜】

【본래 개의 한 종류이다】

此與蠻閩本邪穜貉本豸種羌本羊穜一例.

이것은 ‘蠻’ ‘閩’이 본래 뱀의 한 종류이며, ‘貉’이 본래 벌레의 한 종류이며, ‘羌’이 본래 양의 한 종류인 것과 같은 예이다.

【狄之爲言淫辟也】

【‘狄’은 ‘음란하다 괴벽하다’라는 말이 된다】

此與孔子曰貉之言貉貉惡也一例惡與貉辟與狄皆疊韻爲訓風俗通云狄父子㛮叔同穴無別狄者辟也其行邪辟其類有五按辟者今之僻字.

이것은 ‘공자 가로되 「‘貉’은 나쁘다는 것을 말한다」하였으니 ‘貉이란 곧 악함이다’한 것과 같은 예이다. ‘惡’과 ‘貉’ 및 ‘辟’과 ‘狄’은 모두 첩운으로 글자의 뜻을 새겼다.《풍속통》에 말하기를 「적인(狄人)들은 에비와 자식간에 또는 제수와 시숙간에 같은 동굴 속에서 생활하면서 따로이 구별하지 않으니 ‘狄’이라 함은 편벽 됨을 말한다. 그 행위는 도리에 어긋나 편벽 되며 그 종류에는 다섯 부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컨대 ‘辟’은 지금의 ‘僻’자이다.

2.《후한서 동이전》서문

▶ 자료 출처 :《중국정사조선열국전》□□□編譯. 서울 東文選. 1996.

03〔言-05/01〕《王制》云: 「東方曰.」 夷者, 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1]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2] 有九種,[3]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4]孔子欲居九也.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을 ‘이夷’라 한다」 하였다. ‘이夷’라는 것은 ‘근본이 되는 뿌리’라는 의미이니, 어질고 자애심이 많아 살생을 꺼려 마치 만물이 뿌리 되는 땅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유순하여 법도로서 다스리기 쉬워 군자의 나라(君子國), 또는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夷’에는 아홉 종류이 있으니 견이 · 우이 · 방이 · 황이 · 백이 · 적이 · 현이 · 풍이 · 양이 등이다. 때문에 공자는 구이九夷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1】事見《風俗通》.

【2】《山海經》曰: 「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外國圖》曰: 「去琅邪三萬里.」《山海經》又曰: 「不死人交脛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並在東方也.

【3】《竹書紀年》曰: 「后芬發卽位三年, 九來御」也.

【4】《竹書紀年》曰: 「后泄二十一年, 命畎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卽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後少康卽位, 方夷來賓」也.

【1】《풍속통風俗通》에 이 내용이 보인다.

【2】《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군자국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라고 하였다.《외국도外國圖》에 이르기를 「낭야琅邪와는 3만 리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산해경》에 또 이르기를 「죽지않는 사람(不死人)은 교경국交脛國의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으며 장수를 누리고 죽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모두가 동방에 있다.

【3】《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이르기를 「후분발后芬發의 즉위 3년에 구이九夷가 와서 시중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4】《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설后泄 21년에 견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에게 명을 내렸다. 후상后相 즉위 2년에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 7년에 우이于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뒤에 소강少康이 즉위하자 방이方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다」라고 하였다.

03〔言-05/02〕昔羲仲嵎夷, 曰暘谷, 蓋日之所出也.[1] 夏后氏.太康失德, 人始畔.[2]少康已後, 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3] 爲暴虐, 諸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至于仲丁, 藍夷作寇.[4] 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武乙衰敝, 東夷寖盛, 遂分遷, 漸居中土.[5]

옛날 요堯가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의 땅에 자리잡아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바로 양곡暘谷이라 일컬어지는 곳으로 대저 해가 솟아나는 곳이다. 하후씨 태강太康이 덕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 소강少康 이후부터 대대로 왕의 교화敎化를 입더니, 마침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며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

걸桀이 난폭하고 잔악해지자 여러 이夷들이 침범하여 들어왔으며, 은殷의 탕湯이 혁명하여 그들을 정벌하고 안정시켰다. 중정仲丁 때 이르러 남이藍夷가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부터 3백여 년 동안을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하였다. 무을武乙 때 (은殷은) 쇠퇴하여 피폐해지고 동이東夷는 점차 번성하여지니, 마침내 회淮와 대岱의 지방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국의 영토를 점거하게 되었다.

【1】孔安《尙書》注曰: 「東方之地曰嵎夷. 暘谷, 日之所出也」.

【2】太康, 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羿所逐也.

【3】少康, 帝仲康之孫, 帝相子也.《竹書紀年》曰: 「后發卽位元年, 諸賓于王門, 諸入舞.」

【4】仲丁, .大戊之子也.《竹書紀年》曰: 「仲丁卽位, 征于藍夷」也.

【5】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 「射天」也.

【1】공안국이《상서尙書》의 주석에서 말하였다. 「동방의 땅을 우이嵎夷라 한다. 양곡暘谷은 해가 솟아오르는 곳이다.」

【2】태강太康은 계啓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무르면 1백 일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며, 백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예羿에 의해 쫓겨났다.

【3】소강少康은 천자 중강仲康의 손자이며 천자 상相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발后發 즉위 원년에 여러 이夷들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또한 여러 이夷들이 들어와 춤을 추었다」라고 하였다.

【4】중정仲丁은 은殷 나라 대무大戊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중정仲丁이 즉위하여 남이藍夷를 정벌하였다」라고 하였다.

【5】무을武乙은 천자 경정庚丁의 아들인데, 무도하여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피를 가득 담아 높은 곳에 걸어두고, 활로 쏘며 이르기를 「하늘을 쏜다」라 하였다.

03〔言-05/03〕及武王, 肅愼來獻石砮‧楛矢. , 乃招誘夷狄, 周公征之, 遂定東夷.[1] 康王之時, 肅愼復至. 後徐夷僭號, 乃率九以伐宗周, 西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2] 偃王潢池東, 地方五百里,[3]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穆王後得驥騄之乘,[4] 乃使造父御以告, 令伐, 一日而至.[5] 於是.文王大擧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鬪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6] 厲王無道, 淮夷入寇, 王命虢仲征之, 不克, 宣王復命召公伐而平之.[7]幽王淫亂, 四交侵, 至齊桓修覇, 攘而卻焉. 及楚靈, 亦來豫盟.[8]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 侵滅小邦.

무왕武王이 주紂를 멸하자 숙신肅愼이 들어와 돌화살촉(石砮)과 호목화살(楛矢)을 바쳤다. 관숙과 채숙이 주周를 배반하고 이적夷狄을 꾀어들이자 주공周公이 이를 정벌하여 마침내 동이를 평정했다. 강왕康王 때 숙신이 다시 들어왔다.

후에 서이徐夷가 신분에 넘치는 칭호로 스스로 일컬으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정벌하고자 서쪽으로 나와 하수河水의 상류에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강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서언왕徐偃王에게 명하여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황지潢池의 동쪽에 거처하고 있었으니, 땅은 사방 5백 리에 행위가 어질고 의로워 뭍길로 배알하러 오는 것이 서른여섯 나라였다. 목왕이 후에 기록驥騄 등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얻어 조보造父로 하여금 이를 몰아 초楚에 가서 알리고, 서국의 정벌을 명하게 하니 하루 만에 초에 이르렀다. 그러자 초 문왕文王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망시켰다. 언왕은 어질고도 권도權道의 술수가 없었으며, 그 사람됨이 차마 전투를 감당해 내지 못한 까닭에 패하고 말았다. 이에 북쪽으로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자 백성된 자로 그를 따르는 자가 1만여 명이었으니, 그런 연유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 이름하였다.

여왕厲王이 무도하자 회이淮夷가 들어와 노략질하기에, 왕이 괵중虢仲에게 명하여 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정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유왕幽王에 이르러 음란하고 어지러워 사방의 만이가 번갈아 침략하여 왔으나, 제齊 환공桓公이 패권을 거머쥐게 되자 물리쳐 쫓아 버렸다. 초楚 영왕靈王에 이르러 신申에 제후들을 모이게 하자 역시 와서 참여하여 맹서를 하였다. 후에 월越이 낭야琅邪로 옮겨가 더불어 정벌의 전쟁을 벌이니, 마침내 화하華夏를 능멸하며 포악한 짓을 하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멸망시켰다.

【1】《尙書》武王崩, 三監及淮夷畔, 周公征之, 作大誥. 又曰, 成王旣伐管叔蔡叔, 滅淮夷.

【2】《博物志》曰: 「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君.」 尸子曰: 「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

【3】《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4】《史記》曰: 「造父以善御幸於.繆王, 得赤驥‧盜驪‧驊騮‧騄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5】造父, 解見《蔡邕傳》.

【6】武原, 縣, 故城在今泗州.下邳縣北. 徐山在其東.《博物志》曰: 「徐王妖異不常. 武原縣東十里, 見有徐山石室祠處. 偃王溝通.之閒, 得朱弓朱矢, 以己得天瑞, 自稱偃王. 穆王聞之, 遣使乘駟, 一日至, 伐之. 偃王仁, 不忍鬪, 爲所敗, 北走此山」也.

【7】《毛詩序》曰: 「江漢, 尹吉甫宣王也. 能興衰撥亂, 命召公淮夷.」 其詩曰: 「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辟四方, 徹我土疆.」

【8】《左傳》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

【1】《상서》에 무왕이 죽자 세 재상과 회이淮夷가 반란을 일으키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는 대고大誥를 지었다. 또 말하기를 성왕이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고 회이를 멸망시켰다.

【2】《박물지》에 이르기를 「서군徐君의 궁녀가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이를 불길하다고 여겨 물가에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 곡창鵠倉이라 불리는 개가 있었는데, 그 버려진 알을 발견하여 입으로 물고 고독모에게 돌아오자, 고독모가 따뜻하게 덮어 주었더니 마침내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나면서부터 한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언偃’이라 이름하였다. 궁녀가 이를 듣고 이내 상을 주고 데려왔다. 장성하여 자리를 물려받아 서국徐國의 임금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시자가 말하였다. 「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는 까닭에 ‘언偃’이라 이름하였다.」

【3】《수경주》에 이르기를 「황수黃水는 일명 왕수汪水라고도 하며 포수泡水와 합해진 후 패수沛水에 이르러 사수泗水로 흘러 들어간다. 산양山陽의 동쪽으로부터 해릉海陵 북쪽의 땅에 흐른다 하였으니 그 땅이 마땅히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4】《사기》에 이르기를 「조보造父는 말을 잘 부리는 것으로 주周 무왕繆王에게 총애를 입었는데, (무왕은) 적기赤驥․도려盜驪․화류驊騮․녹이騄耳 등 네 필의 말이 끄는 사마駟馬 수레를 얻어 서쪽으로 순행하여 수렵을 즐기며 돌아갈 일을 잊었다」라고 하였다.

【5】조보에 관해서는《채옹전蔡邕傳》에 상세히 보인다.

【6】무원武原은 현縣인데 그 옛 성이 지금의 사주泗州 하비현下邳縣의 북쪽에 있다. 서산徐山은 그 동쪽에 있다.《박물지》에 「서왕의 괴이함은 범상치 않다. 무원현 동쪽 10여 리에 있는 서산의 석실에는 제사를 올리던 터를 볼 수 있다. 언왕이 진陳과 채蔡 사이에 물길을 통하게 하고,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어 이로 자신이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여기고 스스로 ‘언왕偃王’이라 일컬었다. 목왕穆王이 이를 듣고 사신을 파견하며 사마의 수레를 내주어 하루 만에 초楚에 이르게 하여 초로 하여금 그를 정벌하게끔 하였다. 언왕은 어질어 차마 싸움을 하지 못하니 초에게 패하여 북쪽의 이 산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7】《모시서》에 이르기를 「《시경詩經》의 ‘강한江漢’이라는 시는 주周의 공경대부 윤길보尹吉甫가 선왕宣王을 칭송한 것이다. 선왕은 능히 쇠퇴해진 나라를 일으켜 혼란을 다스리고 소공召公에게 명하여 회이淮夷를 평정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모시毛詩》에 이르기를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넘실거리니 병사들의 발걸음 씩씩하네. 즐기는 것도 아니요 노니는 것도 아니라 회이淮夷를 찾아서 간다네. 왕께서 소호召虎에게 명하시어 온 세상을 평정하여 우리의 강토를 바르게 다스림이라」라고 하였다.

【8】《좌전》에 초영왕楚靈王․채후蔡侯․진후陳侯․정백鄭伯․허남許男․회이淮夷 등이 신申에서 회동會同했다고 하였다.

03〔言-05/04〕幷六國, 其泗夷皆散爲民戶. 陳涉起兵, 天下崩潰, 衛滿避地朝鮮,[1] 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滅之, 於是東夷始通上京. 王莽簒位, 人寇邊.[2] 建武之初, 復來朝貢. 時遼東太守祭肜威讋北方, 聲行海表, 於是萬里朝獻, 占攵已後, 使聘流通. 逮永初多難, 始入寇鈔; 失政, 漸滋曼焉.

진秦이 여섯 나라를 병합하자 그 곳의 회이淮夷와 사이泗夷들이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진섭陳涉이 군사를 일으키니 천하는 혼란 속에 무너지고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피신하여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1백여 년 후에 한 무제武帝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니, 이에 동이가 비로소 상경上京과 통하게 되었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자 맥인貊人들이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건무建武(25~56) 초에 다시 들어와 조공하였다. 이 때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위세로서 북방을 복종시키니 그 명성이 바다 건너까지 이르러, 예濊․맥貊․왜倭․한韓 등이 1만 리 밖으로부터 와서 조공을 바쳤다. 그리하여 장제章帝와 화제和帝 이후에는 사자를 보내 안부를 묻는 등 서로 소통하게 되었다. 영초永初(107~113) 연간에 이르러 어려움이 많자 비로소 쳐들어와 노략질하였으며, 환제桓帝와 영제靈帝가 실정을 하자 점차 더욱 가벼이 여겼다.

【1】《前書》曰: 「朝鮮王滿, 人. 自始全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障. 興屬[], 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東走, 度浿水, 居故空地, 稍役屬朝鮮.蠻夷及故(任)[在]者, 王之, 都王險」也.

【2】《前書》高句麗兵當伐, 不欲行, 郡縣彊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州郡歸咎於高句麗侯., 嚴尤奏言人犯法, 不從起, 宜慰安之.

【1】《한서》에 이르기를 「조선의 왕 만滿은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가 번성하였을 때,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예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요새를 건축하였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연에] 속하였으며, 연나라 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위만이 망명하며 동쪽으로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 땅에 거처하였는데, 점차 조선과 만이蠻夷 및 옛 연燕과 제齊의 도망자들을 점차 복속시키더니,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면서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하였다.

【2】《한서》에서 말하기를, 왕망이 고구려의 병사들을 내어 호胡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고구려가 그렇게 하려 들지 않자, 군현郡縣의 위세로 고구려를 강제로 핍박하니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서서 법을 어기고 노략질을 하게 되었다. 주州와 군郡에서 모든 허물을 고구려후 추騶에게 돌리자 엄우가 천자에게 아뢰기를, 맥인들이 법을 어기며 추騶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마땅히 그를 위안하여 주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03〔言-05/05〕自中興之後, 四來賓, 雖時有乖畔, 而使驛不絶, 故國俗風土, 可得略記. 東夷率皆土著, 憙飮酒歌舞, 或冠弁衣錦, 器用俎豆. 所謂中國失禮, 求之四者也.[1]總名四夷者, 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云.

(한나라가) 다시 일어나고부터 사방의 만이蠻夷들이 들어와 복종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비록 때로 틀어져 배반하기도 하였으나, 사신과 역마驛馬가 끊이지 않았던 까닭에 그 나라들의 습속과 풍토를 간략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였으며, 혹은 예복에 관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생활의 기구로 제기祭器를 사용하였다. ‘중국에서 예禮를 잃어버리면 사방의 만이에게서 이를 구한다’고 말하는 바가 그것이다. 무릇 만蠻․이夷․융戎․적狄을 함께 일러 사이四夷라고 하는 것은, 마치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을 제후諸侯라 부르는 것과 같다.

【1】《左傳》曰: 「仲尼學鳥名[官]於郯子, 旣而告人曰:吾聞之, 天子失官, 學在四, 其信也.

【2】《좌전》에 이르기를 「중니仲尼가 담자郯子에게 새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칭하는 것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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