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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斷論
압록강과 압록수의 위치 본문
송(宋) 증공량(曽公亮) 등이 편찬한 <무경총요(武經總要)> 전집(前集) 권16에서
동경(東京)
(전략)
“<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에 이르기를
안동부(安東府)로부터 동남쪽으로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는데 800 리이고,
서남쪽으로 도리해구(都里海口)에 이르는데 약 600 리이며,
서북쪽으로 건안성(建安城)에 이르는데 약 500 리이며,
정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압록강(鴨緑江) 북박(北泊)에 이르는데 약 700 리이다.”
(皇華四達記曰自安東雰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約六百里西北至建安城約五百里
正南微東至鴨緑江北泊約七百里)
오늘날 거란지형도(契丹地形圖)를 참고하여 보건대
건안성(建安城)은 어느 곳에 위치하였는지 알 수 없고 기타 지형의 원근(遠近)은 대체로 같다.
동북쪽으로 여진(女眞)의 경계까지 이르는데 약 500 리이며,
서쪽으로 요하(遼河)에 이르는데 150 리이며,
또 880 리에 중경(中京)에 이르며 서쪽으로 60 리에 학주관(鶴柱館)에 이른다.
또한 90 리에 요수관(遼水館)에 이르고,
또 70 리에 여산관(閭山館)에 이르는데 의무려산(醫巫閭山) 산중에 있다.
또 90 리에 독산관(獨山館)에 이르며, 또 60 리에 당엽관(唐葉館)에 이른다.
또 50 리에 건주(乾州)에 이르며 조금 북쪽으로 60 리에 양가채(楊家砦)에 이르며
또 50 리에 요주(遼州)에 이른다.
북쪽으로 60 리에 의주(宜州)에 이르며 또 100 리에 우심산관(牛心山館)에 이르는데
우심산관은 우심산(牛心山) 북쪽 가운데에 있다.
또 60 리에 패주(霸州)에 이르며, 또 70 리에 건안관(建安館)에 이르며
50 리에 부수(富水) 회안(會安)에 이르며
중경(中京) 삼역하(三驛河)에 이르는데 각 70 리이다.
남쪽으로 평주(平州)에 이르는데 50 리이며,
평주로부터 유주(幽州)에 이르는데 550 리이며,
북으로 심주(瀋州)에 이르는데 120 리이며,
동남쪽으로 압록수(鴨緑水)에 이르는데 90 리이며,
서남쪽으로 금주(錦州)에 이르는데 400 리이며,
북쪽으로 황룡부(黄龍府)에 900 리이며,
서북쪽으로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300 리이다.
(今以契丹地形圖參校惟建安城不知處所其他地形逺近率同也東北至女真界約五百里西至遼河百五十里又八百八十里至中京西六十里至鶴柱館又九十里至遼水館又七十里至閭山館在醫巫閭山中又九十里至獨山館又六十里至唐葉館又五十里至乾州㣲北六十里至楊家砦又五十里至遼州北六十里至宜州又百里至牛心山館在牛心山北中又六十里至霸州又七十里至建安館五十里至富水會安至中京三驛河各去七十里南至平州五十里自平州至幽州五百五十里北至瀋州百二十里東南至鴨緑水九十里西南至錦州四百里北至黄龍府九百里西北至顯州三百里)
심주(瀋州)
심주(瀋州)는 덕광(德光, 요 태종)이 세운 바로서 소덕군이라 하였으며 거란의 옛 땅이다.
동으로 대료수(大遼水)에 이르는데 대료수(大遼水) 동쪽은 즉 여진과의 경계이며
서남쪽으로 동경에 이르는데 130 리이며 북쪽으로 쌍주(雙州)에 이르는데 80 리이다.
(瀋州德光所建仍曰昭德軍契丹舊地也東至大遼水水東即女真界西南至東京一百三十里北至雙州八十里)
<무경총요(武經總要)> 권16으로 압록강을 살펴본다면
<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를 인용하여
동경(東京)에서 정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압록강(鴨緑江) 북박(北泊)에 이르는데 약 700 리라고 하고
본문에서는 평주(平州)에서 북으로 심주(瀋州)에 이르는데 120 리이며,
동남쪽으로 압록수(鴨緑水)에 이르는데 90 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 솟대 선생님이 올려주신 그림> - 압록강
<필자의 칼럼 : '고려도경으로 본 고려의 강역' 지도 중에서>
<요수(遼水)>라고 표시된 곳 바로 옆에 평주(平州)가 있는데 평주(平州)에서 동남쪽 90 리이면
요수(遼水) 하구가 됩니다. 결국 요수(遼水)는 압록수(鴨緑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경총요(武經總要)> 에서 말하는
고려, 거란, 송나라 시절의 압록강은 현 대릉하로 추정이 되며
압록수는 곧 요수이며 오늘날의 영정하로 추정됩니다.
백송 선생님과 솟대 선생님 두 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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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생님/ 아는게 적은데도 배운다는 각오로 두서없이 글을 올린 것에 대해 이해하여 주시니 고맙습니다. 거란지리도에 평주가 요수옆에 있어서 오늘날의 노룡현에 있는 것으로 기록한 것이 가장 잘 알려진 평주로 보입니다. 지명대사전에는 평주가 여러 곳에 나오는데, 무경총요에서 심주와 가까운 것으로 기록한 평주는 노룡현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심주는 여러가지로 보아 오늘날의 심양과 가까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연이 설치한 요양현 북 70리의 평주, 또는 후연의 조양현 동북이 더 가깝지 않을까 추정해 봅니다. 만주원류고 번역서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平州(중국고대지명대사전) 晋分幽州置,今辽宁河北省朝鲜之地,治昌黎,在河北省朝阳县境。又《清一统志》云,辽宁辽阳县东四十五里有土堡,俗呼平州,相传晋时平州遗址。 前燕置,治襄平,在今辽宁辽阳县北七十里。 后燕置,初治龙城,今河北省朝阳县治,后治平郭,在今辽宁盖平县南,慕容宝后侨置于宿军,在今河北省朝阳县东北。 前秦置,治和龙,今河北省朝阳县治。 后魏置,治肥如,在今河北卢龙县北。 北周置,即今湖北当阳县治。 隋置,唐因之,亦曰北平郡,元改为兴平府,治卢龙,今河北虑龙县治。 宋崇宁县开蛮地置怀远连寻升为平州,治怀远,在今广西三江县北,后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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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이제, 약간 제가 갖고 있던 혼란이 정리 될 것 같습니다. 거란에 압록강과 압록하와 압자하 3개의 강이 있었던 것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검증을 계속 또 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 거듭 감사올립니다. 압록수(鴨緑水) : 거란 중경(中京) 동남쪽 90 리 압록강(鴨緑江) : 거란 동경(東京) 남동쪽 90리 > 현 대릉하 유력 압자하(鴨子河) : 거란 상경로(上京路) 장춘長春 > 요 황제의 봄 낚시의례 장소 遼史/志/卷三十七 志第七 地理志一/上京道/長春州 長春州,韶陽軍,下,節度.本鴨子河春獵之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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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선생님, 鴨水, 鴨淥水, 鴨緑水, 鴨緑江 등이 미궁이었듯이 奄水, 奄利水, 奄淲水, 奄豹水 등도 비슷한 상황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보기도 하였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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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 선생님, 솟대 선생님 댓글을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백송 선생님 평주에 관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자료 고맙습니다. 평주와 심주 관련하여 저도 매우 혼동이 되고 헷갈리고 있습니다. 솟대 선생님 압자하에 관한 자료 고맙습니다. 압자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요 성종 태평 4년(1024년) <조서를 내려 압자하를 혼동강으로 탑로하를 장춘하로 바꾸도록 하였다(詔改鴨子河曰混同江塔魯河曰長春河)>고 되어 있군요. 아뭏든 압록수와 압록강 그리고 압자하는 서로 다른 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압록수가 영정하든 난하든 아니면 이것 저것도 아닌 다른 강이든 간에 열심히 연구해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성겸 선생님 잘 풀리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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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생님/ 설명 고맙습니다 저도 신당서에 나오는 압록수가 최소한 만주원류고나 유변기략에 나오는 압록강(=익주강)과는 다른 곳일 것이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문제 제기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신당서에서 당장 정명진이 대기한 곳은 압록수인데 아마도 평양과 가까운 곳일 것이고, 발해만과 직결되어 있을 것이며, 내륙 깊숙한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일명 익주강은 내륙 깊숙이 있고, 또 발해만과 직접 연결되지 아니하여 당군이 바다에서 들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 [貞觀]19년(645) 4월에 [李]勣이 遼水를 건너니,[註085] 高[句]麗가 모두 城을 에워 싸고 지켰다. 太宗은 군사를 크게 犒饋한 다음 幽州 남쪽에 장막을 치고, 長孫无忌에게 詔書하여 誓師를 행한 뒤,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李]勣이 蓋牟城[註086]을 쳐 함락시켜 2만戶와 식량 1십만石을 얻고, 그 땅을 蓋州로 삼았다. 程名振은 沙卑城[註087]을 공격하는데, 밤에 그 서쪽으로 침입하자 城이 潰滅되었다. 8천명을 사로 잡아, 군사를 이끌고 鴨淥水 위에서 대기 하고 있었다. [李]勣이 드디어 遼東城을 포위하였다. 太宗은 遼澤에 머물며, 詔書를 내려 [들판에] 널려 있는 隋나라 戰士의 骸骨들을 묻게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target=_blank>http://db.history.g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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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김성겸선생님 말씀에 공감하였습니다. 압강도 이렇게 다 다른 강들인데 奄水, 奄利水, 奄淲水, 奄豹水가 모두 하나의 강이지는 하나 하나 확인해 보아야 겠네요. 그동안 너무나 같은 강으로만 보아서 혼선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강역이동에 의해 생겨났던 유사한 강 이름이든 혹은 원래 도성이나 중요 성읍의 수계에 붙이는 일반적인 이름들이었든 이름이 유샇거나 같다고 무조건 같은 장소로 단정해 혼란을 자초하지 말고 말씀내려주신대로 먼저 그 위치부터 찬찬히 뜯어나가도록 하면 비밀을 풀 수 있을 거라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각 시대에 압록이면 압록, 요수면 요수가 오로지 하나뿐이고 같은 장소라는 가정이 사서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는 우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시대마다 위치가 달라지고 같은 시대에도 같은 강이라 생각한 유사한 강이름이 여러곳에 산재했다는 점은 그 동안의 강역비정의 어려움을 풀 열쇠라 생각되어지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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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완순선생님, 압록강(鴨緑江)이 원나라때는 대릉하임은 상당히 유력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려전기인 요나라와 금나라때도 같은 대릉하이었는지는 저도 자신이 없네요. 보다 서진할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여서 앞으로 심사숙고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거란상경의 위치를 제대로 찾아내기만 하면 거란,금나라때의 모두 지명의 비정을 술술 풀 수 있을텐데... 상당히 어려워 고민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