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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조선사독단/오국사 (15)
獨斷論
赫居世를 일연은 아마도 鄕言일 것이며 弗矩內王이라고 한다고 했다... 일연도 정확히 몰라서 "아마도"라는 말을 붙였다. 鄕言이 무엇인가? 대개 우리가 아는 향찰표기를 말한다. 향찰을 이용하여 赫居世를 억지로 해석하다보니 赫은 뜻으로, 居은 음으로, 또다시 世는 뜻으로 해석하여 불거내(弗矩內)라 한것이다 하지만 대개 어간은 뜻으로 어미는 음으로 하는게 일반적이니 일연의 赫居世에 대한 해석은 너무 자의적이며, 만약 赫居世가 향언이라면 赫는 뜻으로 居과 世는 음으로 해석했어야만 옳다... 그러니 일연의 해석은 맞다고 볼수 없다. 삼국사기에 赫居世를 해석할수 있는 좋은 단서가 있다. 年十餘歲岐嶷然夙成 나이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숙성하였다나이 10여세에 다른 어린이들보다 재주가 많고 숙성(夙成)했다는..
漢語 達胡爾語 蒙古語 水 水深 水淺 水漲 水落 水渟 沃索 沃索滾 沃索古完 沃索必勒特北 沃索胡瓦北 沃索索森 沃索 沃索滾 鄂蘇滾 鄂蘇▨布勒伯 鄂蘇他特巴 鄂蘇薩郭巴 옥저가 와지의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옥저를 海城으로 바꾼데는 다 이유가 있음이다. 출처: 흑룡강지고
馬石이 아니란게 흠... 原自南山磨石口登海會寺寺當山缺逺見盧溝橋在數十里外橋柱歴歴可數 小長峪口在昌平州二道關東北其北有萬澗口其東曰大長峪口内有堡再東北為南冶口大榛峪口驢鞍嶺口磨石水口擦石口内俱有堡再東即密雲縣之幵連口自洪鎮山以下皆州境第一道邊城
장진근이 번역한 만주원류고에 보면 아래와 같은 주장이 있다. 청조 말기 정겸(丁謙)이란 학자가 신당서각외국전지리고증(新唐書各外國傳地理考證)에서 백제의 두 왕성에 대해 매우 귀중한 고증을 한 바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즉, “왕은 동·서의 두 성에서 거주하는데 동성(東城)은 곧 공주(公州)로서 당시 국왕의 배도(陪都: 제2수도)였고, 서성(西城)은 지금 부여현(夫餘縣)이니 양(梁)나라 때 명농왕(明穠王)이 이미 이 산성에서 살았던 곳으로 성산(成山)으로도 쓰고 산동(山東) 영성현(榮城縣)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장순휘 주편, 이십오사삼편(二十五史三編) 제7분책, 구록서사, 240쪽 참조.) 과연 이 주장이 합당한가?위 주장이 합당한지 보기위하여 정겸이 썼다는 신당서각외국전지리고증을 검토해보아야만 한다. ..
가탐도리기에 나오는 지리비정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은 도화포桃花浦이다. 도화포는 도리진에서 東傍海壖하여 지나는 섬 가운데 2번째 것이다. 도화라는 지명은 신당서 지리지 이후로 금사에 처음 나온다. 金史 興中府...興城遼嚴州保肅軍縣故名皇統三年廢州隸錦州有桃花島 흥중부 흥성현은 요나라 엄주嚴州 보숙군현保肅軍縣의 옛이름이다. 皇統3년에 폐하였다. 금주錦州에 속한다. 도화도가 있다. 여기 도화도가 바로 신당서지리지에 나오는 도화포라고 성경통지에 기록하고 있다. 欽定盛京通志 桃花島.., 新唐書地理志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烏湖島三百里至都里鎮二百里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 金史地理志興城縣有桃花島. 按桃花島即桃花浦, 明初海運泊船于此, 今在寧逺州城南도화도(桃花島).... 신당서지리지에 기록하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
고구려 마지막 수도는 장안성이다. 한자로 長安..중국의 고대수도 長安과 한자까지 똑같다. 어떤 이들은 고구려가 중국걸 따라했다고 하지만 그럴까? 심한자들은 중국 서안이 고구려 마지막 수도라고까지한다. 고구려 장안은 평양성과 가깝다고 한다. 평양은 삼국사기에도 써있듯이 王儉이 살던 곳이다. 여기서 왕검이란 곧 檀君을 말한다. 檀君은 우리고대어 을 뜻이 좋게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1] 이는 텡그리와 어원이 같다. 최남선 선생님은 몽골어의 하늘을 뜻하는 '텅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長安은 을 음차한 것이다. 長은 고대발음이 "dang"이다.[2]安은 우리 고대 지명에 쓰일때는 '알' 또는 '아~ㄹ' 등으로 표기된다. 이는 앞서 설명한 安市(안시) 즉 알불에 잘 설명이 되어있다.[3]따라서 長安..
남당유고 화랑세기는 아무리봐도 위서임에 틀림이 없다. 남당유고에 쓰인 몇몇 이야기가 훗날 역사적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그 이외의 남녀관계에 대한건 모두 일본인들이 첨가한 것임에 분명하다. 일례로 "구리지"가 있다. 이는 사다함의 아버지인데 삼국사기에 그냥 이름만 나와 있다. 근데 이 구리지를 두고 화랑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斯多含者仇利知子也. 初比梁公慕碧花后常如其厠. 法興大王愛比梁公 不禁之果通后生子 故曰仇利知. 5세 사다함(斯多含)은 구리지(仇利知)의 아들이다. 처음 비량공(比梁公)이 벽화후(碧花后)를 그리워하여, 늘 후(后)의 뒷간에 갔다. 법흥대왕이 비량공을 사랑하여 금하지 않았다. 과연 후(后)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구리지라 하였다. 아무리 변소에서 성관계를 가져 애를 낳았다고..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련된 낙랑 정리 고구려 백제 신라 BC28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다 三十年 樂浪人將兵來侵 BC20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三十八年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BC15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四年 春夏 旱 饑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BC11 낙랑태수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樂浪太守使告曰…由是 與樂浪失和 BC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