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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斷論
조선민족의 전성시대 본문
신채호 지음
동양의 고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조선 고문화의 원류를 탐색치 않고는 도저히 史의 근거와 사의 진수와 사의 체계와 통지(統志)를 작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 고문화를 강구(講究)함에는 먼저 조선 구강(舊疆)의 판도 범위부터 획정(劃定)하여야 되리니 고대 문헌의 고증을 어디서 찾아낼 것이냐?
신지(神誌)의 구변진단도(九變震壇圖)가 전하지 못하고 단군 계통의 부여가 조업(祖業)을 계승하여 만몽대륙에서 혁혁문화(赫赫文化) 1천년을 발양(發揚)하여 오다가 춘추 열국 시대에 미쳐서 한족(漢族)과 전쟁을 일으켜 혹승혹패(或勝或敗)하며 장기간에 걸친 전운이 식녕(息寧)의 날이 없더니 제환공(齊桓公) 때에 와서는 조선족의 쇠운기라 패적(敗蹟)이 날로 많으매 만몽(滿蒙) 서남부에 사는 조선족의 근거가 심히 동요하여 영평부 이동(以東)까지 국역이 축소되었으며 그후 진시황의 동남전쟁은 전혀 조선족을 동북으로 구축함이라. 만리장성을 조선 중국의 국계로 하고 대공사를 일으켜 만여리로 연장한 것이다.
그런고로 고조선의 문헌 고증은 누십백년 병분(兵焚)에 소실되고 또한 조선의 국도(國都)가 적화(敵禍)로 인하여 자주 천사(遷徙)되었으니 강변의 변축(變縮)함이 더욱 많을지니 중고에 이르러 우유배(愚儒輩)의 곡해(曲解) 억단(抑斷)이 존화주의에 맹광하여 단군 강역을 마음대로 줄이고 ‘부여국도(扶餘國都)’를 되는 대로 천사하여 심지어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을 백두산이라 하고 아사달(阿斯達)을 황해도라 하며 기자를 대동강에까지 갖다 묻어 놓았으니 어찌 통한할 바 아니리요.
소위 사가들이 적어놓은 국사를 보면 붓끝마다 다르며 말끝마다 맞지 아니하여 비유컨대 군맹(群盲)이 종야(終夜)의 길에 헤매며 목적지의 소재를 찾지 못함과 같도다. 만리장성이 우리 조선과 숙명이 깊으니만큼 만리장성고(萬里長城考)는 곧 우리 고강(古疆)을 찾는데 한 증거가 훌륭하다 하노라.
회남자 가로되 만리장성을 “北擊遼水 東結朝鮮”이라 하였으니 회남자 당시에도 만리장성이 조선과 중국의 국방계로 쌓은 것이 명백하니 장성을 아는 자는 반드시 고조선을 알 것이다.
고구려 개소문이 가로되 “自扶餘로 築長城하여 南至海하니 長千餘里라”(比國史上之最長城) 하였고, 로마 카이사르가 가로되 “因北寇頻逼 築城於萊因河北 其長至數百里”라 하니 이는 서양사상 城之最長也라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북으로 장성을 쌓아 임도(臨逃)에 기(起)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니 장(長)이 만여리라 하였으니 이 곧 세상이 말하는 만리장성이다. 동서 사상(史上)의 최 장성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유성이래(有城以來)로 오직 시조되는 장성의 거벽일 것이다.
이제 만리장성의 전기(傳記)를 고찰하건대, 만리장성이 진시황의 창축(創築)한 것이 아니요 진시황 때에 이르러 고유한 장성을 확대 연장하여 가축(加築)함이며, 또한 장성을 가축(加築)함이 진시황뿐 아니라 진시황 이후에도 장성을 수축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대공사를 가져 확축(擴築)하기는 진시황 이상에 출한 자가 없으므로 마침내 진시황이 만리장성이 되어 만고에 독웅(獨雄)한 것이다.
장성의 역사가 심히 회색(晦塞)하여 조(朝) 한(漢) 양국 당시의 국경의 분계임을 명백히 분명키는 어렵도다. 이제 갑 을 병 삼자를 거하건대
(갑) 진시황 이전의 장성이니
사기 흉노전에 왈 “趙武靈王 …… 北破林胡樓煩 築長城 自代並隂山下 至髙闕為塞 而置雲中 鴈門代郡”이라 하였으니 이는 조(趙)의 장성이요, 또 왈 “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郤千餘里 ……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라 하였으니 이는 연(燕)의 장성이요, “秦昭王時 殺義渠戎王 …… 秦有隴西北地上郡 築長城 以備胡”라 하였으니 이는 진시황 이전의 장성이라 한다.
(을) 진시황 이후의 장성을 말하건대 북제서(北齊書)에 왈 “顯祖(文宣帝) …… 天保六年 …… 發夫一百八十萬人 築長城 自幽州北夏口 至恒州九百餘里”, “七年春正月 …… 自西河總秦戍 築長城東至於海”, “後主大統六年 自庫堆 東拒海 隨山屈曲二千餘里 塹山築城”이라 하였으니 이는 고제(高齊)의 장성이요, 수서(隋書) 왈 “文帝開皇六年二月……發丁男十一萬 脩築長城”, “七年二月……發丁男十萬餘 脩築長城”이라 하였으니 이는 수(隋)의 장성이요 열하일기에 “同徐中山 築長城”이라 하였으니 이는 명(明)의 장성이니 진시황 이후의 장성이 또한 이러하다.
(병) 진시황의 장성은 사기 진본기에 “始皇……三十二年……燕人盧生 使入海 還 …… 夷天錄圖書 曰 亡秦者胡也……三十三年……又使蒙恬 渡河 取高闕 陶山北假中 築亭障”, “三十四年 適治獄吏不直者 築長城”, 흉노전에 왈 “秦滅六國 而始皇帝 使蒙恬 將十萬之衆 北擊胡 悉收河(白羊河)南地 因河為塞 築四十四城 臨河 徙適戍以充之 而通直道 自九原至雲陽 因邉山險 壍谿谷 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라 하고 몽념전에 왈 “起臨洮至遼東 延袤萬餘里”라 하였으니 이는 곧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라.
이상의 소술(所述)은 중국 역대의 장성의 약사(略史)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3개의 문제가 복유(復有)하니
1) 진시황의 장성과 연(燕) ∙ 조(趙)와 및 소왕(昭王)의 구지(舊址)를 기인하여 계수(繼修) 증축 확대함이냐, 또한 척지(拓地)를 광원(廣遠)히 하고 더욱이 북역(北域)에 이축(移築)함이냐?
2) 진시황 이후의 장성은 다 진(秦)의 구지(舊址)를 수축할 뿐이었느냐, 혹 내퇴외진(內退外進)하여 진의 성기(城基)를 변천한 것이냐?
3) 그 서계(西界)는 본래 臨洮(嘉裕關)에서 기점하였으나 그 동계는 다못 요동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요동은 어떤 지계(地界)까지를 지칭함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위서(魏書) 장손진전(長孫陳傳)을 의거하건대 진(陳)의 “爲羽林郞 征和龍 賊自西門出 將犯外圍 陳擊退之 追斬至長城下”라 하니, 이는 장성이 용성(龍城) 밖에 있는 것이 명료하고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왈 “薊州北至廢長城塞 二百五十里”라 하고 박연암이 가로되 “산해관의 장성은 명시(明時) 서달(徐達)의 소축(所築)”이라 하니 가히 탁견이 되나니, 이는 제1문제가 해결됨이오, 진황 이후의 장성이 만일 진황의 건축의 구지를 잉용(仍用)치 아니하였다면 진황의 장성이 한번 다시 연 조 구허(舊墟)만을 한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대개 국가의 성쇠 강약을 따라 가히 외지를 원척(遠拓)할 수도 있고 가히 국방을 축단(縮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니 그런고로 흉노전에 가로되 “可繕者治之 不可繕者 別築之”라 함이 장성 변이의 특증(特證)될 것이니, 제2의 문제가 해명되었고, 제3문제는 요동 문제로 인한 곤란이니 요동문제를 말하려 함은 반드시 2개 문제가 제출될 것이다. 1) 당시 조선의 국정과 국경 범위 여하요, 2) 연(燕)의 척지(拓地)의 원근 여하이다.
기년아람(紀年兒覽) 서곽잡록(西郭雜錄) 등의 책으로 보건대 모용외의 부여 침입과 이적의 평양 입구가 조선 고사를 일거(一炬)에 회신(灰燼)하였다 하였고 마사(馬史)의 고(考)하면 육국사기(六國史記)가 “燕史在內皆爲秦始皇燒之”라 하니 조선과 연의 고사를 고거할 처가 없어 제2문제의 해결이 심히 곤란하도다.
그러나 이제 단란여신(斷爛餘燼)한 중에서 고사의 편린을 채습(採拾)하리라. 문헌비고 왈 “孤竹(今 永平部)春秋時爲朝鮮所有”라 하였으니 이는 어환 위략의 말한 바라. 위략에 왈 “朝鮮見燕僭稱王 欲與伐燕(中略) 燕將秦開 詐而爲質於朝鮮 朝鮮甚信之 秦開歸言於燕 伐朝鮮拓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大要), 사마씨 사기에 왈 “秦東胡拓地千餘里”라 하였으니 어환이 그때 누백년 후의 사람으로서 무엇을 고거하여 동호를 고쳐 조선이라 하고 천리를 고쳐서 이천리라 하며 또한 어찌하여 그 所拓의 땅이 만반한에 이른 것을 알았는가? 가로되 이 무리는 위의 관구검의 이류라 하리니 삼국사기와 삼국지를 안(安)하면 삼국사기는 우리 사(史)요 삼국지는 곧 촉(蜀) 오(吳) 위(魏) 삼국사이다.
“曹魏大將毌丘儉侵高句麗入丸都城” 운운은 대개 환도성의 소장한 고구려 사책이 관구검의 손에 들어가 중국에 유전함이 많은 고로 중국 고인이 史事를 안다는 자의 魏의 사관에 지날 자가 없으니, 단군왕검의 이름을 위략에서 시견함이 아니냐. 진수가 魏에 仕할 때의 所作을 가져 삼국유사가 많이 인용한 고로 箕否 箕準의 일 또한 위략에서 보게 되었고 부여의 풍속과 삼한 78국의 명칭을 삼국지에서 시견케 되었나니 이는 진수가 또한 晉에 仕하여 저작한 바라. 후한서에 비록 삼한 78국의 명칭을 기록하였으나 그러한 후한서는 범엽의 소작이니 곧 진수의 후인이다. 진개가 조선의 토지를 침탈한 사실은 또한 위략을 근거한 것일 것이다.
선유들이 永平의 以西는 燕이요, 영평의 이동은 조선이라 하여 왔다. 진개의 소척한 지계 2천여리라 할진대 그 족적이 반드시 압록가을 지났을지니 이율곡은 太遠하게 2천여리를 1천여리로 고치고 정다산은 太近하게 2천여리로 바르다 하여 만반한이 대동강 이남에 있다고 망증하였으니, 오호라 어찌 그리 편견의 考執을 전하였는가. 고구려 당시에도 항상 奉天을 據割하고 直隷의 북반부와 몽고 동부를 영유한 고로 사책에 자주 태원(今 山西省)을 침입하였은즉 이는 동몽고로부터 馳兵南下하던 형세를 말함이다.
唐人 樊深의 高句麗城詩에 왈 “僻地城門啓 空林館堞長 居然朝市變 無復管絃鏘”이라 하여 조선이 동몽고로부터 남하하여 이땅에 의거하고 축성개도(築城開都)함을 이름이요 연으로부터 싸우던 자취를 음영함이라. 조선의 당시 用兵은 영평으로부터 연경 이북에 이르고 북으로 흉노(今 蒙古地)를 접하고 남으로 上爲(今宣化府)에 미쳤다.
연이 조선을 反攻함을 보면 “北攻上谷南襲孤竹(今永平部)而至遼河”, 그러므로 사기에 왈 “燕將秦開伐東胡拓地”, “伐胡自造陽至襄平築長城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等郡”이라 하였으니 이를 상고하면 조선이 연과 접경하였던 대개를 볼 것이다. 上爲는 곧 宣化府요 어양은 지금 順天府의 북부요 우북평은 지금 영평부의 북부요 요서 요동은 지금 봉천의 서반부의 북부이다. 위략의 만반한이라 함은 곧 한 무제의 分設한 汶 潘汗 2현이니 그 이름을 한서 요동군지에 明載하니 즉 지금 개평 해성 등지다. 拓地二千餘里라 함은 上爲(금 선화부)로부터 양평에 이르기까지 其程을 再折하여 남으로 개평 해성까지 그 이수가 2천여리라. 그런즉 燕郡의 요동과 진의 장성 所至한 요동을 가히 알 것이니 제3의 문제도 해석될 것이다.
진서 太康地志에 가로되 “낙랑(樂浪) 수성현(遂城縣) 갈석산(碣石山)이 장성(長城)이 소기(所起)한 지점”이라 하였으니 이 일단이 독사자의 의점(疑點)을 일으킬 것이다. 낙랑은 곧 평양이요 수성현은 평양 남에 있으니(廣寧 金州의 古平壤을 운함이요, 즉 지금 평안도의 평양을 말함이 아니다), 진의 장성이 멀리 평양을 지나갔다. 문법으로 보면 시점을 起라 하고 종점을 至라 하나니, 진시황의 장성이 시기점이 臨洮이었나니 어찌하여 낙랑으로 所起地라 적었는가? 북사와 수서를 상고하면 魏와 隋가 일찍 상위(今 선화)에 있어서 군을 두어 낙랑이라 하고 현을 두어 수성이라 이름하였으니 연의 장성은 上爲谷에서 기한 것이 명백하다. 진서의 書載가 이를 가리킴이다. 진서 작자 당 태종이 隋末에 생하여 晉陽에 家하매 항상 이를 보고 연의 장성을 같이 말함이다.
그러면 갈석산은 어찌함이뇨? 禹貢 冀州가 夾右碣石이라 하고 그 아래 또 이르기를 太行王屋至於碣石이라 하니 이는 일시에 두 갈석이 있는 연고라. 신당서에 平州石城에 有碣石山이라 하고 그 아래 또 이르기를 “太行王屋 至於碣石”이라 하니, 이는 일시에 두 갈석이 있는 연고라. 신당서에 平州石城에 有碣石山이라 하고 營州柳城에 亦有碣石山이라 하니 당시에 대개 衆石이 碑碣같이 선 것이면 갈석산이라 이름함도 그럴 듯 하나니, 어찌 상곡인들 갈석산이 없으리요. 일인 역사학잡지에 甘氏 博氏가 진서에 낙랑 평양과 장성이 진시황 소축임을 말함은 적확한 참고를 가하지 못하여 전인의 잘못을 그대로 써서 사실과 틀림이 많으니라.
연의 장성이 조선과 여하한 관계되었음은 이미 상술하였거니와 연의 관계는 眞番 樂浪 양조의 일이요 趙의 관계는 부여조선 때의 일이니, 부여조선이 삼조선 중에 최대국으로서 지나와 교통을 先開하였나니 고로 舜本紀에 가로되 ‘北山戎發息愼’이라 하니 發息愼은 부여조선의 誤音이다. 관자 왈 ‘八千里之發朝鮮’이라 하고 또 發朝鮮之文皮라 하였으니 발조선은 또한 부여조선의 促音이다. 사기에 濊 貊 朝鮮 혹은 但稱 濊라 하며 貊이라 하니 맥이라 함은 그 문피를 의복함에 득명함이다. 예는 곧 부여의 촉음이니 기실은 다 동일하다.
趙가 부여조선으로 관계되기는 趙襄子로부터서니 흉노전에 왈 “趙襄子가 破幷代 臨胡貊”이라 하였으니 그 후에 부여의 속민 魏林 樓煩이 다 강성하여 趙의 변경이 多事하였다. 趙 武靈王이 服을 변하고 騎射를 연습하여 부여로 더불어 자주 싸우며 장성을 쌓아서 방어하였으니 이는 조의 장성이 부여조선을 막기 위하여 쌓은 바이다. 사기 趙世家에 부여를 동호라 하였고 흉노전에는 낙랑을 동호라 하였다. 조의 말엽에 李牧이 북변의 良將으로 林胡와 樓煩을 파하고 달아났다 하였으니, 다못 장성 이내에만 방어하였을 뿐이요 능히 장성 이외에 진출치 못함이니라. 趙가 이미 망하고 부여 더욱 강성하여지매 흉노 선우 冒頓이 항상 미인 양마를 부여에 進貢하였다 하며 사기에 冒頓이 地廣을 서하여 왈 “自上谷으로 東接濊貊朝鮮”이라 하였으니 그때는 부여조선이 冒頓에 패한 후임이 명백하다. 그런즉 조의 장성은 전혀 조선을 위하여 쌓음이요 시황의 장성이 상곡 이래까지는 또한 부여조선을 방어함이니라.
부여조선이 연으로 더불어 嫌怨을 얽었을 뿐만 아니라 부여가 자주 연을 정벌하였으므로 管仲이 九合諸侯의 歸衆을 督率하여 孤竹을 파함이 그것이다. 수백년간에 부여가 삼조선의 맹주가 되어 중국을 침략하다가 연 조가 망한 뒤에 또한 망하였으니 오호라 그간에 神誌 高興之倫의 그 전말을 기록한 바 있었나니, 야심 많은 군주와 辣腕한 將相이며 충의강개한 장사와 帷幄密勿하던 謀臣들의 可歌可舞 可哭可驚할 만한 사실이 많았으나 조선이 이미 板蕩되고 고서는 一傳이 없었으며 중국의 사마천의 사기가 있으나 전혀 尊華攘夷로 배외적 사상을 취하여 史例를 문란하였으니 도리어 플루타크의 인방정형을 詳察하고 그 전말을 具載함만 못하도다. 馬史는 그 1, 2차 인방과 접촉된 사실을 기록한 외에 다만 자기 지나인의 자존 호기심의 완상물과 같을 뿐이다.
일국의 이름을 그릇하여 數國을 만들었으니 肅愼 朝鮮 扶餘 濊 東胡 등의 국명을 그릇함이며, 혹 갑국의 사실을 을국의 일로 기록하니, 胡貊의 일을 다 흉노전에 기록한 등이다. 전쟁을 기록하매 승패를 전도하고 풍속을 논한즉 그 미악을 변란하였나니 국도 인명의 가고할 자료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국제의 교섭 내왕한 일을 일변의 기록이 부존하였으니 실로 개탄할 바이다.
이제 조선 국경 所至와 연 조 진의 장성을 쌓은 원인이 흉노를 위함보다 흉노 이전에 朝 漢 양족의 관계 되었음을 비록 명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만리장성을 연구함에 있어서 조선 古疆이 얼마나 크며 조선의 강성함이 어떤 범위까지 발전되었던 것을 반의 반을 알아낼 수 있으며 만리장성이 동양사 연구상에 있어서 실로 위대한 실물의 참고됨을 확언하리라 하노라.
附: 長城小話
만리장성이 동양사의 最重한 秘藏의 보고요 건축상의 위관만 될 뿐 아니라 동서양에 역사적 영향이 지대하다 하노니 장성을 쌓기 이전에 鑑하여 부여 흉노 제족이 長弓勁弩로 鞕馬南下하여 漢族을 虜殺하며 재곡을 약탈하여 심하면 토지를 할거하고 자립국을 건설하는 등이다.
춘추전 사기에 보인 昆夷 徐夷 萊夷 赤狄 中山 등이 지나의 본토에 있어서 건국 칭왕하며 橫行自姿하였고 장성을 旣築한 후로는 동북의 대국인 부여로 고토에 還하여 다시 남하의 형세를 취하지 못하고 몽고의 흉노족도 一枝로 서구에 竄入하여 고트족과 侵擾를 일으켜 마침내 서양사상의 민족적 大遷動을 일으켰나니 성로마의 몰락과 신문예의 발생이 만리장성의 유무에 관하여 국제문화 消長된 영향이 과연 어떠한가.
흉노의 일지가 또한 동으로 부여에 爭抗한지 누 십년에 마침내 부여족도 遷動되어 동으로 徙하여 옥저 진번이라 혹칭하며 남으로 천하여 진한육부가 되었나니 그 상세한 것은 생략하고 독사자가 다만 서구의 민족 대천동만 알고 동서에 또한 동일한 현상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함을 개탄하며 우뚝한 만리장성을 바라볼 때마다 심각한 느낌을 금치 못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