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정겸이 산동 영성현이 백제의 도읍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이 사실일까? 본문

조선사독단/오국사

정겸이 산동 영성현이 백제의 도읍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이 사실일까?

부르칸 2015. 3. 31. 11:19

장진근이 번역한 만주원류고에 보면 아래와 같은 주장이 있다.

청조 말기 정겸(丁謙)이란 학자가 신당서각외국전지리고증(新唐書各外國傳地理考證)에서 백제의 두 왕성에 대해 매우 귀중한 고증을 한 바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즉, “왕은 동·서의 두 성에서 거주하는데 동성(東城)은 곧 공주(公州)로서 당시 국왕의 배도(陪都: 제2수도)였고, 서성(西城)은 지금 부여현(夫餘縣)이니 양(梁)나라 때 명농왕(明穠王)이 이미 이 산성에서 살았던 곳으로 성산(成山)으로도 쓰고 산동(山東) 영성현(榮城縣)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장순휘 주편, 이십오사삼편(二十五史三編) 제7분책, 구록서사, 240쪽 참조.)

과연 이 주장이 합당한가?

위 주장이 합당한지 보기위하여 정겸이 썼다는 신당서각외국전지리고증을 검토해보아야만 한다. 위 만주원류고 저자는 신당서각외국전지리고증을 검토해보지 않았나보다. 정겸의 주장을 이야기하면서 장순휘가 쓴 이십오사삼편을 인용했으니 말이다.


꽤 긴 문장이지만 생략가능한 부분은 생략하고 논지에 필요한 것만 써보도록 하겠다.

절강도서관총서제일집에 신당서각외국전지리고증이 있고 그 가운데 신당서동이열전지리고증이 있다. 이 책은 와세다대학에서 보고 참조한 판본이다.


우선 신당서각외국전지리고증은 본문이 나오고 주석이 나온다. 아래 백제에 대한 본문과 주석을 필요한 것만 발췌하였다. 

百濟扶餘別種也……王居東西二城……蘇定方爲大總管發兵討之自城山濟海. 百濟守熊津口…

王居東西二城. 東城卽公州爲當時國王部. 都西城今扶餘縣, 自梁時明穠王已居於此. 城山一作成山在山東榮城縣東. 熊津江今曰錦江

우선 굵고 크게한건 본문이고

들여쓰기하고 작게쓴건 주석이다.

이제 해석해보자.

가)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임금은 동쪽과 서쪽 2개의 성에서 산다.
나) 소정방이 대총관이 되어 병사를 일으켜 성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였다. ……
다) 백제는 웅진구에서 지켰다.

1) 임금은 동쪽과 서쪽 2개의 성에서 산다. 동쪽성은 즉 공주인데 당시에 국왕부가 되었고, 서쪽성에 도읍하였는데 지금의 부여현인데 梁나라때부터 명농왕(성왕)은 이미 여기 부여현에 살았었다.
2) 성산城山은 또한 성산成山이라고도 쓰는데 산동 영성현 동쪽에 있다.
3) 웅진강은 지금 금강이다. 

정겸은 주석을 달때 본문의 문장문장마다 달아야 하는데 그것이 싫어서 문단 맨 뒤에 달았다. 주석이 본문 무엇에 대한 주석인지 본문과 주석을 모두다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래서 그런지 주석에 나온 산동의 영성현을 백제 임금이 거하던 東西二城으로 이해하여 벌어진 오해이다.


위 본문 가)에 대한 주석이 1)이고

위 본문 나)에 대한 주석이 2)이며

위 본문 다)에 대한 주석이 3)이다.

산동 영성현은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병사들을 출발시킨 지역을 나타낸것이고 주석에 城山一作成山在山東榮城縣東라고 한 것은 그 지역을 나타낸 것일뿐 백제 왕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를 단순히 주석만 대충보고 백제 西城이 산동 영성현이라고 하면 안된다.

분명히 동성은 공주이고 서성은 부여라고 나와있다. 


흥미있는 분들을 위하여 신당서각외국전지리고증의 백제편만 아래 첨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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