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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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원문 번역

부르칸 2013. 2. 19. 07:33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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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卷第一.

三國史記卷第二.

三國史記卷第三.

三國史記卷第四.

三國史記卷第五.

三國史記卷第六.

三國史記卷第七.

三國史記卷第八.

三國史記卷第九.

三國史記卷第十.

三國史記卷第十一.

三國史記卷第十二.

三國史記卷第十三.

三國史記卷第十四.

三國史記卷第十五.

三國史記卷第十六.

三國史記卷第十七.

三國史記卷第十八.

三國史記卷第十九.

三國史記卷第二十.

三國史記卷第二十一.

三國史記卷第二十二.

三國史記卷第二十三.

三國史記卷第二十四.

三國史記卷第二十五.

三國史記卷第二十六.

三國史記卷第二十七.

三國史記卷第二十八.

三國史記卷第二十九.

三國史記卷第三十.

三國史記卷第三十一.

三國史記卷第三十二.

三國史記卷第三十三.

三國史記卷第三十四.

三國史記卷第三十五.

三國史記卷第三十六.

三國史記卷第三十七.

三國史記卷第三十八.

三國史記卷第三十九.

三國史記卷第四十.

三國史記卷第四十一.

三國史記卷第四十二.

三國史記卷第四十三.

三國史記卷第四十四.

三國史記卷第四十五.

三國史記卷第四十六.

三國史記卷第四十七.

三國史記卷第四十八.

三國史記卷第四十九.

三國史記卷第五十.




三國史記卷第一.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삼국사기 권 제 1

수충 정난 정국 찬화 동덕 공신, 개부 의동삼사, 검교 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 이례부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第一.

始祖<赫居世>居西干·<南解>次次雄·<儒理>尼師今·<脫解>尼師今·<婆娑>尼師今·<祗摩>尼師今·<逸聖>尼師今.


신라본기 제 1

시조 혁거세 거서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탈해 이사금, 파사 이사금, 지마 이사금, 일성 이사금.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자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궤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영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三}??歲, 岐억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四年, 夏四月辛丑朔, 日有食之.


4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구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 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內輔, 時人謂之二聖.


5년 봄 정월,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 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다. 시조가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8년,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有星패于王良.


9년 봄 3월, 왕량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四年, 夏四月, 有星패于參.


14년 여름 4월, 삼성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17년, 왕이 6부를 순행하며 위문하는 길에, 왕비 알영도 수행하였다.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19년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二十四年, 夏六月壬申晦, 日有食之.


24년 여름 6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26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 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경,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 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제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30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범하려다가, 국경 부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노적가리가 들에 가득 쌓인 것을 보고 서로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덕이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군대로 몰래 기습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三十二年, 秋八月乙卯晦, 日有食之.


32년 가을 8월 그믐 을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庾充,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 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침{寢}??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趙炳舜. 『三國史節要』.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 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요?"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측근들이 간하여 이를 말리자 그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이와 같이 책망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 마한왕이 별세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했다.

"서한왕이 이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했습니다. 이제 그 국왕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그 나라를 충분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40년,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四十三年, 春二月乙酉晦, 日有食之.


43년, 봄 2월 그믐 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百}??匹, 曰: "寡君問{聞}??<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패于河鼓.


54년, 봄 2월 기유에 혜성이 하고 성좌에 나타났다.


○五十六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56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九年, 秋九月戊申晦, 日有食之.


59년, 가을 9월 그믐 무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60년, 가을 9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巖寺{曇巖寺}>??北.


趙炳舜. 『三國史節要』.

61년, 봄 3월, 거서간이 별세하였다. 사릉에 장사지냈다.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南解>次次雄立,[次次雄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 爲慈充."] <赫居世>嫡子也. 身長大, 性沈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云<阿婁>夫人.]繼父卽位稱元.

○論曰: 人君卽位, 踰年稱元, 其法詳於『春秋』, 此先王不천{刊}??之典也. 『伊訓』曰: "<成湯>旣沒, <大甲{太甲}??>元年." 『正義』曰: "<成湯>旣沒, 其歲卽<大甲{太甲}??>元年." 然『孟子』曰: "<湯>崩, <大丁{太丁}??>未立, <外丙>二年, <仲壬>四年." 則疑若『尙書』之脫簡, 而『正義』之誤說也, 或曰: "古者, 人君卽位, 或踰月稱元年, 或踰年而稱元年." 踰月而稱元年者, <成湯>旣沒<大甲{太甲}??>元年, 是也. 『孟子』云: "<大丁{太丁}??>未立"者, 謂<大丁{太丁}??>未立而死也. "<外丙>二年, <仲壬>四年"者, 皆謂<大丁{太丁}>??之子<大甲{太甲}>??二兄, 或生二年, 或生四年而死, <太甲>所以得繼<湯>耳. 『史記』便謂此<仲壬>·<外丙>爲二君, 誤也. 由前, 則以先君終年, 卽位稱元, 非是. 由後, 則可謂得<商>人之禮者矣.


허성도.허성도.허성도.허성도.허성도.허성도.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 x]남해 차차웅[차차웅을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충은 방언으로는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자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혁거세의 적자이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아루 부인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아버지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를 원년이라고 하는 법도는 「춘추」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절대적인 선왕의 법도이다. 「이훈」에는 "성탕이 죽으니 태갑 원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의」에는 "성탕이 죽은 그 해가 곧 태갑 원년이다"라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맹자」에는 "탕이 죽고, 태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외병이 2년이요, 중임이 4년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서」에는 이 기록이 빠져 있고, 「정의」에는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이 잘못되어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옛날에는 임금이 즉위하면 그 달을 넘긴 다음 달을 즉위 원년이라고 일컫기도 했고, 혹은 그 해를 넘긴 다음 해를 즉위 원년이라고 했다"라고 말한다. 즉위한 달을 넘기고 나서 원년이라고 부른 경우로는 "성탕이 죽으니 태갑 원년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맹자」에서 말한 "태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은 태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외병이 2년, 중임이 4년이라"고 한 것은 태정의 아들인 태갑의 두 형이 태어난지 2년 혹은 4년 만에 죽은 것을 말한다. 이리하여 태갑이 탕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기」에서 이를 중임과 외병의 두 임금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전자에 의하면 선왕이 죽은 해를 즉위 원년이라 불렀으니 이는 옳지 않으며, 후자에 의하면 상 나라 백성의 예절에 맞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 부식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마다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을 이 번역서에서는 '저자의 견해'라고 표시하여 번역하기로 한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國{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隣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妾{妄}??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果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가을 7월, 낙랑 군사가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이 측근에게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측근들이 "적은 우리 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이 물러갔다.


○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冬十月丙辰朔, 日有食之.


3년, 봄 정월, 시조묘를 건립하였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5년, 봄 정월,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7년 가을 7월,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八年, 春夏旱.


8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소,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 以禦之. <樂浪>謂內虛, 求{來}??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 至<閼川>, 見石堆, 知賊衆, 乃止.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11년,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낙랑이 우리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보고, 금성을 공격하여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적병이 두려워 하며 퇴각하다가 알천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물러갔다. 6부 군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이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병이 많은 것으로 알고 추격을 멈추었다.


○十三年, 秋七月戊子晦, 日有食之.


13년, 가을 7월 그믐 무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京城旱. 秋七月, 蝗, 民饑, 發倉름救之.


15년,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之.


16년 봄 2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주워서 이를 왕에게 바쳤다.


○十九年, 大疫, 人多死. 冬十一月, 無氷.


19년,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겨울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二十年秋, 大白{太白}??入太微.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가을, 금성이 태미 성좌에 들어 갔다.


○二十一年, 秋九月, 蝗. 王薨, 葬<蛇陵園>內.


21년, 가을 9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 <雲帝>夫人;  妃, <日知>葛文王之女也.[或云妃姓<朴>, <許婁王>之女.] 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 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 多齒." 試以餠서之,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 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며, 왕비는 일지 갈문왕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며, 허루왕의 딸이라고도 한다.] 애초에 남해가 사망했을 때, 유리가 당연히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유리는 대보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왕위를 그에게 사양하였다. 탈해는 "임금이라는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시험삼아 떡을 깨물어 보았다. 그 결과 유리의 이 자국이 많았으므로 즉시 측근들과 함께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으니, 옛부터 전해오는 말이 이와 같았다. 김 대문은 "이사금은 방언이다"라고 말했다. '이사금'은 곧 '이의 자국'이란 말이다. 이전에 남해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너희들 '박'과 '석' 두 성을 가진 사람 중에 나이 많은 자가 왕위를 이으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후에 김씨 성이 또한 흥기하였으므로, 세 성씨들 중에 나이많은 자를 선택하여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왕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大赦.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구飢凍將死曰: "予以묘身{躬}??居上, 不能養民, 吏{使}??老幼, 至於此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 鰥寡孤獨, 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於是, 隣國百姓, 聞而來者衆矣.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 歌樂之始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겨울 11월, 왕이 국내를 순행하다가 어떤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왕위에 앉았으나,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없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토록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라고 말하고,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현지에서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을 위문하게 하고, 늙고 병들어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자들을 부양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오는 자들이 많았다.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다. 이것이 노래 가사의 시작이었다.


○九年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 姓<孫>; <于珍部{干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又設官有十七等: 一(+曰)??伊伐찬, 二(+曰)??伊尺찬, 三(+曰)??잡찬, 四(+曰)??波珍찬, 五(+曰)??大阿찬, 六(+曰)??阿찬, 七(+曰)??一吉찬, 八(+曰)??沙찬, 九(+曰)??級伐찬, 十(+曰)??大奈麻, 十一(+曰)??奈麻, 十二(+曰)??大舍, 十三(+曰)??小舍, 十四(+曰)??吉士, 十五(+曰)??大烏, 十六(+曰)??小烏, 十七(+曰)??造位. 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六}??部之庭績麻, 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歌舞百戱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 起舞嘆曰: "會蘇, 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李丙燾. 新本.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9년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쳤으며 성은 이씨이고,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쳤으며 성은 최씨,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쳤으며 성은 정씨,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쳤으며 성은 배씨,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쳤으며 성은 설씨로 정하였다. 또한 관직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1.이벌찬 2.이척찬 3.잡찬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7.일길찬 8.사찬 9.급벌찬 10.대나마 11.나마 12.대사 13.소사 14.길사 15.대오 16.소오 17.조위

왕은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두 편으로 나누고,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이들 두 편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시 경에 끝냈다. 그들은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했는지를 심사하였으며,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길쌈을 많이 한 편에 사례하였다. 이 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의 오락을 하였다. 이 행사를 가배라고 하였다. 이 행사를 할 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래말을 붙이고, 회소곡이라고 하였다.


○十一年, 京都, 地裂泉湧. 夏六月, 大水.


11년,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고 샘이 솟았다.

여름 6월, 홍수가 났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3년,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점령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4년,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년, 가을 9월, 화려현·불내현의 두 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 서쪽에서 요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19년,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三十一年, 春二月, 星패于紫宮.


31년, 봄 2월, 자미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暴雨自西北來. 五月, 大風拔木.


33년,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얼마 후에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비卽大位, 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34년,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국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공을 여러 번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라. 나의 유언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脫解>尼師今立.[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 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과卵幷寶物, 置於독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 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時, 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독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독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온독而出, 宜名<脫解>." <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 以立功名." 於是, 專精學問, 兼知地理.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年, 登庸爲大輔, 委以政事.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 是以寡人先立, 今也宜傳其位焉."


탈해 이사금[토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본래 그 나라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그 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노인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도착하였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 왔으니,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고,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격과 관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문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지리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그 곳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꾀를 써서 이 터를 얻어 그 곳에서 살았다. 이 땅은 뒷날 월성터가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왕은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에 그를 등용하여 대보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말했다. "선왕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二年春正月, 拜<瓠公>爲大輔. 二月, 親祀始祖廟.


2년, 봄 정월,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三年春三月, 王登<吐含山>, 有玄雲如蓋, 浮王頭上, 良久而散.??夏五月, 與<倭>國結好交聘. 六月, 有星패于天船.


3년, 봄 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 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여름 5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월에 천선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五年秋八月, <馬韓>將<孟召>, 以<覆巖城>降.


5년, 가을 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七年冬十月, <百濟>王拓地, 至<娘子谷城>, 遣使請會, 王不行.


7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八年秋八月, <百濟>遣兵, 攻<蛙山城>. 冬十月, 又攻<狗壤城>. 王遣騎二千, (+逆)??擊走之. 十二月, 地震. 無雪.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가을 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 지진이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九年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黎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독, 掛樹枝, 白鷄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독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胤{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독, 姓<金>氏. 改<始林>名<계林>, 因以爲國號.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十年, <百濟>攻取<蛙山城>, 留二百人居守, 尋取之.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十一年春正月, 以<朴>氏貴戚, 分理國內州郡, 號爲州主·郡主. 二月, 以<順貞>爲伊伐찬, 委以政事.


11년 봄 정월, 박씨의 귀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다.

2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十四年, <百濟>來侵.


14년, 백제가 침범하였다.


○十一{七}??年, <倭>人侵<木出島>. 王遣角干<羽烏>禦之, 不克, <羽烏>??{死}??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우오가 전사하였다.


○十八年, 秋八月, <百濟>寇邊, 遣兵拒之.


18년 가을 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十九年, 大旱. 民饑, 發倉賑給. 冬十月, <百濟>攻西鄙<蛙山城>, 拔之.


19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二十年, 秋九月, 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 盡殺之.


2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二十一年, 秋八月, 阿찬<吉門>, 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찬, 賞功也.


21년 가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


○二十三年, 春二月, 彗星見東方, 又見北方, 二十日乃滅.


23년 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二十四年, 夏四月, 京都大風, <金城>東門自壞. 秋八月, 王薨. 葬城北<壤井>丘.


24년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婆娑>尼師今立, <儒理>王第二子也.[或云, <儒理>第{弟}??<柰老>之子也.] 妃, <金>氏<史省>夫人, <許??{許婁}>??葛文王之女也. 初, <脫解>薨, 臣僚欲立<儒理>太子<逸聖>. 或謂: "<逸聖>雖嫡嗣, 而威明不及<婆娑>." 遂立之. <婆娑>節儉省用, 而愛民, 國人嘉之.


『북한본』.趙炳舜. 『顯宗實錄字本』.

파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혹은 유리의 아우 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이다. 그녀는 갈문왕 허루의 딸이다. 애초에 탈해가 죽었을 때 신하들은 유리의 태자 일성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기를 "일성이 적자이기는 하지만 사람됨과 총명함이 파사만 못하다"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도록 한 것이다. 파사는 절도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끼는 생활을 하였고,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三月, 巡撫州郡, 發倉賑給, 慮獄囚, 非二罪, 悉原之.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주와 군을 순행하여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옥에 갇힌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사형죄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면 모두 석방토록 하였다.


○三年, 春正月, 下令曰: "今倉름空궤, 戎器頑鈍, 당有水旱之災, 邊鄙之警, 其何以禦之? 宜令有司, 勸農桑, 練兵??{革}??, 以備不虞."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 나라 창고가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 졌다. 혹시라도 홍수나 가뭄 또는 변방에 변고가 생기면 이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의외의 상황에 대비토록 하라."


○五年, 春二月, 以<明宣>爲伊찬, <允良>爲波珍찬. 夏五月, <古타>郡主, 獻靑牛. <南新縣>릉{麥}??連기, 大有年, 行者不齎糧.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2월, 명선을 이찬으로, 윤량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고타 군주가 푸른 색의 소를 바쳤다. 남신현에서는 하나의 보리 이삭에 여러 가닥이 생겨나 크게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六年, 春正月, <百濟>犯邊. 二月, 以<吉元>爲阿찬. 夏四月, 客星入紫微.


6년 봄 정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월, 길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객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 갔다.


○八年, 秋七月, 下令曰: "朕以不德, 有此國家. 西隣<百濟>, 南接<加耶>, 德不能綏, 威不足畏, 宜繕葺城壘, 以待侵질." 是月, 築<加召>·<馬頭>二城.


8년 가을 7월, 왕이 "내가 부덕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맡았다. 우리 나라는 서쪽으로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에 접하였으나, 나의 덕망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을 두렵도록 하기에 부족하였으니, 마땅히 성과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달에 두 곳, 즉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十一年, 秋七月, 分遣使十人, 廉察州郡主, 不勤公事, 致田野多荒者, 貶黜之.


11년 가을 7월, 열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들을 조사하고, 공무에 성실하지 않거나 농토를 많이 황폐하게 한 자가 있으면 직급을 내리거나 사직토록 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拜<궤良{允良}>??爲伊찬, <啓其>爲波珍찬. 二月, 巡幸<古所夫里>郡, 親問高年, 賜穀. 冬十月, 京都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윤량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왕이 고소부리군에 행차하여 나이 많은 백성을 직접 위문하고 곡식을 주었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十五年, 春二月, <加耶>賊圍<馬頭城>. 遣阿찬<吉元>, 將騎一千, 擊走之. 秋八月, 閱兵於<閼川>.


15년 봄 2월,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자 아찬 길원을 보냈다. 길원은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퇴하였다.

가을 8월,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十七年, 秋七月, 暴風自南, 拔<金城>南大樹. 九月, <加耶>人襲南鄙. 遣加城主<長世>拒之, 爲賊所殺. 王怒, 率勇士五千出戰, 敗之, 虜獲甚多.


17년 가을 7월, 남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성주 장세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그가 전사하였다. 왕이 노하여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노획한 물자가 매우 많았다.


○十八年, 春正月, 擧兵欲伐<加耶>, 其國主, 遣使請{謝}??罪, 乃止.


趙炳舜. 『三國史節要』.

18년 봄 정월,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를 치려 하였으나,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京都旱.


19년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二十一年, 秋七月, 雨雹, 飛鳥死. 冬十月, 京都地震, 倒民屋, 有死者.


21년 가을 7월, 우박이 내려 날던 새가 죽었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민가가 쓰러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 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이를 월성이라 이름지었다.

가을 7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찬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 依<音汁伐>主<타鄒干>家. 王使人索其奴, <타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冬十月, 공{桃}??李華.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가을 8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6부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우두머리를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은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보제의 종이 도망하여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돌려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피었다.


○二十五年, 春正月, 衆星隕如雨, 不至地. 秋七月, <悉直>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鄙.


25년 봄 정월, 많은 별들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가을 7월, 실직이 배반하자 군사를 보내 토벌 평정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二十六年, 春正月, <百濟>遣使請和. 二月, 京都雪三尺.


26년 봄 정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였다.

2월, 서울에 석 자 깊이의 눈이 내렸다.


○二十七年, 春正月, 幸<押督>, 賑貧窮. 三月, 至自<押督>.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27년 봄 정월, 왕이 압독에 행차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3월에 압독으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8월, 마두성주에게 명령하여 가야를 정벌토록 하였다.


○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食{倉}??賑給.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幷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9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을 정벌하여 합병하였다.


○三十年, 秋七月, 蝗害穀. 王遍祭山川, 以??{祈}??禳之, 蝗滅, 有年.


趙炳舜. 『三國史節要』.

30년 가을 7월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렸다. 메뚜기 떼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三十二年, 夏四月, 城門自毁. 自五月, 至秋七月, 不雨.


32년 여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三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蛇陵어{蛇陵園}>??內.


趙炳舜. 『三國史節要』.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祗摩>尼師今立,[或云<祇味>.] <婆娑王>嫡子. 母, <史省>夫人; 妃, <金>氏<愛禮>夫人, 葛文王<摩帝>之女也. 初, <婆娑王>獵於<楡찬>之澤, 太子從焉. 獵後, 過<韓기??{韓기部}>??, 伊찬<許婁>饗之. 酒감, <許婁>之妻, ??{以??/携??}少女子出舞. <摩帝>伊찬之妻, 亦(-引)??出其女, 太子見而悅之, <許婁>不悅. 王謂<許婁>曰: "此地名<大포>, 公於此, 置盛饌美온, 以宴간之, 宜位酒多, 在伊찬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後云{稱}??角干.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는, 新舊唐書에는 '推'로 되어있으나, '携'가 옳다고 본다. 今西龍의 견해도 이와 같다.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지마 이사금[혹은 지미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파사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이다.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인데, 그녀는 갈문왕 마제의 딸이었다. 애초에 파사왕이 유찬 못가에 가서 사냥할 때 태자도 동행하였다. 사냥을 한 뒤 한기부를 지날 때, 이찬 허루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술 기운이 무르익자 허루의 아내가 젊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찬 마제의 부인도 역시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허루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왕이 허루에게 말하기를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 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말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리웠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拜<昌??{昌永}>??爲伊찬, 以參政事, <玉權>爲波珍찬, <申權>爲一吉찬, <順宣>爲級찬. 三月, <百濟>遣使來聘.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三年, 春三月, 雨雹, 麥苗傷. 夏四月大水. 慮囚, 除死罪, 餘悉原之.


3년 봄 3월 우박이 내려 보리싹이 상하였다.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죄수들를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四年, 春二月, <加耶>寇南邊. 秋七月, 親征<加耶>. 帥步騎, 度<黃山河>, <加耶>人伏兵林, 薄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4년 봄 2월,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五年,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以繼之, <加耶>영城固守. 會久雨, 乃還.


5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九年, 春二月, 大星墜<月城>西, 聲如雷. 三月, 京都大疫.


9년 봄 2월,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3월,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年, 春正月, 以<翌宗>爲伊찬, <昕連>爲波珍찬, <林權>爲河찬{阿찬}??. 二月, 築<大甑山城>. 夏四月, <倭>人侵東邊.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대증산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十一年, 夏四月, 大風東來, 折木飛瓦, 至夕而止. 都人訛言<倭>兵大來, 爭遁山谷. 王命伊찬<翌宗>等諭止之. 秋七月, 飛蝗害穀, 年饑多盜.


11년 여름 4월,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렸다. 바람은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 온다는 헛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으며,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十二年, 春三月, 與<倭>國講和. 夏四月, 隕霜. 五月, <金城>東民屋, 陷爲他{池}??, 芙거生.


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 3월, 왜국과 강화하였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 금성 동쪽 민가가 내려 앉아 연못이 되었고, 그 곳에 연밥이 생겼다.


○十三年, 秋九月庚申晦, 日有食之.


13년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


14년 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十六年, 秋七月甲戌朔, 日有食之.


16년 가을 7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七年, 秋八月, 長星竟天. 冬十月, 國東地震. 十一月, 雷.


17년 가을 8월, 장성이 하늘 끝까지 뻗쳤다.

겨울 10월, 동쪽 지방에 지진이 있었다.

11월, 우레가 있었다.


○十八年, 秋, 伊찬<昌永>卒. 以波珍찬<玉權>爲伊찬, 以參政事.


18년,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二十年, 夏五月, 大雨, 漂沒民戶.


20년 여름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물에 잠겼다.


○二十一年, 春二月, 宮南門災.


21년 봄 2월, 궁궐 남문이 불탔다.


○二十三年, 春夏, 旱. 秋八月, 王薨, 無子.


23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逸聖>尼師今立, <儒理王>長子.[或云<日知>葛文王之子.] 妃, <朴>氏, <支所禮王>之女.


일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리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의 딸이다.


○元年九月, 大赦.


원년 9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三年, 春正月, 拜<雄宣>爲伊찬, 兼知內外兵馬事. <近宗>爲一吉찬.


3년 봄 정월, 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근종이 일길찬이 되었다.


○四年, 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


4년 봄 2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여,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을 불태웠다.


○五年, 春二月, 置政事堂於<金城>. 秋七月, 大閱<閼川>西. 冬十月, 北巡, 親祀<大白山{太白山}>??.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2월,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알천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六年, 秋七月, 隕霜殺菽. 八月, <靺鞨>襲<長嶺>, 虜掠民口. 冬十月, 又來, 雷{雪}??甚乃退.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8월,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주민들을 잡아갔다. 겨울 10월, 말갈이 다시 습격해왔으나, 우레가 심하게 울리자 물러갔다.


○七年, 春二月, 立柵<長嶺>, 以防<靺鞨>.


7년 봄 2월, 장령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어하였다.


○八年, 秋九月辛亥晦, 日有食之.


8년 가을 9월 그믐 신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九年, 秋七月, 召群公議征<靺鞨>. 伊찬<雄宣>上言: "不可." 乃止.


9년 가을 7월, 왕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말갈을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이찬웅선이 "불가능하다"고 왕에게 말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十年, 春二月, 修葺宮室. 夏六月乙丑, 熒惑犯鎭星. 冬十一月, 雷.


10년 봄 2월, 궁실을 수리하였다.

여름 6월 을축에 화성이 토성을 범했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다.


○十一年, 春二月, 下令: "農者政本, 食惟民天. 諸州郡修完堤坊, 廣闢田野." 又下令: "禁民間用金·銀·珠玉."


11년 봄 2월, 왕이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다.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개간하여 넓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민간에서 금·은·주옥의 사용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十二年, 春夏旱, 南地最甚, 民飢, 移其粟賑給之.


12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식량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하였다.


○十三年, 冬十月, <押督>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地.


13년 겨울 10월, 압독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풀어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十四年, 秋七月, 命: 臣寮, 各擧智勇堪爲將帥者.


14년 가을 7월, 신하들에게 명하여 장수가 될만한 지혜와 용맹을 갖춘 자를 각각 천거하게 하였다.


○十五年, 封<朴阿道>爲葛文王.[<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其義未詳.]


15년, 박아도를 갈문왕에 봉했다.[신라에서는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확실하지 않다.]


○十六年, 春正月, 以<得訓>爲沙찬, <宣忠>爲奈麻. 秧{秋}??八月, 有星패于天市. 冬十一月, 雷. 京都大疫.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봄 정월, 득훈을 사찬, 선충을 내마로 삼았다.

가을 8월, 혜성이 천시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고,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七年, 自夏四月不雨, 至秋七月, 乃雨.


17년, 여름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十八年, 春二月, 伊찬<雄宣>卒. 以<大宣>爲伊찬, 兼知內外兵馬事. 三月, 雨雹.


18년 봄 2월, 이찬 웅선이 사망하자, 대선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3월, 우박이 내렸다.


○二十年, 冬十月, 宮門災. 彗星見東方, 又見東北方.


20년 겨울 10월, 궁궐 대문에 불이 났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동북쪽에 나타났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薨.

三國史記卷第一.


21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 끝




三國史記卷第二.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삼국사기 권 제 2

수충 정난 정국 찬화 동덕 공신, 개부 의동삼사, 검교 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 이례부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第二.

<阿達羅>尼師今·<伐休>尼師今·<奈解>尼師今·<助賁>尼師今·<沾解>尼師今·<味鄒>尼師今·<儒禮>尼師今·<基臨>尼師今·<訖解>尼師今.


신라본기 제 2

아달라 이사금, 벌휴 이사금, 나해 이사금, 조분 이사금,

첨해 이사금, 미추 이사금, 유례 이사금, 기림 이사금,

흘해 이사금.


○<阿達羅>尼師今立, <逸聖>長子也. 身長七尺, 豊準有奇相. 母<朴>氏, <支所禮>王之女, 妃<朴>氏<內禮>夫人, <祗摩王>之女也.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성의 맏아들이다. 그는 키가 일곱 자였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얼굴 모양이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이다. 그녀는 지마왕의 딸이다.


○元年三月, 以<繼元>爲伊찬, 委軍國政事.


원년 3월, 계원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以<興宣>爲一吉찬.


李丙燾.

今西龍.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三年, 夏四月, 隕霜. 開<계立嶺>路.


3년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에 길이 개통되었다.


○四年, 春二月, 始置<甘勿>·<馬山>二縣. 三月, 巡幸<長嶺鎭>, 勞戍卒, 各賜征袍.


4년 봄 2월, 감물현과 마산현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五年, 春三月, 開<竹嶺>. <倭>人來聘.


5년 봄 3월, 죽령이 개통되었다. 왜인이 예방해왔다.


○七年, 夏四月, 暴雨, <閼川>水溢, 漂流人家, <金城>北門自毁.


7년 여름 4월, 폭우로 알천이 넘쳐서 집이 떠내려 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八年, 秋七月, 蝗害穀. 海魚多出死.


8년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고, 바다 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죽었다.


○九年, 巡幸<沙道城>, 勞戍卒.


9년, 왕이 사도성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를 위로하였다.


○十一年, 春二月, 龍見京都.


11년 봄 2월, 서울에 용이 나타났다.


○(-十)二年??, 冬十月, 阿찬<吉宣>謀叛, 發覺, 懼誅亡入<百濟>. 王移書求之, <百濟>不許. 王怒出師伐之, <百濟>영城守不出, 我軍粮盡乃歸.


趙炳舜. 『三國史節要』. 『百濟本紀』.

12년 겨울 10월,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처형을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응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十三年, 春正月辛亥朔, 日有食之.


13년 봄 정월 초하루 신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四年, 秋七月, <百濟>襲破國西二城, 虜獲民口一千而去. 八月, 命一吉찬<興宣>, 領兵二萬伐之, 王又率騎八千, 自<漢水>臨之, <百濟>大懼, 還其所掠男女, 乞和.


14년 가을 7월,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

8월,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 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十五年, 夏四月, 伊찬<繼元>卒, 以<興宣>爲伊찬.


15년 여름 4월, 이찬 계원이 사망하자 흥선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十七年, 春二月, 重修始祖廟. 秋七月, 京師地震, 霜雹害穀. 冬十月, <百濟>寇邊.


17년 봄 2월, 시조묘를 중수하였다.

가을 7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였다.


○十八年春, 穀貴, 民飢.


18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十九年, 春正月, 以<仇道>爲波珍찬, <仇須兮>爲□吉찬{一吉찬}??. 二月, 有事始祖廟. 京都大疫.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봄 정월, 구도를 파진찬에 임명하고 구수혜를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20년 여름 5월,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二十一年, 春正月, 雨王{土}??. 二月旱, 井泉??{竭}??.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봄 정월, 흙비가 내렸다.

2월,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물이 말랐다.


○三十一年, 春三月, 王薨.


31년 봄 3월, 왕이 별세하였다.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벌휴[발휘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석씨이며, 탈해왕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이다. 그녀는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가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왕은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 흉년이 들 것인가를 미리 알았으며, 또한 사람이 정직한가 사악한가를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珍찬<仇道>·一吉찬<仇須兮>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


李丙燾. '軍主之名始於此'라는 기록은 智證麻立干 6년에도 나온다.

2년 봄 정월,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가 좌우 군주가 되어 소문국을 정벌하였다. 군주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三年, 春正月, 巡幸州郡, 觀察風俗. 夏五月壬申{壬辰}??晦, 日有食之. 秋七月, <南新縣>進嘉禾.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遺事』.

3년 봄 정월, 왕이 주와 군을 순행하여 민정을 시찰하였다.

여름 5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남신현에서 상서로운 벼를 진상하였다.


○四年, 春三月, 下令: 州郡, 無作土木之事, 以奪農時. 冬十月, 北地大雪, 深一丈.


4년 봄 3월,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 농사철에 토목 공사를 하지 않도록 하였다.

겨울 10월, 북부 지방에 큰 눈이 내려 한 장 깊이로 쌓였다.


○五年, 春二月, <百濟>來攻<母山城>. 命波珍찬<仇道>, 出兵拒之.


5년 봄 2월,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파진찬 구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방어하게 하였다.


○六{五}??年, 秋七月, <仇道>與<百濟>戰於<狗壤>, 勝之. 殺獲五百餘級.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7월,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5백여 명을 죽였다.


○七年, 秋八月, <百濟>襲西境<圓山鄕>, 又進圍<??谷城{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策, 貶爲<缶谷城>主, 以<薛支>爲左軍主.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가을 8월, 백제가 서쪽 국경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하였다. 구도가 와산까지 추격하다가 백제에게 패배하였다. 왕은 구도가 잘못했다고 하여 부곡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에 임명하였다.


○八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8년 가을 9월, 치우기 별이 각성 성좌와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九年, 春正月, 拜<國良>爲阿찬, <述明>爲一吉찬. □{三}??月, 京都雪深三尺. 夏五月, 大水, 山崩十餘所.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봄 정월, 국량을 아찬에 임명하고, 술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3월, 서울에 눈이 내렸는데 깊이가 석 자였다.

여름 5월, 홍수가 나서 산이 10여 군데 무너졌다.


○十年, 春正月甲寅朔, 日有食之. 三月, <漢祇部>女, 一産四男一女. 六月, <倭>人大饑, 來求食者千餘人.


10년 봄 정월 초하루 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한기부 여인이 한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다.

6월, 왜인 천여 명이 큰 기근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


○十一年, 夏六月乙巳晦, 日有食之.


11년 여름 6월 그믐 을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三月, 旱. 夏四月, 震宮南大樹, 又震<金城>東門. 王薨.


1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3월,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대궐 남쪽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쳤다. 왕이 사망하였다.


○<奈解>尼師今立, <伐休王>之孫也. 母, <內禮>夫人. 妃<昔>氏, <助賁王>之妹. 容儀雄偉, 有俊才. 前王太子<骨正>及第二十{子}??<伊買>, 先死, 大孫尙幼少, 乃立<伊買>之子, 是爲<奈解>尼師今. 是年, 自正月至四月不雨, 及王卽位之日, 大雨, 百姓歡慶.


趙炳舜. 『三國史節要』.

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벌휴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이다. 왕비 석씨는 조분왕의 누이이다. 왕은 용모와 풍채가 훌륭하였고 재주가 뛰어났다. 전 임금의 태자 골정과 둘째 아들 이매가 먼저 죽고 장손이 아직 어렸으므로, 이매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나해 이사금이다. 이 해에 봄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가, 왕이 즉위하던 날 큰 비가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즐거워 하며 경축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始祖廟.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三年, 夏四月, 始祖廟前臥柳自起. 五月, 國西大水, 免遭水州縣一年租調. 秋七月, 遣使撫問.


3년 여름 4월, 시조묘 앞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수재를 당한 주와 현에 1년의 세금을 면제하였고, 가을 7월에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四年, 秋七月, <百濟>侵境.


4년 가을 7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五年, 秋七月, 太白晝見. 隕霜殺草. 九月庚午朔, 日有食之. 大??{閱}??於<閼川>.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가을 7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六年, 春二月, <加耶國>請和. 三月丁卯朔, 日有食之. 大旱, 錄內外繫囚, 原輕罪.


6년 봄 2월, 가야국이 화친을 청해왔다.

3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큰 가뭄이 들자,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였다.


○八年, 冬十月, <靺鞨>犯境. 桃李華. 人大疫.


8년 겨울 10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年, 春二月, 拜<眞忠>爲一伐찬, 以參國政. 秋七月, 霜雹殺穀. 太白犯月. 八月, 狐鳴<金城>及始祖廟庭.


10년 봄 2월, 진충을 일벌찬에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시켰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고, 금성이 달을 범했다.

8월,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의 뜰에서 울었다.


○十二年, 春正月, 拜王子<利音>[或云<奈音>.]爲伊伐찬, 兼知內外兵馬事.


12년 봄 정월, 왕의 아들 이음[혹은 나음이라고도 한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찬<利音>, 將兵拒之.


13년 봄 2월, 왕이 서쪽의 군과 읍을 순찰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謀侵<加羅{阿羅}>??, <加羅{阿羅}>??王子來請救. 王命大子{太子}??<于老>與伊伐찬<利音>, 將六部兵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李丙燾. 勿稽子傳.李丙燾. 勿稽子傳.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가을 7월, 바닷가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가라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일벌찬 이음에게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잡아 돌아왔다.


○十五年, 春夏旱, 發使錄郡邑獄囚, 除二死, 餘悉原之.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신을 보내 군읍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죄수는 모두 석방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拜<萱堅>爲伊찬, <允宗>爲一吉찬.


16년, 봄 정월에 훤견을 이찬에 임명하고 윤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十七年, 春三月, <加耶>送王子爲質. 夏五月, 大雨, 漂毁民屋.


17년 봄 3월,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왔다.

여름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유실되었다.


○十九年, 春三月, 大風折才{木}??. 秋七月, <百濟>來攻國西<腰車城>, 殺城主<薛夫>. 王命伊伐찬<利音>, 率精兵六千伐<百濟>, 破<沙峴城>. 冬十二月, 雷.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봄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가을 7월, 백제가 서쪽 지방 요거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그들은 사현성을 격파하였다.

겨울 12월, 우레가 있었다.


○二十三年, 秋七月, 武庫兵物自出. <百濟>人來國{圍}??<獐山城>, 王親率兵出擊走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가을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밖으로 나왔다.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하였으므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격퇴하였다.


○二十五年, 春三月, 伊伐찬<利音>卒. 以<忠萱>爲伊伐찬, 兼知兵馬事. 秋七月, 大閱<楊山>西.


25년 봄 3월, 이벌찬 이음이 사망하자 충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二十七年, 夏四月, 雹傷菽麥. <南新縣>人死, 歷月復活. 冬十月, <百濟>兵入<牛頭州>, 伊伐찬<忠萱>將兵拒之. 至<熊谷>, 爲賊所敗, 單騎而返. 貶爲鎭主, 以<連珍>爲伊伐찬, 兼知兵馬事.


27년 여름 4월,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가 상했다. 남신현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음 달에 다시 살아났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우두주에 들어 왔으므로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막으려 하였으나, 웅곡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二十九年, 秋七月, 伊伐찬<連珍>與<百濟>戰, <烽山>下破之, 殺獲一千餘級. 八月, 築<烽山城>.


29년 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전투를 하였다. 그는 봉산 아래에서 백제병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였다.

8월, 봉산성을 쌓았다.


○三十一年, 春不雨, 至秋七月乃雨. 民飢, 發倉름賑給. 冬十月, 錄內外獄囚, 原輕罪.


31년,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서울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자는 석방하였다.


○三十二年, 春二月, 巡狩西南郡邑, 三月還. 拜波珍찬<康萱>爲伊찬.


32년 봄 2월, 왕이 서남쪽 군읍을 순행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 강훤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三十四年, 夏四月, 蛇鳴南庫三日. 秋九月, 地震. 冬十月, 大雪深五尺.


34년 여름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 동안 울었다.

가을 9월, 지진이 있었다.

겨울 10월, 눈이 크게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三十五年, 春三月, 王薨.


35년 봄 3월, 왕이 별세하였다.


○<助賁>尼師今立,[一云<諸貴{諸賁}>??.] 姓, <昔>氏, <伐休>尼師今之孫也. 父, <骨正>[一作<忽爭>.]葛文王. 母, <金>氏<玉帽>夫人, <仇道>葛文王之女; 妃, <阿爾兮>夫人, <奈解王>之女也. 前王將死, 遺言以壻<助賁>繼位. 王身長, 美儀뢰{表}??, 臨事明斷, 國人畏敬之.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조분 이사금[제분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이 석씨이고,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갈문왕 골정[홀쟁이라고도 한다.]이다. 어머니는 김씨 옥모부인이다. 그녀는 갈문왕 구도의 딸이다. 왕비는 아이혜부인이다. 그녀는 나해왕의 딸이다. 전 임금이 죽음을 앞두고, 사위 조분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왕은 키가 크며 외모가 훌륭하고, 일이 생기면 명석한 판단을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경외하였다.


○元年, 拜<連忠>爲伊찬, 委軍國事. 秋七月, 謁??{始}??祖廟.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연충을 이찬에 임명하여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7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二年, 秋七月, 以伊찬<于老>爲大將軍, 討破<甘文國>, 以其地爲郡.


2년 가을 7월,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여 승리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三年, 夏四月, <倭>人猝至圍<金城>. 王親出戰, 賊潰走, 遣輕騎追擊之, 殺獲一千餘級.


3년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직접 나아가 싸웠다. 적이 흩어져 도주하자 정예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四年, 夏四月, 大風飛屋瓦. 五月, <倭>兵寇東邊. 秋七月, 伊찬<于老>與<倭>人戰<沙道>, 乘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4년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와 기와가 날았다.

5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웠다. 그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웠다.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六年, 春正月, 東巡撫恤.


6년 봄 정월, 왕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백성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七年, 春二月, <骨伐國>王<阿音夫>, 率衆來降, 賜第宅田莊安之, 以其地爲郡.


7년 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왔다. 왕은 그들에게 집과 밭을 주어 편안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八年, 秋八月, 蝗害穀.


8년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十一年, <百濟>侵西邊.


11년,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十三年秋, 大有年. <古타郡>進嘉禾.


13년 가을, 큰 풍년이 들었다. 고타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拜伊찬<于老>爲舒弗邯, 兼知兵馬事.


15년 봄 정월, 이찬 우로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于老>將兵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群心感激.


16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자, 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수비하였다. 그 날 밤 날씨가 몹시 추워지자, 우로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직접 장작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하여 주었다. 사졸들이 진심으로 감격하였다.


○十七年, 冬十月, 東南有白氣如匹練. 十一月, 京都地震.


17년 겨울 10월, 동남방에 흰 기운이 한 필의 명주를 펴놓은 것처럼 뻗쳤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十八年, 夏五月, 王薨.


18년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沾解>尼師今立, <助賁王>同母弟也.


첨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분왕의 동복 아우이다.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論曰: <漢><宣帝>卽位, 有司奏: "爲人後者爲之子也. 故降其父母不得祭, 尊祖之義也. 是以帝所生父稱親, 諡曰悼, 母曰悼后, 比諸侯王." 此合經義, 爲萬世法. 故<後漢><光武帝>·<宋><英宗>, 法而行之. <新羅>自王親入繼大統之君, 無不封崇其父稱王, 非特如此而已, 封其外舅者亦有之. 此, 非禮, 固不可以爲法也.


원년 가을 7월, 왕이 시조묘를 참배하였다. 그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했다.

저자의 견해 : 한 나라 선제가 즉위했을 때, 유사가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대를 잇는 자는, 자기에게 대를 물려준 그 사람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친부모를 낮추어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이는 황제의 조상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황제께서는 생부를 친(親)이라 부르시고, 시호는 도(悼)라 하며, 생모는 도후(悼后)라고 불러서, 제후나 왕의 지위와 같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경전의 뜻과 합치된다. 따라서 이것이 만세의 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후한의 광무제와 송나라 영종은 이를 본받아 시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왕의 친족 신분으로서 왕통을 이은 임금이 자신의 생부를 왕으로 추봉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장인까지 왕으로 봉한 일도 있었다. 이는 예에 맞지 않으므로 절대로 법도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二年, 春正{二}??月, 以伊찬<長萱>爲舒弗邯, 以參國政. 二月, 遣使<高句麗>結和.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秋七月, 作<南堂>於宮南.[<南堂>或云<都堂>.] 以<良夫>爲伊찬.


3년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가을 7월, 남당[도당이라고도 한다.]을 대궐 남쪽에 지었다.

양부를 이찬에 임명하였다.


○五年, 春正月, 始聽政於<南堂>. <漢祇部>人<夫道>者, 家貧無諂, 工書算, 著名於時. 王徵之爲阿찬, 委以物藏庫事務.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남당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한기부 사람 부도란 자는 집이 가난하였으나 아첨하는 일이 없고 글씨와 산수에 능하여 당시에 명성이 높았다. 왕이 그를 불러 아찬으로 임명하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업무를 맡겼다.


○七年, 夏四月, 龍見宮東池. <金城>南臥柳自起. 自五月至七月不雨, 禱祀祖廟及名山, 乃雨. 年饑, 多盜賊.


7년 여름 4월, 대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서는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조묘와 명산에 제사지내고 기원하였다. 곧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이 생겼다.


○九年, 秋九月, <百濟>來侵. 一伐찬<翊宗>, 逆戰於<??谷{槐谷}>??西, 爲賊所殺. 冬十月, <百濟>攻<烽山城>, 不下.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가을 9월, 백제가 침범하자 일벌찬 익종이 괴곡 서쪽에서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왔으나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十年, 春三月, 國東海出大魚三, 長三丈, 高丈有二尺. 冬十月晦, 日有食之.


10년 봄 3월,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다. 그 길이는 세 발, 폭은 한 길 두 자였다.

겨울 10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十三年, 秋七月, 旱蝗. 年荒, 多盜.


13년 가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생겼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十四年夏, 大雨, 山崩四十餘所. 秋七月, 星패于東方, 二十五日而滅.


14년, 여름에 큰 비가 내려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다.

가을 7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혜성은 25일만에 사라졌다.


○十五年, 春二月, 築<達伐城>, 以奈麻<克宗>爲城主. 三月, <百濟>遣使請和, 不許. 冬十二月二十八日, 王暴疾薨.


15년 봄 2월,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임명하였다.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겨울 12월 28일, 갑자기 병이 나서 왕이 별세하였다.


○<味鄒>尼師今立,[一云<味照>.]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光明>夫人, <助賁王>之女. 其先<閼智>出於계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 <金>氏有國之始也.


미추 이사금[미조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이다. 그녀는 갈문왕 이칠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이다. 그녀는 조분왕의 딸이다. 미추의 조상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자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았으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되었다.


○元年, 春三月, 龍見宮東池. 秋七月, <金城>西門災, 延燒人家三百餘區.


원년 봄 3월, 대궐 동쪽 못에 용이 나타났다.

가을 7월, 금성서문에 불이 났고, 인가 삼백여 호가 연이어 불탔다.


○二年, 春正月, 拜伊찬<良夫>爲舒弗邯,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親祀國祖廟. 大赦. 封考<仇道>爲葛文王.


2년 봄 정월,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다.


○三年, 春二月, 東巡幸望海. 三月, 幸<黃山>, 問高年及貧不能自存者, 賑恤之.


3년 봄 2월, 왕이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황산에 행차하여 노인 및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五年, 秋八月, <百濟>來攻<烽山城>.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出擊之, 賊敗走. 王聞之, 拜<直宣>爲一吉찬, 厚賞士卒.


5년 가을 8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출격하였다. 적들은 패주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七年, 春夏不雨. 會群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又遣使五人, 巡問百姓苦患.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놓고 왕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으며, 또한 사신 다섯 명을 파견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十一年, 春二月, 下令: 凡有害農事者, 一切除之. 秋七月, 霜雹害穀. 冬十一月, <百濟>侵邊.


11년 봄 2월,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에 피해를 주었다.

겨울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臣寮請改作宮室, 上{王}??重勞人, 不從.


趙炳舜. 『三國史節要』.

15년 봄 2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고 여겨 이에 따르지 않았다.


○十七年, 夏四月, 暴風拔木. 冬十月, <百濟>兵來圍<槐谷城>. 命彼珍찬{波珍찬}??<正源>領兵拒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파진찬 정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旱. 錄囚.


19년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였다.


○二十年, 春正月, 拜<弘權>爲伊찬, <良質>爲一吉찬, <光謙>爲沙찬. 二月, 謁廟{祖}??. 秋九月, 大閱<楊山>西.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정월, 홍권을 이찬, 양질을 일길찬, 광겸을 사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가을 9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二十二年, 秋九月, <百濟>侵邊. 冬十月, 圍<槐谷城>. 命一吉찬<良質>領兵禦之.


22년 가을 9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겨울 10월에는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二十三年, 春二月, 巡撫國西諸城. 冬十月, 王薨, 葬<大陵>.[一云<什長陵{竹長陵}>??.]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2월, 왕이 서쪽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대릉[죽장릉이라고도 한다.]에 장사지냈다.


○<儒禮>尼師今立,[古記第三, 第十四, 二王同諱<儒理>, 或云<儒禮>, 未知孰是.] <助賁王>長子. 母<村{朴}>??氏, 葛文王<奈音>之女. 嘗夜行, 星光入口, 因有娠. 載誕之夕, 異香滿室.


趙炳舜. 『三國史節要』.

유례 이사금[고기에는 제 3대, 제 14대의 두 왕의 이름을 똑같이 유리 혹은 유례라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분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씨이고, 갈문왕 나음의 딸이었다. 그녀는 에전에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임신이 되었다. 유례를 낳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었다.


○二年, 春正月, 謁始祖廟. 二月, 拜伊찬<弘權>爲舒弗邯, 委以機務.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2월, 이찬 홍권을 서불한에 임명하고 중요한 정무를 맡겼다.


○三年, 春正月, <百濟>遣使請和. 三月, 旱.


3년 봄 정월,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요청하였다.

3월, 가뭄이 들었다.


○四年, 夏四月, <倭>人襲<一禮部{一禮郡}??>, 縱火燒之, 虜人一千而去.


李丙燾.

「북한본」.

4년 여름 4월,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1천 명을 잡아 갔다.


○六年, 夏五月, 聞<倭>兵至, 理舟楫, 繕甲兵.


6년 여름 5월, 왜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였다.


○七年, 夏五月, 大水, <月城>頹毁.


7년 여름 5월, 홍수가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八年, 春正月, 拜<末仇>爲伊伐찬. <末仇>忠貞, 有智略, 王常訪問政要.


8년 봄 정월, 말구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말구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았다. 왕은 자주 그를 찾아가서 정사의 요령을 물었다.


○九年, 夏六月, <倭>兵攻陷<沙道城>, 命一吉찬<大谷>, 領兵救完之. 秋七月, 旱. 蝗.


9년 여름 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날씨가 가물었다.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十年, 春二月, 改築<沙道城>, 移<沙伐州>豪民八十餘家.


10년 봄 2월,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의 호민 80여 호를 옮겨 살도록 하였다.


○十一年夏, <倭>兵來攻<長峰城>, 不克. 秋七月, <多沙郡>進嘉禾.


11년, 여름에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하였으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十二年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 舒弗邯<弘權>對曰: "吾人不習水戰, 冒{??}??險遠征, 恐有不測之危. 況<百濟>多詐, 常有呑서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에 왕이 신하에게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백제와 우리가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 계획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서불한 홍권이 "우리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모험삼아 원정을 하는 경우에는 예상 밖의 위험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백제는 사술이 많고, 항상 우리 나라를 병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옳다"고 말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以<智良>爲伊찬, <長昕>爲一吉찬, <順宣>爲沙찬. <伊西古國>來攻<金城>, 我大擧兵防禦, 不能攘, 忽有異兵來, 其數不可勝紀. 人皆珥竹葉, 與我軍同擊賊破之, 後不知其所歸. 人或見竹葉數萬積於<竹長陵>. 由是, 國人謂先王以陰兵助戰也.


14년, 봄 정월, 지량을 이찬에, 장흔을 일길찬에, 순선을 사찬에 임명하였다.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우리 나라가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이를 방어하였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았는데 우리 군사와 함께 적군을 쳐부수고 난 후에는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수만 개의 댓잎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돌아가신 임금께서 하늘의 군사를 보내 전쟁을 도우셨다"고 말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京都大霧不辨人, 五月{日}??而霽. 冬十二月, 王薨.


趙炳舜. 『三國史節要』.

15년 봄 2월, 서울에 안개가 심하여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안개는 닷새 만에 개었다.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基臨>[一云<基丘{基立}>??.]尼師今立, <助賁>尼師今之孫也. 父<乞淑>用찬{伊찬}??.[一云: <乞淑>, <助賁>之孫也.] 性寬厚, 人皆稱之.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今西龍.

기림[기립이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걸숙 이찬이다.[걸숙은 조분의 손자라고도 한다.] 그는 성격이 관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二年, 春正月, 拜<長昕>爲伊찬,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祀始祖廟.


2년 봄 정월, 장흔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三年, 春正月, 與<倭>國交聘. 二月, 巡幸<比列忽>, 親問高年及貧窮者, 賜穀有??{差}??.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2월, 왕이 비열홀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자와 가난한 자를 직접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하였다.

3월,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


○五年, 春夏旱.


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七年, 秋八月, 地震. 泉湧. 九月, 京都地震, 壞民屋, 有死者.


7년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샘물이 솟아 올랐다.

9월, 서울에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十年, 復國號<新羅>.


10년, 국호를 다시 신라로 하였다.


○十三年, 夏五月, 王寢疾彌留, 赦內外獄囚. 六月, 王薨.


13년 여름 5월, 왕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6월, 왕이 별세하였다.


○<訖解>尼師今立, <奈解王>孫也. 父<于老>角干. 母<命元>夫人, <助賁王>女也. <千老{于老}>??事君有功, 累爲舒弗邯, 見<訖解>狀貌俊異, 心膽明敏, 爲事異於常流. 乃謂諸侯曰: "興吾家者, 必此兒也." 至是, <基臨>薨, 無子. 群臣議曰: "<訖解>幼, 有老成之德." 乃奉立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해왕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로 각간이다. 그의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의 딸이다. 우로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여러 번 서불한이 되었다. 그는 흘해의 용모가 준수하며,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다. "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이 때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라 하고 그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


○二年, 春正月, 以<急利>爲阿찬, 委以政要,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親杞{祀}??始祖廟.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에 급리를 아찬으로 삼아 중요한 정사를 맡기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三年, 春三月, <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阿찬<急利>女送之.


3년 봄 3월,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의 혼처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四年, 秋七月, 旱. 蝗. 民飢, 發使救恤之.


4년 가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특사를 보내 그들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五年, 春正月, 拜阿찬<急利>爲伊찬. 二月, 重修官{宮}??闕, 不雨乃止.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정월, 아찬 급리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궁궐을 중수하였는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이를 중단하였다.


○八年, 春夏旱. 王親錄囚, 多原之.


8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많이 석방하였다.


○九年, 春二月, 下令: 向以旱災, 年不順成. 今則土膏맥起{土脈膏起}??, 農事方始, 凡所勞民之事, 皆停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봄 2월에 왕이 "지난 해에는 가뭄으로 농사가 잘 되지 못하였다. 이제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돌아 농사가 바야흐로 시작되었으니 백성들을 노역시키는 일을 모두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21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聘<百濟>. 三月, 雨雹. 夏四月, 隕霜.


28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백제를 예방하였다.

3월,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三十五年, 春二月, <倭>國遣使請婚, 辭以女旣出嫁. 夏四月, 暴風拔宮南大樹.


35년 봄 2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 청혼하였으나, 딸이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대궐 남쪽의 큰 나무가 뽑혔다.


○三十六年, 春正月, 拜<康世>爲伊伐찬. 二月, <倭>王移書絶交.


36년 봄 정월, 강세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2월, 왜왕이 절교한다는 글을 보내왔다.


○三十七年,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찬<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 走之.


37년,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한 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생각하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왕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그들을 격퇴하였다.


○三十九年, 宮井水暴溢.


39년, 대궐 우물이 솟아 넘쳤다.


○四十一年, 春三月, 관巢<月城>隅. 夏四月, 大雨浹旬, 平地水(+深)??三四尺, 漂沒官私屋舍, 山崩十三{三十}??所.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新本.

41년 봄 3월, 황새가 월성 모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여름 4월, 큰 비가 열흘 동안 내려 평지에 물이 서너 자씩 고이고, 관가와 민가가 유실되거나 물에 잠기고, 산이 열 세 군데 무너졌다.


○四十七年, 夏四月, 王薨.

三國史記卷第二.


47년 여름 4월, 왕이 별세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 끝




三國史記卷第三.



삼국사기 권 제 3


新羅本紀第三.

<奈勿>尼師今·<實聖>尼師今·<訥祗>麻立干·<慈悲>&麻辛{麻立干}??·<照知{炤知}>??麻立干.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신라본기 제 3

내물 이사금, 실성 이사금, 눌지 마립간,

자비 마립간, 소지 마립간.


○<奈勿>[一云<那密>.]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 <末仇>角于{角干}??; 母, <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末仇>, <末鄒{味鄒}>??尼師柰{尼師今}??兄{王}??弟也.]

○論曰: 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是故, <魯公>之取於<吳>, <晋侯>之有四姬, <陳司敗>·<鄭子産>深譏之. 若<新羅>, 則不止取同姓而已, 兄弟子姑姨從姉妹, 皆聘爲妻. 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 若<匈奴>之烝母報子, 則又甚於此矣.


趙炳舜. 『顯宗實錄字本』.『북한본』.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내물[나밀이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구도 갈문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말구 각간이며,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미추왕의 딸이다. 흘해가 죽고 아들이 없었므로 내물이 그 뒤를 이었다.[말구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다.]

저자의 견해 : 부인을 얻을 때, 같은 성의 여인을 얻지 않는 것은 동성과 타성의 구별을 철저히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유로 진 사패와 정 자산은, 노공이 오나라 왕실에서 아내를 얻고, 진후가 성이 같은 네 명의 첩을 가진 것을 몹시 비방하였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사촌이나, 고종, 이종 누이들까지도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과 우리 나라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예법을 기준으로 따지자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오랑캐들이 어미나 자식을 간음하는 것은 또한 이보다도 더욱 심한 경우이다.


○二年春, 發使撫問鰥寡孤獨, 各賜穀三斛. 孝悌有異行者, 賜職一級.


2년 봄에 왕이 특사를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그들에게 각각 곡식 3곡 씩을 주었다. 특별히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은 자들에게는 직위를 한 급씩 주었다.


○三年, 春二月, 親杞{祀}??始祖廟. 紫雲盤旋廟上, 神雀集於廟庭.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2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보랏빛 구름이 묘당 위에 감돌고 신기한 새가 시조묘의 뜰에 모였다.


○七年, 夏四月, 始祖廟庭樹, 連理.


7년 여름 4월, 시조묘 뜰에 있는 나뭇가지가 맞붙어 하나가 되었다.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년 여름 4월,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힌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 아래에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은 자신의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곧장 진격해왔다. 복병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허를 찌르니, 왜인이 대패하여 도주하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十一年, 春三月, <百濟>人來聘. 夏四月, 大水, 山崩十三所.


11년 봄 3월, 백제인이 와서 예방하였다.

여름 4월, 큰 홍수가 나서, 산이 열 세 군데 무너졌다.


○十三年春, <百濟>遣使, 進良馬二匹.


13년 봄,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바쳤다.


○十七年, 春夏大旱. 年荒民飢, 多流亡, 發使開倉름賑之.


17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자가 많이 생기자 왕은 특사를 보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十八年,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 答曰: "民者無常心, 故思則來, 두則去, 固其所也. 大王不患民之不安, 而責寡人, 何其甚乎?" <百濟>聞之, 不復言. 夏五月, 京都雨魚.


18년, 백제 독산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 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왕은 "두 나라가 화목하여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지금 대왕은 우리 나라에서 도망간 백성들을 받아 들였다. 이는 화친하자는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 보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왕은 "백성이란 항시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왕이 그들을 돌보아 주면 오고, 힘들게 하면 가나니,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대왕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책망함이 어찌 이토록 심한가?"라고 대답하였다.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여름 5월, 서울에 비가 왔는데 물고기가 빗속에 섞여 떨어졌다.


○二十一年, 秋七月, <夫沙郡>進一角鹿. 大有年.


21년 가을 7월, 부사군에서 뿔이 하나인 사슴을 진상하였다. 대풍년이 들었다.


○二十四年, 夏四月, <楊山>有小雀, 生大鳥.


24년 여름 4월, 양산에서 뱁새가 황새를 낳았다.


○二十六年, 春夏旱, 年荒民飢. 遣<衛頭>入<符秦{부秦}>??, 貢方物. <符堅{부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顯宗實錄字本』.

26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위두를 부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이 위두에게 물었다.

"그대가 해동의 사정을 이야기함에 있어, 사용하는 언어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위두가 대답했다.

"이는 또한 중국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명칭과 호칭도 바뀌는 법이니, 오늘날의 언어가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까?"


○三十三年, 夏四月, 京都地震. 六月又震. 冬, 無氷.


33년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6월에 또 지진이 있었고,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았다.


○三十四年, 春正月, 京都大疫. 二月, 雨土. 秋七月, 蝗. 穀不登.


34년 봄 정월,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월, 흙비가 내렸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겼다.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찬<大西知>子<實聖>爲質.


37년 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왔다.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왕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38년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四十年, 秋八月, <靺鞨>侵北邊, 出師大敗之於<悉直>之原.


40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보내 실직 평야에서 그들을 대파하였다.


○四十二年, 秋七月, 北邊<何瑟羅>, 旱蝗. 年荒民飢. 曲赦囚徒, 復一年租調.


42년 가을 7월, 북쪽 변방 하슬라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그 지방의 죄수를 특사하고, 1년 간의 세금을 면제하여 주었다.


○四十四年, 秋七月, 飛蝗蔽野.


44년 가을 7월, 날아 다니는 메뚜기 떼가 들을 뒤덮었다.


○四十五年, 秋八月, 星패于東方. 冬十月, 王所嘗御內廐馬, 궤膝流??{淚}??哀鳴.


趙炳舜. 『三國史節要』.

45년 가을 8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겨울 10월, 왕이 타고 다니던 궁중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다.


○四十六年, 春夏, 旱. 秋七月, <高句麗>質子<實聖>還.


4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 고구려에 인질로 가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四十七年, 春二月, 王薨.


47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實聖>尼師今立, <閼智>裔孫, <大西知>伊찬之子. 母, <伊利>夫人[伊一作企.], <昔登保>阿干之女. 妃, <味鄒王>女也. <實聖>身長七尺五寸, 明達有遠識. <奈勿>薨, 其子幼少, 國人立<實聖>繼位.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伊'를 '企'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별세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원년 3월,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二年, 春正月, 以<未斯品>爲舒弗邯, 委以軍國之事. 秋七月, <百濟>侵邊.


2년 봄 정월,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春二月, 親謁始祖廟.


3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四年,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4년 여름 4월,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하였으며, 다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다.


○五年, 秋七月, 國西蝗害穀. 冬十月, 京都地震. 十一月, 無氷.


5년 가을 7월, 서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六年, 春三月, <倭>人侵東邊. 夏六月, 又侵南邊, 奪掠一百人.


6년 봄 3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여름 6월에 다시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1백 명을 잡아갔다.


○七年, 春二月, 王聞: <倭>人於<對馬島>置營, 貯以兵革資粮, 以謀襲我, 我欲先其未發, 揀精兵擊破兵儲. 舒弗邯<未斯品>曰: "臣聞: '兵凶器, 戰危事.' 況涉巨浸以伐人, 萬一失利, 則悔不可追, 不若依험設關, 來則禦之, 使不得侵猾, 便則出而禽之, 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 策之上也." 王從之.


7년 봄 2월,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 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라고 들었습니다. 황차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난한 지형을 찾아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올 때 이를 막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남을 끌어 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책략 중에는 상책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十一年, 以<奈勿王>子<卜好>, 質於<高句麗>.


11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十二年, 秋八月, 雲起<狼山>, 望之如樓閣, 香氣郁然, 久而不歇. 王謂: 是必仙靈降遊, 應是福地. 從此後, 禁人斬伐樹木. 新成<平壤州>大橋.


12년 가을 8월, 낭산에 구름이 피어올라 누각처럼 보였고, 향기가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이는 틀림없이 신선이 내려와 노는 것이니 응당 복스러운 땅이라고 하여, 그후로 이 곳에서 벌목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평양주 대교를 새로 축성하였다.


○十四年, 秋七月, 大閱於<穴城>原, 又御<金城>南門觀射. 八月, 與<倭>人戰於<風島>, 克之.


14년 가을 7월, 왕이 혈성 벌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또한 금성 남문에 행차하여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十五年, 春三月, 東海邊獲大魚, 有角, 其大盈車. 夏五月, <吐含山>崩, 泉水湧, 高三丈.


15년 봄 3월, 동해변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있고 수레에 가득 찰 만큼 컸다.

여름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세 길 높이로 솟아 올랐다.


○十六年, 夏五月, 王薨.


16년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訥祗>麻立干立,[<金大問>云: "麻立者, 方言, 謂궐也. 궐謂함操{標}??, 准位而置, 則王궐爲主, 臣궐列於下, 因以名之."] <奈勿王>子也. 母, <保反>夫人[一云<內禮吉怖>], <味鄒王>女也; 妃, <實聖王>之女. <奈勿王>三十七年, 以<實聖>質於<高句麗>, 及<實聖>還爲王, 怨<奈勿>質己於外國, 欲害其子以報怨. 遣人招在<高句麗>時相知人, 因密告: 見<訥祗>則殺之. 遂令<訥祗>往, 逆於中路. <麗>人見<訥祗>, 形神爽雅, 有君子之風, 遂告曰: "爾國王使我害君, 今見君, 不忍賊害." 乃歸. <訥祗>怨之, 反弑王自立.


李丙燾. 「三國遺事」 南解王條.

눌지 마립간[김 대문은 "'마립'은 방언으로는 '말뚝'인데, 말뚝은 곧 함조를 뜻한다. 이는 직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즉, 왕 말뚝이 중심이 되고 신하 말뚝은 그 아래에 나열한다. 이를 빌어와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라고 말했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내물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반부인[내례길포라고도 한다.]이며, 미추왕의 딸이다.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고나서 내물이 자기를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였다. 그는 내물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와 은밀히 그에게 "눌지를 보거든 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눌지를 가게하여 도중에서 그와 마주치도록 하였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가 쾌활하고 정신이 고상하여 군자의 기풍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대의 국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도록 하였으나 이제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일 수 없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눌지가 이를 원망하여 도리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二年, 春正月, 親謁始祖廟. 王弟<卜好>, 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 秋, 王弟<未斯欣>, 自<倭>國逃還.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참배하였다. 왕의 아우 복호가 고구려에서 내마 제상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왔다.


○三年, 夏四月, <牛谷>水湧.


3년 여름 4월, 우곡에서 물이 솟아 올랐다.


○四年, 春夏大旱. 秋七月, 隕霜殺穀, 民飢, 有賣子孫者. 慮囚原罪.


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심하였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고 백성이 굶주려 자손을 파는 자가 있었다. 죄수를 재심사하여 석방하였다.


○七年, 夏四月, 養老於<南堂>, 王親執食, 賜穀帛有差.


7년 여름 4월, 남당에서 노인들을 대접하였는데, 왕이 직접 음식을 집어 주고, 곡식과 비단을 등급에 따라 하사하였다.


○八年, 春二月, 遣使<高句麗>修聘.


8년 봄 2월,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하였다.


○十三年, 新築<矢堤>, 岸長二千一百七十步.


13년, 새로 시제를 축성하였는데, 둑의 길이가 2천1백7십보였다.


○十五年, 夏四月, <倭>兵來侵東邊, 圍<明活城>, 無功而退. 秋七月, 霜雹殺穀.


15년 여름 4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명활성을 포위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갔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었다.


○十六年春, 穀貴, 人食松樹皮.


16년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소나무 껍질을 먹었다.


○十七年, 夏五月, <未斯欣>卒, 贈舒弗邯. 秋七月, <百濟>遣使請和, 從之.


17년 여름 5월, 미사흔이 사망하자 그에게 서불한을 추증하였다.

가을 7월,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요청하였으므로 이에 응하였다.


○十八年, 春二月, <百濟>王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王以黃金明珠, 報聘<百濟>.


18년 봄 2월,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왔다.

가을 9월, 백제왕이 다시 흰 매를 보내 왔다.

겨울 10월, 왕이 황금과 명주로 백제에 답례하였다.


○十九年, 春正月, 大風拔木. 二月, 修葺歷代園陵. 夏四月, 祀始杞{祖}??廟.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봄 정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2월, 역대의 능원을 보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二十年, 夏四月, 雨雹. 慮囚.


20년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二十二年, 夏四月, <牛頭郡>山水暴至, 漂流五十餘家. 京都大風雨雹. 敎民牛車之法.


22년 여름 4월, 우두군에서 산골물이 갑자기 불어나 50여 호가 떠내려 갔다. 서울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 백성들에게 우차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二十四年, <倭>人侵南邊, 掠取生口而去. 夏六月, 又侵東邊.


24년,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약탈해갔다.

여름 6월에 동쪽 변경을 다시 침범하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史勿縣>進長尾白雉, 王嘉之, 賜縣吏穀.


25년 봄 2월, 사물현에서 흰빛깔의 꼬리가 긴 꿩을 진상하였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그 현의 관리에게 곡식을 하사하였다.


○二十八年, 夏四月, <倭>兵圍<金城>十日, 糧盡乃歸. 王欲出兵追之, 左右曰: "兵家之說曰: '窮寇勿追.' 王其舍之." 不聽, 率數千餘騎, 追反{至??/及??}於<獨山>之東合戰, 爲賊所敗, 將士死者過半. 王蒼黃棄馬上山, 賊圍之數重. 忽昏霧, 不辨咫尺, 賊謂有陰助, 收兵退歸.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

28년 여름 4월,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려 하자 측근들이 "병가의 말에 '궁한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하였으니, 왕은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 이르러 접전하였다. 왕이 이 전투에서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적이 여러 겹으로 산을 포위하였다. 이 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三十四年, 秋七月, <高句麗>邊將, 獵於<悉直>之原, <何瑟羅>城主<三直>, 出兵掩殺之. <麗>王聞之怒, 使來告曰: "孤與大王, 修好至歡也, 今出兵殺我邊將, 是何義耶?" 乃興師, 侵我西邊, 王卑辭謝之, 乃歸.


34년 가을 7월,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 벌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하슬라성주 삼직이 군사를 보내 그를 습격하여 죽였다.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분노하여 사신을 보내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어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제 군사를 보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였으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고,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 나라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자 그들이 돌아갔다.


○三十六年, 秋七月, <大山郡>進嘉禾.


36년 가을 7월, 대산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三十七年, 春夏旱. 秋七月, 群狼入<始林>.


37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 이리떼가 시림에 들어 왔다.


○三十八年, 秋七月, 霜雹害穀. 八{七}??月, <高句麗>侵北邊.


趙炳舜. 『三國史節要』.

38년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었다.

8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十九年, 冬十月, <高句麗>侵<百濟>, 王遣兵救之.


39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四十一年, 春二月, 大風拔木. 夏四月, 隕霜傷麥.


41년 봄 2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상하게 하였다.


○四十二年, 春二月, 地震, <金城>南門自毁. 秋八月, 王薨.


42년 봄 2월, 지진이 발생하여 금성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慈悲>麻立干立, <訥祗王>長子, 母<金>氏, <實聖>之女也.


자비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눌지왕의 맏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이며, 실성왕의 딸이다.


○二年, 春二月, 謁始祖廟. 夏四{五}??月, <倭>人以兵船百餘소, 襲東邊, 進圍<月城>, 四面矢石, 如雨. 王城守, 賊將退, 出兵擊敗之, 追北至海口, 賊溺死者, 過半.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여름 4월,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동원하여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이어서 월성을 포위하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왕성이 무너지지 않자 적은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군사를 보내 적을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바다 어구까지 추격하였다. 적병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四年, 春二月, 王納舒弗邯<未斯欣>女, 爲妃. 夏四月, 龍見<金城>井中.


4년 봄 2월, 왕이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다.


○五年, 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5년 여름 5월,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六年, 春二月, <倭>人侵<감良城{삽良城}>??, 不克而去, 王命<伐知>·<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 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역, 緣邊築二城. 秋七月, 大閱.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봄 2월,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벌지와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대승하였다. 왜인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은 변경의 두 곳에 성을 쌓았다.

가을 7월,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八年, 夏四月, 大水, 山崩一十七所. 五月, <沙伐郡>, 蝗.


8년 여름 4월, 홍수가 나서 산이 열 일곱 군데 무너졌다.

5월, 사벌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十年春, 命有司修理戰艦. 秋九月, 天赤, 大星自北流東南.


10년 봄, 유사에게 명하여 전함을 수리하였다.

가을 9월, 하늘에 붉은 빛이 돌았고,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갔다.


○十一年春, <高句麗>與<靺鞨>, 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泥河>一名<泥川>.].


11년 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 하슬라 사람으로서 15세 이상되는 자를 징발하여 니하[니하를 니천이라고도 한다.]에 성을 쌓았다.


○十二年, 春正月, 定京都坊里名. 夏四月, 國西大水, 漂毁民戶. 秋七月, 王巡撫經水州郡.


12년 봄 정월, 서울의 방과 리의 이름을 정하였다.

여름 4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 가고 허물어졌다.

가을 7월, 왕이 수해를 당한 주와 군을 순행하여 위문하였다.


○十三年, 築<三年山城>.[<三年>者, 自興役始終, 三年訖功, 故名之.]


13년, 삼년산성[삼년이란 공사를 시작한지 삼년만에 끝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을 쌓았다.


○十四年, 春二月, 築<芼老城>. 三月, 京都地裂, 廣무二(+十}??丈, 濁水湧. 冬十月, 大疫.


李丙燾. 新本.

14년 봄 2월, 모로성을 쌓았다.

3월,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갈라진 틈이 2장이고 혼탁한 물이 솟아 올랐다.

겨울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六年, 春正月, 以阿찬<伐智>·級찬<德智>爲左右將軍. 秋七月, 葺<明活城>.


16년 봄 정월,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 장군에 임명하였다.

가을 7월, 명활성을 보수하였다.


○十七年, 築<一牟>·<沙尸>·<廣石>·<沓達>·<仇禮>·<坐羅>等城. 秋七月, <高句麗>王<巨連>親率兵, 攻<百濟>. <百濟>王<(+餘)慶>??, 遣子<文周>求援, 王出兵救之, 未至, <百濟>已陷, <(+餘)慶>??亦被害.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일모·사시·광석·답달·구례·좌라 등에 성을 쌓았다.

가을 7월, 고구려왕 거련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 경이 아들 문주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어 구원토록 했는데,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함락되었고 또한 경이 죽었다.


○十八年, 春正月, 王移居<明活城>.


18년 봄 정월, 왕이 명활성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 거주하였다.


○十九年, 夏六月, <倭>人侵東邊. 王命將軍<德智>擊敗之, 殺虜二百餘人.


19년 여름 6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 왕이 장군 덕지를 시켜 그들을 공격토록 하였다. 그는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二十年, 夏五月, <倭>人擧兵, 五道來侵, 竟無功而還.


20년 여름 5월,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다섯 길로 들어와 침범했으나 결국은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갔다.


○二十一年, 春二月, 夜赤光, 如匹練, 自地至天. 冬十月, 京都地震.


21년 봄 2월, 밤에 붉은 빛이 땅에서 하늘까지 뻗쳤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였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二十二年, 春二月三日, 王薨.


22년 봄 2월 3일, 왕이 별세하였다.


○<炤知{照知}>??[一云<毗處>.]麻立干立, <慈悲王>長子. 母<金>氏, 舒弗邯<未斯欣>之女, 妃<善兮>夫人, <乃宿>伊伐찬女也. <炤知{照知}>??幼有孝行, 謙恭自守, 人咸服之.


趙炳舜. 『三國史記』 목록.趙炳舜. 『三國史記』 목록.

소지[비처라고도 한다.]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며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다. 왕비는 선혜부인이며 내숙 이벌찬의 딸이다. 소지는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웠고, 겸손함과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元年, 大赦, 賜百官爵一級.


원년,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모든 관리들에게 벼슬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二年, 春二月, 祀始祖廟. 夏五月, 京都旱. 冬十月, 民飢, 出倉穀賑給之. 十一月, <靺鞨>侵北邊.


2년 봄 2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5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10월,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나누어 주었다.

11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春二月, 幸<比列城>, 存撫軍士, 賜征포{袍}??. 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2월, 왕이 비열성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문하고 군복을 하사하였다.

3월,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 와서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 및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방어하였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그들을 니하 서쪽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四年, 春二月, 大風拔木. <金城>南門火. 夏四月, 久雨. 命內外有司慮囚. 五月, <倭>人侵邊.


4년 봄 2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금성 남문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여름 4월, 오랫 동안 비가 내렸다. 왕이 중앙과 지방의 유사들에게 명령하여 죄수를 재심사하도록 하였다.

5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五年, 夏四月, 大水. 秋七月, 大水. 冬十月, 幸<一善>界, 存問구災百姓, 賜穀有差. 十一月, 雷. 京都大疫.


5년 여름 4월, 큰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큰 홍수가 났다.

겨울 10월, 왕이 일선 지방에 행차하여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재해의 정도에 따라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11월, 우레가 있었다.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六年, 春正月, 以<烏含>爲伊伐찬. 三月, 土星犯月. 雨雹. 秋七月, <高句麗>侵北邊, 我軍與<百濟>, 合擊於<母山城>下, 大破之.


6년 봄 정월, 오함을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3월, 토성이 달을 범하고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리 군사와 백제 군사가 모산성 아래에서 함께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七年, 春二月, 築<仇伐城>. 夏四月, 親祀始祖廟, 增置守廟二十家. 五月, <百濟>來聘.


7년 봄 2월, 구벌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묘지기 20호를 더 두었다.

5월, 백제가 예방해왔다.


○八年, 春正月, 拜伊찬<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屈山>二城. 二月, 以<乃宿>爲伊伐찬, 以參國政. 夏四月, <倭>人犯邊. 秋八月, 大閱於<狼山>之南.


8년 봄 정월,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일선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성과 굴산성의 두 성을 개축하였다.

2월, 내숙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 낭산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는 큰 행사를 벌였다.


○九年, 春二月, 置神宮於<奈乙>. <奈乙>, 始祖初生之處也. 三月, 始置四方郵驛, 命所司修理官道. 秋七月, 葺<月城>. 冬十月, 雷.


9년 봄 2월, 내을에 신궁을 설치하였다. 내을은 시조가 처음 탄생한 곳이다.

3월,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소관 관청으로 하여금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월성을 수리하였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十年, 春正月, 王移居<月城>. 二月, 幸<一善郡>, 存問鰥寡孤獨, 賜穀有差. 三月, 至自<一善>, 所歷州郡獄囚, 除二死悉原之. 夏六月, <東陽>獻六眼龜, 腹下有文字. 秋七月, 築<刀那城>.


10년 봄 정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2월, 왕이 일선군에 행차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하였다.

3월, 왕이 일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중의 주와 군의 죄수들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여름 6월, 동양 지방에서 여섯 개의 눈을 가진 거북을 헌납하였다. 그 거북의 배에 글자가 있었다.

가을 7월, 도나성을 쌓았다.


○十一年, 春正月, 驅游食百姓歸農. 秋九月, <高句麗>襲北邊至<戈峴>, 冬十月, 陷<狐山城>.


11년 봄 정월,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농촌으로 돌려 보냈다.

가을 9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과현에 이르렀고, 겨울 10월에는 호산성을 점령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重築{修}??<鄙羅城{鄒羅城}>??. 三月, 龍見<鄒羅井>. 初開京師市??{肆}??, 以通四方之貨.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 2월, 비라성을 다시 쌓았다.

3월, 추라정에 용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十四年, 春夏旱, 王責己, 減常膳.


1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먹는 음식을 줄이도록 하였다.


○十五年, 春三月, <百濟>王<牟大>遣使請婚, 王以伊伐찬<比智>女, 送之. 秋七月, 置<臨海>·<長嶺>二鎭, 以備<倭>賊.


15년 봄 3월,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다. 왕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

가을 7월, 임해, 장령의 두 진(鎭)을 설치하여 왜적을 방비하였다.


○十六年, 夏四月, 大水. 秋七月, 將軍<實竹>等, 與<高句麗>戰<薩水>之原, 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兵圍之, <百濟>王<牟大>遣兵三千, 救解圍.


16년 여름 4월,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 벌에서 고구려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견아성을 지키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가 그들을 포위했다. 백제왕 모대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고 그들을 구원하였다.


○十七年, 春正月, 王親祀神宮. 秋八月, <高句麗>圍<百濟><雉壤城>, <百濟>請救. 王命將軍<德智>, 率兵以救之, <高句麗>衆潰. <百濟>王遣使來謝.


17년 봄 정월,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가을 8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궤멸하였다.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였다.


○十八年, 春二月, <加耶國>送白雉, 尾長五尺. 三月, 重修宮室. 夏五月, 大雨, <閼川>水漲, 漂沒二百餘家. 秋七月, <高句麗>來攻<牛山城>, 將軍<實竹>出擊, <泥河>上破之. 八月, 幸南郊觀稼.


18년 봄 2월, 가야국이 꼬리의 길이가 다섯 자인 흰 꿩을 보내 왔다.

3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큰 비가 내리고 알천의 물이 불어 2백여 호가 잠기거나 떠내려 갔다.

가을 7월,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였다. 장군 실죽이 출동하여 니하에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8월, 왕이 남쪽 교외에 나가 농사를 시찰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倭>人犯邊. 秋七月, 旱蝗. 命群官, 擧才堪牧民者各一人. 八月, <高句麗>攻陷<牛山城>.


19년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왕이 모든 관리들에게 명하여 지방관이 될만한 능력이 있는 자를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였다.

8월,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二十二年, 春三月, <倭>人攻陷<長峰鎭>. 夏四月, 暴風拔木. 龍見<金城>井. 京都黃霧四塞. 秋九月, 王幸<捺巳郡{捺已郡}>??. 郡人<波路>有女子, 名曰<碧花>, 年十六歲, 眞國色也. 其父衣之以錦繡, 置여{轝}??冪以色絹, 獻王. 王以爲饋食, 開見之, 감{斂}??然??{幼}??女, 怪而不納. 及還宮, 思念不已, 再三微行, 往其家幸之. 路經<古타郡>, 宿於老구之家. 因問曰: "今之人, 以國王爲何如主乎?" 구對曰: "衆以爲聖人, 妾獨疑之. 何者? 竊聞王幸<捺已>之女, 屢微服而來. 夫龍爲魚服, 爲漁者所制. 今王以萬乘之位, 不自愼重, 此而爲聖, 孰非聖乎?" 王聞之大慙, 則潛逆其女, 置於&別室至??{生}??一子. 冬十一月, 王薨.

三國史記卷第三.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허성도.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今西龍은 '別室至??'을 '別室至生'으로 교감하였다.

22년 봄 3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가을 9월, 왕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 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 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 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3 끝




三國史記卷第四.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삼국사기 권 제 4

수충 정난 정국 찬화 동덕 공신, 개부 의동삼사, 검교 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 이례부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第四.

<智證>麻立干·<法興王>·<眞興王>·<眞智王>·<眞平王>.


신라본기 제 4

지증 마립간,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勿王{奈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照知&王{麻立干}>??之再從弟也. 母, <金>氏<鳥生>夫人, <訥祗王>之女; 妃, <朴>氏<延帝>夫人, <登欣>伊찬女. 王體鴻大, 瞻{膽}??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曰『左』·『漢』, <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토"·<匈奴>語"撑犁孤塗"等. 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記」.

「북한본」은 '照知王'을 '炤知王'으로 교감.『북한본』.

지증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이다.[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라고도 한다.] 그는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 아우가 된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이며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연제부인이며 등흔 이찬의 딸이다. 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다. 전 임금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의 왕 가운데 거서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하나이며, 차차웅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하나, 이사금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열 여섯, 마립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넷이다. 신라 말년의 명유 최 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에서는 이들을 모두 왕이라고 불렀고, 거서간 등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 용어가 천박하여 부를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길 것인가? 「좌전」과 「한서」는 중국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오히려 초나라 용어인 '곡오도(곡於토)'와 흉노 용어인 '탱리고도(撑梨孤塗)'라는 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제 신라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방언을 그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또한 옳다고 생각한다.


○三{二}??年, 春三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3월, 순장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을 순장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폐지되었다.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주주와 군주에게 일일이 명령하여 농사를 권장토록 하였다.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기 시작하였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 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4년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한 채 사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로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는 신라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은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의 군주를 살펴보면, 모두 '제(帝)'나 '왕'으로 칭호를 삼았는데,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오직 방언으로 왕호를 삼았을 뿐 아직도 존귀한 칭호를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왕이 이를 따랐다.


○五年, 夏四月, 制喪服法頒行. 秋九月, 徵役夫, 築<波里>·<彌實>·<珍德>·<骨火>等十二城.


5년 여름 4월,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여 반포 시행하였다.

가을 9월, 일할 사람을 징발하여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의 열두 개 성을 쌓았다.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 冬十一月, 始命所司藏氷, 又制舟楫之利.


李丙燾. '軍主之名, 始於此'라는 기록은 伐休尼師今 2년조에도 보인다. 그러나 이곳의 기록이 맞는다.

6년 봄 2월, 왕이 직접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하였다. 군주라는 칭호는 이에서 시작되었다.

겨울 11월, 처음으로 소관 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또한 선박의 이용을 제도화 하였다.


○七年, 春夏旱, 民饑, 發倉賑救.


7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十年, 春正月, 置京都東市. 三月, 設檻穽, 以除猛獸之害. 秋七月, 隕霜殺菽.


10년 봄 정월, 서울에 동시장을 설치하였다.

3월, 나무 울타리와 함정을 만들어 맹수의 피해를 없애도록 하였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十一年, 夏五月, 地震壞人屋, 有死者. 冬十月, 雷.


11년 여름 5월,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쓰러지고 사람이 죽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험不服. 伊찬<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獅}??子, 分載戰船, 저{抵}??其國海岸, 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置小京於<阿尸村>, 秋七月, 徙六部及南地人戶, 充實之.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 始於此.


15년 봄 정월,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하여, 이 곳에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姓<募>, 名<泰{秦}>??], <智證王>元子. 母, <延帝>夫人; 妃, <朴>氏<保刀>夫人. 王身長七尺, 寬厚愛人.


李丙燾. 「三國遺事」 王曆.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책부원귀」에는 성이 '모'이며, 이름은 '태'라고 되어 있다.]이며,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연제부인이다. 그의 왕비는 박씨이며 보도부인이다. 왕은 키가 7척이고, 성품이 관대하여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三年, 春正月, 親祀神宮. 龍見<楊山>井中.


3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양산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다.


○四年, 夏四月, 始置兵部.


4년 여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五年, 春二月, 築<株山城>.


5년 봄 2월, 주산성을 쌓았다.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7년 봄 정월, 법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관리들의 관복을 제정하였다. 붉은 빛과 자줏빛으로 등급을 표시하였다.


○八年, 遣使於<梁>, 貢方物.


8년, 사신을 양(梁)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찬<比助夫>之妹送之.


9년 봄 3월, 가야국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다.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냈다.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11년 가을 9월, 왕이 남쪽 국경을 순행하면서 국토를 개척하였다. 가야국왕이 와서 회견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以大阿찬<伊登>, 爲<沙伐州>軍主.


12년 봄 2월,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임명하였다.


○十五年, 肇行佛法. 初<訥시王{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句麗>至<一善郡>, 郡人<毛禮>, 於家中作窟室安置. 於時, <梁>遣使賜衣着香物,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편問. <墨胡子>見之, 稱其名目曰: "此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未有過於三寶, 一曰佛타,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 時, 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궤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 俄而不知所歸. 至<毗處王>時, 有<阿道>[一作<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至是, 王亦欲興佛敎, 群臣不信, 첩첩騰口舌, 王難之. 近臣<異次頓>[或云<處道>.]奏曰: "請斬小臣, 以定衆議." 王曰: "本欲興道, 而殺不(-古)??辜, 非也." 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 無憾." 王於是召群臣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異次頓>獨曰: "今群臣之言, 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 王曰: "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此據<金大問>『계林雜傳』所記書之. ??{與}??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所錄, 殊異.]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今西龍.

15년, 처음으로 불법이 시행 되었다. 처음 눌지왕 때, 중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왔었다. 그 곳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그를 편히 모셨다. 이 때 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을 주었으나 임금이나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관리에게 향을 주어 여러 곳을 다니며 물어보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말해주면서 "이것을 태우면 향기가 피어나고, 그 정성이 신성한 곳에 이르게 되오. 소위 신성이란 3보(三寶)를 일컫는 것이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요, 세째는 승가(僧伽)라오. 만일 이것을 태우며 원하는 바를 기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그 때 왕의 딸이 병으로 위독했었다. 왕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태우며 서원하게 하였다. 왕녀의 병이 치유되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묵호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가 물러 나와 모례를 보고 예물을 주면서 "나는 지금 갈 데가 있어 작별코자 한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에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 때가 되어 아도['阿道'를 '我道'로 쓰기도 한다.] 화상이라는 사람이 시자 세 사람과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그는 몇 년 동안 살다가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 그의 시자 세 사람이 그 집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가끔 불법을 신봉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 때에 이르러 왕도 역시 불교를 흥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불교를 믿지않고 반대가 많았으므로 왕도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근신 이 차돈이[혹은 처도라고도 한다.] 왕에게 "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분분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소서"라고 말했다. 왕은 "본래 불도를 흥하게 하려는 것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차돈은 "만약 불도가 시행된다면 소신이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요즈음 중의 무리를 보면,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였으며, 말하는 것이 기괴하니, 이는 영원히 진실한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들을 방치한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저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차돈은 홀로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들어보면,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강경하여 이를 꺾지 못하겠고, 너만이 혼자 견해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두 편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형리로 하여금 그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을 앞두고 말했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일 부처의 영험이 있다면 내가 죽고나서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을 벤 곳에서 피가 솟아 나왔는데, 그 색깔이 젖빛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하였다.[이 기록은 김 대문의 「계림잡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한내마 김 용행이 지은 아도 화상비의 기록과는 현격하게 다르다.]


○十六年, 下令禁殺生.


16년,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十八年, 春三月, 命有司修理제防. 夏四月, 拜伊찬<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 始於此, 如今之宰相.


18년 봄 3월, 유사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 이찬 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고,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이라는 벼슬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이는 지금의 재상과 같다.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19년, 금관국주 김 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二十一年, 上大等<哲夫>卒.


21년, 상대등 철부가 사망하였다.


○二十三年, 始稱年號, 云<建元>元年.


23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건원 원년이라고 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敎: 許外官携家之任.


25년 봄 정월, 외관들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해도 좋다는 교서를 내렸다.


○二十七年, 秋七月, 王薨, 諡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峯.


27년 가을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眞興王>立. 諱<삼麥宗>[或作<深麥夫>.],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母, 夫人<金>氏, <法興王>之女; 妃, <朴>氏<思道>夫人. 王幼少, 王太后攝政.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이다.[혹은 심맥부라고도 한다.] 이 때 그의 나이 일곱살이었다. 그는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부인이며 법흥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元年, 八月, 大赦. 賜文武官爵一級. 冬十月, 地震. 桃李華.


원년 8월, 대사령을 내렸다. 문무관들에게 작위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복숭아 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二年, 春三月, 雪一尺. 拜<異斯夫>爲兵部令, 掌內外兵馬事. <百濟>遣使請和, 許之.


2년 봄 3월,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五年, 春二月, <興輪寺>成. 三月, 許人出家爲僧尼奉佛.


5년 봄 2월, 흥륜사가 준공되었다.

3월, 출가하여 중이 되어 불교를 믿는 것을 허락하였다.


○六年, 秋七月, 伊찬<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찬<居柒夫>等, 廣集文士, 비之修撰.


6년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人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朱珍}>??,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봄 2월, 고구려가 예와 함께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은 장군 주령을 보냈다. 주령은 정병 3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주령은 포로를 많이 잡아 왔으며 죽인 자도 매우 많았다.


○十年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 逸{送}??佛舍利. 王使百官奉迎<興輪寺>前路.


李丙燾. 「海東高僧傳」.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봄, 양 나라가 사신과 유학승 각덕 편에 부처의 사리를 보내 왔다. 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찬<異斯夫>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11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千勒{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 정월,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

3월, 왕이 순행 중에 낭성에서 묵으며,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초청하였다. 왕은 하림궁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각각 새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에 앞서 가야국의 가실왕이 열 두 달을 음률로 상징하는 12현금을 만들고, 우륵으로 하여금 이에 맞는 악곡을 짓게 했었다. 그러나 가야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 나라로 귀순해왔었다. 이에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고 하였다.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十三年, 王命<階古>·<法知{注知}>??·<萬德>三人, 學樂於<于勒>. <于勒>量其人之所能, 敎<階古>以琴, 敎<法知>以歌, 敎<萬德>以舞. 業成, 王命奏之曰: "與前<娘城>之音, 無異." 厚賞焉.


李丙燾. 「樂志」.

13년, 왕이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참작하여,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이 끝나자 왕이 그들로 하여금 연주하게 하고는, "전일 낭성에서 듣던 소리와 다름이 없다"라고 말하며, 후하게 상을 주었다.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興{新州}>??, 以阿찬<武力>爲軍主. 冬十月, 娶<百濟>王女, 爲小妃.


李丙燾. 「濟紀」.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2월, 왕이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 터에서 황색의 용이 나타났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궁궐을 고쳐 절을 짓고, 황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아 소비로 삼았다.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농>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찬<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趙炳舜. 『三國史節要』.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 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 復一年租調. 曲赦, 除二罪, 皆原之.


16년 봄 정월, 비사벌에 완산주를 신설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국경을 정하였다.

11월, 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와 교서를 내려, 순행했던 주와 군에 1년 간의 납세를 면제해주고, 해당 지방 죄수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十七年, 秋七月, 置<比列忽州>, 以沙찬<成宗>爲軍王{軍主}??.


今西龍.

17년 가을 7월,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 사찬 성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찬<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18년, 국원을 소경으로 만들었다.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하였다. 사찬 기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신주를 없애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 奈麻<身得>作砲弩上之, 置之城上.


19년 봄 2월,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으로 이사하게하여 국원을 충실하게 하였다. 내마 신득이 포와 노를 만들어 바쳤으므로, 이를 성 위에 설치하였다.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전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三}??百口. <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其生口, 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의 주민을 침탈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모반하였다.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이사부를 돕게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인솔하고 그 곳에 도착하니, 그들이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로를 평가하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왕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왕이 강력히 권하므로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사다함은 이들을 풀어주어 양민을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二十五年, 遣使<北齊>朝貢.


25년, 사신을 북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秋八月, 命阿찬<春賦>出守<國原>. 九月, 廢<完山州>, 置<大耶州>. <陳>遣使<劉思>與僧<明觀>, 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26년 봄 2월,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가을 8월, 아찬 춘부로 하여금 국원을 지키게 하였다.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를 설치하였다. 진 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중 명관을 보내와 예방하고, 불경 1천7백여 권을 보내 왔다.


○二一{十}??七年, 春二月, <祗園>·<實際>二寺成. 立王子<銅輪>爲王太子. 遣使於<陳>, 貢方物. <皇龍寺>畢功.


趙炳舜. 『三國史節要』.

27년 봄 2월, 지원사와 실제사 두 절이 준공되었다. 왕자 동륜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황룡사가 준공되었다.


○二十八年, 春三月, 遣使於<陳>, 貢方物.


28년 봄 3월,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二十九年, 改元<大昌>. 夏六月, 遣使於<陳>, 貢方物.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又廢<比列忽州>, 置<達忽州>.


29년,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다.

여름 6월,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또한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를 설치하였다.


○三十一年, 夏六月, 遣使於<陳>, 獻方物.


31년 여름 6월,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三十二年, 遣使於<陳>, 貢方物.


32년,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二{三}??十三年, 春正月, 改元<鴻濟>. 三月, 王太子<銅輪>卒. 遣使<北齊>朝貢. 冬十月二十日, 爲戰死士卒, 設八關筵會於外寺, 七日罷.


趙炳舜. 『三國史節要』.

33년 봄 정월, 연호를 홍제로 고쳤다.

3월, 왕태자 동륜이 사망하였다. 사신을 북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20일, 전사한 사졸을 위하여, 지방에 있는 절에서 팔관 연회를 열어 7일 만에 끝냈다.


○三十五年, 春三月, 鑄成<皇龍寺><丈六像>. 銅重三萬五千七斤, 鍍金重一萬一百九十八分.


35년 봄 3월, 황룡사의 장륙상의 주조가 끝났다. 구리의 중량이 3만 5천7근이었으며, 도금한 금의 중량이 1만 1백9십8푼이었다.


○三十六年, 春夏旱. <皇龍寺><丈六像>出淚至踵.


3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황룡사의 장륙상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발꿈치까지 내려왔다.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初, 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二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 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 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大子{竺乾太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安弘>法師入<隋>求法, 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 上『稜伽勝만經』及佛舍利. 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峯. 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효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


37년 봄, 처음으로 원화(源花)제도를 두었다.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 낼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친구들끼리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 거지를 살펴 본 후에 적절한 자를 천거하여 임용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선발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강권하였다. 준정은 남모가 취한 후에 그녀를 끌어 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모인 무리들은 화목하지 못하여 해산하였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하고, 그를 떠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더러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 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생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 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유불선의 세 가지 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서는 효도하고, 집밖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무위의 일에 처하며, 不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요,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 나라 영고징의 「신라국기」에는 "귀인의 자제 중에서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백성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홍 법사가 수 나라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서역의 중 비마라 등 두 명의 중과 함께 돌아와 「능가승만경」과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독실하게 불도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와서는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스스로 지어 부르며 생애를 마쳤다. 왕비도 역시 이를 본받아 중이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眞智王>立. 諱<舍輪>[或云<金輪>.], <眞興王>次子. 母, <思道>夫人; 妃, <知道>夫人. 太子早卒, 故<眞智>立.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사륜[혹은 금륜이라고도 한다.]이며,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이다. 왕비는 지도부인이다.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가 왕위에 올랐다.


○元年, 以伊찬<居柒夫>爲上大等, 委以國事.


원년,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국사를 맡겼다.


○二年, 春二月, 王親祀神宮, 大赦. 冬十月, <百濟>侵西邊州郡, 命伊찬<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 築<內利西城>.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을 내렸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주군을 침범하자, 이찬 세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세종은 일선 북쪽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3천7백 명을 목베었다. 내리서성을 쌓았다.


○三年, 秋七月, 遣使於<陳>, 以獻方物. 與{侵??/擧??}<百濟><閼也山城>.


李丙燾.『북한본』.

3년 가을 7월, 진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백제의 알야산성을 점령하였다.


○四年, 春二月, <百濟>築<熊峴城>·<松述城>, 以梗<蒜山城>·<麻知峴城>·<內利西城>之路. 秋七月十七日, 王薨. 諡曰<眞智>, 葬于<永敬寺>北.


4년 봄 2월, 백제가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산산성·마지현성·내리서성의 통로를 막았다.

가을 7월 17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眞平王>立. 諱<白淨>, <眞興王>太子<銅輪>之子也. 母<金>氏<萬呼>[一云<萬內>.]夫人, 葛文王<立宗>之女, 妃<金>氏<摩耶>夫人, 葛文王<福勝>之女. 王生有奇相, 身體長大, 志識沈毅明達.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백정이며, 진흥왕 태자 동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만내라고도 한다.]부인이며, 갈문왕 입종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이며 갈문왕 복승의 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 생김이 기이하였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였으며, 지식이 깊고 의기가 활달하였다.


○元年, 八月, 以伊찬<弩里夫>爲上大等. 封{贈}??母弟<伯飯>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8월,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왕의 어머니의 동생인 백반을 진정 갈문왕에 봉하고, 국반을 진안 갈문왕에 봉했다.


○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以伊찬<后稷>爲兵部令.


2년 봄 2월,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三年, 春正月, 始置位和府, 如今吏部.


3년 봄 정월, 처음으로 위화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지금의 이부(吏部)와 같다.


○五年, 春正月, 始置船府署, 大監·弟監各一員.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선부서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 각 한 명씩을 두었다.


○六年, 春二月, 改元<建福>. 三月, 置調府令一員, 掌貢賦, 乘府令一員, 掌車乘.


6년 봄 2월, 연호를 건복으로 고쳤다.

3월, 조부령 한 명을 두어 납세와 부역에 관한 사무를 관장케하고, 승부령 한 명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七年, 春三月, 旱, 王避正殿, 減常饍, 御南堂, 親錄囚. 秋七月, 高僧<智明>入<陳>求法.


7년 봄 3월, 가뭄이 들자 왕이 정전에 거처하지 않았으며, 평상시보다 음식을 줄이고 죄수를 직접 재심사하였다.

가을 7월, 고승 지명이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진 나라에 갔다.


○八年, 春正月, 置禮部令二員. 夏五月, 雷震, 星殞如雨.


8년 봄 정월, 예부령 두 명을 두었다.

여름 5월, 뇌성과 벼락이 치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九年, 秋七月, <大世>·<仇柒>二人適海. <大世>, <奈勿王>七世孫, 伊찬<冬臺>之子也. 資俊逸, 少有方外志, 與交遊僧<淡水>, 曰: "在此<新羅>山谷之間, 以終一生, 則何異池魚籠鳥, 不知滄海之浩大, 山林之寬閑乎! 吾將乘부泛海, 以至<吳>·<越>, 侵尋追師, 訪道於名山. 若凡骨可換, 신仙{神仙}??可學, 則飄然乘風於혈寥之表, 此天下之奇遊壯觀也, 子能從我乎?" <淡水>不肯, <大世>退而求友. 適遇<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之寺. 忽風雨落葉, 泛於庭료. <大世>與<仇柒>言曰: "吾有與君西遊之志, 今各取一葉, 爲之舟, 以觀其行之先後." 俄而<大世>之葉在前, <大世>笑曰: "吾其行乎!" <仇柒>勃然曰: "子{予}??亦男兒也, 豈獨不能乎!" <大世>知其可與, 密言其志. <仇柒>曰: "此吾願也." 遂相與爲友, 自南海乘舟而去, 後不知其所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가을 7월, 대세와 구칠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의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세는 내물왕의 7대손이며, 이찬 동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나고 젊어서부터 세속을 떠나 외지로 나가려는 뜻을 품었었다. 그는 담수라는 중과 사귀면서 말했다. "신라 같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연못의 고기가 산림의 크기를 모르고, 새장의 새가 바다의 넓음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지나 오 나라 월 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을 것이며, 명산에서 도를 구할 것이다. 만약 속된 자세를 바꿀 수 있거나 신선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표표하게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닐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천하의 신기한 노름이요,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담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대세는 그를 버리고 다시 친구를 찾았다. 그는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사람됨이 굳건하고 남다른 절개가 있었다. 그는 곧 구칠과 함께 남산에 있는 절을 유람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연못에 나뭇잎이 떠다니고 있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방을 유람할 생각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뭇잎 하나씩을 주워 이를 배로 생각하고 띄워서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자." 조금 후에 대세의 잎사귀가 앞서자 대세가 웃으면서 "내가 먼저 간다!"라고 말했다. 구칠은 불끈 성을 내며 "나도 또한 사나이이다. 어찌 갈 수 없으리!"라고 말하였다. 대세는 구칠이야말로 같이 행동을 할만한 사람임을 알고, 은근히 자신의 뜻을 말했다. 구칠은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어 배를 타고 남해를 떠났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十年, 冬十二月, 上大等<弩里夫>卒, 以伊찬<首乙夫>爲上大等.


10년 겨울 12월,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으므로 이찬 수을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十一年, 春三月, <圓光>法師, 入<陳>求法. 秋七月, 國西大水, 漂沒人戶, 三萬三百六十, 死者二百餘人. 王發使賑恤之.


11년 봄 3월, 원광 법사가 진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연구하였다.

가을 7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났다. 유실된 인가가 3만 3백6십호, 사망자가 2백여 명이었다. 왕이 사자를 보내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置領客府令二員. 秋七月,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四步.


13년 봄 2월, 영객부령 두 명을 두었다.

가을 7월, 남산성을 쌓았다. 그 둘레가 2천8백5십4보였다.


○十五年, 秋七月, 改築<明活城>, 周三千步; <西兄山城>, 周二千步.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개축하였다. 그 둘레가 3천 보였다. 서형산성은 둘레가 2천 보였다.


○十六年, <隋>帝詔, 拜王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16년, 수 나라 황제가 조서를 주어 왕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배수하였다.


○十八年, 春三月, 高僧<曇育>, 入<隋>求法. 遣使如<隋>, 貢方物. 冬十月, <永興寺>火, 延燒三百五十家, 王親臨救之.


18년 봄 3월, 고승 담육이 수 나라에 가서 불법을 연구하였다.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영흥사에 화자가 발생하여 3백50호가 연이어 불에 탔다. 왕이 직접 나가서 이들을 구제하였다.


○十九年, <三郞寺>成.


19년, 삼랑사가 낙성되었다.


○二十二年, 高僧<圓光>, 隨朝聘使奈麻<諸文>·大舍<橫川>還.


22년, 고승 원광이 조빙사 내마 제문과 대사 횡천을 따라 돌아왔다.


○二十四年, 遣使大奈麻<上軍>入<隋>, 進方物. 秋八月, <百濟>來攻<阿莫城>. 王使將士逆戰, 大敗之, <貴山>·<추項>死之. 九月, 高僧<智明>, 隨入朝使<上軍>還. 王尊敬<明公>戒行, 爲大德.


24년, 대내마 상군을 사신으로 수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병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귀산과 추항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9월, 고승 지명이 수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상군을 따라 돌아왔다. 왕이 지명공의 계행을 존경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二十五年, 秋八月, <高句麗>侵<北漢山城>, 王親率兵一萬以拒之.


25년 가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범하였다. 왕이 직접 군사 1만을 이끌고 나아가 그들을 물리쳤다.


○二十六年, 秋七月, 遣使大奈麻<萬世>·<惠文>等朝<隋>. 廢<南川州>, 還置<北漢山州>.


26년 가을 7월, 대내마 만세와 혜문 등을 수 나라에 사절로 보내  조회하였다. 남천주를 없애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二十七年, 春三月, 高僧<曇育>, 隨入朝使<惠文>還. 秋八月, 發兵侵<百濟>.


27년 봄 3월, 고승 담육이 수 나라에 사절로 갔던 혜문을 따라 돌아왔다.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三十年, 王患<高句麗>屢侵封역,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二月, <高句麗>侵北境, 虜獲八千人. 四月, <高句麗>拔<牛鳴山城>.


30년, 왕은 고구려가 자주 국토를 침범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 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왕은 원광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군사를 요구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불교도의 행실이 아니지만, 제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곧 글을 지어 올렸다.

2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4월,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점령하였다.


○三十一年, 春正月, <毛只嶽>下地燒, 廣四步, 長八步, 深五尺, 至十月十五日滅.


31년 봄 정월, 모지악 아래 땅에 불이 났다. 불탄자리의 넓이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5척이나 되었다. 불은 10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꺼졌다.


○三十三年, 王遣使<隋>, 奉表請師, <隋><煬帝>許之. 行兵事在『高句麗紀』. 冬十月, <百濟>兵來圍<가岑城>百(+餘)??日. 縣令<讚德>固守, 力竭死之, 城沒.


趙炳舜. 『三國史節要』.

33년, 왕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구하는 내용의 글을 바쳤다. 수 양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군사를 동원한 사실은 「고구려기」에 실려 있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가잠성을 백일 동안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이 굳게 수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고 성은 함락되었다.


○三十五年春, 旱. 夏四月, 降霜.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 說經.


35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 수 나라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를 초청하여 불경을 설법하게 하였다.


○三十六年, 春二月, 廢<沙伐州>, 置<一善州>. 以一吉찬<日夫>爲軍主. <永興寺>塑佛自壞, 未幾, <眞興王>妃比丘尼死.


36년 봄 2월, 사벌주를 폐지한 후 일선주를 설치하고,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의 흙으로 빚은 불상이 저절로 훼손되고, 얼마 후에 진흥왕의 왕비였던 비구니가 사망하였다.


○三十七年, 春二月, 賜大포三日. 冬十月, 地震.


37년 봄 2월, 왕이 큰 연회를 사흘 동안 베풀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三十八年, 冬十月, <百濟>來攻<母山城>.


38년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四十年, <北漢山州>(+都督)??軍王{軍主}??<邊品>, 謀復<가岑城>, 發兵與<百濟>戰, <奚論>從軍赴敵力戰, 死之. <論>, <讚德>之子也.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

40년, 북한산주 군주 변품이 가잠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백제와 싸웠다. 해론이 이에 종군하여 적과 만나 전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四十三年, 秋七月, 王遣使大<唐>, 朝貢方物. <高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常侍<庾文素>來聘, 賜以璽書及畵·屛風·錦綵三百段.


43년 가을 7월, 왕이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고조가 직접 사신을 위로하고, 통직 산기상시 유문소를 사절로 파견하면서 조서, 그림, 병풍, 비단 3백 단을 보내왔다.


○四十四年, 春正月, 王親幸<皇龍寺>. 二月, 以伊찬<龍樹>爲內省私臣. 初, 王七年, <大宮>·<梁宮>·<沙梁宮>三所, 各置私臣, 至是置內省私臣一人, 兼掌三宮.


44년 봄 정월, 왕이 직접 황룡사에 갔다.

2월, 이찬 용수를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즉위 7년에는 대궁, 양궁, 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1인을 두어 3궁을 동시에 관장하게 한 것이다.


○四十五年, 春正月, 置兵部大監二員. 冬十月, 遣使大<唐>朝貢. <百濟>襲<勒弩縣>.


45년 봄 정월, 병부 대감 두 명을 두었다.

겨울 10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였다.


○四十六年, 春正月, 置侍衛府大監六員, 賞賜署大正{大匠}??一員, 大道署大正一員. 三月, <唐><高祖>降使, 冊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冬十月, <百濟>兵來圍我<速含>·<櫻岑>·<기岑>·<烽岑>·<旗縣>·<穴柵>等六城. 於是, 三城或沒或降. 級찬<訥催>合<烽岑>·<櫻岑>·<旗懸>三城兵堅守, 不克死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46년 봄 정월, 시위부 대감 6명과 상사서 대정 1명과 대도서 대정 1명을 두었다.

3월,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우리의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 등 여섯 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3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가 봉잠·앵잠·기현 3성의 군사를 합하여 굳게 지키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四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因訟: <高句麗>塞路, 使不得朝, 且數侵入.


47년 겨울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 때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 나라에 조회할 수 없음과 또한 그들이 자주 침범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四十八年,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唐><高祖>遣<朱子奢>來, 詔諭與<高句麗>連和. 八月, <百濟>攻<主在城>, 城主<東所>, 拒戰死之. 築<高墟城>.


48년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조가 주자사를 보내 고구려와 화친할 것을 권하였다.

8월,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였다. 주재성 성주 동소가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고허성을 쌓았다.


○四十九年, 春三月, 大風雨土, 過五日. 夏六月, 遣使大<唐>朝貢. 秋七月, <百濟>將軍<沙乞>拔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八月, 隕霜殺穀.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49년 봄 3월,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렸다. 이러한 날씨가 닷새 동안 계속되었다.

여름 6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백제 장군 사걸이 서쪽 변경의 2성을 점령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겨울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年, 春二月, <百濟>圍<가岑城>, 王出師擊破之. 夏, 大旱, 移市, 畵龍祈雨. 秋冬民飢, 賣子女.


50년 봄 2월,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격파하였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녀를 파는 일이 있었다.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軍<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懼, 殊無鬪心. <庾信>曰: "吾聞: '振領而구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乃跨馬拔劒,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或斬將, 或건旗. 諸軍乘勝, 鼓조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九月, 遣使大<唐>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51년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 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二年, 大宮庭地裂.


52년, 큰 대궐 뜰의 땅이 갈라졌다.


○五十三年, 春二月, 白狗上千{于}??宮墻. 夏五月, 伊찬<柒宿>與伊찬{阿찬}??<石品>謀叛, 王覺之, 捕捉<柒宿>, 斬之東市, 幷夷九族. 阿찬<石品>亡至<百濟>國境, 思見妻子, 晝伏夜行, 還至<叢山>, 見一樵夫, 脫衣換樵夫폐衣, 衣之, 負薪潛至於家, 被捉伏刑. 秋七月, 遣使大<唐>, 獻美女二人, <魏徵>以爲不宜受. 上喜曰: "彼<林邑>獻鸚鵡, 猶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 付使者歸之. 白虹飮于宮井. 土星犯月.


趙炳舜. 『顯宗實錄字本』.李丙燾.

今西龍.

53년 봄 2월, 흰 개가 대궐의 담장 위에 올라갔다.

여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 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구족을 처형하였다. 아찬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망하였으나, 처자가 보고 싶어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왔다. 그는 그 곳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나 그의 헤어진 옷과 바꾸어 입은채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명을 바쳤다. 그러나 위징은 이를 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기뻐하며 "저 임읍에서 바친 앵무새도 추운 고통을 말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황차 가족을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의 처지야 어떻겠는가!"라고 말하고, 사신에게 맡겨 돌려 보냈다. 흰 무지개가 대궐 우물로 들어갔다. 토성이 달을 범했다.


○五十四年, 春正月, 王薨. 諡曰<眞平>, 葬于<漢只>. <唐><太宗>詔, 贈左光祿大夫, 賻物段二百. [『古記』云: "<貞觀>六年王辰{壬辰}??正月卒." 而『新唐書』·『資理通鑑』皆云: "<貞觀>五年辛卯, <羅>王<眞平>卒." 豈其誤耶?]

三國史記卷第四.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54년 봄 정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한지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서로 좌광록대보 벼슬을 추증하고, 비단 2백 필을 부조하였다.[고기에는 '정관 6년 임진봄 정월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와 「자리통감」에는 모두 '정관 5년 신묘에 신라왕 진평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틀린 것이 아닐까?]

삼국사기 권 제 4 끝




三國史記卷第五.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삼국사기 권 제 5

수충 정난 정국 찬화 동덕 공신, 개부 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 이례부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第五.

<善德王>·<眞德王>·<大宗王{太宗王}??>.


허성도.

신라본기 제 5

선덕왕, 진덕왕, 태종왕.


○<善德王>立. 諱<德曼>, <眞平王>長女也, 母, <金>氏<摩□{摩耶}>??夫人. <德曼>性寬仁明敏. 王薨, 無子, 國人立<德曼>, 上號<聖祖皇姑>. 前王時, 得自<唐>來牡丹花圖幷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 王笑曰: "爾何以□□{知之}???" □□{對曰}??: "□□□□□{圖花無蜂蝶}??, □□{故知}之??. 大抵女有國色, □□□{男隨之}??, □□□□{花有香氣}??, □□□□{蜂蝶隨之}??故也, 此花絶艶, 而圖畵又無蜂蝶, 是必無香花." 種植之, 果如所言. 其先識如此.


趙炳舜. 『三國遺事』李丙燾는 「三國遺事」와 「通鑑」을 참고하여, '此花雖絶艶, 而必無香氣.'로 보았고, 今西龍은 '此花(  )(  )(  )(  ), 必定無香氣'로 보았고, 「북한본」은 東國通鑑을 참고하여,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로 보았다.李丙燾.

今西龍.李丙燾.

今西龍.李丙燾.

今西龍은 이 부분을 '畵花而無蝶'으로 보았다. 李丙燾.

今西龍.李丙燾.李丙燾.

「북한본」.李丙燾.

「북한본」.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덕만이며,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 전 임금 때 당 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덕만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덕만은 "이 꽃이 비록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앞을 내다 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元年, 二月, 以大臣<乙祭>摠持國政. 夏五月, 旱, 至六月, 乃雨. 冬十月, 遣使撫問國內鰥寡孤獨, 不能自存者, 賑恤之. 十二月, 遣使入<唐>朝貢.


원년 2월,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자 비가 왔다.

겨울 10월, 특사를 보내 국내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復諸州郡一年租調. 二月, 京都地震.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八月, <百濟>侵西邊.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을 내렸다. 모든 주와 군의 1년 납세를 면제하였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春正月, 改元<仁平>. <芬皇寺>成. 三月, 雹大如栗.


3년 봄 정월,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다. 분황사가 낙성되었다.

3월, 크기가 밤알 정도 되는 우박이 내렸다.


○四年, <唐>遣使持節, 冊命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以襲父封. <靈廟寺>成. 冬十月, 遣伊찬<水品>·<龍樹>[一云<龍春>.], 巡撫州縣.


4년,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가 낙성되었다.

겨울 10월, 이찬 수품과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五年, 春正月, 拜伊찬<水品>爲上大等. 三月, 王疾, 醫禱無效, 於<皇龍寺>設百高座, 集僧講『仁王經』, 許度僧一百人. 夏五月, 蝦마大集宮西<玉門池>. 王聞之, 謂左右曰: "蝦마怒目, 兵士之相也. 吾嘗聞西南邊亦有地名<玉門谷>者, □□□□□□{其或有隣國兵}??潛入其中乎?" 乃命將軍<閼川>·□□□□□□□{<弼呑>率兵搜之}??, 果<百濟>將軍<于召>欲襲<獨山城>, 率甲士五百人, 來伏其處. <閼川>掩擊盡殺之. <慈藏>法師入<唐>求法.


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今西龍은 '必有敵兵(  )(  )'으로 되어 있다. 「북한본」은 「東國通鑑」을 참고하여 '意或有隣國兵'으로 교감하였다.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今西龍은 '弼呑等往搜之(  )'로 보았다.

5년 봄 정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왕에게 병환이 났으나 약과 기도가 모두 효험이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고, 중을 모아 인왕경을 강의하고, 중 1백 명에게 도첩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 측근들에게 "개구리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경에 옥문곡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고 들었다. 이웃 나라 군사가 혹시 이 골짜기에 잠입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 장군 알천과 필탄으로 하여금 그 곳에 가서 수색하게 하였다. 그 곳에는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숨어 있었다. 알천이 이를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자장 법사가 불법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갔다.


○六年, 春正月, 拜伊찬<思眞>爲舒弗邯. 秋七月, 拜<閼川>爲大將軍.


6년 봄 정월,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알천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七年, 春三月, <七重城>南大石自移三十五步. 秋九月, 雨黃花. 冬十月, <高句麗>侵北邊<七重城>, 百姓驚擾入山谷. 王命大將軍<閼川>安集之. 十一月, <閼川>與<高句麗>兵, 戰於<七重城>外, 克之, 殺虜甚衆.


7년 봄 3월, 칠중성 남쪽에 있던 큰 돌이 저절로 35보 거리를 이동하였다.

가을 9월, 노랑 색의 꽃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범하였다. 백성들이 놀라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안심시켜 다시 모여 살도록 하였다.

11월,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八年, 春二{正}??月, 以<何瑟羅州>爲北小京, 命沙찬<眞珠>鎭之. 秋七月, 東海水赤且熱, 魚鼈死.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2월,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만들었다. 사찬 진주로 하여금 이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가을 7월, 동해의 물이 붉게 변하고 더워져서 고기가 죽었다.


○九年, 夏五月, 王遣子弟於<唐>, 請入國學. 是時, <太宗>大徵天下名儒爲學官, 數幸國子監, 使之講論, 學生能明一大經已上, 皆得補官. 增築學舍千二百間, 增學生滿三千二百六十員. 於是, 四方學者雲集京師. 於是, <高句麗>·<百濟>·<高□{高昌}??>·<&□蕃{□吐蕃}>??, 亦遣子弟入學.


李丙燾. 「唐書」 儒學傳.李丙燾. 「唐書」 儒學傳.

9년 여름 5월, 왕이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태종은 천하의 유명한 학자들을 모아 학관으로 임명하고, 국자감에 자주 가서 그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으며, 학생들 가운데 「예기」나 「춘추좌씨전」 가운데 한 가지 이상 능통한 자에게는 모두 관직을 주고, 학사 1천 2백 간을 증축하고, 학생을 3천 2백 60명으로 증원하였다. 이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서울로 모였다. 이 때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도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秋七月, <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又與<高句麗>謀欲取<당項城>, 以絶歸<唐>之路. 王遣使告急於<太宗>. 是月, <百濟>將軍<允忠>, 領兵攻拔<大耶城>, 都督伊찬<品釋>·舍知<竹竹>·<龍石>等死之. 冬, 王將伐<百濟>, 以報<大耶>之役, 乃遣伊찬<金春秋>於<高句麗>, 以請師. 初, <大耶>之敗也, 都督<品釋>之妻死焉, 是<春秋>之女也. <春秋>聞之, 倚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 便詣王曰: "臣願奉使<高句麗>請兵, 以報怨於<百濟>." 王許之. <高句麗>王<高臧>素聞<春秋>之名, 嚴兵衛而後見之.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질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麗>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春秋>對曰: "臣奉君命乞師, 大王無意救患以善隣, 但威劫行人, 以□□{要歸}??地, 臣有死而已, 不知其他." <臧>怒其言之□□{不遜}??, □{囚}??之別館, <春秋>潛使人告本國王. 王命大將軍<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行軍過<漢江>, 入<高句麗>南境, <麗>王聞之, 放<春秋>以還. 拜<庾信>爲<押梁州>軍主.


今西龍.李丙燾. 「通鑑」.今西龍.

11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찬 김 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애초에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는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이길 수 없으랴!"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은 원래 춘추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는 먼저 군사의 호위를 엄하게 한 뒤에 춘추를 만났다. 춘추가 말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대악당이 되어 우리 국토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임금이 귀국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를 보내어 하집사에게 명령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구려왕이 말했다.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인데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땅을 돌려 준다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

춘추가 대답했다.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고장은 분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는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본국 왕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왕은 대장군 김 유신에게 명령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가도록 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三月, 入<唐>求法高僧<慈藏>還. 秋九月, 遣使大<唐>上言: "<高句麗>·<百濟>侵凌臣國, 累遭攻襲數十城. 兩國連兵, 期之必取, 將以今玆九月大擧, 下{臣}??國杜??{社稷}??必不獲全, 謹遣陪臣歸命大國, 願乞偏師, 以存救援." 而{帝}??謂使人曰: "我實哀爾爲二國所侵, 所以頻遣使人和爾三國. <高句麗>·<百濟>旋踵번悔, 意在呑滅, 而分爾土宇. 爾國設何奇謀以免顚越?" 使人曰: "吾{臣}??王事窮計盡, 唯告急大國, 冀以全之." 帝曰: "我少發邊兵, 摠<契丹>·<靺鞨>直入<遼東>, 爾國自解, 可緩爾一年之圍. 此後知無繼兵, 還肆侵侮, 四國俱擾, 於爾未安, 此爲一策. 我又能給爾數千朱袍·丹幟, 二國兵至, 建而陳之, 彼見者以爲我□{兵}??, 必皆奔走, 此爲二策. <百濟>國恃{負}??海之험{險}??, 不修機械, 男女紛{分}??雜, 互{好}??相燕聚. 我以數十百船, 載以甲卒, 銜枚泛海, 直襲其地. 爾國以婦人爲主, 爲隣國輕侮, 失主延寇, 靡歲休寧. 我遣一宗支{枝}??, 與{以}李丙燾. 「冊府元龜」. 爲爾國主. 而自不可獨王{往}李丙燾. 「冊府元龜」., 當遣兵營護,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爲三策. 爾宜思之, 將從何事?" 使人但唯而無對. 帝嘆{難}??其庸鄙, 非乞師告急之才也.


李丙燾.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冊府元龜」.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

1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 당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탐구하던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폐국을 침공하여 수십개의 성이 누차 공격을 당했습니다. 이제 이들 두 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우리 나라를 필히 빼앗고자, 이번 9월에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사직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오니, 일부의 군대라도 빌려 주어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가 두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이 진실로 애통하다. 그렇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화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발길을 돌리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있다. 이는 너희 나라를 빼앗고 너희 나라를 나누어 갖자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다. 너희 나라에는 사직을 보전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대책이라도 있는가?"

사신이 말했다. "우리 임금께서는, 상황은 급하고 대책이 없으므로 급한 사정을 대국에 말하여 나라의 보전을 바라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내고, 거란·말갈과 함께 곧장 요동을 치면, 너희 나라에 대한 포위가 자연히 풀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1년 동안은 포위 상태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군사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을 것을 그들이 알면, 도리어 함부로 침략을 할 것이다. 이리되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해지고 너희 나라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계책이다. 내가 또한 너희 나라에 우리 나라가 사용하는 붉은 옷과 붉은 기 수천 벌을 주고, 고구려 백제의 두 나라 군사가 올 때 이것을 벌려 세워 놓아라. 그리하면 저들은 이를 우리 나라 군대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주할 것이다. 이것이 두번 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한 요새를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은 채 남녀가 난잡하게 뒤섞여 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무장한 군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바로 그 나라를 습격할 것이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시절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 명을 보내 너희 나라의 임금을 삼겠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너희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 나라에 맡겨 스스로 나라를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번 째 계책이다.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지 그대는 잘 생각하여 보아라."

사신은 다만 "예"할 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사람됨이 용렬하여, 군사를 요청하고 급한 상황을 호소할 만한 인재가 못됨을 개탄하였다.


○十三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太宗>遣司農丞<相里玄奬>齎璽書, 賜<高句麗>, 曰: "<新羅>委命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卽집兵. 若更攻之, 明年當出師擊爾國矣." <蓋蘇文>謂<玄奬>曰: "<高句麗>·<新羅>, 怨隙已久. 往者<隋>室相侵, <新羅>乘흔奪<高句麗>五百里之地, 城邑皆據有之, 非返地還城, 此兵恐未能已." <玄奬>曰: "已往之事, 焉可追論?" <蘇文>竟不從. 秋九月, 王命<庾信>爲大將軍{上將軍}??, 領兵伐<百濟>, 大克之, 取城七.


趙炳舜. 『三國史記』 列傳.

1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주어 고구려에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는 운명을 우리 나라에 맡기고, 조공을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너희 나라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곧 거두어 들여야 한다. 만약 또 다시 신라를 공격을 한다면 내년에는 틀림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너희 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개소문은 현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나빠진지 이미 오래이다. 과거 수 나라가 침범하였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5백여 리를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다." 현장은 "지나간 일을 어찌 따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으나, 개소문은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十四年, 春正月, 遣使大<唐>貢獻方物. <庾信>自伐<百濟>還, 未見王, <百濟>大軍復來寇邊. 王命□□{<庾信>??/拒之??}, 遂不至家, 往伐破之, 斬首二千□{級}??. □□{三月}??, □□{還命}??□於王, 未得歸家, 又□{急}??報<百濟>復來侵. 王以事急, 乃曰: "國之存亡, 繫公一身, 庶不憚勞, 往其圖之!" <庾信>又不歸家, 晝夜鍊兵. 西行道, 過宅門, 一家男女, 瞻望涕泣, 公不顧而歸. 三月, 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 夏五月, <太宗>親征<高句麗>, 王發兵三萬以助之. <百濟>乘虛, 襲取國西七城. 冬十一月, 拜伊찬<毗曇>爲上大等.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李丙燾. 庾信傳.李丙燾. 庾信傳.李丙燾. 庾信傳.李丙燾. 庾信傳.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은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대부대의 백제군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유신은 집에도 가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3월에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가 다시 침노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사세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매었으니, 노고를 마다하지 말고 가서 대책을 도모하라!"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가 서쪽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 유신을 바라보고 눈물지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 보지도 않고 싸움터로 갔다.

3월, 황룡사 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름 5월,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이를 도왔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겨울 11월,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日{月}??,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唐書』云: "<貞觀>二十一年卒." 『通鑑』云: "二十五{二}??年卒." 以本史考之, 『通鑑』, 誤也.]

○論曰: 臣聞之, 古有<女왜>氏, 非正是天子, 佐<伏犧>理<九州>耳, 至若<呂雉>·<武조>, 値幼弱之主, 臨朝稱制, 史書不得公然稱王, 但書<高皇后呂氏>·<則天皇后武氏>者.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豈可許모구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 幸也. 『書』云: "牝鷄之晨." 『易』□{云}??: □□□{羸豕孚}??척촉." 其可不爲之戒哉?


『북한본』.李丙燾.今西龍.今西龍.

16년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당서」에는 '정관 21년에 죽었다'고 하였고, 「통감」에는 '25년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 책에서 고증한다면 통감이 잘못이다.]

저자의 견해 :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옛날에 여와씨가 있었으나, 그녀는 천자가 아니라 복희를 도와 9주를 다스렸을 뿐이며, 여치와 무조 같은 경우에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나와 정사를 보았으므로, 역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 못하고 다만 고황후 여씨, 측천황후 무씨로만 기록하고 있다. 하늘의 원리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며, 사람의 원리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게 하였다. 이는 실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에는 "암탉이 새벽에 운다"고 하였고, 주역에는 "암퇘지가 껑충거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眞德王>立. 名<勝曼>, <眞平王>母弟<國飯>[一云<國芬>.]葛文王之女也, 母, <朴>氏<月明>夫人. <勝曼>姿質豊麗, 長七尺, 垂手過膝.


진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이름은 승만이며, 진평왕의 동복 아우인 갈문왕 국반[국분이라고도 한다.]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이었고, 팔을 늘이고 있으면 그 길이가 무릎을 넘었다.


○元年, 正月十七日, 誅<毗曇>, 坐死者三十人. 二月, 拜伊찬<閼川>爲上大等, 大阿찬<守勝>爲<牛頭州>軍主. <唐><大宗{太宗}>??遣使持節, 追贈前王爲光樣大夫{光祿大夫}??. 仍冊命王爲柱國封<樂浪郡>王. 秋七月, 遣使入<唐>謝恩. 改元<太和>. 八月, 彗星出於南方, 又衆星北流. 冬十月, <百濟>兵圍<茂山>·<甘勿>·<桐岑{洞岑}>??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以拒之, 苦戰氣竭. <庾信>麾下<丕寧子>及其子<擧眞>入敵陣, 急格死之, 衆皆奮擊, 斬首三千餘級. 十一月, 王親祀神宮.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봄 정월 17일, 비담을 목베어 처벌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 군주로 임명하였다. 당 태종이 지절사를 보내 전왕을 광록대부로 추증했다. 그리고 왕을 주국으로 삼아 '낙랑군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은공에 사례하였다.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8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나고, 또한 별 무리가 북쪽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의 3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항하게 하였다. 그들은 악전고투로 기운이 다하였다. 그런 가운데 유신의 부하 비녕자와 그 아들 거진이 적진에 들어가 격렬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용감하게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1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二年, 春正月, 遣使大<唐>朝貢. 三月, <百濟>將軍<義直>侵西邊, 陷<腰車>等一十餘城. 王患之, 命<押督州{押梁州}>??都督<庾信>以謀之. <庾信>於是訓勵士卒, 將以發行, <義直>拒之. <庾信>分軍爲三道, 夾□□{擊之}??, □□{<百濟>}??兵敗走. <庾信>追北, 殺之幾盡. 王悅賞□□□□{賜士卒有}??差. 冬, 使<邯帙許>朝<唐>. <太宗>勅御史問: "<新羅>臣事大朝, 何以別稱年號?" <帙許>言: "曾是天朝未頒正朔, 是故先祖<法興王>以來, 私有紀年, 若太{大??/天??}朝有命, 小國又何敢焉?" <太宗>然之. 遣伊찬<金春秋>及其子<文王{文汪}>??朝<唐>, <太宗>遣光祿卿<柳亨>郊勞之. 旣至, 見<春秋>儀表英偉, 厚待之. <春秋>請詣國學, 觀釋奠及講論, <太宗>許之, 仍賜御製<溫湯>及<晉祠>碑幷新撰『晉書』. 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궤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百濟>强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전除凶惡, 則폐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詔授<春秋>爲特進, <文王{文汪}>??爲左武衛將軍. 還國詔令三品已上燕餞之, 優禮甚備. <春秋>奏曰: "臣有七子, 願使不離聖明□衛{宿衛}??." 乃命其子<文注{文汪}>??與大監□□. □□□□□□{<春秋>還至海上}??, 遇<高句麗>邏兵. <春秋>從者<溫君解>, 高冠大衣, 坐於船上, 邏兵見以爲<春秋>, 捉殺之. <春秋>乘小船至國. 王聞之嗟痛, 追贈<君解>爲大阿찬, 優賞其子孫.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列傳.李丙燾. 新本.李丙燾. 新本.李丙燾. 新本.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李丙燾. 「通鑑」.

辛鎬烈.李丙燾. 「通鑑」.

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여 요거 등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이를 걱정하여 압독주 도독 유신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신이 군사들을 격려하여 작전을 시작하려 하자 의직이 저항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협격하자, 백제 군사가 패주하였다. 유신은 도망가는 백제 군사를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왕이 기뻐하면서 군사들에게 공훈에 따라 상을 주었다.

겨울, 감질허를 당 나라에 보내 조회하도록 하였다. 태종이 어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신라가 신하의 자격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당과 다른 연호를 사용하는가?" 질허는 "일찌기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 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를 사용하였겠는가?"라고 말했다. 태종이 이를 수긍하였다. 이찬 김 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조회케 하였다. 태종은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내보내 맞이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태종이 춘추의 풍모가 영특하며 늠늠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는 국학에 가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당의 황제가 지은 온탕 및 진사비의 비문과 새로 지은 「진서」를 주었다. 태종이 하루는 춘추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면서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춘추가 무릎을 꿇고 "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 구석에 있어,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 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수십개의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육로와 수로를 거쳐 술직하는 일도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이 크게 동감하고 군사의 파견을 승락하였다. 춘추는 또한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다. 이에 태종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의복을 춘추와 수행원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춘추를 특진에, 문왕을 좌무위장군에 제수하였다. 춘추가 귀국할 때, 태종이 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전별하였다. 태종이 그들을 우대하는 예절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다. 춘추는 황제에게 "저의 자식이 일곱입니다. 원컨대 그 중의 하나인 문왕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숙위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태종은 곧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 (원문 2자 결자)에게 숙위를 명하였다. 춘추가 귀국하는 도중에 바다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다. 이렇게 되자 춘추의 시종인 온 군해가 큰 모자를 쓰고 대의를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순라병은 그를 춘추로 알고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군해에게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三年, 春正月, 始服中朝衣冠. 秋八月, <百濟>將軍<殷相>率衆來, 攻陷<石吐>等七城. 王命太將軍{大將軍}??<庾信>·將軍<陳春>·<竹旨>·<天存>等出相{拒}??之. 轉鬪經旬不解, 進屯於<道薩城>下. <庾信>謂衆曰: "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乃??{使}??순{徇}??于軍中曰: "堅壁不動, 明日待援軍然後決戰."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進擊大敗之, 殺虜將士一百人, 斬軍卒八千九百八十級, 獲戰馬一萬匹, 至若兵仗, 不可勝數.


趙炳舜.『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다.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왕은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에게 대항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장소를 옮겨 가며 열흘이 지나도록 싸웠으나 백제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도살성 밑에 진을 쳤다. 유신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정탐을 하러 올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모르는 체 하고, 절대로 누구인가를 묻지 말라!" 유신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진중을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면서 "결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말라. 내일 구원병이 온 후에 결전을 하겠다."라고 말하도록 하였다.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은상 등은 증원병이 온다고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진격하여 적을 크게 쳐부수고, 장령 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군졸 8천 9백 80명의 머리를 베고, 군마 만필을 얻었다. 노획한 병기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四年, 夏四月, 下敎: 以眞骨在位者, 執牙笏. 六月, 遣使大<唐>, 告破<百濟>之衆. 王織錦作五言大乎頌{大平頌}??, 遣<春秋>子<法敏>, 以獻<唐>皇帝. 其辭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威}??定, 修文□□□{繼百王??/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偕}??曰用{日用??/日月??}, 撫運邁時康{陶唐??/虞唐??. 幡旗何{旣}??赫赫, 鉦{錚}??何굉굉.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凝}??幽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光}??." <高宗>嘉焉, 拜<法敏>爲大府卿以還. 是歲, 始行<中國><永徽>年號.

○論曰: 三代更正朔, 後代稱年號, 皆所以大一統, 新百姓之視聽者也. 是故苟非乘時竝起, 兩立而爭天下, 與夫姦雄, 乘間而作, 기유神器, 則偏方小國, 臣屬天子之邦者, 固不可以私名年. 若<新羅>以一意事<中國>, 使航貢비相望於道, 而<法興>自稱年號, 惑矣. 厥後承愆襲繆, 多歷年, 所聞太宗之초讓, 猶且因循至是, 然後奉行<唐>號. 雖出於不得已, 而柳{抑}??可謂過而能改者矣.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李丙燾. 「舊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李丙燾. 舊本.李丙燾. 「三國遺事」.李丙燾. 「舊唐書」.李丙燾. 「三國遺事」.李丙燾. 兩唐書.李丙燾. 「舊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교서를 내려 진골로서 현직에 있는 자는 상아홀(笏)을 들게 하였다.

6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이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은 비단에 5언시 태평송을 써서, 이를 춘추의 아들 법민으로 하여금 당 나라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당 나라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은 황제의 앞 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받드니 은혜의 비 내리고

땅의 만물 다스려 빛나는 이치 얻었네.

어질음 깊고 깊어 일월과 어울리고,

시운도 따라오니 언제나 태평하네.

큰 깃발 작은 깃발 저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 어찌 저리 쟁쟁한가?

외방의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시골이나 도시에나 풍속이 순박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 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오성이 만방을 도는구나.

산신의 뜻으로 재상이 보필하고,

황제는 충신 인재를 믿으시니,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 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였다.

저자의 견해 : 하, 은, 주 삼대에 정삭을 고치고, 후대에 와서 연호를 사용한 것은, 모두가 대통일을 이룬 왕조가 백성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이유로 동일한 시기에 함께 일어나서 천하를 두고 양립하고 있는 경우이거나, 또는 간웅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를 노리는 경우가 아닌 이상, 주변의 소국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하의 처지로 속한 나라라면 절대로 사사로이 연호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줄곧 중국을 섬겨 사신들이 탄 배와 공물 꾸러미가 길에 연이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흥왕이 우리만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뒤에도 이러한 잘못을 답습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며, 태종의 견책을 듣고도 고치지 않다가 이 때에 이르러 당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비록 마지 못하여 한 일이기는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잘못하기는 했으나 이를 고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五年, 春正月朔, 王御<朝元殿>, 受百官正賀. 賀正之禮, 始於此. 二月, 改稟主爲執事部, 仍拜波珍찬<竹旨>爲執事中侍, 以掌機密事務. □□{<新羅>}??, □□□□{遣}??波珍찬<金仁問>, 入<唐>朝貢, 仍留宿衛□□□□.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신년 하례의 예식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2월,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고, 파진찬 죽지를 집사중시로 임명하여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원문 3자 결자) 파진찬 김 인문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이어서 숙위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六年, 春正月, 以波珍찬<天曉>, 爲左理方府令. 遣使大<唐>朝貢. 三月, 京都大雪. 王宮南門, 無故自毁.


6년 봄 정월에 파진찬 천효를 좌리 방부령으로 삼았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왕궁의 남문이 이유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 獻金총{總}??布.


허성도.

7년 겨울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를 바쳤다.


○八年, 春三月, 王薨. 諡曰<眞德>, 葬<沙梁部>. <唐><高宗>聞之, 爲擧哀於<永光門>, 使大常丞<張文收>持節吊祭之, 贈開府儀同三司, 賜綵段三百. 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永{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新羅記』曰: "其國, 王族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李丙燾.

今西龍.

8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대상승 장문수를 사절로 삼아,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조문케하였으며, 왕에게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고 비단 3백 필을 부의로 주었다.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대 왕을 성골이라고 불렀으며, 무열왕으로부터 마지막 임금까지를 진골이라고 불렀다. 당 나라 영호징의 「신라기」에는 "그 나라에서는 왕족을 제 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을 제 2골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찬<龍春>[一云<龍樹>]之子也.[『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 <天明>夫人, <眞平王>女; 妃, <文明>夫人, <舒玄>角찬女也. 王儀表英偉, 幼有濟世志. 事<眞德>, 位歷伊찬, <唐>帝授以特進. 及<眞德>薨, 群臣請<閼川>伊찬攝政. <閼川>固讓曰: "臣老矣, 無德行可稱. 今之德望崇重, 莫若<春秋>公, 實可謂濟世英傑矣." 遂奉爲王, <春秋>三讓, 不得已而就位.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춘추이며,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당서」에는 진덕왕의 아우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이니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이며 각찬 서현의 딸이다. 왕은 풍모가 영명하고 당당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다. 그는 진덕왕을 섬겨 이찬의 직위를 지냈으며, 당 나라 황제가 특진을 제수하였다. 진덕왕이 사망하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에게 섭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알천은 굳이 사양하며 "나는 늙었고 이렇다 할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두텁기로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다. 그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가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지 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元年, 夏四月, 追封{尊}??王考爲<文興大王>, 母爲<文貞>太后. 大赦. 五月, 命理方府令<良首>等, 詳酌律令, 修定理方府格六十餘條. <唐>遣使持節備禮, 冊命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 王遣使入<唐>表謝.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여름 4월, 작고한 왕의 부친을 문흥대왕, 어머니를 문정 태후로 추증하였다.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렸다.

5월, 이방부령 양수 등으로 하여금 법령을 상세히 검토하게 하여 이방부의 법령 60여 조를 정리 보완하였다. 당 나라에서 지절사를 보내와 예절을 갖추어 왕을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二年, 春正月, 拜伊찬<金剛>爲上大等, 波珍찬<文忠>爲中侍. <高句麗>與<百濟>·<靺鞨>連兵, 侵질我北境, 取三十三城. 王遣使入<唐>求援, 三月, <唐>遣<營州>都督<程名振>·左右衛中郞將<蘇定方>, 發兵擊<高句麗>. 立元子<法敏>爲太子, 庶子<文王{文汪}>??爲伊찬, <老且{老旦}>??爲海찬, <仁泰>爲角찬, <智鏡>·<愷元>各爲伊찬. 冬十月, <牛首州>獻白鹿. <屈弗郡>進白猪, 一首二身八足. 王女<智照>下嫁大角찬<庾信>. 立鼓樓<月城>內.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고구려가 백제 및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33개소의 성을 빼앗았다. 왕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3월에 당 나라가 영주 도독 정명진과 좌우위 중랑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세우고, 서자인 문왕을 이찬, 노차를 해찬, 인태를 각찬,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에서 흰 돼지를 진상하였다. 그 돼지의 머리는 하나, 몸체는 둘, 발이 여덟 개였다.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 월성 안에 고루를 세웠다.


○三年, <金仁問>自<唐>歸, 遂任軍主, 監築<獐山城>. 秋七月, 遣子右{左}??武衛將軍<文王{文汪}>??, 朝<唐>.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김 인문이 당 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를 군주로 임명하여 장산성의 축조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왕의 아들 우무위 장군 문왕으로 하여금 당 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다.


○四年, 秋七月, <一善郡>大水, 溺死者三百餘人. 東<吐含山>地燃, 三年而滅. <興輪寺>門自壞. □□□北巖崩碎爲米, 食之如陳倉米.


4년 가을 7월, 일선군에 큰 홍수가 났다. 이 홍수로 3백여 명이 익사하였다. 동쪽 토함산에서 땅에 불이 났다. 그 불은 3년이 지난 후에야 꺼졌다. 흥륜사의 대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원문 3자 결자) 북쪽의 바위가 산산이 무너져 쌀로 변했다. 그 쌀을 먹어 보니 창고의 묵은 쌀과 같았다.


○五年, 春正月, 中侍<文忠>改爲伊찬, <文王{文汪}>??爲中侍. 三月,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정월, 중시 문충의 벼슬을 이찬으로 바꾸고, 문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3월, 왕이, 하슬라는 지역적으로 말갈과 연이어 있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경을 폐지하여 주로 만들고, 도독을 두어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한 실직을 북진으로 만들었다.


○六年, 夏四月, <百濟>頻犯境, 王將伐之, 遣使入<唐>乞師. 秋八月, 以阿찬<眞珠>爲兵部令. 九月, <何瑟羅>州進白鳥. <公州><基郡江>中大魚出死, 長百尺. 食者死.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 不報, 憂形於色. 忽有人於王前, 若先臣<長春>·<罷郞>者. 言曰: "臣雖枯骨, 猶有報國之心, 昨到大<唐>. 認得皇帝命大將軍<蘇定方>等, 領兵以來年五月, 來伐<百濟>. 以大王勤佇如此, 故玆控告." 言畢而滅. 王大驚異之, 厚賞兩家子孫, 仍命所司, 創<漢山州><莊義寺>, 以資冥福.


6년 여름 4월,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가을 8월, 아찬 진주를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9월,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진상하였다. 공주 기군강에서 큰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죽었다. 그 고기의 길이가 1백 자였는데, 이를 먹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겨울 10월, 왕이 조정에 앉아서, 당 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데 대한 회보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다. 그는 선대의 신하 장춘과 파랑 같아 보였다. 그는 "제가 비록 몸은 백골로 변하였으나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기에, 어제 당 나라에 갔었습니다. 그 곳에서 당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내년 5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치도록 명령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므로 미리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왕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겨, 두 집안 자손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곧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한산주에 장의사를 지어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七年, 春正月, 上大等<金剛>卒. 拜伊찬<金庾信>爲上大等. 三月, <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金仁問>爲副大摠管,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軍}??, □□{以伐}??□濟{百濟}??>, 勅王爲우夷道行軍摠管, 何{使}??將兵, □□□□{爲之聲援}??.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 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축로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소,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욕食而至."  方喜, 還遣<法敏>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 率精兵五萬, 應之, 王次<今突城>. 七月九日, <庾信>等, 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계伯{階伯}>??, 擁兵而至, 先據험, 設三營以待. <庾信>等, 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將軍<欽純{欽春}>??謂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謹聞命矣." 乃入陣, 力戰死. 左將軍<品日>, 喚子<官狀>[一云<官昌>.], 立於馬前, 指諸將曰: "吾兒年재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官狀??/官昌??>}曰: "唯!"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 □□{生致}??<□伯{階伯}>??. <계伯{階伯}>??비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官狀>告父曰: "吾入敵中, 不能斬將건旗者, 非畏死也." 言訖, 以手국井水飮之, 更向敵陣疾鬪. <계伯{階伯}>??擒斬首, 繫馬鞍以送之. <品日>執其首, 流血濕袂. 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幸矣!" 三軍見之, 慷慨有死志, 鼓조進擊, <百濟>衆大敗, <계伯{階伯}??>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 是日,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 到<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於軍門. <庾信>言於衆曰: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而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乃杖鉞軍門, 怒髮如植, 其腰間寶劒, 自躍出초. <定方>右將<董寶亮>섭足曰: "<新羅>兵將有變也." <定方>乃釋<文穎>之罪. <百濟>王子使佐平<覺伽>, 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 <庾信>說之, 二軍勇敢, 四道齊振. <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옹희豊전,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謂{詣}??前乞罪, 又揮之. 十三日, <義慈>率左右, 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 出降. <法敏>궤<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八月二日, 大置酒勞將土{士}??, 王與<定方>及諸將, 坐於堂上, 坐<義慈>及子<隆>於堂下, 或使<義慈>行酒, <百濟>佐平等群臣莫不鳴咽流涕. 是日捕斬<毛尺>. <毛尺>本<新羅>人, 亡入<百濟>, 與<大耶城><黔日>同謀陷城, 故斬之. 又捉<黔日>, 數曰: "汝在<大耶城>, 與<毛尺>謀, 引<百濟>之兵, 燒亡倉庫, 令一城乏食致敗, 罪一也. 逼殺<品釋>夫妻, 罪二也. 與<百濟>來攻本國, 罪三也." 以□{四}??支解, 投其尸於江水. <百濟>□{餘}??賊□{據}??<南岑>·<貞峴>□□□城, 又佐平<正武>聚衆庄<豆尸原>嶽, 抄掠<唐>·<羅>人. 二十六日, 攻<任存>大柵, 兵多地험, 不能克, 但攻破小柵. 九月三日, 郞將<劉仁願>, 以兵一萬人, 留鎭<泗비城>, 王子<仁泰>與沙찬<日原>·級찬<吉那>, 以兵七千副之. <定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 百姓一萬二千人, 自<泗비>乘船廻<唐>

. <金仁問>與沙찬<儒敦>·大奈麻<中知>等偕行. 二十三日, <百濟>餘賊{兵}??入<泗비>, 謀掠生降人, 留守<仁願>出<唐>·<羅>人, 擊走之. 賊退上<泗비>南嶺, 竪四五柵, 屯聚伺隙, 抄掠城邑, <百濟>人叛而應者二十餘城. <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 爲<熊津>都督. 二十八日, 至<三年山城>, 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 十月九日, 王率太子及諸軍攻<이禮城>. 十八日, 取其城置官守, <百濟>二十餘城震懼, 皆降. 三十日, 攻<泗비>南嶺軍柵, 斬首一千五百人. 十一月一日, <高句麗>侵攻<七重城>, 軍□{軍主}??<匹夫>死之. 五日, 王行渡<계灘>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 二十二日, 王來自<百濟>, 論功, 以<계衿>卒<宣服>爲級찬, 軍師<豆迭>爲高□{高干}??. 戰死<儒史知>·<未知活>·<寶弘伊>·<屑儒>等四人, 許職有差. <百濟>人員幷量才任用, 佐平<忠常>·<常永>, 達率<自簡>授位一吉찬, 充職摠管; 恩率<武守>授位大奈麻, 充職大監; 恩率<仁守>授位大奈麻, 充職弟監.


李丙燾. 「通鑑」.李丙燾. 「通鑑」.李丙燾. 「通鑑」.李丙燾.李丙燾. 「通鑑」.李丙燾. 列傳.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북한본」.今西龍.今西龍.『북한본』.허성도.허성도.허성도.今西龍.李丙燾.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今西龍.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БЩо???????????????????????????????????????????????????????????????????????????????????????????????????????????????????????????????????????????????????????????????????????????????????????????????????????????????????????????????????????????????????????????????????????????????????????????? ?7년 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이찬 김 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3월, 당 고종이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 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 장군 유백영 등 수륙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칙명을 내려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장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법민은 "우리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대장군의 도착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라도 달려 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했다. 왕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춘을 순이라고도 한다.]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벌로 진군하였다.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병사들도 기진맥진하였다. 그러자 장군 흠순이 그의 아들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니,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를 모두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굴이 대답하기를 "삼가 분부 말씀을 알아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곧 적진으로 달려 들어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관창이라고도 한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 아들이 나이 겨우 열 여섯이지만 기백이 자못 용감하다. 네가 오늘 전투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관장은 "예!"라고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창 한 자루를 들고 적진에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적군에게 생포되어 계백 앞에 서게 되었다. 계백이 갑옷을 벗겨보고, 그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계백은 그를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 관장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깃빨을 뽑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겁나서가 아닙니다."

관장은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나아가 힘차게 싸웠다. 계백은 그를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쳐들자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다. 그는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삼군의 군사들이 이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은 대패하였고, 계백도 전사하였으며,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날 정방이 부총관 김 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와 마주쳤다. 그는 백제병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유신 등이 당 나라 군영에 도착하니, 정방은 유신 등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김 문영['潁'을 '永'으로도 쓴다.]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유신은 군사들 앞에서 "대장군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 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라고 말하고,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의 노기 서린 머리털이 뻗뻗히 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은 발을 구르며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리되자 정방이 문영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로 하여금 글을 당 나라 장군에게 보내 철군할 것을 애걸하였다. 12일, 당과 신라 군사가 (원문 3자 결자) 의자의 도성을 포위하기 위하여 소부리 벌로 진격하였다. 정방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진격하지 않았다. 유신이 이를 달래어 신라와 당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방향에서 일제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다시 상좌평을 시켜 음식과 많은 선물을 보냈으나 정방은 이를 받지 않았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정방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정방은 이를 뿌리쳤다. 13일, 의자왕은 좌우의 측근들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주하여 웅진성을 지켰다. 의자왕의 아들 융은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가 원통하게도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융은 땅 바닥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8일, 의자는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도착하여, 제감 천복을 보내 당 나라에 전공을 보고하였다.

8월 2일,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정방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청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의자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였다. 이에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날 모척을 잡아 참수하였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이었으나 백제로 도망가서 대야성의 금일과 공모하여 신라의 성을 점령한 적이 있었으므로 참수한 것이다. 또한 금일을 잡아 죄를 일일이 따져가며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함께 공모하여, 백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창고를 불질러 없앴다.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 식량이 떨어져 마침내 패배를 당하였다. 이것이 첫번 째 죄이다. 네가 품석의 부처를 협박하여 죽였으니, 이것이 두번 째 죄이다. 네가 백제와 함께 와서 본국을 공격했으니, 이것이 세번 째 죄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지를 찟고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남은 적병이 남잠, 정현(원문 3자 결자)성에 웅거하였다.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 산에 진을 치고, 당과 신라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26일, 임존의 대책을 공격했으나, 적병이 많고 지세가 험준하여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소책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아 진을 쳤다.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과 급찬 길나가 군사 7천명으로 그를 도왔다. 정방이 백제왕 및 왕족,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배에 태우고 사비로부터 당 나라로 돌아갔다. 김 인문이 사찬 유 돈, 대내마 중지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23일, 백제의 잔적들이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사람들을 약탈하려 했다. 유수 유인원이 당 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출동시켜 이들을 격퇴하였다. 적들은 퇴각하여 사비의 남령에 올라가 너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주둔하면서 기회를 노려 성읍을 약탈하였다. 백제의 20여 성이 신라를 배반하고,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임명하여 보냈다. 28일, 문도가 삼년산성에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였다.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당 황제의 명령을 전달한 후, 문도가 황제의 선물을 왕에게 주려다가 갑자기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문도의 시종들이 대신하여 의식을 마무리 하였다.

10월 9일, 왕이 태자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례성을 공격하였다. 18일, 그 성을 점령하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게 하자,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 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30일, 사비 남령군의 목책을 공격하여 1천 5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11월 1일,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군주 필부가 전사하였다.

5일,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7일 만에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7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22일,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전공을 논하여, 계금의 군졸 선복을 급찬,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네 사람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관직을 주었다. 백제 사람도 재능에 따라 다음과 같이 임용하였다.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의 위품과 총관의 직위를 주었으며, 은솔 무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대감의 관직을 주었고, 은솔 인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제감의 관직을 주었다.


○八年春二月, <百濟>殘賊來攻<泗비城>. 王命伊찬<品日>爲大幢將軍, 잡찬<文王>·大阿찬<良圖>·阿찬<忠常>等副之. 잡찬<文忠>爲<上州>將軍, 阿찬<眞王>副之. 阿찬<義服>爲<下州>將軍, <武훌>·<旭川>等爲<南川>大監, <文品>爲誓幢將軍, <義光>爲郞幢將軍, 往救之. 三月五日, 至中路, <品日>分麾下軍, 先行往<豆良尹[一作伊.]城>南, 相營地. <百濟>人望陣不整, 猝出急擊不意, 我軍驚駭潰北. 十二日, 大軍來屯<古沙比城>外, 進攻<豆良尹城>, 一朔有六日, 不克. 夏四月十九日, 班師, 大幢·誓幢先行, <下州>軍殿後, 至<賓骨壤>, 遇<百濟>軍, 相鬪敗退. 死者雖少, 先{失}??亡兵械輜重甚多. <上州>郞幢遇賊於<角山>, 而進擊克之, 遂入<百濟>屯堡, 斬獲二千級. 王聞軍敗大驚, 遣將軍<金純>·<眞??{眞欽}>??·<天存>·<竹旨>·<濟師>救援. 至<加尸兮津>, 聞軍退至<加召川>, 乃還. 王以諸將敗績, 論罰有差. 五月九日[一云十一日.], <高句麗>將軍<??音信{惱音信}>??與<靺鞨>將軍<生偕>合軍, 來攻<述川城>, 不克. 移攻<北漢山城>, 列抛車飛石, 所當비屋輒壞. 城主大舍<冬타川>使人擲鐵질藜於城外, 人馬不能行, 又破<安養寺>름괴, 輸其材, 隨城壞處, 卽構爲樓櫓, 結환網, 懸牛馬皮綿衣, 內設弩砲以守. 時, 城內只有男女二千八百人, 城主<冬타川>能激勵少弱, 以敵强大之賊, 凡二十餘日. 然糧盡力疲, 至誠告天, 忽有大星, 落於賊營, 又雷雨以震, 賊疑懼解圍而去. 王嘉奬<冬타川>, 擢位大奈麻, 移<押督州>於<大耶>, 以阿찬<宗貞>爲都督. 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諡曰<武烈>, 葬<永敬寺>比{北}??, 上號<太宗>. <高宗>聞訃, 擧哀於<洛城門>.

三國史記卷第五.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2월, 백제의 잔적이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으로 임명하고,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와 아찬 충상 등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또한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으로 임명하고, 아찬 진왕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으며,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 무훌·욱천 등을 남천 대감, 문품을 서당 장군, 의광을 낭당 장군으로 임명하여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 중도에 이르자 품일이 자기 군사의 일부를 나누어 두량윤['윤'을 '이'라고도 한다.]성 남쪽에 먼저 가서 진지를 만들 곳을 살펴 보도록 하였다. 백제 사람들은 우리 진영이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고,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급습을 해왔다. 우리 군사들이 놀라 패주하였다. 12일, 대군이 고사비성 밖에 와서 진을 치고 있다가 두량윤성을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승리하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철수하면서 대당과 서당을 먼저 보내고, 하주의 군사를 뒤따라 오게 하였다. 그들이 빈골양에 이르렀을 때, 백제 군사를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사망자는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을 상당히 많이 잃었다. 상주 낭당은 각산에서 적을 만나 공격하여 승리하고, 마침내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가 2천 명을 참살하였다. 왕은 군사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 제사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이 가시혜진에 도착했을 때, 적군이 가소천까지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 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 책임을 물어 정도에 따라 벌을 주었다.

5월 9일[11일이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해와 군사를 합쳐 술천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그들은 방향을 바꾸어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포차를 벌려놓고 돌을 날려 보냈다. 그 돌에 맞은 담장과 집은 번번히 무너졌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은 성 밖에 마름쇠를 던져 놓아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또한 안양사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가져다가 성 안의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 굵은 밧줄로 그물을 얽고, 마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어매고, 그 안 쪽에 노포를 설치하여 성을 지켰다. 이 당시 성안의 남녀가 2천 8백 명 뿐이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린이와 힘 못 쓰는 자들까지도 격려하여 20여 일 동안이나 강한 적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 때 돌연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우레가 울리고 비가 오면서 천지가 진동하였다. 적들은 겁이 나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왕은 동타천을 가상하게 여기고 대내마로 발탁하였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로 변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 피가 5보 넓이로 흘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태종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당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5 끝




三國史記卷第六.



삼국사기 권 제 6


新羅本紀第六.

<文武王>上.


신라본기 제 6

문무왕 (상).


○<文武王>立. 諱<法敏>, <太宗王>之元子. 母<金>氏<文明>王后, 蘇判<舒玄>之季女, <庾信>之妹也. 其妹{자}??夢登<西兄山>頂坐, 旋流편國內. 覺與&季{文明}??言夢, &季{文明}??戱曰: "予願買兄此夢." 因與錦裙爲直. 後數日, <庾信>與<春秋公>蹴鞠, 因踐落<春秋>衣紐. <庾信>曰: "□□□{吾家幸}??近, 請往綴紐." 因與俱往宅, 置酒, 從容喚□□{<寶姬>}??, □{持}??針線來縫. 其자有故不進, 其季進前縫綴. 淡粧輕服, 光艶炤人. <春秋>見而悅之, 乃請婚成禮, 則有娠生男, 是謂<法敏>. 妃<慈儀>王后, 波珍찬<善品>之女也. <法敏>姿表英特, 聰明多智略. <永徽>初如<唐>, <高宗>授以大府卿. <太宗>元年, 以波珍찬爲兵部令, 尋封爲太子. <顯慶>五年, <太宗>與<唐>將<蘇定方>, 平<百濟>, <法敏>從之, 有大功, 至是卽位.


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 新本.今西龍.今西龍.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 왕후이며,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고, 유신의 누이였다. 유신의 맏누이가 꿈에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두루 펴졌다. 그녀는 꿈을 깨고난 후에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동생은 장난 삼아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라고 말하고, 꿈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우리 집이 마침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고 말하고, 춘추와 함께 집으로 왔다. 그는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을 꿰매도록 하였다. 그러나 맏누이 보희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그녀의 수수한 화장과 경쾌한 의복, 그리고 어여쁜 얼굴은 눈이 부시는듯하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곧 혼인을 청하여 혼인식을 올렸다. 그녀는 바로 임신하여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를 법민이라 하였다. 왕비는 자의왕후이니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영휘 초에 당 나라에 갔을 때, 고종이 대부경 벼슬을 주었다. 태종 원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태자로 책봉되었다. 현경 5년에 태종이 당 나라 장수 소 정방과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元年六月, 入<唐>宿衛<仁問>·<儒敦>等至, 告王 "皇帝已遣<蘇定方>, 領水陸三十五道兵, 伐<高句麗>, 遂命王擧兵相應. 雖在服, 重違皇帝勅命." 秋七月十七日, 以<金庾信>爲大將軍, <仁問>·<眞珠>·<欽突>爲大幢將軍, <天存>·<竹旨>·<天品>爲貴幢摠管, <品日>·<忠常>·<義服>爲<上州>摠管, <眞欽>·<衆臣>·<自簡>爲<下州>摠管, <軍官>·<藪世>·<高純>爲<南川州>摠管, <述實>·<達官>·<文穎>爲<首若州>摠管, <文訓>·<眞純>爲<河西州>摠管, <眞福>爲誓幢摠管, <義光>爲郞幢摠管, <慰知>爲계衿大監. 八月, 大王領諸將, 至<始飴谷>停留. □使來告曰: "<百濟>殘賊, 據<甕山{瓮山}>??□□□{城遮路}??, □□□{不可前}??." □王{大王}??先遣使諭之, 不服. 九月十九日, 大王進次<熊峴停>, 集諸摠管大監, 親臨誓之. 二十五日, 進軍圍<甕山城>. 至二十七日, 先燒大柵, 斬殺數千人, 遂降之. 論功, 賜角干·伊찬爲摠管者劒;  잡滄{잡찬}??·波珍찬·大阿찬爲摠管者戟, 已下各一品位. 築<熊峴城>. <上州>摠管<品日>, 與<一牟山郡>太守<大幢>·<沙尸山郡>大守{太守}??<哲川>等, 率兵攻<雨述城>, 斬首一千級. <百濟>達率<助服>·恩率<波伽>與衆謀降. 賜位<助服>級찬, 仍授<古타耶郡>大守{太守}??, <波伽>級찬, 兼賜田宅衣物. 冬十月二十九日, 大王聞<唐>皇帝使者至, 遂還京. <唐>使弔慰, 兼勅祭前王, 贈雜彩五百段. <庾信>等休兵, 待後命, <含資道>摠管<劉德敏>至, 傳勅旨, 輸<平壤>軍粮.


李丙燾. 庾信傳.李丙燾. 庾信傳.李丙燾.

「북한본」.李丙燾. 庾信傳.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6월,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인문과 유돈 등이 돌아왔다. 그들은 왕에게 "황제가 이미 소 정방으로 하여금 35도의 수륙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면서, 마침내 왕께도 군사를 파견하여 응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상중일지라도 황제의 칙명을 어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가을 7월 17일, 김 유신을 대장군, 인문·진주·흠돌을 대당 장군, 천존·죽지·천품을 귀당 총관, 품일·충상·의복을 상주 총관, 진흠·중신·자간을 하주 총관, 군관·수세·고순을 남천주 총관, 술실·달관·문영을 수약주 총관, 문훈·진순을 하서주 총관, 진복을 서당 총관, 의광을 낭당 총관, 위지를 계금 대감으로 임명하였다.

8월, 대왕이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원문 1자 결자) 어떤 사람이 와서 "백제의 잔적이 옹산성에 웅거하여 길을 막고 있으니, 앞으로 전진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대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 그들을 타일렀으나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9월 19일, 대왕이 웅현정에 진주하여, 모든 총관과 대감들을 모아 놓고 직접 훈계하였다.

25일, 군사를 진군시켜 옹산성을 포위했다. 27일, 먼저 큰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목베어 죽이고, 마침내 그들을 항복시켰다. 왕이 공로를 평가하여 각간이나 이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칼을 주고, 잡찬이나 파진찬 또는 대아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창을 주고, 그 이하에게는 각각 위 1품씩을 올려 주었다. 웅현성을 쌓았다. 상주 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과 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1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백성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조복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어 고타야군 태수를 삼고, 파가에게는 급찬을 주고, 그들 둘 모두에게 밭과 집과 옷을 주었다.

겨울 10월 29일, 대왕이 당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당 나라 사신이 조의와 위로의 뜻을 표하고, 동시에 황제의 조칙에 따라 이전 임금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채색 비단 5백 필을 부조하였다.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함자도 총관 유 덕민이 와서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당 황제의 칙지를 전하였다.


○二年春正月, <唐>使臣在館, 至是, 冊命王爲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公}??<新羅>王. 拜伊찬<文訓>爲中侍. 王命<庾信>與<仁問>·<良圖>等九將軍, 以車二千餘兩, 載米四千石·租二萬二千餘石, 赴<平壤>. 十八日, 宿<風樹村>, 氷滑道險, 車不得行, 竝載以牛馬. 二十三日, 渡<七重河>, 至<산壤>. 貴幢弟監<星川>·軍師<述川>等, 遇賊兵於<梨峴>, 擊殺之. 二月一日, <庾信>等至??塞{獐塞}??, 距<平壤>三萬六千步. 先遣步騎監<裂起>等十五人, 赴<唐>營. 是日, 風雪寒호, 人馬多凍死. 六日, 至<楊오>, <庾信>遣阿찬<良圖>·大監<仁仙>等致軍粮, 贈<定方>以銀五千七百·分細布三十匹·頭髮三十兩·牛黃十九兩. <定方>得軍粮, 便罷還. <庾信>等聞<唐>兵歸, 亦還渡<과川{??川}>??. <高句麗>兵追之, 廻軍對戰, 斬首一萬餘級, 虜小兄<阿達兮>等, 得兵械萬數. 論功, 中分<本彼宮>財貨·田莊·奴僕, 以賜<庾信>·<仁問>. <靈廟寺>災. <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一作津.], 來降. <耽羅>自<武德>以來, 臣屬<百濟>, 故以佐平爲官號, 至是, 降爲屬國. 三月, 大赦. 王以旣平<百濟>, 命所司設大포. 秋七月, 遣伊찬<金仁問>, 入<唐>貢方物. 八月, <百濟>殘賊, 屯聚<內斯只城>, 作惡, 遣<欽純>等十九將軍, 討破之. 大幢摠管<眞珠>·<南川州>摠管<眞欽>, 詐稱病, 閑放不恤國事, 遂誅之, 幷夷其族. 沙찬<如冬>打母, 天雷雨震死, 身上題須주堂[주字未詳.]三字. <南川州>獻白鵲.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당 나라 사신이 객사에 머물고 있다가 이 때에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찬 문훈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왕이 유신·인문·양도 등 아홉 장군에게 수레 2천여 채에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18일, 풍수촌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길이 얼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수레가 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에 실었다. 23일, 칠중하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 귀당 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등이 이현에서 적병을 만나 이들을 죽였다.

2월 1일, 유신 등이 장새에 도착했는데, 이 곳에서 평양까지는 3만 6천 보 거리였다. 먼저 보기감 열기 등 15인을 당 나라 군영에 보냈다. 이 날은 바람과 눈으로 날씨가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다수 얼어 죽었다. 6일, 양오에 도착하여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등을 보내 군량을 전달하고, 정방에게는 은 5천 7백 푼, 가는 베 30필, 머리털 30량, 우황 19량을 선물하였다. 정방은 군량을 얻고는 곧 전투를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의 군사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되돌려 과천을 건넜다. 이 때 고구려 군사가 추격해오자 군사를 되돌려 대적하여 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소형 아달혜 등을 사로잡고, 병기를 무수히 노획하였다. 전공을 평가하면서 본피궁의 재물과 전장과 노복을 절반으로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주었다.

영묘사에 불이 났다.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률'을 '진'이라고도 한다.]이 항복해왔다. 탐라국은 무덕 이래로 백제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좌평으로 관직명을 삼았었는데, 이 때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3월, 대사령을 내렸다.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왕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큰 연회를 베풀게 하였다.

가을 7월, 이찬 김 인문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월, 백제의 잔적이 내사지성에 모여 반란을 도모하자 흠순 등 19명의 장군을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대당 총관 진주와 남천주 총관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고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목을 베고 동시에 그 일족을 모두 처형하였다.

사찬 여동이 그의 어머니를 때리자,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고 비가 내리다가 벼락이 그에게 떨어져 사망하였다. 그의 몸에 "수주당"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三年春正月, 作長倉於<南山新城>. 築<富山城>. 二月, <欽純>·<天存>領兵, 攻取<百濟><居列城>, 斬首七百餘級. 又攻<居勿城>·<沙平城>降之, 又攻<德安城>, 斬首一千七十級. 夏四月, 大<唐>, 以我國爲鷄林大都督府, 以王爲<鷄林州>大都督. 五月, 震<靈廟寺>門. <百濟>故將<福信>及浮圖{浮屠}??<道琛>迎故王子<扶餘풍>, 立之, 圍留鎭郞將<劉仁願>於<熊津城>. <唐>皇帝詔<仁軌>檢校<帶方州>刺使{刺史}??, 統{將}??前都督<王文度>之衆, 與我兵向<百濟>營, 轉鬪陷陳, 所向無前. <信>等釋<仁願>圍, 退保<任存城>. 旣而<福信>殺<道琛>, 井{幷}??其衆, 招還叛亡, 勢甚張. <仁軌>與<仁願>合, 解甲休士, 乃請益兵. 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 至<德物島>, 就<熊津府城>. 王領<金庾信>等二十八[一云三十.]將軍, 與之合攻<豆陵[一作<良>.]尹城>·<周留城>等諸城, 皆下之. <扶餘풍>脫身走, 王子<忠勝>·<忠志>等, 率其衆降, 獨<遲受信>據<任存城>, 不下. 自冬十月二十一日, 攻之, 不克, 至十一月四日, 班師, 至<舌[一作后.]利停>, 論功行賞有差. 大赦, 製衣裳, 給留鎭唐軍.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남산신성에 길다란 창고를 지었다. 부산성을 쌓았다.

2월,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7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또한 거물성과 사평성을 쳐서 항복케 하였으며, 덕안성을 쳐서 1천 70명의 머리를 베었다.

여름 4월, 당 나라가 우리 나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

5월,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군 복신과 중 도침이 예전 임금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세우고, 유진 낭장 유 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하였다. 당 황제는 인궤에게 검교대방주자사를 시켜 전 도독 왕문도의 무리를 통솔하고 우리 군사와 함께 백제 진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들은 도처에서 싸울 때마다 진지를 점령하였으니 가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은 인원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임존성을 수비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인 후에 그의 무리를 병합하고, 또한 그를 배반하고 도망했던 자들을 불러 모아서 큰 세력을 이루었다. 유 인궤는 유 인원과 군사를 합친 후,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대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는 조서를 내려 우위위장군 손 인사로 하여금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 왕은 김 유신 등 28명[30명이라고도 한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합쳐서 두릉['릉'을 '량'이라고도 한다.]윤성·주류성 등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도주하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그러나 지수신만은 혼자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1월 4일에는 회군하여 설['설'을 '후'라고도 한다.]리정으로 왔다. 공훈의 정도에 따라 논공행상을 하였다.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진에 머물고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 의복을 만들어 주었다.


○四年春正月, <金庾信>請老, 不允, 賜궤杖. 以阿찬<軍官>爲<漢山州>都督. 下敎婦人亦服中朝衣裳. 交通二月, 命有司徙民於諸王陵園, 各二十戶. 角干<金仁問>·伊찬<天存>與<唐>勅使<劉仁願>·<百濟><扶餘隆>, 同盟干{于}??<熊律{熊津}>??. 三月, <百濟>殘衆, 據<泗비山城>叛{反}??, <熊州{熊津}>??都督發兵, 攻破之. 地震. 遣<星川>·<丘日>等二{三}??十八人於<府城>, 學<唐>樂. 秋七月, 王命將軍<仁問>·<品日>·<軍官>·<文穎>等, 率<一善>·<漢山>二州兵, 與<府城>兵馬, 攻<高句麗><突沙城>, 滅之. 八月十四日, 地震, 壞民屋, 南方尤甚. 禁人擅以財貨田地施佛寺.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봄 정월, 김 유신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아찬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중국의 의복을 입게 하였다.

2월, 유사에게 명하여 역대의 왕릉에 능을 지킬 백성 20호씩을 이사시켰다. 각간 김 인문과 이찬 천존이 당 나라 칙사 유 인원, 백제의 부여융과 웅진에서 맹약을 맺었다.

3월, 백제의 잔당이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웅주 도독이 군사를 보내 이를 격파하였다. 지진이 있었다. 성천과 구일 등 28명을 웅진부성에 보내 당의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장군 인문·품일·군관·문영 등에게 명령하여 일선주와 한산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부성의 군사와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공격케하여 그들을 격멸하였다.

8월 14일,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무너졌다. 남쪽 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백성들이 재물과 토지를 함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五年春二月, 中侍<文訓>致仕, 以伊찬<眞福>爲中侍. 伊찬<文王{文汪}>??卒, 以王子禮葬之. <唐>皇帝遣使來弔, 兼進贈紫衣一襲·腰帶一條·彩綾羅一百匹·초二百匹. 王贈<唐>使者金帛尤厚. 秋八月, 王與勅使<劉仁願>·<熊津>都??{都督}??<扶餘隆>盟于<熊津><就利山>. 初, <百濟>自<扶餘璋>與<高句麗>連和, 屢??{侵}??伐封역. 我遣使入朝求救, 相望于路. 及<蘇定方>旣平<百濟>軍廻, 餘衆又叛. 王與鎭守使<劉仁願>·<劉仁軌>等, 經略數年, 漸平之. <高宗>詔: <扶餘隆>歸, 撫餘衆及令與我和好. 至是, 刑白馬而盟, 先祀神祇及川谷之神, 而後삽血. 其盟文日{曰}??: "往者, <百濟>先王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託<高句麗>, 交通<倭>國, 兵{共}??爲殘暴, 侵削<新羅>, 剽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無辜, 頻命行人, 遣其和好. 負험恃遠, 侮慢天經, 皇赫斯怒, 공{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저}??宮안{오}??宅, 作誡{範}??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然懷柔伐叛, 前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낭冊. 故立{樹}??前<百濟>大司稼正卿<扶餘隆>, 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各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誘{諭}??, 寔{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삽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弟兄, 祗奉綸言{音}??, 不敢失墜, 旣盟之後, 共保歲寒. 若有背盟{棄信不恒??/乖背不恒??},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수, 明신{神}??監{鑒}??之, 百殃是降, 子孫不育{昌}??, 杜稷{社稷}??無守, 인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券,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敢違祀{犯}??. 神之聽之, 是饗{享}??是福." <劉仁軌>之辭也. 삽訖, 埋牲幣於壇之壬地, 藏其書於我之宗廟. 於是, <仁軌>領我使者及<百濟>·<耽羅>·<倭>人四國使, 浮海西還, 以會祠<泰山>. 立王子<政明>爲太子, 大赦. 冬, 以<一善>·<居列>二州民輸軍資於<河西州>. 絹{초}??布舊以十尋爲一匹, 改以長七步廣二尺爲一匹.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兩唐書. 「天地瑞祥志」.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天地瑞祥志」.李丙燾. 「天地瑞祥志」.李丙燾. 「舊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李丙燾. 「天地瑞祥志」.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天地祥瑞志」.李丙燾. 「天地祥瑞志」.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2월, 중시 문훈이 은퇴하자 이찬 진복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이찬 문왕이 사망하자 왕자의 예식으로 장사지냈다. 당 황제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동시에 자주옷 한 벌과 허리띠 한 벌, 채색 능직 비단 1백 필, 생초 2백 필을 보내왔다. 왕이 당 나라 사자에게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었다.

가을 8월, 왕이 칙사 유 인원·웅진 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화친을 맹서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의 부여장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으면서부터 자주 우리의 국토를 침범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는 연이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고 구원병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었다. 또한 소 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당으로 돌아가자 백제의 잔당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진수사 유 인원·유 인궤 등과 함께 수년간 이들을 정벌하여 점점 평정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당 고종은 부여융에게 조서를 내려 그로 하여금 신라로 오게하여 잔당들을 무마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와 화친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때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강과 계곡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 순서로 입에 피를 발랐다. 그 서약문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 날 백제의 전 임금이 역리와 순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낼 줄 모르고, 인척간에 화목하지 못하면서,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내통하여, 그들과 함께 포악한 행동으로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을 약탈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잃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화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리가 험하며 거리가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므로, 황제가 대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는 토벌을 결행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향하는 곳은 한 번의 전투로 완전히 평정되었다. 사정이 이러한 즉 마땅히 궁실과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이후의 세대에 경계심을 주고,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순한 자를 받아 들이고, 배반하는 자를 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이며, 망한 것을 다시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지난 날 성인들의 공통된 규범이었다. '모든 일은 옛날의 교훈에서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 역사서에 전해져 온다. 이에 따라 전 백제의 대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자기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하고, 그의 옛 고장을 보전케 할 것이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야 할 것이며, 각각의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어 서로 화친하여, 모두가 당의 조칙을 받들고, 영원히 당의 번방으로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노성현공 유 인원을 보내 직접 권유하고 황제의 뜻을 상세하게 선포한다. 두 나라는 혼인으로써 약조를 맺어 맹세를 다졌으며, 짐승을 잡아 피를 머금었으니, 언제나 함께 화목하며 재난을 함께 극복하고 환난을 구제하며, 형제와 같이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삼가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맹세를 마친 뒤에는 모두 함께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맹세를 저버리고 행동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키거나 무리를 움직이거나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신명이 굽어 볼 것이요, 수 없는 재앙이 내릴 것이며, 자손을 기르지 못할 것이요,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며, 제사가 끊어질 것이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금서철권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 두고, 자손 만대를 통하여 감히 어기거나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신령이여 이를 들으시고, 흠향하시고 복을 베푸소서."

이 맹약문은 유 인궤의 글이다. 입에 피를 바르는 절차를 마치고, 제물은 제단의 북쪽 땅에 묻었으며, 문서는 우리 종묘에 보관하였다. 이 때 유 인궤는 우리 사신과 백제·탐라·왜 등의 네 나라 사신을 거느리고 뱃길로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겨울에, 일선·거열 2주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군수품을 하서주로 운반하였다. 예전에는 명주와 베 열 발을 한 필이라고 했는데, 이를 고쳐서 길이 일곱 보 넓이 두 자를 한 필로 정하였다.


○六年春二月, 京都地震. 夏四月, <靈廟寺>災. 大赦. <天存>之子<漢林>· <庾信>之子<三光>, 皆以奈麻入<唐>宿衛. 王以旣平<百濟>, 欲滅<高句麗>, 請兵於<唐>. 冬十二月, <唐>以<李勣>爲<遼東>道行軍大摠管, 以司列少常<伯安陸>·<학處俊>副之, 以擊<高句麗>. <高句麗>貴臣<淵淨土>, 以城十二, 戶七百六十三, 口三千五百四十三來投. <淨土>及從官二十四人, 給衣物·糧料·家舍, 安置王都及州府. 其&八{十二}??城完, ??{병}??遣士卒鎭守.


李丙燾. 「通鑑」.李丙燾. 「通鑑」.

6년 봄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영묘사에 불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천존의 아들 한림과 유신의 아들 삼광이 모두 내마로서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가 되었다. 왕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멸하고자 당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겨울 12월, 당 나라가 이적을 요동방면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 백 안륙과 학 처준을 보좌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대신 연 정토가 12성, 7백 63호, 3천 5백 43명을 데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정토와 종관 24명에게 의복·식량·주택을 주어 서울과 부주에 안주시켰다. 그 중 8개 성이 완성되자 군사를 파견하여 수비토록 하였다.


○七年秋七月, 大포三日. <唐>皇帝勅以<智鏡>·<愷元>爲將軍, 赴<遼東>之役, 王卽以<智鏡>爲波珍찬, <愷元>爲大阿찬. 又皇帝勅以<日原>大阿찬爲雲麾將軍, 王命於宮庭受命. 遣大奈麻<汁恒世>, 入<唐>朝貢. <高宗>命<劉仁願>·<金仁泰>從<卑列道>, 又徵我兵, 從<多谷>·<海谷>二道, 以會<平壤>. 秋八月, 王領大角干<金庾信>等三十將軍, 出京. 九月, 至<漢城停>以待<英公>. 冬十月二日, <英公>到<平壤城>北二百里, 差遣<이同兮>村主大奈麻<江深>, 率<契丹>騎兵八十餘人, 歷<阿珍含城>, 至<漢城>移書, 以督兵期, 大王從之. 十一月十一日, 至<獐塞>, 聞<英公>歸. 王兵亦遇{還}??. 仍授<江深>位級찬, 賜粟五百石. 十二月, 中侍<文訓>卒. <唐>留鎭將軍<劉仁願>, 傳宣天子래命, 助征<高句麗>, 仍賜王大將軍旌節.


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가을 7월, 사흘 동안 큰 연회를 베풀었다.

당 황제가 칙령으로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 전투에 참전하게 하자, 왕은 즉시 지경을 파진찬, 개원을 대아찬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황제가 대아찬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임명하는 칙령을 보내니, 왕은 일원에게 대궐 뜰에서 그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대나마 즙항세를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고종은 유 인원·김 인태를 비열도로 가게하고, 또한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해곡의 두 길을 경유하여 평양에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가을 8월, 왕이 대각간 김 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9월, 한성정에 도착하여 영공을 기다렸다.

겨울 10월 2일, 영공이 평양성 북쪽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영공은 그 곳에서 이동혜 촌주 대내마 강심으로 하여금 거란 기병 80여 명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경유하여 한성에 이르러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그 편지는 군사의 동원 기일을 독촉하는 것이었다. 대왕이 이에 응하였다.

11월 11일, 왕이 장새에 도착하여 영공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따라 왕의 군대도 역시 돌아왔다. 강심에게 급찬의 작위와 곡식 5백 석을 주었다.

12월, 중시 문훈이 사망하였다. 당 나라 유진장군 유 인원이 고구려 정벌을 도우라는 천자의 칙명을 전달하고, 왕에게 대장군정절을 주었다.


○八年春, <阿麻>來服. 遣<元器>與<淨土>入<唐>, <淨土>留不歸, <元器>還. 有勅此後禁獻女人. 三月, 拜波珍찬<智鏡>爲中侍. 置<比列忽州>, 仍命波珍찬<龍文>爲摠管. 夏四月, 彗星守天船. 六月十二日, <遼東>道安撫副大使<遼東>行軍副大摠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摠管右{左}??相檢校太子左中護上柱國<樂城縣>開國男<劉仁軌>, 奉皇帝勅旨, 與宿衛沙찬<金三光>到<黨項津>. 王使角干<金仁問>, 廷{往}??迎之以大禮. 於是, 右相約束訖, 向<泉岡>. 二十一日, 以大角千{大角干}??<金庾信>大幢爲{爲大幢}??大摠管; 角干<金仁問>·<欽純>·<天存>·<文忠>·잡찬<眞福>·波珍찬<智鏡>·大阿찬<良圖>·<愷元>·<欽突>, 爲大幢摠管; 伊찬<陳純>[一作<春>.]·<竹旨>, 爲京停摠管; 伊찬<品日>·잡찬<文訓>·天阿찬{大阿찬}??<天品>, 爲貴幢摠管; 伊찬<仁泰>, 爲<卑列道>摠管; 잡찬<軍官>·天阿찬{大阿찬}??<都儒>·阿찬<龍長>, 爲<漢城州>行軍摠管; 잡찬<崇信>·大阿찬<文穎>·阿찬<福世>, 爲<卑列城州>行軍摠管; 波珍찬<宣光>·阿찬<長順>·<純長>, 爲<河西州>行軍摠管; 波珍찬<宜복{宜福}>??·阿찬<天光>, 爲誓幢摠管; 阿찬<日原>·<興元>, 爲계衿幢摠管. 二十二日, <府城><劉仁願>遣貴于{貴干}??<未힐>, 告<高句麗><大谷□{大谷城}>??·<漢城>等二郡十二城歸服, 王遣一吉찬<眞功>稱賀. <仁問>·<天存>·<都儒>等領<一善州>等七郡及<漢城州>兵馬, 赴<唐>軍營. 二十七日, 王發京赴<唐>兵. 二十九日, 諸道摠管發行, 王以<庾信>病風留京. <仁問>等遇<英公>, 進軍於<영留山>下.[<영留山>在今<西京>北二十里.] 秋七月十六日, 王行次<漢城州>, 敎諸摠管往會大軍. <文穎>等遇<高句麗>兵於<蛇川>之原, 對戰大敗之. 九月二十一日, 與大軍合圍<平壤>, <高句麗>王先遣<泉男産>等, 詣<英公>請降. 於是, <英公>以王<寶臧>·王子<福男>·<德男>·大臣等二十餘萬口廻<唐>. 角干<金仁問>·大阿찬<助州>隨<英公>歸, <仁泰>·<義福>·<藪世>·<天光>·<興元>隨行. 初, 大軍平<高句麗>, 王發<漢城>指<平壤>, 次<힐次壤>, 聞<唐>諸將已歸, 還至<漢城>. 冬十月二十二日, 賜<庾信>位太大角千{太大角干}??, <仁問>大角干, 已外伊찬將軍等竝爲角干, 蘇判已下竝增位一級. 大幢少監<本得>, <蛇川>戰功第一. <漢山州>少監<朴京漢>, <平壤>城內殺軍主<述脫>, 功第一. 黑嶽令<宣極>, <平壤城>大門戰功第一, 竝授位一吉찬, 賜租一千石; 誓幢幢主<金遁山>, <平壤>軍營戰功第一, 授位沙찬, 賜租七百石; 軍師<南漢山><北渠>, <平壤城>北門戰功第一, 授位述干, 賜粟一千石; 軍師<斧壤><仇杞>, <平壤>南橋戰功第一, 授位述干, 賜粟七百石; 假軍師<比列忽><世活>, <平壤>少城戰功第一, 授位高干, 賜粟五百石; <漢山州>少監<金相京>, <蛇川>戰死, 功第一, 贈位一吉찬, 賜租一千石. <牙述>沙찬<求律>, <蛇川>之戰, 就橋下涉水出, 與賊鬪大勝, 以無軍令, 自入危道, 功雖第一而不錄, 憤恨欲經死, 旁人救之, 不得死. 二十五日, 王還國, 次<褥突驛>, <國原>仕臣<龍長>大阿찬, 私設筵, 饗王及諸侍從. 及樂作, 奈麻<緊周>子<能晏>, 年十五歲, 呈<加耶>之舞, 王見容儀端麗, 召前撫背, 以金盞勸酒, 賜幣帛頗厚. 十一月五日, 王以所虜<高句麗>人七千入京. 六日, 率文武臣寮, 朝謁先祖廟, 告曰: "祗承先志, 與大<唐>同擧義兵, 問罪於<百濟>·<高句麗>, 元凶伏罪, 國步泰靜, 敢玆控告, 神之聽之." 十八日, 賚死事者, 少監已上十□□匹, 從者二十匹. 十二月, <靈廟寺>災.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趙炳舜.『북한본』.『북한본』

8년, 봄에 아마가 와서 항복하였다. 원기와 정토를 당 나라에 보냈다. 정토는 당 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원기는 돌아왔다.

이후로는 여자를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황제의 칙명이 있었다.

3월,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비열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을 총관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천선 성좌에 나타났다.

6월 12일, 요동방면 안무부대사 요동행군 부대총관 겸 웅진 방면 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태자 좌중호 상주국 낙성현 개국남 유 인궤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숙위 사찬 김 삼광과 함께 당항진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 인문으로 하여금 성대한 예우로 그를 맞게 하였다. 이 날, 우상 유 인궤는 약속을 끝내고 천강으로 떠났다.

21일, 대각간 김 유신을 대당 대총관, 각간 김 인문·흠순·천존·문충과 잡찬 진복·파진찬 지경·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을 대당 총관, 이찬 진순['순'을 '춘'이라고도 한다.]·죽지를 경정 총관, 이찬 품일·잡찬 문훈·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 잡찬 군관·대아찬 도유·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 총관, 잡찬 숭신·대아찬 문영·아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 총관, 파진찬 선광·아찬 장순, 순장으로 하서주 행군 총관, 파진찬 의복과 아찬 천광을 서당 총관을 삼고, 아찬 일원과 흥원으로 계금당 총관을 임명하였다.

22일, 부성의 유 인원이 귀간 미흘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성·한성 등 2군 12성이 항복하여 귀순한 것을 보고하였다. 왕이 일길찬 진공을 보내 이를 치하하였다. 인문·천존·도유 등이 일선주 등 7군과 한성주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영으로 갔다.

27일, 왕이 서울을 떠나 당 나라 군영으로 갔다.

29일, 각도의 총관들이 출발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풍병을 앓았으므로 왕이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인문 등이 영공을 만나 영류산 아래[영류산은 지금 서경 북쪽 20리에 있다.]로 진군하였다.

가을 7월 16일, 왕이 한성주에 행차하여 모든 총관들에게 가서 당 나라 군대와 연합하도록 지시하였다. 문영 등이 사천 벌에서 고구려 군사와 마주쳐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다.

9월 21일, 당 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우선 천 남산 등을 보내 영공을 방문하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이 때 영공이 왕 보장과 왕의 아들 복남·덕남과 대신 등 20여만 명을 당 나라로 보냈다. 각간 김 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 돌아가고,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도 그들을 수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당 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평정하려 했을 때, 왕은 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다가 흘차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당 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귀국하였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 왔다.

겨울 10월 22일, 유신에게 태대각간, 인문에게 대각간의 직위를 주고, 이 밖에 이찬·장군 등은 모두 각간의 직위를 주었으며,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위품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 대당소감 본득은 사천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며, 한산주 소감 박 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인 전공이 제일 높았으며 흑악령 선극은 평양성 대문 싸움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모두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벼 1천 석을 주었다. 서당 당주 김 둔산은 평양 군영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사찬의 직위와 벼 7백 석을 주었다. 군사 남한산 사람 북거는 평양성 북문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술간의 직위와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군사 부양 사람 구기는 평양 남교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술간의 직위와 곡식 7백 석을 주었다. 가군사 비열홀 사람 세활은 평양 소성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고간의 직위와 곡식 5백 석을 주었다. 한산주 소감 김 상경은 사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일길찬의 직위와 벼 1천 석을 주었다. 아술 사찬 구율은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령없이 임의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으므로, 전공은 비록 제일 높았으나 공신록에 등록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분하게 여겨 목매어 죽으려 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구하여 죽지 못하였다.

25일, 왕이 귀국하는 길에 욕돌역에서 묵었다. 그 때, 국원의 지방관인 대아찬 용장이 개인적으로 연회를 열어 왕과 여러 시종들을 접대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내마 긴주의 아들 능안이 나이 15세로서 가야의 춤을 추었다. 왕이 그의 얼굴과 거동이 단정하고도 고운 것을 보고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면서 금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을 후하게 주었다.

11월 5일, 왕이 고구려 포로 7천 명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6일, 왕이 문무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고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삼가 선왕의 뜻을 이어서 대당과 함께 정의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묻고 그 괴수를 처단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국운이 태평하여졌기에 감히 고하오니 신이여 들으소서."

18일, 전쟁 중의 전사자에게 폐백을 내렸다. 소감 이상은 십(원문 2자 결자)필, 종자에게는 20필씩을 주었다.

12월, 영묘사에 불이 났다.


○九年春正月, 以<信惠>法師爲政官大書省. <唐>僧<法安>來傳天子命求磁石. 二月二十一日, 大王會群臣, 下敎: "往者, <新羅>隔於兩國, 北伐西侵, 暫無寧歲, 戰士曝骨, 積於原野, 身首分於庭界. 先王愍百姓之殘害, 忘千乘之貴重, 越海入朝, 請兵絳闕, 本欲平定兩國, 永無戰鬪, 雪累代之深讐, 全百姓之殘命. <百濟>雖平, <高麗{高(+句)麗}>??未滅, 寡人承克定之遺業, 終已成之先志. 今兩敵旣平, 四隅靜泰, 臨陣立功者, 竝已酬賞, 戰死幽魂者, 追以冥資. 但囹圄之中, 不被泣辜之恩, 枷쇄之苦, 未蒙更新之澤. 言念此事, 寢食未安, 可赦國內. 自<總章>二年二月二十一日昧爽已前, 犯五逆罪死已下, 今見囚禁者, 罪無小大, 悉皆放出; 其前赦已後犯罪奪爵者, 竝令依舊; 盜賊人, 但放其身, 更無財物可還者, 不在徵限; 其百姓貧寒, 取他穀米者, 在不熟之地者, 子母俱不須還, 若在熟處者, 至今年收熟, 只還其本, 其子不須還. □□{今月}??三十日爲限, 所司奉行!" 夏五月, <泉共{泉井}>??·<比□□{比列忽}>??·<□連{各連}>??等三郡民饑, 發倉賑恤. 遣<祇珍山>級찬等, 入<唐>獻磁石二箱. 又遣<欽純>角干·<良圖>波珍찬, 入<唐>謝罪. 冬, <唐>使到傳詔, 與弩師<仇珍川{仇珍山}>??沙찬廻. 命造木弩, 放箭三十步. 帝問曰: "聞在爾國造弩射一千步, 今재三十步, 何也{耶}???" 對曰: "材不良也, 若取材本國, 則可以作之." 天子降使求之, 卽遣<福漢>大奈麻獻木. 乃命改造, 射至六十步. 問其故, 答曰: "臣亦不能知其所以然, 殆木過海, 爲濕氣所侵者歟." 天子疑其故不爲, 劫之以重罪, 而終不盡呈其能. 頒馬거九{凡}??一百七十四所: 屬所內二十二, 官{宮}??十, 賜<庾信>太大角干六, <仁問>太角干五, 角干七人各三, 供찬{伊찬}??五人各二, 蘇判四人各二, 波珍찬六人·大阿찬十二人各一, 以下七十四所, 隨宜賜之.


『북한본』.李丙燾.『북한본』.趙炳舜『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趙炳舜.李丙燾. 國譯 三國史記.李丙燾.

9년, 봄 정월에 신혜 법사를 정관 대서성에 임명하였다. 당 나라 중 법안이 와서 자석을 구해보라는 천자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2월 21일,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예전에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하여, 북쪽에서 쳐들어오고 서쪽에서 쳐들어와 잠시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사의 백골은 벌판에 쌓였으며, 몸과 머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상을 불쌍히 여겨 천승지국의 왕이라는 신분도 잊으시고, 바다 건너 당 나라의 조정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다. 그 본래의 뜻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영원히 전쟁을 없애고, 누대에 쌓인 깊은 원한을 갚자는 것이었으며,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보전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비록 평정되었으나 고구려는 미쳐 멸하지 못하였으므로, 선왕께서 평정하신 유업을 과인이 계승하여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 두 적국이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고 태평하여졌으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는 모두 상을 주었고, 전사한 영혼에게는 명자를 추증하였다. 그러나 감옥의 죄수들은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칼을 쓴 채 새 세상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생각하면 자고 먹는 사이에도 편안하지 않으니, 국내의 죄수들을 사면함이 옳을 것이다. 총장 2년 2월 21일 새벽 이전에 5역죄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 이하를 범한 자들로서 현재 옥에 갇혀 있는 자는, 죄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석방할 것이며, 이전의 대사령으로 석방된 이후에 죄를 범하여 벼슬을 빼앗긴 자는 모두 복직시키고, 도적질한 자는 석방하되 배상할 재물이 없는 자는 한도액까지 배상하지는 않도록 할 것이며,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빌려 먹은 자로서 작황이 좋지 않은 곳에 사는 자는 본곡과 이자를 반드시 갚지는 않아도 되게 할 것이며, 만약 작황이 좋은 곳에 산다면 금년 추수 후에 본곡만 갚고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이 달 30일 안으로 해당 관청이 집행하라."

여름 5월, 천정·비열홀·각연 등 3군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급찬 지진산 등을 당 나라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또한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당 나라에 보내 사죄하였다.

겨울, 당 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고,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인 사찬 구 진천을 데리고 갔다. 당 황제가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였다. 만든 후에 화살을 쏘아보니 30보 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 보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자는 사신을 보내 목재를 요구하였고, 곧바로 대내마 복한을 보내 목재를 바쳤다. 황제는 즉시 쇠뇌를 개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조한 후에 쏘아보니 60보 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그 이유를 물었다. 구 진천은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목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습기가 배어 들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자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중죄를 준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

말을 기르는 우리 174개소를 지어 주었다. 말 우리를 관리하는 관청에 22개소, 궁중에 10개소, 태대각간 유신에게 6개소, 태각간 인문에게 5개소, 각간 7인에게 각 3개소, 이찬 5인에게 각 2개소, 소판 4인에게 각 2개소, 파진찬 6인과 대아찬 12인에게 각 1개소를 지어주고, 나머지 74개 소는 적당하게 나누어 지어주었다.


○十年春正月, <高宗>許<欽純>還國, 留囚<良圖>, 終死干{于}??圓獄. 以王擅取<百濟>土地遺民, 皇帝責怒, 再留使者. 三月, 沙찬<薛烏儒>與<高句麗>太□□{大兄}??<□延武{高延武}>??, 正各率精兵一{二}??, 度<鴨록江{鴨綠江}>??, 至<屋骨>, □□□<靺鞨>兵先至<皆敦壤>待之. 夏四月四日, 對戰, 我兵大克之, 斬獲不可勝計. <唐>兵繼至, 我兵退保<白城>. 六月, <高句麗><水臨城>人<年岑{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至}??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 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來}??告曰: "興滅國, 繼絶世, 天下之公義也, 椎{惟}??大國是望. 我國先王目{以}??失道見滅, 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永世盡忠." 王處之國西<金馬渚>. <漢祇部>女人, 一産三男一女, 賜粟二百石. 秋七月, 王疑<百濟>殘衆反覆, 遣大阿찬<儒敦>於<熊津>都督府請和, 不從, 乃遣<司馬稱{司馬彌}>??軍窺첨. 王知謀我, 止<稱{彌}>??軍不送, 擧兵討<百濟>. <品日>·<文忠>·<衆臣>·<義官>·<天官>等, 攻取城六十三, 徙其人於內地. <天存>·<竹旨>等取城七, 斬首二千. <軍官>·<文穎>取城十二, 擊狄兵, 斬首七千級, 獲戰馬兵械甚多. 王還, 以<衆臣>·<義官>·<達官>·<興元>等□□□寺營退却, 罪當死, 赦之免職. <倉吉于>□□□□一, 各授位級찬, 賜租有差. 遣沙찬<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大祖{太祖}??<中牟王>, 積德比{北}??山, 立切{功}??南海, 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토>.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津{建}>??·<産>兄弟, 禍起蕭墻, 흔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山野, 投單身於隣國, 遊離辛苦, 迹同<晉文>, 更興亡國, 事等<衛侯>. 夫百姓不可以無主, 皇天必有以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於祭祀, 非公而誰? 謹遣使一吉찬<金須彌山>等, 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 公宜撫集遺民, 紹興舊緖, 永爲隣國, 事同昆弟, 敬哉敬哉. 兼送粳米二千石, 甲具馬一匹, 綾五匹, 絹·細布各十匹, 綿十五稱, 王其領之!" 十二月, 土星入月. 京都地震. 中侍<智鏡>退.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漢城州>摠管<藪世>取<百濟>□□□□□□國, 適彼事覺, 遣大阿찬<眞珠>, 誅之.[十二□□□賁書所六{云}??□□강事同異可.]

三國史記卷第六.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북한본」.李丙燾.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10년, 봄 정월에 당 고종이 흠순의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하여 가두었다. 그는 결국 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유민들을 차지하였다는 이유로 황제가 노하였고, 이에 따라 사신을 억류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3월, 사찬 설 오유가 고구려의 태대형 고 연무와 함께 각각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렀다. (원문 3자 결자) 말갈 군사가 먼저 개돈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 말갈 군사와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참획한 것이 이루 셀 수 없었다. 당 나라 군사가 계속하여 도착하자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을 지켰다.

6월, 고구려 수림성 사람 대형 모잠이 고구려의 유민을 모았다. 그는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도착하여 당 나라 관리와 중 법안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오는 도중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 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났다. 그들은 안승을 한성으로 맞아 들여 임금으로 삼았다. 그리고 소형 다식 등을 우리에게 보내 애소하기르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공의이니, 오직 대국이 이를 허락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하였으나, 이제 저희들이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신라의 속국이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애소하였다. 왕은 그들을 서쪽 지방 금마저에 살게 하였다.

한기부 여자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녀에게 곡식 2백 석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은 백제의 유민들이 배반할 것을 걱정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 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도독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곧 사마칭의 군사를 보내 우리를 정탐하도록 하였다. 왕이 우리를 해치려는 그들의 음모를 알고는 사마칭의 군사를 억류한 채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품일·문충·중신·의관·천관 등이 63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곳 사람들을 내지로 옮겨 살게 하였다. 천존·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적의 머리 2천 개를 베었으며, 군관·문영은 열 두 성을 빼앗고 적병을 공격하여 머리 7천 개를 베었고, 말과 병기를 매우 많이 노획하였다. 왕이 돌아와 중신·의관·달관·흥원 등이 (원문 3자 결자)...사영에 퇴각한 일이 있으므로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나 죄를 사면하여 면직만 시켰다. 창길우 (4자 결자)…일에게 각각 급찬의 작위를 주고, 공훈의 정도에 따라 벼를 주었다.

사찬 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에 책봉하였다. 그 책명문은 다음과 같다.

"함형 원년 세차 경오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명을 보낸다. 공의 태조 중모왕이 북쪽 땅에 덕을 쌓고, 남해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에 떨쳤고, 어진 교화가 현토를 덮었다. 자손이 뒤를 잇고, 본계와 지계가 끊이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가 되고 역사가 8백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남건·남산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란이 일어나 골육이 갈라지고, 집안과 나라가 망하고, 종묘와 사직이 사라졌으니, 백성들이 동요하여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공은 산야에서 위난을 피하다가 홀로 이웃 나라에 귀순하였으니, 그 유랑의 고통은 진 문공의 행적과 같고,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니 이는 위 선공의 행적과 같다고 할 것이다. 무릇 백성이란 임금이 없어서는 안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나니, 선왕의 정통 후계자도 오직 공일 뿐이요, 제사를 주관할 사람도 또한 공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이제 삼가 일길찬 김 수미산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책명을 전하고, 공을 고구려왕으로 명하노니,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위로하여 안정시키고 옛 전통을 일으킬 것이며, 길이 선린이 되어 형제와 같이 우리를 공경하고 섬겨야할 것이다. 이에 멥쌀 2천 석, 무장마 한 필, 능직 비단 다섯 필, 견직과 베 각 열 필, 면화 열다섯 칭을 보내니 왕은 이를 받으라!"

12월, 토성이 달에 들어가고,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중시 지경이 퇴직하였다.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치고, '해돋는 곳과 가까이 있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백제의 (원문 6자 결자)...나라를...약취하여, 그 곳으로 가려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왕이 대아찬 진주를 보내 그의 목을 베었다.[주석 부분은 빠진 자가 많아서 의미를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 제 6 끝




三國史記卷第七.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삼국사기 권 제 7

수충 정난 정국 찬화 동덕 공신, 개부 외동삼사, 검교 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 이례부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第七.

<文武王>下.


신라본기 제 7

문무왕(하).


○十一年春正月, 拜伊찬<禮元>爲中侍. 發兵侵<百濟>, 戰<熊津>南, 幢主<夫果>死之. <靺鞨>兵來圍<舌口城>, 不克將退, 出兵擊之, 斬殺三百餘人. (+王)??聞<唐>兵欲來??{구??/救??}<百濟>, 遣大阿찬<眞功>·阿찬, □□□□兵守<甕浦>. 白魚躍入□□□□□□□□□□一寸. 夏四月, 震<興輪寺>南門. 六月, 遣將軍<竹旨>等, 領兵踐<百濟><加林城>禾, 遂與<唐>兵戰於<石城>, 斬首五千三百級, 獲<百濟>將軍二人·<唐>果毅六人. 秋七月二十六日, 大<唐>摠管<薛仁貴>&使{遣僧}??<琳潤>法師寄書曰: "行軍摠管<薛仁貴>致書<新羅>王. 淸風萬里, 大海三千, 天命有期, 行遵此境. 奉承機心稍動, 窮武邊城, 去<由>也之片言, 失<侯生>之一諾. 兄爲逆首, 弟作忠臣, 遠分花악之陰, 空照相思之月. 興言彼此, 良增歎詠. 先王<開府>, 謀猷一國, 展轉百城, 西畏<百濟>之侵, 北警<&高麗{高句麗}??>之寇. 地方千里, 數處爭鋒, 蠶女不及桑時, 耘人失其疇序. 年將耳順, 楡景日侵, 不懼船海之危, 遠涉<陽侯>之險, 瀝心華境, 頓상天門, 具陳孤弱, 明論侵擾, 情之所露, 聽不勝悲. <太宗文皇帝>, 氣雄天下, 神王宇宙, 若<盤古>之九變, 同<巨靈>之一掌, 扶傾救弱, 日不暇給. 哀納先君, 矜收所請, 輕車駿馬, 美衣上藥, 一日之內, 頻遇殊私. 亦旣承恩, 對揚軍事, 契同魚水, 明於金石. 鳳약千重{里}??, 鶴關萬戶, 留連酒德, 연笑金除, 參論兵馬. 分期聲援, 一朝大擧, 水陸交鋒. 于時, 塞草分花, 楡星上莢. <駐필>之戰, <文帝>親行, 弔人恤隱, 義之深也. 旣而, 山海異形, 日月廻薄, 聖人下武, 王亦承家. 巖葛因依, 聲塵共擧, 洗兵刷馬, 咸遵先志. 數十年外, <中國>疲勞, 帑藏時開, 飛추日給. 以蒼島之地, 起黃圖之兵, 貴於有益, 貪於無用. 豈不知止, 恐失先君之信也. 今强寇已淸, 讐人喪國, 士馬玉帛, 王亦有之. 當應心려不移, 中外相輔, 銷鏑而化, 虛室爲情, 自然貽厥孫謀, 以燕翼子. 良史之讚, 豈不休哉? 今王去安然之基, 厭守常之策, 遠乖天命, 近棄父言, 侮暴天時, 侵欺隣好, 一隅之地, 僻左之추, 率戶徵兵, 連年擧斧, 孀姬輓粟, 稚子屯田. 守無所支, 進不能拒. 以得裨喪, 以存補亡, 大小不모, 逆順乖敍, 亦由持彈而往, 暗於枯井之危, 捕蟬而前, 不知黃雀之難, 此王之不知量也. 先王在日, 早蒙天권, 審懷險피之心, 假以披誠之禮, 從己私欲, 貪天至功, 苟希前惠, 圖爲後逆, 此先君之不長者也. 必其誓<河>若帶, 義分如霜, 違君之命, 不忠, 背父之心, 非孝, 一身二名, 何以自寧? 王之父子, 一朝振立, 此竝天情遠及, 威力相持, 方州連郡, 遂爲盤錯. 從此, 遞蒙冊命, 拜以稱臣. 坐治經書, 備詳詩禮, 聞義不從, 見善而輕, 聽縱橫之說, 煩耳目之神, 忽高門之基, 延鬼瞰之責. 先君盛業, 奉而異圖, 內潰疑臣, 外招强陣, 豈爲智也? 又<&高麗{高句麗}??><安勝>, 年尙幼沖, 遺壑殘부, 生人減半, 自懷去就之疑, 匪堪襟帶之重. <仁貴>樓船, 竟翼風帆, 連旗巡於北岸, 矜其舊日傷弓之羽, 未忍加兵, 恃爲外援, 斯何謬也! 皇帝德澤無涯, 仁風遠계, 愛同??{日}??景, 炤若春華. 遠聞消息, 초然不信, 爰命下臣, 來觀由委. 而王不能行人相問, 牛酒호師, 遂便隱甲雀陂{피}??, 藏兵江口, 기行林薄, 喘息萊{荒}??丘. 潛生自서之鋒, 而無相持之氣. 大軍未出, 游兵具行, 望海浮江, 魚驚鳥竄. 以此形況, 人事可求, 沈迷猖惑, 幸而知止. 夫擧大事者, 不貪小利, 杖高節者, 寄以英奇. 必其鸞鳳不馴, 豺狼有顧, <高>將軍之<漢>騎, <李謹行>之蕃云兵, <吳>·<楚>棹歌, 幽幷惡少, 四面雲合, 方舟而下, 依險築戍, 闢地耕田, 此王之膏盲{황}??也. 王若勞者歌, 事屈而頓申, 具論所由, 明陳彼此. <仁貴>夙陪大駕, 親承委寄, 錄狀聞奏, 事必昭蘇, 何苦총총, 自相영擾? 嗚呼, 昔爲忠義, 今乃逆臣, 恨始吉而終凶, 怨本同而末異. 風高氣切, 葉落年悲, 憑山遠望, 有傷懷抱. 王以機오{晤??/悟??}淸明, 風神爽秀, 歸以流謙之義, 存於順迪之心, 血食依時, 茅저不易, 占休納祐, 王之策也. 嚴鋒之間, 行人來往, 今遣王所部僧<琳潤>齎書, 佇布一二." 大王報書云: "先王<貞觀>二十二年, 入朝, 面奉<太宗文皇帝>恩勅 '朕今伐<高□麗{高句麗}??>, 非有他

故, 憐니<新羅>, 攝乎兩國, 每被侵陵, 靡有寧歲. 山川土地, 非我所貪, 玉帛子女, 是我所有. 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竝乞니<新羅>, 永爲安逸.' 垂以計會, 賜以軍期. <新羅>百姓, 具聞恩勅, 人人畜力, 家家待用. 大事未終, <文帝>先崩, 今帝踐祚, 復繼前恩, 頻蒙慈造, 有踰往日. 兄弟及兒, 懷金拖紫, 榮寵之極, 형古未有. 粉身碎骨, 望盡驅馳之用, 肝腦塗原, 仰報萬分之一. 至<顯慶>五年, 聖上感先志之未終, 成낭日之遺緖, 泛舟命將, 大發船兵. 先王年衰力弱, 不堪行軍, 追感前恩, 勉强至於界首, 遣某領兵, 應接大軍. 東西唱和, 水陸俱進, 船兵재入江口, 陸軍已破大賊. 兩軍俱到王都, 共平一國. 平定已後, 先王遂共<蘇>大摠管平章, 留<漢>兵一萬, <新羅>亦遣弟<仁泰>, 領兵七千, 同鎭<熊津>. 大軍廻後, 賊臣<福信>, 起於江西, 取集餘燼, 圍逼<府城>, 先破外柵, 摠奪軍資, 復攻<府城>, 幾將陷沒. 又於<府城>側近四處, 作城圍守, 於此, <府城>不得出入. 某領兵往赴解圍, 四面賊城, 竝皆打破, 先救其危, 復運粮食, 遂使一萬漢兵, 免虎吻之危難, 留鎭餓軍, 無易子而相食. 至六年, <福信>徒黨漸多, 侵取江東之地, <熊津><漢>兵一千, 往打賊徒, 피{被}??賊최破, 一人不歸. 自敗已來, <熊津>請兵, 日夕相繼. <新羅>多有疫病, 不可徵發兵馬, 苦請難違, 遂發兵衆, 往圍<周留城>. 賊知兵小, 遂卽來打, 大損兵馬, 失利而歸. 南方諸城, 一時摠叛, 竝屬<福信>, <福信>乘勝, 復圍<府城>. 因卽<熊津>道斷, 絶於鹽시, 卽募律{健}??兒, 偸道送鹽, 救其乏困. 至六月, 先王薨, 送葬재訖, 喪服未除, 不能應赴, 勅旨發兵北歸. <含資道>摠管<劉德敏>等至, 奉勅遣<新羅>供運<平壤>軍粮. 此時, <熊津>使人來, 具陳<府城>孤危. <劉>摠管與某平章自云: '若先送<平壤>軍粮, 卽恐<熊津>道斷, <熊津>若其道斷, 留鎭<漢>兵, 卽入賊手.' <劉>摠管遂共某相隨, 先打<瓮山城>. 旣拔<瓮山>, 仍於<熊津{熊峴}>??造城, 開通<熊津>道路. 至十二月, <熊津>粮盡. 先運<熊津>, 恐違勅旨, 若送<平壤>, 卽恐<熊津>絶粮. 所以差遣老弱, 運送<熊津>, 强健精兵, 擬向<平壤>. <熊津>送粮, 路上逢雪, 人馬死盡, 百不一歸. 至<龍朔>二年正月, <劉>摠管共<新羅><兩河道{西河道}>??摠管<金庾信>等, 同送<平壤>軍粮. 當時陰雨連月, 風雪極寒, 人馬凍死, 所將兵粮, 不能勝致. <平壤>大軍, 又欲歸還. <新羅>兵馬, 粮盡亦廻. 兵士饑寒, 手足凍촉, 路上死者, 不可勝數. 行至<瓠瀘河>, <高□麗{高句麗}??>兵馬, 尋後來진, 岸上列陣. <新羅>兵士, 疲乏日久, 恐賊遠진, 賊未渡河, 先渡交刃, 前鋒暫交, 賊徒瓦解, 遂收兵歸來. 此兵到家, 未經一月, <熊津府城>, 頻索種子, 前後所送, 數萬餘斛. 南運<熊津>, 北供<平壤>, 최小<新羅>, 分供兩所, 人力疲極, 牛馬死盡, 田作失時, 年穀不熟, 所貯倉粮, 漕運竝盡, <新羅>百姓, 草根猶自不足, <熊津><漢>兵, 粮食有餘. 又留鎭<漢>兵, 離家日久, 衣裳破壞, 身無全褐. <新羅>勸課百姓, 送給時服. 都護<劉仁願>, 遠鎭孤城, 四面皆賊, 恒被<百濟>侵圍, 常蒙<新羅>解救. 一萬<漢>兵, 四年衣食<新羅>, <仁願>已下, 兵士已上, 皮骨雖生<漢>地, 血肉俱是<新羅>. 國家恩澤, 雖復無涯, <新羅>效忠, 亦足矜憫. 至<龍朔>三年, 摠管<孫仁師>領兵, 來救<府城>, <新羅>兵馬, 亦發同征, 行至<周留城>下. 此時, <倭>國船兵, 來助<百濟>, <倭>船千소, 停在<白沙{白江}>??, <百濟>精騎, 岸上守船. <新羅>驍騎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卽降下. 南方已定, 廻軍北伐, <任存>一城, 執迷不降. 兩軍倂力, 共打一城, 固守拒한, 不能打得. <新羅>卽欲廻還, <杜>大夫云: '準勅, 旣平已後, 共相盟會, <任存>一城, 雖未降下, 卽可共相盟誓.' <新羅>以爲準勅 '旣平' 已後, 共相盟會, <任存>未降, 不可以爲 '旣平'. 又且<百濟>, 姦詐百端, 反覆不恒{恤}??, 今雖共相盟會, 於後恐有서臍之患, 奏請停盟. 至<麟德>元年, 復降嚴勅, 責不盟誓, 卽遣人於<熊嶺>, 築壇共相盟會. 仍於盟處, 遂爲兩界. 盟會之事, 雖非

所願, 不敢違勅. 又於<就利山>築壇, 對勅使<劉仁願>, 삽血相盟, 山河爲誓, 畵界立封, 永爲??{彊}??界, 百姓居住, 各營産業. 至<乾封>二年, 聞大摠管<英國公>征<遼某{遼東}>??, 往<漢城州{漢山州}>??, 遣兵集於界首. <新羅>兵馬, 不可獨入, 先遣細作三度, 船相次發遣, 첨候大軍. 細作廻來竝云: '大軍未到<平壤>.' 且打<高□麗{高句麗}><七重城>, 開通道路, 佇待大軍來至. 其城垂垂欲破, <英公>使人<江深>來云: '奉大摠管處分, <新羅>兵馬不須打城, 早赴<平壤>, 卽給兵粮.' 遣令赴會, 行至<水谷城>, 聞大軍已廻, <新羅>兵馬, 遂卽抽來. 至<乾封>三年, 遣大監<金寶嘉>入海, 取<英公>進止. 奉處分, <新羅>兵馬, 赴集<平壤>. 至五月, <劉>右相來, 發<新羅>兵馬, 同赴<平壤>. 某亦往<漢城州>, 檢校兵馬. 此時, <蕃>·<漢>諸軍, 摠集<蛇水>, <男建>出兵, 欲決一戰. <新羅>兵馬, 獨爲前鋒, 先破大陣, <平壤>城中, 挫鋒縮氣. 於後<英公>更取<新羅>驍騎五百人, 先入城門, 遂破<平壤>, 克成大功. 於此<新羅>兵士竝云: '自征伐已經九年, 人力탄盡, 終始平兩國, 累代長望, 今日乃成, 必當國蒙盡忠之恩, 人受效力之賞.' <英公>漏云: '<新羅>前失軍期, 亦須計定.' <新羅>兵士得聞此語, 更增파懼. 又立功軍將, 병錄入朝, 已到京下, 卽云: '今<新羅>병無功.' 夫軍將歸來, 百姓更加파懼. 又<卑列>之城, 本是<新羅>, <高??麗{高句麗}??>打得三十餘年, <新羅>還得此城, 移配百姓, 置官守捉, 又取此城, 還與<&高麗{高句麗}??>. 且<新羅>自平<百濟>, 흘定<&高麗{高句麗}??>, 盡忠效力, 不負國家, 未知何罪, 一朝遺棄. 雖有如此寃枉, 終無反叛之心. 至<總章>元年, <百濟>於盟會處, 移封易標, 侵取田地, 견我奴婢, 誘我百姓, 隱藏內地, 頻從索取, 至竟不還. 又通消息云: '國家修理船소, 外託征伐<倭>國, 其實欲打<新羅>.' 百姓聞之, 驚懼不安. 又將<百濟>婦女, 嫁與<新羅><漢城>都督<朴都儒>, 同謀合計, 偸取<新羅>兵器, 襲打一州之地, 賴得事覺, 卽斬<都儒>, 所謀不成. 至<咸亨>元年六月, <&高麗{高句麗}??>謀叛, 摠殺<漢>官. <新羅>卽欲發兵, 先報<熊津>云: '<&高麗{高句麗}??>旣叛, 不可不伐, 彼此俱是帝臣, 理須同討凶賊, 發兵之事, 須有平章, 請遣官人來此, 共相計會.' <百濟>司馬<녜軍>來此, 遂共平章云: '發兵已後, 卽{旣}??恐彼此相疑, 宜令兩處官人, 互相交質.' 卽遣<金儒敦>及府城<百濟>主簿<首彌>·<長貴>等, 向府平論交質之事. <百濟>雖許交質, 城中仍集兵馬, 到彼城下, 夜卽{則}??來打. 至七月, 入朝使<金欽純>等至, 將畵界地, 案圖披검<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三四年間, 一與一奪, <新羅>百姓, 皆失本望, 병云: '<新羅>·<百濟>累代深讐, 今見<百濟>形況, 別當自立一國, 百年已後, 子孫必見呑滅. <新羅>旣是國家之州, 不可分爲兩國. 願爲一家, 長無後患.' 去年九月, 具錄事狀, 發使奏聞, 被漂却來. 更發遣使, 亦不能達. 於後, 風寒浪急, 未及聞奏. <百濟>構架奏云: '<新羅>反叛.' <新羅>前失貴臣之志{心}??, 後被<百濟>之참, 進退見咎, 未申忠款. 似是之讒, 日經聖聽, 不貳之患{忠}??, 曾無一達. 使人<琳潤>至, 辱書仰承, 摠管犯冒風波, 遠來海外, 理須發使郊迎, 致其牛酒, 遠居異城, 未獲致禮, 時闕迎接, 請不爲怪. 披讀摠管來書, 專以<新羅>已爲叛逆, 旣非本心, 척然驚懼. 數自功夫, 恐被斯辱之譏, 緘口受責, 亦入不弔之數, 今略陳寃枉, 具錄無叛. 國家不降一介之使, 垂問元由. 卽遣數萬之衆, 傾覆巢穴, 樓船滿於滄海, 로축連於江口, 數(救}??彼<熊律{熊津}>??, 伐此<新羅>. 嗚呼! 兩國未定平, 蒙指종之驅馳, 野獸今盡, 反見烹宰之侵逼. 賊殘<百濟>, 皮{反}??蒙<雍齒>之賞, 殉<漢><新羅>, 已見<丁公>之誅. 大陽之曜, 雖不廻光, 葵藿本心, 猶양{懷}??向日. 摠管품英雄之秀氣, 抱將相之高材, 七德兼備, 九流涉獵, 恭行天罰, 濫加非罪? 天兵未出, 先問元由. 緣此來書, 敢陳不叛, 請摠管審自商量, 具狀申奏. <계林州>大都督左衛大將軍開府儀同三司上柱國<新羅>王<金法敏>白." 置<所夫里州>

, 以阿찬<眞王>爲都督. 九月, <唐>將軍<高侃>等, 率蕃兵四萬到<平壤>, 深溝高壘侵<帶方>. 冬十月六日, 擊<唐>漕船七十餘소, 捉郞將<鉗耳大侯>·士卒百餘人. 其淪沒死者, 不可勝數. 級찬<當千{當干}>??功第一, 授位沙찬.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李丙燾.李丙燾.『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李丙燾.李丙燾.李丙燾.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정월에 이찬 예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웅진 남쪽의 전투에서 당주 부과가 전사하였다. 말갈 군사가 와서 설구성을 포위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려 하자,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3백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당 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원문 4자 결자)을 보내 옹포를 수비하게 하였다.

백어가…에 뛰어 들었는데(원문 열 자 결자)…한 치 였다.

여름 4월,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 장군 죽지 등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 가림성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그 때 마침 당 나라 군사와 석성에서 전투가 벌어져 5천 3백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백제 장군 두 사람과 당 나라 과의(果毅) 여섯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가을 7월 26일, 대당총관 설 인귀가 임륜 법사를 시켜 신라왕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행군 총관 설 인귀는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육로 만리 해로 삼천리를 지나 본인은 황제의 명령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왕은 사심이 발동하여, 변경에 무력을 배치한다 하오니, 이는 자유(子由)의 한마디 말을 버린 것이요, 후생(侯生)의 한번 약속을 버린 것입니다.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었으며, 꽃과 꽃받침의 그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움의 달빛만 헛되이 비치고 있습니다. 이제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일을 말씀드리려 하니 실로 더욱 탄식이 나올 뿐입니다. 선왕 개부는 통일을 도모하여 온갖 성을 전전하면서,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노를 염려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약탈을 경계하였습니다. 사방 천리 땅 도처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누에 치는 여인들은 뽕 따는 시기를 놓쳤고, 김 매는 농부들은 밭갈이 할 시기를 잃었습니다. 선왕은 나이 60세라는 인생의 황혼기에도 뱃길의 위험을 감내하고 파도를 넘어 와서, 중국에 의지하는 심정으로, 황제의 대문에 머리 숙이며 어려운 상황을 고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 상황을 호소하는 말에 진정이 묻어 나왔으니, 이를 듣는 사람은 슬픈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태종 문황제는 기품이 천하에 제일이었으며, 정신은 우주에 군림하였으니, 반고의 아홉번 변화나 거령(巨靈)의 손과 같이, 쓰러지는 자를 부축해주고 약한 자를 구원하기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선왕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요청하는 것을 기꺼이 들어 주셨으며, 가벼운 수레와 빠른 말, 좋은 의복과 훌륭한 약품을 하루에도 여러번 주어 특별히 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으며, 군사에 관한 토의를 하게 되니, 그들의 약속은 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서로 의지하였으며, 쇠와 돌에 새긴 것 보다 더 분명하였습니다. 두 분은 찬란한 대궐과 번화한 수도에서 주연을 벌였으며, 궁정의 연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군사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일을 달리하여 서로 응원하기로 하고, 일시에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를 벌렸습니다. 그 때는 변방의 잡초에 꽃잎이 매달리고, 느릅나무에는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주필 전투에는 문제가 직접 가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불쌍한 자들을 구휼하였으니, 이는 매우 정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얼마 후, 산과 바다가 형상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 황제는 무기를 놓으셨고 왕도 역시 선왕의 뒤를 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위와 칡이 서로 의지하듯 함께 토벌군을 일으켰고, 병기와 말을 정비하여 선대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 후로 수십년이 흘러 중국은 국세가 흥성치 못하였으나 때때로 창고를 열어 일용할 물자를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신라를 위하여 중국의 군사를 일으키니, 중국에 유익한 일은 적고, 쓸 데 없는 일은 많았습니다. 이를 중지할 줄을 어찌 몰랐으리오마는, 선왕의 신의를 저버릴까 염려하여 그만 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강했던 적들이 이미 숙청되었고, 원수들은 나라를 잃었으며, 그 병사와 말과 재물을 왕이 또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마땅히 정신과 육체를 헛되이 쓰지 말고, 안팎이 서로 도와 병기를 녹이고 허욕에 눈뜨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실정에 알맞는 일입니다. 후손에게 좋은 국책을 전해 주어, 그들을 평안하니 돕는다면, 역사는 이를 칭찬할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여,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의 말씀을 어기며, 천시(天時)를 업신여기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면서, 한 구석의 궁벽한 작은 땅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 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나아가 싸우려해도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얻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며,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요, 크고 작은 것이 짝맞지 아니하고, 순리

와 역리가 차례를 잃은 격이니, 이는 또한 활을 가지고 닭을 잡으러 가다가 마른 우물에 빠지는 위험을 못 보는 것과 같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다 참새가 자기를 덮치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이는 왕이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한 탓입니다. 만약 선왕이 살아 계실 때, 일찍부터 황제의 은혜를 입고도 음험한 생각을 품고, 거짓 예절로 정성을 내보이며, 자기의 사욕을 위하여 황제의 큰 공을 차지하려 하고, 앞에서는 구차하게 은혜를 바라고, 뒤에서 반역을 도모했다면, 이는 선왕의 단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맹세는 반드시 황하가 허리띠처럼 좁아질 때까지 지켜질 것이며, 의리와 명분은 추상같이 엄정해야 할 것이니,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충성이 아니오,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왕은 충성과 배반의 두 가지를 한 몸에 지녔으니,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선왕과 지금의 당신이 하루 아침에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은, 모두 황제의 염려가 멀리 미쳤고, 그 위력이 서로를 협조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와 군이 이어져 마침내 기반이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선왕과 그대 왕이 번갈아 책명을 받았고, 스스로 신하임을 일컬어 왔던 것입니다. 왕은 앉아서는 경서를 읽고, 시와 예를 상세히 알면서도, 정의를 들으면 따르지 않고, 선을 보고도 경멸하며, 권모술수에 귀기울이니, 이는 눈과 귀가 어두운 것이며, 고귀한 가문의 기반을 소홀히 하는 것이니, 필경 귀신이 엿보는 결과를 맞아 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왕의 성대한 업적을 받들면서도 다른 뜻을 품고, 안으로는 충신을 없애고 밖으로는 강적을 불러 들이니, 이를 어찌 슬기롭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고구려의 안승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 인귀의 병선은 돛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외부의 원조를 믿고 나와 대적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된 잘못 입니까! 황제의 은덕은 끝이 없고, 어진 교화는 멀리 미치며, 사랑은 햇볕처럼 따스하여 봄날의 꽃잎 같이 밝게 비치나니, 멀리서 신라와 고구려가 꾸미는 일을 듣고도, 이를 염려할지언정 믿지 아니하고, 마침내 본인에게 명령하여 이 곳에 와서 자세한 사유를 알아 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본인이 온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술과 고기를 보내 우리 군사를 먹이지도 않았으며, 마침내 군사를 언덕 밑에 숨기거나, 병기를 강 어구에 감추거나, 병사들을 숲속으로 숨어 다니게 하며, 풀이 무성한 언덕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게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해칠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요, 우리가 서로 돕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 나라의 대군이 출동하기 전에, 유격대가 먼저 대열을 정비하여 바다로 출동하니, 물고기는 놀라고 새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왕은 사람의 도리로 해야할 일을 스스로 찾아, 망령된 행위를 요행스럽게나마 그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큰 일을 하려는 자는 적은 이익을 탐하지 않으며, 높은 절개를 가진 자는 영명해야 합니다. 선량한 나라와 사귀지 못하면 적국이 엿보게 되는 법입니다. 고장군이 거느렸던 한 나라 기병이나 이 근행이 거느렸던 번병, 오 나라 초 나라의 용감한 수군들과 북방의 사나운 군사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병선을 열지어 내려가서,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 치유될 수 없는 병이 될 것입니다. 왕이 만약 전쟁에 지친 병사들로 하여금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면, 잘못된 일도 단번에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니, 왕은 사유를 모두 말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명백히 말씀하십시오! 본인 설 인귀는 일찌기 황제의 행차를 수행했을 때, 직접 황제로부터 위임을 받았으니, 이제 보고문을 기록하여 황제에게 상주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모든 일이 밝게 해결될 것인데, 왕은 왜 그리 초조하여, 스스로 복잡하게 소동을 부립니까? 슬픈 일입니다. 옛날에는 충의를 다하다가, 이제는 역신이 되었으니, 처음의 좋은 관계가 나중에 와서 나빠진 것이 유감이며, 근본은 같았는데 말단이 달라진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바람은 높고 날씨는 차며, 나뭇잎은 떨어져 한 해가 슬프게 흘러 가는데, 산자락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니 가슴 아픈 회포가 떠오릅니다. 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원칙으로 돌아가 당 나라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제향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 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정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이제 왕의 휘하에 있는 스님 임윤에게 편지를 맡겨, 몇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대왕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선왕께서 정관 22년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으니, 그 조칙에는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매번 침해를 받아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련히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것이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모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의 동원 기일을 정하여 주었다. 신라 백성들이 모두 이 은혜로운 조칙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동원되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대업이 끝나기도 전에 문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 황제가 위에 오르자, 선대 황제의 은혜가 이어져, 지난 날보다 더욱 자주 은덕을 입었다. 나의 형제와 아들이 귀한 선물과 관직을 받았고, 영광스러운 총애는 지극하였으니, 이는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에 따라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지도록 시키는 일을 다하려 하였으며, 비록 우리의 간과 뇌가 평원을 덮더라도, 은혜의 만분지 일이나마 보답코자 하였다. 현경 5년에 황제는 선대 황제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으니, 전일에 남겨 둔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전함을 띄우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대부대의 수군을 동원하였다. 당시 무열왕은 늙고 힘이 없어 행군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예전의 은혜를 추모하는 감정으로, 억지로 국경까지 나왔으며, 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귀국의 군대를 영접하게 하였다. 동서가 호응하며 수륙 양군이 함께 진격하여, 수군이 겨우 강 어구에 들어올 즈음 육군은 이미 대부대의 적군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군사가 함께 백제의 수도에 이르러 백제 전국을 평정하였다. 평정 후에 선왕은 소정방 대총관과 함께 뒷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당 나라 군사 1만을 머물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에게 군사 7천을 주어, 그들과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적의 신하 복신이 강의 서쪽 지방에서 봉기하여 백제의 유민을 모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를 부수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상황이 되었다. 또한 부성(사비성) 부근 네 곳에 성을 쌓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한 채 수비하고 있으므로 부성(사비성)에 출입할 수 없었다. 이 때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포위를 풀고, 사면의 적의 성을 한꺼번에 모두 격파하여, 우선 그들의 위급함을 구원하였고, 다시 군량을 수송하여 마침내 1만 명의 당 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범의 아가리에 든 위험을 면하게 하였으며, 그 곳에 남아 수비하던 굶주린 군사들로 하여금 자식을 바꾸어 잡아 먹는 참상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점점 증가하여 강의 동쪽 땅을 침탈하였으므로, 웅진의 당 나라 군사 1천 명이 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적에게 격파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웅진으로부터 구원병의 요청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그 당시 신라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군마를 징발할 수가 없었으나, 그들의 애타는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파견하여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나와 공격하여, 우리의 군마는 크게 손상 당했고, 결국 우리는 승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쪽 지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키고 복신에게 복속하니, 복신이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따라 웅진으로 가는 길이 즉시 차단되어 소금과 된장이 떨어졌으므로, 건장한 청년들을 모집하여 다른 길로 몰래 소금을 보내 곤핍해진 그들을 구원하였다. 6월에 이르러 선왕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겨우 끝냈는데, 상복도 미쳐 벗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군사를 웅진으로 보내지 못하였던 바, 황제의 칙서가 내려 군사를 북방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 때, 함자도 총관 유 덕민 등이 왔는데, 그들은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운반하게

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이 때 웅진에서 사람을 보내와 부성(사비성)이 고립되어 위태롭다는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유 총관이 나와 함께 일을 처리하면서 스스로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 길이 차단될 것이오, 웅진 길이 차단된다면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당 나라 군사가 바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 갈 것이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유 총관은 드디어 나와 동행하여 우선 옹산성을 공격하였다. 옹산을 점령하고 이어 웅진에 성을 쌓고, 웅진 길을 개통시켰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모두 소진되었다. 그러나 먼저 웅진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칙령을 어긴다는 문제가 있었고,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의 군량이 끊길 것이 염려 되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노약자를 시켜 웅진으로 군량을 운반하고, 건장한 장병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웅진으로의 군량 수송 도중에 눈이 내려 사람과 말이 모두 죽어서 백 명에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용삭 2년 정월, 유 총관이 신라 양하도 총관 김 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보냈다. 이 때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 내리고 눈과 바람으로 날씨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동상을 입어 군량을 전할 수 없었다. 평양의 당 나라 군사들은 귀국을 원했다. 신라 군사들도 양식이 떨어져 역시 귀환하였다.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손발에 동상이 걸려 도중에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행군이 호로하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가 뒤를 따라와 언덕에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오래도록 피곤한 상황이었으나, 적이 멀리까지 따라 올까 염려하여,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접전을 벌였는데, 선봉대가 잠시 교전하는 사이에 적이 와해되고 말았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 온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웅진 부성에서는 여러 차례 곡식을 요청하였다. 이 때 앞뒤에 보낸 곡식이 수만여 곡이었다. 이와 같이 소국 신라가 남으로는 웅진, 북으로는 평양으로 소국 신라가 두 군데나 공급을 하고 보니, 인력은 극도로 피로하고 소와 말은 모두 죽었으며, 농사 지을 시기를 놓쳐서 흉년이 들고, 저축해 두었던 창고의 양식은 두 지역의 수송으로 모두 없어졌으므로 신라의 백성들에게는 풀뿌리도 모자랐는데, 웅진에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는 식량이 남아 돌았다. 또한 진에 주둔하는 당 나라 군사들은 집 떠난 지가 오래되어 옷이 헤어져 몸에 걸칠 성한 의복이 없었다. 이에 따라 신라에서는 백성들을 독려하여 철에 맞는 의복을 지어 보냈다. 도호 유 인원은 멀리 고립된 성을 수비하는데,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포위를 당하였으므로 언제나 신라의 구원을 받았다. 1만 명의 당 나라 군사가 4년 동안 신라의 식량을 먹고 신라의 의복을 입었으니, 유 인원 이하 모든 병사들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 땅에서 났으나,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었다. 당 나라의 은택이 비록 대단하다고 하지만, 신라가 바친 충성도 또한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용삭 3년에 이르러 총관 손 인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참여하여 행군이 주류성에 이르렀었다. 이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돕게 되어, 왜선 일천 척이 백강에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수비하고 있었다.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당 나라 군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가의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은 사기를 잃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남쪽 지방이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방을 치는데 임존성 한 곳이 미욱하게도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두 군대가 협력하여 그 성을 함께 공격하였으나, 그들이 성을 굳게 수비하고 강력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었다. 신라는 즉시 회군하고자 하였으나 두대부가 '칙령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모두가 함께 맹약을 하게 되어 있으니, 임존성 하나가 비록 항복하지 않았더라도 모두 모여 맹약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신라는, 칙령대로라면 '완전한 평정' 이후에 맹약의 회합을 가져야 하며, 임존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평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신라는 또한, 백제는 모든 행동이 간사하여 향후의 행동 변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지금 비록 함께 모여 맹약을 하더라도, 뒤에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염려되므로, 맹약을 하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인덕 원년에 다시 엄한 칙령이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사신을 웅령으로 파견하여 제단을 쌓아놓고 모두 함께 모여 맹약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맹약을 한 지역을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맹약의 행사는 비록 우리가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령을 어길 수 없어 행한 것이었다. 또한 다시 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 인원과 마주하여 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산하를 두고 맹약하였는데, 맹약의 내용은 경계를 확정하고 봉토를 쌓아서 이를 영원한 국토로 삼아, 백성들이 거주하고 저마다 생업을 경영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건봉 2년에, 대총관 영국공이 요동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성주에 갔으며, 그 곳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들어가서는 안되겠기에 먼저 3회에 걸쳐 정탐을 보내고, 배를 잇달아 보내 당 나라 군사의 상황을 알아 보았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당 나라 군사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을 공격하여 길을 열어 놓고, 당 나라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 영공의 사자인 강심이 와서 '신라 군사가 반드시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 평양으로 조속히 군대를 파견하여 병기와 군량을 공급하라는 대총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명령을 내려 군대를 모아 행군하여 수곡성에 당도하자, 당 나라 군사가 이미 회군하였다는 말을 듣게되어 신라 군사도 그 곳을 즉시 빠져 나왔다.

건봉 3년, 대감 김 보가를 시켜 해로를 통하여 요동에 들어가 영공의 명령을 받아오도록 하였는데, 그는 신라 군사를 평양에 집합시키라는 분부를 받아 왔다. 5월에 이르러 유 우상이 와서 신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다. 나도 역시 한성주로 가서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이 때 번군 한군 모두가 사수에 집결하니, 남건도 출병하여 결전을 하고자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을 격파하니, 평양 성중의 기세가 꺾였다. 그후 영공이 다시 신라의 정예 기병 5백 명을 선발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신라 군사들이 모두 '정벌을 시작한지 9년이 이미 지나 인력은 소진되었으나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여 누대에 걸친 소망을 오늘에야 이루었으니,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은 것이요, 백성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영공이 '신라가 이전에 군사의 동원 기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반드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어, 신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 나라 서울에 전달되었는데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 장군들이 돌아오자 백성들의 공포심이 더하였다. 또한 비열성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빼앗은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회복하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관리를 두어 수비했으나, 당 나라는 이 성을 다시 빼앗아 고구려에 돌려 주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할 때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가 있기에 하루 아침에 이렇게 신라를 저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라는 비록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배반할 마음은 없었다. 총장 원년에 백제는 앞서 모여 맹약하였던 곳에서 경계를 옮기고, 경계 표시를 바꾸어 전지를 침탈하였으며, 우리의 노비들을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내지로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한 '당 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 하면서 불안하게 지냈다. 또한 백제 여자를 데려다가 신라의 한성 도독 박 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어떤 한 주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다행히 일이 발각되어 즉시 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함형 원년 6월, 고구려가 모반하여 당 나라 관리를 모두 죽였다. 신라는 바로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반드시 함께 흉적을 토벌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군사의 출동은 상호 토론해야할 문제이니, 청컨대 관인을 이 곳에 파견하여 함께 토벌을 계획하여 보자'라고 하였는데, 백제의 사마 니군이 이 곳에 와서 의논하는 중에 말하기를 '군사를 동원한 뒤에 서로가 의심할 수 있으니, 응당 신라와 백제의 두 편 관인을 상호 인질로 교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 유돈과 부성의 백제 주부 수미, 장귀 등을 부로 파견하여, 인질 교환의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백제는 인질의 교환에 찬성하기는 하였으나, 성 안에서는 여전히 병마를 모아 성 아래에 있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공격을 했다.

7월에 당 나라에 갔던 사신 김 흠순 등이 귀국하여,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지도에 의하여 백제의 옛 국토를 조사하여, 백제의 국토는 백제로 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황하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누대에 걸친 철천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백년 이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신라는 원래 당 나라의 한 지방이므로 두 나라로 나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원컨대 이를 한 집안으로 만들어 영원히 후환을 없애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작년 9월에 이러한 사정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상주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역시 당 나라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 후에는 바람이 차고 풍랑이 심하여 결국 상주를 올리지 못했다. 백제는 거짓으로 '신라가 반역한다'고 상주하였다. 신라는, 앞으로는 당 나라 고관의 심정적 후원을 잃고, 뒤로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어떻게 행동하든 언제나 질책만 당하였으므로 충성심을 보일 길이 없었다. 황제는 이와 같은 참소를 날마다 들었으므로, 변함 없는 충성을 한 번도 황제에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자 임 윤이 전하는 편지를 보니, 총관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서 왔다하므로, 도리상 사신을 교외에 파견하여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올려야만 할 것이나, 다른 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영접을 못 한 것이니, 청컨대 크게 탓하지 말라. 총관의 편지를 보면 전적으로 신라가 반역을 한 것으로 취급되어 있으나, 이는 본심이 아니었으니, 걱정스럽고 놀랍고 두려운 심정이다. 우리가 기울인 노력을 조목 조목 말하면 욕된 꾸지람이나 들을까 걱정되어 입을 다물고 질책을 받으려 하였으나, 이리하면 또한 사정을 모르는 당 나라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므로, 이제 억울한 사정을 대략이라도 설명하여 우리가 반역할 뜻이 없었음을 상세하게 글로 쓰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 나라는 사신 한 명 보내어 근본적인 사유를 물은 적이 없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의 터전을 뒤엎고자 수만의 군사를 파견하였으니, 병선은 창해를 덮어 배의 수미가 강 어구에 줄을 이었고, 저들 웅진을 독촉하여 우리 신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아아!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심부름을 시키더니, 들짐승이 없어진 지금에는 도리어 삶아 먹히는 사냥개의 박해를 당하고 있도다. 잔악한 백제는 오히려 옹치의 상을 받고, 당 나라에 희생 당한 신라는 이미 정공의 죽음을 당하였도다. 태양이 비치지 않건마는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총관은 영웅의 기상을 받고 태어났으며,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재기를 갖추었고, 일곱 가지 덕을 겸비하였으며, 아홉가지 종류의 학술을 섭렵하였는데, 삼가 천벌을 주는 데 있어 함부로 죄없는 자에게 죄를 주려 하는가? 황제의 군대가 출동하기 이전에 그대는 먼저 그 근본 이유를 물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보내는 편지를 계기로 우리가 배반하지 않은 사정을 설명하노니, 청컨대 총관은 깊이 생각하여 실상을 정리하여 황제께 상주하라. 계림주대도독좌위대장군개부의동삼사상주국신라왕김법민이 말하노라."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9월, 당 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병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대방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6일, 당 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급찬 당천의 공로가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직위를 주었다.


○十二年春正月, 王遣將攻<百濟><古省城>, 克之. 二月, 攻<百濟><加林城>, 不克. 秋七月, <唐>將<高保{高侃}>??率兵一萬, <李謹行>率兵三萬, 一時至<平壤>, 作八營留屯. 八月, 攻<韓始城>·<馬邑城>, 克之進兵, 距<白水城>五百許步作營, 我兵與<高句麗>兵逆戰, 斬首數千級. <高保{高侃}>??等退, 追至<石門>戰之, 我兵敗績, 大阿찬<曉川>·沙찬<義文>·<山世>·阿찬<能申>·<豆善>·一吉찬<安那含>·<良臣>等死之. 築<漢山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 九月, 彗星七出北方. 王以向者<百濟>往訴於<唐>, 請兵侵我, 事勢急迫, 不獲申奏, 出兵討之. 由是, 獲罪大朝, 遂遣級찬<原川>·奈麻<邊山>及所留兵船郞將<鉗耳大侯>·<萊州>司馬<王藝>·<本烈州>長史<王益>·<熊州>都督府司馬<이軍{녜軍}>??·<曾山>司馬<法聰>·軍士一百七十人, 上表乞罪曰: "臣某死罪謹言, 昔臣危急, 事若倒懸, 遠蒙拯救, 得免屠滅. 粉身미骨, 未足上報鴻恩, 碎首灰塵, 何能仰酬慈造? 然深讐<百濟>, 逼近臣蕃, 告引天兵, 滅臣雪恥. 臣忙{懼}??破滅, 自欲求存, 枉被凶逆之名, 遂入難赦之罪. 臣恐事意未申, 先從刑戮, 生爲逆命之臣, 死爲背恩之鬼, 謹錄事狀, 冒死奏聞, 伏願少垂神聽, 炤審元由. 臣前代已來, 朝貢不絶, 近爲<百濟>, 再虧職貢, 遂使聖朝出言命將, 討臣之罪, 死有餘刑. <南山>之竹, 不足書臣之罪, <褒斜>之林, 未足作臣之械. 저池宗社, 屠裂臣身, 事聽勅裁, 甘心受戮. 臣츤轝在側, 泥首未乾, 泣血待朝, 伏聽刑命. 伏惟: 皇帝陛下, 明同日月, 容光병蒙曲炤, 德合乾坤, 動植咸被亭毒, 好生之德, 遠被昆蟲, 惡殺之仁, 爰流翔泳. 당降服捨之宥, 賜全腰領之恩, 雖死之年, 猶生之日. 非所希冀, 敢陳所懷, 不勝伏劒之志. 謹遣<原川>等, 拜表謝罪, 伏聽勅旨. 某頓首頓首, 死罪死罪." 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 銅三萬三千分, 針四百枚, 牛黃百二十分, 金百二十分, 四十升{綜}??布六匹, 三十升{綜}??布六十匹. 是歲, 곡貴人飢.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 정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2월에 백제 가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가을 7월, 당 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이근행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동시에 평양에 와서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주둔하였다. 8월에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진군시켜 백수성으로부터 5백여 보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그들과 격전을 벌여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 등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여 석문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대아찬 효천·사찬 의문·사찬 산세·아찬 능신·아찬 두선·일길찬 안나함·일길찬 양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으니 둘레가 4천 3백 60보였다.

9월, 혜성이 일곱 번 북방에 나타났다.

얼마 전 백제가 당 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빌려 우리를 침략하자, 왕은 사세가 급박하여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출병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이 때문에 당 조정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내마 변산과 억류했던 병선낭장 겸이대후·내주 사마 왕예·본열주 장사 왕익·웅주 도독부 사마 니군·증산 사마 법총과 군사 1백 70명을 당 나라에 보내면서 청죄하는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렸다.

"저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드립니다. 예전에 제가 위급하여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을 때, 먼 곳에서 와서 구원해주어 제가 멸망을 면했습니다. 그러하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도 그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기가 부족할 것이며, 머리를 부수어 재와 먼지가 되더라도 어찌 그 자비의 덕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철천지 원수 백제는 우리의 변경을 핍박하고, 황제에게 청병하여 우리를 멸망시키고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파멸이 두려워 우리의 생존을 추구하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취급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은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일을 저지른 의도를 말하지 않은 채 먼저 형벌을 당한다면, 살아서는 명령을 거역한 신하가 될 것이요, 죽어서는 은혜를 배반한 귀신이 될까 염려되어,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 들어 주시고 근본적인 사유를 밝게 살펴주기를 원합니다. 저는 선대 이래로 조공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근자에 백제 때문에 두 번 조공을 하지 않아 마침내 황제의 조정에 의론을 일으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저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으니, 죽은 후에도 받아야 할 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요, 포야산의 나무도 저의 착고를 만드는데 부족할 것이니, 종묘와 사직을 연못으로 만들고, 저를 죽여 몸을 찢어 버리더라도, 이 사정을 듣고나서 친히 판단하여 주신다면 기꺼이 형벌을 받겠습니다. 저는 부왕의 관과 상여를 옆에 두고, 머리의 진흙이 마르지 않은 채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며 삼가 형벌에 관한 명령을 듣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의 밝음이 해와 달 같아서 그 광명이 세상 어느 곳이나 골고루 비치며, 덕은 천지와 같아서 동식물이 모두 그 덕으로 자라나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도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날짐승과 물고기에게도 미치고 있습니다.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하는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로 변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어려우나 감히 생각한 바를 아뢰옵자니 황공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글을 올려 사죄하며, 엎드려 칙명을 듣고자 합니다. 황송하고 황송하여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이와 동시에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十三年春正月, 大星隕<皇龍寺>, <在城>中間(+地震)??. 拜<强首>爲沙찬, 歲賜租二百石. 二月, 增築<西兄山城>. 夏六月, 虎入大宮庭, 殺之. 秋七月一日, <庾信>卒. 阿찬<大吐>謀叛付<唐>, 事泄伏誅, 妻노充賤. 八月, 以波珍찬<天光>爲中侍. 增築<沙熱山城>. 九月, 築<國原城>[<古완長城>]·<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首若州><走壤城>[一名<迭巖城>]·<達含郡><主岑城>·<居烈州><萬興寺山城>·<삽良州><骨爭峴城>. 王遣大阿찬<徹川>等, 領兵船一百소, 鎭西海. <唐>兵與<靺鞨><契丹>兵來侵北邊, 凡九戰, 我兵克之, 斬首二千{百}??餘級. <唐>兵溺<瓠瀘>·<王逢>二河, 死者不可勝計. 冬, <唐>兵攻<高句麗><牛岑城>, 降之. <契丹>·<靺鞨>兵攻<大楊城>·<童子城>, 滅之. 始置外司正, 州二人郡一人. 初, <太宗王>滅<百濟>, 罷戍兵, 至是復置.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列傳.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봄 정월,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고, 재성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강수를 사찬으로 임명하고, 해마다 벼 2백 석을 주기로 하였다.

2월,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자 잡아 죽였다.

가을 7월 1일, 유신이 사망하였다.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 나라에 붙으려다가, 사건이 누설되어 사형을 받았으며, 처자는 천인에 편입되었다.

8월,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사열산성을 증축하였다.

9월, 국원성[예전의 난완성]·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의 주양성[혹은 질암성]·달함군의 주잠성·거열주의 만흥사산성·삽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아홉 번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호로·왕봉 두 강에 빠져 죽은 당 나라 군사가 이루 셀 수 없었다.

겨울에 당 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거란과 말갈 군사가 대양성과 동자성을 쳐서 멸망시켰다.

처음으로 주에 2인, 군에 1인의 외사정을 두었다. 애초에 태종왕이 백제를 멸하고 수자리 군사를 없앴던 것을 이 때 다시 두게 되었다.


○十四年春正月, 入<唐>宿衛大奈麻<德福傳>, 學曆術還, 改用新曆法. 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使人守之. <唐><高宗>大怒, 詔削王官爵, 王弟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仁問>在京師, 立以爲<新羅>王, 使歸國, 以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劉仁軌>爲<계林>道大摠管, 衛尉卿<李弼>·右領軍大將軍<李謹行>副之, 發兵來討. 二月, 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秋七月, 大風毁<皇龍寺>佛殿. 八月, 大閱於<西兄山>下. 九月, 命<義安>法師爲大書省, 封<安勝>爲<報德王>.[十年, 封<安勝><高句麗>王, 今再封, 不知<報德>之言, 若歸名等耶, 或地名耶.] 幸<靈廟寺>前路閱兵, 觀阿찬<薛秀眞>六陣兵法.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갔던 숙위 대내마 덕복전이 역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 때까지 사용하던 역법을 새 역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당 나라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들을 왕이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리로 하여금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없애고, 당 나라에 있던 왕의 아우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 동중서문하 3품 유 인궤를 계림 방면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 필과 우령군 대장군 이 근행을 부관으로 삼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왔다.

2월, 대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

가을 7월, 큰 바람이 불어서 황룡사 불전이 훼손되었다.

8월,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 의안 법사를 대서성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였다.[10년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두 번째 봉하였으니, 보덕이라는 이름이 귀명 등과 같이 불교적 용어인지 아니면 지명인지 알 수 없다.]

왕이 영묘사 앞길에 나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 수진의 육진 병법을 관람하였다.


○十五年春正月, 以銅鑄百司及州郡印, 頒之. 二月, <劉仁軌>破我兵於<七重城>. <仁軌>引兵還, 詔以<李謹行>爲<安東>鎭撫大使, 以經略之. 王乃遣使, 入貢且謝罪, 帝赦之, 復王官爵. <金仁問>中路而還, 改封<臨海郡>公. 然多取<百濟>地, 遂抵<高句麗>南境爲州郡. 聞<唐>兵與<契丹>·<靺鞨>兵來侵, 出九軍, 待之. 秋九月, <薛仁貴>以宿衛學生<風訓>之父<金眞珠>, 伏誅於本國, 引<風訓>爲鄕導, 來攻<&泉城{白水城}>??. 我將軍<文訓>等, 逆戰勝之, 斬首一千四百級, 取兵船四十소. <仁貴>解圍退走, 得戰馬一千匹.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 稱是. 遣使入<唐>貢方物. 緣<安北河>設關·城, 又築<鐵關城>. <靺鞨>入<阿達城>劫掠, 城主<素那>逆戰死之. <唐>兵與<契丹>·<靺鞨>兵來, 圍七重城, 不克. 小守<儒冬>死之. <靺鞨>又圍<赤木城>滅之, 縣令<脫起>率百姓, 拒之, 力竭俱死. <唐>兵又圍<石峴城>, 拔之, 縣令<仙伯>·<悉毛>等, 力戰死之. 又我兵與<唐>兵大小十八戰, 皆勝之, 斬首六千四十七級, 得戰馬二百匹.


李丙燾.

「북한본」.

15년 봄 정월, 모든 관청과 주와 군의 인장을 구리로 주조하여 나누어 주었다.

2월, 유 인궤가 우리 나라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 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그 곳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한 사죄하니 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귀국하던 김 인문이 당 나라로 돌아가자, 그를 임해군공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아 마침내 국경이 고구려 남쪽 지방에 이르렀고, 그 곳을 주와 군으로 만들었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군(九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가을 9월, 설 인귀가 숙위 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 진주가 본국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하여, 그것을 빌미로하여 풍훈을 향도로 삼아 천성을 공격하였다. 우리 장군 문훈 등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1천 4백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 인귀가 포위를 풀고 퇴각하매, 우리는 전마 1천 필을 얻었다.

29일, 이 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3만 3백 80필의 전마와 그 이외에 이에 상당하는 병기도 얻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안북하를 따라 관문과 성을 건설하고 또한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을 포위하고 이를 점령하려 하자,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전력을 기울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또한 우리 군사가 당 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천 47명의 머리를 베고 2백 필의 전마를 얻었다.


○十六年春二月, 高僧<義相>奉旨, 創<浮石寺>. 秋七月, 彗星出北河·積水之間, 長六七許步. <唐>兵來攻<道臨城>拔之, 縣令<居尸知>死之. 作<壤宮>. 冬十一月, 沙찬<施得>領船兵, 與<薛仁貴>戰於<所夫里州><伎伐浦>, 敗績, 又進大小二十二戰, 克之, 斬首四千餘級. 宰相<陳純>乞致仕, 不允, 賜궤杖.


16년 봄 2월, 고승 의상이 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 혜성이 북하와 적수 두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 가량 되었다.

당 나라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현령 거시지가 전사하였다.

양궁을 지었다.

겨울 11월, 사찬 시득이 수군을 이끌고 설 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가 패하였으나, 다시 크고 작은 20번의 전투에 나아가 승리하고 4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재상 진순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十七年春三月, 觀射於<講武殿>南門. 始置左司祿館{左司祿官}??. <所夫里州>獻白鷹.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3월, 강무전 남문에서 왕이 활 쏘기를 구경하였다.

처음으로 좌사록관을 설치하였다.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十八年春正月, 置船府令一員, 掌船楫事. 加左右理方府卿各一員. 置<北原>小京, 以大阿찬<吳起>守之. 三月, 拜大阿찬<春長>爲中侍. 夏四月, 阿찬<天訓>爲<武珍州>都督. 五月, <北原>獻異鳥, 羽핵有文, 脛有毛.


18년 봄 정월, 선부령 한 명을 두어 선박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좌우 이방부경 각 1명을 증원하였다. 북원을 소경으로 하고, 대아찬 오기로 하여금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3월, 대아찬 춘장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5월, 북원에서 이상한 모양의 새를 바쳤는데, 깃털에 무늬가 있고 정강이에 털이 나 있었다.


○十九年春正月, 中侍<春長>病免, 舒弗邯<天存>爲中侍. 二月, 發使略<耽羅國>. 重修宮闕, 頗極壯麗. 夏四月, 熒惑守羽林. 六月, 太白入月, 流星犯參大星. 秋八月, 太白入月. 角干<天存>卒. 創造東宮, 始定內外諸門額號. <四天王寺>成. 增築<南山城>.


19년 봄 정월, 중시 춘장이 병으로 사직하자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

궁궐을 다시 수리하였는데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여름 4월, 화성이 우림을 지키고, 6월에 금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가을 8월, 금성이 달에 들어 갔다. 각간 천존이 사망하였다. 동궁을 처음으로 짓고 안팎의 모든 문의 현판 이름을 지었다. 사천왕사가 낙성되었다. 남산성을 증축하였다.


○二十年春二月, 拜伊찬<金軍官>爲上大等. 三月, 以金銀器及雜綵百段, 賜<報德王><安勝>, 遂以王&妹{兄之女}??妻之.[一云잡찬<金義官>之女也.] 下敎書曰: "人倫之本, 夫婦攸先; 王化之基, 繼嗣爲主. 王鵲巢位曠, 계鳴在心. 不可久空內輔之儀, 永闕起家之業. 今良辰吉日, 率順{循}??舊章, 以寡人妹{兄}??女爲伉儷, 王宜共敦心義, 式奉宗조, 克茂子孫, 永풍盤石, 豈不盛歟, 豈不美歟!" 夏五月, <高句麗>王使大將軍<延武>等上表曰: "臣<安勝>言: 大阿찬<金官長>至, 奉宣敎旨, 幷賜敎書, 以外生公{女}??, 爲下邑內主, 仍以四月十五日至此, 喜懼交懷, 罔知攸치. 竊以<帝女>降<규>, <王姬>適<齊>, 本揚聖德, 匪關凡才. 臣本庸流, 行能無산, 幸逢昌運, 沐浴聖化, 每荷殊澤, 欲報無계. 重蒙天寵, 降此姻親, 遂卽농華表慶, 肅옹成德. 吉月令辰, 言歸弊館, 億載難遇, 一朝獲申, 事非望始, 喜出意表. 豈惟一二父兄, 實受其賜? 其自先祖已下, 寔寵喜之.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奉表以聞." <加耶郡>置<金官>小京.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2월, 이찬 김 군관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보덕왕 안승에게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잡색 비단 백단을 내리고, 왕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하고[잡찬 김 의관의 딸이라는 주장도 있다.], 교서를 내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제일이며, 교화의 기초는 자손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 왕은 아내가 없으므로 아내를 맞이할 생각이 많을 것이다. 내조할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두어, 가문을 일으킬 도리를 영원히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 좋은 때 길한 날을 맞이하여 옛날의 예절에 따라 나의 생질로 배필을 삼게 할 것이니, 왕이 그녀와 더불어 정의를 두터이 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크게 융성토록 하여, 길이 반석같이 번성하게 한다면 어찌 성대하고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라고 말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왕이 대장군 연무 등을 시켜 왕에게 글을 올렸다.

"신 안승은 아뢰나이다. 대아찬 김 관장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전하고 동시에 교서를 내렸으며, 동시에 왕의 생질을 우리 작은 마을의 안주인으로 삼기 위해 4월 15일 이 곳에 도착하였으니, 기쁘고 두려운 생각이 교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생각하건대, 요 임금은 자기의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고, 주나라 왕은 딸을 제 나라에 시집보냈으니, 이러한 행위는 딸을 범부에게 줌으로써 그들의 거룩한 덕을 높이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바탕이 용렬하고 행실과 재능에 뛰어난 점이 없으면서도, 요행히 좋은 운명을 만나 왕의 거룩한 교화에 젖게되고 매번 남다른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이러한 은혜는 갚고자 하여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왕의 인척을 내려 보내시는 총애를 입게 되었으니, 마침내 꽃이 만발하여 경사임을 나타내고, 사람들은 화목하여 덕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좋은 날 좋은 때를 선택하여 누추한 저의 집안으로 출가를 하게 되니, 억년을 살아도 만나기 어려운 일을 하루 아침에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원래 바라지도 못한 것이요, 이 기쁨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오직 저의 한두 명의 부형만이 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선조 이하 모두를 총애하고 기쁘게 하신 것입니다. 신은 아직 왕의 지시를 받지 못하여 감히 바로 가서 뵙지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글을 바쳐 아룁니다."

가야군에 금관 소경을 설치하였다.


○二十一年春正月朔, 終日黑暗如夜. 沙찬<武仙>率精兵三千, 以戍<比列忽>. 置右司祿館. 夏五月, 地震. 流星犯參大星. 六月, 天狗落坤方. 王欲新京城, 問浮屠<義相>, 對曰: "雖在草野茅屋, 行正道, 則福業長, 苟爲不然, 雖勞人作城, 亦無所益." 王乃止役. 秋七月一日, 王薨, 諡曰<文武>. 群臣以遺言葬東海口{中}??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遺詔曰: "寡人運屬紛운, 時當爭戰. 西征北討, 克定疆封, 伐叛招携, 聿寧遐邇. 上慰宗조之遺顧, 下報父子之宿寃, 追賞遍於存亡, 소爵均於內外. 鑄兵戈爲農器, 驅黎元於仁壽, 薄賦省요, 家給人足, 民間安堵, 域內無虞. 倉름積於丘山, 囹圄成於茂草, 可謂無愧於幽顯, 無負於士人. 自犯冒風霜, 遂成痼疾, 憂勞政敎, 更結沈아. 運往名存, 古今一揆, 奄歸大夜, 何有恨焉! 太子早蘊離輝, 久居震位, 上從群宰, 下至庶寮, 送往之義勿違, 事居之禮莫闕. 宗廟之主, 不可暫空, 太子卽於柩前, 嗣立王位. 且山谷遷貿, 人代椎{推}??移, <吳>王<北山>之墳, 거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 屬광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服輕重, 自有常科, 喪制度, 務從儉約. 其邊城鎭알, 及州縣課稅, 於事非要者, 병宜量廢, 律令格式, 有不便者, 卽便改張, 布告遠近, 令知此意. 主者施行!"

三國史記卷第七.


李丙燾. 「三國遺事」.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봄 정월 초하루, 날씨가 종일 밤처럼 캄캄하게 어두었다. 사찬 무선이 정병 3천을 거느리고 비열홀을 지켰다.

우사록관을 두었다.

여름 5월, 지진이 있었다.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6월 천구성이 서남방에 떨어졌다.

왕이 서울을 새로 꾸미고자하여 중 의상에게 물으니, 의상이 "비록 풀밭과 초막에 살지라도 바른 도를 실천한다면 복스러운 세업이 오래 갈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비록 사람을 고생시켜 성을 만든다 할지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이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월 1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속설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다. 왕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만 하였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 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현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 왕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뭇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삼국사기 권 제 7 끝




三國史記卷第八.



삼국사기 권 제 8


新羅本紀第八.

<神文王>·<孝明王{孝昭王??/孝照王??}>·<聖德王>.


李丙燾.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신라본기 제 8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


○<神文王>立. 諱<政明>[明之字<日초{日炤}>??.],??<文武大王>長子也. 母<慈儀[一作義]王后>, 妃<金>氏, 蘇判<欽突>之女, 王爲太子時, 納之, 久而無子, 後坐父作亂, 出宮. <文武王>五年, 立爲太子, 至是繼位. <唐><高宗>遣使冊立爲<新羅>王, 仍襲先王官爵.


李丙燾. 「三國遺事」 王曆 第一.

신문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명이며[명지의 자는 일조이다.], 문무대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의(儀)를 의(義)로 쓰기도 한다.]왕후이다. 왕비는 김씨이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였을 때 그녀를 맞았으나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뒤에는 그녀의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다. 문무왕 5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의 관작을 이어 받았다.


○元年, 八月, 拜舒弗邯<眞福>, 爲上大等. 八日, 蘇判<金欽突>·波珍찬<興元>·大阿찬<眞功>等, 謀叛대{伏}??誅. 十三日, <報德王>遣使小兄<首德皆>, 賀平逆賊. 十六日, 下敎曰: "賞有功者, 往聖之良規; 誅有罪者, 先王之令典. 寡人以묘躬량德, 嗣守崇基, 廢食志{忘}??餐, 晨興晏寢, 庶與股肱, 共寧邦家, 豈圖최질之內, 亂起京城! 賊首<欽突>·<興元>·<眞功>等, 位非才進, 職實恩升. 不能克愼始終, 保全富貴, 而乃不仁不義, 作福作威, 侮慢官寮, 欺凌上下. 比口{日}??逞其無厭之志, 肆其暴虐之心, 招納凶邪, 交結近竪, 禍通內外, 同惡相資, 剋日定期, 欲行亂逆. 寡人上賴天地之祐, 下蒙宗廟之靈, <欽突>等惡積罪盈, 所謀發露, 此乃人神之所共棄, 覆載之所不容, 犯義傷風, 莫斯爲甚. 是以追集兵衆, 欲除梟鏡{경}??, 或逃竄山谷, 或歸降闕庭. 然尋枝究葉, 병已誅夷, 三四日間, 囚首蕩盡. 事不獲已, 驚動士人, 憂愧之懷, 豈忘旦夕! 今旣妖徒廓淸, 遐邇無虞, 所集兵馬, 宜速放歸, 布告四方, 令知此意!" 二十八日, 誅伊찬<軍官>, 敎書曰: "事上之規, 盡忠爲本; 居官之義, 不二爲宗. 兵部令伊찬<軍官>, 因緣班序, 遂升上位, 不能拾遺補闕, 效素節於朝廷, 授命忘軀, 表丹誠於社稷. 乃與賊臣<欽突>等交涉, 知其逆事, 曾不告言, 旣無憂國之心, 更絶徇公之志, 何以重居宰輔, 濫濁憲章? 宜與衆棄, 以懲後進. <軍官>及嫡子一人, 可令自盡. 布告遠近, 使共知之!" 冬十月, 罷侍衛監. 置將軍六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8월, 서불한 진복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8일, 소판 김 흠돌·파진찬 흥원·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13일, 보덕왕이 사신 소형 수덕개를 보내 역적을 평정한 것을 치하하였다.

16일,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예전 성인들의 좋은 법도이며,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 또한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다. 과인이 못나고 박덕한 몸으로 숭고한 왕업을 이었기에, 식사를 잊고 새벽에 일어나고 밤 늦게 잠을 자면서, 충복 대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였으니, 상중에 서울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반란의 괴수 흠돌·흥원·진공 등은 그들의 재능이 훌륭하여 작위에 오른 것이 아니며, 관직도 실은 은전에 의하여 오른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여 부귀를 보전해야 했으나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결국은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행복이나 위세를 마음대로 만들어 관료들을 업신여기고 상하를 기만하였으며, 한없이 탐욕스런 생각을 함부로 내보이고 포학한 마음을 휘둘렀으며,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을 끌어 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결탁하였다. 그 화란이 안팎으로 통하여 악의 무리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과인이 위로 천지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 조상의 도움을 받아, 쌓이고 쌓인 흠돌 등의 음모가 탄로되었으니, 이는 곧 사람과 귀신이 모두 취하지 않는 행위요,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니, 정의를 범하고 기풍에 상처냄이 이보다 더 심한것이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를 모아 흉악한 무리들을 무찌르니 더러는 산골로 도망하고, 혹은 대궐 뜰에 와서 항복하였다. 잔당들은 모두 체포하여 이미 처형하였고, 향후 3,4일 사이에 괴수들도 모두 소탕할 것이다. 이는 부득이한 조치였으나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여러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백성을 걱정하고 그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야 어찌 하루라도 잊었겠는가!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원근에 걱정이 없어졌으므로, 소집하였던 병마를 조속히 돌려 보낼 것이니, 이를 사방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알도록 하라!"

28일, 이찬 군관을 목 베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임금을 섬기는 법도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요, 관직에 있는 의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병부령 이찬 군관은 순서에 따라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임금을 정성껏 보좌하지 못하고, 결백한 절조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며, 임금의 명령을 받으면 제 몸을 잊어 버릴 줄 모르고,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표할 줄 몰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신 흠돌 등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반역할 것을 알고도 미리 고발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고, 더욱 공공의 질서를 따를 뜻이 없는 것이니, 어찌 다시 재상의 직무를 맡겨 국가의 헌장을 흐리게 할 것인가? 마땅히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후진들에게 경계를 삼게 하리라. 군관과 그의 맏아들 한 명을 자살하여 죽게 하고, 원근에 포고하여 모두가 알도록 하라."

겨울 10월, 시위감을 없애고 장군 6인을 두었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夏四月, 置位和府令二人, 掌選擧之事. 五月, 太白犯月. 六月, 立國學, 置卿一人. 又置工匠府監一人, 彩典監一人.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4월, 위화부령 2인을 두어 관리의 선발과 추천을 맡게 하였다.

5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6월, 국학을 세우고 경 1인을 두었다. 또한 공장 부감 1인과 채전감 1인을 두었다.


○三年, 春二月, 以<順知>爲中侍. 納一吉찬<金欽運>少女, 爲夫人. 先差伊찬<文穎>·波珍찬<三光>定期, 以大阿찬<智常>納采, 幣帛十五轝, 米·酒·油·蜜·醬·시·脯·해一百三十五轝, 租一百五十車. 夏四月, 平地雪(+深)??一尺. 五月七日, 遣伊찬<文穎>·<愷元>抵其宅, 冊爲夫人. 其日卯時, 遣波珍찬<大常>·<孫文>·阿찬<坐耶>·<吉叔>等, 各與妻娘及<梁>·<沙梁>二部구各三十人迎來. 夫人乘車, 左右侍從, 官人及娘구甚盛. 至王宮北門, 下車入內. 冬十月, 徵<報德王><安勝>爲蘇判, 賜姓<金>氏, 留京都, 賜甲第良田. 彗星出五車.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2월, 순지를 중시로 임명하였다. 일길찬 김 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삼기로 하고,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을 보내 납채를 하였는데, 폐백이 열다섯 수레,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식혜가 1백 35수레, 벼가 1백 50수레였다.

여름 4월, 평지에 눈이 한 자 쌓였다.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을 김 흠운의 집에 보내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그 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손문과 아찬 좌야·길숙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과 이 밖에 양과 사량 두 부의 여자 각 30명씩을 데리고 가서 부인을 맞아 오게 하였다. 부인이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하녀로 따르는 부녀들의 모습이 성대하였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 왔다.

겨울 10월,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려, 서울에 머물게 하였으며, 좋은 집과 좋은 밭을 주었다.

혜성이 오거 성좌에 나타났다.


○四年, 冬十月, 自昏及曙, 流星縱橫. 十一月, <安勝>族子將軍<大文>, 在<金馬渚>謀叛, 事發伏誅. 餘人見<大文>誅死, 殺害官吏, 據邑叛, 王命將士討之, 逆鬪幢主<逼實>死之. 陷其城, 徙其人於國南州郡, 以其地爲<金馬郡>.[<大文>或云<悉伏>.]


4년 겨울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날아 다녔다.

11월, 안승의 조카뻘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잔적들이 대문의 처형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한 채 반역하므로, 왕이 장병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토벌하였는데, 이 전투 중에 당주 핍실이 전사하였다.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에 옮겨 살게 하였으며, 그 곳을 금마군으로 만들었다.[대문을 혹은 실복이라고도 한다.]


○五年春, 復置<完山州>, 以<龍元>爲摠管. 挺<居列州>, 以置<菁州>, 始備九州, 以大阿찬<福世>爲摠管. 三月, 置<西原小京>, 以阿찬<元泰>爲仕臣. 置<南原小京>, 徙諸州郡民戶分居之. <奉聖寺>成. 夏四月, <望德寺>成.


5년 봄,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를 나누어 청주를 두니, 처음으로 구주가 되었다. 대아찬 복세를 총관으로 삼았다.

3월, 남원 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삼았다. 남원소경을 두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봉성사가 낙성되었다.

여름 4월, 망덕사가 낙성되었다.


○六年, 春正月, 以伊찬<大莊>[一作<將>.]爲中侍. 置例作府卿二人. 二月, 置<石山>·<馬山>·<孤山>·<沙平>四縣. 以<泗비州>爲郡, <熊川郡>爲州. <發羅州>爲郡, <武珍郡>爲州. 遣使入<唐>, 奏請『禮記』幷文章. <則天>令所司, 寫『吉凶要禮』, 幷於『文관詞林』, 採其詞涉規誡者, 勒成五十卷, 賜之.


6년 봄 정월, 이찬 대장[장(莊)을 장(將)으로도 쓴다.]을 중시로 삼았다. 예작부에 경 두 사람을 두었다.

2월, 석산·마산·고산·사평의 네 현을 설치하였다. 사비주를 군으로, 웅천군을 주로 만들었다. 발라주를 군으로, 무진군을 주로 만들었다.

당에 사신을 보내 「예기」와 여러 문장을 요청하니, 측천무후가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길흉요례」을 베껴주고, 또한 「문관사림」 중에서 준칙에 관한 글을 선택하여 50권을 만들어 주었다.


○七年, 春二月, 元子生. 是日, 陰沈昧暗, 大雷電. 三月, 罷<一善州>, 復置<沙伐州>, 以波珍찬<官長>爲摠管. 夏四月, 改音聲署長爲卿. 遣大臣於祖廟, 致祭曰: "王某稽首再拜, 謹言<太祖大王>·<眞智大王>·<文興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之靈. 某以虛薄, 嗣守崇基, 寤寐憂勤, 未遑寧處. 奉賴宗廟, 獲{護}??持乾坤降祿{福}??, 四邊安靜, 百姓雍和, 異域來賓, 航琛奉職, 刑淸訟息, 以至于今. 比者, 道喪君臨, 義乖天鑒, 怪成星{星成}??象, 火宿沈輝, 戰戰慓慓{慄慄}??, 若墜淵谷. 謹遣使某官某, 奉陳不전之物, 以虔如在之靈. 伏望: 炤察微誠, 矜恤묘末, 以順四時之候, 無愆五事之徵, 禾稼풍而疫려消, 衣食足而禮義備, 表裏淸謐, 盜賊消亡, 垂裕後昆, 永膺多福. 謹言." 五月, 敎賜文虎{武}??官僚田有差. 秋, 築<沙伐>·<삽良>二州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2월, 원자가 출생하였다. 이 날 날씨가 음침하여 어둡고 우레와 번개가 심하였다.

3월, 일선주를 폐지하고, 다시 사벌주를 두었다. 파진찬 관장을 총관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음성서의 장을 경으로 바꾸었다.

대신을 시켜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제문은 다음과 같았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며, 삼가 태조대왕·진지대왕·문흥대왕·태종대왕·문무대왕 영전에 아뢰나이다. 저는 천박한 자질로 숭고한 유업을 이어받아, 자나깨나 걱정하고 노력하여 편안하게 지낼 틈이 없었으나, 종묘의 돌보심과 천지가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락하며, 이역의 내빈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며, 형정이 공평하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보니,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매,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모관 모를 시켜 변변치 못한 제물을 받들어 살아 계신 신령 앞에 드리오니,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사 이 하찮은 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해주시며, 5사의 성과를 틀리지 말게 하시며, 농사가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먹고 입을 것이 풍족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중외가 평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남겨주고,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룁니다."

5월, 교서를 내려 문무 관료들에게 직급에 따라 밭을 주었다.

가을에 사벌과 삽량 두 주의 성을 쌓았다.


○八年, 春正月, 中侍<大莊>卒, 伊찬<元師>爲中侍. 二月, 加船府卿一人.


8년 봄 정월, 중시 대장이 죽고 이찬 원사가 중시가 되었다.

2월, 선부에 경 한 사람을 증원하였다.


○九年, 春正月, 下敎: 罷內外官祿邑, 逐年賜租有差, 以爲恒式. 秋閏九月二十六日, 幸<獐山城>. 築<西原京城>. 王欲移都<達句伐>, 未果.


9년 봄 정월, 왕이 하교하여, 서울과 지방 관리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직급에 따라 벼를 주는 것으로 상례를 삼도록 하였다.

가을 윤 9월 26일, 왕이 장산성에 갔다. 서원경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十年, 春二月, 中侍<元師>病免, 阿찬<仙元>爲中侍. 冬十月, 置<轉也山郡>.


10년 봄 2월, 중시 원사가 병으로 사직하자, 아찬 선원으로 중시를 삼았다.

겨울 10월, 전야산군을 설치하였다.


○十一年, 春三月一日, 封王子<理洪>爲太子. 十三日, 大赦. <沙火州>獻白雀. 築<南原城>.


11년 봄 3월 1일, 왕자 이홍을 태자로 봉하였다. 13일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사화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남원성을 쌓았다.


○十二年春, 竹祐{枯}??. <唐><中宗>遣使口래曰: "我<太宗文皇帝>, 神功聖德, 超出千古, 故上僊之日, 廟號<大宗{太宗}>??. 汝國先王<金春秋>, 與之同號, 尤爲僭越, 須急改稱." 王與群臣同議, 對曰: "小國先王<春秋>諡號, 偶與聖祖廟號相犯, 래令改之, 臣敢不惟命是從. 然念先王<春秋>, 頗有賢德, 황生前得良臣<金庾信>, 同心爲政, 一統三韓, 其爲功業, 不爲不多. 捐館之際, 一國臣民不勝哀慕, 追尊之號, 不覺與聖祖相犯. 今聞敎래, 不勝恐懼, 伏望: 使臣復命闕庭, 以此上聞." 後更無別래. 秋七月, 王薨. 諡曰<神文>, 葬<狼山>東.


李丙燾.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 대나무가 말랐다.

당 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다음과 같은 칙명을 전했다.

"우리 태종 문황제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던 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선왕 김 춘추에게도 동일한 묘호를 쓴 것은 매우 참람된 일이니,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한 후에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컨대,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 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별세하던 때에 온 나라의 신민들이 그를 추모하는 심정이 극진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의 묘호에 저촉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교칙을 들으니 송구스러움을 다할 수 없습니다. 사신이 황제에게 복명하되, 이대로 보고해 주기를 삼가 바랍니다."

그 후에 다시는 이에 관한 다른 칙명이 없었다.

가을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


○<孝昭王{孝照王}>??立. 諱<理洪>[一作恭.], <神文王>太子. 母, 姓<金>氏<神穆王后>, 一吉찬<金欽運>[一云雲.]女也. <唐><則天>遣使吊祭, 仍冊王爲<新羅>王輔國大將軍行左豹韜尉大將軍<계林州>都督. 改左右理方府, 爲左右議方府, 理犯諱故也.


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효소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홍'을 '공(恭)'이라고도 한다.]이며, 신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신목왕후이며, 일길찬 김 흠운['金欽運'을 '金欽雲'이라고 하기도 한다.]의 딸이다. 당의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신라왕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으로 책봉하였다.

좌우리방부를 좌우의방부로 고쳤는데, 이는 '리'자가 왕의 이름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元年, 八月, 以大阿찬<元宣>爲中侍. 高僧<道證>自<唐>廻, 上天文圖.


원년 8월, 대아찬 원선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고승 도증이 당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바쳤다.


○三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以<文穎>爲上大等. <金仁問>在<唐>卒, 年六十六. 冬, 築<松岳>·<牛岑>二城.


3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문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김 인문이 당 나라에서 죽으니 나이 66세였다.

겨울에 송악과 우잠 두 성을 쌓았다.


○四年, 以立子月爲正. 拜<愷元>爲上大等. 冬十月, 京都地動{地震}??. 中侍<元宣>退老. 置西南二市.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자월을 정월로 삼았다.

개원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중시 원선이 연로하여 사직하였다.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였다.


○五年, 春正月, 伊찬<幢元>爲中侍. 夏四月, 國西旱.


5년 봄 정월, 이찬 당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서쪽 지방이 가물었다.


○六年, 秋七月, <完山州>進嘉禾, 異畝同穎. 九月, 宴群臣於<臨海殿>.


6년 가을 7월, 완산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밭고랑에서 난 벼 이삭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었다.

9월, 임해전에서 모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七年, 春正月, 以伊찬<體元>爲<牛頭州>摠管. 二月, 京都地動, 大風折木. 中侍<幢元>退老, 大阿찬<順元>爲中侍. 三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崇禮殿>. 秋七月, 京都大水.


7년 봄 정월, 이찬 체원을 우두주 총관으로 삼았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중시 당원이 연로하여 사직하자, 대아찬 순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3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났다.


○八年, 春二月, 白氣竟天, 星패于東. 遣使朝<唐>貢方物. 秋七月, 東海水血色, 五日復舊. 九月, 東海水&戰{自擊}??, 聲聞王都. 兵庫中鼓角自鳴. <新村>人<美힐>得黃金一枚, 重百分, 獻之, 授位南邊第一, 賜租一百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2월, 흰 기운이 하늘에 뻗쳤고, 동쪽에 혜성이 나타났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5일 만에 회복되었다.

9월,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그 소리가 서울까지 들렸다. 병기고에서 북과 나팔이 저절로 울었다.

신촌 사람 미흘이 무게 백 푼되는 황금 한 개를 주워서 바쳤으므로, 그에게 남변 제일의 위품과 벼 1백 석을 주었다.


○九年, 復以立寅月爲正. 夏五月, 伊찬<慶永>[<永>一作<玄>.]謀叛, 伏誅. 中侍<順元>緣坐罷免. 六月, 歲星入月.


9년, 다시 인월로 정월을 삼았다.

여름 5월, 이찬 경영['영'을 '현(玄)'이라고도 한다.]이 모반하다가 처형되고,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6월, 세성이 달에 들어 갔다.


○十年, 春二月, 彗星入月. 夏五月, <靈巖郡>太守一吉찬<諸逸>, 背公營私, 刑一百杖, 入島.


10년 봄 2월, 혜성이 달에 들어갔다.

여름 5월, 영암군 태수 일길찬 제일이 공익을 위배하고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므로, 곤장 1백을 때려 섬으로 귀양보냈다.


○十一年, 秋七月, 王薨. 諡曰<孝昭{孝照}>??, 葬于<望德寺>東.[『舊唐書』云: "<長安>二年, <理洪>卒." 諸古記云: "壬寅七月二十七日卒." 而『通鑑』云: "<大足>三年卒." 則『通鑑』, 誤.]


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11년 가을 7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효소라 하고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구당서」에는 "장안 2년에 이홍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러 고기에도 "임인 7월 27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자치통감」에는 "대족 3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통감이 잘못된 것이다.]


○<聖德王>立. 諱<興光>, 本名<隆基>, 與<玄宗>諱同, <先天>中改焉.[『唐書』言<金志誠>.] <神文王>第二子, <孝昭{孝照}>??同母弟也. <孝昭王{孝照王}>??薨無子, 國人立之. <唐><則天>聞<孝昭{孝照}>??薨, 爲之擧哀, 輟朝二日, 遣使吊慰, 冊王爲<新羅>王, 仍襲兄將軍都督之號.


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성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 현종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 연간에 고쳤다.[「당서」에는 김 지성이라 하였다.] 그는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복 동생이다. 효소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 나라 측천무후가 효소왕이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 애도하기 위하여, 2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하는 동시에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장군도독이라는 형의 칭호를 이어받게 하였다.


○元年, 九月, 大赦. 增文武官爵一級, 復諸州郡一年租稅. 以阿찬<元訓>爲中侍. 冬十月, <삽良州>, 력{橡}??實變爲栗.


李丙燾.

원년 9월,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관에게 관작 한 급씩을 올려 주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하였다. 아찬 원훈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삽량주에서 상수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遣使入<唐>貢方物. 秋七月, <靈廟寺>災. 京都大水, 溺死者衆. 中侍<元訓>退, 阿찬<元文>爲中侍. <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遣阿찬<金思讓>朝<唐>.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영묘사에 불이 났다. 서울에 홍수가 나서 익사자가 많았다.

중시 원훈이 사직하자 아찬 원문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총 인원이 204인이었다. 아찬 김 사양을 당 나라에 입조시켰다.


○三年, 春正月, <熊川州>進金芝. 三月, 入<唐><金思讓>廻, 獻『最勝王經』. 夏五月, 納乘府令蘇叛{蘇判}??<金元泰>之女爲妃.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웅천주에서 금지를 진상하였다.

3월, 견당사 김 사양이 돌아와서 「최승왕경」을 바쳤다.

여름 5월, 승부령 소판 김 원태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


○四年, 春正月, 中侍<元文>卒, 以阿찬<信眞{信貞}>??爲中侍. 三月, 遣使入<唐>朝貢. 夏五月, 旱. 秋八月, 賜老人酒食. 九月, 下敎禁殺生. 遣使如<唐>獻方物. 冬十月, 國東州郡饑, 人多流亡, 發使賑恤.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봄 정월, 중시 원문이 죽었으므로 아찬 신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3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하사하였다.

9월, 살생을 금하는 교서를 내렸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동쪽 지방의 주와 군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많이 유랑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구제하였다.


○五年, 春正月, 伊찬<仁品>爲上大等. 國內饑, 發倉름賑之. 三月, 衆星西流. 夏四月, 遣使入<唐>貢方物. 秋八月, 中侍<信眞{信貞}>??病免, 以大阿찬<文良>爲中侍. 遣使入<唐>貢方物. 곡不登. 冬十月, 遣使入<唐>貢方物. 十二月, 大赦.


『북한본』.

5년 봄 정월, 이찬 인품이 상대등이 되었다. 나라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3월, 뭇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 중시 신정이 병으로 사직하자, 대아찬 문량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이 해에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겨울 10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六年, 春正月, 民多饑死, 給粟人一日三升, 至七月. 二月, 大赦. 賜百姓五곡種子, 有差. 冬十二月, 遣使入<唐>貢方物.


6년 봄 정월, 백성 가운데 아사자가 늘어나자, 한 사람에게 하루 조 3되를 7월까지 나누어 주었다.

2월,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백성들에게 5곡의 종자를 정도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七年, 春正月, <沙伐州>進瑞芝. 二月, 地震. 夏四月, 鎭星犯月. 大赦.


7년 봄 정월, 사벌주에서 서지를 진상하였다.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八年, 春三月, <菁州>獻白鷹. 夏五月, 旱. 六月, 遣使入<唐>貢方物. 秋八月, 赦罪人.


8년 봄 3월, 청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6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九年, 春正月, 天狗隕<三郞寺>北. 遣使入<唐>貢方物. 地震. 赦罪人.


9년 봄 정월, 삼랑사 북쪽에 천구가 떨어졌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지진이 있었고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十年, 春三月, 大雪. 夏五月, 禁屠殺. 冬十月, 巡狩國南州郡. 中侍<文良>卒. 十一月, 王製百官箴, 示群臣. 十二月, 遣使入<唐>貢方物.


10년 봄 3월, 큰 눈이 내렸다.

여름 5월, 가축의 도살을 금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였다. 중시 문량이 사망하였다.

11월, 왕이 백관잠을 지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十一{二}??年, 春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以伊찬<魏文>爲中侍. 大<唐>遣使<盧元敏>, 래改王名. 夏四月, 駕幸溫水. 秋八月, 封<金庾信>妻爲夫人, 歲賜穀一千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 이찬 위문으로 중시를 삼았다. 당 나라에서 사신 노원민을 보내와 칙명으로 왕의 이름을 고치라고 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온천에 행차하였다.

가을 8월, 김 유신의 아내를 부인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 천 석을 주기로 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置典祀署. 遣使入<唐>朝貢, <玄宗>御樓門, 以見之. 冬十月, 入<唐>使<金貞宗>廻, 降詔書, 封王爲驃騎將軍特進行左威衛大將軍使持節大都督<계林州>諸軍事<계林州>刺史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 冬十月, 中侍<魏文>請老, 從之. 十二月, 大赦. 築<開城>.


12년 봄 2월, 전사서를 설치하였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현종이 문루에 나와 사신을 접견하였다.

겨울 10월, 당 나라에 갔던 사신 김 정종이 귀국할 때,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상주국악랑군공신라왕'으로 봉하였다.

겨울 10월, 중시 위문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은퇴를 요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개성을 쌓았다.


○十三年, 春正月, 伊찬<孝貞>爲中侍. 二月, 改詳文司{詳文師}??爲通文博士, 以掌書表事. 遣王子<金守忠>入<唐>宿衛, <玄宗>賜宅及帛以寵之, 賜宴于朝堂. 閏二月, 遣級食{級찬}??<朴裕>入{如}??<唐>賀正. 賜朝散大夫員外奉御還之. 夏旱, 人多疾疫. 秋, <삽良州>山橡實化爲栗. 冬十月, <唐><玄宗>宴我使者于內殿, 래宰臣及四品已上淸{諸}??官預焉.


李丙燾. 職官志.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

13년 봄 정월, 이찬 효정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상문사를 통문 박사로 고치고, 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왕자 김 수충을 당에 보내 숙위케 하니, 현종이 그를 총애하여 집과 비단을 주고, 조당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윤 2월, 급찬 박 유를 당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는데, 그에게 조산대부원외봉어의 직을 주어 돌려 보냈다.

여름에 가뭄이 들었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많았다.

가을에 삽량주 산의 상수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겨울 10월, 당 현종이 내전에서 우리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재상과 신하 및 4품 이상의 청관들에게 이에 참가하도록 명령하였다.


○十四年, 春三{二}??月, 遣<金楓厚>入<唐>朝貢. 夏四月, <菁州>進白雀. 五月, 赦. 六月, 大旱, 王召<河西州><龍鳴嶽>居士<理曉>, 祈雨於<林泉寺>池上, 則雨浹旬. 秋九月, 太白掩庶子星. 冬十月, 流星犯紫微. 十二月, 流星自天倉入大微. 赦罪人. 封王子<重慶>爲太子.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3월, 김 풍후를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청주에서 흰 참새를 진상하였다.

5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6월, 큰 가뭄이 들자, 왕이 하서주 용명악에 사는 거사 이효를 불러 임천사 연못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곧 비가 열흘 동안이나 계속 내렸다.

가을 9월, 금성이 서자성을 가렸다.

겨울 10월, 유성이 자미성을 범하였다.

12월, 유성이 천창으로부터 태미성좌로 들어 갔다.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流星犯月, 月無光. 三月, 遣使□{如}??<唐>獻方物. 出<成貞>[一云<嚴貞>.]王后, 賜彩五百匹·田二百結·租一萬石·宅一區, 宅買<康申公>舊居, 賜之. 大風拔木飛瓦, <崇禮殿>毁. 入<唐>賀正使<金楓厚>欲歸國, 授員外郞還之. 夏六月, 旱, 又召居士<理曉>祈禱, 則雨. 赦罪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15년 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하자 달이 빛을 잃었다.

3월,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성정[엄정이라고도 한다.]왕후를 궁에서 내보내는데, 비단 5백 필·밭 2백 결·벼 1만 석·저택 한 구역을 주었다. 그 집은 강신공의 옛 집이었는데 이를 사준 것이다.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았으며, 숭례전이 무너졌다. 당 나라에 갔던 하정사 김 풍후가 귀국하려 하니, 당 황제가 그에게 원외랑 벼슬을 주어 돌려 보냈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어 다시 거사 이효를 불러 기도하게 하니, 곧 비가 왔다.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置醫博士·산博士各一員. 三月, 創新宮. 夏四月, 地震. 六月, 太子<重慶>卒, 諡曰<??상{孝상}>??. 秋九月, 入<唐>大監<守忠>廻, 獻<文宣王>·十哲·七十二弟子圖, 卽置於大學.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봄 2월, 의박사와 산박사 각 한 명씩을 두었다.

3월, 새로 대궐을 지었다.

여름 4월, 지진이 있었다.

6월, 태자 중경이 죽으니 시호를 효상이라 하였다.

가을 9월, 당에 갔던 대감 수충이 돌아와 문선왕·10철·72제자의 화상을 바치자, 이를 곧 태학에 안치하였다.


○十七年, 春正月, 中侍<孝貞>退, 波珍찬<思恭>爲中侍. 二月, 王巡撫國西州郡, 親問高年及鰥寡孤獨, 賜物有差. 三月, 地震. 夏六月, 震<皇龍寺>塔. 始造漏刻. 遣使入<唐>朝貢, 授守中郞將還之. 冬十月, 流星自昴入于奎, 衆小星隨之, 天狗隕艮方. 築<漢山州>都督管內諸城.


17년 봄 정월, 중시 효정이 은퇴하고, 파진찬 사공이 중시가 되었다.

2월, 왕이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 위무하여, 나이 많은 사람·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직접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였다.

3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처음으로 누각을 만들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수중낭장 벼슬을 주어 돌려 보냈다.

겨울 10월, 유성이 묘성으로부터 규성으로 들어가자,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따라 들어갔고, 천구가 동북방에 떨어졌다.

한산주 도독 관내 여러 곳에 성을 쌓았다.


○十八年, 春正月, 遣使入<唐>賀正. 秋九月, 震<金馬郡><彌勒寺>.


18년 봄 정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가을 9월,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


○十九年, 春正月, 地震. 上大等<仁品>卒, 大阿찬<裴賦>爲上大等. 三月, 納伊찬<順元>之女, 爲王妃. 夏四月, 大雨, 山崩十三所. 雨雹傷禾苗. 五月, 命有司埋骸骨. <完山州>進白鵲. 六月, 冊王妃爲王后. 秋七月, <熊川州>獻白鵲. 蝗蟲害穀. 中侍<思恭>退, 波珍찬<文林>爲中侍.


19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상대등 인품이 사방하자, 대아찬 배 부가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이찬 순원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 큰 비가 내려 산이 열세 곳이나 무너졌다. 우박이 내려 볏모를 해쳤다.

5월, 유사에게 명령하여 해골을 묻게 하였다.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6월, 왕비를 왕후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중시 사공이 은퇴하고, 파진찬 문림이 중시가 되었다.


○二十年, 秋七月, 徵<何瑟羅道>丁夫二千, 築長城於北境. 冬, 無雪.


20년 가을 7월에 하슬라도 장정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二十一年, 春正月, 中侍<文林>卒, 伊찬<宣宗>爲中侍. 二月, 京都地震. 秋八月, 始給百姓丁田. 冬十月, 遣大奈麻<金仁壹>入<唐>賀正, 幷獻方物.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21년 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자, 이찬 선종이 중시가 되었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을 주었다.

겨울 10월, 대내마 김 인일을 당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로를 막았다.


○二十二年, 春三月, 王遣使入<唐>, 獻美女二人. 一名<抱貞>, 父<天承>奈麻, 一名<貞울>, 父<忠訓>大舍. 給以衣着·器具·奴婢·車馬, 備禮資遣之. <玄宗>曰: "女皆王姑자妹, 違本{親}??屬{俗}??別本國{所親}??, 朕不忍留." 厚賜還之. <貞울>碑云: "<孝成>六年, <天寶>元年歸<唐>." 未知孰是. 夏四月, 遣使入<唐>, 獻果下馬一匹·牛黃·人蔘·美체·朝霞紬·魚牙紬·鏤鷹鈴·海豹皮·金銀等. 上表曰: "臣鄕居海曲, 地處遐추, 元無泉客之珍, 本乏종人之貨, 敢將方産之物, 塵瀆天官, 駑蹇之才, 滓穢龍廐. 竊方<燕>豕, 敢類<楚>계. 深覺전顔, 彌增戰汗." 地震.


李丙燾. 「通鑑」.李丙燾. 「新唐書」.李丙燾.

22년 봄 3월,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내 미인 두 명을 바쳤다. 한 명은 포정이라는 여자로서 아버지는 내마 천승이었으며, 한 명은 정완이라는 여자로서 아버지는 대사 충훈이었다. 두 여자가 떠날 때 왕이 의복과 기구와 노비와 수레와 말을 주어, 예장을 갖추어 보냈다. 현종은 "너희들이 모두 왕의 내종 자매들로서, 친척과 이별하고 고국을 떠나 왔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게 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후하게 선물을 주어 돌려 보냈다. 정완의 비석에는 "효성 6년 즉 천보 원년에 당 나라에 가다"라고 되어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여름 4월, 사신을 당에 보내 과하마 한 필·우황·인삼·다리·조하주·어아주·조각한 매 방울·해표 가죽·금은 등을 바쳤다.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에 "우리 나라는 바다의 한 구석 벽지에 처하여 있어, 원래 외지에서 들어오는 귀한 재물이 없으므로, 감히 지방의 토산물로 황제의 이목을 더럽히고, 노둔한 말의 재주로 황제의 마굿간을 더럽힙니다. 생각해보면 요동의 흰돼지를 바치는 어리석음과 같사오니, 감히 초나라 닭을 바친 충성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속깊이 부끄러움을 느끼나니 더욱 떨리고 진땀이 흐릅니다"라고 하였다.

지진이 있었다.


○二十三年, 春, 立王子<承慶>爲太子. 大赦. <熊川州>進瑞芝. 二月, 遣<金武勳>入<唐>賀正. <武勳>還, <玄宗>降書曰: "卿, 每承正朔, 朝貢闕庭, 言念所懷, 深可嘉尙. 又得所進雜物等, 병踰越滄波, 跋涉草莽, 物旣精麗, 深表卿心. 今賜卿錦袍·金帶及綵索{素}??共二千匹, 以答誠獻, 至宜領也." 冬十二月, 遣使入<唐>獻方物. <炤德王妃>卒.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웅천주에서 서지를 진상하였다.

2월, 김 무훈을 당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무훈이 귀국할 때 현종이 글을 보내 말했다.

"경이 정삭을 받들 때마다 우리 조정에 조공을 보내고, 가슴에 품은 뜻을 말하니 진실로 가상한 일이다. 또한 진상한 여러 가지 물건을 받고 보니, 모두가 푸른 바다와 거친 들판을 건너 왔건만, 하나같이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것들이어서, 그대의 뜻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그대에게 비단 웃옷과 금 띠와 채색 비단, 흰 비단을 합하여 2천 필을 주어 정성스러운 예물에 답례하노니, 물건이 도착하면 잘 받으라"라고 하였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소덕 왕비가 사망하였다.


○二十四年, 春正月, 白虹見. 三月, 雪. 夏四月, 雹. 中侍<宣宗>退, 伊찬<允忠>爲中侍. 冬十月, 地動{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봄 정월,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중시 선종이 은퇴하자 이찬 윤충이 중시가 되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二十五年, 夏四月, 遣<金忠臣>入<唐>賀正. 五月, 遣王弟<金근質{金欽質}>??入<唐>朝貢, 授郞將還之.


李丙燾. 「冊府元龜」.

25년 여름 4월, 김 충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5월, 왕의 아우 김 근질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어 돌려 보냈다.


○二十六年, 春正月, 赦罪人. 遣使入<唐>賀正. 夏四月, 以一吉찬<魏元>爲大阿찬, 級찬<大讓>爲沙찬. 冬十二月, 修<永昌宮>. 上大等<裴賦>請老, 不許, 賜궤杖.


26년 봄 정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여름 4월, 일길찬 위 원을 대아찬, 급찬 대양을 사찬에 임명하였다.

겨울 12월, 영창궁을 수리하였다.

상대등 배 부가 연로하여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二十七年, 秋七月, 遣王弟<金嗣宗>, 入<唐>獻方物, 兼表請子弟入國學, 詔許之. 授<嗣宗>果毅, 仍留宿衛. 上大等<裴賦>請老, 從之. 以伊찬<思恭>爲上大等.


27년 가을 7월, 왕의 아우 김 사종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겸하여 글로써 자제들의 국학 입학을 요청하였다. 이를 허가하도록 황제가 명하였다. 황제가 사종에게 과의 벼슬을 주고, 숙위로 머무르게 하였다.

상대등 배 부가 연로하여 은퇴를 요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찬 사공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 遣使入<唐>賀正.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28년 봄 정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가을 9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九年, 春二月, 遣王族{姪}??<志滿>朝<唐>, 獻小馬五匹·狗一頭·金二千兩·頭髮八十兩·海豹皮十張. <玄宗>授<志滿>大僕卿{太僕卿}??, 賜絹一百匹·紫袍·錦細帶, 仍留宿衛. 冬十月, 遣使朝<唐>貢獻方物, <玄宗>賜物有差.


李丙燾.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

29년 봄 2월, 왕족 지만을 당에 보내 작은 말 다섯 필·개 한 마리·금 2천 냥·머리 털 80냥·해표 가죽 열 장을 바쳤다. 현종이 지만에게 태복경 벼슬을 주고, 명주 백 필·자줏 빛 웃옷·비단으로 만든 가는 띠를 주었고, 그를 숙위에 머무르게 하였다.

겨울 10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니, 현종이 직급에 따라 그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三十年, 春二月, 遣<金志良>入<唐>賀正, <玄宗>授大僕少卿{太僕少卿}??員外置, 賜帛六十匹放還, 降詔書曰: "所進牛黃及金銀等物, 省表具之. 卿二明慶祚, 三韓善隣, 時稱仁義之鄕, 世{代}??著勳賢之業. 文章禮樂, 闡君子之風. 納款輸忠, 效勤王之節, 固藩維之鎭衛, 諒忠義之儀表. 豈殊方憬{悍}??俗, 可同年而語耶? 加以慕義克勤, 述職愈謹, 梯山航海, 無倦於阻脩, 獻幣貢琛, 有常於歲序. 守我王度, 垂諸國章, 乃眷懇誠, 深可嘉尙. 朕每晨興佇念, 宵衣待賢. 想見其人, 以光啓沃, 俟卿구止, 允副所懷{依}??. 今使至, 知영疾苦, 不遂抵命, 言念遐闊, 用增憂勞. 時候暄和, 想전復也. 今賜卿綾綵五百匹, 帛二千五百匹, 宜卽領取." 夏四月, 赦. 賜老人酒食. <日本國>兵船三百소,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秋九月, 命百官會<的門>, 射車弩.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0년 봄 2월, 김 지량을 당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현종은 그에게 태복소경원외치 벼슬을 주고, 비단 60필을 주어 돌려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우황과 금은 등을 보내준 것을 그대의 표문을 보고 잘 알았다. 그대의 시조 두 성인이 나라를 창건한 이후, 삼한이 좋은 이웃으로 화목하게 지내니 세상에서는 그대의 나라를 어질고 의로운 나라라고 불렀고, 대대로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내었다. 문장과 예악은 군자의 기풍을 보여 주었고, 당 나라에 대한 약속과 충성을 지켜, 왕으로서의 절조를 힘써 실행하였으니, 진실로 번방의 요새이며, 충의의 모범이다. 그러하니 어찌 야만의 무리가 사는 이역의 흉악한 풍속 문화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대는 당 나라에 대한 공경과 정의를 두터이 하며, 우리 조정의 조회에 정성스럽게 참여하고, 길이 멀거나 험한 것을 마다하지 않고 산 넘고 바다를 건너와, 새해가 될 때마다 항상 폐백과 보물을 바쳤다. 그리하여 우리의 왕법을 지키고 국가의 기록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 간곡한 정성을 돌아 보면 실로 가상한 일이로다. 나는 새벽마다 일어나 그대를 생각하고, 밤에도 옷을 입고 현명한 사람인 그대를 기다렸다. 그대를 만나면 나의 심정이 밝아질 것 같았기에, 그대를 기다려 나의 소회를 나누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제 사신이 와서 사정을 설명하여, 그대가 병 때문에 오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니 걱정이 더할 뿐이다. 날씨가 온화하여지면 병이 회복되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대에게 능직 비단 5백 필과 비단 2천 5백 필을 주노니 받기를 바란다."

여름 4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일본국 병선 3백 척이 바다를 건너와 동쪽 변경을 습격하므로, 왕이 장병을  출동시켜 대파하였다.

가을 9월, 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적문에 모이게 하여, 그들과 함께 거노의 사격술을 관람하였다.


○三十一年, 冬十二月, 以角干<思恭>·伊찬<貞宗>·<允忠>·<思仁>, 各爲將軍.


31년 겨울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윤충·사인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遣大僕員外卿{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渤海}>??南鄙. 會, 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功而還. <金思蘭>本王族, 先因入朝, 恭而有禮, 因留宿衛. 及是, 委以出疆之任. 冬十二月, 遣王姪<志廉>, 朝<唐>謝恩. 初, 帝賜王白鸚鵡雄雌各一隻及紫羅繡袍·金銀細器物·瑞紋錦·五色羅綵共三百餘段. 王上表謝曰: "伏惟: 陛下, 執{乾}??象開元, 聖文神武, 應千齡之昌運, 致萬物之嘉祥. 風雲所通, 咸承至德, 日月所炤{照}??, 共被深仁. 臣地隔<蓬>·<壺>, 天慈洽遠, 鄕규華夏, 睿渥{澤}??覃幽. 伏視{覩}??瓊文, 궤披玉匣, 含九소之雨露, 帶五彩之원鸞. 辯惠{慧}??靈禽, 素蒼兩妙, 或稱<長安>之樂, 或傳聖主之恩. 羅錦彩章, 金銀寶鈿, 見之者爛目, 聞之者驚心. 原其獻??{애/??/款??}之功, 實由先祖, 錫此非常之寵, 延及末孫, 微효似塵, 重恩如嶽. 循涯췌分, 何以上酬." 詔饗<志廉>內殿, 賜以束帛.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32년 가을 7월, 발해에 소속된 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를 침범하므로, 당 현종이 태복원외경 김 사란을 귀국시키면서, 동시에 왕에게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의 작위를 더하여 주고, 김 사란에게 군사를 주어 말갈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한길 넘게 내려 산길이 막혔고,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으며,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김 사란은 원래 왕족이었는데 앞서 당 나라 조회에 참여하였을 때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므로 숙위로 머물도록 하였는데, 이 시기에 당 나라의 대외 임무를 맡긴 것이다.

겨울 12월, 왕의 조카 지렴을 당에 보내 황제의 은혜에 사례하였다. 이 보다 앞서 황제가 왕에게 흰 앵무새 암수 각 한마리와 자주 비단에 수놓은 웃옷과 금은으로 세공한 기물과 무늬 놓은 비단 및 오색 비단 3백여 단을 주었다. 왕이 다음과 같은 글을 황제에게 올려 감사를 표시하였다.

"생각컨데 폐하가 천하의 운행 법도에 따라 나라를 창건하니, 문무가 성스러워 천년 동안 창성할 것이며, 만물을 상서롭게 할 것입니다. 바람과 구름이 가는 곳은 어디나 폐하의 지극한 덕을 받게 되었으며,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폐하의 깊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봉래와 방호의 옆에 있어 중국과는 멀지만, 황제의 자비는 이러한 먼 데까지 미쳤으며, 궁벽진 향리에서 중국을 바라보니, 밝은 은혜가 어두운 데까지 뻗었습니다. 공손히 조서를 읽고서, 무릎꿇어 선물 상자를 열어 보니,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은 듯하고, 오색 빛깔의 신기한 새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영물스러운 새인 앵무는, 흰 것과 푸른 것 두 마리가 신묘하게 어우러져, 때로는 장안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황제의 은혜를 전해주는 듯 하였습니다. 비단의 채색 무늬와 보물의 금은 장식은, 보는 자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자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원래 당 나라에 정성을 바친 공은, 사실은 선조들이 이룬 것인데, 저에게 이 처럼 큰 은총을 내리고,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미미한 충성은 티끌처럼 작은데, 은혜는 태산 같이 큰 격입니다. 저의 분수를 생각해보면 무엇으로 보답할지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지렴을 위하여 대궐 내전에서 잔치를 열게 하고, 그에게 비단 1속을 주었다.


○三十三年, 春正月, 敎百官, 親入北門奏對. 入<唐>宿衛左領軍衛員外將軍<金忠信>上表曰: "臣所奉進上{止}??, 令臣執節, 本國發兵馬, 討除<靺鞨>, 有事續奏者. 臣自奉聖旨, 誓將致命. 當此之時, 爲替人<金孝方>身亡, 便留臣宿衛. 臣本國王以臣久侍天庭, 遣使從姪<志廉>代臣. 今已到訖, 臣卽合還. 每思前所奉進上{止}??, 無忘夙夜. 陛下先有制, 加本國王<興光>寧海軍大使, 錫之旌節, 以討凶殘, 皇威載臨, 雖遠猶近, 君則有命, 臣敢不祗. 蠢爾夷부, 計己悔禍, 然除惡務本, 布憲惟新. 故出師義貴乎三捷, 縱敵患貽於數代. 伏望: 陛下因臣還國, 以副使假臣, 盡將天旨再宣殊裔. 豈稚{惟}??斯怒益振, 固亦武夫作氣, 必傾其巢穴, 靜此荒隅, 遂夷臣之小誠, 爲國家之大利. 臣等復乘부滄海, 獻捷丹위, 효毛髮之功, 答雨露之施, 臣所望也. 伏惟陛下圖之." 帝許焉. 夏四月, 遣大臣<金端竭丹>, 入<唐>賀正. 帝宴見於內殿, 授衛尉少卿, 賜緋란袍·平漫銀帶及絹六十匹. 先時遣王姪<志廉>謝恩, 獻小馬兩匹·狗三頭·金五百兩·銀二十兩·布六十匹·牛黃二十兩·人蔘二百斤· 頭髮一百兩·海豹皮一十六張. 及是授<志廉>鴻려少卿員外置.


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33년 봄 정월, 백관들이 직접 북문으로 들어와 상주를 올리거나 왕과 마주 대하도록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당 나라에 가서 숙위를 하는 좌령군위원외장군 김 충신이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렸다.

"제가 받은 명령은, 제가 폐하의 신임표를 가지고 본국에 가서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다른 상황이 발생하면 계속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나서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저를 대신하여 숙위할 사람인 김 효방이 죽었기 때문에 제가 숙위로 유임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본국 왕은 제가 황제를 오래 모셨다 하여, 저의 종질 지렴을 사신으로 보내와 저를 대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그가 이미 도착해 있으니 저는 귀국함이 합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전에 받은 황제의 명령은 언제나 염두에 둘 것이며, 밤이나 낮이나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예전에 본국의 왕 흥광에게 영해군 대사의 직위를 가하고, 군사 출동의 정절을 주어 흉적을 토벌케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임하면 먼 곳이라도 가까운 곳 같았고, 황제의 명령이 내리면 신하는 감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오랑캐들은 자신의 행동이 화를 불러 일으켰음을 이미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근본에 힘써야할 것이며, 법령을 선포함에 있어서는 새로움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의 출동에 있어서는 세 번의 승리보다도 정의가 더욱 귀중하며, 적을 방종케 하면 후환이 누대에 미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저의 귀국을 기회로, 부사의 직을 저에게 맡겨 주셔서, 황제의 뜻을 신라에 거듭 선포토록 하소서. 그리하면 이것이 어찌 황제의 위엄만 떨칠 뿐이겠습니까. 실로 군사들도 또한 기운을 내어 반드시 오랑케의 근거지를 뒤엎어서, 이 거친 변방을 안정시킬 것이고, 마침내 저의 작은 정성이 국가의 큰 이익으로 변할 것입니다. 신 등이 다시 창해에 배를 띄우고 승리의 보고를 대궐에 바치며, 작은 공이라도 세워, 크나큰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폐하께서 이 뜻을 들어 주소서."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여름 4월, 대신 김 단갈단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황제는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그를 접견하고, 위위소경 벼슬을 주었으며, 비란포·평만은대·명주 60필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왕의 조카 지렴을 보내 황제에게 사례하고, 작은 말 2필·개 3마리·금 500냥·은 20냥·베 60필·우황 20냥·인삼 200근·머리털 100냥·해표 가죽 16장을 바쳤었다. 이 때 황제는 지렴에게도 홍려소경원외치 벼슬을 주었다.


○三十四年, 春正月, 熒惑犯月. 遣<金義忠>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少卿. <義忠>廻, 래賜<浿江>以南地.


34년 봄 정월, 화성이 달을 범하였다.

김 의충을 당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2월, 부사 김 영이 당에서 사망하자, 광록소경 벼슬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귀국할 때 황제는 신라에 패강 이남의 땅을 주라는 조칙을 내렸다.


○三十五年, 夏六月, 遣使入<唐>賀正, 仍附表陳謝曰: "伏奉恩래, 賜<浿江>以南地境. 臣生居海裔, 沐化聖朝, 雖丹素爲心, 而功無可효, 以忠貞爲事, 而勞不足賞. 陛下降雨露之恩, 發日月之詔, 錫臣土境{壤}??, 廣臣邑居, 遂使墾闢有期, 農桑得所. 臣奉絲綸之旨, 荷榮寵之深, 粉骨미身, 無由上답{答}??." 冬十一月, 遣從弟大阿찬<金相>朝<唐>, 死于路. 帝深悼之, 贈衛尉卿. 遣伊찬<允忠>·<思仁>·<英述>, 檢察<平壤>·<牛頭>二州地勢. 狗登<在城>鼓樓, 吠三日.


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35년 여름 6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패강 이남의 땅을 준다는 칙서를 삼가 받았습니다. 제가 바다의 한 구석에 태어나 살면서, 거룩한 당 황제의 교화를 입었으니, 비록 충성을 바칠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공적은 없었으며, 충정을 일 삼았으나 상을 받을 만한 노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가 크나큰 은혜를 베풀고, 해와 달 같이 밝은 조서를 내려 저에게 토지를 주어서, 나라를 넓혔으니, 마침내 땅을 개간할 희망이 생기고 농사지을 터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서의 뜻을 받들어 큰 은총을 입었으니, 분골쇄신할지라도 황제에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겨울 11월, 왕의 종제 대아찬 김 상을 당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도중에 사망하였다. 황제가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 벼슬을 추증하였다.

이찬·윤충·사인·영술을 보내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조사하였다.

개가 재성 고루에 올라가 사흘 동안 짖었다.


○三十六年, 春二月, 遣沙찬<金抱質>入<唐>賀正, 旦{且}??獻方物. 王薨. 諡曰<聖德>, 葬<移車寺>南.

三國史記卷第八.


趙炳舜. 『三國史節要』.

36년 봄 2월, 사찬 김 포질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성덕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 8 끝




三國史記卷第九.



삼국사기 권 제 9


新羅本紀第九.

<孝成王>·<景德王>·<惠恭王>·<宣德王>.


신라본기 제 9

효성왕, 경덕왕, 혜공왕, 선덕왕.


○<孝成王>立. 諱<承慶>, <聖德王>第二子, 母<炤德王后>. 大赦. 三月, 改司正丞及左右議方府丞, 병爲佐. 以伊찬<貞宗>爲上大等; 阿찬<義忠>爲中侍. 夏五月, 地震. 秋九月, 流星入大微. 冬十月, 入<唐>沙찬<抱質>廻. 十二月, 遣使入<唐>獻方物.


효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경이며,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소덕왕후이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사정부의 승과 좌우 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고쳤다. 이찬 정종을 상대등, 아찬 의충을 중시에 임명하였다.

여름 5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9월, 유성이 태미 성좌에 들어 갔다.

겨울 10월, 당 나라에 갔던 사찬 포질이 돌아왔다.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二年, 春二月, <唐><玄宗>聞<聖德王>薨, 悼惜久之, 遣左贊善大夫<邢璹>, 以鴻려少卿, 往吊祭, 贈太子太保, 且冊嗣王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 <璹>將發, 帝製詩序, 太子已下百寮, 咸賦詩以送. 帝謂<璹>曰: "<新羅>號爲君子之國, 頗知書記, 有類<中國>. 以卿惇儒, 故持節往, 宜演經義, 使知大國儒敎之盛." 又以國人善碁, 詔率府兵曹참軍<楊季膺>爲副, 國高奕皆出其下. 於是, 王厚贈<璹>等金寶藥物. <唐>遣使, 詔冊王妃<朴>氏. 三月, 遣<金元玄>入<唐>賀正. 夏四月, <唐>使臣<邢璹>, 以<老子>『道德經』等文書, 獻于王. 白虹貫日, <所夫里郡>河水變血.


2년 봄 2월, 당 현종은 성덕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좌찬선 대부 형도를 홍려소경의 자격으로 파견하여 조문케하고, 태자태보의 관작을 추증하였으며, 또한 새 왕을 '개부의동삼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형도가 당 나라를 출발하려 할 때, 황제가 시의 서문을 짓고, 태자 이하 백관들이 모두 시를 지어 보냈다. 황제가 형도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불리우나니 책과 글에 조예가 사당히 깊어서 우리 중국과 비슷하다. 그대는 돈유한 선비이므로 나의 신임표를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경서의 뜻을 강의하여, 대국에 유교가 성한 것을 알게 하라"고 하였다. 황제는 또한 우리 백성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 솔부병조참군 양계응에게 조칙을 내려 부관으로 동행케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바둑 고수들이 모두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이 때 왕이 형도 등에게 금·보물·약물 등을 후하게 주었다. 당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려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3월, 김 원현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여름 4월, 당 나라 사신 형도가 노자 「도덕경」 등의 책을 왕에게 바쳤다.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소부리군의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三年, 春正月, 拜祖考廟. 中侍<義忠>卒, 以伊찬<信忠>爲中侍. <善天宮>成. 賜<邢璹>黃金三十兩·布五十匹·人蔘一百斤. 二月, 拜王弟<憲英>爲波珍찬. 三月, 納伊찬<順元>女<惠明>爲妃. 夏五月, 封波珍찬<憲英>爲太子. 秋九月, <完山州>獻白鵲. 狐鳴<月城>宮中, 狗咬殺之.


3년 봄 정월, 왕이 조부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중시 의충이 사망하자, 이찬 신충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선천궁이 낙성되었다. 형도에게 황금 30냥과 베 50필, 인삼 100근을 주었다.

2월, 왕의 아우 헌영을 파진찬에 임명하였다.

3월, 이찬 순원의 딸 혜명을 왕비로 맞았다.

여름 5월, 파진찬 헌영을 태자로 봉하였다.

가을 9월,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여우가 월성궁에서 울었는데, 그것을 개가 물어 죽였다.


○四年, 春三月, <唐>遣使, 冊夫人<金>氏爲王妃. 夏五月, 鎭星犯軒轅大星. 秋七月, 有一緋衣女人, 自<隸橋>下出, 謗朝政, 過<孝信公>門, 忽不見. 八月, 波珍찬<永宗>謀叛, 伏誅. 先是, <永宗>女入後宮, 王絶愛之, 恩渥日甚. 王妃嫉妬, 與族人謀殺之. <永宗>怨王妃宗黨, 因此叛.


4년 봄 3월, 당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부인 김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여름 5월, 토성이 헌원 성좌의 큰 별을 범하였다.

가을 7월, 붉은 옷을 입은 여자 한 명이 예교 밑에서 나와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다가, 효신공의 대문을 지나간 후로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8월, 파진찬 영종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이보다 앞서 영종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들어오자, 왕이 그를 몹시 사랑하여 은총이 날로 심하였다. 왕비는 이를 질투하여 자기 친척과 함께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이리하여 영종이 왕비와 그의 친척 무리들에게 원한을 갖게 되어 반역을 한 것이다.


○五年, 夏四月, 命大臣<貞宗>·<思仁>, 閱弩兵.


5년 여름 4월, 대신 정종·사인으로 하여금 쇠뇌를 쏘는 군사들을 검열하게 하였다.


○六年, 春二月, 東北地震, 有聲如雷. 夏五月, 流星犯參大星. 王薨. 諡曰<孝成>. 以遺命, 燒柩於<法流寺>南, 散骨東海.


6년 봄 2월, 동북쪽에서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여름 5월,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효성이라 하였다. 유언에 따라 관을 법류사 남쪽에서 불에 태우고,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景德王>立. 諱<憲英>, <孝成王>同母弟. <孝成>無子, 立<憲英>爲太子, 故得嗣位. 妃伊찬<順貞>之女也.


경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헌영이며, 효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한 것이다. 왕비는 이찬 순정의 딸이다.


○元年, 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원년 겨울 10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二年, 春三月, <主力公>宅, 牛一産三{五}??犢. <唐><玄宗>, 遣贊善大夫<魏曜>來吊祭. 仍冊王爲<新羅>王, 襲先王官爵, 制曰: "故開府儀同三司使(+充)??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持節寧海軍使<新羅>王<金承慶>弟<憲英>, 奕業{葉}??懷仁, 率心常禮, 大賢風敎, 條理尤明, 中夏軌儀, 衣冠素襲. 馳海琛而遣使, 準雲呂而通朝, 代爲純臣, 累효忠節. 頃者, 兄承土宇, 沒而絶嗣, 弟膺繼及, 抑惟常經, 是用賓懷, 優以冊命, 宜用舊業, 비承藩長之名. 仍加殊禮, 載錫<漢>官之號, 可襲兄<新羅>王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充持節寧海軍使." 幷賜御註『孝經』一部. 夏四月, 納舒弗邯<金義忠>女, 爲王妃. 秋八月, 地震. 冬十二月, 遣王弟入<唐>賀正. 授左淸道率府員外長史, 賜綠袍銀帶, 放還.


李丙燾. 「新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李丙燾.

2년 봄 3월, 주력공의 집에서 소가 한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 현종이 찬선대부 위요를 보내와 제사에 참여하게 하고, 이어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선왕의 관작을 잇게 하였는데, 그 조서는 다음과 같았다.

"고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영해군사신라왕' 김 승경의 아우 헌영은 대대로 왕업을 계승하여 어진 생각을 품고, 상도에 맞는 예의에 마음을 두었으니, 기자(箕子)의 풍속과 교화는 조리가 더욱 밝아지고, 중국 제도의 의관도 스스로 답습하게 되었다. 바다를 통하여 사신을 보내오고, 구름을 벗삼는 먼 길을 따라 당 나라의 조정에 왕래하여, 대대로 사심 없는 신하로서 여러 번 충절을 나타내었다. 이전에 왕의 형이 국가를 계승하였으나, 그가 아들이 없어 아우가 그 뒤를 잇게되니, 이것도 상례일 것이므로, 이에 빈례로 우대하여 책명하노니, 마땅히 구업을 지켜 번국의 수장으로서의 명예를 계승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예우를 가하여 중국 관작의 칭호를 주노니 형의 관작인 '신라왕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충지절영해군사'를 이어 받으라." 조서와 함께 황제의 명령으로 주해를 가한 「효경」 한 권을 주었다.

여름 4월, 서불한 김 의충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겨울 12월, 왕의 아우를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니, 황제가 그에게 좌청도솔부원외장사 벼슬을 주고, 초록빛 웃옷과 은대를 주어 돌려 보냈다.


○三年, 春正月, 以伊찬<惟正>爲中侍. 閏二月, 遣使入<唐>賀正, 幷獻方物. 夏四月, 親祀神宮. 遣使入<唐>獻馬. 冬, ??{妖}??星出中天, 大如五斗器. 浹旬乃滅.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이찬 유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윤 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말을 바쳤다.

겨울에 이상한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말들이 그릇만 하였다. 이 별은 열흘 만에 사라졌다.


○四年, 春正月, 拜伊찬<金思仁>爲上大等. 夏四月, 京都雹, 大如鷄子. 五月, 旱. 中侍<惟正>退, 伊찬<大正>爲中侍. 秋七月, 葺東宮. 又置司正府·少年監典·穢宮典.


4년 봄 정월, 이찬 김 사인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그 크기가 달걀 정도였다.

5월, 가뭄이 들었다.

중시 유정이 퇴직하자, 이찬 대정이 중시가 되었다.

가을 7월, 동궁을 수리하고, 또한 사정부와 소년감전과 예궁전을 설치하였다.


○五年, 春二月, 遣使入<唐>賀正, 幷獻方物. 夏四月, 大赦, 賜大포, 度僧一百五十人.


5년 봄 2월, 당에 사신을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 죄수들을 대사하고, 백성들을 위한 큰 연회를 베풀었다. 중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六年, 春正月, 改中侍爲侍中. 置國學諸業博士·助敎. 遣使入<唐>賀正, 幷獻方物. 三月, 震<眞平王陵>. 秋, 旱. 冬, 無雪. 民饑且疫, 出使十道安撫.


6년 봄 정월, 중시를 시중으로 고치고,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3월, 진평왕릉에 벼락이 쳤다.

가을에 가뭄이 들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사방에 특사를 보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위로하였다.


○七年, 春正月, 天狗落地. 秋八月, 太后移居<永明新宮>. 始置貞察{員察}??一員, 糾正百官. 遣阿찬<貞節>等, 檢察北邊. 始置<大谷城>等十四郡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 태후가 새로 지은 영명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처음으로 정찰 한 명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여 바로 잡게 하였다.

아찬 정절 등을 파견하여 북쪽 변경을 시찰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八年, 春三{二}??月, 暴風拔木. 三月, 置天文博士一員·漏刻博士六員.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 천문 박사 한 명과 누각 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九年, 春正月, 侍中<大正>免, 伊찬<朝良>爲侍中. 二月, 置御龍省奉御二員.


9년 봄 정월, 시중 대정이 사직하자, 이찬 조량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어룡성에 봉어 두 명을 두었다.


○十一年, 春三月, 以級찬<原神>·<龍方>爲大阿찬. 秋八月, 置東宮衙官. 冬十月, 加置倉部史三人.


11년 봄 3월, 급찬 원신과 용방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가을 8월, 동궁아관을 두었다.

겨울 10월, 창부에 사 3명을 더 두었다.


○十二年, 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武珍州>獻白雉.


12년 가을 8월,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그가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곧 돌아갔다.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쳤다.


○十三年, 夏四月, 京都雹, 大如鷄卵. 五月, 立<聖德王>碑. <牛頭州>獻瑞芝. 秋七月, 王命官修葺<永興>·<元延{元永}??>二寺. 八月, 旱, 蝗. 侍中<朝良>退.


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 정도였다.

5월, 성덕왕의 비석을 세웠다.

우두주에서 상서로운 지초를 바쳤다.

가을 7월, 왕이 관원을 시켜 영흥사와 원연사를 수리하였다.

8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시중 조량이 퇴직하였다.


○十四年, 春, 곡貴民饑. <熊川州><向德>, 貧無以爲養, 割股肉, 飼其父. 王聞, 賜賚頗厚, 仍使旌表門閭. <望德寺>塔動.[<唐><令狐澄>『新羅國記』曰: "其國, 爲<唐>立此寺, 故以爲名. 兩塔相對高十三層, 忽震動開合, 如欲傾倒者數日. 其年<祿山>亂, 疑其應也."] 夏四月, 遣使入<唐>賀正. 秋七月, 赦罪人, 存問老疾鰥寡孤獨, 賜곡有差. 以伊찬<金耆>爲侍中.


14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이라는 사람이 가난하여 그 아버지를 봉양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선물을 후히 주고, 동시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망덕사 탑이 흔들렸다.[당 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 "신라가 당 나라를 위하여 이 절을 세운 까닭에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두 탑은 마주 보고 있으며, 높이는 13층이다.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하며 곧 넘어질 듯하였다. 이러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이 해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닌가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름 4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가을 7월, 죄수들을 석방하고, 늙고 병든 이·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다. 이찬 김 기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上大等<金思仁>, 以比年災異屢見, 上疏極論時政得失, 王嘉納之. 王聞<玄宗>在<蜀>, 遣使入<唐>, 소<江>至<成都>, 朝貢. <玄宗>御製御書五言十韻詩, 賜王曰: "嘉<新羅>王歲修朝貢, 克踐禮樂名義, 賜詩一首: 四維分景緯, 萬象含中樞. 玉帛遍天下, 梯航歸上都. 緬懷阻靑陸, 歲月勤黃圖. 漫漫窮地際, 蒼蒼連海隅. 興言名義國, 豈謂山河殊. 使去傳風敎, 人來習典謨. 衣冠知奉禮, 忠信識尊儒. 誠矣天其鑑, 賢哉德不孤. 擁모同作牧, 厚황比生추. 益重靑靑志, 風霜恒不투." 帝幸<蜀>時, <新羅>能不遠千里, 朝聘行在所, 故嘉其至誠, 賜之以詩. 其云: "益重靑靑志, 風霜恒不투"者, 豈古詩"疾風知勁草, 叛{板}??蕩識貞臣"之意乎. <宣和>中, 入朝使臣<金富儀>將刻本, 入<변京>, 示관伴學士<李병>. <李병>上皇帝, 因宣示兩府及諸學士訖, 傳宣曰: "進奉侍郞所上詩, 眞明皇書." 嘉嘆不已. 夏四月, 大雹. <大永郞>獻白狐, 授位南邊第一.


趙炳舜. 『三國史節要』.

15년 봄 2월, 상대등 김 사인이, 해마다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난 사실을 들어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는 시국 정치의 옳고 그름을 극렬하게 비평한 것이었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 들였다.

왕이, 당 현종이 촉 지방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현종은 5언 10운 시를 직접 짓고 써서 왕에게 보내며 말했다.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잘 하고, 예악 및 대의명분을 훌륭하게 실행에 옮기므로, 시 한편을 지어 주노라.

사방은 위도로 나뉘어 있으나

만물은 모두 중심을 가지고 있네.

옥과 비단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으나

산 넘고 물 건너 중국의 서울로 찾아 든다.

생각하면 먼 곳 동방은 막혔건만

해마다 신라는 중국을 위해 힘을 쓰네.

아득히 먼 곳 땅의 끝

푸른 바다 한 구석에 자리하건만

대의 명분 지키는 나라라고 일컬어지니

산 다르고 물 다른 나라라고 어찌 부르랴.

사신은 돌아가 중국의 풍교를 전하고

사람들은 찾아와 우리의 옛 고전을 배워 가는구나.

의관을 예절에 맞출 줄 알고

충성스럽고 신의를 지키며 학문을 존중할 줄 아나니,

그 성실함이여, 하늘이 굽어 볼 것이오,

그 현명함이여, 덕행은 외롭지 않으리!

깃발 세우고 우리처럼 백성을 다스리니

보내 준 후한 선물 정성이 넘치나니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 서리 맞아도 영원히 변하지 말라."

현종이 촉 지방에 갔을 때, 신라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황제의 행재소까지 찾아 갔으므로, 그 지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지어 준 것이다. 싯구 중의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 서리 맞아도 영원히 변하지 말라"라고 한 것은, 옛날의 싯구인 "강한 바람이 불어야만 강한 풀을 알게 되고, 정치가 문란한 뒤에야 지조 있는 신하를 알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선화 연간에 송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 부의가 이 시의 각본을 가지고 변경에 가서 접대원으로 있던 학사 이 병에게 보였다. 이 병은 이를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는 양부와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 보이고, 황제의 의견을 말하기를 "진봉 시랑이 바친 시는 틀림 없는 현종의 글씨이다"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여름 4월, 큰 우박이 내렸다.

대영랑이 흰 여우를 바쳤으므로, 남변 제일의 직위를 주었다.


○十六年, 春正月, 上大等<思仁>病免, 伊찬<信忠>爲上大等. 三月, 除內外群官月俸, 復賜祿邑. 秋七月, 重修<永昌宮>. 八月, 加調府史二人. 冬十二月, 改<沙伐州>爲<尙州>, 領州一, 郡十, 縣三十; <삽良州>爲<良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二, 縣三十四; <菁州>爲<康州>, 領州一, 郡十一, 縣二十七; <漢山州>爲<漢州>, 領州一, 小京一, 郡二十七, 縣四十六; <首若州>爲<朔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一, 縣二十七; <熊川州>爲<熊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三, 縣二十九; <河西州>爲<溟州>, 領州一, 郡九, 縣二十五; <完山州>爲<全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 縣三十一; <武珍州>爲<武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四, 縣四十四.[<良州>一作<梁州>.]


16년 봄 정월, 상대등 김 사인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신충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서울과 지방 관리들의 월급제를 폐지하고, 다시 녹읍을 주었다.

가을 7월, 영창궁을 중수하였다.

8월, 조부에 사 2명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소속시켰다. 삽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소속시켰다.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소속시켰다.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소속시켰다. 하서주를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5현을 소속시켰다.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소속시켰다.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소속시켰다.['良州'는 '梁州'로 쓰기도 한다.]


○十七年, 春正月, 侍中<金耆>卒, 伊찬<廉相>爲侍中. 二月, 下敎: 內外官請暇滿六十日者, 聽解官. 夏四月, 選醫官精究者, 充內供奉. 置律令博士二員. 秋七月二十三日, 王子生. 大雷電, 震佛寺十六所. 八月, 遣使入<唐>朝貢.


17년 봄 정월, 시중 김 기가 죽자, 이찬 염 상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이 교서를 내려서,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휴가를 만 60일 이상 얻은 자는 해직으로 인정하였다.

여름 4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자를 선발하여, 내공봉을 맡도록 하였다. 율령 박사 두 명을 두었다.

가을 7월 23일, 왕자가 탄생하였다. 우레와 번개가 심하였고, 16곳의 절에 벼락이 쳤다.

8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八年, 春正月, 改兵部·倉部卿·監爲侍郞, 大舍爲郞中, 改執事舍知爲執事員外郞, 執事史爲執事郞. 改調府·禮部·乘府·船府·領客府·左右議方府·司正府·位和府·例作典·大學監·大道署·永昌宮等大舍爲主簿. 賞賜署·典祀署·音聲署·工匠府·彩典等大舍爲主書. 二月, 改禮部舍知爲司禮, 調府舍知爲司庫, 領客府舍知爲司儀, 乘府舍知爲司牧, 船府舍知爲同舟{司舟}??, 例作府舍知爲司例, 兵部弩舍知爲司兵, 倉部租舍知爲司倉. 三月, 彗星見, 至秋乃滅.


趙炳舜. 『三國史節要』.

18년 봄 정월,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대사를 낭중으로, 집사부의 사지를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 조부·예부·승부·선부·영객부·좌우의방부·사정부·위화부·예작전·태학감·대도서·영창궁 등의 대사를 주부로 개칭하였으며, 상사서·전사서·음성서·공장부·채전 등의 대사를 주서로 개칭하였다.

2월,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로, 영객부의 사지를 사의로, 승부의 사지를 사목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3월, 혜성이 나타났다. 이 혜성은 가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十九年, 春正月, 都城寅方, 有聲如伐鼓, 衆人謂之鬼鼓. 二月, 宮中穿大池. 又於宮南<蚊川>之上, 起<月淨>·<春陽>二橋. 夏四月, 侍中<廉相>退, 伊찬<金邕>爲侍中. 秋七月, 封王子<乾運>, 爲王太子.


19년 봄 정월, 서울 동쪽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이를 귀신이 치는 북 소리라고 말하였다.

2월, 대궐 안에 큰 연못을 파고, 또한 대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춘양교의 두 다리를 놓았다.

여름 4월, 시중 염 상이 퇴직하고, 이찬 김 옹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7월, 왕자 건운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二十年, 春正月朔, 虹貫日, 日有珥. 夏四月, 彗星出.


20년 봄 정월 초하룻날,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고 햇무리가 보였다.

여름 4월, 혜성이 나타났다.


○二十一年, 夏五月, 築<五谷>·<휴巖>·<漢城>·<獐塞>·<池城>·<德谷>六城, 各置太守.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21년 여름 5월, 오곡·휴암·한성·장새·지성·덕곡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가을 9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二年, 夏四月, 遣使入<唐>朝貢. 秋七月, 京都大風, 飛瓦拔樹. 八月, 추{桃}??李再花. 上大等<信忠>·侍中<金邕>免. 大奈麻<李純>爲王寵臣, 忽一旦避世入山, 累徵不就. 剃髮爲僧, 爲王創立<斷俗寺>, 居之. 後, 聞王好樂, 卽詣宮門. 諫奏曰: "臣聞: 昔者, <桀>·<紂>荒于酒色, 淫樂不止. 由是, 政事凌遲{夷}??, 國家敗滅, 覆轍在前, 後車宜戒. 伏望: 大王改過自新, 以永國壽." 王聞之感歎, 爲之停樂. 便引之正室, 聞說道妙, 以及理世之方, 數日乃止.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2년 여름 4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뽑혔다.

8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두 번째 피었다.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 옹이 퇴직하였다. 대내마 이 순은 왕의 총신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 갔는데,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그 후 왕이 풍악을 즐긴다는 말을 듣고 그는 즉시 대궐문으로 찾아갔다. 그는 왕에게 "제가 듣건대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황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로 인하여 정치가 문란하고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앞에 가는 수레 바퀴가 엎어지면 뒷 수레는 마땅히 이를 경계 하여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허물을 고치고 자신을 새롭게 바꾸어 나라를 영원히 보존하소서"라고 간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그치게 하고, 그를 큰 방으로 인도하여 도리의 오묘함과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며칠 동안이나 들었다.


○二十三年, 春正月, 伊찬<萬宗>爲上大等, 阿찬<良相>爲侍中. 三月, 星패于東南. 龍見<楊山>下, 俄而飛去. 冬十二月十一日, 流星或大或小, 觀者不能數.


23년 봄 정월, 이찬 만종이 상대등이 되고, 아찬 양상이 시중이 되었다.

3월, 혜성이 동남쪽에 나타나고, 용이 양산 밑에 나타났다가 얼마 안되어 날아갔다.

겨울 12월 11일, 크고 작은 유성이 나타났는데, 이를 본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二十四年, 夏四月, 地震. 遣使入<唐>朝貢, 帝授使者檢校禮部尙書. 六月, 流星犯心. 是月, 王薨. 諡曰<景德>, 葬<毛祇寺>西岑.[『古記』云: "<永泰>元年乙巳卒." 而『舊唐書』及『資理通鑑』皆云: "<大曆>二年, <新羅>王<憲英>卒." 豈其誤耶.]


24년 여름 4월, 지진이 있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 벼슬을 주었다.

6월, 유성이 심성을 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영태 원년 을사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와 「자리통감」에는 모두 '대력 2년에 신라왕 헌영이 사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惠恭王>立. 諱<乾運>, <景德王>之嫡子. 母, <金>氏<滿月>夫人, 舒弗邯<義忠>之女. 王卽位時年八歲, 太后攝政.


혜공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건운이며, 경덕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월부인이며 서불한 의충의 딸이다. 왕이 즉위했을 때 나이가 여덟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섭정하였다.


○元年, 大赦. 幸大學, 命博士講『尙書』義.


원년에 죄수들을 대사하고, 왕이 태학에 행차하여 박사에게 상서를 강의하게 하였다.


○二年, 春正月, 二日병出. 大赦. 二月, 王親祀新宮. <良里公>家牝牛生犢, 五脚, 一脚向上. <康州>地陷成池, 縱廣五十餘尺, 水色靑黑. 冬十月, 天有聲如鼓.


2년 봄 정월, 두 개의 해가 나타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양리공 집에서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다섯이었다. 다리 하나는 위로 향하였다.

강주에서 땅이 내려앉아 연못이 되었는데, 넓이가 50여 척이고 검푸른 물빛이었다.

겨울 10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북소리 같았다.


○三年, 夏六月, 地震. 秋七月, 遣伊찬<金隱居>, 入<唐>貢方物, 仍請加冊命. 帝御<紫震殿{紫宸殿}>??宴見. 三星隕王庭, 相擊, 其光如火병散. 九月, <金浦縣>禾實皆米.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여름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7월, 이찬 김 은거를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동시에 책명해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자신전에 나와 접견하였다.

별 세 개가 대궐에 떨어져 서로 부딪쳤다. 그 빛이 불같이 솟아 올랐다가 흩어졌다.

9월, 김포현에서 벼 이삭이 모두 쌀로 변하였다.


○四年, 春, 彗星出東北. <唐><代宗>遣倉部郞中<歸崇敬>兼御史中丞, 持節齎冊書, 冊王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 兼冊王母<金>氏爲大妃. 夏五月, 赦殊死已下罪. 六月, 京都雷雹傷草木. 大星隕<皇龍寺>南. 地震聲如雷, 泉井皆渴. 虎入宮中. 秋七月, 一吉찬<大恭>與弟阿찬<大廉>叛, 集衆, 圍王宮三十三日. 王軍討平之, 誅九族. 九月, 遣使入<唐>朝貢. 冬十月, 以伊찬<神猷>爲上大等, 伊찬<金隱居>爲侍中.


4년 봄,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당 나라 대종이 창부낭중 귀 숭경에게 어사중승을 겸직시켜 황제의 신임표와 책봉서를 가지고 와서 왕을 '개부의동삼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동시에 왕의 어머니 김씨를 대비로 책봉하였다.

여름 5월,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6월, 서울에 벼락이 치고 우박이 내려 초목이 상하였다.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다. 지진이 발생하였는데 그 소리가 벼락 소리 같았고,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다. 호랑이가 대궐에 들어 왔다.

가을 7월, 일길찬 대공이 그의 아우인 아찬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반도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포위하였다. 왕의 군사가 이들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9족을 모두 처형하였다.

9월,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이찬 신유를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김 은거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五年, 春三月, 燕群臣於<臨海殿>. 夏五月, 蝗. 旱. 命百官各擧所知. 冬十一月, <雉岳縣>鼠八千{數十}??許, 向<平壤>. 無雪.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3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메뚜기 떼가 생겼다. 가뭄이 들었다. 왕이 백관들에게 각자 아는 인물을 천거하게 하였다.

겨울 11월, 치악현에서 쥐 8천여 마리가 평양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六年, 春正月, 王幸<西原京>, 曲赦所經州縣繫囚. 三月, 雨土. 夏四月, 王至自<西原>. 五月十一日, 彗星出五章{五車}??北, 至六月十二日滅. 二十九日, 虎入執事省, 捉殺之. 秋八月, 大阿찬<金融>叛, 伏誅. 冬十一月, 京都地震. 十二月, 侍中<隱居>退, 伊찬<正門>爲侍中.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봄 정월, 왕이 서원경에 행차하였는데, 도중의 주와 현의 죄수들을 특사하였다.

3월, 흙비가 내렸다.

4월, 왕이 서원에서 돌아왔다.

5월 11일, 혜성이 오거성좌 북쪽에 나타났다가 6월 12일에 사라졌다.

29일, 호랑이가 집사성에 들어왔으므로 잡아 죽였다.

가을 8월, 대아찬 김 융이 반역하다가 사형당하였다.

겨울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12월, 시중 은거가 퇴직하자 이찬 정문이 시중이 되었다.


○八年, 春正月, 遣伊찬<金標石>, 朝<唐>賀正. <代宗>授衛尉員外少卿放還.


8년 봄 정월, 이찬 김 표석을 당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당 나라 대종이 그에게 위위원외소경 벼슬을 주어 귀국시켰다.


○九年, 夏四月, 遣使如<唐>賀正, 獻金·銀·牛黃·魚牙紬·朝霞(+紬)??等方物. 六月, 遣使如<唐>謝恩, <代宗>引見於<延英殿{迎英殿}>??.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여름 4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금·은·우황·어아주·조하주 등의 토산물을 바쳤다.

6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사은을 표하니, 대종이 사신을 연영전에서 접견하였다.


○十年, 夏四月, 遣使如<唐>朝貢. 秋九月, 拜伊찬<良相>爲上大等. 冬十月, 遣使如<唐>賀正, 見于<延英殿>授員外衛尉卿遣之.


10년 여름 4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이찬 양상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황제는 연영전에서 이들을 접견하고, 그들에게 원외위위경 벼슬을 주어 귀국시켰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如<唐>朝貢. 三月, 以伊찬<金順>爲侍中. 夏六月, 遣使朝<唐>. 伊찬<金隱居>叛, 伏誅. 秋八月, 伊찬<廉相>與侍中<正門>謀叛, 伏誅.


11년 봄 정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 이찬 김 순으로 시중을 삼았다.

여름 6월, 사신을 파견하여 당 나라에 입조하였다.

이찬 김 은거가 반역하다가 처형당하였다.

가을 8월, 이찬 염 상이 시중 정문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下敎: 百官之講{號}??, 盡合復舊. 幸<感恩寺>望海. 二月, 幸國學聽號{講}??. 三月, 加倉部史八人. 秋七月, 遣使朝<唐>, 獻方物. 冬十月, 遣使入<唐>朝貢.


李丙燾.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 정월, 왕이 교서를 내려 백관들의 관직 이름을 모두 이전대로 복구하였다.

왕이 감은사에 행차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2월, 왕이 국학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3월, 창부에 사 8명을 더 두었다.

가을 7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10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春三月, 京都地震. 夏四月, 又震. 上大等<良相>上疏, 極論時政. 冬十月, 伊찬<周元>爲侍中.


13년 봄 3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지진이 다시 발생하였다.

상대등 양상이 상소하여 시국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겨울 10월, 이찬 주원이 시중이 되었다.


○十五年, 春三月, 京都地震, 壞民屋, 死者百餘人. 太白入月, 設百座法會.


15년 봄 3월, 서울에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백여 명이 되었다. 금성이 달에 들어 갔다. 백좌 법회를 열었다.


○十六年, 春正月, 黃霧. 二月, 雨土. 王幼少卽位, 及壯, 淫于聲色, 巡遊不度, 綱紀紊亂, 災異屢見, 人心反側, 社稷올얼. 伊찬<志貞>叛, 聚衆, 圍犯宮闕. 夏四月, 上大等<金良相>與伊찬<敬信>, 擧兵誅<志貞>等, 王與后妃爲亂兵所害. <良相>等諡王爲<惠恭王>. 元妃<新寶王后>, 伊찬<維誠>之女, 次妃, 伊찬<金璋>之女, 史失入宮歲月.


16년 봄 정월, 누런 안개가 끼었다.

2월, 흙비가 내렸다.

왕이 어렸을 때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들자 음악과 여색에 빠져, 아무 때나 법도를 잃고 놀러 다니며, 기강이 문란하여 재난과 이변이 자주 발생하였으므로, 인심이 이반되고 사직이 위태로웠다. 이찬 지정이 반란을 일으키고 반도를 모아 대궐을 포위하여 침범하였다.

여름 4월, 상대등 김 양상이 이찬 경신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지정 등을 죽였다. 왕과 왕비는 이 난리 중에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양상 등이 왕의 시호를 혜공왕이라 하였다. 대비 신보왕후는 이찬 유성의 딸이고, 다음 왕비는 이찬 김 장의 딸이었는데, 역사서에는 두 왕비가 궁에 들어온 시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宣德王>立. 姓<金>氏, 諱<良相>, <奈勿王>十世孫也. 父, 海찬<孝芳>; 母, <金>氏<四炤>夫人, <聖德王>之女也; 妃, <具足>夫人, 角干<良品>之女也.[一云<義恭>阿찬之女.] 大赦. 追封父爲<開聖大王>, 尊母<金>氏爲<貞懿太后>, 妻爲王妃. 拜伊찬<敬信>, 爲上大等, 阿찬<義恭>爲侍中. 改御龍省奉御爲卿, 又改卿爲監.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이고, 내물왕의 10대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해찬 효방이다. 어머니는 김씨 사조부인이며 성덕왕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이며 각간 양품의 딸이다.[아찬 의공의 딸이라고도 한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아버지를 개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로 추존하였으며, 아내를 왕비로 삼았다. 이찬 경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의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어룡성의 봉어를 경으로 고쳤다가 경을 다시 감으로 고쳤다.


○三{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秋七月, 發使安撫<浿江>南州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가을 7월, 왕이 사신을 보내 패강 남쪽의 주와 군을 위무하였다.


○三年, 春閏正月, 遣使入<唐>朝貢. 二月, 王巡幸<漢山州>, 移民戶於<浿江鎭>. 秋七月, 大閱於<始林>之原.


3년 봄 윤정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왕이 한산주를 순행하고 주민들을 패강진으로 옮겼다.

가을 7월, 시림 벌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四年, 春正月, 以阿찬<體信>爲<大谷鎭>軍主. 二月, 京都雪三尺.


4년 봄 정월, 아찬 체신을 대곡진 군주로 임명하였다.

2월,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五年, 夏四月, 王欲遜位. 群臣三上表諫, 乃止.


5년 여름 4월, 왕이 왕위를 물러나려 했다. 여러 신하들이 세 번이나 표를 올려 간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六年, 春正月, <唐><德宗>遣戶部郞中<蓋塤>, 持節冊命王, 爲檢校大尉<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 是月, 王寢疾彌留. 乃下詔曰: "寡人本惟菲薄, 無心大寶, 難逃推戴, 作其卽位. 居位以來, 年不順成, 民用窮困, 此皆德不符民望, 政未合天心. 常欲禪讓, 退居于外, 群官百벽, 每以誠止, 未果如意, 因循至今. 忽구疾疹, 不寤不興. 死生有命, 顧復何恨? 死後, 依佛制燒火, 散骨東海!" 至十三日薨, 諡曰<宣德>.

三國史記卷第九.


6년 봄 정월, 당 덕종이 호부낭중 개 훈을 지절사로 보내 왕을 '검교대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이 달에 왕이 병으로 누웠고, 병이 점점 위독해지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과인은 본래 재능이 없고 덕이 적어 왕위에 오를 마음이 없었으나, 추대를 피할 수 없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이래 해마다 하는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백성의 일상 생활이 곤궁하여졌으니, 이는 모두 과인의 덕성이 백성들의 소망에 부합되니 아니하고, 정치가 하늘의 뜻에 합치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과인은 항상 왕위를 물러나 궁궐 밖에 살고자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이 그 때마다 지성으로 말렸기 때문에, 매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었다. 이제 갑자기 병이 나서 다시 회복이 어렵게 되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렸으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과인이 죽은 후에는 불교의 법식 대로 화장할 것이며, 유골을 동해에 뿌리도록 하라."

13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9 끝




三國史記卷第十.



삼국사기 권 제 10


新羅本紀第十.

<元聖王>·<昭聖王>·<哀莊王>·<憲德王>·<興德王>·<僖康王>·<閔哀王{敏哀王}>??·<神武王>.


趙炳舜. 『新羅敏哀大王石塔記銘』.

신라본기 제 10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元聖王>立. 諱<敬信>, <奈勿王>十二世孫. 母, <朴>氏<繼烏>夫人; 妃, <金>氏, <神述>角干之女. 初, <惠恭王>末年, 叛臣跋扈, <宣德>時爲上大等, 首唱除君側之惡. <敬信>預之, 平亂有功, 계<宣德>卽位, 邦{卽}??爲上大等. 及<宣德>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周元>宅於京北二十里, 會, 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或曰: "卽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德望素高, 有人君之體." 於是, 衆議翕然, 立之繼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歲. 二月, 追封高祖大阿찬<法宣>爲<玄聖大王>, 曾祖伊찬<義寬>爲<神英大王>, 祖伊찬<魏文>爲<興平大王>, 考一吉찬<孝讓>爲<明德大王>, 母<朴>氏爲<昭文太后>, 立子<仁謙>, 爲王太子. 毁<聖德大王>·<開聖大王>二廟, 以<始祖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及祖<興平大王>·考<明德大王>爲五廟. 增文武百官爵一級. 拜伊찬兵部令<忠廉>爲上大等. 伊찬<悌恭>爲侍中, <悌恭>免, 伊찬<世强>爲侍中. 三月, 出前妃<具足王后>於外宮, 賜租三萬四千石. <浿江鎭>進赤烏. 改摠管爲都督.


李丙燾.

「북한본」.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발호하였는데, 선덕이 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 측근의 악당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 서서 주장하였다. 경신이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바로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선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을 현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증조부 이찬 의관을 신영대왕으로, 조부 이찬 위문을 흥평대왕으로, 아버지 일길찬 효양을 명덕대왕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묘당을 헐고, 시조대왕과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 흥평대왕과 부 명덕대왕을 5묘로 정하였다.

문무 백관에게 작위를 한 급씩 올려주었다. 이찬 병부령 충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제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가, 제공이 퇴직하자, 이찬 세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3월, 전 왕비 구족왕후를 외궁으로 내보내고, 벼 3만 4천 석을 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총관을 고쳐 도독이라 하였다.


○二年, 夏四月, 國東雨雹, 桑麥皆傷. 遣<金元全>入<唐>, 進奉方物. <德宗>下詔書曰: "래<新羅>王<金敬信>. <金元全>至, 省表及所進奉具悉. 卿俗敦信義, 志秉貞純, 夙奉邦家, 克遵聲敎. 撫玆藩服, 皆품儒風, 禮法興行, 封部寧乂, 而竭誠向闕, 述職無虧. 累遣使臣, 聿修貢獻, 雖溟渤遐廣, 道路悠長, 贄幣往來, 率循舊興{典}??, 忠효益著, 嘉歎良深. 朕君臨萬方, 作人父母, 自中及外, 合軌同文, 期致太和, 共제仁壽. 卿宜保安封內, 勤恤蒼生, 永作藩臣, 以寧海裔. 今賜卿羅錦綾綵等三十匹, 衣一副, 銀합一口, 至宜領之; 妃錦綵綾羅等二十匹, 押金線繡羅裙衣一副, 銀椀一; 大宰相一人衣一副, 銀椀一; 次宰相二人各衣一副, 銀椀各一. 卿宜領受分給. 夏中盛熱, 卿比平安好, 宰相已下, 병存問之. 遣書指不多及." 秋七月, 旱. 九月, 王都民饑, 出粟三萬三千二百四十石以賑給之. 冬十月, 又出粟三萬三千石以給之. 大舍<武烏>, 獻『兵法』十五卷·『花鈴圖』二卷, 授以<屈??縣{屈岬縣??/屈押縣??}>令.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2년 여름 4월,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과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김 원전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당 나라 덕종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신라왕 김 경신에게 말하노라. 김 원전이 와서 바친 표문과 진상한 물건을 살펴 보았다. 그대 나라의 풍속은 신의를 중시하고, 지조는 바르며, 일찍부터 중국의 번방으로서 교시를 잘 받들었다. 또한 변방에 속한 무리들을 훌륭하게 진무하였으며, 유교의 풍습을 받들어 예법이 성행하고, 나라가 평안하게 다스려졌으며, 중국에 정성을 다하고, 천자에게 직무를 보고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또한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과 진상을 계속하였고, 비록 바닷길이 멀고 육로로도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폐백의 왕래가 옛법을 따르고, 충성은 더욱 드러나니 더없이 가상하고 감탄할 일이다. 나는 만방에 백성의 부모로 군림하였으니, 안으로부터 중외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맞게하며, 문화를 공유하고, 태평화락을 이루어서, 모두와 함께 안락장수의 경계에 오르고자 한다. 그대는 마땅히 국내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열성으로 구휼하며, 길이 변방의 신하가 되어, 바다 변방의 백성들을 평안케 하라. 이제 그대에게 비단·능직·채단 등 30필과 옷 한 벌·은합 한 개를 주노니, 이들이 도착하면 받을 것이며, 왕비에게 비단·채단·능직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가장 높은 재상 한 사람에게 옷 한벌과 은합 한 개를, 다음 직위의 재상 두 사람에게는 각각 옷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준다. 그대는 이를 받아서 나누어 주라. 여름이 깊어 날씨가 더워지는데, 그대 내내 평안하기 바라며, 재상 이하 모두에게도 안부를 묻는다. 글월로는 나의 뜻을 다 싣지 못하노라."

가을 7월, 가뭄이 들었다.

9월, 서울에 기근이 들어 곡식 3만 3천 2백 40석을 내어 구제하였고, 겨울 10월에도, 곡식 3만 3천 석을 나누어 주었다.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三年, 春二月, 京都地震. 親祀神宮. 大赦. 夏五月, 太白晝見. 秋七月, 蝗害곡. 八月辛巳朔, 日有食之.


3년 봄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年, 春,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博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前祇以弓箭選人, 至是改之. 秋, 國西, 旱蝗, 多盜賊, 王發使安撫之.


4년 봄, 처음으로 독서 삼품과를 설치하여 벼슬을 주었다. 「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서 그 뜻을 능히 알고, 이와 동시에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곡례」·「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등으로 하고,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등으로 하였다. 5경, 3사, 제자백가서에 모두 능통한 자는 절차를 밟지 않고 등용하였다. 예전에는 활 쏘기만으로 인물을 선발하던 것을 이 때에 와서 바꾼 것이다.

가을,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위무하였다.


○五年, 春正月甲辰朔, 日有食之. <漢山州>民饑, 出粟以주之. 秋七月, 隕霜傷곡. 九月,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毛肖>박{駁}??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曾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王從之.

○論曰: "惟學焉然後聞道, 惟聞道然後灼知事之本末. 故學而後仕者, 其於事也, 先本而末自正. 譬如擧一綱, 萬目從而皆正. 不學者反此, 不知事有先後·本末之序, 但區區弊精神於枝末, 或부감{斂}??以爲利, 或苛察以相高, 雖欲利國安民, 而反害之. 是故, 『學記』之言, 終於'務本', 而『書』亦言: '不學牆面, 리事惟煩.' 則執事<毛肖>一言, 可爲萬世之模範者焉."


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

5년 봄 정월 초하루 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임명하였는데, 집사사 모초가 반박하여 "자옥은 학문을 잘하여 등용된 것이 아니므로 지방 장관의 관직을 맡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시중이 "비록 학문을 잘하여 출세한 것은 아니지만, 일찌기 당 나라에 가서 학생이 된 적이 있으니, 역시 등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왕은 시중의 말을 따랐다.

저자의 견해 : 오직 학문을 닦은 연후에 도리를 알게 되고, 도리를 알고난 이후에야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문을 연마한 뒤에 벼슬을 하는 자는, 사물에 대하여 근본적인 것을 먼저 바르게 처리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물의 벼리 하나를 들면, 만 개의 그물코가 바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학문을 연마하지 않은 자는 이와 반대이니, 사물에 선후와 본말의 순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구구하게 정신을 지엽적인 것에만 빼앗기게 되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이익을 삼기도 하고, 백성을 까다롭게 규찰하는 것으로 높은 체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할지라도 도리어 해가 된다. 그러므로 「학기」는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상서」에도 또한 "배우지 않으면 벽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며, 오직 번거롭게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으니, 집사 모초의 한 마디는 만대의 모범이 될 만하다.


○六年, 春正月, 以<宗基>爲侍中. 增築<碧骨堤>, 徵<全州>等七州人, 興役. <熊川州>進赤烏. 三月, 以一吉찬<伯魚>使北國. 大旱. 夏四月, 太白辰星, 聚于東井. 五月, 出粟賑<漢山>·<熊川>二州饑民.


6년 봄 정월, 종기를 시중에 임명하였다.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이 공사를 하였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3월, 일길찬 백어를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큰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금성과 진성이 동정성좌에 모였다.

5월, 한산·웅천 두 주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七年, 春正月, 王太子卒, 諡曰<惠忠>. 伊찬<悌恭>叛, 伏誅. <熊川州><向省>大舍妻, 一産三男. 冬十月, 京都雪三尺, 人有凍死. 侍中<宗基>免, 大阿찬<俊邕>爲侍中. 十一{二}??月, 京都地震. 內省侍郞<金言>爲三重阿찬.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왕태자가 사망하자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이 반역하다가 처형 당했다.

웅천주 대사 향성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겨울 10월,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리고 사람이 얼어 죽었다.

시중 종기가 퇴직하자, 대아찬 준옹이 시중이 되었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내성 시랑 김언이 3중 아찬이 되었다.


○八年, 秋七月, 遣使入<唐>, 獻美女<金井蘭>, 其女國色身香. 八月, 封王子<義英>爲大子{太子}??. 上大等<忠廉>卒, 伊찬<世强>爲上大等. 侍中<俊邕>病免, 伊찬<崇斌>爲侍中. 冬十一月壬子朔,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가을 7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미인 김 정란을 바쳤다. 그녀는 국색으로서 몸에서 향내가 났다.

8월, 왕자 의영을 태자로 봉하였다.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숭빈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九年, 秋八月, 大風折木偃禾. 奈麻<金惱>獻白雉.


9년 가을 8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내마 김뇌가 흰 꿩을 바쳤다.


○十年, 春二月, 地震. 太子<義英>卒, 諡曰<憲平>. 侍中<崇斌>免, 以잡찬<彦昇>爲侍中. 秋七月, 始創<奉恩寺>. <漢山州>進白鳥{白烏}??. 起<望恩樓>於宮西.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태자 의영이 사망하자 시호를 헌평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 언승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망은루를 대궐 서쪽에 세웠다.


○十一年, 春正月, 封<惠忠太子>之子<俊邕>爲太子. 夏四月, 旱, 親錄囚. 至六月乃雨. 秋八月, 隕霜害곡.


11년 봄 정월,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을 태자로 봉하였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자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형량을 낮추어 주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十二年, 春, 京都飢疫, 王發倉름賑恤之. 夏四月, 侍中<彦昇>爲兵部令, 伊찬<智原>爲侍中.


12년 봄,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시중 언승이 병부령이 되고, 이찬 지원이 시중이 되었다.


○十三年, 秋九月, 國東, 蝗害곡, 大水山崩. 侍中<智原>免, 阿찬<金三朝>爲侍中.


13년 가을 9월, 동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치고, 홍수가 발생하여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사직하였다. 아찬 김 삼조가 시중이 되었다.


○十四年, 春三月, 宮南樓橋災. <望德寺>二塔相擊. 夏六月, 旱. <屈自郡><石南烏>大舍妻, 一産三男一女. 冬十二月二十九日, 王薨. 諡曰<元聖>, 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唐書』云: "<貞元>十四年, <敬信>死." 『通鑑』云: "<貞元>十六年, <敬信>死." 以本史孝{考}??之, 『通鑑』, 誤.]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14년 봄 3월, 대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다.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었다. 굴자군 대사 석남오의 아내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당서」에는 '정원 14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정원 16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사기를 기준으로 고찰하면 「통감」이 틀린 것이다.]


○<昭聖[或云<昭成>]王>立. 諱<俊邕>, <元聖王>太子<仁謙>之子也. 母, <金>氏. 妃, <金>氏<桂花>夫人, 大阿찬<叔明>女也. <元聖大王>元年, 封子<仁謙>爲太子, 至七年卒, <元聖>養其子於宮中. 五年, 奉使大<唐>, 受位大阿찬; 六年, 以波珍찬爲宰相; 七年爲侍中; 八年爲兵府令{兵部令}??; 十一年爲太子, 及<元聖>薨, 繼位.


趙炳舜. 『三國史節要』.

소성왕['昭聖'을 '昭成'으로도 쓴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준옹이며,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왕비는 김씨 계화부인이며 대아찬 숙명의 딸이다. 원성대왕 원년에 그의 아들 인겸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7년에 죽었으므로 원성이 태자의 아들을 궁중에서 길렀다. 원성은 5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고, 6년에 파진찬으로 재상이 되었고, 7년에는 시중이 되었고, 8년에는 병부령이 되었고, 11년에는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元年, 春三月, 以<菁州><居老縣>爲學生祿邑. <冷井縣>令<廉哲>進白鹿. 夏五月, 追封考<惠忠太子>爲<惠忠大王>. <牛頭州>都督遣使奏言: "有異獸若牛, 身長且高, 尾長三尺許, 無毛長鼻, 自<峴城川>向<烏食壤>去." 秋七月, 得人蔘九尺, 甚異之, 遣使如<唐>進奉, <德宗>謂非人蔘, 不受. 八月, 追封母<金>氏爲<聖穆太后>. <漢山州>獻白烏.


원년 봄 3월, 청주의 거노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정하였다.

냉정현령 염 철이 흰 사슴을 진상하였다.

여름 5월, 왕의 아버지인 혜충 태자를 혜충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우두주 도독이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했다.

"소와 비슷한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그 짐승의 몸체는 길고 크며, 꼬리 길이가 석 자 쯤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데, 현성천에서 오식양을 향하여 갔습니다."

가을 7월, 길이가 아홉 자인 인삼을 얻었다.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겨서 사신에게 주어 당 나라에 바쳤다. 덕종은 인삼이 아니라하여 받지 않았다.

8월, 어머니 김씨를 성목태후로 추봉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二年, 春正月, 封妃<金>氏爲王后, 以<忠芬>爲侍中. 夏四月, 暴風折木蜚瓦, <瑞蘭殿>簾飛不知處, <臨海>·<仁化>二門壞. 六月, 封王子爲太子. 王薨, 諡曰<昭聖>.


2년 봄 정월, 왕비 김씨를 왕후로 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렸다. 서란전에 쳤던 발이 날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으며,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

6월, 왕자를 태자로 봉하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소성이라 하였다.


○<哀莊王>立. 諱<淸明>, <昭聖王>太子也. 母, <金>氏<桂花>夫人. 卽位時, 年十三歲, 阿찬兵部令<彦昇>攝政. 初, <元聖>之薨也, <唐><德宗>遣司封郞中兼御史中丞<韋丹>, 持節吊慰, 且冊命王<俊邕>, 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 <丹>至<운州>, 聞王薨, 乃還. 秋七月, 王更名<重熙>. 八月, 授前入<唐>宿衛學生<梁悅><豆힐>小守. 初, <德宗>幸<奉天>, <悅>從難有功, 帝授右贊善大夫還之, 故王擢用之.


애장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청명이며, 소성왕의 태자이었다. 어머니는 김씨 계화부인이다.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하였다.

앞서 원성이 죽었을 때, 당 나라 덕종이 사봉낭중겸어사중승 위 단을 지절사로 보내 조문하게 하고, 또한 왕 준옹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신라왕으로 책봉하려 하였는데, 위 단이 운주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왕이 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 갔다.

가을 7월, 왕이 이름을 중희로 고쳤다.

8월, 당 나라에 가서 숙위했던 학생 양열에게 두힐소수 벼슬을 주었다. 예전에 당 나라 덕종이 봉천으로 피난갔을 때, 양열이 난리 중에 공을 세웠다 하여, 황제가 우찬선대부 벼슬을 주어 귀국시켰기 때문에 왕이 그를 발탁한 것이다.


○二年, 春二月, 謁始祖廟. 別立<太宗大王>·<文武大王>二廟. 以始祖大王及王高祖<明德大王>·曾祖<元聖大王>·皇祖<惠忠大王>·皇考<昭聖大王>爲五廟. 以兵部令<彦昇>, 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大赦. 夏五月壬戌朔, 日當食, 不食. 秋九月, 焚惑入月, 星隕如雨. <武珍州>進赤烏, <牛頭州>進白雉. 冬十月, 大寒, 松竹皆死. <耽羅國>遣使朝貢.


2년 봄 2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두 묘는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 및 왕의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대왕, 조부 혜충대왕, 아버지 소성대왕을 5묘로 정했다.

병부령 언승을 어룡성 사신으로 임명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 초하루 임술일에 꼭 있어야 할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을 9월, 화성이 달에 들어가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고, 우두주에서는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 날씨가 아주 추워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탐라국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年, 春正月, 王親祀神宮. 夏四月, 以阿찬<金宙碧{金富碧}>??女, 入後宮. 秋七月, 地震. 八月, 創<加耶山><海印寺>. <삽良州>進赤烏. 冬十二月, 授<均貞>大阿찬, 爲假王子, 欲以質<倭>國, <均貞>辭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 아찬 김 주벽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가을 7월, 지진이 있었다.

8월,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의 위를 주고, 거짓 왕자로 꾸며 왜국에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균정이 이를 사양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幸南郊觀麥. 秋七月, 與<日本國>交聘結好. 冬十月, 地震.


4년 여름 4월, 왕이 남쪽 교외로 행차하여 보리 농사를 시찰하였다.

가을 7월,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以伊찬<秀昇>爲侍中. 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秋七月, 大閱於<閼川>之上. <삽良州>進白鵲. 重修<臨海殿>, 新作東宮<萬壽房>. <牛頭州><蘭山縣>伏石起立. <熊川州><蘇大縣><釜浦>水變血. 九月, <望德寺>二塔戰.


5년 봄 정월, 이찬 수승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냥을 바쳤다.

가을 7월, 알천 강가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삽량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임해전을 중수하고,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지었다.

우두주 난산현에서 누워 있던 돌이 일어났다. 웅천주 소대현 부포의 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9월, 망해사의 두 탑이 부딪쳤다.


○六年, 春正月, 封母<金>氏, 爲大王后; 妃<朴>氏, 爲王后. 是年, <唐><德宗>崩, <順宗>遣兵部郞中兼御史大夫<元季方>, 告哀, 且冊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계林州>諸軍事<계林州>刺史兼持節充寧海軍使上柱國<新羅>王. 其母<叔>氏爲大妃, [王母父<叔明>, <奈勿王>十三世孫, 則母姓<金>氏, 以父名爲<叔>氏, 誤也.] 妻<朴>氏爲妃. 秋八月, 頒示公式二十餘條. 冬十一月, 地震.


6년 봄 정월, 왕의 어머니 김씨를 태왕후로 봉하고, 왕비 박씨를 왕후로 봉하였다. 이 해에 당 나라 덕종이 사망하자, 새로운 황제 순종이 병부낭중겸어사대부 원 계방을 보내 부고를 전하고, 또한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 어머니 숙씨를 대비로 책봉하고[왕모의 부친인 숙명은 내물왕의 13대손이므로, 왕모의 성은 김씨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숙씨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아내 박씨를 왕비로 하였다.

가을 8월,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였다.

겨울 11월, 지진이 있었다.


○七年, 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 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唐><憲宗>, 放宿衛王子<金獻忠>歸國, 仍加試秘書監. 秋八月, 遣使入<唐>朝貢.


7년 봄 3월, 일본국 사신이 오자, 왕이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새로 절을 짓는 것을 금하고, 수리하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또한 불교행사에 고급 비단을 사용하지 못하며, 금은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담당자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당 나라 헌종이, 숙위하던 왕자 김 헌충을 귀국하게 하고, 그에게 시비서감의 직을 더하여 주었다.

가을 8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春正月, 伊찬<金憲昌>[一作貞.]爲侍中. 二月, 王坐<崇禮殿>觀樂. 秋八月, 大雪.


8년 봄 정월, 이찬 김 헌창['昌'을 '貞'이라고도 한다.]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이 숭례전에 앉아 음악을 감상하였다.

가을 8월, 큰 눈이 내렸다.


○九年, 春二月, <日本國>使至, 王厚禮待之. 遣<金力奇>入<唐>朝貢. <力奇>上言: "<貞元>十六年, 詔冊臣故主<金俊邕>爲<新羅>王, 母<申>氏爲大妃, 妻<叔>氏爲王妃. 冊使<韋丹>至中路, 聞王薨却廻, 其冊在中書省, 今臣還國, 伏請授臣以歸." 래: "<金俊邕>等冊, 宜令鴻려寺, 於中書省受領, 至寺宣授與<金力奇>, 令奉歸國." 仍賜王叔<彦昇>及其弟<仲恭{忠恭}>??等門戟, 令本國准例給之.[<申>氏, <金神述>之女, 以神字同韻, 申爲氏, 誤也.] 發使十二道, 分定諸郡邑疆境. 秋七月辛巳朔, 日有食之.


李丙燾.

9년 봄 2월, 일본국 사신이 오자 왕이 후대하였다.

김 역기를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역기가 황제에게 "정원 16년에 조서로 신라의 전 임금 김 준옹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왕모 신씨를 대비로 책봉하고, 왕의 아내 숙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책봉사신 위 단이 도중에서 왕이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현재 그 책문이 중서성에 있사오니, 청컨대 지금 제가 귀국하는 길에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황제는, "김 준옹 등의 책문은 응당 홍려시가 중서성에서 수령해와서 김 역기에게 주어 그가 가지고 귀국하도록 하라"는 칙명을 내리고, 이어 왕의 숙부 언승과 그의 아우 중공 등에게 문극을 하사하고, 이를 신라가 그들의 기준과 예규에 따라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신(申)씨는 김 신술(金神述)의 딸인데, 신(神)과 동운이라 하여 신(申)씨라 한 것은 잘못이다.]

왕이 12도에 특사를 보내 모든 군과 읍의 경계를 획정하였다.

가을 7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年, 春正月, 月犯畢. 夏六月, <西兄山城>鹽庫鳴, 聲如牛. <碧寺>蝦마食蛇. 秋七月, 遣大阿찬<金陸珍>, 入<唐>謝恩, 兼進奉方物. 大旱. 王叔父<彦昇>與弟伊찬<悌邕>, 將兵入內, 作亂弑王. 王弟<체明>侍衛王幷害之. 追諡王爲<哀莊>.


10년 봄 정월, 달이 필성 성좌를 범하였다.

여름 6월, 서형산성 소금 창고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벽사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대아찬 김 육진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동시에 토산물을 바쳤다. 날씨가 크게 가물었다.

왕의 숙부 언승이 그의 아우 이찬 제옹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였다. 왕의 아우 체명이 왕을 시위하고 있다가 함께 살해당했다. 왕의 시호를 애장으로 추증하였다.


○<憲德王>立. 諱<彦昇>, <昭聖王>同母弟也. <元聖王>六年, 奉使大<唐>, 受位大阿찬; 七年, 誅逆臣, 爲잡찬; 十年爲侍中; 十一年, 以伊찬爲宰相; 十二年爲兵部令; <哀莊王>元年爲角干; 二年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至是, 卽位. 妃<貴勝>夫人, <禮英>角干女也. 以伊찬<金崇斌>爲上大等. 秋八月, 大赦. 遣伊찬<金昌南>等, 入<唐>告哀. <憲宗>遣職方員外郞攝御史中丞<崔廷>, 以其質子<金士信>副之, 持節吊祭, 冊立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持節大都督<계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上柱國<新羅>王. 冊妻<貞>氏爲妃. 賜大宰相<金崇斌>等三人門戟.[按: 王妃, <禮英>角干女也, 今云<貞>氏, 未詳.]


헌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왕은 이보다 앞서 원성왕 6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갔다가 대아찬의 작위를 받았고, 7년에 반역하는 신하를 처형하여 잡찬이 되었고, 10년에 시중이 되었고, 11년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12년에 병부령이 되었고, 애장왕 원년에 각간이 되었고, 2년에 어룡성 사신이 되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대등이 되었다가, 이 때에 와서 즉위한 것이다. 왕비는 귀승부인이니 각간 예영의 딸이다.

이찬 김 숭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 창남 등을 당에 보내 이전 왕의 죽음을 알렸다. 당 헌종은 직방원외랑섭어사중승 최 정을 정사로, 인질로 가있던 김 사신을 부사로 파견하면서, 황제의 신임표를 지니고 가서 조의를 표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새로운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의 아내 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며, 대재상 김 숭빈 등 3명에게 문극을 주었다.[살펴보면 왕비는 각간 예영의 딸인데, 여기에서는 정씨라고 했으니 확실하지 않다.]


○二年, 春正月, 以波珍찬<亮宗>爲侍中. <河西州>進赤鳥{赤烏}??. 二月, 王親祀神宮. 發使修葺國內제防. 秋七月, 流星入紫微. <西原京>進白雉. 冬十月, 遣王子<金憲章>入<唐>, 獻金銀佛像及佛經等, 上言: "爲<順宗>祈福." 流星入王良.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람을 보내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유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갔다.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 왕자 김 헌장을 당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순종을 위하여 명복을 빈다"고 하였다. 유성이 왕량 성좌에 들어 갔다.


○三年, 春正月, 侍中<亮宗>以病免, 伊찬<元興>爲侍中. 二月, 以伊찬<雄元>爲<完山州>都督. 夏四月, 始御<平議殿>聽政.


3년 봄 정월, 시중 양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원흥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이찬 웅원을 완산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처음으로 평의전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四年春, 以<均貞>爲侍中, 以伊찬<忠永>年七十, 賜궤杖. 秋九月, 遣級찬<崇正>使北國.


4년 봄, 균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이찬 충영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가을 9월, 급찬 숭정을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五年, 春正月, 以伊찬<憲昌>爲<武珍州>都督. 二月, 謁始祖廟. <玄德門>火.


5년 봄 정월, 이찬 헌창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현덕문에 불이 났다.


○六年, 春三月, 宴群臣於<崇禮殿>, 樂極, 王鼓琴, 伊찬<忠榮>起舞. 夏五月, 國西大水, 發使撫問經水州郡人民, 復一年租調. 秋八月, 京都風霧如夜. <武珍州>都督<憲昌>, 入爲侍中. 冬十月, <黔牟>大舍妻, 一産三男.


6년 봄 3월,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왕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이찬 충영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여름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왕이 사자를 보내 수재를 당한 주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 간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였다.

가을 8월, 서울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낮이 밤과 같았다.

무진주 도독 헌창을 중앙으로 불러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대사 검모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七年, 春正月, 遣使朝<唐>, <憲宗>引見, 宴賜有差. 夏五月, 下雪. 秋八月己亥朔, 日有食之. 西邊州郡大飢, 盜賊蜂起, 出軍討平之. 大星出翼軫間, 指庚, 芒長六許尺, 廣二許寸.


7년 봄 정월, 당에 사신을 보냈다. 헌종이 그를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여름 5월, 눈이 내렸다.

가을 8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고,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큰 별이 익성 성좌와 진성 성좌 사이에 나타나서 서쪽을 향하였다. 그 빛이 길이는 6척 정도였고, 폭은 두 치 가량이었다.


○八年, 春正月, 侍中<憲昌>出爲<菁州>都督, <璋如>爲侍中. 年荒民飢, 抵<浙東>求食者一百七十人. <漢山州><唐恩縣{唐恩郡}>??石長十尺, 廣八尺, 高三尺五寸, 自移一百餘步. 夏六月, <望德寺>二塔戰.


李丙燾.

8년 봄 정월, 시중 헌창이 외직으로 나가 청주 도독이 되었고, 장여가 시중이 되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한산주 당은현에서 길이 10척, 넓이 8척, 높이 3척 5촌이 되는 큰 바위가 저절로 1백여 보 이동하였다.

여름 6월,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九年, 春正月, 以伊찬<金忠恭>爲侍中. 夏五月, 不雨, 遍祈山川, 至秋七月, 乃雨. 冬十月, 人多飢死, 敎州郡發倉곡存恤. 遣王子<金張廉>, 入<唐>朝貢.


9년 봄 정월, 이찬 김 충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다. 가을 7월이 되자 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왕은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왕자 김 장렴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年, 夏六月癸丑朔, 日有食之.


10년 여름 6월 초하루 계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春正月, 以伊찬<眞元>年七十, 賜궤杖. 以伊찬<憲貞>病不能行, 年未七十, 賜金飾紫檀杖. 二月, 上大等<金崇斌>卒, 伊찬<金秀宗>爲上大等. 三月, 草賊遍起, 命諸州郡都督大守{太守}??, 捕捉之. 秋七月, <唐><운州>節度使<李師道>叛. <憲宗>將欲討平, 詔遣<楊州>節度使<趙恭>, 徵發我兵馬, 王奉래旨, 命順天軍將軍<金雄元>, 率甲兵三萬以助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정월,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찬 헌정이 병이 나서 걷지 못하므로, 나이 70세가 안되었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상대등 김 숭빈이 사망하자, 이찬 김 수종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초적들이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 운주 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헌종이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 조 공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왕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 김 웅원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十二年, 春夏旱, 冬飢. 十一月, 遣使入<唐>朝貢, <穆宗>召見<麟德殿>, 宴賜有差.


12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목종이 인덕전에서 사신을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 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十三年, 春, 民饑, 賣子孫自活. 夏四月, 侍中<金忠恭>卒, 伊찬<永恭>爲侍中, <菁州>都督<憲昌>, 改爲<熊川州>都督. 秋七月, <浿江><南川>二石戰. 冬十二月二十九日, 大雷.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가 있었다.

여름 4월, 시중 김 충공이 사망하자 이찬 영공이 시중이 되었다. 청주 도독 헌창이 웅천주 도독이 되었다.

가을 7월, 패강 남천에 있는 두 돌이 서로 맞붙었다.

겨울 12월 29일, 큰 우레가 있었다.


○十四年, 春正月, 以母弟<秀宗>爲副君, 入<月池宮>.[<秀宗>或云<秀升>.] 二月, 雪五尺. 樹木枯.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牛頭>·<삽良>·<浿江>·<北原>等, 先知<憲昌>逆謀, 擧兵自守. 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찬<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卽授<崔雄>位級찬, <速含郡>大守{太守}??, <令忠>位級찬, 遂差員將八人, 守王都八方, 然後出師. 一吉찬<張雄>先發, 잡찬<衛恭>·波珍찬<悌陵>繼之, 伊찬<均貞>·잡찬<雄元>·大阿찬<祐徵>等, 掌三軍조征. 角干<忠恭>·잡찬<允膺>, 守<蚊火>關門. <明基>·<安樂>二郞, 各請從軍, <明基>與徒衆赴<黃山>, <安樂>赴<施彌知鎭>. 於是, <憲昌>遣其將, 據要路以待.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衛恭>·<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黃山}>??, 滅之.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憲昌>僅以身免, 入城固守. 諸軍圍攻浹旬, 城將陷, <憲昌>知不免, 自死. 從者斷首與身, 各藏. 及城陷, 得其身於古塚, 誅之, 戮宗族黨與凡二百三十九人, 縱其民. 後, 論功爵賞有差. 阿찬<祿眞>授位大阿찬, 辭不受. 以<삽良州><屈自郡>近賊, 不오於亂, 復七年. 先是, <菁州>太守廳事南, 池中有異鳥, 身長五尺, 色黑, 頭如五歲許兒, 喙長一尺五寸, 目如人, 소如受五升許器, 三日而死, <憲昌>敗望兆也. 聘角干<忠恭>之女<貞嬌>, 爲太子妃. <浿江>山谷間, 顚木生蘖, 一夜高十三尺, 圍四尺七寸. 夏四月十三日, 月色如血. 秋七月十二日, 日有黑暈, 指南北. 冬十二月, 遣<柱弼>入<唐>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14년 봄 정월, 왕의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도록 하였다.[수종을 수승이라고도 한다.]

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다.

3월, 웅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무진·완산·청주·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청주 도독 상영이 추화군으로 도주하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의 여러 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수비하였다. 18일, 완산주 장사 최 웅과 조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울로 도주해와서 변고를 알렸다. 왕은 곧 최 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 태수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 8명을 파견하여 서울의 8방을 지키게 하고, 그 후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 웅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뒤를 잇고,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과 대아찬 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은 문화의 관문을 지켰다. 명기와 안락 두 화랑이 모두 종군을 요청하여, 명기는 여러 무리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갔다. 이 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 웅이 적병을 도동현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 웅의 군사와 연합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격멸하였다. 균정 등은 성산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모든 군사가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결하였다. 그의 종자가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었다. 성이 점령되자 그의 몸을 옛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이고, 그 백성들은 방면하였다. 후에 전공을 논하여 정도에 따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아찬 녹진에게는 대아찬의 작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은 적지와 근접한 곳에 있었으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7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그 키는 다섯 자였으며, 빛깔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의 머리 크기만하고, 부리의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였으며, 눈은 사람의 눈과 흡사하고, 위장은 닷되들이 그릇 정도였는데, 사흘 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각간 충공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맞았다.

패강 산골짜기의 쓰러진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그 싹은 하룻밤에 높이가 열 세 자, 둘레가 넉 자 일곱 치나 자랐다.

여름 4월 13일, 달빛이 핏빛 같았다.

가을 7월 12일, 해에 흑점이 생겨 남북을 가리켰다.

겨울 12월, 주필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五日, <西原京>有蟲, 從天而墮. 九日有白·黑·赤三種蟲, 冒雪能行, 見陽而止. <元順>·<平原>二角干, 七十告老, 賜궤杖. 二月, 合<水城郡>·<唐恩縣{唐恩郡}>??. 夏四月十二日, 流星起天市, 犯帝座, 過天市東北垣·織女·王良至閣道, 分爲三, 聲如擊鼓而滅. 秋七月, 雪.


李丙燾.

15년 봄 정월 5일, 서원경에,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졌다. 9일에는 흰 색·검은 색·붉은 색의 세 가지 벌레가 눈밭을 기어 다니다가 햇볕이 나자 사라졌다.

원순·평원 두 각간이 나이 70세가 되어 은퇴하고자 하였다. 왕은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수성군과 당은현을 합쳤다.

여름 4월 12일, 유성이 천시 성좌에서 나와 제좌를 범하고, 천시 성좌 동북쪽의 원 성좌, 직녀 성좌, 왕량 성좌를 지나 각도성에 이르러 셋으로 나뉘었는데, 북치는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가을 7월, 눈이 내렸다.


○十七年, 春正月, <憲昌>子<梵文>, 與<高達山>賊<壽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 攻<北漢山州{北漢山城}>??. 都督<聰明>率兵, 捕殺之.[<平壤>, 今<楊州>也, <太祖>製<庄義寺>齋文, 有<高麗>舊壤, <平壤>名山之句.] 三月, <武珍州><馬彌知縣>女人産兒, 二頭二身四臂, 産時天大雷. 夏五月, 遣王子<金昕>, 入<唐>朝貢, 遂奏言: "先在大學生, <崔利貞>·<金叔貞>·<朴季業>等, 請放還蕃, 其新赴朝<金允夫>·<金立之>·<朴亮之>等一十二人, 請留宿衛. 仍請配國子監習業, 鴻려寺給資粮." 從之. 秋, <삽良州>獻白烏{白馬}??. <牛頭州><大楊管郡><黃知>奈麻妻, 一産二男二女, 賜租一百石.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적 수신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였다.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우기 위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해왔다.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처형하였다.[평양은 지금의 양주인데, 태조가 지은 장의사 재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 명산'이라는 글귀가 있다.]

3월, 무진주 마미지현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몸이 둘, 팔이 넷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때, 천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름 5월, 왕자 김 흔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이전에 와있는 대학생 최 이정·김 숙정·박 계업 등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고, 새로 입조한 김 윤부·김 입지·박 양지 등 열 두명을 숙위로 머물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공부를 하게 하고, 홍려시에서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여 주소서."

황제가 이를 따랐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 대양관군에 사는 내마 황지의 아내가 아들 둘과 딸 둘을 한 번에 낳았다. 그 녀에게 벼 1백 석을 주었다.


○十八年, 秋七月, 命<牛岑>太守<白永>, 徵<漢山>北諸州郡人一萬, 築<浿江>長城三百里. 冬十月, 王薨. 諡曰<憲德>, 葬于<泉林寺>北.[『古記』云: "在位十八年, <寶曆>二年丙午四月卒." 『新唐書』云: "<長慶><寶曆>間, <羅>王<彦昇>卒." 而『資治通鑑』及『舊唐書』皆云: "<大和>五年卒." 豈其誤耶.]


18년 가을 7월, 우잠 태수 백영으로 하여금 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재위 18년 보력 2년 병오 4월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장경 보력 연간에 신라왕 언승이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과 「구당서」에는 모두 태화 5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興德王>立. 諱<秀宗>, 後改爲<景徽>. <憲德王>同母弟也. 冬十二月, 妃<章和>夫人卒, 追封爲<定穆王后>. 王思不能忘, 창然不樂. 群臣表, 請再納妃. 王曰: "隻鳥有喪匹之悲, 황失良匹, 何忍無情遽再娶乎?" 遂不從, 亦不親近女侍. 左右使令, 唯宦竪而己.[<章和>, 姓<金>氏, <昭聖王>之女也.]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수종이지만, 그 후에 경휘로 바꾸었다. 그는 헌덕왕의 동복 아우이다.

겨울 12월, 왕비 장화부인이 사망하자, 정목왕후로 추봉하였다. 왕은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 들이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말했다.

"짝을 잃은 새에게도 자기의 짝을 잃은 슬픔이 있는데, 좋은 배필을 잃고나서 어찌하여 무정스럽게도 바로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고,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내시 뿐이었다.[장화의 성은 김씨이고, 소성왕의 딸이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唐><文宗>聞王薨, 廢朝, 命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源寂>, 持節吊祭. 仍冊立嗣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계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 母<朴>氏爲大妃; 妻<朴>氏爲妃. 三月, <高句麗>僧<丘德>入<唐>, 齎經至. 王集諸寺僧徒, 出迎之. 夏五月, 降霜. 秋八月, 太白晝見. 京都大旱. 侍中<永恭>退.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 문종은 헌덕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회를 폐지하고 태자좌유덕겸어사중승 원적을 지절사로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이어 새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로,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3월, 고구려의 중 구덕이 당 나라에 갔다가 불경을 가지고 오자, 왕이 여러 절의 중을 소집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8월, 금성이 낮에 나타나고,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이 퇴직하였다.


○三年, 春正月, 大阿찬<金祐徵>爲侍中. 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雪深三尺. 夏四月, <淸海>大使<弓福>, 姓<張>氏.[一名<保고>.] 入<唐><徐州>, 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鎭<淸海>.[<淸海>, 今之<莞島>.] <漢山州><瓢川縣>妖人, 自言有速富之術, 衆人頗惑之. 王聞之, 曰: "執左道以惑衆者, 刑之, 先王之法也. 投비{棄}??其人遠島." 冬十二日{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대아찬 김 우징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 눈이 석자나 내렸다.

여름 4월, 청해대사 궁복은 성이 장씨였다.[일명 보고이다.] 그는 당 나라 서주에 건너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청해는 지금의 완도이다.]를 수비하게 되었다.

한산주 표천현에 사는 요망스러운 자가, 빨리 부자가 되는 술수가 있다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에 미혹되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옳지 않은 방도로 많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 그 자를 먼 섬으로 쫓아 버리라"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문종이 인덕전에서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 주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당 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크게 유행한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


○四年, 春二月, 以<唐恩郡>爲<唐城鎭>, 以沙찬<極正>往守之.


4년 봄 2월, 당은군을 당성진으로 바꾸고, 사찬 극정을 파견하여 이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五年, 夏四月, 王不豫, 祈禱, 仍許度僧一百五十人.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5년 여름 4월,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되자,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중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六年, 春正月, 地震. 侍中<祐徵>免, 伊찬<允芬>爲侍中. 二月, 遣王子<金能儒>幷僧九人朝<唐>. 秋七月, 入<唐>進奉使<能儒>等一行人, 廻次溺海(+死)??.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시중 우징이 퇴직하고, 이찬 윤분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자 김 능유와 중 아홉 명을 당 나라에 보냈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갔던 진봉사 능유 등 일행이 귀국하다가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겨울 11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夏旱, 赤地. 王避正殿, 減常膳, 赦內外獄囚. 秋七月, 乃雨. 八月, 飢荒, 盜賊遍起. 冬十月, 王命使安撫之.


7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땅의 빛깔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특사하였다. 가을 7월에야 비가 내렸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八年, 春, 國內大飢. 夏四月, 王謁始祖廟. 冬十月, 桃李再華. 民多疫死. 十一月, 侍中<允芬>退.


8년 봄, 나라에 대 기근이 들었다.

여름 4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11월, 시중 윤분이 사직하였다.


○九年, 春正月, <祐徵>復爲侍中. 秋九月, 王幸<西兄山>下大閱, 御<武平門>觀射. 冬十月, 巡幸國南州郡, 存問耆老及鰥寡孤獨, 賜곡布有差.


9년 봄 정월, 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9월, 왕이 서형산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면서, 노인과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과 베를 하사하였다.


○十年, 春二月, 拜阿찬<金均貞>爲上大等. 侍中<祐徵>以父<均貞>入相, 表乞解職. 大阿찬<金明>爲侍中.


10년 봄 2월, 아찬 김 균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시중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 명이 시중을 맡았다.


○十一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遣王子<金義琮>, 如<唐>謝恩兼宿衛. 夏六月, 星패于東. 秋七月, 太白犯月. 冬十二月, 王薨. 諡曰<興德>, 朝廷以遺言, 合葬<章和王妃>之陵.


11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자 김 의종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아울러 숙위를 들게 하였다.

여름 6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가을 7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흥덕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하였다.


○<僖康王>立. 諱<悌隆>[一云<悌옹>.], <元聖大王>孫伊찬<憲貞>[一云<草奴>.]之子也. 母, <包道夫人>. 妃, <文穆夫人>, 葛文王<忠恭>之女. 初, <興德王>之薨也, 其堂弟<均貞>·堂弟之子<悌隆>, 皆欲爲君. 於是, 侍中<金明>·阿찬<利弘><裴萱伯>等, 奉<悌隆>. 阿찬<祐徵>與姪<禮徵>及<金陽>, 奉其父<均貞>, 一時, 入內相戰. <金陽>中箭, 與<祐徵>等逃走, <均貞>遇害, 而後<悌隆>乃得卽位.


희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제융[제옹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손자 이찬 헌정[초노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포도부인이다. 왕비는 문목부인이니, 갈문왕 충공의 딸이다.

이전에 흥덕왕이 사망했을 때, 그의 종제 균정과 종제의 아들 제융이 모두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 이 때 시중 김 명과 아찬 이홍과 아찬 배 훤백 등은 제융을 지지하였고, 아찬 우징은 조카 예징 및 김 양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균정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동시에 대궐로 들어가 서로 싸웠다. 김 양은 화살에 맞아 우징 등과 함께 도주하였고, 균정은 죽었다. 이에 따라 후에 제융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二年, 春正月, 大赦獄囚誅{殊}??死已下. 追封考爲<翌成大王>, 母<朴>氏爲<順成太后>. 拜侍中<金明>爲上大等, 阿찬<利弘>爲侍中. 夏四月, <唐><文宗>放還宿衛王子<金義琮>. 阿찬<祐徵>, 以父<均貞>遇害, 出怨言, <金明>·<利弘>等不平之. 五月, <祐徵>懼禍及, 與妻子奔<黃山津>口, 乘舟往依於<淸海鎭>大使<弓福>. 六月, <均貞>妹壻阿찬<禮徵>, 與阿찬<良順>亡投於<祐徵>. <唐><文宗>賜宿衛<金忠信>等錦綵有差.


李丙燾.

「북한본」.

2년 봄 정월, 사형수 이외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아버지를 익성대왕,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로 추봉하였다. 시중 김 명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중으로 삼았다.

여름 4월, 당 문종은 숙위하던 왕자 김 의종을 돌려 보냈다.

아찬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원망에 찬 말을 하고 다니자, 김 명과 이홍 등이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5월, 우징은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그의 처자와 함께 황산진 어구로 도주하여, 배를 타고 가서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의탁하였다.

6월, 균정의 매부 아찬 예징이 아찬 양순과 함께 도주하여 우징에게 투항하였다.

당 나라 문종이 숙위 김 충신 등에게 등급에 따라 비단을 주었다.


○三年, 春正月, 上大等<金明>·侍中<利弘>等, 興兵作亂, 害王左右. 王知不能自全, 乃縊於宮中. 諡曰<僖康>, 葬于<蘇山>.


3년 봄 정월, 상대등 김 명과 시중 이홍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하고, 왕의 측근들을 죽였다. 왕은 자신도 무사할 수 없음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의 시호를 희강이라 하고 소산에 장사지냈다.


○<閔哀王{敏哀王}>??立. 姓<金>氏, 諱<明>, <元聖大王>之曾孫也, 大阿찬<忠恭>之子. 累官爲上大等, 與侍中<利弘>, 逼王殺之, 自立爲王. 追諡考爲<宣康大王>, 母<朴>氏<貴寶>夫人爲<宣懿太后>, 妻<金>氏爲<允容王后>. 拜伊찬<金貴>爲上大等, 阿찬<憲崇>爲侍中. 二月, <金陽>募集兵士, 入<淸海鎭>, 謁<祐徵>. 阿찬<祐徵>在<淸海鎭>, 聞<金明>簒位, 謂鎭大使<弓福>曰: "<金明>弑君自立, <利弘>枉殺君{吾}??父, 不可共戴天也. 願仗將軍之兵, 以報君父之수." <弓福>曰: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遂分兵五千人, 與其友<鄭年>, 曰: "非子, 不能平禍亂." 冬十二月, <金陽>爲平東將軍, 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統軍, 至<武州><鐵治縣{鐵冶縣}>??. 王使大監<金敏周>出軍迎戰. 遣<駱金>·<李順行>, 以馬軍三千突擊, 殺傷殆盡.


趙炳舜. 『新羅敏哀大王石塔記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三國史節要』.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관직을 거쳐 상대등이 되었던 바, 시중 이홍과 함께 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추존하여 선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은 선의태후라 하고, 아내 김씨를 윤용왕후라 하였으며, 이찬 김 귀를 상대등으로, 그리고 아찬 헌숭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월, 김 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났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서 김 명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했다.

"김 명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비를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그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 원컨대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궁복은 "옛사람의 말에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용기 없는 자'라고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대답하고, 마침내 군사 5천을 그의 친구인 정 년에게 주면서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평정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김 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염 장·장 변·정 년·낙 금·장 건영·이 순행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 철야현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 김 민주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켜 싸우게 하였다. 이에 김 양이 낙 금과 이 순행에게 기병 3천을 주어 돌격케 하여, 거의 모두를 섬멸하였다.


○二年, 春閏正月, 晝夜兼行, 十九日, 至于<達伐>之丘. 王聞兵至, 命伊찬<大昕>·大阿찬<允璘>·<억勛>等, 將兵拒之. 又一戰大克, 王軍死者過半. 時, 王在西郊大樹之下, 左右皆散, 獨立不知所爲, 奔入<月遊宅>, 兵士尋而害之. 群臣以禮葬之, 諡曰<閔哀{敏哀}>??.


趙炳舜. 『新羅敏哀大王石塔記銘』.

2년 봄 윤정월, 김 양의 군사가 주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에 도착하였다. 왕은 김 양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의훈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김 양의 군사가 다시 한번 싸워 대승하였다. 왕의 군사 중에는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 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다가,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게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으로 도주하였다. 군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라 하였다.


○<神武王>立. 諱<祐徵>, <元聖大王>孫<均貞>上大等之子, <僖康王>之從弟也. <禮徵>等旣淸宮禁, 備禮迎之, 卽位. 追尊祖伊찬<禮英>[一云<孝眞>.]爲<惠康大王>, 考爲<成德大王>, 母<朴>氏<眞矯>夫人爲<憲穆太后>, 立子<慶膺>爲太子. 封<淸海鎭>大使<弓福>爲感義軍使, 食實封二千戶. <利弘>懼, 棄妻子, 遁山林, 王遣騎士, 追捕殺之. 秋七月, 遣使如<唐>, 遺<淄靑>節度使奴婢. 帝聞之矜遠人, 詔令歸國. 王寢疾, 夢<利弘>射中背, 旣寤, 瘡發背. 至是月二十三日, 薨. 諡白{曰}??<神武>, 葬于<弟兄山>西北.

○論曰: "<歐陽子>之論, 曰: '<魯><桓公>, 弑<隱公>而自立者; <宣公>, 弑<子赤>而自立者; <鄭><려公>, 逐世子<忽>而自立者; <衛>公<孫剽>, 逐其君<간>而自立者. 聖人於『春秋』, 皆不絶其爲君, 各傳其實, 而使後世信之, 則四君之罪, 不可得而掩耳, 則人之爲惡, 庶乎其息矣.' <羅>之<彦昇>, 弑<哀莊>而卽位; <金明>, 弑<僖康>而卽位; <祐徵>, 弑<閔哀{敏哀}>??而卽位. 今皆書其實, 亦『春秋』之志也."

三國史記卷第十.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新羅敏哀大王石塔記銘』.

신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우징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며, 희강왕의 종제이다. 예징 등이 이미 궁중을 숙청하고, 예절을 갖추어 그를 맞이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의 조부 이찬 예영[효진이라고도 한다.]을 추존하여 혜강대왕이라 하고, 아버지를 성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을 헌목태후라 하고, 아들 경응을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 대사 궁복을 감의 군사로 삼는 동시에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이홍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처자를 버리고 산림으로 도주하였으나, 왕이 기병을 보내 추격시켜 잡아 죽였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들이 당 나라로 가는 도중에 치청의 절도사에게 노비를 주었다. 황제가 이를 듣고 먼 지방 사람이라고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귀국시키게 하였다.

왕이 병으로 누웠는데, 꿈에 이홍이 왕의 등에 활을 쏘았다. 왕이 잠을 깨어 보니 등에 종기가 났다. 이 달 23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무라 하고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저자의 견해 : 구양자는 "노 환공은 은공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요, 선공은 자적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이며, 정 여공은 세자 홀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된 자요, 위공 손표는 그의 임금 간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이다. 공자가 「춘추」에 그들이 임금된 것을 하나도 빼지 아니하고 일일이 사실대로 전한 것은, 후인들로 하여금 이를 알고 믿게하기 위함이다. 위의 네 왕의 죄는 귀를 가려도 들릴 수 밖에 없는 사실이므로, 이제 사람들의 악행이 거의 없어질만도 하다"라고 주장하였다. 신라의 언승은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고, 김 명은 희강왕을 죽이고 즉위하였고, 우징은 민애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지금 그 사실을 모두 기록하는 것도 또한 「춘추」의 의도와 동일하다.

삼국사기 권 제 10 끝




三國史記卷第十一.



삼국사기 권 제 11


新羅本紀第十一.

<文聖王>·<憲安王>·<景文王>·<憲康王>·<定康王>·<眞聖王>.


신라본기 제 11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


○<文聖王>立. 諱<慶膺>, <神武王>太子,??母<貞繼>夫人.[一云<定宗太后>.] 八月, 大赦, 敎曰: "<淸海鎭>大使<弓福>, 嘗以兵助神考, 滅先朝之巨賊, 其功烈可忘耶?" 乃拜爲<鎭海>將軍, 兼賜章服.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응이다. 그는 신무왕의 태자이며, 그의 어머니는 정계부인이다.[정종 태후라고도 한다.]

8월, 왕이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아버지 신무왕을 도와 선왕의 대적을 격멸하였으니, 그의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라는 교서를 내리며, 곧 궁복을 진해 장군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장복을 하사하였다.


○二年, 春正月, 以<禮徵>爲上大等, <義琮>爲侍中, <良順>爲伊찬. 自夏四月至六月, 不雨. <唐><文宗>래<鴻려寺>, 放還質子及年滿合歸國學生, 共一百五人. 冬, 饑.


2년 봄 정월, 예징을 상대등, 의종을 시중, 양순을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 문종이 홍려시에 조서를 내려, 인질 및 기한이 되어 귀국하게 된 학생 총 105명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三年, 春, 京都疾疫. 一吉찬<弘弼>謀叛, 事發逃入海島, 捕之不獲. 秋七月, <唐><武宗>래: 歸國<新羅>官, 前入<新羅>, 宣慰副使(+前)??, 充<연州>都督府司馬賜緋魚袋<金雲卿>, 可<淄州>長史, 仍爲使, 冊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太尉}??使持節大都督<계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諸}??軍使上柱國<新羅>王, 妻<朴>氏爲王妃.


李丙燾. 「冊府元龜」, 「舊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3년 봄,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일길찬 홍필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그는 일이 발각되자 섬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그를 체포하지 못했다.

가을 7월, 당 무종이 신라에 귀국할 관리를 선발하는데, 이전에 신라에 갔던 선위부사충연주도독부사마사비어대 김 운경으로 결정하였다. 무종은 그에게 치주 장사의 직위를 주어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신라의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녕해제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칙명을 전하도록 하였다.


○四年, 春三月, 納倂찬{伊찬}??<魏昕>之女爲妃.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봄 3월, 이찬 위흔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五年, 春正月, 侍中<義琮>病免, 伊찬<良順>爲侍中. 秋七月, 五虎入神宮園.


5년 봄 정월, 시중 의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양순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7월, 호랑이 다섯 마리가 신궁의 정원에 들어 왔다.


○六年, 春二月甲寅朔, 日有食之. 大白{太白}??犯鎭星. 三月, 京都雨雹. 侍中<良順>退, 大阿찬<金茹>爲侍中. 秋八月, 置<穴口鎭>, 以阿찬<啓弘>爲鎭頭.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봄 2월 초하루 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금성이 토성을 범하였다.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시중 양순이 퇴직하자, 대아찬 김 여가 시중이 되었다.

가을 8월, 혈구진을 설치하고, 아찬 계홍을 진두로 임명하였다.


○七年, 春三月, 欲娶<淸海鎭>大使<弓福>女爲次妃. 朝臣諫曰: "夫婦之道, 人之大倫也. 故<夏>以<塗山>興, <殷>以<신>氏昌, <周>以<褒사>滅, <晉>以<驪姬>亂. 則國之存亡, 於是乎在, 其可不愼乎? 今, <弓福>, 海島人也, 其女豈可以配王室乎?" 王從之. 冬十一月, 雷. 無雪. 十二月朔, 三日병出.


7년 봄 3월,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고자 했다. 조정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부부간의 도는 사람이 지켜야할 큰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하 나라는 도산을 얻어 흥성하였고, 은 나라는 신씨를 얻어 번창하였으며, 주 나라는 포사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진 나라는 여희로 인하여 혼란하였습니다. 나라의 존망은 여기에 달려있는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 사람인데 그의 딸을 어떻게 왕실의 배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따랐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2월 초하룻날, 해가 세 개 나란히 나타났다.


○八年, 春, <淸海><弓福>怨王不納女, 據鎭叛. 朝廷將討之, 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 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 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 投<淸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8년 봄, 청해진의 궁복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지 않는다고 하여 왕을 원망하며, 청해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이들를 토벌하자니 예기하지 못한 후환이 발생할 것이 염려되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처리할 바를 몰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무주 사람 염장이 용감하고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와서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군사 한 명도 필요없이 빈 주먹만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궁복은 평소 힘센 사람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가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사유를 설명하니, 그들은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九年, 春二月, 重修<平議>·<臨海>二殿. 夏五{四}??月, 伊찬<良順>·波珍찬<興宗>等叛, 伏誅. 秋八月, 封王子爲王太子. 侍中<金茹>卒, 伊찬<魏昕>爲侍中.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봄 2월,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당하였다.

가을 8월, 세자를 왕태자로 봉하였다. 시중 김 여가 사망하자, 이찬 위흔이 시중이 되었다.


○十年, 春夏旱. 侍中<魏昕>退, 波珍찬<金啓明>爲侍中. 冬十月, 天有聲如雷.


10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시중 위흔이 퇴직하자, 파진찬 김 계명이 시중이 되었다.

겨울 10월,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十一年, 春正月, 上大等<禮徵>卒, 伊찬<義正>爲上大等. 秋九月, 伊찬<金式{金貳}>??·<大昕>等叛, 伏誅, 大阿찬<昕린>緣坐罪.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정월, 상대등 예징이 사망하자, 이찬 의정이 상대등이 되었다.

가을 9월, 이찬 김식·대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당하고, 대아찬 흔린이 이에 연루되었으므로 역시 처벌되었다.


○十二年, 春正月, 土星入月, 京都雨土, 大風拔木. 赦獄囚誅{殊}??死已下.


李丙燾.

「북한본」.

12년 봄 정월,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흙비가 내렸으며,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罷<淸海鎭>, 徙其人於<碧骨郡>. 夏四月, 隕霜. 入<唐>使阿찬<元弘>, 재佛經幷佛牙來, 王出郊迎之.


13년 봄 2월, 청해진을 없애고, 그 지방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당 나라에 갔던 사신인 아찬 원홍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왔다. 왕이 교외로 나가 그를 맞았었다.


○十四年, 春二月, 波珍찬<眞亮>爲<熊川{熊州}>??都督. 調府火. 秋七月, 重修<鳴鶴樓>. 冬十一月, 王太子卒.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2월, 파진찬 진량이 웅주 도독이 되었다.

조부에 불이 났다.

가을 7월, 명학루를 중수하였다.

겨울 11월, 왕태자가 죽었다.


○十五年, 夏六月, 大水. 秋八月, 西南州郡, 蝗.


15년 여름 6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서남 지방의 주와 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十七年, 春正{二}??月, 發使撫問西南百姓, 冬十二月, <珍閣省>災. 土星入月.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사신을 보내 서남 지방의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겨울 12월, 진각성에 불이 났다. 토성이 달에 들어 갔다.


○十九年, 秋九月, 王不豫, 降遺詔曰: "寡人以묘末之資, 處崇高之位, 上恐獲罪於天鑑, 下慮失望於人心, 夙夜兢兢, 若涉淵氷, 賴三事大夫, 百벽卿士, 左右挾維, 不墜重器. 今者, 忽染疾疹, 至于旬日, 황惚之際, 恐先朝露. 惟祖宗之大業, 不可以無主; 軍國之萬機, 不可以暫廢. 顧惟舒弗邯<誼靖>, 先皇之令孫, 寡人之叔父. 孝友明敏寬厚仁慈, 久處古衡{台衡}??, 挾贊王政, 上可以祗奉宗廟, 下可以撫育蒼生. 爰釋重負, 委之賢德, 付託{托}??得人, 夫復何恨! 황生死始終, 物之大期; 壽夭脩短, 命之常分. 逝者可以達理, 存者不必過哀. 伊爾多士, 竭力盡忠, 送往事居, 罔或違禮. 布告國內, 明知朕懷." 越七日, 王薨. 諡曰<文聖>, 葬于<孔雀??{孔雀趾}>??.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들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높은 자리에 처하여, 위로는 하늘에 죄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니, 밤낮으로 깊은 물과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 전전긍긍하면서도, 세 명의 재상과 여러 신하들의 보좌에 의지하여 왕위를 유지해왔다. 이제 나는 갑자기 병에 걸린지 열흘이 지났으니, 정신이 혼몽하여 아침 이슬 보다 빨리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사직에는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에 관한 모든 사무는 잠시라도 폐할 수 없다. 돌아보건대 서불한 의정은 선왕의 손자요, 나의 숙부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며 관후하고 인자하여, 오래도록 재상의 직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기를 만하다. 이에 나는 무거운 책무에서 벗어나, 어질고 덕 있는 이에게 그것을 맡기려 하는 바, 그것을 부탁할 적임자를 얻었으니, 다시 무슨 여한이 있으랴? 살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위대한 기약이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이 부여하는 정해진 몫이다. 세상을 뜨는 자는 하늘의 이치에 이르는 것이니, 세상에 남는 자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너희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며, 가는 사람을 장례지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혹시라도 예절을 어기지 말 것이다. 나라 전체에 포고하여, 나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왕이 7일 만에 별세하였다.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憲安王>立. 諱<誼靖>[一云<祐靖>.], <神武王>之異母弟也. 母<照明>夫人, <宣康王>之女. 以<文聖>顧命卽位, 大赦, 拜伊찬<金安>爲上大等.


헌안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우정이라고도 한다.]이며, 신무왕의 이복 아우이다. 그의 어머니는 조명부인이니 선강왕의 딸이다.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이찬 김 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夏四月, 降霜. 自五月至秋七月, 不雨. <唐城郡>南河岸, 有大魚出, 長四十步, 高六丈{尺}??.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성군 남쪽 강변에서 큰 고기가 나왔는데, 길이가 40보, 넓이가 6척이었다.


○三年, 春, 곡貴人饑, 王遣使賑救. 夏四月, 敎修完제防勸農.


3년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특사를 보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왕이 교서를 내려, 제방을 축수하고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四年, 秋九月, 王會群臣於<臨海殿>, 王族<膺廉>年十五歲, 預坐焉. 王欲觀其志, 忽問曰: "汝游學有日矣, 得無見善人者乎?" 答曰: "臣嘗見三人, 竊以爲有善行也." 王曰: "何如?" 曰: "一高門子弟, 其與人也, 不自先而處於下. 一家富於財, 可以侈衣服, 而常以麻紵自喜. 一有勢榮, 而未嘗以其勢加人, 臣所見如此." 王聞之默然, 與王后耳語曰: "朕閱人多矣, 無如<膺廉>者." 意以女妻之, 顧謂<膺廉>曰: "願郞自愛. 朕有息女, 使之薦枕." 更置酒同飮, 從容言曰: "吾有二女, 兄今年二十歲, 弟十九歲, 惟郞所娶!" <膺廉>辭不獲, 起拜謝, 便歸家告父母. 父母言: "聞王二女容色, 兄不如弟, 若不得已, 宜娶其弟." 然尙疑未決, 乃問<興輪寺>僧. 僧曰: "娶兄則有三益, 弟則反是, 有三損." <膺廉>乃奏: "臣不敢自決, 惟王命是從." 於是, 王長女出降焉.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에 여러 신하들을 모았을 때, 왕족 응렴이 열 다섯 살의 나이로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이 그의 생각을 알고자 하여 갑자기 "네가 상당 기간 사방을 유력하며 견학한 바 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던가?"라고 물었다. 그는 "제가 일찌기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은 착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어떤 행위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한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아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는 것으로 자족하였으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리면서,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 말로 "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라고 말하고, 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 보고 말했다. "그대는 자중자애하라. 내가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 왕은 다시 술을 가져오게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형은 금년에 스무살이요, 동생은 열 아홉살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의 부모는 "듣건대 왕의 두 딸의 얼굴은 형이 동생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응렴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그 중은 "형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세가지 손해를 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응렴이 곧 "제가 감히 마음 대로 결정을 못하겠사오니, 다만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아뢰니, 이에 왕이 맏딸을 시집 보냈다.


○五年, 春正月, 王寢疾彌留, 謂左右曰: "寡人不幸, 無男子有女. 吾邦故事, 雖有<善德>·<眞德>二女主, 然近於牝계之晨, 不可法也. 甥<膺廉>, 年雖幼少, 有老成之德. 卿等, 立而事之, 必不墜祖宗之令緖, 則寡人死, 且不朽矣." 是月二十九日, 薨. 諡曰<憲安>, 葬于<孔雀趾>.


5년 봄 정월,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했다. "과인이 불행하게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 나라에는 예전에 선덕·진덕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한 일로써, 이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인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성숙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달 29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景文王>立. 諱<膺廉>[膺一作疑{凝}??.], <僖康王>&子{之孫}??<啓明>阿찬之子也. 母曰<光和>[一云<光義>.]夫人, 妃<金>氏<寧花>夫人.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경문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응렴['응(膺)'을 '의(疑)'라고도 한다.]이며,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 계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광화['광의'라고도 한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 영화부인이다.


○元年, 三月, 王御<武平門>, 大赦.


원년 3월, 왕이 무평문에 나아가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正月, 以伊찬<金正>爲上大等, 阿찬<魏珍>爲侍中. 二月, 王親祀<神宮>. 秋七月, 遣使如<唐>貢方物. 八月, 入<唐>使阿찬<富良>等一行人, 溺沒.


2년 봄 정월, 이찬 김 정을 상대등,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가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월, 입당사인 아찬 부량 등의 일행이 익사하였다.


○三年, 春二月, 王幸國學, 令博士已下, 講論經義, 賜物有差. 冬十月, 桃李華. 十一月, 無雪. 納<寧花>夫人弟爲次妃. 異曰{日}??, 王問<與輪寺{興輪寺}>??僧曰: "師前所謂三益者何也?" 對曰: "當時, 王及王妃喜其如意, 寵愛浸深, 一也. 因此, 得繼太位{大位}??, 二也. 卒, 得娶嚮所求季女, 三也." 王大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遺事』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2월, 왕이 국학에 가서, 박사 이하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경서의 뜻을 강론하게 하고,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1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영화부인의 아우를 둘째 왕비로 삼았다. 그 후 왕이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대사가 전에 말했던 세 가지 이익이란 무엇인가?" 중이 대답하였다. "형과 결혼하면 그것이 당시에 왕과 왕비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왕과 왕비가 기뻐하여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첫째 이익입니다.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니, 이것이 둘째 이익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처음부터 원하던 둘째 딸을 취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세째 이익입니다." 왕이 크게 웃었다.


○四年, 春二月, 王幸<感恩寺>望海. 夏四月, <日本國>使至.


4년 봄 2월, 왕이 감은사에 가서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 일본국 사신이 왔다.


○五年, 夏四月, <唐><懿宗>降使太子右諭德御史中丞<胡歸厚>, 使副光祿主簿兼監察御史<裴光>等, 弔祭先王, 兼賻贈一千匹, 冊立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太尉}??持節大都督<계林州>諸軍事上柱國<新羅>王. 仍賜王官誥一道·旌節一副·錦綵五百匹·衣二副·金銀器七事. 賜王妃錦綵五十匹·衣一副·銀器二事. 賜王太子錦綵四十匹·衣一副·銀器一事. 賜大宰相錦綵三十匹·衣一副·銀器一事. 賜次宰相錦綵二十匹·衣一副·銀器一事.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여름 4월, 당 의종이 정사 태자우유덕어사중승 호 귀후와 부사 광록주부겸감찰어사 배 광 등을 보내 선왕을 조상하는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비단 1천 필을 부의로 주고,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대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관직을 임명하는 문건 한 통·황제의 신임표 한 벌·비단 5백 필·옷 두 벌·금 은 그릇 일곱 개를 주고, 왕비에게는 비단 50필·옷 한 벌·은 그릇 두 개를 주고, 왕태자에게는 비단 4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고, 대재상에게는 비단 3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고, 다음 재상에게는 비단 2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었다.


○六年, 春正月, 封王考爲<懿恭大王>, 母<朴>氏<光和>夫人爲<光懿王大后{太后}??>, 夫人<金>氏爲<文懿王妃>, 立王子<晸>爲王太子. 十五日, 幸<皇龍寺>看燈, 仍賜燕{연}??百寮. 冬十月, 伊찬<允興>與弟<叔興>·<季興>謀逆, 事發覺, 走<岱山郡>, 王命追捕斬之, 夷一{三}??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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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봄 정월, 왕의 선친을 의공대왕으로 봉하고, 어머니 박씨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로 봉하고, 부인 김 씨를 문의 왕비로 봉하고, 왕자 정을 왕태자로 삼았다.

15일,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보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겨울 10월, 이찬 윤흥이 아우 숙흥·계흥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대산군으로 도주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 그들을 붙잡아 참수하고, 삼족을 처형하였다.


○七年, 春正月, 重修<臨海殿>. 夏五月, 京都疫. 秋八月, 大水, 곡不登. 冬十月, 發使分道撫問. 十二月, 客星犯大白{太白}??.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홍수가 나고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겨울 10월, 사신들을 여러 곳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12월, 객성이 금성을 범하였다.


○八年, 春正月, 伊찬<金銳>·<金鉉>等謀叛, 伏誅. 夏六月, 震<皇龍寺>塔. 秋八月, 重修<朝元殿>.


8년 봄 정월, 이찬 김 예·김 현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가을 8월, 조원전을 중수하였다.


○九年, 秋七月, 遣王子蘇判<金胤>等入<唐>謝恩, 兼進奉馬二匹·부金一百兩·銀二百兩·牛黃十五兩·人蔘一百斤·大花魚牙錦一十匹·小花魚牙錦一十匹·朝霞錦二十匹·四十升白첩布四十匹·三十升紵衫段四十匹·四尺五寸頭髮百五十兩·三尺五寸頭髮三百兩·金釵頭五色기帶幷班胸各一十條·鷹金쇄선子幷紛삽紅도二十副·新樣鷹金쇄선子·紛삽五色도三十副·鷹銀쇄선子·紛삽紅도二十副·新樣鷹銀쇄선子·紛삽五色도三十副·요子金쇄선子·紛삽紅도二十副·新樣요子金쇄선子·紛삽五色도三十副·요子銀쇄선子·紛삽紅도二十副·新樣요子銀쇄선子·紛삽五色도三十副·金花鷹삽鈴子二百顆·金花요子鈴子二百顆·金鏤鷹尾筒五十雙·金鏤요子尾筒五十雙·銀鏤鷹尾筒五十雙·銀鏤요子尾筒五十雙·繫鷹緋힐皮一百雙·繫요子緋힐皮一百雙·瑟瑟鈿金針筒三十具·金花銀針筒三十具·針一千五百. 又遣學生<李同>等三人, 隨進奉使<金胤>, 入<唐>習業, 仍賜買書銀三百兩.


9년 가을 7월, 왕자인 소판 김 윤 등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동시에 말 2 필·부금 1백 냥·은 2백 냥·우황 15냥·인삼 1백 근·대화어아금 10 필·소화어아금 10 필·조하금 20필·마흔새 흰 세모직 40필·설흔새모시 40필·넉자 5치 짜리 머리털 150냥, 석자 다섯치 짜리 머리털 3백 냥·금비녀·오색 댕기·반흉 각 10개·응금쇄선자병분삽홍도 20개·신양응금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응은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응은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요자금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요자금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요자은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요자은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금화응삽령자 2백 과·금화요자령자 2백 과·금루응미통 50 쌍·금루요자미통 50 쌍·은루응미통 50 쌍·은루요자미통 50 쌍·계응비힐피 1백 쌍·계요자비힐피 1백 쌍·슬슬전금침통 30 구·금화은침통 30 구·바늘 1천5백개를 바쳤다. 또한 학생 이 동 등 세 사람으로 하여금 진봉 사신 김 윤을 수행케 하여 당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고, 그들에게 책값으로 은 3백 냥을 주었다.


○十年, 春二月, 遣沙찬<金因>, 入<唐>宿衛. 夏四月, 京都地震. 五月, 王妃卒. 秋七月, 大水. 冬, 無雪. 國人多疫.


10년 봄 2월, 사찬 김 인을 당 나라에 보내 숙위를 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5월, 왕비가 죽었다.

가을 7월, 홍수가 났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


○十一年, 春正月, 王命有司, 改造<皇龍寺>塔. 二月, 重修<月上樓>.


11년 봄 정월, 왕이 관리에게 명령하여, 황룡사 탑을 개축하게 하였다.

2월, 월상루를 중수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夏四月, 京師地震. 秋八月, 國內州郡, 蝗害곡.


1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국내의 주와 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十三年, 春, 民饑且疫, 王發使賑救. 秋九月, <皇龍寺>塔, 成九層高二十二丈.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가을 9월, 황룡사 탑이 낙성되었는데, 9층으로 되어 있고, 높이가 스물 두 장이었다.


○十四年, 春正月, 上大等<金正>卒, 以侍中<魏珍>爲上大等, <藺興>爲侍中. 夏四月, <唐><僖宗>降使宣諭. 五月, 伊찬<近宗>謀逆犯闕, 出禁軍擊破之. <近宗>與其黨夜出城, 追獲之車裂. 秋九月, 重修<月正堂>. <崔致遠>在<唐>登科.


14년 봄 정월, 상대등 김 정이 죽으니, 시중 위진을 상대등, 인흥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와 황제의 말을 선포하였다.

5월, 이찬 근종이 모반하여 대궐을 침범하므로, 대궐 지키는 군사를 출동시켜 격파하였다. 근종이 그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성 밖으로 도주하는 것을 추격 체포하여 수레에 매어 찢어 죽였다.

가을 9월, 월정당을 중수하였다.

최 치원이 당 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京都及國東地震. 星패于東, 二十日乃滅. 夏五月, 龍見王宮井, 須臾雲霧四合飛去. 秋七月八日, 王薨, 諡曰<景文>.


15년 봄 2월, 서울과 동쪽 지방에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없어졌다.

여름 5월, 용이 왕궁의 우물에 나타났는데, 잠시 후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모여 들면서 날아 갔다.

가을 7월 8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문이라 하였다.


○<憲康王>立. 諱<晸>, <景文王>之太子. 母, <文懿王后>; 妃, <懿明>夫人. 王性聰敏, 愛看書, 目所一覽, 皆誦於口. 卽位, 拜伊찬<魏弘>爲上大等, 大阿찬<乂謙>爲侍中, 大赦內外殊死已下.


헌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정이며, 경문왕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문의왕후이며, 왕비는 의명부인이다. 왕은 성품이 명민하였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 왕위에 오르면서 이찬 위홍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예겸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二月, <皇龍寺>齋僧, 設百高座講經, 王親幸聽之. 秋七月, 遣使入<唐>貢方物.


2년 봄 2월, 황룡사에서 모든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왕이 직접 가서 들었다.

가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三年, 春正月, 我<太祖大王>生於<松岳郡>.


3년 봄 정월, 고려 태조대왕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


○四月{年}??, 夏四月, <唐><僖宗>降使, 冊封王爲使持節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太尉}??大都督<계林州>諸軍事<新羅>王. 秋七月, 遣使朝<唐>, 聞<黃巢>賊起, 乃止. 八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朝元殿>.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의 난이 일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중지하였다.

8월, 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五年, 春二月, 幸國學, 命博士已下講論. 三月, 巡幸國東州郡, 有不知所從來四人, 詣駕前歌歌{舞}??. 形容可駭, 衣巾詭異, 時人謂之山海精靈.[古記謂王卽位元年事.] 夏六月, 一吉찬<信弘>叛, 伏誅. 冬十月, 御<遵禮門>觀射. 十一月, 獵<穴城>原.


李丙燾.

今西龍.

5년 봄 2월,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 사람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다.

3월, 왕이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양이 무섭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이라고 하였다.[고기에는 이 사건이 왕위에 오른 첫해에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

여름 6월,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준례문에 행차하여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11월, 왕이 혈성 벌에서 사냥을 하였다.


○六年, 春二月, 大白{太白}??犯月. 侍中<乂謙>退, 伊찬<敏恭>爲侍中. 秋八月, <熊州>進嘉禾. 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 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 風雨順, 歲有年, 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 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 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봄 2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시중 예겸이 사직하자, 이찬 민공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8월,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쳐 왔다.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 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찌기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七年, 春三月, 燕群臣於<臨海殿>, 酒감, 上鼓琴, 左右各進歌詞, 極歡而罷.


7년 봄 3월,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술기운의 오르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八年, 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冬十二月, <枯彌縣>女, 一産三男.


8년 여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야명주 10 개를 바쳤다.

겨울 12월, 고미현 여자가 한번에 삼형제를 낳았다.


○九年, 春二月, 王幸<三郞寺>, 命文臣各賦詩一首.


9년 봄 2월, 왕이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였다.


○十一年, 春二月, 虎入宮庭. 三月, <崔致遠>還. 冬十月壬子, 太白晝見. 遣使入<唐>, 賀破<黃巢>賊.


11년 봄 2월, 호랑이가 대궐에 들어 왔다.

3월, 최 치원이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자일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당에 사신을 보내 황소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十二年, 春, 北鎭奏: "狄國人入鎭, 以片木掛樹而歸." 遂取以獻, 其木書十五字云: "<寶露國>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 夏六月, 王不預, 赦國內獄囚. 又於<皇龍寺>, 設百高座講經. 秋七月五日, 薨. 諡曰<憲康>, 葬<菩提寺>東南.


12년 봄, 북쪽 진에서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판자쪽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상주하면서, 그것을 가져다 바쳤다. 그 판자쪽에는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 다섯 글자가 씌여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병으로 편치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였고, 또한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가을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定康王>立. 諱<晃>, <景文王>之第二子也. 八月, 拜伊찬<俊興>爲侍中. 國西旱且荒.


정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황이며,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8월, 이찬 준흥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어 황폐하였다.


○二年, 春正月, 設百(+高)??座於<皇龍寺>, 親幸聽講. <漢州>伊찬<金요>叛, 發兵誅之. 夏五月, 王疾病. 謂侍中<俊興>曰: "孤之病革矣, 必不復起. 不幸無嗣子, 然妹<曼>天資明銳, 骨法似丈夫, 卿等宜倣<善德>·<眞德>古事, 立之可也." 秋七月五日, 薨. 諡曰<定康>, 葬<菩提寺>東南.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강론을 들었다.

한주 이찬 김 요가 모반하므로, 군사를 보내 그를 처형하였다.

여름 5월, 왕이 병들자 시중 준흥에게 말했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 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을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眞聖王>立. 諱<曼>, <憲康王>之女弟也.[『崔致遠文集』第二卷, 謝追贈表云: "臣<坦>言: 伏奉制旨, 追贈亡父臣<凝>爲太師, 亡兄臣<晸>爲大傅{太傅}??." 又納旌節表云: "臣長兄國王<晸>, 以去<光啓>三年七月五日, 奄御聖代, 臣姪男<嶢>生未周수, 臣仲兄<晃>權統藩垣, 又未經朞月, 遠謝明時." 以此言之, 景文王諱<凝>, 本紀則云<膺廉>, <眞聖王>諱<坦>, 本紀則云<曼>, 又<定康王><晃>以<光啓>三年薨, 本紀謂二年薨, 皆不知孰是.] 大赦, 復諸州郡一年租稅. 設百(+高)??座<皇龍寺>, 親幸聽法. 冬無雪.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진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만이며, 헌강왕의 누이 동생이다.[최 치원 문집 제2권 사추증표에는 "신하 탄은 말합니다. 삼가 하명을 받들어 저의 죽은 아비 응을 태사로 추증하고, 죽은 형인 정을 태부로 추증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납정절표에는 "저의 맏형인 국왕 정이 지난 광계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저의 조카 요는 태어난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저의 둘째 형인 황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경문왕의 이름이 응인데, 본기에는 응렴이라 하였고, 진성왕의 이름이 탄인데, 본기에는 만이라 하였으며, 또한 정강왕 황은 광계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모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설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少梁里>石自行.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 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及<魏弘>卒, 追諡爲<惠成大王>. 此後, 潛引少年美丈夫兩三人淫亂, 仍授其人以要職, 委以國政. 由是, 녕倖肆志, 貨賂公行, 賞罰不公, 紀綱壞弛. 時有無名子, 欺謗時政, 構辭榜於朝路. 王命人搜索, 不能得. 或告王曰: "此必文人不得志者所爲, 殆是<大耶州>隱者<巨仁>耶?" 王命拘<巨仁>京獄, 將刑之. <巨仁>憤怨, 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其夕, 忽雲霧震雷雨雹, 王懼, 出<巨仁>放歸. 三月戊戌朔, 日有食之. 王不豫, 錄囚徒, 赦殊死已下, 許度僧六十人. 王疾乃추. 夏五月, 旱.


2년 봄 2월, 소양리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왕이 원래부터 각간 위 홍과 간통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궁중에 들어 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여 대구 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게 하였는데, 이를 삼대목이라고 불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왕은 젊은 미남자 두 세 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 정사를 맡겼다. 이에 따라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여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 때 누군가가 이름을 감추고 시정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관청 거리에 방을 붙였다. 왕이 그를 수색케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누가 왕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문인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에 숨어 사는 거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체포하여 서울 감옥에 가두고 처벌하려 하였는데,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왔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 옛 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없이 푸를 뿐인가.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왕이 이를 두려워하여 거인을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들어 편치 못하자, 죄수들을 조사하여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고, 중 6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왕의 병이 곧 나았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三年, 國內諸州郡, 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 所在盜賊蜂起. 於是, <元宗>·<哀奴>等據<沙伐州>叛. 王命奈麻<令奇>捕捉. <令奇>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 力戰死之. 王下래斬<令奇>, <祐連>子年十餘歲, 嗣爲村主.


3년,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독촉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 때 원종·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내마 영기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으나, 영기가 반도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자, 촌주 우연이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를 참수하고, 나이가 10여 세인 우연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日暈五重. 十五日, 幸<皇龍寺>, 看燈.


4년 봄 정월,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나타났다.

15일,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구경하였다.


○五年, 冬十月, <北原>賊帥<梁吉>, 遣其佐<弓裔>, 領百餘騎, 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內<酒泉>等十餘郡縣.


5년 겨울 10월, 북원의 도적 두목 양길이 그의 부하 궁예로 하여금 기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 관내 주천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게 하였다.


○六年, <完山>賊<甄萱>據州, 自稱<後百濟>, <武州>東南郡縣降屬.


6년, 완산의 도적 견훤이 주에 웅거하여 후백제라고 자칭하였다. 무주 동남쪽의 군현이 그에게 투항하였다.


○七年, 遣兵部侍郞<金處誨>, 如<唐>納旌節, 沒於海.


7년, 병부 시랑 김 처회를 당 나라에 보내 정절을 바치게 했는데, 그는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八年, 春二月, <崔致遠>進時務一十餘條, 王嘉納之, 拜<致遠>爲阿찬. 冬十月, <弓裔>自<北原>入<何瑟羅>, 衆至六百餘人, 自稱將軍.


8년 봄 2월, 최 치원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을 작성하여 바쳤다. 왕이 이를 기쁘게 받아 들이고, 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에 들어오니,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다. 그는 장군이라고 자칭하였다.


○九年, 秋八月, <弓裔>擊取<猪是{猪足}>??·<성川>二郡, 又破<漢州>管內<夫若>·<鐵圓>等十餘郡縣. 冬十月, 立<憲康王>庶子<嶢>爲太子. 初, <憲康王>觀獵, 行道傍見一女子, 姿質佳麗. 王心愛之, 命後車載, 到유宮野合, 卽有娠而生子. 及長, 體貌魁傑, 名曰<嶢>. <眞聖>聞之, 喚入內, 以手撫其背曰: "孤之兄第{弟}??姉妹, 骨法異於人, 此兒, 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仍命有司, 備禮封崇.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가을 8월, 궁예가 저족·성천의 두 군을 탈취하고, 또한 한주 관내의 부약·철원 등 10여 군현을 격파하였다.

겨울 10월,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삼았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왔다. 왕이 마음 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뒷수레에 태우고, 행재소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바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므로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에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는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十年, 賊起國西南, 赤其袴以自異, 人謂之<赤袴賊>. 屠害州縣, 至京西部<牟梁里>, 劫掠人家而去.


10년, 도적들이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남들과 구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인가를 위협하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十一年, 夏六月, 王謂左右曰: "近年以來, 百姓困窮, 盜賊蜂起, 此, 孤之不德也. 避賢讓位, 吾意決矣." 禪位於太子<嶢>. 於是, 遣使入<唐>表奏曰: "臣某言, 居羲仲之官, 非臣素分; 守<延陵>之節, 是臣良圖. 以臣姪男<嶢>, 是臣亡兄<晸>息. 年將志學, 器可興宗, 不假外求, 爰從內擧, 近已비權藩寄, 用靖國災." 冬十二月乙巳, 王薨於北宮, 諡曰眞聖, 葬于<黃山>.

三國史記卷第十一.


11년 여름 6월, 왕이 측근들에게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 되었노라"라고 말하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선양하였다. 이에 당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했다.

"신하 아무게는 아룁니다. 희중의 관직에 처하는 것이 저의 본분이 아니며, 연릉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좋은 방도입니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의 아들입니다. 그는 나이가 열댓 살이 되었고, 종실을 흥성케할 자질이 있기에, 인재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국가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 11 끝




三國史記卷第十二.



삼국사기 권 제 12


新羅本紀第十二.

<孝恭王>·<神德王>·<景明王>·<景哀王>·<敬順王>.


신라본기 제 12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孝恭王>立. 諱<嶢>, <憲康王>之庶子, 母<金>氏. 大赦. 增文武百官爵一級.


효공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요이며, 헌강왕의 서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렸다.


○二年, 春正月, 尊母<金>氏爲<義明王大后{太后}??>. 以舒弗邯<俊興>爲上大等, 阿찬<繼康>爲侍中. 秋七月, <弓裔>取<浿西道>及<漢山州>管內三十餘城, 遂都於<松岳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왕의 어머니 김씨를 의명 왕태후로 추존하고, 서불한 준흥을 상대등,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군에 도읍을 정하였다.


○三年, 春三月, 納伊찬<乂謙>之女爲妃. 秋七月, <北原>賊帥<梁吉>, 忌<弓裔>貳己, 與<國原>等十餘城主, 謀攻之. 進軍於<非惱城>下, <梁吉>兵潰走.


3년 봄 3월, 이찬 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가을 7월, 북원의 도적 두목 양길은, 궁예가 자기를 배반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싫어하여, 국원 등 10여 성주들과 함께 그를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비뇌성 아래까지 진군하였으나, 양길의 군사가 패하여 도주하였다.


○四年, 冬十月, <國原>·<菁州{靑州}>??·<槐壤>賊帥<淸吉>·<莘萱>等, 擧城役{投}??於<弓裔>.


李丙燾. 弓裔傳.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겨울 10월, 국원·청주·괴양의 도적 두목 청길과 신훤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五年, <弓裔>稱王. 秋八月, <後百濟>王<甄萱>, 攻<大耶城>, 不下, 移軍<錦城>之南, 奪掠沿邊部落而歸.


5년, 궁예가 왕을 자칭하였다.

가을 8월, 후백제왕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금성 남쪽으로 군사를 옮기면서 부근의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六年, 春三月, 降霜. 以大阿찬<孝宗>爲侍中.


6년 봄 3월, 서리가 내렸다. 대아찬 효종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七年, <弓裔>欲移都, 到<鐵圓>·<斧壤>, 周覽山水.


7년, 궁예가 도읍을 옮기기 위하여, 철원과 부양에 와서 산수를 둘러 보았다.


○八年, <弓裔>設百官, 依<新羅>制.[所制官號, 雖因<羅>制, 殿{多}??有巽{異}??者.] 國號<摩震>, 年號<武泰>元??. <浿江道{浿西道}>??十餘州縣, 降於<弓裔>.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李丙燾는 '元'의 뒤에 '年'을 첨가하여 '<武泰>元年'으로 보았고, 趙炳舜은 『三國史節要』를 참고하여, '元' 앞에 '紀'를 첨가하여,  이 부분을 '<武泰>紀元'으로 보았다.李丙燾. 弓裔傳.

8년, 궁예가 백관을 두어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제정한 관직 칭호는 비록 신라 제도를 모방하였으나, 신라의 제도와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 원년이라 하였다. 패서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九年, 春二月, 星隕如雨. 夏四月, 降霜. 秋七月, <弓裔>移都於<鐵圓>. 八月, <弓裔>行兵, 侵奪我邊邑, 以至<竹嶺>東北. 王聞疆역日削, 甚患, 然力不能禦, 命諸城主, 愼勿出戰, 堅壁固守.


9년 봄 2월, 별이 비 오듯 떨어졌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8월, 궁예가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의 변방 고을을 침략하면서, 죽령 동북 지역까지 이르렀다. 왕이 국토가 나날이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였으나, 방어할 능력이 없으므로 모든 성주들에게 명령하여 함부로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게 수비하도록 하였다.


○十年, 春正月, 以波珍찬<金成>爲上大等. 三月, 前入<唐>及第<金文蔚>, 官至工部員外郞沂王府諮議참軍, 充冊命使而還. 自夏四月至五月, 不雨.


10년 봄 정월, 파진찬 김 성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이전에 당 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김 문울의 관직이 공부원외랑기왕부자의참군에 이르렀는데, 그가 책명사가 되어 돌아왔다.

여름 4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十一年, 春夏無雨. <一善郡>以南十餘城, 盡爲<甄萱>所取.


11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일선군 이남 10여 성을 전부 견훤에게 빼앗겼다.


○十二年, 春二月, 星패于東. 三月, 隕霜. 夏四月, 雨雹.


12년 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3월, 서리가 내렸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十三年, 夏六月, <弓裔>命: 將領兵船, 降<珍島郡>, 又破<皐夷島城>.


13년 여름 6월, 궁예가, 장수들이 병선을 거느리고 와서 진도군의 항복을 받고, 또한 고이도성을 격파하도록 명령하였다.


○十四年, <甄萱>躬率步騎三千, 圍<羅州城>, 經旬不解, <弓裔>發水軍, 襲擊之, <萱>引軍而退.


14년, 견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나주성을 포위하여 열흘동안 풀지 않았다. 궁예가 수군을 출동시켜 그를 습격하니,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十五年, 春正月丙戌朔, 日有食之. 王嬖於賤妾, 不恤政事. 大臣<殷影>諫, 不從, <影>執其妾, 殺之. <弓裔>改國號<泰封>, 年號<水德萬歲>.


15년 봄 정월 초하루 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첩에게 미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은영이 충간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은영은 그 첩을 죽여 버렸다.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 만세라 하였다.


○十六年, 夏四月, 王薨. 諡曰<孝恭>, 葬于<師子寺>北.


16년 여름 4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효공이라 하고,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神德王>立. 姓<朴>氏, 諱<景暉>, <阿達羅王>遠孫. 父<乂兼>[一云<銳謙>.], 事<定康大王>爲大阿찬. 母, <貞和>夫人. 妃<金>氏, <憲康大王>之女. <孝恭王>薨, 無子, 爲國人推戴, 卽位.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예겸(銳謙)'이라는 주장도 있다.]이다. 그는 정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헌강대왕의 딸이다. 효공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元年, 五月, 追尊考爲<宣聖大王>, 母爲<貞和太后>, 妃爲<義成王后>, 立子<昇英>爲王太子. 拜伊찬<繼康>爲上大等.


원년 5월, 선친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 태후,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을 왕태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二年, 夏四月, 隕霜. 地震.


2년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지진이 있었다.


○三年, 春三月, 隕霜. <弓裔>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3년 봄 3월, 서리가 내렸다.

궁예가 연호 수덕 만세를 정개로 고쳤다. 이 해가 정개 원년이다.


○四年, 夏六月, <참浦>水與<東海>水相擊, 浪高二十丈許, 三日而止.


4년 여름 6월, 참포의 물과 동해의 물이 맞부딪쳐서, 물결 높이가 20장 가량 솟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멈추었다.


○五年, 秋八月, <甄萱>攻<大耶>(+<仇史>)??(+二)??城, 不克. 冬十月, 地震, 聲如雷.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가을 8월,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는데 우레같은 소리가 났다.


○六年, 春正月, 太白犯月. 秋七月, 王薨. 諡曰<神德>, 葬于<竹城>.


6년 봄 정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가을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덕이라 하고, 죽성에 장사지냈다.


○<景明王>立. 諱<昇英>, <神德王>之太子, 母, <義成王后>.


경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승영이며, 신덕왕의 태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의성왕후이다.


○元年, 八月, 拜王弟伊찬<魏膺>爲上大等, 大阿찬<裕廉>爲侍中.


원년 8월, 왕의 아우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二年, 春二月, 一吉찬<玄昇>叛, 伏誅. 夏六月, <弓裔>麾下人心忽變, 推戴<太祖>, <弓裔>出奔, 爲下所殺. <太祖>卽位稱元. 秋七月, <尙州>賊帥<阿玆盖>, 遣使降於<太祖>.


2년 봄 2월, 일길찬 현승이 모반하다가 처형되었다.

여름 6월, 궁예의 부하들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여 연호를 새로 정하고,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가을 7월, 상주의 도적 두목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三年, <四天王寺>塑像所執弓弦自絶, 壁畵狗子有聲, 若吠者. 以上大等<金成>爲角찬, 侍中<彦邕>爲沙찬.

我<太祖>移都<松岳郡>.


3년, 사천왕사의 소상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에 그려진 개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그 개가 짖는 것 같았다.

상대등 김 성을 각찬, 시중 언옹을 사찬으로 삼았다.

우리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四年, 春正月, 王與

<太祖>交聘修好. 二月, <康州>將軍<閏雄>, 降於

<太祖>. 冬十月, <後百濟>主<甄萱>, 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進軍於<進禮>, 王遣阿찬<金律>, 求援於

<太祖>.

<太祖>命將出師救之, <萱>聞乃去.


4년 봄 정월, 왕이 태조와 사신을 교환하고 수호 관계를 맺었다.

2월, 강주 장군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겨울 10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진례로 진군하였다. 왕이 아찬 김 율을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물러갔다.


○五年, 春正月, <金律>告王曰: "臣往年奉使<高麗>, <麗>王問臣曰: '聞<新羅>有王{三}??寶, 所謂丈六尊像·九層塔幷聖帶也. 像塔猶存, 不知聖帶今猶在耶.' 臣不能답{答}??." 王聞之, 問群臣曰: "聖帶是何寶物耶?" 無能知者. 時, 有<皇龍寺>僧年過九十者, 曰: "予嘗聞之, 寶帶是<眞平大王>所服也, 歷代傳之, 藏在南庫." 王遂令開庫, 不能得見, 乃以別{擇}??日齋祭, 然後見之. 其帶□{粧}??以金玉甚長, 非常人所可束也.

○論曰: "古者坐明堂, 執傳國璽, 列九鼎, 其若帝王之盛事者也. 而<韓公>論之曰: '歸天人之心, 興太平之基, 決非三器之所能也.' 竪三器而爲重者, 其誇者之詞耶? 황此<新羅>所謂三寶, 亦出於人爲之侈而已, 爲國家, 何須此耶? 『孟子』曰: '諸侯之寶三, 土地·人民·政事.' 『楚書』曰: '<楚國>無以爲寶, 惟善以爲寶.' 若此者, 行之於內. 足以善一國, 推之於外, 足以澤四海, 又何外物之足云哉! <太祖>聞<羅>人之說而問之耳, 非以爲可尙者也. 二月, <靺鞨>別部<達姑>衆, 來寇北邊. 時, <太祖>將<堅權>鎭<朔州>, 率騎擊大破之, 匹馬不還. 王喜, 遣使移書, 謝於<太祖>. 夏四月, 京都大風拔樹. 秋八月, 蝗, 旱.


趙炳舜. 『顯宗實錄字本』.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5년 봄 정월, 김 율이 왕에게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소위 장륙 불상과 9층탑과 성대가 그것이라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이 때 황룡사에 중이 있었는데 나이 90세가 넘었다. 그가 말하였다. "그 보배로운 허리띠는 진평대왕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 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일찌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왕이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날을 정하여 치성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다.

저자의 견해 : 옛날 명당에 앉아서 나라를 이어받는 옥새를 쥐고, 아홉개의 솥을 진열하여 놓는 것, 그것이 마치 제왕들의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한퇴지가 평론하기를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태평 성세의 기초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세 가지 기물을 소중하다고 한 것은, 과장된 자의 말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라의 소위 세 가지 보물은 또한 사람이 만든 사치한 물건일 뿐이니,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이들이 어찌 꼭 필요한 것이겠는가? 「맹자」에는 "제후의 보배가 세 가지이니, 곧 토지·백성·정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초서」에는 "초 나라에는 보물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없고, 오직 선을 보배로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선은, 국내에서 실천하면 족히 한 나라를 선하게 할 것이며, 국외로 실천하면, 족히 천하에 은혜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니, 이밖에 또 무엇을 보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전설을 듣고 물었을 뿐이며, 그것을 숭상할만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2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 때 태조의 장수 견권이 삭주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태조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사례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六年, 春正月, <下枝城>將軍<元逢>·<溟州>將軍<順式>, 降於<太祖>. <太祖>念其歸順, 以<元逢>本城爲<順州>, 賜<順式>姓曰<王>. 是月, <眞寶城>將軍<洪述>, 降於<太祖>.


6년 봄 정월, 하지성 장군 원봉과 명주 장군 순식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 성을 순주라 하였으며,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다. 이 달에 진보성 장군 홍 술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七年, 秋七月, 命<旨城>將軍<城達>·<京山府>將軍<良文>等, 降於<太祖>. 王遣倉部侍郞<金樂>·錄事참軍<金幼卿>, 朝<後唐>, 貢方物. <莊宗>賜物有差.


7년 가을 7월, 왕이 지성 장군 성달과 경산부 장군 양문 등에게 명령하여 태조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왕이 창부 시랑 김 낙과 녹사 참군 김 유경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쳤다. 장종이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다.


○八年, 春正月, 遣使入<後唐>朝貢. <泉州>節度使<王逢規>, 亦遣使, 貢方物. 夏六月, 遣朝散大夫倉部侍郞<金岳>, 入<後唐>朝貢, <莊宗>授朝議大夫試衛尉卿. 秋八月, 王薨. 諡曰<景明>, 葬于<黃福寺>比{北}??, <太祖>遣使弔祭.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정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 절도사 왕 봉규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6월, 왕이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 악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주었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명이라 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景哀王>立. 諱<魏膺>, <景明王>同母弟也.


경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위응이며, 경명왕의 동복 아우이다.


○元年, 九月, 遣使聘於<太祖>. 冬十月, 親祀神宮. 大赦.


원년 9월,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冬十月, <高鬱府>將軍<能文>, 投於<太祖>, 勞諭還之, 以其城迫近<新羅>王都故也. 十一月, <後百濟>主<甄萱>, 以姪<眞虎>, 質於<高麗>. 王聞之, 使謂<太祖>曰: "<甄萱>反覆多詐, 不可和親." <太祖>然之.


2년 겨울 10월, 고울부 장군 능문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돌려 보냈다. 왜냐하면 그 성이 신라의 서울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1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태조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三年, 夏四月, <眞虎>暴死. <萱>謂<高麗>人故殺, 怒擧兵, 進軍於<熊津>. <太祖>命諸城, 堅壁不出. 王遣使曰: "<甄萱>違盟擧兵, 天必不祐. 若大王奮一鼓之威, <甄萱>必自破矣." <太祖>謂使者曰: "吾非畏<萱>, 俟惡盈而自彊{강}??耳."


李丙燾. 「通鑑」. 「高麗史」.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여름 4월,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분개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웅진까지 진군하였다. 태조가 모든 성에 명령하여 방비를 굳게 하고 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진격하여 위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조는 사신에게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이 넘쳐서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四年, 春正月, <太祖>親征<百濟>, 王出兵助之. 二月, 遣兵部侍郞<張芬>等, 入<後唐>朝貢. <唐>授<張芬>檢校工部尙書; 副使兵部郞中<朴術洪>, 兼御史中丞; 判官倉部員外郞<李忠式>, 兼侍御史. 三月, <皇龍寺>塔搖動北傾. <太祖>親破<近巖城{近品城}>??. <唐><明宗>以權知康州事<王逢規>, 爲懷化大將軍. 夏四月, 知康州事<王逢規>遣使<林彦{林遠}>??, 入<後唐>朝貢, <明宗>召對<中興殿>, 賜物. <康州>所管<突山>等四鄕, 歸於<太祖>. 秋九月, <甄萱>侵我軍於<高鬱府>, 王請救於<太祖>, 命將出勁兵一萬往救. <甄萱>以救兵未至, 以冬十一月, 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 倉猝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 奔走逃竄. 其爲賊所虜者, 無貴賤皆駭汗匍匐, 乞爲奴僕而不免. <萱>又縱其兵, 剽掠公私財物略盡, 入處宮闕,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强淫王妃, 縱其下, 亂其妃妾. 乃立王之族弟, 權知國事, 是爲<敬順王>.


李丙燾. 「高麗史」. 「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봄 정월, 태조가 직접 백제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도왔다.

2월, 병부 시랑 장 분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후당에서는 장 분을 검교공부상서로 임명하고, 부사인 병부 낭중 박 술홍을 겸어사중승으로, 판관인 창부 원외랑 이 충식을 겸시어사로 임명하였다.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가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직접 가서 근암성을 격파하였다.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 봉규를 회화 대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지강주사 왕 봉규가 사자 임 언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명종이 중흥전에서 그를 접견하고 선물을 주었다.

강주 관하의 돌산 등 네 고을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하여 정병 1만 명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겨울 11월에 서울을 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게 후궁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라고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견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왕을 찾게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을 데리고 후궁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 갔다. 견훤은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고,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의 아우뻘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다. 이 사람이 경순왕이다.


○<敬順王>立. 諱<傅>, <文聖大王>之裔孫, <孝宗>伊찬之子也, 母<桂娥太后>. 爲<甄萱>所擧卽位. 擧前王屍, 殯於西堂, 與群下慟哭. 上諡曰<景哀>, 葬<南山><蟹目嶺>, <太祖>遣使弔祭.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부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 태후이다. 부는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전 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元年, 十一月, 追尊考爲<神興大王>, 母爲王太后. 十二月, <甄萱>侵<大木郡>, 燒盡田野積聚.


원년 11월, 왕의 아버지를 신흥대왕,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에 침입하여, 논밭에 있던 노적가리를 모두 불태웠다.


○二年, 春正月, <高麗>將<金相>與<草八城>賊<興宗>戰, 不克死之. 夏五月, <康州>將軍<有文>, 降於<甄萱>. 六月, 地震. 秋八月, <甄萱>命將軍<官昕>, 築城於<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率兵擊走之. <甄萱>進屯於<大耶城>下, 分遣軍士, 芟取<大木郡>禾稼. 冬十月, <甄萱>攻陷<武谷城>.


2년 봄 정월, 고려 장수 김 상이 초팔성의 도적 흥종과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여름 5월, 강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게 하자, 태조가 명지성의 장군 왕 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내게 하였다. 견훤이 대야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보내 대목군의 벼를 베어 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三年, 夏六月, <天竺國><三藏摩후羅>抵<高麗>. 秋七月, <甄萱>攻<義成府城{義城府城}>??, <高麗>將<洪述>出戰, 不克死之. <順州>將軍<元逢>, 降於<甄萱>. <太祖>聞之怒, 然以<元逢>前功, 宥之, 但改<順州>爲縣. 冬十月, <甄萱>圍<加恩縣>, 不克而歸.


李丙燾. 甄萱傳. 「高麗史」.

3년 여름 6월, 천축국의 삼장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을 공격하므로, 고려 장수 홍술이 그들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四年, 春正月, <載巖城>將軍<善弼>降<高麗>, <太祖>厚禮待之, 稱爲尙父. 初, <太祖>將通好<新羅>, <善弼>引導之, 至是降也, 念其有功且老, 故寵褒之. <太祖>與<甄萱>戰<古昌郡><甁山>之下, 大捷, 殺虜甚衆. 其<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 相次降於<太祖>. 二月, <太祖>遣使告捷, 王報聘兼請相會. 秋九月, 國東沿海州郡部落, 盡降於<太祖>.


4년 봄 정월,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후하게 예우하고 상보라고 불렀다. 예전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가 항복해오자 태조가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참작하여 은총을 베풀고 표창하였다. 태조는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향하에 있던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왕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동해 주변에 있는 주와 군의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五年, 春二月, <太祖>率五十餘騎, 至京畿通謁. 王與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於<臨海殿>, 酒감, 王言曰: "吾以不天, 침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 因泫然涕泣, 左右無不鳴咽, <太祖>亦流涕慰藉. 因留數旬廻駕,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 隨駕焉. <太祖>麾下軍士肅正,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 秋八月, <太祖>遣使, 遺王以錦彩·鞍馬, 幷賜群僚將士布帛, 有差.


5년 봄 2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근방에 와서 왕을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은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 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종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동시에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을 주었다.


○六年, 春正月, 地震. 夏四月, 遣便{使}??執事侍郞<金불>, 副使司賓卿<李儒>, 入<唐>朝貢.


今西龍.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 시랑 김 불, 부사로 사빈경 이 유를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唐><明宗>遣使<高麗>, 錫命.


7년, 후당 명종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을 주었다.


○八年, 秋九月, 老人星見. <運州>界三十餘郡縣降於<太祖>.


8년 가을 9월, 남극성이 나타났다.

운주 경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群下謀, 擧土降<太祖>. 群臣之議, 或以爲可, 或以爲不可. 王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 齎書請降於<太祖>.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十一月, <太祖>受王書, 送大相<王鐵>等迎之. 王率百寮, 發自王都, 歸于<太祖>. 香車寶馬, 連亘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甲第一區, 以長女<樂浪公主>妻之. 十二月, 封爲<正承公{正丞公}>??,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 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初, <新羅>之降也, <太祖>其{甚}??喜, 旣待之以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昏於宗室, 以永甥舅之好." 答曰: "我伯父<億廉>잡干, 知<大耶郡>事, 其女子德容雙美, 非是, 無以備內政." <太祖>遂取之生子, 是<顯宗>之考, 追封爲<安宗>. 至<景宗><獻和大王>, 聘<正承公>女, 納爲王妃, 仍封<正承公>爲尙父令. 公至大<宋><興國>四{三}??年戊寅, 薨, 諡曰<敬順>[一云<孝哀>.]. 國人自始祖至此, 分爲三代. 自初至<眞德>二十八王, 謂之上代; 自<武烈>至<惠恭>八王, 謂之中代; 自<宣德>至<敬順>二十王, 謂之下代云.

○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 輔行. 詣<佑神관>, 見一堂設女仙像. 관伴學士<王보>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學而講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之, 可謂盛矣. 而奉浮屠之法, 不知其폐, 至使閭里, 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則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也, <景哀>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石亭>, 置酒燕간,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嘉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 甚大. 昔, <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遠矣. 我<太祖>, 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 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之報者歟!

三國史記第十二.


李丙燾. 「高麗史」.今西龍.李丙燾. 「三國遺事」.

9년 겨울 10월,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로 되어,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였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왕자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 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 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여,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개칭하여 경주라 하고, 이를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자를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나의 백부 잡간 억렴이 지대야군사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행이 훌륭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외에는 집안을 받들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곧 현종의 아버지로서, 후에 안종으로 추봉되었다. 경종 헌화대왕 때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으로 봉하였다. 공이 송 나라 흥국 4년 무인에 죽으니, 호를 경순[효애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신라 시조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니, 초대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상대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라 하고,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라고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는 금궤에 들어 있다가 하늘로부터 하강하였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 내려와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 연간에 우리 나라에서 상서 이 자량을 송 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 부식은 글 쓰는 임무를 맡아 보좌로 가게 되었다. 우리가 우신관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화상을 걸어 놓은 것을 보았다. 숙소에서 접대를 맡은 학사 왕 보가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를 아는가?"라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곧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의 첫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영원히 선도산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화상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한 송 나라 사신 왕 양이 지은 동신성모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 노릇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고, 이제 다만 이러한 전설이 생긴 시초를 고찰해 본 것이다.

신라에서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히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의 교화를 받았기 때문에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신라는 중국 군사의 위세를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군사와 농사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 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 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하게 되어, 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 금호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 여화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만약 목숨을 걸고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고려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할 것이다. 옛날 전씨가 오와 월의 국토를 송 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 자첨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위와 같은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권 제 12 끝




三國史記卷第十三.



삼국사기 권 제 13


高句麗本紀第一.

始祖<東明聖王>·<&琉璃王{瑠璃明王}??>.


趙炳舜.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고구려 본기 제 1

시조 동명성왕, 유리왕.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鄒牟}>??, 一云<衆解{衆牟}>??]. 先是,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蛙, 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 其相<阿蘭弗>曰: "日者, 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유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熊神山}>??下<鴨록{鴨綠}>??邊室中, 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 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과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억然異常, 自作弓矢, 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 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而<朱蒙>에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鳥伊{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표水>[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伯{河伯}>??外孫{甥}??.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魏書』云; "至<普述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默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時, <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王見<沸流水>中, 有菓{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 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에는 '牟', 『三國史節要』에는 '祥'으로 되어 있다.李丙燾.李丙燾. 「三國遺事」.『북한본』.李丙燾. 「三國遺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이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구나!"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기르며 금와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녀를 따라 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다섯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으며,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는 들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그것을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의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아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

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골嶺>. 秋七月, 慶雲見<골嶺>南, 其色{邑}??靑赤.


李丙燾. 舊本.

3년 봄 3월, 황룡이 골령에 나타났다.

가을 7월,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다.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


○四年, 夏四月, 雲霧四起, 人不辨色七日. 秋七月, 營作城郭宮室.


4년 여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이나 사람들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했다.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六年, 秋八月, 神雀集宮庭.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大白山{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날아 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해인국을 치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十(+一)??年, 秋九月,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염>, 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가을 9월, 난새가 왕대에 모였다.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격멸하고, 그 지역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 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德.


14년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곳의 왕 금와가 그를 태후의 예로 장례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瑠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類利>聞之, 乃往山谷, 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 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라고도 하였다. 그는 주몽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씨이다. 에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녀는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였다. 유리가 어렸을 때,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논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어서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았기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말했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바로 산골로 들어가 그것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지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옥지·구추·도조 등의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을 꺼내어 맞추어 보니, 하나의 칼로 이어졌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된 것이다.


○二年, 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 九月, 西狩獲白獐. 冬十月, 神雀集王庭. <百濟>始祖<溫祚>立.


2년 가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9월, 서쪽 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三年, 秋七月, 作離宮於<골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姬}??繼室, 一曰<禾姬>, <골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량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 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姬}??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편편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가을 7월, 골천에 이궁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취를 삼았는데, 한 사람은 화희이니 골천 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이니 한 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 했으므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다. 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각각 따로 살게 하였다. 그 후,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인은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를 욕하며 말했다. "네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이토록 심한가?"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집으로 도망가버렸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 갔으나, 치희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왕이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꾀꼬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 있어 노래를 불렀다. "꾀꼬리도 이리저리, 암수가 서로 의지하며 노는데, 외로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


○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良馬一十匹.


11년 여름 4월,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선비가 자기네 땅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약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수비를 하니, 나라의 걱정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했다. "거짓 간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말을 하되, '우리 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 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들어가 산림 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 들어 왔다. 부분노는 성문에서 싸워 그들을 수없이 목베어 죽였다.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식읍을 주었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十三年, 春正月, 熒惑守心星.


13년 봄 정월, 화성이 심성 성좌에 머물렀다.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에之.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분개하였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동사자가 많이 생기자 곧 돌아갔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斯卑>爲崇{수}??." 王使謝之, 卽愈.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가을 8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 났다. 왕은 탁리와 사비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 늪에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다리의 힘줄을 잘랐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했다.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에 어찌 상처를 낼 수 있는가?" 왕은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 왕이 병들었다. 무당이 "탁리, 사비의 귀신이 화근이 되었다"고 하므로, 왕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죄하게 하였다. 곧 왕의 병이 나았다.


○二十年, 春正月, 太子<都切>卒.


20년 봄 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 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 養之. 返見王, 曰: "臣逐豕, 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미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夏四月, 王田于<尉中林>. 秋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還至<沙勿>澤, 見一丈夫坐澤上石. 謂王曰: "願爲王臣." 王喜許之, 因賜名<沙勿>, 姓<位>氏.


21년 봄 3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 났다. 왕이 장생 설지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아 우선 국내 사람의 집에서 기르게 하였다. 설지가 돌아와 왕에게 말했다. "제가 돼지를 따라 국내 위나암에 갔는데, 그곳 자연이 준험하고,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전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름 4월, 왕이 위중림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9월, 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돌아 보고 오다가 사물 못에 이르러, 한 사나이가 연못 가운데의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에게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흔쾌히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이라는 이름과 위씨라는 성을 주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國內城)>??, 築<尉那巖>城.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 墜地." 王聞之, 震怒, 罷<陜父>職, 비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趙炳舜. 『三國史記』 志.

22년 겨울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 협보가 말했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응당 열심히 사회의 안정과 정치와 백성의 구휼 사업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왕께서 만일 이러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왕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관가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협보가 분개하여 그 나라를 떠나 남한으로 갔다.


○二十三年, 春二月, 立王子<解明>, 爲太子, 大赦國內.


23년 봄 2월, 왕의 아들 해명을 태자를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賜姓<羽>氏, 비尙王女.


24년 가을 9월, 왕이 기산의 들에서 사냥하다가 비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 성을 주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諫者, 曰: "今隣國無故請見, 其意不可則{測}??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7년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센 활을 선사하였다.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꺾으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황룡왕이 부끄러워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황룡왕에게 "해명은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죽여 버리라"라고 말했다.

3월,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만류하며 간하기를 "오늘 이웃 나라에서 이유없이 만나자고 하니,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드디어 떠났다. 황룡왕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만나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절을 갖추어 돌려 보냈다.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 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隣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太子曰: "嚮, <黃龍王>以强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 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時年, 二十一歲. 以太子禮, 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槍京}>??.

○論曰: 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 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不}??納於邪." 今王, 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讓王曰: "我先王, 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 禮也, 以幼事長者, 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祐}??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 難矣."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효, 乃與群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扶餘王>聞之, 편問群下. 有一老구對曰: "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8년 봄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그리고 태자에게 칼을 주어 자결하게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결하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말했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정당하게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사자가 한 번 와서 말한다 하여 자결한다면, 왕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태자가 말했다. "전번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길까 걱정되어, 일부러 활을 잡아 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의 견책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부왕이 나를 불효하다고 생각하여 칼을 내려 자결케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 태자는 여진 동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찔려 자결하였다. 이 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식으로 동원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 땅을 창원이라 하였다.

저자의 견해 :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마땅히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효도를 삼아, 마치 문왕이 세자 시절에 행동하듯 하여야 한다. 해명은 옛 도읍에 살면서 용맹을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으니, 그는 당연히 죄를 범한 것이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아들을 사랑하거든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고, 사악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니, 왕이 처음에는 한 번도 가르친 일이 없다가, 죄악이 이루어진 다음에 지나치게 미워하여 죽여 버리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애비는 애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가을 8월,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왕 동명왕과 서로 의좋게 지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도록 유인하는 것은, 백성을 모두 모아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나라에는 대국과 소국의 구분이 있고, 사람에도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있으니,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것은 예절이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이다. 이제 왕이 만약 예절과 순리로써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나라의 운명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은, 나라를 세운 역사가 짧으며, 백성과 군대는 약하므로, 치욕을 참고 굴복하여, 후일의 성과를 도모하는 것이 형세에 합치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부여왕에게 "과인이 바다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왔기에 예의에 대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제 대왕의 교시를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회답하였다. 이 때, 왕자 무휼은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가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부여의 사신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현명하고 재주가 많았었는데,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였고, 부왕에게 말이나 기르게 하는 직위를 주도록 참소하여 욕을 보인 까닭에 불안하여 탈출했던 것이다. 이제 대왕이 전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군사가 많은 것을 믿어 우리 나라를 멸시하고 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대왕에게 '이곳에 알을 쌓아 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대왕을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보고하라." 부여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에게 그 뜻을 두루 물었다. 한 노파가 "쌓아놓은 알은 위태로운 것이니,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 자는 편안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노파의 말은 곧, 왕이 자신에게 위기가 왔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남이 와서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위기를 만들지 않고 차라리 평화를 택하여 자기 나라를 먼저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群鬪, 黑蛙不勝, 死. 議者曰: "黑, 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 秋七月, 作離宮於<豆谷>.


29년 여름 6월,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떼지어 싸우다가,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해설하는 사람이 "검은 것은 북방의 색깔이니, 북부여가 파멸될 징조"라고 말했다.

가을 7월, 두곡에 이궁을 지었다.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예貊{穢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侯雛}>??, 근{斬}??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왜{騶??/鄒??}>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後漢書」. 「梁書」. 「北史」.「북한본」.

31년, 한 나라 왕망이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강제로 협박하여 보내려 하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다. 요서 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었다. 한 나라 주와 군에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돌렸다. 엄우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貊)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마땅히 (요동과 현토의)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함부로 그들에게 큰 죄를 묻게 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그들을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가 오랑캐를 부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부여, 예맥이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이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내어 목을 베어 한 나라 서울로 보냈다.[양「한서」와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 추(騶)를 꾀어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망이 기뻐하여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로 개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한 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년 겨울 11월, 부여가 침범해왔다. 왕이 아들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대적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한 계책을 내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여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겼던 군사를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하니, 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鳥伊{烏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縣屬<玄토郡>.]


『북한본』.

33년 봄 정월, 왕자 무휼을 태자를 삼고,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8월,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계속 진군하여 한 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 탈취토록 하였다.[현은 현토군에 속한다.]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 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琉璃明王{瑠璃明王}>??.

三國史記卷第十三.


趙炳舜. 『高句麗本紀』.

37년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후, 비류 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으므로,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두곡 동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3 끝




三國史記卷第十四.



삼국사기 권 제 14


高句麗本紀第二.

<大武神王>·<閔中王>·<慕本王>.


고구려본기 제 2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


○<大武神王>立.[或云<大解宋留王{大解朱留王}>??.] 諱<武恤>, <&琉璃王{瑠璃明王}>??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有大略. <&琉璃王{瑠璃明王}>??在位三十三年, 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북한본』.趙炳舜. 『高句麗本紀』.趙炳舜. 『高句麗本紀』.

대무신왕이 왕위에 올랐다.[혹은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 그의 이름은 무휼이며, 유리왕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장성하여서는 호걸의 풍모를 갖추었고, 지략이 많았다. 유리왕 재위 33년 갑술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당시의 나이는 11세였는데, 이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송씨이니,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2년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 名<거루>. 冬十月, <扶餘>王<帶素>遣使送赤烏, 一頭二身. 初, <扶餘>人得此烏獻之王, 或曰: "烏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 <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王與群臣議答曰: "黑者, 北方之色,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可知也." <帶素>聞之, 驚悔.


3년 봄 3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가을 9월, 왕이 골구천에서 사냥하다가 신마를 얻어 거루라고 이름 지었다.

겨울 10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통하여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그 까마귀의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서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부여왕에게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고구려를 합병함이 어떤가요?"라고 말하였다. 대소가 기뻐하며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동시에 이 사람이 한 말도 전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부여왕에게 대답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색깔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으며,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대소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四年, 冬十二月, 王出師, 伐<扶餘>, 次<沸流水>上, 望見水涯, 若有女人, 여鼎游희. 就見之, 只有鼎. 使之炊, 不待火自熱, 因得作食, 飽一軍. 忽有一壯夫曰: "是鼎吾家物也, 我妹失之, 王今得之, 請負以從."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理勿林}>??宿, 夜聞金聲. 向明, 使人尋之, 得金璽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又有人曰: "臣<赤谷>人<麻盧>, 請以長矛爲導." 王又許之.


李丙燾. 地理志.

4년 겨울 12월,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비류수 옆에 머무르며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왕이 그 솥에 밥을 짓게 하니,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밥을 짓게 되어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이었는데, 제 누이가 잃었다가 이제 왕께서 얻었으니, 제가 이 솥을 지고 왕을 따라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곧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주었다. 왕이 이물림에 도착하여 묵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는 중에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이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또한 허락하였다.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뇨}??,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態. <扶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녕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 斬頭. <扶餘>人, 旣失其王, 氣力최折, 而猶不自屈, 圍數重. 王以糧盡士饑, 憂懼不知所爲. 乃乞靈於天, 忽大霧咫尺不辨人物七日. 王令作草偶人, 執兵立營內外, 爲疑兵. 從間道潛軍夜出. 失<骨句川>神馬, <沸流源>大鼎. 至<利勿林>, 兵飢不興, 得野獸以給食. 王旣至國, 乃會群臣飮至曰: "孤以不德, 輕伐<扶餘>. 雖殺其王, 未滅其國, 而又多失我軍資, 此孤之過也." 遂親吊死問疾, 以存慰百姓. 是以國人感王德義, 皆許殺身於國事矣. 三月, 神馬<거루>將<扶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車廻谷>.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록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秋七月, <扶餘>王從弟, 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연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冬十月, <怪由>卒. 初疾革, 王親臨存問. <怪由>言: "臣<北溟>微賤之人, 屢蒙厚恩. 雖死猶生, 不敢忘報." 王善其言, 又以有大功勞, 葬於<北溟山>陽, 命有司以時祀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2월,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에는 진흙 수렁이 많으므로 왕은 평지를 선택하여 병영을 만들고, 말 안장을 풀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두려워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부여왕이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출전하였다. 그는 고구려가 대비하지 않는 틈을 노려 기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말을 급히 몰아 진군하다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앞으로 갈수도 뒤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 때 괴유를 출동시켰다. 괴유가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가니, 부여의 1만여 군졸들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버틸 수 없었다. 이 때 괴유가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부여 사람들은 이미 왕을 잃고 기세가 꺾였으나, 그래도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굶주리니 왕은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갑자기 큰 안개가 7일 동안 끼어 지척에서도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허수아비에게 병기를 들게하여 병영 안팎에 세워서 마치 병사로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그리고 사잇길로 밤을 도와 몰래 행군하였다. 이 와중에 골구천에서 얻은 신마와 비류수 상류에서 얻은 큰 솥을 잃어 버렸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배고파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음지(飮至)의 예식을 거행하면서 "내가 부덕하여 경솔하게 부여를 공격하였다.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였으며, 또한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전사자를 직접 조상하고, 부상당한 자를 문병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왕의 덕행과 의리에 감동되어, 나라 일에 생명을 바치기로 모두 다짐하였다.

3월, 신마 거루가 부여의 말 백 필을 가지고 학반령 아래 차회곡에 왔다.

여름 4월,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왕이 살해되자 그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자 백여 명을 데리고 압록곡에 이르렀다가, 사냥나온 해두왕을 죽이고 그의 백성을 빼앗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이 사람이 곧 갈사왕이다.

가을 7월, 부여왕의 종제가 백성에게 "우리 선왕이 별세하고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고, 왕의 아우는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나 역시 불초하여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라고 말하고, 만여 명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왕이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있게 하였다. 그의 등에 낙(絡) 무늬가 있다 하여 성씨를 낙(絡)으로 정하여 주었다.

겨울 10월, 괴유가 죽었다. 처음 그의 병이 위독했을 때 왕이 직접 가서 문병하였다. 그 때 괴유가 "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왕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서와 같이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 말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그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관리를 시켜 철에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다.


○八年, 春二月, 拜<乙豆智>, 爲右輔, 委以軍國之事.


8년 봄 2월, 을두지를 우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毋{禁}??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겨울 10월, 왕이 직접 개마국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자기 군사들이 백성을 약탈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 지역만 따로 군현으로 만들었다.

12월, 구다국 왕이 개마가 멸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개척 지역이 점점 넓어졌다.


○十年, 春正月, 拜<乙豆智>, 爲左輔, <松屋句>爲右輔.


10년 봄 정월, 을두지를 좌보로 삼고, 송옥구를 우보로 삼았다.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王會群臣, 問戰守之計. 右輔<松屋句>曰: "臣聞恃德者昌, 恃力者亡. 今中國荒儉, 盜賊蜂起, 而兵出無名, 此非君臣定策, 必是邊將規利, 擅侵吾邦. 逆天違人, 師必無功, 憑險出奇, 破之必矣." 左輔<乙豆智>曰: "小敵之强, 大敵之禽也. 臣度大王之兵, 孰與<漢>兵之多, 可以謀伐, 不可力勝." 王曰: "謀伐若何?" 對曰: "今<漢>兵遠鬪, 其鋒不可當也. 大王閉城自固, 待其師老, 出而擊之, 可也." 王然之, 入<尉那巖>城, 固守數旬, <漢>兵圍不解. 王以力盡兵疲, 謂<豆智>曰: "勢不能守, 爲之奈何?" <豆智>曰: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氷{水}??草, 兼旨酒若干, 致호漢軍." 王從之, 貽書曰: "寡人愚昧, 獲罪於上國, 致令將軍帥百萬之軍, 暴露弊境. 無以將厚意, 輒用薄物, 致供於左右." 於是, <漢>將謂城內有水, 不可猝拔. 乃報曰: "我皇帝不以臣駑, 下令出師, 問大王之罪. 及境踰旬, 未得要領, 今聞來旨, 言順且恭, 敢不藉口以報皇帝." 遂引退.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가을 7월, 한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공격과 방어에 대한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했다. "제가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고 있는데,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키니, 이는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필시 변방의 장수가 사욕을 채울 목적으로 우리 나라를 무단 침범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이치에 위배되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그들의 군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였다가 불시에 기습을 한다면,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했다. "수가 적은 편이 비록 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수가 많은 편에게 잡히게 됩니다. 제가 대왕의 군사와 한 나라 군사 중에 어느 편이 많은가를 생각하여 보았는데,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할 수 있을지언정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이 물었다. "계략으로 공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을두지가 대답했다. "지금 한 나라 군사가 멀리 와서 싸우니, 그들의 서슬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대왕은 성문을 닫고 우리의 군사를 튼튼히 하여, 적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이 의견을 옳게 여기고 위나암성에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굳게 수비하였으나 한 나라 군사는 포위를 풀지 않았다. 아군의 힘이 다하고 군사가 피로해졌으므로 두지에게 물었다. "더 이상 수비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으니 어떻게 할까?" 두지가 대답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처하고 있으므로 물있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궁에 처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 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두지의 말에 따라 편지를 보내어 말했다. "내가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지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의 황폐한 경내에서 노숙 생활을 하게 하였다. 장군의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어, 이에 보잘 것 없는 물건이나마 장군의 막하에 보낸다." 이 때 한 나라 장수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빠른 시간 내에 점령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곧 회답하여 말했다. "우리 황제가 나의 어리석음을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출사의 명령을 내려 대왕의 죄과를 묻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 국경에 온지 열흘이 넘도록 행동할 바를 몰랐는데, 이제 보내 온 편지를 보니 말이 순리에 맞고 공손하니, 내가 황제에게 이 말대로 보고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十三年, 秋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來投.


13년 가을 7월, 매구곡 사람 상수가 그의 아우 위수 및 사촌 우도 등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十四年, 冬十一月, 有雷. 無雪.


14년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十五年, 春三月, 黜大臣<仇都>·<逸苟>·<焚求>等三人爲庶人. 此三人爲<沸流>部長, 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其所欲, 有不與者卽鞭之, 人皆忿{懷忿}??怨. 王聞之, 欲殺之, 以<東明>舊臣, 不忍致極法, 黜退而已. 遂使南部使者<鄒발素>, 代爲部長. <발素>旣上任, 別作大室以處, 以<仇都>等罪人, 不令升堂. <仇都>等詣前, 告曰: "吾제小人, 故犯王法, 不勝愧悔. 願公赦過, 以令自新, 則死無恨矣." <발素>引上之, 共坐曰: "人不能無過, 過而能改, 則善莫大焉." 乃與之爲友. <仇都>等感愧, 不復爲惡. 王聞之曰: "<발素>不用威嚴, 能以智懲惡, 可謂能矣." 賜姓曰<大室>氏.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之. 後, <好童>還國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 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其不仁不足道矣, 而<好童>不得無罪. 何則? 子之見責於其父也, 宜若<舜>之於<고수{고수}>??, 小杖則受, 大杖則走, 期不陷父於不義. <好童>不知出於此, 而死非其所, 可謂執於小謹而昧於大義, 其公子<申生>之譬耶?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太子. 遣使入<漢>朝貢. <光虎帝{光武帝}>??復其王號, 是<立武{建武}>??八年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資治通鑑』.趙炳舜. 『資治通鑑』.

15년 봄 3월, 대신 구도·일구·분구 등의 세 사람을 축출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이 세 사람은 비류의 부장으로 있을 때, 자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과 우마와 재물을 함부로 빼앗으며,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했었다. 만약 이를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곧 매질을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며 원망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을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을 차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하여 축출한 것이다. 그리고 곧 남부 사자 추발소로 하여금 그들을 대신하여 부장이 되게 하였다. 발소가 부임한 후, 별도로 큰 집을 짓고 살면서 구도 등은 죄인이라 하여 마루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와서 말했다. "우리들은 소인이라 왕법을 위반하였으니, 그 부끄럽고 뉘우치는 심정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원컨대 공이 우리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준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발소가 그들을 오르게 하여 같이 앉아서 말했다. "사람이란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잘못을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발소는 그들과 더불어 벗을 삼았다. 구도 등이 수치심을 느끼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발소는 위엄이 아닌 지혜로써 악한 사람을 바로 잡았으니 유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 하고, 발소에게 대실씨라는 성을 주었다.

여름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 때 낙랑왕 최 리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 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아 들이지 않겠다." 옛날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이를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 때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후, 이를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 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방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군사들이 소리없이 성밑까지 이르게 된 이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수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다음, 그녀를 본국에 돌려 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겨울 11월, 왕자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이었다. 그는 얼굴이 미려하여 왕이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름도 호동이라고 하였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종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참소하였다. "호동은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 간통하려 한다." 왕이 대답히였다. "너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느냐?" 첫째 왕비는 왕이 자기를 믿지 않음을 알고, 화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했다. "청컨대 대왕께서 가만히 엿보소서. 만약 이런 일이 없으면, 내가 죄를 받겠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왕이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그에게 죄를 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왕에게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이를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 호동은 곧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저자의 견해 : 왕은 참소하는 말을 믿고, 죄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으나, 호동에게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책망을 들었을 때는, 마땅히 순이 고수에게 하듯이 조금 때리면 맞고 많이 때리면 피하여,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호동은 이러한 행동으로 나아갈 줄을 모르고, 죽지 않을 일로 죽었으니, 가히 작은 성실을 행하기 위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옛날의 공자 신생에 비유할 만하다.

12월,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 8년이었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四年, 春三月, 京都雨雹. 秋七月, 隕霜殺穀. 八月, 梅花發.


24년 봄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8월, 매화가 피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號爲<大武神王>.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27년 가을 9월, 한 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와서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북이 한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그를 대수촌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


○<閔中王>, 諱<解色朱{解邑朱}>??, <大武神王>之弟也. <大武神王>薨, 大子{太子}??幼少, 不克卽政. 於是, 國人推戴以立之. 冬十一月, 大赦.


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민중왕의 이름은 해색주이며,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해색주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겨울 11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三月, 宴群臣. 夏五月, 國東大水, 民饑, 發倉賑給.


2년 봄 3월, 여러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三年, 秋七月, 王東狩, 獲白獐. 冬十一月, 星패于南, 二十日而滅. 十二月, 京都無雪.


3년 가을 7월,왕이 동쪽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12월,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王田於<閔中原>. 秋七月, 又田, 見石窟, 顧謂左右曰: "吾死, 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九月, 東海人<高朱利>獻鯨魚目, 夜有光. 冬十月, <蠶友落部{蠶支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李丙燾. 地理志. 「後漢書」.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왕이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7월, 다시 사냥을 하다가 석굴을 보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기에 장사할 것이며, 별도로 능묘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9월, 동해 사람 고주리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

겨울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 나라에 투항하였다.[「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1만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五年, 王薨. 王后及群臣, 重違遺命, 乃葬於石窟, 號爲<閔中王>.


5년에 왕이 별세하였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호를 민중왕이라 하였다.


○<慕本王>, 諱<解憂>[一云<解愛婁>.], <大武神王>元子. <閔中王>薨, 繼而卽位. 爲人, 暴戾不仁, 不恤國事, 百姓怨之.


모본왕의 이름은 해우[해애루라고도 한다.]이며,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다. 민중왕이 별세하자,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元年, 秋八月, 大水, 山崩二十餘所. 冬十月, 立王子<翊>爲王大子{太子}??.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가을 8월, 홍수가 나서 20여 개 소의 산이 무너졌다.

겨울 10월, 왕자 익을 왕태자로 삼았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동{祭동}>??,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李丙燾. 「後漢書」.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국내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四年, 王日增暴虐, 居常坐人, 臥則枕人. 人或動搖, 殺無赦, 臣有諫者, 彎弓射之.


4년,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하여,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활을 쏘았다.


○六年, 冬十一月, <杜魯>弑其君. <杜魯>, <慕本>人, 侍王左右, 慮其見殺, 乃哭. 或曰: "大丈夫何哭爲? 古人曰: '撫我則后, 虐我則수.' 今王行虐以殺人, 百姓之수也, 爾其圖之." <杜魯>藏刀以進王前, 王引而坐. 於是, 拔力{刀}??害之. 遂葬於<慕本原>, 號爲<慕本王>.

三國史記卷第十四.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겨울 11월, 두노가 임금을 죽였다. 두노는 모본 사람으로서 왕의 근신이었는데, 자기가 해를 입을까 걱정하여 통곡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 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하였다. 이제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는 왕을 처치하라"라고 하였다. 두노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가니 왕이 그를 앉게 하였다. 이 때 두노가 칼을 빼어 왕을 죽였다. 그를 모본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모본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4 끝




三國史記卷第十五.



삼국사기 권 제 15


高句麗本紀第三.

<大祖大王{太祖大王}>??·<次大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고구려본기 제 3

대조대왕, 차대왕.


○<大祖大王{太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瑠璃明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大后{太后}??, <扶餘>人也. <慕本王>薨, 太子不肖, 不足以主社稷, 國人迎<宮>繼立. 王生而開目能視, 幼而岐억. 以年七歲, 大后{太后}??垂簾聽政.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대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고, 아명은 어수이다. 그는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맞이하여 모본왕에 이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태어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출중한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이 때 나이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 蝗害穀.


3년 봄 2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四年, 秋土{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가을 7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어 국경을 개척하였으니,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七年, 夏四月, 王如<孤岸淵>, 觀魚, 釣得赤翅白魚. 秋七月, 京都大水, 漂沒民屋.


7년 여름 4월, 왕이 고안연에 가서 낚시를 하다가 날개가 붉은 백어를 낚았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 갔다.


○十年, 秋八月, 東獵, 得白鹿. 國南, 飛蝗害穀.


10년 가을 8월, 동쪽 지방에서 사냥을 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남쪽 지방에 날아다니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十六年, 秋八月, <曷思王>孫<都頭>, 以國來降. 以<都頭>爲于台. 冬十月, 雷.


16년 가을 8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해왔다.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二十年, 春二月, 遣<貫那部>沛者<達賈>, 伐<藻那>, 虜其王. 夏四月, 京都, 旱.


20년 봄 2월,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遣<桓那部>沛者<薛儒>, 伐<朱那>, 虜其王子<乙音>, 爲古鄒加.


22년 겨울 10월, 왕이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치고,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를 삼았다.


○二十五年, 冬十月, <扶餘>使來, 獻三角鹿·長尾免{兎}??, 王以爲瑞物, 大赦. 十一月, 京都, 雪三尺.


趙炳舜. 『三國史節要』.

25년 겨울 10월,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이 이를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11월, 서울에 눈이 3자 내렸다.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계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46년 봄 3월, 왕이 동쪽 책성으로 가는 도중에,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책성 관리들에게 물품을 정도에 따라 하사하였다.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


50년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五十三年, 春正月, <扶餘>使來, 獻虎, 長丈二, 毛色甚明而無尾. 王遣將入<漢><遼東>, 奪掠六縣. 太守<耿夔>出兵拒之, 王軍大敗. 秋九月, <耿夔>擊破<貊>人.


53년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빛깔은 환하고, 꼬리가 없었다.

왕이 한 나라 요동에 장수를 보내 여섯 개 현을 약탈하게 하였다. 요동 태수 경 기가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왕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 경 기가 맥인을 격파하였다.


○五十五年, 秋九月, 王獵<質山>陽, 獲紫獐. 冬十月, <東海谷>守獻朱豹, 尾長九尺.


55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그 표범의 꼬리가 아홉 자였다.


○五十六年, 春大旱, 至夏赤地. 民饑, 王發使賑恤.


56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붉게 변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五十七年, 春正月, 遣使如<漢>, 賀<安帝>加元服.


57년 봄 정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안제의 성년식을 축하하였다.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토>.[『通鑑』言: "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 寇<玄토>." 不知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59년,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토에 소속되기를 요구하였다.[「통감」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침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속하기를 원하고, 다른 편으로는 침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느 한 쪽이 잘못 기록한 것인가?]


○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62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왕이 남해를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六十四年, 春三月, 日有食之. 冬十二月, 雪五尺.


64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토>, 攻<華麗城>. 秋七月, 蝗雹, 害穀. 八月, 命所司, 擧賢良孝順, 問鰥寡孤獨及老不能自存者, 給衣食.


66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예맥과 함께 한 나라 현토를 습격하여 화려성을 쳤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8월,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선량한 사람, 효성스런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과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토>大守<姚光>·<遼東>太守<蔡諷{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토>·<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隊縣{遼隧縣}>??. <遼東>太守<蔡諷{蔡風}??>,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兵}??曹연<龍端>·兵馬연<公孫포>, 以身한<諷>, 俱沒{歿}??於陣, 死者百餘人. 冬十月, 王幸<扶餘>, 杞{祀}??大后{太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구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토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李丙燾. 「魏志」.李丙燾. 「魏志」.허성도.李丙燾. 「後漢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69년 봄, 한 나라 유주 자사 풍 환·현토 태수 요 광·요동 태수 채 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 환·요 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한 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 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왕이 선비의 군사 8천 명과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 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연 용 단과 병마연 공손 포는 자신의 몸으로 채 풍을 엄호하다가, 채 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 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70년,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한 나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七十一年, 冬十月, 以沛者<穆度婁>爲左輔, <高福??{高福章}>??爲右輔, 令與<遂成>參政事.


趙炳舜. 『三國史節要』.

71년 겨울 10월, 패자 목도루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七十二年, 秋九月庚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漢>朝貢. 十一月, 京都地震.


72년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八十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 與左右宴. 於是, 貫那于台<彌儒>·桓那于台<어支留>·沸流那조衣<陽??{陽神}>??等, 陰謂<遂成>曰: "初, <慕本>之薨也, 太子不肯{肖}??, 群寮欲立王子<再思>, <再思>以老讓子者, 欲使兄老弟及. 今王旣已老矣, 而無讓意, 惟吾子計之." <遂成>曰: "承襲必嫡, 天下之常道也. 王今雖老, 有嫡子在, 豈敢기유乎?" <彌儒>曰: "以弟之賢, 承兄之後, 古亦有之, 子其勿疑." 於是, 左輔沛者<穆度婁>, 知<遂成>有異心, 稱疾不仕.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80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에서 사냥을 하며 좌우의 근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와 비류나조의 양신 등이 남모르게 수성에게 말했다. "초기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다 하여 아들에게 양보하였다. 이는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계승케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왕이 이미 늙었으나 양위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대책을 세우라." 수성이 말했다.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천하의 상도이다. 왕이 지금 비록 연로하다고 하지만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왕위를 넘볼 수 있겠는가?" 미유가 말했다. "아우가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이 옛날에도 있었다. 그대는 이를 의심치말라." 이 때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음을 알고, 병을 구실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八十六年, 春三月, <遂成>獵於<質>陽, 七日不歸, 戱樂無度. 秋七月, 又獵<箕丘>, 五日乃反. 其弟<伯固>諫曰: "禍福無門, 惟人所召. 今子以王弟之親, 爲百寮之首, 位已極矣, 功亦盛矣. 宜以忠義存心, 禮讓克己, 上同王德, 下得民心. 然後富貴不離於身, 而禍亂不作矣. 今不出於此, 而貪樂忘憂, 竊爲足下危之." 答曰: "凡人之情, 誰不欲富貴而歡樂者哉, 而得之者, 萬無一耳. 今吾居可樂之勢, 而不能肆志, 將焉用哉." 遂不從.


86년 봄 3월, 수성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며 7일 동안 돌아오지 않고, 즐기기만 할 뿐 행동에 절도가 없었다.

가을 7월, 수성이 또 기구에 사냥가서 5일 만에 돌아왔다. 그의 아우 백고가 간했다. "화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 들이는 것이다. 지금 형은 왕의 아우라는 친족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는 이미 지극히 높고, 공로도 또한 훌륭하다. 따라서 마땅히 충성과 의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예절과 겸양으로 욕망을 억제하여, 위로는 왕의 덕과 같도록 노력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부귀가 형을 떠나지 않고 화란이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걱정을 모르고 있으니, 형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수성이 대답했다. "사람의 감정으로 누구인들 부귀와 환락을 원하지 않으랴만 이것을 얻는 자는 만 명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내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끝내 백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九十年, 秋九月, <丸都>地震. 王夜夢, 一豹齧斷虎尾. 覺而問其吉凶, 或曰: "虎者, 百獸之長; 豹者, 同類而小者也. 意者王之族類, 殆有謀絶大王之後者乎?" 王不悅, 謂右輔<高福章>曰: "我昨夢有所見, 占者之言如此, 爲之奈何?" 答曰: "作不善, 則吉變爲凶; 作善, 則災反爲福. 今大王憂國如家, 愛民如子, 雖有小異, 庸何傷乎?"


90년 가을 9월, 환도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끊었다. 왕이 잠을 깨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모든 짐승의 어른이며, 표범은 호랑이의 한 종류로서 작은 짐승이다. 아마도 왕의 친족 가운데 대왕의 후대를 끊으려고 획책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왕이 기분이 좋치않아 우보 고 복장에게 "내가 어제 밤 꿈에 본 것에 대하여, 점치는 자의 말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었다. 고 복장이 대답하였다. "안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것도 변하여 나쁜 것이 되고, 좋은 일을 하면, 재앙도 도리어 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 일을 집안 일과 같이 걱정하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사소한 이변이 있다한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九十四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之下, 謂左右曰: "大王老而不死, 吾齒卽將暮矣, 不可待也. 惟願左右, 爲我計之." 左右皆曰: "敬從命矣." 於是, 一人獨進曰: "向, 王子有不祥之言, 而左右不能直諫, 皆曰敬從命者, 可謂姦且諛矣. 吾欲直言, 未知尊意如何?" <遂成>曰: "子能直言, 藥石也, 何疑之有?" 其人對曰: "今大王之賢, 內外無異心, 子雖有功, 率群下姦諛之人, 謀廢明上, 此何異將以單縷, 繫萬鈞之重而倒曳乎? 雖復愚人, 猶知其不可也. 若王子改圖易慮, 孝順事上, 則大王深知王子之善, 必有揖讓之心, 不然則禍將及也." <遂成>不悅. 左右妬其直, 讒於<遂成>曰: "王子以大王年老, 恐國祚之危, 欲爲後圖, 此人妄言如此, 我等惟恐漏洩, 以致患也, 宜殺以滅口." <遂成>從之.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大守{太守}??妻子. 冬十月, 右輔<高福章>言於王曰: "<遂成>將叛, 請先誅之." 王曰: "吾旣老矣, <遂成>有功於國, 吾將禪位, 子無煩慮!" <福章>曰: "<遂成>之爲人也, 忍而不仁. 今日受大王之禪, 則明日害大王之子孫. 大王但知施惠於不仁之弟, 不知貽患於無辜之子孫(+乎)??, 願大王熟計之."(+王不聽)?? 十二月, 王謂<遂成>曰: "吾旣老, 倦於萬機. 天之曆數在汝躬, 況汝內參國政, 外摠軍事, 久有社稷之功, 允塞臣民之望, 吾所付託, 可謂得人. 作{汝}??其卽位, 永孚于休!" 乃禪位, 退老於別宮, 稱爲<大祖大王>.[『後漢書』云: "<安帝><津光{建光}>??元年, <高句麗>王<宮>死, 子<遂成>立. <玄토>太守<姚光>上言: 欲因其喪, 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陳忠>曰: '<宮>前桀힐, <光>不能討, 死而擊之, 非義也. 宜遣吊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 <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案『海東古記』: "<高句麗><國祖王><高宮>以<後漢><津武{建武}>??二十九年, 癸巳{癸丑}??卽位, 時年七歲, 國母攝政. 至<孝桓帝><本初>元年丙戌, 遜位讓母弟<遂成>, 時, <宮>年一百歲, 在位九十四年, 則<建光>元年, 是<宮>在位第六十九年." 則『漢書』所記, 與『古記』抵오不相符合. 豈<漢書>所記誤耶?]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今西龍.『북한본』.李丙燾.

「북한본」.

94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 아래서 사냥하면서 좌우의 근신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나도 나이가 많으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꾸미기 바란다." 근신들이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누군가가 혼자 나서서 "조금 전에 당신은 자신에게 결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올바른 말로 말리지 않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당신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수성이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이 될 터인데, 무엇을 의심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우리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반역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비록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 현명한 임금을 폐위시키려고 하니, 이것이 한 오라기의 실로 1만 균의 물건을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충효와 공손함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당신의 어진 마음을 깊이 헤아려, 반드시 당신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좌우의 근신들이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소하였다. "대왕이 나이 많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녕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환을 초래할까 염려된다. 따라서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수성이 그 말을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 나라 요동 서쪽 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겨울 10월, 우보 고 복장이 왕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처형하소서." 왕이 말했다. "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내가 그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복장이 말했다.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아마도 오늘 대왕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죄없는 자손들에게 후환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12월, 왕이 수성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늙어서 모든 일이 힘들구나.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으며, 또한 네가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에 대한 일을 총괄하여, 오랫 동안 나라에 공로를 쌓아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니, 내가 의지하고 일을 맡길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왕위에 올라 길이 경사를 누릴지어다!" 왕은 곧 왕위를 내어주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이를 대조대왕이라 하였다.[「후한서」에는 "안제 건광 원년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현토 태수 요광이 왕이 죽은 것을 기회로 삼아 군사를 출동하여 치고 싶다고 안제에게 말하니 모두가 찬성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전에는 궁이 훌륭하고 영명하여 요광이 칠 수 없었는데, 그가 죽었다 하여 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예전의 죄과를 묻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니, 안제가 이 말대로 하였다. 이듬해에 수성이 한 나라 포로를 돌려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고기」에는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 계사에 즉위하니, 이 때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 병술에 이르러, 동복 아우 수성에게 왕위를 내어주니 이 때 궁의 나이가 1백세로서, 재위 94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건광 원년은 곧 궁의 재위 69년에 해당한다. 「한서」의 기록과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혹시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닌가?]


○<次大王>, 諱<遂成>, <大祖大王>同母弟也. 勇壯有威嚴, 小仁慈. 受<大祖大王>推讓, 卽位, 時年七十六.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이며 대조왕의 동복 아우이다. 그는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한 마음은 적었다. 대조대왕이 물려 준 자리를 받아 즉위하엿다. 이 때 나이 76세였다.


○二年, 春二月, 拜貫那沛者<彌儒>爲左輔. 三月, 誅右輔<高福章>. <福章>臨死嘆曰: "痛哉, 寃乎! 我當時爲先朝近臣, 其可見賊亂之人, 默然不言哉? 恨先君不用吾言, 以至於此. 今君甫陟大位, 宜新政敎以示百姓, 而以不義殺一忠臣. 吾與其主{生}??於無道之時, 不如死之速也." 乃卽刑. 遠近聞之, 莫不憤惜. 秋七月, 左輔<穆度婁>稱疾退老, 以□那于台{桓那于台}??<??支留{어支留}>??爲左輔, 加爵爲大主簿. 冬十月, <沸流那><陽神>爲中畏大夫, 加爵爲于台, 皆王之故舊. 十一月, 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관나 패자 미유를 좌보로 임명하였다.

3월, 우보 고 복장을 죽였다. 복장이 죽을 때 탄식하며 말했다. "슬프고 원통하다! 내가 전일에 선왕의 근신이었으니,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보고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으랴? 전 왕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한스럽다. 이제 임금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새로운 정치와 교화를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도, 정의에 어긋나게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한다. 내가 이와 같은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고 복장은 곧 형을 받았다. 원근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7월, 좌보 목도루가 병을 구실로 퇴직하자 환나부 우태 어지류를 좌보로 삼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라 하였다.

겨울 10월, 비류나부 양신을 중외 대부로 삼고, 작위를 올려 우태라 하니, 그들은 모두 왕의 옛친구였다.

11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夏四月, 王使人, 殺<大祖大王{太祖大王}>??元子<莫勤>, 其弟<莫德>恐禍連及, 自縊.

○論曰: 昔<宋><宣公>不立其子<與夷>, 而立其弟<繆公{穆公}>??, 小不忍, 亂大謀, 以致累世之亂, 故『春秋』 '大居正'. 今<大祖王>不知義, 輕大位以授不仁之弟, 禍及一忠臣·二愛子, 可勝歎耶.

秋七月, 王田于<平儒原>, 白狐隨而鳴. 王射之不中. 問於師巫, 曰: "狐者, 妖獸非吉祥, 황白其色, 尤可怪也. 然天不能諄諄其言, 故示以妖怪者, 欲令人君恐懼修省以自新也. 君若修德, 則可以轉禍爲福." 王曰: "凶則爲凶, 吉則爲吉, 爾旣以爲妖, 又以爲福, 何其誣耶?" 遂殺之.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左傳」.

3년 여름 4월, 왕이 사람을 시켜 대조대왕의 맏아들 막근을 죽이자, 그의 아우 막덕은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매어 자결하였다.

저자의 견해 : 옛날 송 선공이 그의 아들 여이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아우 목공을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작은 인정에 이끌려 국가의 대계를 어지럽힌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여러 세대에 걸친 환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춘추에서는 "정도(正道)에 처하는 것을 가장 크게 여기라"라고 말하였다. 이제 대조왕이 정의를 알지 못하고, 중대한 왕위를 가볍게 여겨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넘김으로써, 화란이 한 명의 충신과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으랴?

가을 7월, 왕이 평유원에서 사냥하는데, 흰 여우가 따라 오면서 울었다. 왕이 여우를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왕이 사무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여우는 원래 요사스럽고, 상서롭지 못한 짐승인데, 더구나 그 빛깔이 희니 더욱 괴이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간절한 뜻을 말로 전할 수 없으므로 요괴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니,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고 반성할 줄 알게 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덕을 닦으면,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흉하면 흉하다 하고, 길하면 길하다 할 것이지, 이미 요사스러운 것이라고 말해놓고 다시 복이 된다고 하니, 이 무슨 거짓말인가?" 왕은 마침내 그를 죽였다.


○四年, 夏四月丁卯晦, 日有食之. 五月, 五星聚於東方. 日者畏王之怒, 誣告{王}??曰: "是君之德也, 國之福也." 王喜. 冬十二月, 無氷.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그믐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5월, 오성이 동방에 모였다. 천기를 맡은 관원이 왕이 노할까 두려워 하여 거짓으로 "이는 임금의 덕이며, 나라의 복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기뻐하였다.

겨울 12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八年, 夏六月, 隕霜. 冬十二月, 雷, 地震. 晦, 客星犯月.


8년 여름 6월, 서리가 내렸다.

겨울 12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고, 그믐날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星패于北斗. 夏五月甲戌晦, 日有食之.


13년 봄 2월, 혜성이 북두에 나타났다.

여름 5월 그믐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年, 春正月晦, 日有食之. 三月, <大祖大王>薨於別宮, 年百十九歲. 冬十月, 椽那조衣<明臨답夫>, 因民不忍, 弑王. 號爲<次大王>.

三國史記卷第十五.


20년 봄 정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월, 대조대왕이 별궁에서 별세하니, 나이 119세였다.

겨울 10월,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하여 왕을 죽였다. 호를 차대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5 끝




三國史記卷第十六.



삼국사기 권 제 16


高句麗本紀第四.

<新大王>·<故國川王>·<山上王>.


고구려본기 제 4

신대왕, 고국천왕, 산상왕.


○<新大王>, 諱<伯固>[固, 一作句.], <大祖大王>之季弟. 儀表英特, 性仁恕. 初, <次大王>無道, 臣民不親附, 恐有禍亂, 害及於己, 遂遯於山谷. 及<次大王>被弑, 左輔<어支留>與群公議, 遣人迎致. 及至, <어支留>궤獻國璽曰: "先君不幸棄國, 雖有子, 不克有國家. 夫{天}??人之心, 歸于至仁, 謹拜稽首, 請卽尊位." 於是, 俯伏三讓而後卽位. 時年七十七歲.


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대왕의 이름은 백고['고(固)'를 '구(句)'라고도 한다.]이며,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이다. 의표가 영특하고 성품이 인자하며 너그러웠다. 선왕인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가까이 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고는 환란이 생기면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산골짜기로 도망했었다. 차대왕이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가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백고를 모셔오게 하였다. 백고가 돌아오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옥새를 바치면서 말했다. "선왕이 불행하게 돌아가시고, 비록 그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맡길 수 없으며, 인심이 인자하신 당신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오니, 청컨대 존위에 오르소서." 이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가 77세였다.


○二年, 春正月, 下令曰: "寡人生첨王親, 本非君德, 向屬友于之政, 頗乖貽厥之謨. 畏害難安, 離群遠遯, 계聞凶計{訃}??, 但極哀최. 豈謂百姓樂推, 群公勸進? 謬以묘未{末}??, 據于崇高, 不敢遑寧, 如涉??{淵}??海. 宜推恩而及遠, 遂與衆而自新, 可大赦國內." 國人旣聞赦令, 無不歡呼慶변, 曰: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初, <明臨답天{明臨答夫}>??之難, <次大王>太子<鄒安>逃竄, 及聞嗣王赦令, 卽詣王門, 告曰: "嚮, 國有災禍, 臣不能死, 遯于山谷, 今聞新政, 敢以罪告. 若大王據法定罪, 棄之市朝, 惟命是聽, 若賜以不死, 放之遠方, 則生死肉骨之惠也, 臣所願也, 非敢望也." 王卽賜<狗山瀨>·<婁豆어{婁豆谷}>??二所, 仍封爲<讓國君>. 拜<답夫{答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북한본』.

2년 봄 정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도 왕의 근친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의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앞서 형제 사이에 정권을 맡긴 것은 왕위를 자손에게 전하는 법도에 대단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마음이 편치 못했으며, 이에 따라 사람 사는 곳을 떠나 먼 곳에 은둔했다가, 선왕의 흉보를 듣고 슬픈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으니, 오늘 백성들이 나를 즐거이 추대하며 여러 대신들이 왕위를 권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그릇되게도 못난 자격으로 거룩한 자리에 앉게 되니, 편치 못함이 마치 깊은 물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혜를 먼 곳까지 펴야 할 것이며, 대중들과 더불어 나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니, 전국의 죄수들을 대사하라!" 백성들이 대사령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경하하여 "크도다! 새 임금의 은덕이여!"라고 말하였다. 애초에 명림답부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이 도망하였다가 새 왕의 대사령을 듣고 곧 궐문에 이르러 고하였다. "지난번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 제가 죽지 못하고 산곡으로 도망하였다가, 이제 새로운 정치가 베풀어졌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의 죄를 말씀드립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의하여 죄를 정하여 주시면, 시체를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라도 받겠으며, 만약 죽음을 면하게 하여 먼 곳으로 추방하신다면, 죽을 사람을 살리는 은혜이니, 이는 저의 원하는 바이나 감히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왕이 그에게 구산뢰·누두어 두 곳을 주고, 양국군으로 봉하였다. 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패자로 삼아, 내외의 병마사를 맡게 하고, 동시에 양맥 부락을 다스리게 하였다. 좌보와 우보를 국상으로 고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杞{祀}??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漢><玄토郡>大守{太守}??<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토>.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한 나라 현토군 태수 경 림이 침입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자, 왕이 자진하여 항복하고 현토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토>大守{太守}??<公孫度>, 討<富山>賊.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왕이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 태수 공손 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치게 하였다.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群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답夫{答夫}>??曰: "不然. <漢>, 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王然之, 영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답夫{答夫}>??帥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답夫{答夫}>??<坐原>及<質山>, 爲食邑.


『북한본』.『북한본』.『북한본』.

8년 겨울 11월, 한 나라에서 대병을 일으켜 우리를 향하여 왔다. 왕이 군신들에게 공격과 수비의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적은 우리를 겁쟁이라 하여 자주 침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 와도 막아낼 수 있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을지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그러나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습니다. 이제 그들이 강병으로 멀리까지 쳐들어 오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병력이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은 자는 수비해야한다는 것이 병가의 법도입니다. 이제 한 나라는 천리길이나 되는 먼 곳에서 군량미를 수송해야 하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밖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성밖의 들판에 곡식 한 알, 사람 하나없이 비워 놓고 기다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림과 피곤으로 인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써 육박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한 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리다 못하여 퇴각하였다. 이 때 답부가 수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전투를 벌리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十二年, 春正月, 群臣請立太子. 三月, 立王子<男武>爲王太子.


12년 봄 정월, 군신들이 태자를 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3월, 왕자 남무를 왕태자로 삼았다.


○十四年,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14년 겨울 10월 그믐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九月, 國相<답天{答夫}>??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乃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冬十二月, 王薨, 葬於<故國谷>, 號爲<新大王>.


『북한본』.

15년 가을 9월, 국상 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례를 지내고, 20여 호의 묘지기를 두었다.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곡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신대왕이라 하였다.


○<故國川王>[或云<國襄>.], 諱<男武>[或云<伊夷謨{伊夷模}>??.],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消奴加{涓奴加}>??, 各將下戶三萬餘口, 詣<公孫康>降, 還住<沸流水>上. 王身長九尺, 姿表雄偉, 力能강鼎, 리事聽斷, 寬猛得中.


李丙燾. 「魏志」.李丙燾. 「魏志」.

고국천왕[혹은 국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예전에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추대하여 왕을 삼았다. 한 헌제 건안 초기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 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왕은 키가 9척이오, 풍채가 웅장하며 힘이 세었고, 일의 처리에 있어서 관용과 예리함을 알맞게 겸비하였다.


○二年, 春二月, 立妃<于>氏爲王后. 后, 提那部{연那部}??<于素>之女也. 秋九月, 王如<卒本>, 杞{祀}??始祖廟.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왕비 우씨를 왕후로 삼으니, 그는 제나부 우소의 딸이다.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四年, 春三月甲寅夜, 赤氣貫於太微, 如蛇. 秋七月, 星패于太微.


4년 봄 3월 갑인일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 성좌를 관통하였는데, 그 형상이 뱀과 같았다.

가을 7월,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六年, <漢><遼東>太守興師, 伐我. 王遣王子<계須>拒之, 不克. 王親帥精騎往, 與<漢>軍戰於<坐原>, 敗之. 斬首山積.


6년, 한 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공격하였다. 왕이 왕자 계수를 파견하여 대항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八年, 夏四月乙卯, 熒惑守心. 五月壬辰晦, 日有食之.


8년 여름 4월 을묘에 형혹성이 심성 성좌에 머물렀다.

5월 그믐 임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二年, 秋九月, 京都雪六尺. 中畏大夫沛者<於비留>·評者<左可慮>, 皆以王后親戚, 執國權柄. 其子弟幷恃勢驕侈, 掠人子女, 奪人田宅, 國人怨憤. 王聞之, 怒欲誅之. <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12년 가을 9월, 서울에 눈이 여섯 자 내렸다.

중외 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자제들이 모두 그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딸을 겁탈하고, 남의 토지와 주택을 갈취하였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처형하려 하니, 좌가려 등이 네 연나와 함께 모반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左可慮>等)?? 聚衆, 攻王都. 王徵幾{畿}??內兵馬, 平之. 遂下令日{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令汝四部(郡}??,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都}??<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록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도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才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 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閒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冬十月,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庶績之疑{凝}??, 子之功也." 乃拜爲大使者.

○論曰: 古先哲王之於賢者也, 立之無方, 用之不惑, 若<殷><高宗>之<傅說>, <蜀>先主之<孔明>, <秦><符堅{부堅}>??之<王猛>, 然後賢在位, 能在職, 政敎修明而國家可保. 今王決然獨斷, 拔<巴素>於海濱, 不撓衆口, 置之百官之上, 而又賞其擧者, 可謂得先王之法矣.


李丙燾.『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13년 여름 4월, 좌가려가 무리를 모아 서울을 침공했다. 왕은 서울 부근의 병마를 징발하여 그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근자에 관직이 정실에 따라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아서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나의 왕실을 동요시키고 있다. 이는 내가 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의 4부에 명령하노니, 각각 자기 하부에 있는 현명한 자들을 천거하라!"

이에 4부에서는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다. 왕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국정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자손인데, 성질이 강직하고 지혜로우며 사려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등용되지 못하고 농사로 생계를 삼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로써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 대부로 임명하고 우태의 작위를 주고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 선대의 왕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처하였으나, 덕과 재주가 없어 정치를 잘 할 수 없었다. 선생은 재능과 총명을 감추고,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려 이곳에 왔으니, 이는 나의 기쁨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행복이다. 그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진정을 다하여 주기바란다."

파소는 비록 나라에 공헌하고 싶었으나, 맡은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우둔한 저로서는 감히 왕의 엄명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위업을 달성하게 하소서."

왕이 그 뜻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조신과 외척들은, 을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대신들을 이간질한다 하여 미워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말했다.

"귀한 자나 천한 자를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징벌하리라."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도이다. 이제 왕께서 나를 후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전일의 은거를 생각하랴!"라고 말하고,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안류에게 말하기를 "만일 그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데리고 나라를 함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일이 정리된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라 하고, 그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저자의 견해 : 옛날의 명철한 임금들은 현명한 자를 등용함에 상례를 따지지 않았으며, 등용한 후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은 나라 고종은 부열에게, 촉 나라 유비는 공명에게, 진 나라 부견은 왕맹에게 그러하였다. 이러한 연후에야 직위에서 현명함과 능력이 발휘되어 정치가 개선되고 교화가 이루어져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왕이 결연히 혼자 용단을 내려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발탁하고, 중론에 구애받지 않고 그를 백관의 윗자리에 임용하였으며, 또한 천거한 자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가히 옛 임금들의 법도를 체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十六年, 秋七月, 墮{隕}??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冬十月, 王전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 對曰: "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 王曰: "嗟呼!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 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少,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길 가에 앉아 우는 자를 보고 우는 이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빈궁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님을 봉양하였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이 없으므로, 한 되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라 하고,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이어서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을 풀어, 백성들의 식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있게 구제곡을 빌려 주었다가,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十九年, <中國>大亂, <漢>人避亂來投者甚多, 是<漢><獻帝><建安>二年也. 夏五月, 王薨. 葬于<故國川原>, 號爲<故國川王>.


19년,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 피난하여 귀순하는 한 나라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이 때가 한 헌제 건안 2년이었다.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천 언덕에 장사 지내고, 호를 고국천왕이라 하였다.


○<山上王>, 諱<延優>[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也. 『魏書』云: "<朱蒙>裔孫<宮>, 生而開目能視, 是爲<大祖{太祖}>??. 今王是<大祖{太祖}>??曾孫, 亦生而視人, 似曾祖<宮>. <高句麗>呼'相似'爲'位', 故名<位宮>云." <故國川王>無子, 故<延優>嗣立. 初, <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夜往王弟<發기>宅, 曰: "王無後, 子宜嗣之." <發기>不知王薨, 對曰: "天之曆數有所歸, 不可輕議. 황婦人而夜行, 豈禮云乎?" 后慙, 便往<延優>之宅. <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기>作{年}??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 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과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 <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群臣, 立<延優>爲王. <發기>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呼曰: "兄死弟及, 禮也. 汝越次簒奪, 大罪也, 宜速出. 不然則誅及妻노." <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發기>者. <發기>知難, 以妻子奔<遼東>. 見大守{太守}??<公孫度{公孫康}>??, 告曰: "某, <高句麗>王<男武>之母弟也. <男武>死, 無子, 某之弟<延優>與嫂<于>氏謀, 卽位以廢天倫之義. 是用憤에, 來投上國, 伏願假兵三萬, 令擊之, 得以平亂." <公孫度>從之. <延優>遣弟<계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계須>自爲先鋒追北, <發기>告<계須>曰: "汝今忍害老兄乎?" <계須>不能無情於兄弟, 不敢害之, 曰: "<延優>不以國讓, 雖非義也, 爾以一時之憤, 欲滅宗國, 是何意耶? 身沒之後, 何面目以見先人乎?" <發기>聞之, 不勝慙悔, 奔至<裴川>, 自刎死. <계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 王悲喜, 引<계須>內中宴, 見以家人之禮, 且曰: "<發기>請兵異國, 以侵國家, 罪莫大焉. 今子克之, 縱而不殺, 足矣, 及其自死, 哭甚哀, 反謂寡人道乎?" <계須>초然銜淚而對曰: "臣今請一言而死." 王曰: "何也?" <계須>曰: "王后雖以先王遺命立大王, 大王不以禮讓之, 曾無兄弟友恭之義. 臣欲成大王之美, 故收屍殯之, 豈圖緣此, 逢大王之怒乎? 大王若以仁忘惡, 以兄喪禮葬之, 孰謂大王不義乎? 臣旣以言之, 雖死猶生. 請出受誅有司." 王聞其言, 前席而坐, 溫顔慰諭曰: "寡人不肖, 不能無惑, 今聞子之言, 誠知過矣. 願子無責." 王子拜之, 王亦拜之, 盡歡而罷. 秋九月, 命有司, 奉迎<發기>之喪, 以王禮葬於<裴嶺>. 王本因<于>氏得位, 不復更娶, 立<于>氏爲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志」.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위궁이라고도 한다.]이며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위서」에는 "주몽의 후손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었는데 이가 태조이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으로서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알아 보는 것이 증조 궁과 같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다는 말을 '위(位)'라고 하므로, 위궁으로 이름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연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처음 고국천왕이 별세하였을 때, 왕후 우씨는 왕이 죽은 사실을 비밀로 하여 발표하지 않고, 밤에 왕의 아우 발기의 집에 가서 말했다.

"왕이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왕의 뒤를 이어야겠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운수는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출입하는 것이 어찌 예절에 맞는다 하리오."

왕후가 부끄러워하며 곧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문에 나와 왕후를 맞아들여 자리에 앉히고 잔치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했다.

"대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맏아우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되겠으나, 그는 나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무례하고 오만하며 예절없이 대하였다. 이에 따라 아주버니에게 온 것이다."

이 때 연우는 예절을 더욱 극진히 하여 직접 칼을 들고 왕후에게 고기를 베어주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허리띠를 풀어 그의 다친 손가락을 감싸주었다. 왕후가 환궁하려 할 때 연우에게 "밤이 깊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가 염려되니, 그대가 나를 대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연우가 그렇게 하였다. 왕후는 연우의 손을 잡고 대궐로 들어갔다.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왕후가 선왕의 유명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군신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삼게 하였다. 발기가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로 왕궁을 포위하고 외쳤다.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이거늘, 네가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죄악이니 빨리 나오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처자들까지 죽이겠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백성들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는 성사되기 어려움을 알고, 처자들과 함께 요동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요동 태수 공손 도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동복 아우이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는데, 나의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다. 나는 이에 분개하여 상국으로 귀순하여 왔다. 원컨대 군사 3만 명을 빌려주어 연우를 치게 하면, 고구려의 분란을 평정할 수 있겠다."

공손 도가 그 말을 들어 주었다. 연우가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에서 오는 군사를 막으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도망가는 군사를 추격하였다. 발기가 계수에게 말했다.

"네가 오늘 감히 늙은 형을 죽이겠는가?"

계수가 형제간의 정의를 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말했다.

"연우가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정의로운 행동은 아니지만, 형이 일시의 분한 생각을 못이겨 나라를 멸망시키려함은 무슨 뜻인가?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려는가?"

발기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이길 수 없어 배천으로 도주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계수가 슬피 울고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하고 돌아왔다. 왕은 슬퍼하면서도 일면 기뻐하며, 계수를 궐내로 불러 들여 잔치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하면서 말했다.

"발기가 타국에 청병하여 국가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이제 그대가 이기고도, 발기를 풀어주어 죽이지 않은 것만 하여도 족한 일인데, 그가 자결한 것을 대단히 애통해하니, 그대는 도리어 나를 무도하다고 생각하는것이 아닌가?"

계수가 서글프게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하였다.

"제가 지금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왕이 "무슨 말인가?"하고 물으니 계수가 말했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대왕께서는 예로써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미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손해야 한다는 의리는 없어진 것입니다. 저는 대왕의 미덕을 이루고자, 짐짓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대왕의 노여움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약 어진 마음을 베풀어 발기의 죄악을 잊어 버리고, 형에 대한 상례를 갖추어 장례지내 주신다면, 누가 대왕이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제가 이미 이 말을 하였으니 죽음을 당하여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나아가 형리의 처형을 받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 앉으며, 따뜻한 표정으로 위로하여 말했다.

"내가 불초하여 미혹됨이 없을 수 없었는데, 이제 너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잘못을 알게 되었구나. 너는 나를 탓하지 말라."

동생이 왕에게 절하고, 왕도 그에게 또한 절을 하여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가을 9월, 관리에게 명하여 발기의 상례를 지내되, 왕례로써 배령에 장사하게 하였다.

왕이 원래 우씨에 의하여 왕위를 얻게 되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二年, 春二月, 築<丸都城>. 夏四月, 赦國內二罪已下.


2년 봄 2월, 환도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전국의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三年, 秋九月, 王전于<質>陽.


3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七年, 春三月, 王以無子, 禱於山川, 是月十五夜夢, 天謂曰: "吾令汝少后生男, 勿憂." 王覺語群臣曰: "夢天語我, 諄諄如此, 而無少后, 奈何?" <巴素>對曰: "天命不可測, 王其待之." 秋八月, 國相<乙巴素>率{卒}??, 國人哭之慟. 王以<高優婁>爲國相.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3월, 왕이 아들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였는데, 이 달 15일 밤 꿈에 하늘이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잠을 깨어 군신에게 말하기를 "꿈에 하늘이 나에게 이와 같이 간곡하게 말하였는데, 소후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니, 을파소가 대답하였다. "천명이란 헤아릴 수 없으니 왕께서는 기다리소서."

가을 8월, 국상 을파소가 죽으니 온 백성이 통곡하였다. 왕이 고우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十二年, 冬十(-一)??月, 郊豕逸. 掌者追之, 至<酒桶村>, 척촉不能捉{獲}??. 有一女子, 年二十許, 色美而艶, 笑而前執之, 然後追者得之. 王聞而異之, 欲見其女, 微行夜至女家. 使侍人說之, 其家知王來不敢拒. 王入室, 召其女, 欲御之. 女告曰: "大王之命, 不敢避, 若幸而有子, 願不見遺." 王諸{諾}??之. 至丙夜, 王起還宮.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겨울 11월, 교제에 잡을 돼지가 달아났다. 관리하는 자가 쫓아가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돼지가 이리저리 달뛰어 잡지 못하였다. 이 때 나이가 20세 가량 되고 얼굴이 아름다운 한 여자가 웃으면서 앞으로 걸어와 돼지를 잡아주어 쫓던 자가 돼지를 얻을 수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왕은 그 여자가 보고 싶어 평복을 입고, 밤에 여자의 집에 갔다. 시종을 시켜 말하니, 그 집에서 왕이 온 줄 알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이 방으로 들어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려 하였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대왕의 명령을 감히 피할 수 없으니, 만약 아이가 있게되면 버리지 말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승낙하였다. 자정이 되자 왕이 일어나 환궁하였다.


○十三年, 春三月, 王后知王幸<酒桶村>女, 妬之, 陰遣兵士殺之. 其女聞知, 衣男服逃走. 追及欲害之, 其女問曰: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兵士不敢害, 來以女所言告之. 王后怒, 必欲殺之, 而未果. 王聞之, 乃復幸女家, 問曰: "汝今有娠, 是誰之子?" 對曰: "妾平生不與兄弟同席, 況敢近異姓男子乎. 今在腹之子, 實大王之遺體也." 王慰藉贈與, 甚厚. 乃還告王后, 竟不敢害. 秋九月, <酒桶>女生男. 王喜曰: "此天賚予嗣胤也." 始自郊豕之事, 得以幸其母, 乃名其子曰<郊체>, 立其母爲小后. 初, 小后母孕未産, 巫卜之曰: "必生王后." 母喜, 及生, 名曰<后女>. 冬十月, 王移都於<九都{丸都}>??.


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봄 3월, 왕이 주통촌 여자에게 갔던 사실을 왕후가 알고, 그 여자를 질투하여 남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 하였으나, 그 여자가 이 소문을 듣고 남장을 하고 도주하였다. 병사들이 그 여자를 추격하여 죽이려 하니, 그 여자가 물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죽이려 하니, 이것이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이제 나의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이 아이는 왕의 혈육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좋으나 왕자도 죽일 것인가?"

병사들이 그 여자를 감히 죽이지 못하고 돌아와, 그 여자의 말을 보고하였다. 왕후가 노하여 기어코 죽이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곧 다시 그 여자의 집에 가서 묻기를 "네가 지금 임신한 것이 누구의 아이냐?"라 하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제가 평생에 형제와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는데, 황차 성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했겠습니까? 지금 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진실로 대왕의 혈육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여자를 위로하고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곧 돌아와 왕후에게 말하니 왕후가 끝내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하였다.

가을 9월, 주통촌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후계자이다"라고 하였다. 교제에 잡을 돼지로 말미암아 그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교체라 하고, 아이의 어머니를 소후로 삼았다. 처음 소후의 어머니가 그녀를 배었을 때 무당이 점을 치고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으리라"하여 어머니가 기뻐하였고, 아이를 낳게 되자 후녀라고 이름지었었다.

겨울 10월, 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十七年, 春正月, 立<郊체>王大子{太子}??.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교체를 왕태자로 삼았다.


○二十一年, 秋八月, <漢><平州>人<夏瑤>, 以百姓一千餘家來投, 王納之, 安置<柵城>. 冬十月, 雷, 地震. 星學{패}??于東北.


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가을 8월, 한 나라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천여 호를 데리고 귀순해왔다. 왕이 그를 받아 들여 책성에 배치하였다.

겨울 10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二十三年, 春二月壬子晦, 日有食之.


23년 봄 그믐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四年, 夏四月, 異鳥集于王庭.


24년 여름 4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二十八年, 王孫<然弗>生.


28년, 왕의 손자 연불이 태어났다.


○三十一年, 夏五月, 王薨. 葬於<山上陵>, 號爲<山上王>.

三國史記卷第十六.


31년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산상릉에 장례지내고, 호를 산상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6 끝




三國史記卷第十七.



삼국사기 권 제 17


高句麗本紀第五.

<東川王>·<中川王>·<西川王>·<烽上王>·<美川王>.


고구려본기 제 5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東川王>[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체>,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렵. 王還曰: "馬無렵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동천왕[동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우위거이며, 아명은 교체이고,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 사람으로서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사기에는 그의 가족과 성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왕은 전왕 17년에 태자가 되었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심정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왕이 유람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잘랐다. 왕이 돌아와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라고 말하였다. 왕후가 또한 시종으로 하여금 밥상을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는데, 왕은 역시 성내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三月, 封<于>氏爲王太后.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우씨를 왕태후로 봉했다.


○四年, 秋七月, 國相<高優婁>卒, 以于台<明臨於漱>爲國相.


4년 가을 7월, 국상 고우루가 죽었다. 우태 명림 어수를 국상으로 삼았다.


○八年, <魏>遣使和親. 秋九月, 大后{太后}??<于>氏薨. 大后{太后}??臨終遺言日{曰}??: "妾失行, 將何面日{目}??見<國壤>於地下? 若群臣不忍제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川上{山上}>??, 不勝憤에,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위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하였다. 무당이 말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하여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네가 조정에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10년 봄 2월, 오 나라의 왕인 손 권이 사신 호 위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 7월에 그의 목을 베어 위 나라에 전하였다.


○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11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의 연호가 개정된 것을 축하하였다. 이 때가 경초 원년이었다.


○十二年, <魏>太傅{太尉}??<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李丙燾. 「魏志」.

12년, 위 나라 태부 사마 선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공손 연을 토벌했다. 왕이 주부 대가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16년,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격파하였다.


○十七年, 春正月, 立王子<然弗>爲王太子, 赦國囚{內}??.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왕자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19년 봄 삼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쳤다. 왕이 그를 후궁으로 맞이 하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토>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록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기>, 追王. 王奔<南??沮{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沮{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호<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전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록>·<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毋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密友紐由傳.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가을 8월, 위 나라가 유주 자사 관구 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위 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 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왕은 곧 철기 5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관구 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사망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하였다.

겨울 10월, 관구 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 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주하다가 죽령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모두 없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의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방어하면, 왕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들어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왕은 사잇길로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호위토록 하였다. 왕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만약 밀우를 찾아 올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 유옥구가 앞으로 나와서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전장으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등에 업어 왔다. 왕은 자신의 다리에 밀우를 눕혔다. 밀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생하였다. 왕은 다시 사잇길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 나라 군사를 위로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되면, 그 때 왕께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 나라 군중에 들어가서 항복을 가장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이제 왕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하여 귀국의 법관에게 죽음을 맡기려 하는데, 저를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 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 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 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 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왕은 귀국하여 공적을 평가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하고, 유유에게는 구사자를 추증하고, 또한 유유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이 전쟁 시에 위 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

예전에, 왕의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 나라 장수 관구 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하였다.[「괄지지」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에는 "사마 의가 공손 연을 치자, 고구려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 검이 와서 침노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 때의 사실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왕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고도 말한다.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 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22년 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원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일에 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다.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 곳을 시원이라고 불렀다.


○<中川王>[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 儀表俊爽, 有智略. <東川>十七年, 立爲王太子. 二十二年, 秋九月, 王薨, 太子卽位. 冬十月, 立<연>氏爲后. 十一月, 王弟<預物>·<奢句>等, 謀叛伏誅.


중천왕[혹은 중양이라고 한다.]의 이름은 연불이며, 동천왕의 아들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많았다. 동천왕 17년에 왕태자가 되었다. 22년 가을 9월에 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연씨를 왕후로 삼았다.

11월, 왕의 아우 예물·사구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三年, 春二月, 王命相<明臨於漱>, 兼知內外兵馬事.


3년 봄 2월, 왕이 국상 명림 어수로 하여금 내외의 군사에 관한 사무를 동시에 맡아 보도록 명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연>氏, 恐其專寵, 乃言於王曰: "妾聞西<魏>求長髮, 購以千金. 昔我先王, 不致禮於<中國>, 被兵出奔, 殆喪社稷. 今王順其所欲, 遣一個行李, 以進長髮美人, 則彼必欣納, 無復侵伐之事." 王知其意, 默不答. 夫人聞之, 恐其加害, 反讒后於王曰: "王后常罵妾曰: '田舍之女, 安得在此. 若不自歸, 必有後悔.' 意者后欲伺大王之出, 以害於妾, 如之何?" 後, 王獵于<箕丘>而還, 夫人將革囊迎哭曰: "后欲以妾盛此, 投諸海, 幸大王賜妾微命, 以返於家, 何敢更望侍左右乎?" 王問知其詐, 怒謂夫人曰: "汝要入海乎?" 使人投之.


4년 여름 4월, 왕이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지게 하였다. 원래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털의 길이가 9척이나 되어, 왕이 사랑하였고, 장차 소후를 삼으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을 걱정하여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서쪽 위 나라에서 긴 머리털을 천금을 주고 산다고 합니다. 옛적에 우리 선대 임금은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 병란을 당하여 쫓겨 다녔으며, 나라를 잃을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하니 이제 왕께서는 위 나라가 원하는 대로 사신을 보내 머리털 긴 미인을 진상하면, 그들은 반드시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며, 다시는 침범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녀가 말하는 의도를 짐작하고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관나부인이 이 말을 듣고 자기에게 해가 미칠까 겁을 내어 도리어 왕에게 왕후를 참소하여 말했다.

"왕후가 항상 나를 욕하여 '시골 계집이 어찌 여기에 있느냐?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리라'라고 합니다. 대왕이 나가시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후가 나를 해칠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어찌하오리까?"

그 후 왕이 기구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자, 관나부인이 가죽 주머니를 들고 나와 왕을 맞이하며 울면서 말했다.

"왕후가 나를 여기에 담아 바다에 버리려 하니, 대왕께서 미천한 목숨을 돌보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신다면, 어찌 이 이상 대왕을 옆에서 모시기를 감히 바라겠습니까?"

왕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노하여 부인에게 말했다.

"네가 바다에 들어 가기를 원하느냐?"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바다에 던지게 하였던 것이다.


○七年, 夏四月, 國相<明臨於漱>卒, 以<沸流>沛者<陰友>爲國相. 秋七月, 地震.


7년 여름 4월, 국상 명림 어수가 사망하자, 비류 패자 음우를 국상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지진이 있었다.


○八年, 立王子<藥盧>爲王太子, 赦國內.


8년에 왕자 약로를 왕태자로 삼았다. 국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九年, 冬十一月, 以연那<明臨笏覩>, 尙公主, 爲駙馬都尉. 十二月, 無雪. 大疫.


9년 겨울 11월, 연나부의 명림 홀도에게 공주를 주어 혼인시켜서, 부마도위를 삼았다.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二年, 冬十二月, 王전于<杜訥>之谷. <魏>將<&尉遲{尉遲楷}>??[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李丙燾.

12년 겨울 12월, 왕이 두눌곡에서 사냥을 하였다.

위 나라 장수 울지해[이름이 장릉의 이름에 저촉되었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입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十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1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十五年, 秋七月, 王獵<箕丘>, 獲白獐. 冬十一月, 雷, 地震.


15년 가을 7월, 왕이 기구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於<中川>之原, 號曰<中川王>.


23년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중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중천왕이라 하였다.


○<西川王>[或云<西壤>.], 諱<藥盧>[一云<若友>.], <中川王>第二子. 性聰悟而仁, 國人愛敬之. <中川王>八年, 立爲太子.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太子卽位.


서천왕[혹은 서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약로[약우라고도 한다.]이며,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총명하고 어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아끼고 존경하였다. 중천왕 8년에 태자가 되었고, 23년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태자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正月, 立西部大使者<于漱>之女, 爲王后. 秋七月, 國相<陰友>卒. 九月, 以<尙婁>爲國相. <尙婁>, <陰友>子也. 冬十二月, 地震.


2년 봄 정월,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가을 7월, 국상 음우가 죽었다.

9월, 상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상루는 음우의 아들이었다.

겨울 12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夏四月, 隕霜害麥. 六月, 大旱.


3년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6월, 큰 가뭄이 들었다.


○四年, 秋七月丁酉朔, 日有食之. 民饑, 發倉賑之.


4년 가을 7월 초하루 정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七年, 夏四月, 王如<新城>[或云: <新城>, 國之東北大鎭也.], 獵獲白鹿. 秋八月, 王至自<新城>. 九月, 神雀集宮庭.


7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어떤 사람은 '신성은 동북 지방에 있는 큰 진(鎭)'이라고 말한다.]에 가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9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모였다.


○十一年, 冬十月, <肅愼>來侵, 屠害邊民{氓}??. 王謂群臣曰: "寡人以묘未{末}??之軀, 謬襲邦基, 德不能綏, 威不能震, 致此린敵, 猾我疆域. 思得謀臣猛將, 以折遐衝, 咨爾群公, 各擧奇謀異略才堪將帥者." 群臣皆曰: "王弟<達賈>, 勇而有智略, 堪爲大將." 王於是, 遣<達賈>往伐之. <達賈>出奇掩擊, 拔<檀盧城>, 殺酋長, 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 降部落六七所, 以爲附庸. 王大悅, 拜{封}??<達賈>爲<安國君>, 知內外兵馬事, 兼統<梁貊>·<肅愼>諸部落.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겨울 10월, 숙신이 침입하여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를 이었으나, 나의 덕은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먼 곳에 떨치지 못하여, 인근의 적들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제 지략있는 신하와 용감한 장수를 얻어 외적을 부수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각 특출한 계략을 지녀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왕의 아우 달가는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어 대장이 될만 합니다."

왕은 곧 달가를 보내 숙신을 치게 하였다. 달가가 뛰어난 계략으로 적을 기습하여 단로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이고, 주민 6백 여 호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기고, 6·7개소의 부락을 항복하게 하여 부용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으며, 겸하여 양백·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十七年, 春二月, 王弟<逸友>·<素勃>等二人, 謀叛, 詐稱病, 往溫湯, 與黨類, 戱樂無節, 出言悖逆. 王召之, 僞許拜相, 及其至, 令力士執而誅之.


17년 봄 2월, 왕의 아우인 일우·소발 등의 두 사람이 모반하여, 병을 핑계대며, 온탕으로 가서 자기 무리들과 방종하게 놀며, 불온한 언사를 퍼뜨렸다. 왕이 국상을 시키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그들을 불렀다. 그들이 도착하자 왕이 역사를 시켜 죽였다.


○十九年, 夏四月, 王幸<新城>. <海谷>太守獻鯨魚目, 夜有光. 秋八月, 王東狩, 獲白鹿. 九月, 地震. 冬十一月, 王至自<新城>.


19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에 갔다. 해곡 태수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광채가 났다.

가을 8월, 왕이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9월, 지진이 있었다.

겨울 11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二十三年, 王薨, 葬於<西川>之原, 號曰<西川王>.


23년, 왕이 별세하였다. 서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서천왕이라 하였다.


○<烽上王>[一云<雉葛>.], 諱<相夫>[或云<삽矢婁>.], <西川王>之太子也. 幼驕逸多疑忌. <西川王>二十三年, 薨, 太子卽位.


봉상왕[치갈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상부[혹은 삽시루라고도 한다.]이며, 서천왕의 태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 23년에 서천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元年, 春三月, 殺<安國君達賈>. 王以<賈>在諸父之行, 有大功業, 爲百姓所瞻望, 故疑之謀殺. 國人曰: "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 無不揮涕相弔. 秋九月, 地震.


원년 봄 3월, 왕이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으며 백성들이 존경하므로, 그를 의심하여 모살한 것이다. 백성들이 말했다.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환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백성들이 눈물을 뿌리며 서로 위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 지진이 있었다.


○二年, 秋八月, <慕容외>來侵. 王欲往<新城>避賊, 行至<鵠林>, <慕容외>知王出, 引兵追之. 將及, 王懼. 時, <新城>宰北部小兄<高奴子>, 領五百騎迎王, 逢賊奮擊之, <외>軍敗退. 王喜, 加<高奴子>爵爲大兄, 兼賜<鵠林>爲食邑. 九月, 王謂其弟<돌固>有異心, 賜死. 國人以<돌固>無罪哀慟之. <돌固>子<乙弗>出遯於野.


2년 가을 8월, 모용 외가 침노하였다.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왕이 곡림에 이르렀을 때, 모용 외가 왕이 나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들이 거의 도달하려 하자 왕은 이를 두려워 하였다. 그 때 신성 태수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왕을 맞으러 나갔다가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렸다. 모용 외의 군사가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노자의 작위를 대형으로 높이고, 또한 곡림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9월, 왕이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돌고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주하였다.


○三年, 秋九月, 國相<尙婁>卒. 以南部大使者<倉助利>爲國相, 進爵爲大主簿.


3년 가을 9월,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대주부로 올렸다.


○五年, 秋八月, <慕容외>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役者有暴死者, 亦聞壙內有樂聲, 恐有神乃引退. 王謂群臣曰: "<慕容>氏, 兵馬精强, 屢犯我疆역, 爲之奈何?" 相國{國相}??<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高奴子>爲<新城>大守{太守}??. 善政有威聲, <慕容외>不復來寇.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가을 8월, 모용 외가 침입하여 고국원에 이르렀다. 그는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 중에 갑자기 사망자가 생기고 또한 광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신이 있는 것으로 알고 겁을 내어 곧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모용씨는 군대가 강력하여 우리 강토를 여러 차례 침범하였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만약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았다. 고노자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모용 외는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다.


○七年, 秋九月, 霜雹殺穀, 民饑. 冬十月, 王增營宮室, 頗極侈麗, 民饑且困, 群臣驟諫, 不從. 十(-一)??月, 王使人索<乙弗>, 殺之不得.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가을 9월,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0월, 왕이 극도로 사치하고 화려하게 궁실을 증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피로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신하들이 공사의 중단을 여러번 간하였다.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11월, 왕이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八年, 秋九月, 鬼哭于<烽山>. 客星犯月. 冬十二月, 雷, 地震.


8년 가을 9월, 귀신이 봉산에서 울었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九年, 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不雨, 年饑, 民相食. 八月, 王發國內男女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천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驅饑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황比린有强梗之敵, 若乘吾폐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온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國相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復}??言." <助利>知王之不悛, 且畏及害, 退與群臣同謀, 廢之, 迎<乙弗>爲王. 王知不免, 自經, 二子亦從而死. 葬於<烽山>之原, 號曰<烽上王>.


李丙燾.

9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8월, 왕이 국내의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식량의 결핍과 부역의 고통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유랑하였다. 창조리가 왕에게 간하였다.

"천재가 연속하여 발생하고,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들은 계곡과 구렁텅이를 헤매고 있으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근신하고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은 이러한 사정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나무를 깎고 돌을 나르는 부역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는 왕이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대단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주위에는 강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우리가 피폐한 기회를 이용하여 침범해 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위로 받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중함을 내보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국상은 아마도 나를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듣고자 하는 것 같구려."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어진 것이 아니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간하지 않으면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국상이라는 어려운 자리를 이었으니 말을 아니할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가? 이후로는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리는 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는 왕 앞에서 물러나와 군신들과 의논하여 왕을 폐위시키고 을불을 왕으로 세웠다. 왕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의 두 아들도 따라 죽었다. 봉산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봉상왕이라 하였다.


○<美川王>[一云<好壤王>.], 諱<乙弗>[或云<憂弗>.], <西川王>之子古鄒加<돌固>之子. 初, <烽上王>疑弗{弟}??<돌固>有異心, 殺之, 子<乙弗>畏害出遁. 始就<水室村>人<陰牟>家傭作. <陰牟>不知其何許人, 使之甚苦. 其家側草澤, 蛙鳴, 使<乙弗>夜投瓦石, 禁其聲, 晝日督之樵採, 不許暫息, 不勝艱苦, 周年, 乃去. 與<東村>人<再牟>販鹽. 乘舟抵<鴨록>, 將鹽下寄江東<思收村>人家. 其家老구請鹽, 許之斗許, 再請不與. 其구恨에, 潛以구置之鹽中. <乙弗>不知, 負而上道. 구追索之, 誣以수구, 告<鴨록>宰. 宰以구直, 取鹽與구, 決笞放之. 於是, 形容枯槁, 衣裳藍縷, 人見之, 不知其爲王孫也. 是時, 國相<倉助利>將廢王, 先遣北部<祖弗>·東部<蕭友>等, 物色訪<乙弗>於山野. 至<沸流河>邊, 見一丈夫在船上, 雖形貌憔悴, 而動止非常. <蕭友>等疑是<乙弗>, 就而拜之曰: "今國王無道, 國相與群臣陰謀, 廢之. 以王孫操行儉約, 仁慈愛人, 可以嗣祖業, 故遣臣等奉迎." <乙弗>疑曰: "予野人, 非王孫也, 請更審之." <蕭友>等曰: "今上, 失人心치{久}??英{矣}??, 固不足爲國主, 故群臣望王孫甚勤, 請無疑." 遂奉引以歸. <助利>喜, 致於<鳥陌{烏陌}>??南家, 不令人知. 秋九月, 王獵於<侯山>之陰, 國相<助利>從之. 謂衆人曰: "與我同心者, 효我." 乃以蘆??{葉}??揷冠, 衆人皆揷之. <助利>知衆心皆同, 遂其廢王, 幽之別室, 以兵周衛. 遂迎王孫, 上璽綬, 卽王位. 冬十月, 黃霧四塞. 十一月, 風從西北來, 飛砂走石六日. 十二月, 星패于東方.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李丙燾. 「東國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미천왕[호양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을불[혹은 우불이라고도 한다.]이고,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예전에 봉상왕은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할 생각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을불은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도망했었다. 처음에는 수실촌 사람 음모의 집에서 머슴 생활을 하였다. 음모는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고 힘든 일을 시켰다. 그 집 옆의 연못에서 개구리가 울면, 음모는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을불로 하여금 밤마다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게 하였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을불은 고생을 이기지 못하고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났다. 을불은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에 가서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의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요구하여, 한 말 가량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그 이상 주기를 요청하였다. 을불은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그를 미워하여 몰래 자기의 신발을 소금 속에 묻었다. 을불은 이를 모르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다.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들고, 을불이 자기의 신발을 감추었다고 거짓으로 압록 성주에게 고발하였다. 성주는 신발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매를 때린 후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여위고 의복이 남루하여, 누구든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고자 하여, 먼저 북부 조불과 동부 소우 등을 파견하여, 온 나라에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물가에 도착하였을 때, 한 사나이가 배에 있었는데 얼굴은 비록 초췌하였으나, 행동 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했다.

"나는 평민이오 왕손이 아닙니다. 달리 알아 보시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곧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다. 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인가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 북쪽에서 사냥할 때 국상 조리가 따라갔다. 조리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와 마음이 같은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그는 곧 갈대잎을 모자에 꽂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 갈대잎을 꽂았다. 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곧 왕손을 맞아 옥새를 올려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겨울 10월,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11월,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와 6일간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1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토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3년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2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 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5년 봄 정월,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토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패于東北.


16년 봄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二十年, 冬十二月, <晉><平州>刺史{刺使}??<崔毖>來奔. 初, <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 使共攻<慕容외>, 三國進攻<棘城>. <외>閉門自守, 獨以牛酒, 호<宇文>氏. 與國疑<宇文>氏與<외>有謀, 各引兵歸. <宇文>大人<悉獨官>曰: "二國雖歸, 吾當獨取之." <외>使其子<황>與長史<裴억>, 將精銳爲前鋒, 自將大兵繼之, <悉獨官>大敗, 僅以身免. <崔毖>聞之, 使其兄子<燾>詣<棘城>僞賀. <외>臨之以兵, <燾>懼首服, <외>내遣<燾>歸. 謂<毖>曰: "降者, 上策; 走者, 下策也." 引兵隨之. <毖>與數十騎, 棄家來奔, 其衆悉降於<외>. <외>以其子<仁>, 鎭<遼東>官府, 市里案堵如故. 我將<如노>據于<河城>, <외>遣將軍<張統>掩擊擒之, 부其衆千餘家, 歸于<棘城>. 王數遣兵寇<遼東>, <慕容외>遣<慕容翰>·<慕容仁>, 伐之, 王求盟, <翰>·<仁>乃還.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겨울 12월, 진 나라 평주 자사 최 비가 도망해왔다. 예전에 최 비는 비밀리에 우리 나라·단씨·우문씨를 회유하여, 모용 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세 나라가 극성으로 진공하였다. 모용 외는 성문을 닫고 수비하면서 우문씨에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 외 사이에 남모르는 계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문 대인 실독관이 말했다.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내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빼앗을 수 있다."

모용 외가 그의 아들 황으로 하여금 장사 배 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대패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갔다. 최 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로 하여금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치하하였다. 모용 외가 군사를 옆에 세우고 도를 접견하였다. 도는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자복하였다. 모용 외는 곧 도를 돌려 보내면서 최 비에게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다." 모용 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의 뒤를 따랐다. 최 비는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모용 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 외는 그의 아들 인으로 하여금 요동 관부에 진을 치게 하였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평안하였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 외가 장군 장 통을 보내 습격하여 사로잡고, 주민 1천여 호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여러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 외는 모용 한과 모용 인을 시켜 우리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동맹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한과 인이 바로 돌아갔다.


○二十一年, 冬十二月, 遣兵寇<遼東>, <慕容仁>拒戰破之.


21년 겨울 12월,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 인이 항전하여 우리가 패배하였다.


○三十一年, 遣使<後趙><石勒>, 致其고矢.


31년,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美川>之原, 號曰<美川王>.

三國史記卷第十七.


32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미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미천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7 끝




三國史記卷第十八.



삼국사기 권 제 18


高句麗本紀第六.

<故國原王>·<小獸林王>·<故國壤王>·<廣開土王>·<長壽王>.


고구려본기 제 6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故國原王>[一云<國강上王>.], 諱<斯由>[或云<劉{釗}>??.]. <美川王>十五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春, 王薨, 卽位.


李丙燾. 百濟蓋鹵王寄魏主書. 「魏書」 高句麗傳.

고국원왕[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사유[혹은 소라고도 한다.]이다. 미천왕 15년에 태자가 되었고, 32년 봄에 왕이 별세하자,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巡問百姓, 老病賑給. 三月, 至自<卒本>.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늙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였다.

3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秋八月, 增築<平壤城>. 冬十二月, 無雪.


4년 가을 8월,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겨울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五年, 春正月, 築國北<新城>. 秋七月, 隕霜殺穀.


5년 봄 정월,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六年, 春三月, 大星流西北. 遣使如<晉>, 貢方物.


6년 봄 3월, 큰 별이 서북방으로 날아갔다.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九年, <燕>王<황>來侵, 兵及<新城>. 王乞盟, 乃還.


9년, 연 나라 임금 황이 침입하여 그의 군사가 신성까지 이르렀다. 왕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갔다.


○十年, 王遣世子, 朝於<燕>王<황>.


10년, 왕이 연 나라 임금 황에게 세자를 보내 예방케 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修葺<瓦都城{丸都城}>??, 又築<國內城>. 秋八月, 移居<丸都城>. 冬十月, <燕>王<황>遷都<龍城>. 立威將軍<翰>請: 先取<高句麗>, 後滅<宇文>, 然後中原可圖.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北都{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 出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 <황>從之. 十一月, <황>自將勁兵四萬, 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우>等, 將兵萬五千, 出北道以來侵. 王遣弟<武>, 帥精兵五萬, 拒北道, 自帥羸兵, 以備南道. <慕容翰>等先至戰, <황>以大衆繼之, 我兵大敗. 左長史<韓壽>, 斬我將<阿佛和度加>, 諸軍乘勝, 遂入<丸都>. 王單騎走入<斷熊谷>, 將軍<慕輿니>, 追獲王母<周>氏及王妃而歸. 會, <王우>等戰於北道, 皆敗沒. 由是, <황>不復窮追, 遣使招王, 王不出. <황>將還, <韓壽>曰: "<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 其主亡民散, 潛伏山谷, 大軍旣去, 必復鳩聚, 收其餘燼, 猶足爲患.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황>從之. 發<美川王>廟{墓}??, 載其尸, 收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毁<丸都城>而還.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 晉紀」.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12년 봄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 왔다.

겨울 10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 장군 한이 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에 우문씨를 멸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 길을 선택하였다. 한이 말했다. "적국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시하고 남쪽 길을 가볍게 취급할 것입니다. 왕께서 응당 정예 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로 가서 불의의 공격을 하면, 북쪽 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황은 이 말을 따랐다.

11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였다. 모용 한과 모용 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 우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게 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왕은 아우 무로 하여금 정예 부대 5만을 이끌고 북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이 때 모용 한 등이 먼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황의 대군이 도착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좌장사 한 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를 죽이자, 모든 적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성으로 쳐들어왔다. 왕은 단기로 단웅곡으로 도주하였다. 연 나라 장군 모여니가 따라와서 왕모 주씨와 왕비를 잡아 돌아갔다. 이 때 연 나라 장군 왕 우 등은 북쪽 길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황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왕을 불렀다. 왕은 가지 않았다. 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 수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였으나,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를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족히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 버리고 돌아갔다.


○十三年, 春二月, 王遣其弟, 稱臣入朝於<燕>, 貢珍異以千數. <燕>王<황>乃還其父尸, 猶留其母爲質.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遣使如<晉>朝貢. 冬十一月, 雪五尺.


13년 봄 2월, 왕이 아우를 연 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면서 예방케 하고, 1천 건에 달하는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 연 나라 임금 황이 곧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 보내고, 왕모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가을 7월,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 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에 있다.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十五年, 冬十月, <燕>王<황>使<慕容恪>來攻, 拔<南蘇>, 置戍而還.


15년 겨울 10월, 연 나라 임금 황이 모용 각으로 하여금 침공케 하여 남소를 함락시킨 후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十九年, 王送前東夷護軍<宋晃>于<燕>. <燕>王<雋>赦之, 更名曰<活>, 拜爲中尉.


19년, 왕이 이전의 동이 호군 송 황을 연 나라에 돌려 보냈다. 연 나라 임금 준이 그의 죄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이라고 고쳐서 중위로 임명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立王子<丘夫>爲王太子. 冬十二月, 王遣使詣<燕>, 納質修貢, 以請其母. <燕>王<雋>許之, 遣殿中將軍<刀龕{조龕}>??,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使, 封<樂浪>公, 王如故.


李丙燾. 「資治通鑑」.

25년 봄 정월,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았다.

겨울 12월, 왕이 연 나라에 사신을 보내 볼모와 공물을 바치고, 왕모를 돌려 보내기를 요청하였다. 연 나라 임금 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 장군 도 감으로 하여금 왕모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왕에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으로 봉하였으니, 이전과 동일하게 되었다.


○三十九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續{績}??.


趙炳舜. 『三國史節要』.

39년 가을 9월, 왕이 군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四十年, <秦>王<猛>, 伐<燕>破之. <燕>大傅<慕容評>來奔, 王執送於<秦>.


40년, 진 나라 왕 맹이 연 나라를 격파하였다. 연 나라 태부 모용 평이 우리 나라로 쫓겨왔다. 왕이 이를 붙잡아 진 나라에 보냈다.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帥}??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 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4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 달 23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 언덕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이 위 나라에 보낸 표문에 '소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小獸林王>[一云<小解朱留王>.], 諱<丘夫>, <故國原王>之子也. 身長大有雄略. <故國原王>二十五年, 立爲太子. 四十一年, 王薨, 太子卽位.


소수림왕[소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구부이며,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그는 신체가 장대하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 고국원왕 25년에 태자가 되었다. 41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재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夏六月, <秦>王<符堅{부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立大學, 敎育子弟.


李丙燾.

今西龍.

2년 여름 6월, 진 나라 왕 부 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 왔다. 왕이 사신을 보내 답례로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三年, 始頒律令.


3년, 처음으로 법령을 반포하였다.


○四年, 僧<阿道>來.


4년, 중 아도가 왔다.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省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李丙燾. 「海東高僧傳」.

5년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로 하여금 이 절을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로 하여금 이 절을 주관하게 하니,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초가 되었다.

가을 7월,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하였다.


○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6년 겨울 11월,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七年, 冬十月, 無雪, 雷, 民疫. <百濟>將兵三萬, 來侵<平壤城>. 十一月, 南伐<百濟>. 遣使入<符{부}秦>??朝貢.


今西龍.

7년 겨울 10월, 눈이 오지 않았다. 우레가 있었다. 민간에 전염병이 돌았다. 백제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남쪽으로 백제를 쳤다. 진 나라 왕 부 견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旱,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8년,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 먹었다.

가을 9월,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


○十三年, 秋九月, 星패于西北.


13년 가을 9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十四年, 冬十一月, 王薨. 葬於<小獸林>, 號爲<小獸林王>.


14년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소수림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소수림왕이라 하였다.


○<故國壤王>, 諱<伊連>[或云<於只支>.], <小獸林王>之弟也. <小獸林王>在位十四年, 薨, 無嗣, 弟<伊連>卽位.


고국양왕의 이름은 이연[혹은 어지지라고 한다.]이며,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소수림왕이 재위 14년에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이 왕위에 올랐다.


○二年, 夏六月, 王出兵四萬, 襲<遼東>. 先是, <燕>王<垂>命<帶方>王<佐>, 鎭<龍城>. <佐>聞我軍襲<遼東>, 遣司馬<학景>, 將兵救之, 我軍擊敗之, 遂陷<遼東>·<玄토>, 虜男女一萬口而還. 冬十(-一)??月, <燕><慕容農>將兵來侵, 復<遼東>·<玄토>二郡. 初, <幽>·<冀>流民, 多來投, <農>以<范陽><龐淵>, 爲<遼東>太守, 招撫之. 十二月, 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여름 6월, 왕이 군사 4만을 출동하여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 나라 임금 수가 대방 왕 좌로 하여금 용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좌는 우리 군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 학 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이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남녀 1만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 나라 모용 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토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기주 등지의 유랑민 다수가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 농이 범양의 방연을 요동 태수로 삼아 그들을 무마하였다.

12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談德>爲太子. 秋八月, 王發兵, 南伐<百濟>. 冬十月, 桃李華. 牛生馬, 八足二尾.


3년 봄 정월, 왕자 담덕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남쪽으로 백제를 쳤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소가 말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꼬리가 두 개였다.


○五年, 夏四月, 大旱. 秋八月, 蝗.


5년 여름 4월, 크게 가물었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六年, 春, 饑人相食, 王發倉賑給. 秋九月, <百濟>來侵, 掠南鄙部落而歸.


6년 봄,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으므로,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가을 9월, 백제가 침입하여 남쪽 변경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七年, 秋九月, <百濟>遣達率<眞嘉謨>, 攻破<都押城>, 虜二百人以歸.


7년 가을 9월, 백제가 달솔 진가모를 시켜 도압성을 쳐부수고, 주민 2백 명을 생포하여 돌아갔다.


○九{八}??年春, 遣使<新羅>修好, <新羅>王遣姪<實聖>爲質. 三月, 下敎: 崇信佛法求福. 命有司, 立國社, 修宗廟. 夏五月, 王薨. 葬於<故國壤>, 號爲<故國壤王>.


李丙燾, 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

9년 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약속하였다. 신라왕이 자기의 조카 실성을 볼모로 보내왔다.

3월,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받게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관리들에게 명하여 사직단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양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고국양왕이라고 하였다.


○<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당之志. <故國壤王>三年, 立爲太子. 九{八}??年, 王薨, 太子卽位.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초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가 되었다. 9년에 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9월,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생포하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왕이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점령하였다.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創九寺於<平壤>.


2년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三年,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3년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하였다. 왕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쳤다. 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四年, 秋八月, 王與<百濟>, 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4년 가을 8월, 왕이 패수에서 백제와 싸웠다. 왕은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베었다.


○九年, 春正月, 王遣使入<燕>朝貢. 二月, <燕>王<盛>, 以我王禮慢, 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慕容熙>, 爲前鋒, 拔<新城>·<南蘇>二城, 拓地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9년 봄 정월, 왕이 연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 나라 임금 성이 우리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 대장군 모용 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남소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11년, 왕이 군사를 보내 연 나라의 수비군을 공격하였다. 연 나라 평주 자사 모용 귀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十三年, 冬十一月, 出師侵<燕>.


13년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 나라를 공격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燕>王<熙>來攻<遼東城>. 且陷, <熙>命將士: "毋得先登, 俟잔平其城, 朕與皇后, 乘轝而入." 由是, 城中得嚴備, 卒不克而還.


14년 봄 정월, 연 나라 임금 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 가리라."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침내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十五年, 秋七月, 蝗, 旱. 冬十二月, <燕>王<熙>襲<契丹>, 至<형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棄輜重, 輕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15년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겨울 12월, 연 나라 임금 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경북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군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경병으로 우리 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 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군사와 말이 피로하였다. 동사자가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을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十六年, 春二月, 增修宮闕.


16년 봄 2월,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서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 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今西龍.

17년 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정의를 나누었다. 북연의 임금 운이 시어사 이 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조부 고 화는 고구려의 방계인데, 자칭 고양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 보가 태자가 되었을 때, 운이 무예가 뛰어나다 하여 동궁을 모셨는데, 모용 보가 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었다.


○十八年, 夏四月, 立王子<巨連>, 爲太子.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八月, 王南巡.


18년 여름 4월, 왕자 거연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왕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22년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長壽王>, 諱<巨連>[一作<璉>.], <開土王>之元子也. 體貌魁傑, 志氣豪邁. <開土王>十八年, 立爲太子. 二十二年, 王薨, 卽位.


장수왕의 이름은 거연['連'을 '璉'이라고 쓰기도 한다.]이며,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의기가 호방하였다. 광개토왕 18년에 태자가 되었다. 22년에 왕이 별세하자, 왕위에 올랐다.


○元年, 遣長史<高翼>, 入<晉>奉表, 獻자白馬. <安帝>封王<高句麗>王<樂安郡>{<樂浪郡>}??公.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장사 고 익을 진 나라에 보내 표문을 올리고, 붉고 흰 말을 바쳤다. 진 나라 안제가 왕을 고구려왕 낙안군공으로 봉하였다.


○二年, 秋八月, 異鳥集王宮. 冬十月, 王전于<蛇川>之原, 獲白獐. 十二月, 王都, 雪五尺.


2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 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사천 벌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12월, 서울에 눈이 다섯 자 내렸다.


○七年, 夏五月, 國東大氷{水}??, 王遣使存問.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왕이 사람을 보내 위문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修聘, 王勞慰之特厚. 秋九月, 大有年, 王宴群臣於宮.


12년 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왕이 그를 후하게 예우하였다.

가을 9월, 큰 풍년이 들자 왕이 궁중에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十三年, 遣使如<魏>貢.


13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五年, 移都<平壤>.


15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系及諱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李敖>, 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 王遣使入<魏>謝恩. <魏>人數伐<燕>, <燕>日危蹙. <燕>王<馮弘>曰: "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國{圖}??後擧." 密遣尙書<陽伊>, 請迎於我.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여름 6월, 왕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 나라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제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 산기 시랑 이 오를 보내 왕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에 왕이 사신을 위 나라에 보내 사은하였다.

위 나라 사람들이 연 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 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 나라 임금 풍 홍이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잠시 의탁하며, 훗날을 도모하겠다"라고 말하고, 비밀리에 상서 양 이를 우리 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二十四年, <燕>王遣使入貢于<魏>, 請送侍子. <魏>主不許, 將擧兵討之, 遣使來告諭. 夏四月, <魏>攻<燕><白狼城>, 克之. 王遣將<葛盧>·<孟光>, 將衆數萬, 隨<陽伊>至<和龍>, 迎<燕>王. <葛盧>·<孟光>入城, 命軍脫弊褐, 取<燕>武庫精仗, 以給之, 大掠城中. 五月, <燕>王率<龍城>見戶東徙, 焚宮殿, 火一旬不滅. 令婦人被甲居中, <陽伊>等勒精兵居外, <葛盧>·<孟光>帥騎殿後, 方軌而進, 前後八十餘里. <魏>主聞之, 遣散騎常侍<封撥>來, 令送<燕>王. 王遣使入<魏>奉表, 稱當興{與}??<馮弘>, 俱奉王化. <魏>主以王違詔, 議擊之, 將發<롱右>騎卒, <劉혈>·<樂平王><丕>等諫之, 乃止.


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연 나라 임금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시자를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려 하면서,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 나라가 연 나라의 백낭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왕은 장수 갈로와 맹광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 나라 사신 양 이를 따라 화룡에 가서 연 나라 임금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 나라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 나라 무기고에 있는 정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 나라 임금이 용성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복판에 서게 하고, 양 이 등은 정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후미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 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 상시 봉 발을 고구려에 보내 연 나라 임금을 압송하라고 하였다. 왕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치면서, 연 나라 임금 풍 홍과 함께 위 나라 임금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 나라 임금은 고구려 왕이 자기의 소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 혈·낙평·비 등이 간하여 이를 중지하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25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春三月, 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풍>. <弘>素侮我, 政刑賞罰, 猶如其國.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 <宋><太祖>遣使者<王白駒>等迎之, 幷令我資送. 王不欲使<弘>南來, 遣將<孫漱>·<高仇>等, 殺<弘>于<北풍>, 幷其子孫十餘人. <白駒>等帥所領七千餘人, 掩討<漱>·<仇>, 殺<仇>, 生擒<漱>. 王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太祖>以遠國, 不欲違其意, 下<白駒>等獄, 已而原之.


26년 봄 3월, 처음, 연 나라 임금 풍 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용성왕 풍군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풍 홍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왕을 꾸짖었다. 왕은 풍 홍을 평곽에 있게 하다가, 얼마 후에 다시 북풍으로 옮겼다. 풍 홍은 원래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정치와 법제도와 상벌을 자기 나라와 동일하게 하려고 하였다. 왕은 곧 그의 시종을 빼앗고, 그의 태자 왕인을 볼모로 삼았다. 풍 홍이 이를 원망하여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자기를 맞아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태조가 사신 왕 백구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치송하게 하였다. 왕은 풍 홍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수 손 수·고 구 등으로 하여금 북풍에서 풍 홍과 그의 자손 10여 명을 죽이도록 하였다. 송의 사신 왕 백구 등은 풍 홍이 지휘하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 장수 손 수와 고 구를 습격하여, 고 구를 죽이고 손 수를 생포하였다. 왕은 왕 백구 등이 고 구를 마음대로 죽였다는 이유로, 그를 잡아 사신편에 송 나라로 보냈다. 송 태조는 먼 곳에 있는 나라인 고구려의 뜻을 어기지 않게 위하여 왕 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후에 석방하였다.


○二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 十二月, 遣使入<魏>朝貢.


27년 겨울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三}??十八年, <新羅>人襲殺邊將. 王怒, 將擧兵討之, <羅>王遣使謝罪, 乃止.


趙炳舜. 新羅本紀 訥祗王 34年條 참조.

28년, 신라인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단하였다.


○四十二年, 秋七月, 遣兵侵<新羅>北邊.


42년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四十三年, 遣使入<宋>朝貢.


43년,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50년 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一年, <宋><世祖><孝武皇帝>策王爲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


51년, 송 나라 세조 효무 황제가 왕을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하였다.


○五十三{二}??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53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四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魏><文明大后{太后}??>, 以<顯祖>六宮未備, 敎王令薦其女. 王奉表云: "女已出嫁." 求以弟女應之, 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 至境送幣. 或勸王曰: "<魏>昔與<燕>婚姻, 旣而伐之, 由行人具知其夷險故也. 殷鑑不遠, 宜以方便辭之." 王遂上書, 稱女死. <魏>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 切責之: "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 王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 <顯祖>崩, 乃止.


趙炳舜. 『三國史節要』.

54년 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위 나라 문명 태후가 현조의 6궁이 미비하다 하여, 우리 왕에게 지시하여 왕의 딸을 바치라고 하였다. 왕이 표문을 올려 "딸은 이미 출가하였다"고 말하고, 아우의 딸을 대신 바치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에서 이를 인정하고 곧 안락왕 진과 상서 이 부 등을 국경으로 파견하여 폐백을 보내왔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기를 "위 나라가 이전에 연 나라와 혼인한 후 얼마 안되어 연 나라를 쳤으니, 이는 사신들이 지리적 상황을 상세히 조사해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머지않은 시기에 이러한 교훈을 얻었으니, 적당한 방법으로 거절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위 나라에 편지를 보내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말했다. 위 나라에서는 이것이 거짓이라고 의심하여, 다시 대리산기상시 정 준을 보내 엄중히 질책하여, "만약 딸이 정말 죽었다면, 다시 종실의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것을 인정하겠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말했다. "만약 천자가 나의 전일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지시대로 따르겠다." 그 때 마침 현조가 죽었으므로 이 일은 중단되었다.


○五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5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六年, 春二月,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城>.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56년 봄 2월, 왕이 말갈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百濟>兵侵入南鄙.


57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백제의 군사가 남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五十八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8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九年, 秋九月, <民奴各{民奴久}>??等奔降於<魏>, 各賜田宅. 是<魏><高祖><延興>元年也.


李丙燾. 「魏書」 高祖紀.

59년 가을 9월, 민노각 등이 위 나라에 도망가 항복하였다. 위 나라는 그들에게 각각 토지와 주택을 주었다. 이 때가 위 고조 연흥 원년이었다.


○六十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自此已後, 貢獻倍前, 其報賜, 亦稍加焉.


60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 때부터 공물의 수량이 종전에 비하여 배로 늘었으며, 보답으로 위 나라에서 주는 물량도 다소 증가하였다.


○六十一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61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二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遣使入<宋>朝貢.


62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송 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63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 경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六十四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遣使入<魏>朝貢.


64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65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六年, 遣使入<宋>朝貢. <百濟><燕信>來投.


66년,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였다.


○六十七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67년 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八年, 夏四月, <南齊><太祖><蕭道成>, 策王爲驃騎大將軍. 王遣使<餘奴>等, 朝聘<南齊>, <魏><光州>人, 於海中得<餘奴>等, 送闕. <魏><高祖>詔責王曰: "<道成>親弑其君, 竊位{號}??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越境外交, 遠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不以一過掩卿舊款, 卽送還藩, 其感恕{恩}??思愆, 祗承明憲, 輯寧所部, 勤{動}??靜以聞."


李丙燾. 「魏書」 高句麗紀.李丙燾. 新本.趙炳舜. 『三國史節要』.

68년 여름 4월, 남제 태조 소 도성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남제에 사신 여노 등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위 나라 광주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 나라 대궐에 송치하였다. 위 나라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 "소 도성은 직접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강남에서 왕으로 자칭하고 있다. 나는 이제 멸망한 나라를 옛 터에서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유씨에게 이어주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국경을 넘어서 외부와 접촉하며, 자기 임금을 죽인 역적과 내통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번신의 절개를 지키는 도리이겠는가? 나는 이제 한 가지 과오 때문에 그대의 옛 정성을 무시하지 않기 위하여 여노를 즉시 돌려 보낸다. 나의 관대한 조치에 감동하여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법도를 지킬 것이며, 다스리는 지역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대의 동정을 보고하라."


○六十九年, 遣使<南齊>朝貢.


69년,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二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時, <魏>人謂我方强, 置諸國使邸, 齊使第一, 我使者次之.


72년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 때, 위 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이제 강성하다고 보고, 여러 나라 사신들의 사관을 둠에 있어서, 제 나라 사신을 첫번째, 우리 나라 사신을 두 번째에 두었다.


○七十三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73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四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74년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五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75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六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秋閏八月, 遣使入<魏>朝貢.


76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윤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夏六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兵侵<新羅>北邊, 陷<狐山城>.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77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호산성을 점령하였다.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八年,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遣使入<魏>朝貢.


78년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 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諡曰<康>.

三國史記卷第十八.


79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호를 장수왕이라 하였다. 위 나라 효문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흰 색의 위모관를 쓰고, 베로 만든 심의를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한 후, 알자 복야 이 안상을 보내와 왕을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8 끝




三國史記卷第十九.



삼국사기 권 제 19


高句麗本紀第七.

<&文咨王{文咨明王}>??·<安藏王>·<安原王>·<陽原王>·<平原王>.


『북한본』.

고구려본기 제 7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文咨明王>[一云<明治好王>.], 諱<羅雲>, <長壽王>之孫. 父, 王子古鄒大加<助多>, 早死, <長壽王>養於宮中, 以爲太孫. <長壽>在位七十九年薨, 繼立.


문자명왕[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나운이며,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장수왕의 아들 고추 대가 조다였다.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나운을 궁중에서 길러 장손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에 죽자, 나운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元年, 春(-正月)??三月, <魏><孝文帝>遣使拜王, 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車旗之飾. 又詔王遣世子入朝, 王辭以疾, 遣從叔<升干>, 隨使者詣闕. 夏六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봄 3월, 위 나라 효문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 도독 요해 제군사 정동 장군 령호 동이 중랑장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삼고, 왕에게 의관·복식·수레깃발 등의 장식물을 주었다. 또한 왕에게 세자를 보내 예방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은 세자가 병이 들어 가지 못한다고 하고, 종숙 승간으로 하여금 사신을 따라 위 나라 황제를 예방하게 하였다.

여름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年, 冬十月, 地震.


2년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二月, <扶餘>王及妻노, 以國來降. 秋七月, 我軍與<新羅>人, 戰於<薩水>之原. <羅>人敗, 保<犬牙城>, 我兵圍之, <百濟>遣兵三千, 침{救??/援??}<新羅>, 我兵引退. <齊>帝策王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桃李華.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은 '援'으로 교감하였다.

3년 봄 정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 군사와 살수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 군사가 패배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백제에서 군사 3천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자 우리 군사가 퇴각하였다.

제 나라 임금이 왕을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2주정동대장군낙랑공으로 봉하였다.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四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大旱.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南巡狩, 望海而還. 八月, 遣兵圍<百濟><雉壤城>, <百濟>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德智>, 率兵來援, 我軍退還.


4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큰 가뭄이 들었다.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왕이 남쪽 지방으로 순행하여, 바다에 망제를 지내고 돌아왔다.

8월, 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덕지로 하여금 백제를 구원하게 하므로 우리 군사가 퇴각하였다.


○五年, <齊>帝進王爲車騎將軍. 遣使入<齊>朝貢. 秋七月, 遣兵攻<新羅><牛山城>, <新羅>兵出擊<泥河>上, 我軍敗北.


5년, 제 나라 임금이 왕을 거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군사가 니하에서 반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六年, 秋八月, 遣兵攻<新羅><牛山城>, 取之.


6년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七年, 春正月, 立王子<興安>爲太子. 秋七月, 創<金剛寺>. 八月, 遣使入<魏>朝貢.


7년 봄 정월, 왕의 아들 흥안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금강사를 창건하였다.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百濟>民饑, 二千人來投.


8년, 백제 백성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2천 명이 투항해왔다.


○九年,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9년 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10년 봄 정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一年, 秋八月, 蝗. 冬十月, 地震, 民屋倒墮, 有死者. <梁><高祖>卽位. 夏四月, 進王爲車騎大將軍. 冬十一月, <百濟>犯境. 十二月, 遣使入<魏>朝貢.


11년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겨울 10월, 지진으로 인하여 가옥이 쓰러졌다. 사망자도 있었다. 양 나라 고조가 즉위하였다.

여름 4월에 양 나라 고조가 왕을 거기 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

겨울 11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二年, 冬十一月, <百濟>遣達率<優永>, 率兵五千, 來侵<水谷城>.


12년 겨울 11월, 백제가 달솔 우영으로 하여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수곡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世宗>引見其使<芮悉弗>於東堂. <悉弗>進曰: "小國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扶餘>, 珂則<涉羅>所産. <扶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世宗>曰: "<高句麗>世荷上奬{將}??, 專制海外, 九夷힐虜, 悉得征之, 甁경뢰치, 誰之咎也? 昔, 方貢之愆, 責在連率. 卿宜宣朕志於卿主, 務盡威懷之略, 전披害群, 輯寧東裔. 使二邑, 還復舊墟, 土毛無失常貢也."


李丙燾. 「魏書」.

13년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위 나라 세종이 우리 사신 예 실불을 동당에서 접견하였다. 예실불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우리 나라가 황제를 섬기기로 약속한 것을 누대에 걸쳐 성실하게 지켰으며,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도 어긴 적이 없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생산되고, 옥은 섭라에서 생산되는데, 부여는 물길에게 쫓기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으니, 두 가지 물품이 왕의 창고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적국의 탓이다."

세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대대로 상국의 도움을 받아, 해외를 다스리고 오랑캐의 교활한 무리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물이 적어졌으니, 이는 우리의 수치인데,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지난 날 조공이 충실하지 못한 것은 책임이 지방관에게 있다. 그대는 나의 뜻을 그대의 왕에게 전달하여, 그로 하여금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잘 사용하여 나쁜 자들을 없애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부여와 섭라로 하여금 각각 옛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토산물의 공납을 어기지 않도록 하라."


○十五年, 秋八月, 王獵於<龍山>之陽, 五日而還. 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一月, 遣將伐<百濟>, 大雪, 士卒凍군而還.


15년 가을 8월, 왕이 용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5일 만에 돌아왔다.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공격했으나, 큰 눈이 내리고 군사들에게 동상이 걸려 되돌아왔다.


○十六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王遣將<高老>, 興{與}??<靺鞨>謀, 欲攻<百濟><漢城>, 進屯於<橫岳>下, <百濟>出師逆戰, 乃退.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장수 고로를 파견하여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횡악 아래에 주둔하였다. 백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마주 싸우자 곧 퇴각하였다.


○十七年, <梁><高祖>下詔曰: "<高句麗>王<樂浪郡>公某, 乃誠款著, 貢驛相尋, 宜풍{隆}??秩命, 式弘朝典, 可撫軍[一作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李丙燾. 「梁書」.

17년, 양 나라 고조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고구려왕낙랑군공 아무개는 약속을 성실히 지켜 조공이 끊어지지 않았다. 마땅히 관작을 높여 조정의 전범을 넓게 펴야겠으므로, 그에게 무군['군(軍)'을 '동(東)'으로도 쓴다.]대장군개부의동삼사의 관작을 준다."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八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18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九年, 夏閏六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一{二}??月, 遣使入<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여름 윤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侵<百濟>, 陷<加弗>·<圓山>二城, 虜獲(-一)??男女一千餘口.


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백제를 침공하여 가불·원산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二十二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22년 봄 정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三年, 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


23년 겨울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四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24년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五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25년 여름 4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26년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三月, 暴風拔木, 王宮南門自毁.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五月, 遣使入<魏>朝貢.


27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며, 왕궁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大后{太后}??>擧哀於東堂, 遣使策贈車騎大將軍. 時, <魏><肅宗>年十歲, 太后臨朝稱制.


趙炳舜. 『三國史節要』.

28년,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문자명왕이라 하였다. 위 나라 영 태후가 동당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사신을 보내 왕에게 거기대장군을 추증하였다. 이 때 위 나라 숙종의 나이가 10세였다. 태후가 조정에 나와 황제의 정사를 대리하였다.


○<安臧王{安藏王}>??, 諱<興安>, <文咨明王>之長子. <文咨>在位七年, 立爲太子. 二十八年, 王薨, 太子卽位.


허성도. 『三國史記』 목록과 『三國史記』 19卷의 제목에는 '安藏王'으로 되어 있으며, 『三國史記』 19卷의 본문 및 高句麗本紀에는 '安臧王'으로 되어 있다. 『國史大事典』에는 '安藏王'으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安藏王'으로 쓴다.

안장왕의 이름은 흥안이며, 문자명왕의 맏아들이다. 문자명왕이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다. 28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梁>朝貢. 二月, <梁><高祖>封王爲寧東將軍都督<營>·<平>二州諸軍事<高句麗>王, 遣使者<江注盛{江法盛}>??, 賜王衣冠劒佩, <魏>兵就海中執之, 送<洛陽>. <魏>封王爲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九月, 入<梁>朝貢.


李丙燾. 「魏書」. 「資治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양 나라 고조가 왕을 영동장군도독영평이주제군사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사신 강 주성을 보내 의관·칼·패물 등을 전하게 하였다. 위 나라 군사가 바다에서 양 나라 사신을 붙잡아 낙양으로 보냈다. 위 나라에서 왕을 안동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9월, 양 나라에 가서 조공하였다.


○三年, 夏四月, 王幸<卒??{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所經州邑貧乏者, 賜??????{곡三斛??/곡人一斛??.}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3년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읍의 가난한 자들에게 한 사람마다 곡식 한 섬씩을 주었다.


○五年春, 旱. 秋八月, 遣兵侵<百濟>. 冬十月, 饑, 發倉賑救. 十一月, 遣使??{如}????{<魏>}??, 進良馬十匹.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기근이 들자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八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8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九年, 冬十一月, 遣使入{如}????{<梁>}??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겨울 11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一年, 春三月, 王전於??城<{黃城}>??之東. 冬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 克之, 殺獲二千餘級.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3월, 왕이 황성 동쪽에서 사냥을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와 오곡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2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十三年, 夏五月, 王薨, 號爲<安臧王{安藏王}??>. [是<梁><中大通>三年, <魏><普泰>元年也. 『梁書』云: "<安臧王{安藏王}??>在位第八年, <普通>七年卒." 誤也.]


허성도.허성도.

13년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안장왕이라 하였다.[이 때는 양 나라 중대통 3년이오, 위 나라 보태 원년이다. 「양서」에는 '안장왕이 재위 8년, 보통 7년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安原王>, 諱<寶延>, <安臧王{安藏王}??>之弟也. 身長七尺五寸, 有大量, <安臧{安藏}??>愛友之. <安臧{安藏}??>在位十三年, 薨, 無嗣子, 故卽位. <梁><高祖>下詔襲爵.


허성도.허성도.허성도.

안원왕의 이름은 보연이며,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커서 안장왕이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에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보연이 왕위에 올랐다. 양 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전왕의 작위를 계승케 하였다.


○二年, 春三月, <魏>帝詔策使持節散騎常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賜衣冠·車旗之飾.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六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2년 봄 3월, 위 나라 황제가 왕을 사지절산기상시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의관과 거기 등의 장식품을 주었다.

여름 4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平成>爲太子. 二月, 遣使入<魏>朝貢.


3년 봄 정월, 왕의 아들 평성을 태자로 삼았다.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四年, <東魏>詔加王驃騎大將軍, 餘悉如故. 遣使入<魏>朝貢.


4년, 동위에서 조서를 보내 왕에게 표기대장군의 작위를 더하여 주고, 다른 관직은 모두 종전과 같게 하였다.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春二月, 遣使入<梁>朝貢. 夏五月, 國南大水, 漂沒民屋, 死者二百餘人. 冬十月, 地震. 十二月, 雷, 大疫.


5년 봄 2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 남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었다. 사망자가 2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12월, 우레가 있었다.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六年, 春夏, 大旱. 發使撫恤饑民. 秋八月, 蝗. 遣使入<東魏>朝貢.


6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사신을 보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三月, 民饑, 王巡撫賑救.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7년 봄 3월,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었다. 왕이 순행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

겨울 12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九年, 夏五月, 遣使入<東魏>朝貢.


9년 여름 5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年, 秋九月, <百濟>圍<牛山城>, 王遣精騎五千, 擊走之. 冬十月, 桃李華. 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10년 가을 9월,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자 왕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2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一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11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二年, 春三月, 大風拔木飛瓦. 夏四月, 雹.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12년 봄 3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았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겨울 12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冬十一月, 遣使入<東魏>朝貢.


13년 겨울 11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四年, 冬十一月, 遣使入<東魏>朝貢.


14년 겨울 11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五年, 春三月, 王薨, 號爲<安原王>.[是<梁><大同>十一年, <東魏><武定>三年也. 『梁書』云: "<安原>以<大淸>二年卒, 以其子爲寧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 誤也.]


15년 봄 3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안원왕이라 하였다.[이 때가 양 나라 대동 11년 동위 무정 3년이다. 「양서」에 '안원왕이 대청 2년에 죽으니, 그의 아들을 영동장군고구려왕낙랑공으로 삼았다'고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陽原王>[或云<陽崗上好王>.], 諱<平成>, <安原王>長子. 生而聰慧, 及壯, 雄豪過人, 以<安原>在位三年, 立爲太子. 至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양원왕[양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평성이며, 안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해서는 남달리 호방하였다. 안원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다. 15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겨울 12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一{二}??年, 春二月, 王都梨樹連理. 夏四月, 雹. 冬十一{二}??月, 遣使入<東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가 있었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겨울 11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年, 秋七月, 改築<白巖城>, 葺<新城>. 遣使入<東魏>朝貢.


3년 가을 7월,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수리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四年, 春正月, 以<濊>兵六千, 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朱珍>來援, 故不克而退. 秋九月, <丸都>進嘉禾. 遣使入<東魏>朝貢.


4년 봄 정월, 예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주진이 백제를 도왔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가을 9월,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遣使入<東魏>朝貢.


5년,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年, 春正月, <百濟>來侵, 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取二城. 夏六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北齊>封王, 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6년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3월,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성을 빼앗았다.

여름 6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북제가 왕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七年, 夏五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新羅>來攻, 取十城{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여름 5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 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八年, 築<長安城>.


8년, 장안성을 쌓았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十二月晦, 日有食之. 無氷.


10년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2월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물이 얼지 않았다.


○十一年, 冬十月, 虎入王都, 擒之. 十一月, 大白{太白}??晝見. 遣使入<北齊>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겨울 10월, 호랑이가 도성 안에 들어와 생포하였다.

11월, 낮에 금성이 나타났다.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立王子<陽成>爲太子, 遂宴群臣於內殿. 冬十月, <丸都城><干朱理>叛, 伏誅.


13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양성을 태자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겨울 10월, 환도성의 간주리가 모반하여 처형되었다.


○十五年, 春三月, 王薨, 號爲<陽原王>.


15년 봄 3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양원왕이라 하였다.


○<平原王>[或云<平崗上好王>.], 諱<陽成>[『隋唐書』作湯.], <陽原王>長子. 有膽力, 善騎射. <陽原王>在位十三年, 立爲太子. 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평원왕[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양성[「수당서」에는 탕(湯)으로 되어 있다.]이며, 양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양원왕 재위 13년에 태자가 되었다. 15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北齊>廢帝封王, 爲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 王幸<卒本>, 祀始祖廟. 三月, 王至自<卒本>, 所經州郡, 獄囚除二死, 皆原之.


2년 봄 2월, 북제의 폐제가 왕을 사지절영동이교위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3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 군의 죄수들 중에서 사형수를 제외하고 모두 사면하였다.


○三年, 夏四月, 異鳥集宮庭. 六月, 大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3년 여름 4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모여 들었다.

6월, 홍수가 났다.

겨울 11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四年, 春二月, <陳><文帝>詔授王寧東將軍.


4년 봄 2월, 진 나라 문제가 조서를 보내 왕에게 영동장군이라는 관작을 주었다.


○五年, 夏, 大旱, 王減常膳, 祈禱山川.


5년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왕이 평시의 음식을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


○六年, 遣使入<北齊>朝貢.


6년,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正月, 立王子<元>爲太子. 遣使入<北齊>朝貢.


7년 봄 정월, 왕자 원을 태자로 삼았다.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冬十二月, 遣使入<陳>朝貢.


8년 겨울 1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二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12년 겨울 11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陳>朝貢. 秋七月, 王전於<浿河>之原, 五旬而返. 八月, 重修宮室, 蝗旱, 罷役.


13년 봄 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왕이 패하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8월, 궁실을 중수하는 도중에 메뚜기 떼가 생기고 날씨가 가물어 공사를 중단하였다.


○十五年, 遣使入<北齊>朝貢.


15년,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遣使入<陳>朝貢.


16년 봄 정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九年, 王遣使入<周>朝貢, <周><高祖>拜王爲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19년, 왕이 주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주 나라 고조가 왕을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임명하였다.


○二十三年, 春二月晦, 星隕如雨. 秋七月, 霜雹殺곡. 冬十月, 民饑, 王巡行撫恤. 十二月, 遣使入<隋>朝貢, <高祖>授王大將軍<遼東郡>公.


23년 봄 2월 그믐날, 유성이 비오듯 떨어졌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였다.

겨울 10월,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왕이 순행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

12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수 나라 고조가 왕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이라는 관작을 주었다.


○二十四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冬十一月, 遣使入<隋>朝貢.


24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二月, 下令: 감不急之事, 發使郡邑勸農桑. 夏四月, 遣使入<隋>朝貢. 冬, 遣使入<隋>朝貢.


25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왕이 급하지 않은 부역을 줄이고, 군읍에 사신을 파견하여 농사와 양잠을 권장토록 하였다.

여름 4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春, 遣使入<隋>朝貢. 夏四月, <隋><文帝>宴我使者於<大興殿>.


26년 봄,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수 나라 문제가 우리의 사신을 위하여 대흥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二十七年, 冬十二月, 遣使入<陳>朝貢.


27년 겨울 1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28년,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三十二年, 王聞<陳>亡, 大懼, 理{治}??兵積곡, 爲拒守之策. <隋><高祖>賜王璽書, 責以: "雖稱藩附, 誠節未盡." 且曰: "彼之一方, 雖地狹人少,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쇄心易行, 率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才彦? 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高句麗>之人, 多少<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 何待多力? 殷勤曉未{示}??, 許王自新耳." 王得書惶恐, 將奉表陳謝而未果, 王在位三十二年, 冬十月, 薨. 號曰<平原王>.[是<開皇>十年. 『隋書』及『通鑑』書: "<高祖>賜璽書於<開皇>十七年." 誤也.]

三國史記卷第十九.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2년, 진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왕은 대단히 두려워 하였다. 왕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국방을 강화할 대비책을 세웠다. 수 나라 고조는 왕에게 조서를 보내 "비록 스스로 번방이라고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대의 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지만, 이제 내가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대로 비워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관리를 선택하여, 그곳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쳐서 우리의 법도를 따른다면, 그 때는 곧 나의 좋은 신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왜 힘들여 다른 인재를 보내겠는가?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 인구가 진 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왕은 말하여 보라. 내가 왕을 용서하려는 심정이 없고, 왕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로 한다면, 한 사람의 장군에게 정벌을 명령해도 될 것이니, 어찌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간곡한 말로 타이르는 뜻은, 왕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를 보고 황공하여 표문을 올려 사의를 표하려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재위 32년 겨울 10월에 죽었다. 호를 평원왕이라 하였다.[이 때는 수 나라 문제 개황 10년이다. 「수서」와 「통감」의 '고조가 개황 17년에 조서를 주었다'는 기록은 잘못이다.]

삼국사기 권 제 19 끝




三國史記卷第二十.



삼국사기 권 제 20


高句麗本紀第八.

<영陽王>·<建武王{榮留王}>??.


趙炳舜.

고구려본기 제 8

영양왕, 건무왕(영류왕).


○<영陽王>[一云<平陽>.], 諱<元>[一云<大元>.], <平原王>長子也. 風神俊爽, 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王薨, 太子卽位. <隋><文帝>遣使拜王, 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郡>公, 賜衣一襲.


영양왕[평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원[대원이라고도 한다.]이며,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평원왕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다. 32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수 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전왕의 요동군공의 관직을 계승케 하고, 옷 한 벌을 주었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隋>, 奉表謝恩進奉, 因請封王, 帝許之. 三月, 策封爲<高句麗>王, 仍賜車服. 夏五月, 遣使謝恩.


2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사은하고 선물을 바친 다음,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문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3월, 왕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복식을 주었다.

여름 5월, 왕이 사신을 보내 사은하였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3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夏五月, 遣使入<隋>朝貢.


8년 여름 5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충>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績{王世積}>??병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투關>, 値水료, 궤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후>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還師,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 諭以<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


李丙燾. 「隋書」. 「資治通鑑」.

9년, 왕이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하였으나, 영주 총관 위 충이 우리 군사를 물리쳤다. 수 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과 왕 세적 등을 모두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월, 문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 나후는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중의 대부분이 죽었다. 왕은 이를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다. 표문에서 자신을 "요동의 분토(糞土)에 사는 신하 아무개"라고 자칭하였다. 문제가 그 때서야 군대를 철수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왕 창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로 가는 수 나라 군사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문제가 백제왕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그들을 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백제의 국경을 침공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11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태학 박사 이 문진으로 하여금 옛 사기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다섯 권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책 1백권을 쓰고, 이것를 「유기」라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十四年, 王遣將軍<高勝>, 攻<新羅><北漢山城>, <羅>王率兵, 過<漢水>. 城中鼓조相應, <勝>以彼衆我寡, 恐不克而退.


14년, 왕이 장군 고 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왔다. 그 때 북한산성의 신라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신라군의 함성과 호응하였다. 고 승이 상대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十八年, 初, <煬帝>之幸<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隱, 與之見帝. 黃門侍郞<裴矩>說帝曰: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城, 先帝欲征之久矣. 但<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今其使者, 親見<啓民>, 擧國從化, 可因其恐懼, 脅使入朝." 帝從之, 래<牛弘>宣旨曰: "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탁郡>. 爾還日語爾王, 宜早來朝, 勿自疑懼, 存育之禮, 當如<啓民>,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王懼: 藩禮頗闕, 帝將討之. <啓民>, <突厥>可汗也. 夏五月, 遣師攻<百濟><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還.


18년, 초기 수 나라 양제가 계민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마침 계민에게 가 있었다. 계민이 우리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어, 우리 사신과 함께 양제를 배알하였다. 이 때 황문 시랑 배 구가 양제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에게 봉하였던 땅이며, 한 나라와 진 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께서는 오랫 동안 그들을 정벌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 량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불초하여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이니,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방치할 것입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왕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제가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도록 우 홍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명년에는 응당 탁군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는 날로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입조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입조하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토벌하리라."

왕이 이 말을 듣고, 번방으로서의 예절을 하지 않았으므로, 양제가 장차 토벌하러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 즉 추장이었다.

여름 5월, 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항복받지 못하고, 군사를 석두성으로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十九年, 春二月, 命將襲<新羅>北境, 虜獲八千人. 夏四月, 拔<新羅><牛鳴山城>.


19년 봄 2월, 장수에게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도록 명령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여름 4월, 신라의 우명산성을 빼앗았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夏四月, 車蓋至<탁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탁郡>.


22년 봄 2월, 수 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二十三年, 春正月王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渤}>??·<碣>之間, 천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訖{흘}??今. 권彼華壤, 전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曰{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극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번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질<遼西>.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품正朔, 遂復탈攘琛責{신}??, 알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유車奉使, 爰기海東, 旌節所次, 途經藩境, 而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 且法令苛酷, 賦斂煩重, 强臣豪族, 咸執國鈞, 朋黨比周, 以之成俗. 賄貨如市, 寃枉莫申. 重以仍歲災凶, 比屋饑饉, 兵戈不息, 요役無期, 力竭轉輸, 身塡溝壑. 百姓愁苦, 爰誰適從? 境內哀惶, 不勝其弊. 廻首面內, 各懷性命之圖, 黃髮稚齒, 咸興酷毒之歎. 省俗觀風, 爰계幽朔, 弔人問罪, 無俟再駕. 於是, 親摠六師, 用申九伐, 拯厥점危, 협{協}??從天意, 殄玆逋穢, 剋嗣先謨. 今宜授律啓行, 分麾계路, 掩<渤海>而雷震, 歷<扶餘>以電掃. 比干{戈}??按甲誓旅而後行, 三令{先}??五申必勝而後戰. 左十二軍, 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토>·<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 右十二軍, 出<점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이>·<체方{帶方}>??·<襄平>等道. 絡驛{繹}??引途, 摠集<平壤>."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궤輸者倍之. 宜杜{社}??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계城>北.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胄·纓拂·旗번, 每團異色.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 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 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二月, 帝御師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麥鐵杖>躍登岸, 與<錢士雄>·<孟叉{孟(+金)叉}>??等, 皆戰死, 乃斂兵引橋, 復就西岸. 更命少府監<何稠>接橋, 二日而成. 諸軍相次繼進, 大戰于東岸. 我兵大敗, 死者萬計. 諸軍乘勝, 進圍<遼東城>, 則<漢>之<襄平城>也. 車駕到{度}??<遼>, 下詔赦天下, 命刑部尙書<衛文昇>等, 撫<遼>左之民, 給復十年, 建置郡縣, 以相統攝. 夏五月, 初, <(+隋)>??諸將之東下也, 帝戒之曰: "凡軍士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遼東>數出戰不利, 乃영城固守. 帝命諸軍攻之, 又래諸將, <高句麗>若降, 則宜撫納, 不得縱兵. <遼東城>將陷, 城中人輒言請降, 諸將奉旨, 不敢赴期{機}??,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旣而城久不下. 六月己未, 帝幸<遼東城>南, 觀其城池形勢, 因召諸將, 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 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邪?" 諸將咸戰懼失色. 帝因留止城西數里, 御<六合城>, 我諸城堅守不下.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축로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護兒>欲乘勝趣其城, 副摠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 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 而僞敗. <護兒>逐之入城, 縱兵부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 不過數千人.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 出<遼東>道; 右翊衛大將軍<薛世雄>, 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 出<玄토>道; 右禦衛將軍<張瑾>, 出<襄平>道; 右武侯將軍<趙孝才>, 出<碣石>道; <탁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 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 出<增地>道, 皆會於<鴨록{鴨綠}水>??西. <述>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槍삭幷衣資戎具火幕, 人別三石已上, 重莫能勝致. 下令軍中: "遺棄米粟者斬!" 士卒皆於幕下, 掘坑埋之, 재行及中路, 糧已將盡.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實欲觀虛實. <子仲文{于仲文}>??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文德>還, 旣而悔之, 遣人태<文德>曰: "更欲有言, 可復來." <文德>不顧, 濟<鴨록{鴨綠}水>??而去. <仲文>與<述>等,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糧盡欲還. <仲文>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固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 古之良將, 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 時, 帝以<仲文>有計劃, 令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 <述>等不得已而從之, 與諸將, 渡水追<文德>. <文德>見<述>軍士有饑色, 故欲疲之, 每戰輒走. <述>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초擊, <述>等且戰且行.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록水{鴨綠水}>??,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 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到{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帝大怒, 鎖擊{繫}??<述>等, 癸卯引還. 初, <百濟>王<璋>遣使, 請討<高句麗>. 帝使之첨我動靜, <璋>內與我潛通. <隋>軍將出, <璋>使其臣<國知牟{國智牟}>??, 入<唐{隋}>??請師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 詣<百濟>, 告以期會. 及<隋>軍渡<遼>, <百濟>亦嚴兵境上, 聲言助<隋>, 實持兩端. 是行也, 唯於<遼水>西, 拔我<武려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북한본」.『북한본』.李丙燾. 「隋書」.李丙燾. 「隋書」.『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隋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隋書」. 「資治通鑑」.李丙燾. 「資治通鑑」.『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북한본』.李丙燾. 「隋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濟紀.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정월 임오일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의 미물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와 예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 나라와 위 나라의 거듭된 토벌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니,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동·현토·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니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천도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나니, 그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그들이 도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과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넘치고 있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왕이)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입조하는 의식에도 (왕이) 직접 오기를 꺼려 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문제의 정벌 시에 그들은 천망에서 빠져 나갔다. 이전에 사로잡았을 때에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 주었고, 뒷날 항복하였을 때도 처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또한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 술직하며, 해변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거늘, 고구려는 이 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내왕하는 길을 막고 있다. 그들은 죄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되는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를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 하겠는가? 이런 행동을 용서한다면, 어떤 행동인들 용서하지 못하랴! 또한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과중하며, 권력있는 신하들과 세도있는 벌족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고, 당파끼리 결탁하는 것이 습속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뇌물로 주고 받는 재화가 시장을 이루니, 백성들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곳이 없다. 해마다 재변과 흉년이 거듭 들어 집집마다 굶주리며, 전쟁은 그치지 않고 부역은 기한없이 계속되어, 전쟁 물자를 나르는 일에 힘을 다 쓰니, 지친 몸이 계곡에 쓰러져 간다. 이러한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누가 제거해줄 것인가? 고구려의 전 지역이 이와 같이 슬픔과 공포에 잠겨 있으니,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머리를 돌려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들은 각각 생명이나 보존하기를 도모하며,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정치의 혹독함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지방의 풍속을 살피기 위하여 북방에 왔으니,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자에게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할 것이다. 이에 나는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밝혀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에 순종하여 이 역적을 무찔러 선조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을 개시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향할지니, 발해를 뒤덮어 우레같이 진동케 하고, 부여를 짓밟아 번개처럼 휩쓸 것이다. 병기와 갑마를 정돈하고 부대를 경계한 후에 행군할 것이며, 재삼재사 훈시하여 필승을 꾀한 후에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좌 12군은 누방·장잠·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토·부여·조선·옥저·낙랑 방면으로 진군할 것이오, 우 12군은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돈·숙신·갈석·동이·대방·양평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군사의 총수는 1백13만 3천8백 명이였는데, 외형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수 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지내고,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게 제사지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아장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 1명을 두었으며, 단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파송하되, 상호 거리가 40리씩 되게 하였다.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백 60리에 뻗쳤다. 황제의 진영에는 12위·3대·5성·9시가 있는데, 내외·전후·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뻗쳤다. 근고 이래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성대한 적이 없었다.

2월, 양제가 군사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사가 모여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우리 군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 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제가 공부 상서 우문 개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1장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하였다. 이 때 우리 군사가 크게 공격하였다. 수 나라 군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하였으나, 우리 군사들은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 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다. 수 나라 군사 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맥 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 사웅·맹 차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기 때문에 수나라 군사는 곧 부교를 걷어 다시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양제가 다시 소부감 하 조에게 명하여 부교를 길게 늘이도록 하였다. 부교는 이틀 만에 완성되었다. 모든 부대가 차례로 건너와 동쪽 언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1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수 나라의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 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양제가 요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전국의 죄수를 사면하고, 형부 상서 위 문승 등을 시켜 요수의 왼쪽 지방 백성들을 위무하였으며, 그들에게 10년 간의 부역을 면제시키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수 나라 장수들이 동쪽으로 오는 초기에 양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다. "모든 군사들의 진퇴를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때 요동의 우리 군사는 자주 싸우는 것이 해롭다 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다. 양제는 여러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요동성을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그들을 무마하여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들에게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될 지경이 되면, 성 안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 나라 장수들은 양제의 지시로 말미암아 적시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먼저 양제에게 보고를 띄웠다. 그러나 회보가 올 때마다 성의 방비가 갖추어져서 수시로 나와 항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두세 번 계속되었으나, 양제는 끝내 알아채지를 못하고, 성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6월 기미일에 양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곽과 연못의 형세를 관찰하고,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벼슬이 높다거나 또한 가문과 세도를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하려 하는가? 전일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그대들이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그대들의 단점이 들어날까 두려워 한 것이로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행동을 보아 그대들의 목을 베려는 것인데, 그대들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다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그대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두 실색을 하고 무서워 떨었다. 양제는 성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합성을 엿보고 있었으나 우리의 모든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우리 군사와 조우하자 그들이 진격하여 우리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총관 주 법상이 만류하며, 여러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예병 수만 명을 선발하여 곧장 성밑까지 왔다. 이 때 우리 장수는 외성에 있는 빈 절간에 군사를 숨겨 놓고, 군사를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체 하였다. 내호아가 성 안으로 쫓아 들어와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며, 미쳐 대오를 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우리의 숨었던 군사들이 출동하니 내호아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하였고,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우리 군사는 선창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수 나라 장수 주 법상이 진을 정비하여 대비하고 있으므로 우리 군사는 곧 물러 나왔다. 내호아는 군사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돌아가서 주둔하며, 다시는 감히 다른 군사들과 호응하고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좌익위 대장군 우문 술은 부여로 출동하고, 우익위 대장군 우 중문은 낙랑으로 출동하고, 좌효위 대장군 형 원항은 요동으로 출동하고, 우익위 대장군 설 세웅은 옥저로 출동하고, 우둔위 장군 신 세웅은 현토로 출동하고, 우어위 장군 장 근은 양평으로 출동하고, 우무후 장군 조 효재는 갈석으로 출동하고, 탁군 태수 검교 좌무위 장군 최 홍승은 수성으로 출동하고, 검교 우어위 호분 낭장 위 문승은 증지로 출동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 술 등의 군사가 노하·회원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백일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짧은 창·긴 창·옷감·전투 기재·장막 등을 주었다. 이에 따라 군사마다 3섬 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우문 술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고 하였다. 군졸들은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에 따라 겨우 중간 쯤 행군하였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떨어졌다. 이 때 왕은 대신 을지 문덕을 수 나라 군영으로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실력 유무를 알아 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 중문은 양제로부터 만일 고려왕이나 을지 문덕이 오는 기회가 있거든 꼭 사로잡으라는 비밀 지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우 중문은 을지 문덕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상서 우승 유 사룡이 위무사로 와있다가 강력히 이를 말렸다. 우 중문은 마침내 이 말을 듣고 을지 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우 중문은 곧 이를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을지 문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또 와도 좋다." 그러나 을지 문덕은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 중문과 우문 술 등은 을지 문덕을 놓치고 내심 불안하였다. 우문 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우 중문이 우문 술에게, 정예 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우문 술이 강하게 말렸다. 중문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도 적은 적군을 깨뜨리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보려는가? 그리고 나는 이번의 정벌에 공이 없을 줄 미리부터 짐작하였다. 왜냐 하면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룬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당시 양제는 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훌륭하다하여, 모든 부대로 하여금 지휘 사항을 자문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 술 등이 마지 못하여 우 중문의 말대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을지 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 문덕은 우문 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도주하였다. 우문 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서 일곱 번을 모두 이겼다. 그들은 여러번 이겼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 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우문 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 간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고 하였다. 우문 술은 자기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돌아갔다. 우문 술은 방진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그 때, 우리 군사가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우문 술 등은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가을 7월, 우문 술의 군사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 장군 신 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수 나라 장군 천수 사람 왕 인공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사를 막아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 술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퇴각하였다. 다만 위 문승의 군대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 7백명 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양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 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에 돌아갔다.

애초에, 백제왕 장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을 때, 양제는 백제로 하여금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이 때 백제왕 장은 비밀리에 우리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수 나라 군사가 출동할 때, 백제왕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로 하여금 수 나라에 가서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양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 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었다. 수 나라 군사가 요수를 건너오게 되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수 나라에 협조한다는 것을 성명하였으나, 실제로는 양 쪽을 모두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 번 싸움에서 수 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의 무려라 지역을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탁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二月, 帝謂侍臣曰: "<高句麗>小虜, 侮慢上國. 今, 拔海移山, 猶望克果, 황此虜乎?" 乃復議代{伐}??. 左光祿大夫<郭榮>諫曰: "戎狄失禮, 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혜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 帝不聽. 夏四月, 車駕度<遼>, 遣<宇文述>與<楊義臣>, 趣<平壤>. <王仁恭>出<扶餘>道, 進軍至<新城>. 我兵數萬拒戰, <仁恭>帥勁騎一千, 擊破之. 我軍영城固守. 帝命諸將攻<遼東>, 聽以便宜從事. 飛樓동·雲梯·地道, 四面俱進, 晝夜不息. 我應變拒之, 二十餘日不拔. 主客死者甚衆. 衝梯竿長十五丈, 驍果<沈光>升其端, 臨城與我軍戰, 短兵接殺十數人. 我軍競擊之, 而墜未及地, 適遇竿有垂환, <光>接而復上. 帝望見壯之, 卽拜朝散大夫. <遼東城>久不下, 帝遣造布囊百餘萬口, 滿貯士{土}??, 欲積爲魚梁大道, 闊三十步, 高與城齊, 使戰士登而攻之. 又作八輪樓車, 高出於城, 夾魚梁道, 欲俯射城內. 指期將攻, 城內危蹙. 會, <楊玄感>叛書至, 帝大懼. 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 益憂之. 兵部侍郞<斛斯政>, 素與<玄感>善, 內不自安, 來奔. 帝夜密召諸將, 使引軍還. 軍資器械攻具, 積如丘山, 營壘帳幕, 案堵不動, 衆心흉懼, 無復部分, 諸道分散. 我軍卽時覺之, 然不敢出, 但於城內鼓조. 至來日午時, 方漸出外, 猶疑<隋>軍詐之. 經二日, 乃出數千兵追섭, 畏<隋>軍之衆, 不敢逼, 常相去八九十里. 將至<遼水>, 知御營畢度, 乃敢逼後軍. 時, 後軍猶數萬人, 我軍隨而초擊, 殺략數千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봄 정월, 수 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국 군사들을 탁군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를 만들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월, 양제가 근신들에게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의 국력이 바다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거늘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하고,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좌광록 대부 곽 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의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나, 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양제는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 술과 양 의신으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고, 왕 인공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우리 군사 수만 명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인공의 강병 1천여 명에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제가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동·운제·지도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 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 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 심 광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 보며 우리 군사와 단병으로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 대부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자, 양제는 1백여 만 개의 푸대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푸대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뚝길을 쌓게 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또 한편으로 높이가 성보다 훨씬 높은 팔륜누거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뚝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 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 하자, 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수 나라에서 양 현감이 반역하였다는 보고가 오자, 양제는 크게 두려워 하였다. 또한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현감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이 때 수 나라 병부 시랑 곡 사정이 본래부터 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해왔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군수 기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은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가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고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오히려 수 나라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추적해 갔다. 그러나 수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9십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 군사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帝詔百寮, 議伐<高句麗>, 數日無敢言. 詔復徵天下兵, 百道俱進. 秋七月, 車駕次<懷遠鎭>. 時, 天下已亂, 所徵兵多失期不至, 吾國亦困弊.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 遣使乞降, 因{囚}??送<斛斯政>. 帝大悅, 遣使持節, 召<護兒>還. 八月, 帝自<懷遠鎭>班師. 冬十月, 帝還<西京>, 以我使者及<斛斯政>, 告太廟, 仍徵王入朝, 王竟不從. 래將帥嚴裝, 更圖後擧, 竟不果行.


李丙燾. 「隋書」. 「資治通鑑」.

25년 봄 2월, 양제가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수일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전국 군사를 소집하여 모든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공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제가 회원진으로 행차하였다. 이 때 수 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군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 나라도 역시 피폐된 상태였다. 수 나라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나아가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을 돌려 보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 가진 사절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 양제가 회원진에서 군사를 거두었다.

겨울 10월, 양제가 서경에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에 고하고, 또한 우리 왕에게 수 나라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왕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제가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二十九年, 秋九月, 王薨, 號曰<영陽王>.


29년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영양왕이라 하였다.


○<榮留王>, 諱<建武>[一云成.], <영陽王>異母弟也. <영陽>在位二十九年薨, 卽位.


영류왕의 이름은 건무[무를 성이라고도 한다.]이며, 영양왕의 이복 아우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건무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遣使如<唐>朝貢. 夏四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2년 봄 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 지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秋七月, 遣使如<唐>朝貢.


4년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遣使如<唐>朝貢. <唐><高祖>感<隋>末戰士多陷於此, 賜王詔書曰: "朕恭膺寶命, 君臨率土, 祗順三靈, 懷柔萬國, 普天之下, 情均撫字, 日月所炤, 咸使乂安. 王統攝<遼>左, 世居藩服, 思稟正朔, 遠循職貢. 故遣使者, 跋涉山川, 申布誠懇, 朕甚嘉揖{焉}??. 方今, 六合寧晏, 四海淸平, 玉帛旣通, 道路無壅, 方申緝{輯}??睦, 永敦聘好, 各保疆역, 豈非盛美? 但<隋>氏季年, 連兵構難, 攻戰之所, 各失其泯{氓}??, 遂使骨肉乖離, 室家分析, 多歷年歲, 怨曠不申. 今, 二國通和, 義無阻異. 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 尋卽遣送, 彼處所有此國人者, 王可放還, 務盡綏{撫}??育之方, 共弘仁恕之道." 於是, 悉搜括華人以送之, 數至萬餘. <高祖>大喜.


李丙燾. 「舊唐書」.李丙燾. 「舊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

5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나라 고조가 수 나라 말기에 많은 군사들이 우리 나라에 붙잡혀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내가 공손히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삼가 천·지·인의 삼령에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니, 천하 백성들이 모두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 왕은 요동의 동쪽 지역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번방의 자격으로 중국의 정삭을 받들며, 오랜 동안 술직과 조공의 직무를 수행하여, 사신을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보여왔으니, 이를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니, 예물이 내왕하되 길이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길이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기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 나라 말년에 연이어 전쟁을 하였으니, 전쟁의 땅에는 어디에나 유랑민이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으니, 우리의 정의는 동일하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 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도 왕이 돌려 보내어,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여,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넒혀 나가자."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을 전부 찾아 모아 돌려 보냈다.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六年, 冬十二月, 遣使如<唐>朝貢.


6년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尙書<沈叔安>, 策王爲上枉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往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7년 봄 2월,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 나라에서 형부 상서 심 숙안을 보내 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도사에게 명하여 천존의 화상과 도교를 가지고 고구려에 가서 「노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백성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王遣使入<唐>, 求學佛·老敎法, 帝許之.


8년,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노자의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九年, <新羅>·<百濟>遣使於<唐>, 上言: "<高句麗>閉道, 使不得朝, 又屢相侵掠." 帝遣散騎侍郞<未子奢{朱子奢}>??, 持節諭和. 王奉表謝罪, 請與二國平.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신라와 백제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고 예방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자주 침략한다"라고 말하였다. 당 나라 황제가 산기 시랑 주 자사에게 황제의 신임표를 주어 보내며, 세 나라가 화친하기를 권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신라·백제 두 나라와 화친하겠다고 하였다.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힐利>可汗, 兼上封域圖.


11년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태종이 돌궐의 힐리 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를 올렸다.


○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九月, 遣使入<唐>朝貢.


12년 가을 8월, 신라 장군 김 유신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예<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西}??南至海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李丙燾. 「舊唐書」.

14년, 당 나라에서 광주 사마 장 손사를 보내 수 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제사지내고, 당시에 세웠던 경관을 헐어 버렸다.

봄 2월, 왕이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 그 성의 동북 쪽은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동남 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이 성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


○二十一年, 冬十月, 侵<新羅>北邊<七重城>. <新羅>將軍<閼川>逆之, 戰於<七重城>外, 我兵敗뉵.


21년 겨울 10월, 신라 북쪽 변경에 있는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우리와 싸웠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二十三年, 春二月, 遣世子<桓權>, 入<唐>朝貢. <太宗>勞尉{慰}??, 賜賚之特厚. 遣王子弟入<唐>, 請入國學. 秋九月, 日無光, 經三日復明.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2월, 당 나라에 세자 환권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수고를 위로하고 특별히 후하게 예물을 주었다. 왕이 당 나라에 자제들을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햇빛이 없어졌다가 사흘 후에 다시 밝아졌다.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回{因}??奉使첨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大德>言於帝曰: "其國聞<高昌>亡, 大懼, 館候之勤, 加於常數." 帝曰: "<高句麗>本四郡地耳. 吾發卒數萬, 攻<遼東>, 彼必傾國救之. 別遣舟師出<東萊>, 自海道趨<平壤>, 水陸合勢, 取之不難. 但<山東>州縣, 凋채未復, 吾不欲勞之耳."


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당 나라 임금이 우리 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 낭중 진 대덕을 보내 왔다. 대덕이 우리 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니,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니,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 나라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으로서 수 나라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니,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왕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 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 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대덕은 황제에게 "고구려는, 고창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 접대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는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군사 수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 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의 주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王命西{東}??部大人<蓋蘇文>, 監長城之役. 冬十月, <蓋蘇文>弑王. 十一月, <太宗>聞王死, 擧哀於苑中, 詔贈物三百段, 遣使持節吊祭.

三國史記卷第二十.


李丙燾. 列傳.

趙炳舜. 「三國史節要」.

25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서부 대인 개소문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 당 나라 태종은 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원중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3백 단의 폐백을 부의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지절사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0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一.



삼국사기 권 제 21


高句麗本紀第九.

<寶臧王{寶藏王}>??上.


허성도.『三國史記』 목록의 21권조와 22권조, 『三國史記』 21卷 高句麗本紀 9권의 제목과 본문에는 '寶臧王'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史記』 22卷 高句麗本紀 10권의 제목에는 '寶藏王'으로 되어 있다. 趙炳舜은 이를 근거로 ''寶臧王'이 옳다고 보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國史大事典 등에 입각하여 '寶藏王'으로 기록한다.

고구려본기 제 9

보장왕(상)


○王, 諱<臧{藏}??>[或云<寶臧{寶藏}??>.], 以失國故無諡. <建武王>弟<大陽王>之子也. <建武王>在位第二十五年, <盖蘇文{蓋蘇文}??>弑之, 立<臧>繼位.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


허성도.허성도.李丙燾.

왕의 이름은 장[혹은 보장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나라를 잃은 까닭에 시호가 없다. 그는 건무왕의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이다. 건무왕 재위 25년에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김 춘추를 보내 구원병을 청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二年, 春正月, 封父爲王. 遣使入<唐>朝貢. 三月, <蘇文>告王曰: "三敎譬如鼎足, 闕一不可. 今儒釋병興, 而道敎未盛, 非所謂備天下之道術者也. 伏請遣使於<唐>, 求道敎以訓國人." 大王深然之, 奉表陳請. <太宗>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老子>『道德經』. 王喜, 取僧寺館之. 閏六月, <唐><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而專國政, 誠不可忍. 以今日兵力, 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使<契丹>·<靺鞨>擾之, 何如?"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嚴設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必更驕惰, 愈肆其惡, 然後討之, 未晩也." 帝曰: "善." 遣使持節備禮冊命, 詔曰: "懷遠之規, 前王令典, 繼世之義, 列代舊章. <高句麗>國王<臧{藏}??>, 器懷韶{昭}??敏, 識宇詳正, 早習禮敎, 德義有聞. 肇承藩業, 誠款先著, 宜加爵命, 允玆故實, 可上柱國<遼東郡>公{王}??<高句麗>王." 秋九月, <新羅>遣使於<唐>, 言: <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乞兵救援. 十五日, 夜明不見月, 衆星西流.


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 「冊府元龜」.

2년 봄 정월, 왕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개소문이 왕에게 말했다.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는, 솥의 다리에 비유되나니,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흥하고 있으나 도교가 성하지 않으니 천하의 도술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청하건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왕이 이 말을 매우 옳게 여겨 당 나라에 표문을 올려 이 뜻을 알렸다. 태종이 도사 숙달 등 여덟 명을 보내고, 동시에 노자 도덕경을 주었다. 왕이 기뻐하며, 사찰에 그들의 숙소를 정해 주었다.

윤 6월, 당 나라 태종이 물었다.

"개소문은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휘두르고 있으니, 이는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을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 거란과 말갈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장손 무기가 대답하였다.

"소문은 자기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토죄할가 두려워 견고한 수비를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우선 참고 계시면 그는 방심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반드시 교만하고 나태해져서 그의 죄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연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옳다"라고 대답하고, 지절사를 보내 예를 갖추어 왕을 책봉하는 조칙을 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방을 포섭하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며, 세대를 계승케 하는 것은 역대의 오래된 규칙이다. 고구려 국왕 장은 사람됨이 밝고 명민하며, 식견이 상세하고 바르며, 일찍부터 예교를 배워 덕망과 의리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제 처음으로 번방의 왕위를 계승하여, 성실과 정성이 이미 드러나고 있으니, 마땅히 작위를 주어야 할 것이므로, 전례에 의하여 상주국 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봉함이 가할 것이다."

가을 9월, 신라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백제가 우리의 40여 성을 점령하고, 다시 고구려와 연합하여 조공하는 길을 막으려 한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5일, 밤이 밝기는 하였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으며, 뭇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命司農丞<相里玄奬>, 齎璽書賜王曰: "<新羅>委質國家, 朝貢不乏, 爾與<百濟>, 各宜집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矣." <玄奬>入境, <蓋蘇文>已將兵擊<新羅>, 破其兩城. 王使召之, 乃還. <玄奬>諭以勿侵<新羅>, <蓋蘇文>謂<玄奬>曰: "我與<新羅>, 怨隙已久. 往者, <隋>人入寇, <新羅>乘흔, 奪我地五百里, 其城邑皆據有之. 自非歸我侵地, 兵恐未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諸城,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且不言, <高句麗>豈得必求故地?" 莫離支竟不從. <玄奬>還, 具言其狀.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侵暴린國)??不可以不討." 秋七月, 帝將出兵, 래<洪>·<饒>·<江>三州, 造舡四百소, 以載軍糧. 遣<營州>都督<張儉>等, 帥<幽>·<營>二都督兵, 及<契丹>·<奚>·<靺鞨>, 先擊<遼東>, 以觀其勢. 以大理鄕{大理卿}??<韋挺>, 爲饋輸使, 自<河北>諸州, 皆受<挺>節度, 聽以便宜從事. 又命小卿<蕭銳>, 轉<河南>諸州糧入海. 九月, 莫離支貢白金於<唐>. <楮遂良>曰: "莫離支弑其君, 九夷所不容. 今將討之, 而納其金, 此고鼎之類也, 臣謂不可受." 帝從之. 使者又言: "莫離支遣官五十, 入宿衛." 帝怒謂使者曰: "汝曹皆事<高><武>, 有官爵, 莫離支弑逆, 汝曹不能復수, 今更爲之遊說, 以欺大國, 罪孰大焉?" 悉以屬大理. 冬十月, <平壤>雪{雨}??色赤. 帝欲自將討之, 召<長安>耆老, 勞曰: "<遼東>, 故<中國>地, 而莫離支賊殺其主, 朕將自行經略之. 故與父老納{約}??, 子若孫從我行者, 我能부循之, 無容恤也." 則厚賜布粟. 群臣皆勸帝毋行. 帝曰: "吾知之矣, 去本以趣末; 捨高以取下; 釋近而之遠, 三者爲不祥, 伐<高句麗>, 是也. 然<蓋蘇文>弑君, 又戮大臣以逞, 一國之人, 延頸待救, 議者顧未亮耳." 於是, 北輸粟<營州>, 東儲粟<古大人城>. 十一月, 帝至<洛陽>. 前<宜州>刺史<鄭天璹>, 已致仕, 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 召詣行在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 帝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 以刑部尙書<張亮>, 爲<平壤>道行軍大摠管, 帥<江>·<淮>·<嶺>·<협>兵四萬, <長安>·<洛陽>募士三千, 戰艦五百소, 自<(+東)萊州>??泛海, 趣<平壤>. 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帥步騎六萬, 及<蘭>·<河>二州降胡, 趣<遼東>. 兩軍合勢, 大集於<幽州>. 遣行軍摠管<江行本{姜行本}>??·少監<丘行淹>, 先督衆士, 造梯衝於<安羅山{安蘿山}>??. 時, 遠近勇士應募, 及獻攻城器械者, 不可勝數. 帝皆親加損益, 取其便易.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 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계>,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 且言: "昔, <隋><煬帝>殘暴其下, <高句麗>王, 仁愛其民. 以思亂之軍, 擊安和之衆, 故不能成功. 今略言必勝之道有五: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 何憂不克? 布告元元, 勿爲疑懼." 於是, 凡頓舍供備之具, 감者太半. 詔諸軍及<新羅>·<百濟>·<奚>·<契丹>, 分道擊之.


李丙燾. 「資治通鑑」.『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冊府元龜」.李丙燾. 「資治通鑑」.

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농승 상리 현장을 보내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신라는 인질을 보낸 나라이며 조공을 계속하는 나라이다. 그대와 백제는 군사를 철수하여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의 나라를 칠 것이다."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사자를 보내 개소문을 소환하자, 그가 돌아왔다. 현장이 개소문에게 신라를 침공하지 말 것을 권유하자, 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했다.

"우리와 신라는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 날 수 나라가 침입하였을 때, 신라는 그 기회를 노려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고, 그 성읍을 모두 점거하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말했다.

"지난 일을 어찌 재론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따지지 않고 있는데 어찌 고구려만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그러나 막리지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귀국하여 이러한 실정을 모두 보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이제는 또한 나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그를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7월, 당 나라 태종은 군사를 출동시키기로 하고, 홍주·요주·강주의 3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 도독 장 검 등을 파견하여 유주·영주의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해·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다. 대리경 위 정을 궤수사로 삼아서 하북의 여러 주를 모두 그의 지휘하에 두고, 그로 하여금 명령없이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경 소예에게 명령하여 하남 여러 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해로로 들어오게 하였다.

9월, 막리지가 당 나라에 백금을 바쳤다. 저 수량이 말했다.

"막리지가 자기 임금을 시해한 죄는 동방의 모든 오랑캐들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를 토벌하려 하면서 금을 받는다면, 이는 곡정(고鼎)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고구려의 사신이 또한 "막리지가 관리 50명을 궁중 숙위로 보내려 한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모두 고구려의 건무를 섬겨 관작을 받았는데, 막리지가 임금을 죽여도 복수하지 않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함으로써 대국을 속이려 하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는가?"

황제는 말을 마치고 사신들을 모두 형관에게 맡겼다.

겨울 10월, 평양에 붉은 색의 눈이 내렸다.

당 나라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며 말했다.

"요동은 옛날 중국의 국토이고, 또한 막리지가 그의 임금을 죽였으므로, 내가 직접 가서 그들을 다스리려 한다. 따라서 그대들에게 약속하건대, 나를 따라 종군하는 자손들은 내가 잘 위무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

황제는 그들에게 옷감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황제가 원정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향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가는 세 가지는 모두 상서로운 행위가 아니다. 고구려를 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임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죽였고, 또한 대신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있으니, 온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가지 않기를 권하는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북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케 하고, 동으로는 고대인성에 군량을 비축하였다.

11월,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 자사 정 천숙은 이미 관직을 물러나 있었다. 황제는 그가 이전에 수 양제를 따라 고구려 정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하여, 황제가 있는 곳으로 불러 상황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서 군량의 수송에 문제가 많으며, 동이 사람들은 성을 잘 수비하기 때문에 조기에 항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지금은 수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대는 나의 의견을 따르라."

황제는 형부상서 장 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회·영·협의 군사 4만 명과 장안·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태자첨사좌위솔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하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도록 계획하였다. 두 부대는 합세하여 유주에 대대적으로 집합하였다. 황제는 행군총관 강 행본과 소감 구 행엄으로 하여금 우선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여 안라산에서 운제와 충거를 만들게 하였다. 이 때 원근의 용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모였으며, 성곽 공격용 기자재를 바치는 자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황제가 이 전투 기자재들을 직접 살피고, 그 중 편리한 것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친필로 천하에 조서를 발표하였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이를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이제 유주·계주 등지를 순행하며, 요동과 갈석에서 죄를 물으려 하나니, 행군 도중의 군영이나 숙소에서는 백성에게 수고를 끼치거나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조서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수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고구려왕은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이는, 반란을 도모하는 군대를 거느려 평화로운 무리를 공격한 격이므로 수 양제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필승의 조건이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치는 것이며, 둘째는 순리로 반역을 토벌하는 것이며, 세째는 정돈된 나라로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는 것이며, 네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기쁨에 충만된 군사로 원한에 쌓인 군사와 맞서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승리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백성들에게 포고하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라!"

이에 모든 숙소, 공급과 설비에 따르는 도구를 절반이나 삭감하였다. 모든 군단과 신라·백제·해·거란 등에 명하여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李世勣>軍, 至<幽州>. 三月,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爲<中國>報子弟之수, <高句麗>雪君父之恥耳. 且方隅大定, 唯此未平, 故及朕之未老, 用士大夫餘力, 以取之." 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夏四月, <世勣>自<通定>, 濟<遼水>, 至<玄토>,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 副大摠管江夏王<道宗>, 將兵數千, 至<新城>, 折衝都尉<曹三良>, 引十餘騎, 直壓城門, 城中驚(+懼)??, 無敢出者.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爲前鋒, 進度<遼水>, 趨<建安城>, 破我兵, 殺數千人. <李世勣>·江夏王<道宗>, 攻<盖牟城>, ??{拔}??之, 獲一{二}??萬人·糧十萬石, 以其地爲<盖州>.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摠管<王大度>先登. 五月, 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進至<遼東城>下. 帝至<遼>澤, 泥뇨二百餘里, 人馬不可通. 將作大匠<閻立德>, 布土作橋, 軍不留行, 度澤東. 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 救<遼東>. 江夏王<道宗>, 將四千騎逆之, 軍中皆以爲衆寡懸絶, 不若深溝高壘, 以待車駕之至. <道宗>曰: "賊恃衆有輕我心, 遠來疲頓, 擊之必敗. 當淸路以待乘輿, 乃更以賊遺君父乎?" 都尉<馬文擧>曰: "不遇勍敵, 何以顯壯士?" 策馬奔擊, 所向皆靡. 衆心稍安, 旣合戰, 行軍摠管<張君乂>退走, <唐>兵敗뉵. <道宗>收散卒, 登高而望見, 我軍陣亂, 與驍騎數千衝之. <李世勣>引兵助之, 我軍大敗, 死者千餘人. 帝度<遼水>, 撤橋以堅上{士}??卒之心, 軍於<馬首山>. 勞賜江夏王<道宗>, 超拜<馬文擧>中郞將, 斬<張君乂>. 帝自將數百騎, 至<遼東城>下, 見士卒負土塡塹, 帝分其尤重者, 於馬上持之, 從官爭負土置城下. <李世勣>攻<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帝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重{里}??, 鼓조聲振天地. 城有<朱蒙>祠, 祠有鎖甲섬矛. 妄言前<燕>世天所降. 方圍急, 飾美女以婦神, 巫言: "<朱蒙>悅, 城必完." <勣>列砲車, 飛大石過三百步, 所當輒潰. 吾人積木爲樓, 結환罔{網}??, 不能拒, 以衝車撞비屋碎之. 時, <百濟>上金휴鎧, 丈{又}??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南風急, 帝遣銳卒, 登衝竿之未{末}??, 설其西南樓. 火延燒城中, 因揮將士登城. 我軍力戰不克, 死者萬餘人. 見捉勝兵萬餘人, 男女四萬口, 糧五十萬石, 以其城爲<遼州>. <李世勣>進攻<白巖城{白崖城}>??西南, 帝臨其西北. 城主<孫代音{孫伐音}>??, 潛遣腹心請降, 臨城捉{投}??刀鉞爲信, ??{曰}??: "奴願降, 城中有不從者." 帝以<唐>幟與其使曰: "必降者, 宜立之城上." <代音>立幟, 城中人以爲<唐>兵已登城, 皆從之. 帝之克<遼東>也, <白巖城>請降, 旣而中悔. 帝怒其反覆, 令軍中曰: "得城, 當悉以人物, 賞戰士." <李世勣>見帝將受其降, 帥甲士數十人, 請曰: "士卒所以爭冒矢石, 不顧其死者, 貪虜獲耳. 今城垂拔, 奈何更受其降, 孤戰士之心?" 帝下馬謝曰: "將軍言是也, 然縱兵殺人, 而虜其妻노, 朕所不忍. 將軍麾下有功者, 朕以庫物賞之, 庶因將軍贖此一城." <世勣>乃退, 得城中男女萬餘口, 臨水設幄, 受其降, 仍賜之食, 八十已上, 賜帛有差. 他城之兵在<白巖>者, 悉慰諭給糧仗, 任其所之. 先是, <遼東城>長史, 爲部下所殺, 其省事奉其妻子, 奔<白巖>. 帝憐其有義, 賜帛五匹, 爲長史造靈輿, 歸之<平壤>. 以<白巖城>爲<巖州>, 以<孫代音>爲刺史. 初, 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 戍<盖牟城>, <李世勣>盡虜之. 其人請從軍自效. 帝曰: "汝家皆在<加尸>, 汝爲我戰, 莫離支必殺汝妻子. 得一人之力, 而滅一家, 吾不忍也." 皆稟賜遣之. 以<盖牟城>爲<蓋州>.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北部누薩<高延壽>·南部누薩<高惠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 帝謂侍臣曰: "今爲<延壽>策有三. 引兵直前, 連<安市城>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료爲阻, 坐困吾軍, 上策也; 拔城中之衆, 與之宵遯, 中策

也; 不度智能, 來與吾戰, 下策也. 卿曹觀之, 彼必出下策, 成擒在吾目中矣." 時, 對盧<高正義>年老習事, 謂<延壽>日{曰}??: "<秦>王內芟군雄, 外服戎狄, 獨立爲帝, 此命世之才. 今據{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 <延壽>不從, 引軍直進, 去<安市城>四十里.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杜이{阿史那社이}>??,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 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帝悉召諸將問計. <長孫無忌>對曰: "臣聞: '臨敵將戰, 必先觀士卒之情.' 臣適行經諸營, 見士卒聞<高句麗>至, 皆拔刀結패, 喜形於色. 此必勝之兵也. 陛下未冠, 身親行陣. 凡出奇制勝, 皆上稟聖謀, 諸將奉成산耳. 今日之事, 乞陛下指종." 帝笑曰: "諸公以此見讓, 朕當爲諸公商度." 乃與<無忌>等, 從數百騎, 乘高望之, 觀山川形勢, 可以伏兵及出入之所. 我軍與<靺鞨>合兵爲陣, 長四十里. 帝望之, 有懼色. 江夏王<道宗>曰: "<高句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衆, 可不戰而降." 帝不應. 遣使태<延壽>曰: "我以爾國强臣弑其主, 故來問罪, 至於交戰, 非吾本心. 入爾境, 芻粟不給, 故取爾數城, 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 <延壽>信之, 不復設備.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 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래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是夜, 流星墜<延壽>營. &日一{旦}??曰{日}??, <延壽>等, 獨見<李世勣>軍少, 勒兵欲戰. 帝望見<無忌>軍塵起, 命作鼓角, 擧旗幟, 諸軍鼓조병進. <延壽>等懼, 欲分兵禦之, 而其陣已亂. 會, 有雷電, <龍門>人<薛仁貴>, 著奇服, 大呼陷陣, 所向無敵, 我軍披靡. 大軍乘之, 我軍大潰, 死者三{二}??萬餘人. 帝望見<仁貴>, 拜遊擊將軍. <延壽>等將餘衆, 依山自固. 帝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梁, 斷其歸路. <延壽>·<惠眞>, 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 請降, 入軍門, 拜伏請命. 帝簡누薩已下官長三千五百人, 遷之內地, 餘皆縱之, 使還<平壤>, 收<靺鞨>三千三百人, 悉坑之. 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 타器械稱是. 更名所幸山, 曰<駐필山>. 以<高延壽>爲鴻려卿, <高惠眞>爲司農卿.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 <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村{材}??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少,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 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帝曰: "以公爲將, 安得不用公策, 勿誤吾事!" <世勣>遂攻<安市>. <安市>人望見帝旗蓋, 輒乘城鼓조, 帝怒. <世勣>請克城之日, 男子皆坑之. <安市>人聞之, 益堅守, 攻久不下. <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 "奴旣委身大國, 不敢不獻其誠. 欲天子早成大功, 奴得與妻子相見. <安市>人顧惜其家, 人自爲戰, 未易猝拔. 今, 奴以<高句麗>十餘萬衆, 望旗沮潰, 國人膽破. <烏骨城>누薩老모, 不能堅守, 移兵臨之, 朝至夕克, 其餘當道小城, 必望風奔潰. 然後收其資糧, 鼓行而前, <平壤>必不守矣." 群臣亦言: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흉懼, 倂力拔<烏骨城>, 度<鴨綠水>, 直取<平壤>, 在此擧矣." 帝將從之, 獨<長孫無忌>以爲天子親征, 異於諸將, 不可乘危요倖, 今<建安>·<新城>之虜衆, 猶十萬, 若回{向}??<烏骨>, 皆섭吾後, 不如先破<安市>, 取<建安>, 然後長驅而進, 此萬全之策也. 帝乃止. 諸將急攻<安市>. 帝聞城中계체聲, 謂<世勣>曰: "圍城積久, 城中??{烟}??火日微, 今鷄체甚喧, 此必饗士, 欲夜出襲我, 宜嚴兵備之." 是夜, 我軍數百人, 추城而下. 帝聞之, 自至城下, 召兵急擊. 我軍死者數十人

, 餘軍退走. 江夏王<道宗>, 督衆第{築}??土山於城東南隅, 侵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포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道宗>傷是{足}??, 帝親爲之針. 築山, 晝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頂去城數丈, 下臨城中. <道宗>使果毅<傅伏愛>, 將兵屯山頂, 以備敵. 山頹壓城, 城崩. 會, <伏愛>私離所部, 我軍數百人, 從城缺出戰, 遂奪據土山, 塹而守之. 帝怒, 斬<伏愛>以徇, 命諸將攻之, 三日不能克. <道宗>徒跣詣旗下, 請罪. 帝曰: "汝罪當死, 但朕以<漢><武>殺<王恢>, 不如<秦><穆>用<孟明>, 且有破<盖牟>·<遼東>之功, 故特赦汝耳." 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將盡, 래班師. 先拔<遼>·<盖>二州戶口, 度<遼>,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城主登城拜辭, 帝嘉其固守, 賜겸百疋, 以勵事君. 命<世勣>·<道宗>, 將步騎四萬爲殿, 至<遼東>度<遼水>. <遼>澤泥료, 車馬不通. 命<無忌>, 將萬人, 전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帝自繫薪於馬초, 以助役. 冬十月, 帝至<蒲蒲{蒲溝}>??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래燃火於道以待之. 凡보<玄토>·<橫山>·<盖牟>·<磨米>·<遼東>·<白巖>·<卑沙>·<夾谷>·<銀山>·<後黃>十城, 徙<遼>·<盖>·<巖>三州戶口, 入<中國>者七萬人. <高延壽>自降後, 常憤歎, 尋以憂死, <惠眞>竟至<長安>. <新城>·<建安>·<駐필>三大戰, 我軍及<唐>兵馬死亡者, 甚衆. 帝以不能成功, 深悔之. 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論曰: <唐><太宗>, 聖明不世出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 至於用兵之際, 出奇無窮, 所向無敵. 而東征之功, 敗於<安市>, 則其城主, 可謂豪傑非常者矣. 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李丙燾. 「舊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兩唐書에는 '白崖城', 「冊府元龜」와 「唐書」 및 「資治通鑑」에는 '白巖城'으로 되어 있음.李丙燾. 「冊府元龜」와 兩唐書에는 '孫伐音'으로, 「資治通鑑」에는 '孫代音'으로 되어 있다.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봄 정월, 이 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였다.

3월, 황제가 정주에 도착하여 시신들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국토인데, 수 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이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사한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를 위해서는 죽은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사방이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늙기 전에 사대부의 여력을 빌어 이 땅을 찾으려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떠나면서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자기 손으로 매달았다. 이 세적의 군사는 유성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을 향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여름 4월, 이 세적이 통정에서 요수를 건너 현토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에서는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로 들어갔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렀고, 절충도위 조 삼량은 기병 10여 명을 데리고 직접 성문을 위압하였다. 성 안 사람들이 놀라서 감히 나오려는 자가 없었다.

영주 도독 장 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 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빼앗고, 1만 명을 생포하였으며,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하였다. 장 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 때 정 명진이 군사를 데리고 밤에 도착하였는데, 부총관 왕 대도가 먼저 성에 올랐다.

5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이 세적이 요동성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황제는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 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왕이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강하왕 도종은 4천 명의 기병으로 이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모두 병력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군사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고 있으나, 그들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이므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길을 깨끗이 닦아놓고 황제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어찌하여 황제 앞에 적을 넘겨 드리려 하는가?"

도위 마 문거가 말했다.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장사의 능력을 드러내겠느냐?"

그는 말을 마치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 공격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우리 군사가 쓰러졌다. 이에 당 나라 군사들의 마음이 약간 안정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행군 총관 장 군예가 퇴주하고 당 나라 군사가 패배하였다. 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섰다. 그는 우리 군대의 진영이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기병 수천 명을 이끌어 돌격해왔다. 그 때 이 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협공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니,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황제는 요수를 건넌 다음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에 진을 쳤다. 황제는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상을 주고, 마 문거를 몇 급 올려 중랑장으로 삼고, 장 군예의 목을 베었다. 황제는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가서, 군사들이 흙을 지고 참호를 쌓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직접 제일 무거운 것을 자기 말에 실었다. 이에 시종들이 다투어 흙을 운반하여 성 밑에 쌓았다.

이 세적은 밤낮없이 12일 간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이 세적에게 와서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였다.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었고, 이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녕되게도 이전 연 나라 시대에 하늘이 내려 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 태세가 긴박해지자,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당 나라 군사는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황제가 이 세적과 만나자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로 개칭하였다. 이 세적은 백암성 서남 쪽을 공격하고, 황제는 서북쪽으로 갔다. 백암성 성주 손 대음이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 항복하기를 청하고, 성에 나와 칼과 도끼를 던지는 것으로 신호를 삼겠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당 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틀림없이 항복하겠으면 이 깃발을 성 위에 세우라"고 하였다. 대음이 그 깃발을 세우니 성 안 사람들은 당 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모두 손 대음을 따라 항복하였다.

황제가 요동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을 때,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는 후회하였다. 황제는 그들의 변심을 보고 노하여 군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을 빼앗으면 마땅히 빼앗은 사람과 물건을 모두 전사들에게 상으로 주리라."

이 때 이 세적은 황제가 백암성의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알아채고, 갑병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황제에게 말했다.

"사졸들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이 거의 함락되어 가는데 어찌하여 항복을 받음으로써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합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와 사과하며 말했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함부로 풀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내가 차마 저지를 수 없는 행위이다. 장군의 부하로서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내가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다. 장군으로 인하여 이 성이 속죄받기를 원한다."

세적은 물러나와 성 안의 남녀 1만여 명을 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런 후에 곧 먹을 것을 주고, 80세의 노인에게는 정도에 따라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와있던 자들은 전부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군기를 주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요동성 장사가 부하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 성의 성사 한 사람이 장사의 처자들을 데리고 백암성으로 도망해왔었다. 황제는 그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비단 다섯 필을 주고, 장사의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백암성을 암주로 개칭하고, 손 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애초에 막리지는 가시성의 군사 7백 명을 파견하여 개모성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이 세적은 그들을 모두 생포하였다. 그들은 당 나라 군사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너희들의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싸우게 되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들의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기 위하여 한 집안을 멸망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

황제는 그들에게 모두 곡식을 주어 돌려 보냈다.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하였다.

황제가 안시성에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자, 북부 욕살 고 연수와 남부 욕살 고 혜진은 우리 군사와 말갈군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했다.

"지금 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 째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항복받을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늪지가 장애가 될 것이므로, 우리 군사들은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상책이다. 둘 째는, 성 안의 군사를 데리고 야간 도주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책이다. 셋 째는, 자기의 지혜와 재능을 모르고,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책이다. 그대들은 두고 보라. 그가 필히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게 되는 작전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이 때,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노 고 정의가 연수에게 말했다.

"진왕은,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쳐 없애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굴복시켜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을 제도하라는 천명을 받은 인재이다. 지금 그가 전국의 군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이에 대적할 수는 없다. 나의 계책은, 군사를 정비하되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면서 기습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 때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때이다."

그러나 연수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안시성 밖 40리까지 진군하였다. 황제는 연수가 주저하고 진군해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장군 아사나 두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그를 유인하게 하였다. 첫 교전에서 당 나라 군사가 패주하는 척하자, 연수는 "다루기가 쉽구나"라고 말하며, 앞을 다투어 진격하였다. 그는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에 이르러서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전부 불러 놓고 계책을 물으니 장손 무기가 대답하였다.

"'적을 만나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군사들의 심정을 살펴야 한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제가 마침 여러 병영을 다니는데,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칼을 뽑아 들고 깃발을 달면서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승리할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면류관을 벗어놓고 직접 진지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뛰어난 전술로 승리를 거듭한 것은, 모두 위로 폐하의 책략을 받들어 모든 장수들이 성공을 이루어낸 것 뿐입니다. 오늘 일도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제공들이 이 일을 나에게 사양하니, 내가 제공들을 위하여 방법을 구상하겠노라."

황제는 곧 무기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기병을 데리고 고지에 올라 산천의 형세 가운데 복병시킬 수 있는 곳과 병력의 출입이 가능한 곳을 관찰하였다. 이 때 우리 군사는 말갈군과 연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진의 길이는 40리에 달했다. 황제가 이를 관찰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강하왕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전력을 다하여 천자의 군대를 방어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평양의 수비에는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정예군 5천 명을 주시어, 그들의 근본을 뒤엎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싸우지 않고도 수십만 군사를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는 이를 듣지 않고, 사신을 보내 연수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나라 경내에 들어오니 마초와 양식이 충분하지 않아 몇 개 성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절을 지킨다면 잃었던 성은 반드시 돌려 줄 것이다."

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수비 태세를 더 갖추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계책을 의논한 다음, 이 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 무기와 우 진달에게 정예군 1만 1천 명을 주어 기습병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우리 군사의 후면을 공격하게 하고, 황제는 직접 보병과 기병 4천명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황제는 모든 군대에게 북과 나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맹공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또한 관리에게는 항복받을 장막을 조회당 옆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날 밤, 유성이 연수의 병영에 떨어졌다. 아침에 연수 등은 이 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만 보고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황제는 무기의 부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깃발을 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였다. 연수 등은 두려워하며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영은 이미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때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당 나라 용문 사람 설 인귀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고함을 치면서 우리의 진영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어 우리 군사가 쓰러졌다. 당 나라의 대군이 이 때를 이용하여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는 큰 혼란에 빠지고, 3만여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황제는 멀리서 인귀를 바라보다가 그를 유격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연수 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자체 수비를 강화하였다. 황제가 모든 부대에 명령하여 우리 군사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 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하여 우리 군사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연수와 혜진은 자기 군사 3만 6천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 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황제는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말 5만 필·소 5만 두·명광 갑옷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황제가 갔던 산의 명칭을 주필산으로 개명하고, 고 연수를 홍려경, 고 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황제가 백암성을 공격하여 승리했을 때, 이 세적에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용맹스러워,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안성은 병력이 약하고 군량미도 적다. 따라서 만약 불시에 그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항복하면 안시성은 이미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 가운데는 공격해서는 안될 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이 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성를 지나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인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시성이 항복하면,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그대를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그대의 계책을 따르지 않겠느냐? 부디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말라!"

세적은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황제가 분노하였다. 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고 연수·고 혜진 등이 황제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자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빨리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어서 수비가 견실할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 그곳을 공격한다면,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는 승리할 것이며, 도중에 있는 여타의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그곳의 자재와 군량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양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또 말했다.

"장 량의 군사가 사성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이면 올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 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장 량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습니다."

황제가 이 말을 따르려 하자 장손 무기가 홀로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르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가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안시성을 점령하고 건안성을 취한 후에 군사를 먼 곳으로 진군시키는 것이 옳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장손 무기의 말을 듣고 황제는 곧 앞서의 계획을 중지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안시성을 급히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세적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한지 오래되어, 성 안에는 밥짓는 연기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데, 지금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니, 이는 틀림없이 군사들을 잘 먹인 후에 야습하려는 것이다. 군사를 단속하여 이에 대비하라."

이날 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군사들은 당번을 정하여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 나라 군사의 충거와 포석이 누대와 성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 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황제가 직접 침을 놓아 주었다. 당 나라 군사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성 안을 내려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 부복애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바로 이 때, 복애는 사사로운 이유로 수비하던 곳을 떠나 있었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여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이길 수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황제가 말했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황제는, 요동 지방은 일찍 추워지므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을 것이므로, 군사와 말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개주 두 주의 주민을 선발하여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기면서, 겹실로 짠 비단 1백 필을 주어,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격려하였다. 황제는 세적과 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 습지의 진흙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황제는 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겨울 10월, 황제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넜다.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서 군사들의 옷이 젖고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황제는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군사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현토·횡산·개모·마미·요동·백암·비사·협곡·은산·후황 등 10개 성을 철폐하고, 요주·개주·암주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을 중국으로 옮겨 갔다. 고 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홧병으로 죽고, 고 혜진은 결국 장안에 도착하였다.

신성·건안성·주필산의 세 차례의 큰 싸움에서 우리 군대와 당 나라 군사 중에 사망자가 많았으며, 마필도 아주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만일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라고 말하였다.

저자의 견해 : 당 태종은 어질고 명철한 불세출의 임금이다. 난을 평정하기는 탕과 무왕에 견줄만 하고, 이치에 통달하기는 성왕·강왕과 비슷하였으며, 병법에는 기묘한 전술이 무궁하였으니,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 정벌의 공이 안시성에서 무너졌으니, 그 성주는 가히 비상한 호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는 그의 성명을 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양자가 이른바 "제·노의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五年, 春二月, <太宗>還京師, 謂<李靖>曰: "吾以天下之衆, 困於小夷, 何也?" <靖>曰: "此, <道宗>所解." 帝顧問, <道宗>具陳: 在<駐필>時, 乘虛取<平壤>之言. 帝창然曰: "當時悤悤, 吾不憶也." 夏五月, 王及莫離支<蓋金>, 遣使謝罪, 幷獻二美女. 帝還之, 謂使者曰: "色者人所重, 然憫其去親戚以傷乃心, 我不取也." <東明王>母塑像, 泣血三日. 初, 帝將還, 帝以弓服賜<盖蘇文>, 受之不謝, 而又益驕恣. 雖遣使奉表, 其言率皆詭誕, 又待<唐>使者倨傲, 常窺伺邊隙. 屢래令不攻<新羅>, 而侵凌不止. <太宗>詔勿受其朝貢, 更議討之.

三國史記卷第二十一.


5년 봄 2월, 태종이 서울로 돌아가서 이 정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도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정이 대답했다.

"이는 도종이 풀어드릴 것입니다."

황제는 도종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평양이 빈 틈을 이용하여 그 곳을 점령하자고 한 말을 상세하게 진술하였다. 황제가 한탄하며 말했다.

"당시에는 내가 정신이 없었기에 생각 나지 않는다."

여름 5월, 왕과 막리지 개금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두 명의 미인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 보내며 사신에게 말했다.

"색은 사람이 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그들이 친척과 떨어져 애태우는 것이 딱하니 내가 이를 받지 않겠다."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이 사흘 동안 피를 흘리며 울었다.

애초에, 당 태종이 돌아가려 할 때 개소문에게 활과 의복을 주었었다. 개소문은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비록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렸으나, 그의 말은 거의 거짓이고 황당하였다. 그는 또한 당 나라 사신을 거만하게 대하였으며,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당 나라에서는 여러번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게 하였으나, 이를 업신여기고 침공을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고구려의 조공을 받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를 칠 것을 다시 논의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1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二.



삼국사기 권 제 22


高句麗本紀第十.

<寶藏王>下.


고구려본기 제 10

보장왕(하)


○六年, <太宗>將復行師, 朝議以爲: "<高句麗>依山爲城, 不可猝拔. 前大駕親征, 國人不得耕種, 所克之城, 實收其곡, 繼以旱災, 民太半乏食. 今若數遣偏師, 更迭擾其疆역, 使彼疲於奔命, 釋뢰入堡, 數年之間, 千里蕭條, 則人心自離, <鴨록>之北, 可不戰而取矣." 帝從之, 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發兵萬餘人, 乘樓舡, 自<萊州>, 泛海而入, 又以太子詹事<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孫貳郞>等副之, 將兵三千人, 因<營州>都督府兵, 自<新城>道入. 兩軍, 皆選習水善戰者, 配之. <李世勣>軍旣度<遼>, 歷<南蘇>等數城, 皆背城拒戰, <世勣>擊破之, 焚其羅郭而還. 秋七月, <牛進達>·<李海岸>入我境, 凡百餘戰, 攻<石城>拔之, 進至<積利城>下. 我兵萬餘人出戰, <李海岸>擊克之, 我軍死者三千人{二千級}??. <太宗>래<宋州>刺史<王波利>等, 發<江南>十二州工人, 造大舡數百소, 欲以伐我. 冬十二月, 王使第二子莫離支<任武>, 入謝罪, 帝許之.


李丙燾. 「資治通鑑」.

6년, 당 나라 태종이 다시 원정을 하려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 앞서 황제가 직접 원정했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가 이에 따라, 좌무위 대장군 우 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이 해안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1만여 명을 출동시켜, 누선을 타고 내주로부터 해로로 진격케 하고, 또한 태자 첨사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 이랑 등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의 군사와 함께 신성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 세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남소 등의 몇 성을 지났는데, 그 성이 모두 성을 등지고 싸웠으므로, 세적이 이들을 격파하고 외성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 우 진달·이 해안 등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웠다. 그들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웠다. 그러나 이 해안이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사망한 우리 군사가 3천명이었다. 태종은 송주 자사 왕 파리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공격하려 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 임무로 하여금 당 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七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衛將軍<裴行方>副之, 將兵三萬餘人, 及樓舡戰艦, 自<萊州>, 泛海來擊.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 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 戰於<易山>, 破之. 其夜, 我軍萬餘人, 襲<神感>舡, <神感>伏發, 乃敗. 帝謂我困弊, 議以明年發三十萬衆, 一擧滅之. 或以爲大軍東征, 須備經歲之糧, 非畜乘所能載, 宜具是{舟}??艦, 爲水轉. <隋>末<劒南>, 獨無寇盜, 屬者<遼東>之役, <劒南>復不預及. 其百姓富庶, 宜使之造舟艦. 帝從之. 秋七月, 王都女産子, 一身兩頭. <大宗{太宗}>??遣左領左右府長史<强偉>於<劒南道>, 伐木造舟艦. 大者或長百尺, 其廣半之. 別遣使行水道, 自<巫峽>, 抵<江>·<楊>, 趣<萊州>. 九月, 群獐渡河西走, 群狼向西行, 三日不絶.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 渡海入<鴨록>, 至<泊灼城>南四十里, 止營. <泊灼>城主<所夫孫>, 帥步騎萬餘, 拒之, <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 領步卒及諸軍乘之, 我兵潰. <行方>等進兵圍之, <泊灼城>因山設險, 阻<鴨록水>以爲固, 攻之不拔. 我將<高文>, 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 來援, 分置兩陣, <萬徹>分軍以當之, 我軍敗潰. 帝又詔<萊州>刺史<李道裕>, 轉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우무위 대장군 설 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그를 보좌케 하여 장병 3만여 명과 누선 및 전함을 가지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우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 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공격하였다. 그는 우리의 보병, 기병 5천명과 역산에서 조우하여 우리 군사를 이겼다. 그날 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신감의 배를 습격하다가 신감의 복병이 출동하여 패배하였다. 태종은 우리가 피폐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음 해에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멸망시킬 것을 논의에 붙였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대군이 동방으로 원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년의 군량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군량을 마소나 수레에 실을 수는 없으니, 마땅히 선박을 준비하여 수로로 운반해야 할 것이다. 수 나라 말기에 검남 지방만은 도적의 침입이 없었고, 지난 번의 요동 정벌 때에도 검남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곳의 부유한 백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게 해야할 것이다.'

태종이 이 말을 따랐다.

가을 7월, 서울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뚱이는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 좌우부 장사 강 위를 검남도에 파견하여, 나무를 베어 선박을 만들게 하였다. 큰 배 중에는, 길이가 1백 척, 넓이가 오십 척이 되는 것이 있었다. 이 배들은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수로를 통하여 무협에서 강남과 양주를 거쳐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 노루가 떼를 지어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고, 이리도 떼를 지어 사흘 동안 서쪽으로 갔다.

태종이 장군 설 만철 등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 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만철이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하여금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케 하자 우리 군사가 무너졌다. 배 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으며,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 문이 오골성·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태종이 또한 내주 자사 이 도유에게, 군량과 기계를 운반하여 오호도에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장차 대정벌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八年, 夏四月, <唐><太宗>崩. 遺詔罷<遼東>之役.

○論曰: 初, <太宗>有事於<遼東>也, 諫者非一. 又自<安市>旋軍之後, 自以不能成功, 深悔之. 歎曰: "若使<魏徵>在, 不使我有此行也." 及其將復伐也, 司空<房玄齡>病中上表, 諫以爲: "『老子』曰: '知足不辱, 知止不殆.' 陛下威名功德, 旣云足矣, 拓地開疆, 亦可止矣. 且陛下每決一重囚, 必令三復五奏, 進素膳, 止音樂者, 重人命也. 今驅無罪之士卒, 委之鋒刃之下, 使肝腦塗地, 獨不足憫乎? 嚮使<高句麗>違失臣節, 誅之可也; 侵擾百姓, 滅之可也; 他日能爲<中國>患, 除之可也. 今無此三條, 而坐煩<中國>, 內爲前代雪치, 外爲<新羅>報수, 豈非所存者小, 所損者大乎? 願陛下許<高句麗>自新, 焚凌波之舡, 罷應募之衆. 自然華夷慶賴, 遠肅邇安." <梁公>將死之言, 諄諄若此, 而帝不從, 思欲丘墟東域而自快, 死而後已. 史論曰: "好大喜功, 勤{勒}??兵於遠者." 非此之謂乎? <柳公權>小說曰: "<住필{駐필}>??之役, <高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 又日{曰}??: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英公>之麾, 黑旗被圍, 帝大恐." 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司馬公>『通鑑』, 不言者, 豈非爲國, 諱之者乎?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여름 4월, 당 나라 태종이 사망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요동 정벌을 중지하게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처음에 태종이 요동 원정을 할 때, 이를 말리는 자가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또한 안시성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한 뒤에는, 자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만약 위 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다시 고구려를 치려 할 때 사공 방 현령이 병중에 있으면서도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했다.

"노자는 '만족함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으며,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폐하의 위대한 명성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만 하며, 국토를 넓히는 일도 역시 멈출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한 명의 중죄인을 처형할 때도 언제나 필히 세 번 심사하고 다섯 번 변명할 기회를 주었으며, 검소한 식사를 올리게 하고, 풍류를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 터인데, 이제 무죄한 사졸들을 몰아다가 칼날 밑에 맡겨 참혹히 죽게 하는 것만은 왜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지난날, 고구려가 신하의 절차를 어겼다면 벌주는 것이 옳으며, 우리 백성들을 침략하였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 공연히 중국 자신을 괴롭히면서, 안으로는 선대의 치욕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복수를 한다하니, 이야말로 어찌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시어, 창파에 띄운 선박을 불태우고, 징발해온 군사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중국에는 경사가 깃들고, 오랑캐들은 우리를 믿을 것이며, 먼 곳은 조용하고 가까운 곳은 평안해질 것입니다."

양공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이와 같이 간곡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동방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자기 만족으로 삼으려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말하는 바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유 공권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니,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작 못하였네. 영공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 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했으나 그와 같이 겁을 내었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기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九年, 夏六月, <盤龍寺><普德>和尙, 以國家奉道, 不信佛法, 南移<完山><孤大山>. 秋七月, 霜雹害곡, 民饑.


9년 여름 6월, 반룡사의 보덕 화상은, 나라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하여, 남쪽에 있는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 갔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에 해가 미치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1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人或言: "於<馬嶺>上, 見神人, 曰: '汝君臣, 奢侈無度, 敗亡無日(+矣)??.'" 冬十月, 王遣將<安固>出師, 及<靺鞨>兵, 擊<契丹>. <松漠>都督<李窟哥>禦之, 大敗我軍於<新城>.


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여름 4월,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마령에서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너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스럽기 한이 없으니 패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장수 안고로 하여금 말갈군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게 하였다. 송막 도독 이 굴가가 대항하여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대패시켰다.


○十四年, 春正月, 先是, 我與<百濟>·<靺鞨>, 侵<新羅>北境, 取三十三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於<唐>求援. 二{三}??月, <高宗>遣<營州>都督<程名振>·左(+右)??衛中郞將<蘇定方>, 將兵來擊. 夏五月, <程名振>等, 渡<遼水>. 吾人見其兵少, 開門度<貴湍水{貴端水}>??, 逆戰. <名振>等奮擊, 大克之, 殺獲千餘人, 焚其外郭及村落而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兩唐書. 「冊府元龜」. 「資治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이보다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 성을 점령하였는데,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2월, 당 나라 고종이 영주 도독 정 명진과 좌위 중랑장 소 정방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5월, 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 오자, 우리 군사는 상대방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가 전투를 벌였다. 명진 등은 우리를 맹공하여 크게 이기고, 우리 군사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十五年, 夏五月, 王都雨鐵. 冬十二月, 遣使入<唐>, 賀冊皇太子.


15년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十七年, 夏六月, <唐><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右領軍中郞將<薛仁貴>, 將兵來攻, 不能克.


17년 여름 6월, 당 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 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十八年, 秋九月, 九虎一時入城食人, 捕之不獲. 冬十一月, <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 與我將<溫沙門>, 戰於<橫山>, 破之.


18년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 먹었으나, 이들을 잡지 못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 사문과 횡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패배시켰다.


○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 凡三日. 冬十一月, <唐>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爲<浿江>道行軍大摠管; 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左驍衛將軍<劉伯英>, 爲<平壤>道行軍大摠管; <蒲州>刺史<程名振>, 爲<鏤方>道摠管, 將兵分道來擊.


19년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 핏빛으로 변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에서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좌무위 대장군 소 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좌효위 장군 유 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 포주 자사 정 명진을 누방도총관으로 삼아 각각 다른 길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공격했다.


○二十年, 春正月, <唐>募<河南·北>·<淮南>六十七州兵, 得四萬四千餘人, 詣<平壤>·<鏤方>行營, 又以鴻려卿<蕭嗣業>, 爲<扶餘>道行軍摠管, 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 夏四月, 以<任雅相>, 爲<浿江>道行軍摠管; <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摠管; <蘇定方>, 爲<平壤>道行軍摠管, 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 水陸分道병進. 帝欲自將大軍, <蔚州>刺史<李君球>立言: "<高句麗>小國, 何至傾<中國>事之有? 如<高句麗>旣滅, 必發兵以守. 小發則威不振, 多發則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 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諫帝, 乃止. 夏五月, 王遣將軍<惱音信>, 領<靺鞨>衆, 圍<新羅><北漢山城>, 浹旬不解, <新羅>餉道絶,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我營, 又雷雨震擊, <惱音信>等, 疑駭引退. 秋八月, <蘇定方>破我軍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城>. 九月, <蓋蘇文>遣其子<男生>, 以精兵數萬, 守<鴨록{鴨綠}>??, 諸軍不得渡. <契苾何力>至, 値氷大合, <何力>引衆乘氷度{渡}??水, 鼓조而進, 我軍潰奔. <何力>追數十里, 殺三萬人. 餘衆悉降, <男生>僅以身免. 會, 有詔班師, 乃還.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정월, 당 나라가 하남·하북·회남 등의 67개 주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4만 4천여 명을 평양과 누방 군영으로 가게 하고, 또한 홍려경 소 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 등 제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임 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 소 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 사업과 모든 오랑캐 군사 35군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하였다. 이 때 황제가 직접 대군을 통솔하려 하였다. 울주 자사 이 군구가 말했다.

"고구려는 소국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국력을 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 때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오, 많이 출동시킨다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토벌하는 것이 토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에 또한 무후도 말렸으므로 황제가 중지하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뇌 음신으로 하여금 말갈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열흘이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신라의 군량 수송이 차단되어 성안에서는 위험과 공포를 느꼈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의 병영에 떨어지고 우레가 치며 비가 오고 벼락이 쳤다. 뇌 음신 등은 의심스럽고 놀라서 퇴각하였다.

가을 8월, 소 정방이 패강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마읍산을 탈취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 개소문이 그의 아들 남생에게 정병 수만 명을 주어 압록강을 수비케 하였다. 당 나라의 모든 부대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설필 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강에 얼음이 얼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가 패주하였다. 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하며 우리 군사 3만명을 죽였다. 남은 군사는 모두 항복하였고, 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하여 달아났다. 이즈음, 당 나라에서 군사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돌아갔다.


○二十一年, 春正月, <(+唐)>??左驍衛將軍<白州>刺史<??沮{沃沮}>??道摠管<龐孝泰>, 與<蓋蘇文>戰於<蛇水>之上, 擧軍沒, 與其子十三人, 皆戰死. <蘇定方>圍<平壤>, 會大雪, 解而退. 凡前後之行, 皆無大功而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 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 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리하여 당 나라는 전후의 정벌에서 매번 큰 성과없이 물러갔다.


○二十五年, 王遣太子<福男>[『新唐書』云<男福>.]入<唐>, 侍祠<泰山>. <蓋蘇文>死, 長子<男生>代爲莫離支. 初, 知國政, 出巡諸城, 使其弟<男建>·<男産>, 留知後事. 或謂二弟曰: "<男生>惡二弟之逼, 意欲除之, 不如先爲計." 二弟初未之信. 又有告<男生>者, 曰: "二弟恐兄還奪其權, 欲拒兄不納." <男生>潛遣所親, 往<平壤>伺之. 二弟收掩得之, 乃以王命召<男生>, <男生>不敢歸. <男建>自爲莫離支, 發兵討之. <男生>走據<國內城>, 使其子<獻誠>, 詣<唐>求哀. 六月, <高宗>命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帥兵應接之, <男生>脫身奔<唐>. 秋八月, 王以<男建>爲莫離支, 兼知內外兵馬事. 九月, 帝詔<男生>, 授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 封<玄토郡>公. 冬十二月, <高宗>以<李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 以司列少常<伯安陸>·<학處俊>副之. <龐同善>·<契苾何力>, 병爲<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 其水陸諸軍摠管, 병轉糧使<竇義積>·<獨孤卿雲>·<郭待封>等, 병受<勣>處分. <河北>諸州租賦, 悉詣<遼東>, 給軍用.


25년, 왕이 태자 복남[「신당서」에는 남복이라 하였다.]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황제가 지내는 태산의 봉선에 참가케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그의 두 아우 남건과 남산으로 하여금 조정에 남아 뒷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어떤 자가 두 아우에게 말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당신들을 처치하려 합니다. 먼저 계책을 세워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자가 남생에게 또 말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형에게 대항하여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남몰래 자기의 심복을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두 아우가 이를 알고 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으로 남생을 소환하였다.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남생을 토벌하였다. 남생이 국내성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웅거하면서, 그의 아들 헌성을 당 나라에 보내 구해줄 것을 애원하였다.

6월, 고종이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남생은 탈출하여 당 나라로 도주하였다.

가을 8월,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9월, 고종이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요동 도독 겸 평양도 안무 대사로 특진시키고, 현토군공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2월, 고종이 이 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사열소상 백 안육과 학 처준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좌케 하며, 방 동선과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인 두 의적·독고 경운·곽 대봉 등은 모두 이 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二十六年, 秋九月, <李勣>拔<新城>, 使<契苾何力>守之. <勣>初渡<遼>, 謂諸將曰: "<新城>, <高句麗>西邊要害, 不先得之, 餘城未易取也." 遂攻之. 城人<師夫仇>等, 縛城主, 開門降. <勣>引兵進擊, 一十六城皆下. <龐同善>·<高侃>尙在<新城>, <泉男建>遣兵襲其營, 左武衛將軍<薛仁貴>, 擊破之. <侃>進至<金山>, 與我軍戰敗. 我軍乘勝逐北, <薛仁貴>引兵橫擊之, 殺我軍五萬餘人, 拔<南蘇>·<木저>·<蒼암>三城, 與<泉男生>軍合. <郭待封>以水軍, 自別道, 趣<平壤>. <勣>遣別將<馮師本>, 載糧仗以資之, <師本>舡破失期, <待封>軍中飢窘. 欲作書與<勣>, 恐爲他所得, 知其虛實, 乃作離合詩, 以與<勣>. <勣>怒曰: "軍事方急, 何以詩爲? 必斬之." 行軍管記通事舍人<元萬頃>, 爲釋其義, <勣>乃更遣糧仗赴之. <萬頃>作檄文曰: "不知守<鴨록>之險?" <泉男建>報曰: "謹聞命矣." 卽移兵據<鴨록津>, <唐>兵不得度. <高宗>聞之, 流<萬頃>於<嶺南>. <학處俊>在<安市城>下, 未及成列, 我軍三萬掩至, 軍中大駭. <處俊>據胡床, 方食乾비, 簡精銳, 擊敗之.


26년 가을 9월, 이 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올 때 모든 장수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먼저 얻지 않으면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그는 드디어 신성을 공격하였다. 신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결박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 적이 군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자 16개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 때 방 동선과 고 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으므로, 천 남건이 군사를 보내 그들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좌무위 장군 설 인귀가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고 간이 금산으로 나와서 우리 군사와 싸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승세를 타고 패배한 군사를 추격하였다. 설 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목저·창암 등 3성을 함락시킨 후, 천 남생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곽 대봉은 수군을 이끌고 다른 길을 통하여 평양으로 왔다. 이 적은 별장 풍사본을 파견하여 곽 대봉에게 군량과 병기를 공급케 하였는데, 사본의 배가 파괴되어 약속 기일을 놓쳤으므로 대봉의 진영에서 군사들이 굶주렸다. 이에 따라 그가 이 적에게 편지를 보내려다가, 만일의 경우 적에게 발견되어 내부의 허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이합시를 지어서 이 적에게 보냈다. 이 적이 이를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바야흐로 위급한데 시가 도대체 무엇인가? 필히 목을 베겠다."라고 하였다. 행군 관기 통사 사인 원 만경이 그 시의 뜻을 해석하여 주었다. 이 적은 그 때서야 다시 군량과 병기를 대봉에게 보냈다. 만경이 격문을 써서 말하기를 "압록의 요충지를 지킬 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천 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령을 듣겠다"라 하고, 즉시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 진을 쳤다. 이에 따라 당 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만경을 영남으로 유배하였다. 학 처준은 안시성 아래에 있었다. 그가 아직 군사 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 우리 군사 3만 명이 엄습하니 그 군사들이 크게 당황하였다. 처준이 의자에 앉아서 한참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以右相<劉仁軌>, 爲<遼東>道副大摠管, <학處俊>·<金仁問>副之. 二月, <李勣>等, 拔我<扶餘城>. <薛仁貴>旣破我軍於<金山>, 乘勝, 將三千人, 將攻<扶餘城>, 諸將以其兵少, 止之. <仁貴>曰: "兵不必多, 顧用之何如耳." 遂爲前鋒以進, 與我軍戰, 勝之, 殺獲我軍, 遂拔<扶餘城>, <扶餘川{扶餘州}>??中四十餘城, 皆請服. 侍御史<賈言忠>奉使, 自<遼東>還.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 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未有흔也. 諺曰: '軍無媒, 中道回.' 今<男生>元{兄}??弟혁한, 爲我嚮導, 虜之情僞,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虜仍천饑, 人常{相}??掠賣, 地震裂, 狼狐入城, 분穴於門, 人心危駭, 是行不再擧矣." <泉男建>復遣兵五萬人, 救<扶餘城>, 與<李勣>等, 遇於<薛賀水>, 合戰, 敗死者三萬餘人. <勣>進攻<大行城>. 夏四月, 彗星見於畢·昴之間. <唐><許??宗{許敬宗}>??曰: "彗見東北, <高句麗>將滅之兆也." 秋九月, <李勣>拔<平壤>. <勣>旣克<大行城>, 諸軍出他道者, 皆與<勣>會, 進至<鴨록>柵. 我軍拒戰, <勣>等敗之, 追奔二百餘里, 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 相繼. <契苾何力>先引兵, 至<平壤城>下, <勣>軍繼之, 圍<平壤>月餘. 王<臧{藏}??>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 詣<勣>降, <勣>以禮接之. <泉男建>猶閉門拒守, 頻遣兵出戰, 皆敗. <男建>以軍事委浮圖<信誠>. <信誠>與小將<烏沙>·<饒苗>等, 密遣人詣<勣>, 請爲內應. 後五日, <信誠>開門, <勣>縱兵登城, 鼓조焚城. <男建>自刺不死. 執王及<男建>等. 冬十月, <李勣>將還, <高宗>命: 先以王等獻于<昭陵>, 具軍容, 奏凱歌, 入京師, 獻于大廟. 十二月, 帝受부于<含元殿>. 以王政非己出, 赦以爲司平太常伯員外同正; 以<泉男産>爲司宰少卿; 僧<信誠>爲銀靑光祿大夫; <泉男生>爲右衛大將軍. <李勣>已下, 封賞有差, <泉男建>流<黔州>. 分五部, 百七十六城, 六十九萬餘戶, 爲九都督府, 四十二州, 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 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참理. 以右威衛大將軍<薛仁貴>, 檢校安東都護, 摠兵二萬人, 以鎭撫之. 是<高宗><摠章>元年戊辰歲也. 二年, 己巳二月, 王之庶子<安勝>, 率四千餘戶, 投<新羅>. 夏四月, <高宗>移三{二}??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 及<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至<咸亨>元年庚午歲, 夏四月, <劒牟岑>欲興復國家, 叛<唐>, 立王外孫<安舜>[『羅紀』作勝.]爲主. <唐><高宗>遣大將軍<高侃>, 爲<東州>道行軍摠管, 發兵討之. <安舜>殺<劒牟岑>, 奔<新羅>. 二年辛未歲, 秋七月, <高侃>破餘衆於<安市城>. 三年壬申歲, 十二月, <高侃>與我餘衆, 戰于<白氷山{白水山}>??, 破之. <新羅>遣兵救我, <高侃>擊克之, 虜獲二千人. 四年癸酉歲, 夏閏五月, <燕山道>管大將軍<李謹行>, 破我人於<瓠瀘河>, 부獲數千人. 餘衆皆奔<新羅>. <儀鳳>二年丁丑歲, 春二月, 以降王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安輯餘衆. 東人先在諸州者, 皆遣與王俱歸,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王至<遼東>, 謀叛, 潛與<靺鞨>通. <開曜{開耀}>??元年, 召還<앙州>, 以<永淳>初死.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葬<힐利>墓左, 樹碑其阡, 散徙其人於<何南{河南}>??·<롱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舊城, 往往沒於<新羅>, 餘衆散入<靺鞨>及<突厥>. <高>氏君長遂絶. <垂拱>二年, 以降王孫<寶元>, 爲<朝鮮郡>王, 至<聖曆>初, 進左鷹揚衛大將軍, 更封忠誠國王, 賜{使}??統安東舊部, 不行. 明年, 以降王子<德武>, 爲安東都督, 後稍自國, 至<元和>十三年, 遣使入<唐>, 獻樂工.

○論曰: <玄토>·<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田蠶·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변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부於海以居之, 有以也夫. 然而『易』之 "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 <高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 皆天者有司, 亂世則英雄特起, 참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역以讐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歲. 及其東遷, 値<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土室. 其頑然不畏如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 而終於王降, 國滅而後止.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大國, 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 『左』氏曰: "國之興也, 以福; 其亡也, 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有味哉, 斯言也! 夫然則凡有國家者, 縱暴吏之驅迫, 强宗之聚斂, 以失人心, 雖欲理而不亂, 存而不亡, 又何異强酒而惡醉者乎?

三國史記卷二十二.


李丙燾.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李丙燾. 「唐會要」.李丙燾. 「羅紀」.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

27년 봄 정월, 당 나라 고종은 우상 유 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 처준과 김 인문 등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2월, 이 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점령하였다.

설 인귀는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승세를 타고 군사 3천 명을 이끌어 부여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 편 군사가 적다고 하며 이를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인귀가 말했다.

"병력은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우리 군사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가 또한 부여성을 점령하자, 부여천 안에 있는 40여 성이 모두 항복하기를 요청하였다. 시어사 이 언충이 임무를 받들고 요동에서 귀국하였다. 고종은 "군대 내부 상황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전에 선제께서 고구려에 죄를 물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적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도 중매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됨으로써, 적의 내부 상황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또한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비기」에는 '9백년이 되기 전에 80대장이 있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 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 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들은 거듭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항상 수탈을 당하고 팔려갔으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 원정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천 남건이 부여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냈는데, 설하수에서 이 적 등과 조우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사망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 적은 대행성으로 진격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 나라 허 경종이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 이 적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 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승리하자, 다른 도로 출동하였던 제군이 모두 이 적과 만나 압록책으로 진군하여 왔다. 우리 군사가 대적하여 싸우다가 이 적 등에게 패배하였고, 이 적 등은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을 함락시켰다.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연이었다. 설필 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 적의 군사가 뒤따라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 장이 천 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 적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 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그러나 천 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그는 자주 군사를 출동시켜 싸웠으나 그때마다 패배하였다. 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이 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이 적은 군사를 풀어 성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 나라 군사가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겨울 10월, 이 적이 귀국하려 하자, 고종이 그에게 먼저 고구려의 왕 등을 소릉에 인사시킨 후,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부르며 서울로 들어와 다시 태묘에 인사시키도록 명령하였다.

12월, 고종이 함원전에서 포로를 전해 받았다. 고구려왕은 정치를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원외동정으로 삼았다. 그리고 천 남산은 사재 소경, 승려 신성은 은청 광록대부, 천 남생은 우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적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정도에 따라 주었다. 천 남건은 검주로 유배시켰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 대장군 설 인귀를 검교안동도호를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진무케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이었다.

2년 기사 2월,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름 4월,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경서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함형 원년 경오 여름 4월,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신라본기」에는 승으로 되어있다.]을 임금으로 세웠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 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2년 신미 가을 7월, 고 간이 안시성에서 우리의 남은 군사를 격파하였다.

3년 임신 12월, 고 간이 우리의 남은 군사와 백빙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격파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고 간이 이를 다시 격파하여 2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4년 계유 여름 윤 5월, 연산도총관대장군 이 근행이 호로하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군사들은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의봉 2년 정축 봄 2월, 항복한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 보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 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있던 자들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왕은 요동에 도착하여 당 나라에 대항하고자 비밀리에 말갈과 내통하였다.

개요 원년, 왕이 앙주로 소환되었다가 영순 초에 사망하였다. 고종이 그에게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영구를 서울로 오게 하여 힐리의 무덤 왼편에 장례를 지냈다. 묘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케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

수공 2년,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 초에 좌응양위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구부를 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원화 13년에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쳤다.

저자의 견해 : 현토와 낙랑은 원래 조선의 국토로서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베 짜는 법을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多懼)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맡은 군주들이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들로 하여금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되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을 제거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또한 억지로 술을 권하면서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삼국사기 권 제 22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三.



삼국사기 권 제 23


百濟本紀第一.

始祖<溫祚王>·<多婁王>·<己婁王>·<盖婁王>·<肖古王>.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 초고왕.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鳥干{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미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미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타추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問{開}??基創業, 혈{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大子{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우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미鄒忽{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 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 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한 편,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원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곡,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 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저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월, 왕이 그의 재종숙부 을음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 관계의 임무를 맡겼다.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冬十月, 雷. 桃李華.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이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쳤고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四年, 春夏, 旱, 饑, 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었다.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五年, 冬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5년 겨울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면서 사냥하여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六年, 秋七月辛未{辛卯}??晦,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7월 그믐 신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투舊好, 휴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투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2월, 말갈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적병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지난 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있는 터에, 지금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점점 차지하려는 계획이 아닌가? 만일 옛날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투로 승부를 결정내보자!"

왕이 이에 대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수비하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이는 당연히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우리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관계가 단절되었다.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 救之. 賊見之, 卽退.


10년 가을 9월, 왕이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이를 마한에 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였다. 왕이 200명의 군사를 보내 곤미천에서 싸웠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을 거점으로 자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직접 100명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와 구원하였다. 적들이 이를 보고 즉시 퇴각하였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구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질疆境, 少有寧日. 황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유.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역,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 봄 2월,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來)??遷<(+漢山)>??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 그곳에 한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 봄 정월, 새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17년 봄,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과 싸웠다.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하였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구곡까지 갔다. 그러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되돌아왔다.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祀}??天地, 異鳥五來翔.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2월, 왕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에게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그 위를 날았다.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2년 가을 8월, 석두·고목의 2성을 쌓았다.

9월, 왕이 1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부현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도적을 만나 단번에 물리쳤다. 이 때 잡은 포로들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 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 遂壞其柵.


24년 가을 7월, 왕이 웅천 목책을 세웠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왕을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것인데, 지금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이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허물었다.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린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25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엄청나게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머리는 하나였으며, 몸은 둘이었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우물이 엄청나게 넘친 것은 대왕께서 융성할 징조이며,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소가 태어난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又{久}??. 당爲他所幷,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趙炳舜. 『三國史節要』.

26년 가을 7월, 왕이 말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국세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이들을 합병해 버린다면 순망치한이 되어,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빼앗아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마한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마한을 합병하였는데, 오직 원산과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28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그에게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三十一年, 春正月, 分國內民戶, 爲南北部. 夏四月, 雹. 五月, 地震. 六月, 又震.


31년 봄 정월, 국내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북부를 만들었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5월, 지진이 났다.

6월, 지진이 다시 났다.


○三十三年, 春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3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 먹었으며,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이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가을 8월, 동부와 서부의 2부를 더 설치하였다.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34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 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 가을 7월,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8월, 원산·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계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 봄 3월, 크기가 달걀 정도인 우박이 내려 새가 맞아 죽었다.

여름 4월부터 가물다가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祀}??天地.


趙炳舜. 『三國史節要』.

38년 봄 2월, 왕이 순무하여 동으로 주양, 북으로 패하까지 갔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역을 모두 없앴다.

겨울 10월, 왕이 큰 제단을 쌓고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 拒擊之.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하였다.

겨울 11월, 말갈이 다시 부현성을 습격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2백 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 방어하였다.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 本<扶餘>人也. 神識淵與{奧}??, 年過七十, 旅{려}??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1년 봄 정월, 우보 을음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70세가 넘었으나, 체력이 강하여 등용한 것이다.

2월,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 되는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안百餘集王宮. 日者曰: "鴻안, 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 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 가을 8월, 왕이 5일 동안 아산 벌에서 사냥하였다.

9월, 1백여 마리의 기러기가 왕궁에 모였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므로, 장차 먼 곳에서 귀순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명이 부양에 와서 귀순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四十五年, 春夏大旱, 草木焦枯. 冬十月, 地震, 傾倒人屋.


45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말랐다.

겨울 10월, 지진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쓰러졌다.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46년 봄 2월, 왕이 사망하였다.


○<多婁王>, <溫祚王>之元子. 器宇寬厚, 有威望. <溫祚王>在位第二十八年, 立爲太子, 至四十六年, 王薨, 繼位.


다루왕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명망이 높았다. 온조왕 재위 28년에 태자가 되었고, 46년에 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


○二年, 春正月, (+王)??謁始祖<東明>廟. 二月, 王祀天地於南壇.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2월, 왕이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三年, 冬十月, 東部<屹于>,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3년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四年, 秋八月, <高木城><昆優>, 與<靺鞨>戰, 大克, 斬首二百餘級. 九月, 王田於<橫岳>下, 連中雙鹿, 衆人歎美之.


4년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 왕이 횡악 아래에서 사냥하다가 두 마리의 사슴을 연이어 적중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六年, 春正月, 立元子<己婁>爲太子. 大赦. 二月, 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6년 봄 정월, 왕의 맏아들 기루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남쪽 주군에 명령하여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七年, 春二月, 右輔<解婁>卒, 年九十歲. 以東部<屹于>爲右輔. 夏四月, 東方有赤氣. 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 燒百姓廬屋. 冬十月, 又襲<甁山>柵.


7년 봄 2월, 우보 해루가 나이 90세로 사망하였다. 동부 흘우를 우보로 삼았다.

여름 4월,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그들이 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十年, 冬十月, 右輔<屹于>爲左輔, 北部<眞會>爲右輔. 十一月, 地震聲如雷.


10년 겨울 10월, 우보 흘우를 좌보로 삼고, 북부 진회를 우보로 삼았다.

11월, 지진이 났는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十一年, 秋, 穀不成, 禁百姓私釀酒. 冬十月, 王巡撫東西兩部, 貧不能自存者, 給穀人二石.


11년 가을, 곡식이 잘 익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동서 양부를 순회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하여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일인당 곡식 두 섬을 주었다.


○二十一年, 春二月, 宮中大槐樹自枯. 三月, 左輔<屹于>卒, 王哭之哀.


21년 봄 2월, 왕궁 뜰에 있는 큰 홰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었다.

3월, 좌보 흘우가 사망하자 왕이 슬프게 울었다.


○二十八年, 春夏旱. 慮囚, 赦死罪. 秋八月, <靺鞨>侵北鄙.


28년, 봄과 여름이 가물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고 사형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二十九年,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29년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을 방어하게 하였다.


○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36년 겨울 10월, 왕이 낭자곡성까지 토지를 개척하였다.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신라는 거절하였다.


○三十七年, (+秋八月)??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冬十月)??, 移兵<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7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군사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기병 2천 명을 동원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이들과 대적하여 물리쳤다.


○三十九年, 攻取<蛙山城>, 留二百人, 守之, 尋爲<新羅>所敗.


39년,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백 명을 그곳에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신라에게 쫓겨났다.


○四十三年, 遣兵侵<新羅>.


43년,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六年, 夏五月戊午晦, 日有食之.


46년 여름 5월 그믐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七年, 秋八月, 遣將侵<新羅>.


47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八年, 冬十月, 又攻<蛙山城>, 拔之.


48년 겨울 10월,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四十九年, 秋九月, <蛙山城>爲<新羅>所復.


49년 가을 9월,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였다.


○五十年, 秋九月, 王薨.


50년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己婁王>, <多婁王>之元子. 志識宏遠, 不留心細事. <多婁王>在位第六年, 立爲太子, 至五十年, 王薨, 繼位.


기루왕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다루왕 재위 6년에 태자가 되었고, 50년에 왕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九年, 春正月, 遣兵侵<新羅>邊境. 夏四月乙巳, 客星入紫微.


9년 봄 정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여름 4월 을사에 객성이 자미 성좌로 들어갔다.


○十一年, 秋八月乙未晦, 日有食之.


11년 가을 8월 그믐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三年, 夏六月, 地震, 裂陷民屋, 死者多.


13년 여름 6월,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주민들의 가옥이 무너졌다. 사망자가 많았다.


○十四年, 春三月, 大旱, 無릉{麥}??. 夏六月, 大風拔木.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3월,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나지 않았다.

여름 6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쓰러뜨렸다.


○十六年, 夏六月戊戌朔, 日有食之.


16년 여름 6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七年, 秋八月, <橫岳>大石五, 一時隕落.


17년 가을 8월,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한꺼번에 떨어졌다.


○二十一年, 夏四月, 二龍見<漢江>.


21년 여름 4월, 두 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二十三年, 秋八月, 隕霜殺菽. 冬十月, 雨雹.


23년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겨울 10월, 우박이 내렸다.


○二十七年, 王獵<漢山>, 獲神鹿.


27년,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二十九年, 遣使<新羅>請和.


29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三十一年, 冬, 無氷.


31년,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三十二年, 春夏旱, 年饑民相食. 秋七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32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三十五年, 春三月, 地震. 冬十月, 又震.


35년 봄 3월, 지진이 났다.

겨울 10월, 또 지진이 났다.


○三十七年, 遣使聘<新羅>.


37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四十年, 夏四月, 관巢于都城門上. 六月, 大雨浹旬, <漢江>水漲, 漂毁民屋. 秋七月, 命有司, 補水損之田.


40년 여름 4월, 서울 성문 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었다.

6월, 열흘동안 큰 비가 내려서 한강물이 넘쳐서, 주민들의 가옥이 유실되었다.

가을 7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수해를 당한 논밭을 복구하게 하였다.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 救之.


49년,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하자 서신을 보내와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五十二年, 冬十一月, 王薨.


52년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蓋婁王>, <己婁王>之子, 性恭順, 有操行. <己婁>在位五十二年薨, 卽位.


개루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하였다. 기루왕이 재위 52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獵<漢山>.


4년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五年, 春二月, 築<北漢山城>.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十年, 秋八月庚子, 熒惑犯南斗(-一)??.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가을 8월 경자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丙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新羅>阿찬<吉宣>謀叛, 事露來奔. <羅>王移書請之, 不送. <羅>王怒, 出師來伐. 諸城堅壁, 自守不出, <羅>兵絶糧而歸.

○論曰: <春秋>時, <거僕>來奔<魯>. <季文子>曰: '見有禮於其君者, 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 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전之逐鳥雀也. 觀<거僕>, 不度於善而在於凶德, 是以去之.' 今<吉宣>亦姦賊之人, <百濟>王納而匿之, 是謂掩賊爲藏者也. 由是, 失린國之和, 使民困於兵革之役, 其不明, 甚矣.


28년 봄 정월 그믐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우리 나라로 도망해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소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를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왔으나 모든 성이 굳게 방어하고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저자의 견해 : 춘추 시대에 거복이 노 나라로 도망해왔을 때, 계문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임금에게 예절이 있는 자를 보면, 임금 섬기기를 마치 효자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같이 하며, 자기 임금에게 예절이 없는 자를 보면, 임금 죽이기를 마치 매가 참새를 쫓는 것같이 한다. 거복을 보니 그의 뜻이 선한 데 있지 않고 악한 데 있기 때문에 그를 쫓아버리노라."

지금보면 길선도 역시 간사한 역적인데 백제왕이 그를 받아들여 숨겨 주었으니 이야말로 도적을 비호하여 탐오를 함께 하는 격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와 화친함을 잃고 백성들로 하여금 병역에 시달리게 하였으니, 그는 대단히 명철하지 못했다.


○三十九年, 王薨.


39년, 왕이 사망하였다.


○<肖古王>[一云<素古>.], <蓋婁王>之子. <蓋婁>在位三十九年薨, 嗣位.


초고왕[소고라고도 한다.]은 개루왕의 아들이다. 개루왕이 재위 39년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었다.


○二年, 秋七月, 潛師襲破<新羅>西鄙二城, 虜獲男女一千而還. 八月, <羅>王遣一吉찬<興宣>, 領兵二萬, 來侵國東諸城.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掩至<漢水>. 王度<羅>兵, 衆不可敵, 乃還前所掠.


2년 가을 7월, 군사를 몰래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에 있는 두 성을 격파하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동쪽의 여러 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신라왕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까지 진격해왔다. 왕은 신라군이 많아서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 이전에 빼앗았던 성을 돌려주었다.


○五年, 春三月丙寅晦, 日有食之. 冬十月, 出兵侵<新羅>邊鄙.


5년 봄 3월 그믐 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二十一年, 冬十月, 無雲而雷. 星패于西北, 二十日而滅.


21년 겨울 10월, 구름 없이 우레가 쳤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二十二年, 夏五月, 王都井及<漢水>皆竭.


22년 여름 5월, 서울의 우물과 한수가 모두 말랐다.


○二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


2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군사를 출동하여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二十四年, 夏四月丙午朔, 日有食之. 秋七月, 我軍與<新羅>戰於<狗壤>, 敗北, 死者五百餘人.


24년 여름 4월 초하루 병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二十五年, 秋八月, 出兵襲<新羅>西境<圓山鄕>,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 帥馬兵五百, 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25년 가을 8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 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二十六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26년 가을 9월, 치우기별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三十四年, 秋七月, 地震. 遣兵, 侵<新羅>邊境.


34년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三十九年, 秋七月, 出兵攻<新羅><腰車城>, 拔之, 殺其城主<薛夫>. <羅>王<奈解>怒, 命伊伐찬<利音>爲將, 帥六部精兵, 來攻我<沙峴城>. 冬十月, 星패于東井.


39년 가을 7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요차성을 공략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신라왕 나해가 분개하여 이벌찬 이음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을 치게 하였다.

겨울 10월, 혜성이 동정 성좌에 나타났다.


○四十年, 秋七月, 太白犯月.


40년 가을 7월,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다.


○四十三年, 秋, 蝗, 旱, 곡不順成, 盜賊多起, 王撫安之.


43년 가을,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물어서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그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四十四年, 冬十月, 大風拔木.


44년 겨울 10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四十五年,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 不克, 焚燒城門而遁.


45년 봄 2월,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고 동부의 민가를 그곳으로 옮겼다.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四十六年, 秋八月, 國南, 蝗害곡, 民饑. 冬十一月, 無氷.


46년 가을 8월, 남쪽 지역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四十七年, 夏六月庚寅晦, 目{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47년 여름 6월 그믐 경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八年, 秋七月, 西部人<茴會{荀會}>??獲白鹿, 獻之. 王以爲瑞, 賜곡一百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48년 가을 7월, 서부 사람 회회가 흰 사슴을 잡아 바쳤다. 왕이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곡식 1백 석을 주었다.


○四十九年, 秋九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三國史記卷第二十三.


49년 가을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령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술천에 이르렀다.

왕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3 끝




三國史記卷第二十四.



삼국사기 권 제 24


百濟本紀第二.

<仇首王>·<沙伴王>·<古이王>·<責稽王>·<汾西王>·<比流王>·<契王>·<近肖古王>·<近仇首王>·<枕流王>.


백제본기 제 2

구수왕, 사반왕,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설왕,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仇首王>[或云<貴須>.], <肖古王>之長子, 身長七尺, 威儀秀異. <肖古>在位四十九年薨, 卽位.


구수왕[혹은 귀수라고도 한다.]은 초고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하였다. 초고왕이 재위 49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三年, 秋八月, <靺鞨>來圍<赤峴城>, 城主固拒, 賊退歸. 王帥勁騎八百, 追之, 戰<沙道城>下, 破之, 殺獲甚衆.


3년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에 와서 포위했으나 성주가 굳게 수비하니 적이 퇴각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사도성 밖에서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병이 많았다.


○四年, 春二月, 設二柵於<沙道城>側, 東西相去十里, 分<赤峴城>卒, 戍之.


4년 봄 2월, 사도성 옆에 두 곳의 목책을 세웠다. 동서의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사를 나누어 이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五年, 王遣兵圍<新羅><獐山城>, <羅>王親帥兵, 擊之, 我軍敗績.


5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을 포위했다.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七年, 冬十月, 王城西門火. <靺鞨>寇北邊, 遣兵拒之.


7년 겨울 10월, 왕성 서문에 화재가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므로 군사를 보내 방어하였다.


○八年, 夏五月, 國東大水, 山崩四十餘所. 六月戊辰晦, 日有食之. 秋八月, 大閱於<漢水>之西.


8년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40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

6월 그믐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한수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九年, 春二月, 命有司修제防. 三月, 下令勸農事. 夏六月, 王都雨魚. 冬十月, 遣兵入<新羅><牛頭鎭>, 抄掠民戶. <羅>將<忠萱>領兵五千, 逆戰於<熊谷>, 大敗, 單騎而遁. 十一月, 庚申晦, 日有食之.


9년 봄 2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3월, 명령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여름 6월, 서울에 물고기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겨울 10월, 신라의 우두진으로 군사를 보내 민가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웅곡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대패하고, 단신으로 도망하였다.

11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秋七月, <新羅>一吉찬<連珍>來侵, 我軍逆戰於<烽山>下, 不克. 冬十月, 大白{太白}??晝見.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가을 7월, 신라의 일길찬 연진이 침입하였다. 우리 군사는 봉산 아래에서 그들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겨울 10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十四年, 春三月, 雨雹. 夏四月, 大旱, 王祈<東明廟>, 乃雨.


14년 봄 3월,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곧 비가 내렸다.


○十六年, 冬十月, 王田於<寒泉>. 十一月, 大疫. <靺鞨>入<牛谷>界, 奪掠人物. 王遣精兵三百, 拒之. 賊伏兵夾擊, 我軍大敗.


16년 겨울 10월, 왕이 한천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이 우곡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은 정예군 3백 명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十八年, 夏四月, 雨雹, 大如栗, 鳥雀中者死.


18년 여름 4월, 밤알 크기의 우박이 내렸다. 이에 맞은 새들이 죽었다.


○二十一年, 王薨.


21년, 왕이 사망하였다.


○<古이王>, <蓋婁王>之第二子也. <仇首王>在位二十一年薨, 長子<沙伴>嗣位, 而幼少不能爲政, <肖古王>母弟<古이>卽位.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므로 초고왕의 동복 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三年, 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


3년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여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五年, 春正月, 祭天地, 用??{鼓}??吹. 二月, 田於<釜山>, 五旬乃返. 夏四月, 震王宮門柱, 黃龍自其門飛出.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정월,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왕이 부산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갔다.


○六年, 春正月, 不雨, 至夏五月, 乃雨.


6년 봄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여름 5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七年, 遣兵侵<新羅>. 夏四月, 拜<眞忠>爲左將, 委以內外兵馬事. 秋七月, 大閱於<石川>. 雙안起於川上, 王射之, 皆中.


7년, 군사를 보내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여름 4월,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내외의 군사에 관한 직무를 맡겼다.

가을 7월, 석천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이 때 냇가에서 오리 한 쌍이 날아 가는 것을 왕이 쏘아서 모두 적중시켰다.


○九年, 春二月, 命國人, 開稻田於南澤. 夏四月, 以叔父<質>爲右輔. <質>性忠毅, 謀事無失. 秋七月, 出西門觀射.


9년 봄 2월, 백성들로 하여금 남쪽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숙부인 질을 우보로 삼았다. 질은 성격이 충직하여 실수없이 일을 계획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서문 밖에 나가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十年, 春正月, 設大壇, 祀天地山川.


10년 봄 정월, 큰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지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관丘儉>, 與<樂浪>大守{太守}??<劉茂>·<朔方{帶方}>??大守{太守}??<王遵{弓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13년 여름, 크게 가물어 보리가 죽었다.

가을 8월, 위 나라 유주 자사 관구 검이 낙랑 태수 유 무, 삭방 태수 왕 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 보냈다.


○十四年, 春正月, 祭天地於南壇. 二月, 拜<眞忠>爲右輔, <眞勿>爲左將, 委以兵馬事.


14년 봄 정월,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진충을 우보로 임명하였다.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十五年, 春, 夏旱. 冬, 民饑, 發倉賑恤, 又復一年租調.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고 또한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十六年, 春正月甲午, 大白{太白}??襲月.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봄 정월 갑오, 태백성이 달을 덮었다.


○二十二年, 秋九月, 出師侵<新羅>, 與<羅>兵戰於<槐谷>西, 敗之, 殺其將<翊宗>. 冬十月, 遣兵攻<新羅><烽山城>, 不克.


22년 가을 9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군과 괴곡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신라 장수 익종을 죽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쳤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二十四年, 春正月, 大旱, 樹木皆枯.


24년 봄 정월, 크게 가물어 나무가 모두 말랐다.


○二十五年, 春, <靺鞨>長<羅渴>獻良馬十匹, 王優勞使者以還之.


25년 봄, 말갈의 추장 나갈이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왕이 그 사자를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二十六年, 秋九月, 靑紫雲起宮東, 如樓閣.


26년 가을 9월, 푸르고 보랏빛 나는 구름이 마치 누각 모양으로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二十七年, 春正月, 置內臣佐平, 掌宣納事;  內頭佐平, 掌庫藏事;  內法佐平, 掌禮儀事;  衛士佐平, 掌宿衛兵事;  朝廷佐平, 掌刑獄事;  兵官佐平, 掌外兵馬事. 又置達率·恩率·德率·한率·奈率及將德·施德·固德·季德·對德·文督·武督·佐軍·振武·克虞. 六佐平병一品, 達率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한率五品, 奈率六品, 將德七品, 施德八品, 固德九品, 季德十品,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克虞十六品. 二月, 下令六品已上服紫, 以銀花飾冠, 十一品已上服緋, 十六品已上服靑. 三月, 以王弟<優壽>爲內臣佐平.


27년 봄 정월, 내신 좌평을 두어 왕명의 출납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두 좌평을 두어 물자와 창고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 좌평을 두어 예법과 의식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 좌평을 두어 숙위 병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 좌평을 두어 형벌과 송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 좌평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 달솔·은솔·덕솔·한솔·나솔· 장덕·시덕·고덕·계덕·대덕·문독·무독·좌군·진무·극우 등을 두었다. 6개 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 6품 이상은 자주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으며,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월, 왕의 아우 우수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二十八年, 春正月初吉, 王服紫大袖袍·靑錦袴·金花飾烏羅冠·素皮帶·烏韋{革}??履, 坐南堂聽事. 二月, 拜<眞可>爲內頭佐平; <優豆>爲內法佐平; <高壽>爲衛士佐平; <昆奴>爲朝廷佐平; <惟巳{惟己}>??爲兵官佐平. 三月, 遣使<新羅>請和, 不從.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8년 봄 정월 초하룻날, 왕이 자주빛으로 된 큰 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을 신고,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2월, 진가를 내두 좌평, 우두를 내법 좌평, 고수를 위사 좌평, 곤노를 조정 좌평, 유기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二十九年, 春正月, 下令: 凡官人受財及盜者, 三倍徵贓, 禁錮終身.


29년 봄 정월,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그 세 배를 배상하며, 종신 금고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二{三}??十三年, 秋八月, 遣兵, 攻<新羅><烽山城>.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 出擊敗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33년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반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三十六年, 秋九月, 星패于紫宮.


36년 가을 9월,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났다.


○三十九年, 冬十一月, 遣兵侵<新羅>.


39년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五年, 冬十月, 出兵攻<新羅>, 圍<槐谷城>.


45년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을 포위했다.


○五十年, 秋九月, 遣兵侵<新羅>邊境.


5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五十三年, 春正月, 遣使<新羅>請和. 冬十一月, 王薨.


53년 봄 정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責稽王>[或云<靑稽>.], <古이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이>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城>·<蛇城>, 備之.


책계왕[혹은 청계라고도 한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 고이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왕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13년 가을 9월, 한 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汾西王>, <責稽王>長子. 幼而聰惠, 儀表英挺, 王愛之, 不離左右, 及王薨, 繼而卽位. 冬十月, 大赦.


분서왕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풍채가 걸출하였으므로 왕이 그를 사랑하여 항상 옆에 두었다. 왕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五年, 夏四月, 彗星晝見.


5년 여름 4월, 낮에 혜성이 나타났다.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大守{太守}??所遣刺客賊害, 薨.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2월,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比流王>, <仇首王>第二子, 性寬慈愛人, 又强力善射. 久在民間, 令譽流聞. 及<汾西>之終, 雖有子, 皆幼不得立, 是以, 爲臣民推戴卽位.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끼며, 또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떨쳤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비록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으로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그가 왕위에 올랐다.


○五年, 春正月丙子朔, 日有食之.


5년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九年, 春二月, 發使巡問百姓疾苦, 其鰥寡孤獨不能自存者, 賜곡人三石. 夏四月, 謁<東明>廟. 拜<解仇>爲兵官佐平.


9년 봄 2월, 사신을 파견하여 민간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들로서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 일인당 곡식 3석씩을 주었다.

여름 4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十年, 春正月, 祀天地於南郊. 王親割牲.


10년 봄 정월, 남쪽 교외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이 직접 제물에 쓰일 고기를 베었다.


○十三年, 春, 旱, 大星西流. 夏四月, 王都井水溢, 黑龍見其中.


13년 봄, 가뭄이 들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 서울에서 우물이 넘치고, 그 속에서 흑룡이 나타났다.


○十七年, 秋八月, 築射臺於宮西, 每以朔望習射.


17년 가을 8월, 대궐 서쪽에 활 쏘는 누대를 쌓아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十八年, 春正月, 以王庶弟<優福>爲內臣佐平. 秋七月, 大白{太白}??晝見. 國南蝗害곡.


趙炳舜. 『三國史節要』.

18년 봄 정월, 왕의 이복동생 우복을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二十二年, 冬十月, 天有聲, 如風浪相激. 十一月, 王獵於<狗原>北, 手射鹿.


22년 겨울 10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풍랑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11월, 왕이 구원 북쪽에서 사냥하여 직접 사슴을 쏘았다.


○二十四年, 秋七月, 有雲如赤烏夾日. 九月, 內臣佐平<優福>, 據<北漢城>叛, 王發兵討之.


24년 가을 7월, 적오와 같이 생긴 구름이 양쪽에서 해를 끼고 있었다.

9월, 내신 좌평 우복이 북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다.


○二十八年, 春夏大旱, 草木枯, 江水竭, 至秋七月, 乃雨. 年饑人相食.


28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풀과 나무와 강물이 말랐다. 가을 7월에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三十年, 夏五月, 星隕. 王宮火, 連燒民戶. 秋十{七}??月, 修宮室. 拜<眞義>爲內臣佐平. 冬十二月, 雷.


趙炳舜. 『三國史節要』.

30년 여름 5월, 별이 떨어졌다. 대궐에 화재가 났는데 연이어 민가도 불탔다.

가을 7월, 대궐을 수리하였다. 진의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우레가 쳤다.


○三十二年, 冬十月乙未朔, 日有食之.


32년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十三年, 春正月辛巳, 彗星見于奎.


33년 봄 정월 신사에 혜성이 규성 성좌에 나타났다.


○三十四年, 春二月, <新羅>遣使來聘.


34년 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四十一年, 冬十月, 王薨.


41년 겨울 10월, 왕이 사망하였다.


○<契王>, <汾西王>之長子也. 天資剛勇, 善騎射. 初<汾西>之薨也, <契王>幼不得立, <比流王>在位四十一年薨, 卽位.


설왕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전에 분서왕이 죽었을 때는 설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는데,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三年, 秋九月, 王薨.


3년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契王>薨, 繼位.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설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二年, 春正月, 祭天地神祇.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性한戾不仁, 臨事苛細, 恃勢自用, 國人疾之.


2년 봄 정월,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을 조정 좌평으로 삼았다. 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다. 그는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 遣使聘<新羅>.


21년 봄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二十三年,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23년 봄 3월 초하루 정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사신을 시켜 신라에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24년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釗}>??,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趙炳舜. 『三國史節要』.

26년,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二十七年, 春正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地震.


27년 봄 정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 奔<新羅>.


28년 봄 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독산 성주가 주민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갔다.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冬十一月, 王薨.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고기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와서 박사 고 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 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近仇首王>[一云<諱須>.], <近肖古王>之子. 先是, <高句麗><國岡王><斯由>親來侵, <近肖古王>遣太子拒之. 至<半乞壤>, 將戰. <高句麗>人<斯紀>, 本<百濟>人, 誤傷國馬蹄, 懼罪奔於彼. 至是, 還來, 告太子曰: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 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太子從之, 進擊大敗之, 追奔逐北, 至於<水谷城>之西北. 將軍<莫古解>諫曰: "嘗聞道家之言: '知足不辱, 知止不殆.' 今所得多矣, 何必??{求}??多." 太子善之, 止焉. 乃積石爲表, 登其上, 顧左右曰: "今日之後, 疇克再至於此手{乎}??." 其地有巖石, 하若馬蹄者, 他人至今, 呼爲<太子馬迹>. <近肖古>在位三十年薨, 卽位.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근구수왕[휘수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국강왕 사유가 직접 와서 침범하였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는 반걸양에 이르러 전투를 시작하려 하였다. 고구려인 사기는 원래 백제인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나게 하였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었다. 그가 이 때 돌아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고구려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 중 제일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태자가 이 말에 따라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달아나는 군사를 계속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에 도착하였다. 이 때 장수 막고해가 간하였다.

"일찌기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읍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태자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중단하였다. 그는 즉시 그곳에 돌을 쌓아 표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는가?"

그곳에는 말발굽 같이 생긴 바윗돌 틈이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태자의 말굽 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以王舅<眞高道>爲內臣佐平, 委以政事.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2년, 왕의 외삼촌 진고도를 내신 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十一月, <高句麗>來侵.


3년 겨울 10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五年, 春三月, 遣使朝<晉>, 其使海上遇惡風, 不達而還. 夏四月, 雨土竟日.


5년 봄 3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으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진 나라에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름 4월, 흙비가 종일 내렸다.


○六年, 大疫. 夏五月, 地裂, 深五丈, 橫廣三丈, 三日乃合.


6년,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여름 5월, 땅바닥이 깊이가 다섯 길, 넓이가 세 길이나 되게 갈라졌다가 3일만에 다시 붙었다.


○八年, 春不雨, 至六月, 民饑, 至有죽子者, 王出官곡, 贖之.


8년, 봄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가 나타나자, 왕이 나라의 곡식을 내어 대신 값을 물어 주었다.


○十年, 春二月, 日有暈三重. 宮中大樹自拔. 夏四月, 王薨.


10년 봄 2월,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대궐 뜰에 있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 왕이 사망하였다.


○<枕流王>, <近仇首王>之元子, 母曰<阿이>夫人, 繼父卽位.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타>自<晉>至, 王迎之, 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가을 7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진 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

三國史記卷第二十四.


2년 봄 2월,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중 1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4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五.



삼국사기 권 제 25


百濟本紀第三.

<辰斯王>·<阿莘王>·<전支王>·<父木辛王{久이辛王}>??·<毗有王>·<盖鹵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백제본기 제 3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辰斯王>, <近仇首王>之仲子, <枕流>之弟. 爲人强勇, 聰惠多智略. <枕流>之薨也, 太子少, 故叔父<辰斯>卽位.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그는 사람됨이 용맹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태자의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秋七月, 隕霜害곡. 八月, <高句麗>來侵.


2년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관문의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길이가 청목령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닿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三年, 春正月, 拜<眞嘉謨>爲達率, <豆知>爲恩率. 秋九月, 與<靺鞨>戰<關彌嶺>, 不捷.


3년 봄 정월, 진 가모를 달솔로 임명하고, 두지를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9월, 관미령에서 말갈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5년 가을 9월,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六年, 秋七月, 星패于北河. 九月, 王命達率<眞嘉謨>,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王拜<嘉謨>爲兵官佐平. 冬十月, 獵於<狗原>, 七日乃返.


6년 가을 7월, 혜성이 북하 성좌에 나타났다.

9월, 왕이 달솔 진 가모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2백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가모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七年, 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 夏四月, <靺鞨>攻陷北鄙<赤峴城>.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 又獵<橫岳>之西.


7년 봄 정월, 궁실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가을 7월, 왕이 서쪽 지방의 큰 섬에서 사냥하다가 직접 사슴을 쏘아 적중시켰다.

8월, 왕이 다시 횡악 서쪽 지역에서 사냥하였다.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阿莘王>[或云<阿芳>.], <枕流王>之元子. 初, 生於<漢城>別宮, 神光炤夜. 及壯, 志氣豪邁, 好鷹馬. 王薨時, 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卽位.


아신왕[혹은 아방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그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을 밝혔다. 그가 장성하자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였으며,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진사왕이 재위 8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武>, 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치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영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三年, 春二月, 立元子<전支>爲太子. 大赦. 拜庶弟<洪>爲內臣佐平. 秋七月, 與<高句麗>戰於<水谷城>下, 敗績. 大白{太白}??晝見.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이복동생 홍을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낮에 태백성이 나타났다.


○四年, 春二月, 星패于西北, 二十日而滅. 秋八月, 王命左將<眞武>等, 伐<高句麗>, <麗>王<談德>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 拒戰.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 次於<靑木嶺>下. 會, 大雪, 士卒多凍死. 廻軍至<漢山城>, 勞軍士.


4년 봄 2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전支>爲質. 秋七月, 大閱於<漢水>之南.


6년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가을 7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七年, 春二月, 以<眞武>爲兵官佐平, <沙豆>爲左將. 三月, 築<雙峴城>. 秋八月, 王將伐<高句麗>, 出帥{師}??至<漢山>北柵. 其夜大星落, 營中有聲. 王深惡之, 乃止. 九月, 集都人, 習射於<西臺>.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2월, 진무를 병관 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다.

3월, 쌍현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출동하여 한산 북쪽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진영에서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여 공격을 중지하였다.

9월, 서울 사람들을 모아 서대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였다.


○八年, 秋八月,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襄{衰}??滅{減}??.


今西龍.李丙燾.

8년 가을 8월,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니, 백성들이 병역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하였고, 이 결과로 호구가 줄었다.


○九年, 春二月, 星패于奎婁. 夏六月庚辰朔, 日有食之.


9년 봄 2월, 혜성이 규성과 누성 성좌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夏, 大旱, 禾苗焦枯, 王親祭<橫岳>, 乃雨. 五月, 遣使<倭>國求大珠.


11년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벼가 타들어가자, 왕이 직접 횡악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내렸다.

5월,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구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倭>國使者至, 王迎勞之, 特厚. 秋七月, 遣兵侵<新羅>邊境.


12년 봄 2월,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十四年, 春三月, 白氣自王宮西起, 如匹練. 秋九月, 王薨.


14년 봄 3월,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전支王>[或士{云}??<直支>.], 『梁書』名<映{暎??/전??}>,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 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十四年, 王薨, 王仲弟<訓解>攝政, 以待太子還國, 季弟<설禮>殺<訓解>, 自立爲王. <전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送. 旣至國界, <漢城>人<解忠>來告曰: "大王棄世, 王弟<설禮>殺兄自(+立)??, 王願太子無輕入." <전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國人殺<설禮>, 迎<전支>卽位. 妃<八회>夫人, 生子<久이辛>.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전지왕[혹은 직지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에서는 영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고,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갔다. 14년에 아신왕이 사망하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첩례가 훈해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 이 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그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이 와서 고하기를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전지가 왜인을 체류시켜 자기를 호위하게 하면서, 바다 가운데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이다. 그녀는 아들 구이신을 낳았다.


○二年, 春正月, 王謁<東明>廟. 祭天地於南壇. 大赦. 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九月, 以<解忠>爲達率, 賜<漢城>租一千石.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고, 한성의 벼 1천 석을 주었다.


○三年, 春二月, 拜庶弟<餘信>爲內臣佐平, <解회{解須}>??爲內法佐平, <解丘>爲兵官佐平, 皆王戚也.


『북한본』.

3년 봄 2월, 이복동생 여신을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해수를 내법 좌평으로 임명하고,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니 모두가 왕의 친척이었다.


○四年, 春正月, 拜<餘信>爲上佐平, 委以軍國政事. 上佐平之職, 始於此, 若今之총宰.


4년 봄 정월, 여신을 상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이라는 직위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었다.


○五年, <倭>國遣使, 送夜明珠, 王優禮待之.


5년,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오니 왕이 특별히 예우하였다.


○十一年, 夏五月甲申, 彗星見.


11년 여름 5월 갑신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二年, <東晉><安帝>遣使, 冊命王,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12년,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十三年, 春正月甲戌朔, 日有食之. 夏四月, 旱, 民饑. 秋七月, 徵東北二部人年十五已上, 築<沙口城>, 使兵官佐平<解丘>監役.


13년 봄 정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7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 좌평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十四年, 夏, 遣使<倭>國, 送白綿{錦}??十匹.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여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흰 포목 열 필을 보냈다.


○十五年, 春正月戊戌, 星패于大微{太微}. 冬十(-一)??月丁亥朔,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5년 봄 정월 무술에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초하루 정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六年, 春三月, 王薨.


16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久이辛王>, <전支王>長子. <전支王>薨, 卽位.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八}??年, 冬十二月, 王薨.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겨울 12월, 왕이 사망하였다.


○<毗有王>, <久이辛王>之長子.[或云: <전支王>庶子. 未知孰是.] 美姿貌, 有口辯, 人所推重, <久이辛王>薨, 卽位.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용모가 훌륭하고 말을 잘 하여 사람들이 따르고 귀중히 여겼다. 구이신왕이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二月, 王巡撫四部, 賜貧乏곡有差. <倭>國使至, 從者五十人.


2년 봄 2월, 왕이 4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다.

왜국 사신이 왔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三年, 秋, 遣使入<宋>朝貢. 冬十月, 上佐平<餘信>卒, 以<解회{解須}>??爲上佐平. 十一月, 地震, 大風飛瓦. 十二月, 無氷.


『북한본』.

3년 가을,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상좌평 여신이 사망하자 해수를 상좌평으로 임명하였다.

11월, 지진이 발생하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았다.

12월, 물이 얼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宋><文皇帝>以王復修職貢, 降使冊授&先王<映>{前王<전支>}??爵號.[<전支王>十二年, <東晋>冊命,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송 나라 문황제는 왕이 다시 조공한다 하여 사신을 보내 선대 임금 영의 작위를 주었다.[전지왕 12년, 동진에서 전지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했었다.]


○七年, 春夏不雨. 秋七月, 遣使入<新羅>, 請和.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 7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八年, 春二月,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新羅>報聘以良金·明珠.


8년 봄 2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다시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좋은 금과 구슬을 답례로 보내 왔다.


○十四年, 夏四月戊午朔,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宋>朝貢.


14년 여름 4월 초하루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一年, 夏五月, 宮南池中有火, 焰如車輪, 終夜而滅. 秋七月, 旱, 곡不熟, 民饑, 流入<新羅>者多.


21년 여름 5월, 대궐 남쪽 연못에서 불길이 일어 났는데, 불꽃이 수레바퀴 같았고, 밤새도록 타다가 사그러졌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어 곡식이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들어간 자가 많았다.


○二十八年, 星隕如雨, 星패于西北, 長二丈許. 秋八月, 蝗害곡, 年饑.


28년, 별이 비처럼 떨어지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두 발 정도 되었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곡식에 해를 입혀 흉년이 들었다.


○二十九年, 春三月, 王獵于<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회{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북한본』.

29년 봄 3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자 날아갔다.

왕이 사망하였다.


○<蓋鹵王>[或云<近蓋婁>.], 諱<慶司>, <毗有王>之長子. <毗有>在位二十九年, 薨, 嗣.


개로왕[혹은 근개루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이니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다.


○十四年, 冬十月癸酉朔, 日有食之.


14년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八月, 遣將侵<高句麗>南鄙.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靑木嶺>, 分<北漢山城>士卒, 戍之.


15년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의 병졸들을 나누어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협{協}??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양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한{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회{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탄力竭, 轉自孱축.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추??/掃??}後宮, 幷遣子弟, 牧어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馬{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효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외효>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연연>, 共相脣鹵{齒}??,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리.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병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 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에.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요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황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수, 跨塞天達{逵}??? 今上所得鞍, 一以實驗." <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其{甚}??善{喜}??.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집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 親所聞見. 卿與<高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수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較}??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別旨." 又詔曰: "知: <高句麗>阻疆, 侵질卿上{土}??,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 雖有自昔之흔, 於國, 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各{咎}??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집則保境. 故기미著於前典, 고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황{황}??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句麗>卽서,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협{協}??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幅)??."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수,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 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북한본』.趙炳舜은 이를 '運'의 避諱字로 보았다.李丙燾.『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李丙燾. 「魏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18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방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 여례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이를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소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적들이 고구려로 도망해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연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을 벌 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 나라가 신주를 죽이니 초 장왕이 맨발로 다녔으며,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위 나라 현조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 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5복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 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니,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 월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 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왕 연에게 조서를 보내 소안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소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위 나라에서는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소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하여 위 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 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 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先是, <高句麗><長壽王>, 陰謀<百濟>, 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愚僧旣不能知道, 思有以報國恩. 願大王不以臣不肖, 指使之, 期不辱命." 王悅, 密使譎<百濟>. 於是, <道琳>佯逃罪, 奔入<百濟>. 時, <百濟>王<近蓋婁>好博혁. <道琳>詣王門, 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 王召入對碁, 果國手也. 遂尊之, 爲上客, 甚親닐之, 恨相見之晩. <道琳>一日侍坐, 從容曰: "臣異國人也, 上不我疎外, 恩私甚渥, 而惟一技之是效, 未嘗有分毫之益. 今願獻一言, 不知上意如何耳." 王曰: "第言之, 若有利於國, 此所望於師也." <道琳>曰: "大王之國, 四方皆山丘河海, 是天設之險, 非人爲之形也. 是以, 四린之國, 莫敢有유心, 但願奉事之不暇. 則王當以崇高之勢, 富有之業, 송人之視聽, 而城郭不葺, 宮室不修. 先王之骸骨, 權찬於露地, 百姓之屋廬, 屢壞於河流, 臣竊爲大王不取也." 王曰: "諾! 吾將爲之."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 作宮樓閣臺사,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是以, 倉庾虛竭, 人民窮困, 邦之얼올, 甚於累卵. 於是, <道琳>逃還以告之. <長壽王>喜, 將伐之, 乃授兵於帥臣. <近蓋婁>聞之, 謂子<文周>曰: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합避難以續國系焉?" <文周>乃與<木협滿致>·<祖彌桀取>[<木협>·<祖彌>, 皆複姓, 『隋書』以<木협>爲二姓, 未知孰是.]南行焉. 至是, <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이萬年>[<再曾>·<古이>, 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己,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阿旦城}>??下장之. <桀婁>·<萬年>, 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論曰: <楚><명王{昭王}>??之亡也, <운公><辛>之弟<懷>, 將弑王曰: "<平王>殺吾父, 我殺其子, 不亦可乎?" <辛>曰: "君討臣, 誰敢수之? 君命, 天也, 若死天命, 將誰수?" <桀婁>等, 自以罪不見容於國, 而導敵兵, 縛前君而害之, 其不義也, 甚矣. 曰: "然則<伍子胥>之入<영>鞭尸, 何也?" 曰: "<楊子>『法言』評此以爲不由德. 所謂德者, 仁與義而已, 則<子胥>之한, 不如<운公>之仁. 以此論之,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

三國史記卷第二十五.


今西龍.李丙燾.趙炳舜. '명'은 高麗 光宗의 諱인 '昭'의 避諱字.

21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 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중 도림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왕 근개루는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오,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어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 만치와 조미 걸취[목협, 조미는 모두 복성인데, 「수서」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 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 걸루, 고이 만년[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저자의 견해 : 초 나라 소왕이 운 땅으로 도망갔을 때, 운공인 신의 아우 회가 소왕을 죽이려 하면서 말했다.

"평왕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신이 말했다.

"임금이 신하를 치는 것을 누가 감히 원수로 생각하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 같은 것이니, 하늘의 명령으로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라 하겠는가?"

걸루 등은 자신의 죄 때문에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았는데, 도리어 적병을 인도하여 이전의 자기 임금을 묶어 죽였으니, 의롭지 못한 정도가 심하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오 자서가 초 나라 서울 영에 들어가, 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한 것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양자 「법언」에는 이를 평하여 "덕에 기반을 둔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인'과 '의'가 있을 뿐이니, 오 자서의 잔인함이 운공의 어진 행위만 못하다. 이렇게 평한다면 걸루 등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삼국사기 권 제 25 끝




三國史記卷第二十六.



삼국사기 권 제 26


百濟本紀第四.

<文周王>·<三斤王>·<東城王>·<武寧王>·<聖王>.


백제본기 제4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녕왕, 성왕.


○<文周王>[或作<汶州>.], <蓋鹵王>之子也. 初, <毗有王>薨, <蓋鹵>嗣位, <文周>輔之, 位至上佐平. <蓋鹵>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 圍<漢城>. <蓋鹵>영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 得兵一萬廻. <麗>兵雖退, 城破王死, 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冬十月, ??{移}??都於<熊津>.


趙炳舜. 『三國史節要』.

문주왕['文周'를 '汶州'로도 쓴다.]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죽어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二年, 春二月,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三月, 遣使朝<宋>, <高句麗>塞路, 不達而還.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秋八月, 拜<解仇>爲兵官佐平.


2년 봄 2월,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3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되돌아왔다.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夏四月, 拜王弟<昆支>爲內臣佐平, 封長子<三斤>爲太子. 五月, 黑龍見<熊津>. 秋七月, 內臣佐平<昆支>卒.


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내신 좌평 곤지가 사망하였다.


○四年??, 秋八月, 兵官佐平<解仇>, 擅權亂法, 有無君之心, 王不能制. 九月, 王出獵, 宿於外, <解仇>使盜害之, 遂薨.


李丙燾는, 연표에 의하면 文周王은 재위한 것이 3년 뿐이므로, 이 四年의 기사는 모두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본다.

趙炳舜은 「三國史節要」와 「三國史記」의 연표에 근거하여 四年의 이 기사를 모두 3년의 기사로 본다.

4년 가을 8월, 병관 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임금을 경시하였으나 왕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외부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그를 해치게 하여, 왕이 마침내 사망하였다.


○<三斤王>[或云<壬乞>.], <文周王>之長子. 王薨, 繼位, 年十三歲, 軍國政事, 一切委於佐平<解仇>.


삼근왕[혹은 임걸이라고도 한다.]은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으니, 나이 13세였다. 군사 임무와 나라 정사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二年, 春, 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 王命佐平<眞男>以兵二千討之, 不克. 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建{熊津}>??市.

○論曰: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之, 以爲無臣子也. <解仇>賊害<文周>, 其子<三斤>繼位, 非徒不能誅之, 又委之以國政, 至於據一城以叛, 然後再興大兵以克之. 所謂履霜不戒, 馴致堅氷, 熒熒不滅, 至于炎炎, 其所由來, 漸矣. <唐><憲宗>之弑, 三世後, 僅能殺其賊, 황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 又烏足道哉! 三月己酉朔,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좌평 진남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시 덕솔 진로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이게 했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체포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저자의 견해 : 「춘추」의 논법에서는 임금을 죽였는데도 그 역적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이를 엄하게 규탄하여 이는 신하다운 신하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왕을 시해하였는데 그의 아들 삼근이 왕위를 계승하여 그를 죽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사를 그에게 맡겼다가 그가 하나의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된 후에야 두 번이나 대병을 출동시켜 그를 제압하였다. 이는 소위 서리를 밟으면서도 경계하지 않다가 얼음이 얼 때 이르는 격이며, 조그만 불씨를 끄지 않다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격이니,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연유는 모두 점차로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당 나라 헌종이 살해되었을 때도 3대 후에야 겨우 그 역적을 죽였으니, 황차 바다 모퉁이에 있는 외진 땅의 삼근과 같은 애숭이에 있어서야 어찌 말할 것이 있으랴!

3월 초하루 기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年, 春夏大旱. 秋九月, 移<大豆城>於<斗谷>. 冬十一月, 王薨.


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9월,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東城王>, 諱<牟大>[或作<摩牟{摩帝}>??.], <文周王>弟<昆支>之子. 膽力過人, 善射, 百發百中. <三斤王>薨, 卽位.


李丙燾. 「三國遺事」.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혹은 마모라고도 한다.]이니,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이다. 담력이 대단히 컸으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四年, 春正月, 拜<眞老>爲兵官佐平, 兼知內外兵馬事. 秋九月, <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戶以歸. 冬十月, 大雪丈餘.


4년 봄 정월, 진로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겨울 10월, 큰 눈이 한 길 넘게 내렸다.


○五年, 春, 王以獵出至<漢山城>, 撫問軍民, 浹旬乃還. 夏四月, 獵於<熊津>北, 獲神鹿.


5년 봄,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六年, 春二月, 王聞<南齊><蕭道成>, 冊<高句麗><巨璉>, 爲驃騎大將軍, 遣使上表, 請內屬, 許之.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6년 봄 2월, 남제 태조 소도성이 고구려왕 거련을 표기 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는 말을 왕이 듣고, 남제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속국이 되기를 요청하니 태조가 승락하였다.

가을 7월, 내법 좌평 사 약사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했으나, 약사가 서해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하여 가지 못하였다.


○七年, 夏五月, 遣使聘<新羅>.


7년 여름 5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八年, 春二月, 拜<백加{芍加}>??爲衛士佐平. 三月, 遣使<南齊>朝貢. 秋七月, 重修宮室, 築<牛頭城>. 冬十月, 大閱於宮南.


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

8년 봄 2월, 백가를 위사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월,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대궐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0년, 위 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十一年, 秋, 大有年. 國南海村人獻合穎禾. 冬十月, 王設壇祭天地. 十一月, 宴群臣於南堂.


11년 가을, 크게 풍년이 들었다. 남해의 어촌 사람이 두 이삭이 하나로 합쳐진 벼를 바쳤다.

겨울 10월, 왕이 제단을 만들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11월, 왕이 남당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十二年, 秋七月, 徵北部人年十五歲已上, 築<沙峴>·<耳山>二城. 九月, 王田於國西<泗비>原. 拜<燕突>爲達率. 冬十一月, 無氷.


12년 가을 7월, 나이가 15세 이상인 북부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다.

9월, 왕이 나라 서쪽 사비 벌판에서 사냥하였고 연돌을 달솔로 임명하였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十三年, 夏六月, <熊川>水漲, 漂沒王都二百餘家. 秋七月, 民饑, 亡入<新羅>者, 六百餘家.


13년 여름 6월, 웅천물이 불어서 서울에서 2백여 호가 떠내려 가고 물에 잠겼다.

가을 7월,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가 6백여 호나 되었다.


○十四年, 春三月, 雪. 夏四月, 大風拔木. 冬十月, 王獵<牛鳴谷>, 親射鹿.


14년 봄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 왕이 우명곡에서 사냥하면서 직접 사슴을 쏘아 맞혔다.


○十五年, 春三月, 王遣使<新羅>請婚, <羅>王以伊찬<比智>女, 歸之.


15년 봄 3월,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十六年, 秋七月, <高句麗>與<新羅>戰<薩水>之原, <新羅>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圍之, 王遣兵三千救, 解圍.


16년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왕이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자 포위가 풀렸다.


○十七年, 夏五月甲戌朔, 日有食之. 秋八月, <高句麗>來圍<雉壤城>. 王遣使<新羅>, 請救, <羅>王命將軍<德智>, 帥兵救之, <麗>兵退歸.


17년 여름 5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하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갔다.


○十九年, 夏五月, 兵官佐平<眞老>卒, 拜達率<燕突>爲兵官佐平. 夏六月, 大雨, 漂毁民屋.


19년 여름 5월, 병관 좌평 진로가 사망하자 달솔 연돌을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6월,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고 무너졌다.


○二十年, 設<熊津橋>. 秋七月, 築<沙井城>, 以한率<毗타>鎭之.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 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耽羅>, 卽<耽牟羅>.]


20년, 웅진교를 가설하였다.

가을 7월, 사정성을 쌓고 한솔 비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8월, 왕이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탐라는 곧 탐모라이다.]


○二十一年, 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多起. 臣寮請發倉賑救, 王不聽. <漢山>人亡入<高句麗>者二千. 冬十月, 大疫.


2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 먹고,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겨울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 諫臣抗疏不報, 恐有復諫者, 閉宮門.

○論曰: 良藥苦口, 利於病; 忠言逆耳, 利於行. 是以, 古之明君, 虛己問政, 和顔受諫, 猶恐人之不言, 懸敢諫之鼓, 立誹謗之木而不已. 今<牟大王>諫書上而不省, 復閉門以拒之. 『莊子』曰: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한." 其<牟大王>之謂乎.

夏四月, 田於<牛頭城>, 遇雨雹, 乃止. 五月, 旱. 王與左右宴<臨流閣>, 終夜極歡.


22년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저자의 견해 :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바른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유익하다. 그러므로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겸허한 자세로 정사를 남에게 물었으며,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간하는 말을 수용하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이 간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간하고자 할 때 칠 수 있는 북을 달았으며, 비방하는 말을 기록하게 하는 기둥을 세우는 등, 온갖 조치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 모대왕은 간하는 글이 올라 와도 반성하지 않고, 더욱 문을 닫고 거절하였다. 장자는 "잘못을 보고도 고치지 않으며, 간하는 말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사납다고 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모대왕과 같은 사람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여름 4월, 왕이 우두성에서 사냥하다가 비와 우박을 만나서 중지하였다.

5월, 가물었다. 왕이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실컷 즐겼다.


○二十三年, 春正月, 王都老구, 化狐而去. 二虎鬪於南山, 捕之不得. 三月, 降霜害麥. 夏五月, 不雨至秋. 七月, 設柵於<炭峴>, 以備<新羅>.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백加{芍加}>??鎭之. 冬十月, 王獵於<泗비>東原.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비>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 王以<백加{芍加}>??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 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冊府元龜』云: <南濟><建元>二年, <百濟>王<牟都>, 遣使貢獻. 詔曰: "寶命惟新, 澤被絶域, <牟都>世蕃東表, 守職遐外, 可卽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又<永明>八年, <百濟>王<牟大>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 爲<百濟>王,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而『三韓古記』無<牟都>爲王之事. 又按<牟大>, <盖鹵王>之孫, <盖鹵>第二子<昆支>之子, 不言其祖<牟都>, 則『齊書』所載, 不可不疑.]


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

23년 봄 정월,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졌다. 남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웠는데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7월,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 좌평 백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으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책부 원구」에는 "남제 건원 2년, 백제왕 모도가 사신을 보내 공납을 바쳤다. 이 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하늘의 명령을 새로 받드니 은택이 먼 곳까지 미치고 있다. 모도는 대대로 동방의 번신으로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의 직무를 다하고 있으므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을 제수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영명 8년,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자 알자 복야 손부를 보내 모대에게 그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관작을 계승케 하고 백제왕으로 삼는 책명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계승하였으니 그 정성이 멀리까지 드러나 보였다. 해로가 고요하고 조공이 변함 없기를 바라며, 법식과 법전을 따를 것이며, 천명을 돌아보며 행동을 삼가하라. 국가의 위업을 잇는 것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에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으로 임명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한 고기」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또한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의 아들로서, 그의 할아버지가 모도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武寧王>, 諱<斯摩{斯麻}>??[或云<(+餘)??隆>.], <牟大王>之第二子也. 身長八尺, 眉目如畵, 仁慈寬厚, 民心歸附, <牟大>在位二十三年薨, 卽位. 春正月, 佐平<백加{芍加}??>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한率<解明>討之. <백加{芍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論日{曰}??: 『春秋』曰: "人臣無將, 將而必誅." 若<백加>之元惡大대, 則天地所不容, 不卽罪之, 至是自知難免, 謀叛而後誅之, 晩也. 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趙炳舜. 『百濟武寧王墓誌石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저자의 견해 : 「춘추」에는 "신하된 자는 장래를 도모해서는 안되나니,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가와 같은 극악한 역적은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데 즉시 처단하지 않고, 이 때에 와서 그가 스스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반역을 일으킨 후에야 처단하였으니 늦은 것이다.

겨울 11월,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게 하였다.


○二年, 春, 民饑且疫. 冬十一月, 遣兵侵<高句麗>邊境.


2년 봄, 백성들이 굶주렸고 또 전염병이 돌았다.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소각하고 고목성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겨울, 물이 얼지 않았다.


○六年, 春大疫. 三月至五月, 不雨, 川澤竭. 民饑, 發倉賑救. 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6년, 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냇물과 연못물이 말랐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가을 7월,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7년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짜고 한성을 치기 위하여 횡악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十年, 春正月, 下令: 完固제防, 驅內外游食者, 歸農.


10년 봄 정월,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히 하고 서울과 지방의 무직자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十二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秋九月, <高句麗>襲取<加弗城>, 移兵破<圓山城>, 殺掠甚衆. 王帥勇騎三千, 戰於<葦川>之北. <麗>人見王軍小{少}??, 易之, 不設陣. 王出奇急擊, 大破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여름 4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다시 군사를 옮겨 원산성을 격파하니 죽이거나 약탈하여 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감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 북쪽에 나가 싸우니 고구려 병사들이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업수이 여겨 진을 치지 않았으므로 왕이 기발한 작전을 써서 기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十六年, 春三月戊辰朔, 日有食之.


16년 봄 3월 초하루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一年, 夏五月, 大水. 秋八月, 蝗害곡. 民饑, 亡入<新羅>者, 九百戶.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 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 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내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21년 여름 5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 간 자가 9백 호였다.

겨울 11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나라가 쇠약하여진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이 때 표문을 올려서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그들과 처음으로 우호 관계를 맺었고, 이제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12월, 양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명하여 말하기를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 여륭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 나는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광스러운 책명을 보내는 바,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으로 봉함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二十二年, 秋九月, 王獵于<狐山>之原. 冬十月, 地震.


22년 가을 9월, 왕이 호산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二十三年, 春二月, 王幸<漢城>, 命佐平<因友{因支}>??·達率<沙烏>等, 徵<漢>北州郡民年十五歲已上, 築<雙峴城>. 三月, 至自<漢城>. 夏五月, 王薨. 諡曰<武寧>.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2월, 왕이 한성으로 가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 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3월, 왕이 한성에서 돌아왔다.

여름 5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무녕이라 하였다.


○<聖王>, 諱<明농>,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성왕의 이름은 명농이니 무녕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녕왕이 죽고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가을 8월,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주어 출전케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二年, <梁><高祖>詔冊王爲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2년, 양 고조가 조서를 내려 왕을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三年, 春二月, 與<新羅>交聘.


3년 봄 2월, 신라와 서로 예방하였다.


○四年, 冬十月, 修葺<熊津城>, 立<沙井>柵.


4년 겨울 10월,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웠다.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7년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十年, 秋七月甲辰, 星隕如雨.


10년 가을 7월 갑진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十二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四月丁卯, 熒惑犯南斗.


12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정묘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十六年, 春, 移都於<泗비>[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


16년 봄,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十八年, 秋九月, 王命將軍<燕會>, 攻<高句麗><牛山城>, 不克.


18년 가을 9월,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十九年, 王遣使入<梁>朝貢, 兼表請『毛詩』博士·涅槃等經義, 幷工匠·畵師等, 從之.


19년, 왕이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문을 올려 「모시(毛詩)」 박사와 열반(涅槃) 등의 의미를 풀이한 책과 기술자, 화가 등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양 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己亥朔, 日有食之.


25년 봄 정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 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이 예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크게 이겼다.


○二十七年, 春正月庚申, 白虹貫日. 冬十月, 王不知<梁>京師有寇賊, 遣使朝貢. 使人旣至, 見城闕荒毁, 병號泣於端門外, 行路見者, 莫不灑淚. <侯景>聞之, 大怒, 執囚之. 及<景>平, 方得還國.


27년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질렀다.

겨울 10월, 왕이 양 나라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 그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己>,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28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31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三國史記卷第二十六.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6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七.



삼국사기 권 제 27


百濟本紀第五.

<威德王>·<惠王>·<法王>·<武王>.


백제본기 제 5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위덕왕은 이름이 창이니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元年, 冬十月, <高句麗>大擧兵來攻<熊川城>, 敗뉵而歸.


원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六年, 夏五月丙辰朔, 日有食之.


6년, 여름 5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秋七月, 遣兵侵掠<新羅>邊境, <羅>兵出擊敗之, 死者一千餘人.


8년, 가을 7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十四年, 秋九月, 遣使入<陳>朝貢.


14년, 가을 9월에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七年, <高齊>後主拜王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17년, 고제의 후주가 왕을 사지절시중거기대장군대방군공백제왕을 배수하였다.


○十八年, <高齊>後主, 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18년, 고제의 후주가 또 왕을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로 삼았다.


○十九年, 遣使入<齊>朝貢. 秋九月庚子朔, 日有食之.


19년, 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초하루 경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遣使入<陳>朝貢. 冬十月, 侵<新羅>西邊州郡, <新羅>伊찬<世宗>帥兵, 擊破之. 十一月, 遣使入<宇文周>朝貢.


24년, 가을 7월에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신라 서부 변경의 주, 군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이찬 세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격파시켰다.

11월, 우문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五年, 遣使入<宇文周>朝貢.


25년, 우문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冬十月, 長星竟天, 二十日而滅. 地震.


26년, 겨울 10월, 혜성이 하늘에 뻗었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지진이 발생하였다.


○二十八年, 王遣使入<隋>朝貢, <隋><高祖>詔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28년, 왕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더니 수 나라 고조가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대방군공으로 삼았다.


○二十九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29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一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31년, 겨울 11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三年, 遣使入<陳>朝貢.


33년,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六年, <隋>平<陳>. 有一戰船, 漂至<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國界, 王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 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 來相體悉. 自今已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36년, 수 나라가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 전함 한 척이 탐모라국으로 표류하여 왔다. 그 배가 돌아가게 되어 국경을 통과할 때, 왕이 물자를 풍성하게 주어 귀국케 하고, 사신을 보내 진 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렸다. 수 나라 고조가 이를 훌륭히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백제왕이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는 말을 듣자 멀리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쳤다. 왕래가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니, 만약 풍랑이라도 만나면 사람이 상하고 재물을 잃게 될 것이다. 백제왕의 마음이 순박하고 지극한 것은 내가 이미 깊이 알고 있다. 거리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얼굴을 대하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하필 자주 사신을 보내어 서로 대면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하지 말 것이며 나도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그리 알 것이다."


○三十九年, 秋七月壬申晦, 日有食之.


39년, 가을 7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一年, 冬十一月癸未, 星패于角·亢.


41년, 겨울 11월 계미에 혜성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四十五年, 秋九月, 王使長史<王辯那>, 入<隋>朝獻. 王聞<隋>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爲軍{鄕}??道. 帝下詔曰: "往歲, <高句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將討之. <高元>??君臣, 恐懼畏服, 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我使者而還之. <高句麗>頗知其事, 以兵侵掠國境. 冬十二月, 王薨. 群臣議諡曰<威德>.


趙炳舜. 『三國史節要』.고구려 영양왕을 말함.

45년, 가을 9월, 왕이 장사 왕변나를 시켜 수 나라에 가서 조공하게 하였다. 왕은 수 나라가 요동 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군사의 향도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우리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일을 모두 알고 군사를 보내 우리 국경을 침략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사망하였다. 군신들이 의논하여 시호를 위덕이라 하였다.


○<惠王>, 諱<季>, <明王>第二子. <昌王>薨, 卽位.


혜왕의 이름은 계이니 명왕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王薨. 諡曰<惠>.


2년,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혜라고 하였다.


○<法王>, 諱<宣>[或云<孝順>.], <惠王>之長子. <惠王>薨, 子<宣>, 繼位.[『隋書』以<宣>爲<昌王>之子.]

冬十二月, 下令: 禁殺生, 收民家所養鷹요, 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의 이름은 선[혹은 효순이라고도 한다.]이니 혜왕의 맏아들이다. 혜왕이 사망하자 아들 선이 왕위를 이었다.[「수서」에는 선을 창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겨울 12월,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놓아 주고,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大旱, 王幸<漆岳寺>, 析雨{祈雨}??. 夏五月, 薨. 上諡曰<法>.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립하고 중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큰 가뭄이 들어 왕이 칠악사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다.

여름 5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법이라 하였다.


○<武王>, 諱<璋>, <法王>之子. 風儀英偉, 志氣豪傑. <法王>卽位, 翌年薨, 子嗣位.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하였다. 법왕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三年, 秋八月, 王出兵, 圍<新羅><阿莫山城>[一名<母山城>]. <羅>王<眞平>遣精騎數千, 拒戰之, 我兵失利而還. <新羅>築<小타>·<畏石>·<泉山>·<甕岑>四城, 侵逼我疆境. 王怒, 令佐平<解수>, 帥步騎四萬, 進攻其四城. <新羅>將軍<乾品>·<武殷>, 帥衆拒戰. <解수>不利, 引軍退於<泉山>西大澤中, 伏兵以待之. <武殷>乘勝, 領甲卒一千, 追至大澤, 伏兵發急擊之. <武殷>墜馬, 士卒驚駭, 不知所爲. <武殷>子<貴山>大言曰: "吾嘗受敎於師, 曰: '士當軍, 無退.' 豈敢奔退, 以墜師敎乎?" 以馬授父, 卽與小將<추項>, 揮戈力鬪以死. 餘兵見此益奮, 我軍敗績, <解수>僅免, 單馬以歸.


3년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아모산성[모산성이라고도 한다.]을 포위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항전하자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 네 성을 쌓고, 우리 변경에 침범하였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그 네 성을 공격케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 무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싸웠다. 해수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 서쪽의 소택지로 퇴각하여 복병을 숨겨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고 갑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소택지까지 추격하여 왔을 때, 복병이 달려들어 갑자기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군사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일찌기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도망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느냐!"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해수는 겨우 위기를 모면하여 단신으로 돌아왔다.


○六年, 春二月, 築<角山城>. 秋八月, <新羅>侵東鄙.


6년 봄 2월, 각산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신라가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七年, 春三月, 王都雨土, 晝暗. 夏四月, 大旱, 年饑.


7년 봄 3월, 서울에 흙비가 내리고 낮에 어두웠다.

여름 4월, 크게 가물어 기근이 들었다.


○八年, 春三月, 遣杵率{한率}??<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入貢, 兼請討<高句麗>. <煬帝>許之, 令첨<高句麗>動靜. 夏五月, <高句麗>來攻<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歸.


趙炳舜. 『三國史記』 職官.

8년 봄 3월, 한솔 연문진을 수 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또한 좌평 왕 효린을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살피라고 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가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다시 석두성을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奉使<倭>國, 經我國南路.


9년 봄 3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수 나라 문림랑 배 청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우리 나라 남쪽 길을 통과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遣使入<隋>朝貢. <隋><煬帝>將征<高句麗>, 王使<國智牟>入請軍期. 帝悅, 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來, 與王相謀. 秋八月, 築<赤암城>. 冬十月, 圍<新羅><가岑城>, 殺城主<讚德>, 滅其城.


12년 봄 2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수 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치려 하므로 왕이 국지모를 수 나라에 보내 행군 일정을 물으니 양제가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상서 기부랑 석률을 보내 왕과 상의하게 하였다.

가을 8월, 적암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신라의 가잠성을 포위하여 성주 찬덕을 죽이고 그 성을 함락시켰다.


○十三年, <隋>六軍度<遼>, 王嚴兵於境, 聲言助<隋>, 實持兩端. 夏四月, 震宮南門. 五月, 大水, 漂沒人家.


13년, 수 나라 6군이 요수를 건너자, 왕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하게 하여 수 나라에 협조한다고 성명하였으나 실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여름 4월, 대궐 남문에 벼락이 쳤다.

5월, 홍수가 나서 인가가 유실되었다.


○十七年, 冬十月, 命達率<백奇{芍奇}>??領兵八千, 攻<新羅><母山城>. 十一月, 王都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겨울 10월, 달솔 백기에게 명령하여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가岑城>, 復之, <奚論>戰死.


19년, 신라의 장군 변품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을 회복하였는데, 해론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二十二年, 冬十月, 遣使入<唐>, 獻果下馬.


22년 겨울 10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과하마를 바쳤다.


○二十四年, 秋, 遣兵侵<新羅><勒弩縣>.


24년 가을, 군사를 보내 신라의 늑노현을 침공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大臣入<唐>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公}??<百濟>王. 秋七月, 遣使入<唐>朝貢. 冬十月, 攻<新羅><速含>·<櫻岑>·<기岑>·<烽岑>·<旗懸>·<冗柵>等六城, 取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5년 봄 정월, 당 나라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가 그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 왕을 대방군공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6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二十六年,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26년 겨울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來, 詔諭我及<高句麗>, 平其怨. 秋八月, 遣兵, 攻<新羅><王在城{主在城}>??, 執城主<東所>, 殺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李丙燾. 「羅紀」.

27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라는 갑옷을 바치면서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상국을 입조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호소하였다. 고조는 산기상시주자사에게 조서를 우리와 고구려에 보내 서로의 원한을 잊으라고 달랬다.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를 죽였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秋七月, 王命將軍<沙乞>, 拔<新羅>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王欲復<新羅>侵奪地分, 大擧兵, 出屯於<熊津>. <羅>王<眞平>聞之, 遣使告急於<唐>. 王聞之, 乃止. 秋八月, 遣王姪<福信>, 入<唐>朝貢, <太宗>謂與<新羅>世수, 數相侵伐, 賜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朕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正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蕃臣, 王之린國, 每聞遣師, 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福信>及<高句麗><新羅>使人, 具래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린情, 卽停兵革." 王因遣使, 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如故.


28년 가을 7월, 왕이 장군 사걸에게 명하여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웅진에 주둔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이를 듣고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급한 사태를 말하였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중지하였다.

가을 8월, 왕이 조카 복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왕은 대대로 군주가 되어 동쪽 변방을 진무하고 있다. 먼 바다 한 끝에서 바람과 파도가 험한 것을 무릅쓰고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계속되니, 왕의 아름다운 생각을 높이 평가하며 매우 기쁘게 여긴다. 내가 삼가 영광스러운 대명을 이어받아 천하를 통치하게 되었으니, 정도를 넓히고 백성들을 아껴 양육하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모두 천성에 따르며 모두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다. 신라왕 김 진평은 나의 번신이요, 왕의 이웃이지만 매번 군사를 보내 토벌하는 것이 그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군대의 힘을 믿고 잔인한 행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나의 기대에 매우 어긋난다. 내가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 신라 사신들에게 서로 화친하도록 타이르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하였다. 왕은 반드시 전날의 원한을 잊고 나의 본뜻을 헤아려서 모두 이웃의 정을 두터이 하여 즉시 전쟁을 중지하라."

왕이 곧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쳐 사죄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이전처럼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二十九年, 春二月, 遣兵攻<新羅><가峰城{가岑城}>??, 不克而還.


李丙燾. 「羅紀」.

趙炳舜. 「三國史節要」.

29년 봄 2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三十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30년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一年, 春二月, 重修<泗비>之宮. 王幸<熊津城>. 夏旱, 停<泗비>之役. 秋七月, 王至自<熊津>.


31년 봄 2월,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였다. 왕이 웅진성으로 갔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웅진에서 돌아왔다.


○三十二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32년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三年, 春正月, 封元子<義慈>爲太子. 二月, 改築<馬川城>. 秋七月, 發兵伐<新羅>, 不利. 王田于<生草>之原.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33년 봄 정월,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2월, 마천성을 고쳐 쌓았다.

가을 7월,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였다.

왕이 생초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四年, 秋八月, 遣將攻<新羅><西谷城>, 十三日拔之.


34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다.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


35년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은 강가에 있었으며 채색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


○三十七年, 春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王率左右臣寮, 遊燕於<泗비河>北浦. 兩岸奇巖怪石錯立, 間以奇花異草, 如화圖. 王飮酒極歡, 鼓琴自歌, 從者屢舞. 時人謂其地爲<大王浦>. 夏五月, 王命將軍<于召>, 帥甲士五百, 往襲<新羅><獨山城>. <于召>至<玉門谷>, 日暮, 解鞍休士. <新羅>將軍<閼川>將兵, 掩至오擊之. <于召>登大石上, 彎弓拒戰, 矢盡, 爲所擒. 六月, 旱. 秋八月, 燕群臣於<望海樓>.


37년 봄 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왕이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서있고, 그 사이에 진기한 화초가 있어 마치 그림 같았다.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하여,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자들도 여러번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라고 불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우소에게 명령하여 갑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우소가 옥문곡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기 시작하였다. 그는 안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였다. 그 때 신라 장군 알천이 군사를 거느리고 몰래 기습하여 왔다. 우소가 큰 돌 위에 올라서서 활을 쏘면서 대항하여 싸우다가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그들에게 사로잡혔다.

6월,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왕이 망해루에서 군신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都地震. 三月, 又震. 冬十二月, 遣使入<唐>,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錦포{袍}??幷彩帛三千段.


趙炳舜. 『三國史節要』.

38년 봄 2월, 서울에서 지진이 났다.

3월, 다시 지진이 났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치니, 태종이 사신을 우대하여 위로하고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천 단을 보냈다.


○三十九年, 春三月, 王與嬪御泛舟大池.


39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四十年, 冬十月, 又遣使於<唐>, 獻金甲雕斧.


40년 겨울 10월, 다시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四十一年, 春正月, 星패于西北. 二月, 遣子弟於<唐>, 請入<國學>.


41년 봄 정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2월,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四十二年, 春三月, 王薨. 諡曰<武>. 使者入<唐>, 素服奉表曰: "君外臣<扶餘璋>卒." 帝擧哀<玄武門>, 詔曰: "懷遠之道, 莫先於寵命, 飾終之義, 無隔於遐方. 故柱國<帶方郡>王{公}??<百濟>王<扶餘璋>, 棧山??{航}??海, 遠품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민悼. 宜加常數, 式表哀榮, 贈光祿大夫." 賻賜甚厚.

三國史記卷第二十七.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2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무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 나라에 가서 소복을 입고 표문을 바쳐 "임금의 번신 부여 장이 죽었습니다"라고 알렸다. 황제는 현무문에서 추도 의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 이르기를 "먼 나라를 사랑하는 방도는 총명(寵命) 보다 나은 것이 없고, 죽은 자를 표창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하여 막혀 있는 것이 아니다. 고(故) 주국대방군왕백제왕부여장은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멀리까지 와서 정삭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표문을 올리기를 한결같이 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를 깊이 추도한다. 마땅히 상례 이상으로 영전을 표하여 광록대부로 추증하노라"라 하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보냈다.

삼국사기 권 제 27 끝




三國史記卷第二十八.



삼국사기 권 제 28


百濟本紀第六.

<義慈王>.


백제본기 제 6

의자왕


○<義慈王>, <武王>之元子, 雄勇膽決. <武王>在位三十三年, 立爲太子.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武王>薨, 太子嗣位. <太宗>遣祠部郞中<鄭文表>, 冊命爲柱國<帶方郡>王{公}??<百濟>王. 秋八月, 遣使入<唐>, 表謝, 兼獻方物.


趙炳舜. 『三國史節要』.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무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 나라 태종이 사부 랑중 정 문표를 보내 왕을 주국대방국왕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8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의를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二月, 王巡撫州郡. 慮囚, 除死罪皆原之. 秋七月, 王親帥兵, 侵<新羅>, 下<미후>等四十餘城. 八月, 遣將軍<允忠>, 領兵一萬, 攻<新羅><大耶城>. 城主<品釋>與妻子出降. <允忠>盡殺之, 斬其首, 傳之王都, 生獲男女一千餘人, 分居國西州縣, 留兵守其城. 王賞<允忠>功, 馬二十匹·穀一千石.


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왕이 주, 군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8월,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冬十一月, 王與<高句麗>和親, 謀欲取<新羅><당項城>, 以塞入朝之路, 遂發兵攻之. <羅>王<德曼>遣使, 請救於<唐>, 王聞之罷兵.


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목적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그들이 당 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다. 왕은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왕 덕만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四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太宗>遣司農丞<相里玄奬>, 告諭兩國, 王奉表陳謝. 立王子<隆>爲太子. 大赦. 秋九月, <新羅>將軍<庾信>領兵來侵, 取七城.


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두 나라를 타이르자 왕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의 아들 융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五年, 夏五月, 王聞<太宗>親征<高句麗>, 徵兵<新羅>. 乘其間, 襲取<新羅>七城. <新羅>遣將軍<庾信>, 來侵.


5년 여름 5월, 왕은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 장군 유신을 보내 침공하였다.


○七年, 冬十月, 將軍<義直>, 帥步騎三千, 進屯<新羅><茂山城>下, 分兵攻<甘勿>·<桐岑>二城, <新羅>將軍<庾信>, 親勵士卒, 決死而戰, 大破之. <義直>匹馬而還.


7년 겨울 10월, 장군 의직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군사들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군을 크게 격파하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다.


○八年, 春三月, <義直>襲取<新羅>西鄙<腰車>等一十餘城. 夏四月, 進軍於<玉門谷>, <新羅>將軍<庾信>逆之, 再戰大敗之.


8년 봄 3월, 의직이 신라 서부 변경의 요차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 옥문곡으로 진군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이들과 두 번 전투하여 크게 이겼다.


○九年, 秋八月, 王遣左將<殷相>, 帥精兵七千, 攻取<新羅><石吐>等七城, <新羅>將<庾信>·<陳春>·<天存>·<竹旨>等, 逆擊之, 不利, 收散卒, 屯於<道薩城>下, 再戰, 我軍敗北. 冬十一月, 雷. 無氷.


9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신라 장수 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이를 맞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해지자,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재차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11월, 우레가 쳤고 물이 얼지 않았다.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병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조{俎}??,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 <高句麗>·<新羅>等使, 병來入朝, 朕命釋玆수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 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병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병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古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 <齊><桓>列士{土}??諸侯, 尙存亡國, 황朕萬國之主, 豈可不恤危藩! 王所兼<新羅>之城, 병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부虜, 亦遣還王. 然後, 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역, 耕織병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哉? 王若不從進止, 朕已依<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句麗>, 不許遠相救恤. <高句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藩, 度<遼>, 深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

11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이 조서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 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었다. 신라 사신 김 법민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 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간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 환공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경에서 피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모두 폐한 채, 남녀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왕이 만일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十二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春, 大旱. 民饑.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 봄,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8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十五年, 春二月, 修太子宮, 極侈麗. 立<望海亭>於王宮南. 夏五月, 성馬入<北岳><烏含寺>, 鳴잡佛宇數日死. 秋七月, 重修<馬川城>. 八月, 王與<高句麗>·<靺鞨>, 攻破<新羅>三十餘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 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 侵我北界, 沒三十餘城."


15년 봄 2월, 태자의 궁을 수리하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였으며,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건축하였다.

여름 5월, 붉은 말이 북악 오함사에 들어와서 불당을 돌면서 울다가 며칠 후에 죽었다.

가을 7월, 마천성을 중수하였다.

8월, 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우리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 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 王怒, 囚之獄中, 由是, 無敢言者. <成忠>유死{不食}??. 臨終上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一云<炭峴>)??>, 水軍不使入<伎伐浦(+一云<白江>)??>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焉.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혹은 정충이라고도 한다.]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 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十七年, 春正月, 拜王庶子四十一人爲佐平, 各賜食邑. 夏四月, 大早{旱}??, 赤地.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왕의 서자 41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논밭이 붉은 땅이 되었다.


○十九年, 春二月, 衆狐入宮中, 一白狐坐上佐平書案. 夏四月, 太子宮, 雌계與小{黃}??雀交. 遣將侵攻<新羅><獨山>·<桐岑>二城. 五月, 王都西南<泗비河>, 大魚出死, 長三丈. 秋八月, 有女屍浮<生草津>, 長十八尺. 九月, 宮中槐樹鳴, 如人哭聲. 夜, 鬼哭於宮南路.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 동잠 두 성을 침공하였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었다.

가을 8월,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二十年, 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濱, 小{群}??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泗비河>水, 赤如血色. 夏四月, 蝦마數萬, 集於樹上. 王都市人, 無故驚走, 如有捕提{逐}??者, 강부而死百餘人, 立{亡}??失財物, 不可數. 五月, 風雨暴至, 震<天王>·<道讓>二寺塔, 又震<白石寺>講堂. 玄雲如龍, 東西相鬪於空中. 六{五}??月,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楫, 隨大水, 入寺門. 有一犬狀如野鹿, 自西至<泗비河>岸, 向王宮吠之, 俄而不知所去. 王都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卽散. 有一鬼入宮中, 大呼: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曰: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王問之, 巫者曰: "同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月新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同月輪者盛也, 如月新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寢{침}??微者乎." 王喜. <高宗>詔: 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左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 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우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王聞之, 會群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新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 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 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新羅>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 擊<羅>軍, 折其銳氣, 然後, 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 而保國矣." 王猶豫, 不知所從. 時, 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황與<新羅>共謀기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 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 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於時, 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류설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계·離網之魚也." 王然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계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 竟敗, <계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王師乘潮, 축로銜尾進, 鼓而조. <定方>將步·騎, 直추眞都城{其都城}??, 一舍止. 我軍悉衆拒之, 又敗, 死者萬餘人. <唐>兵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孝>, 走北鄙. <定方>圍其城. 王次子<泰>, 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子<文思>, 謂王子<隆>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遂率左右, 추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超堞, 立<唐>旗幟, <泰>窘迫, 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 至是, 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各統州縣. 擢渠長, 爲都督·刺史·縣令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以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부見上, 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孫皓>·<陳叔寶>墓側, 幷爲竪碑. 授<隆>司稼卿. <文度>濟海卒, 以<劉仁軌>代之. <武王>從子<福信>, 嘗將兵, 乃與浮屠<道琛>, 據<周留城>叛, 迎古王子<扶餘풍>,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 西北部皆應, 引兵圍<仁願>於都城. 詔起<劉仁軌>檢校<帶方州>刺史, 將<

王文度>之衆, 便道發<新羅>兵, 以救<仁願>. <仁軌>喜曰: "天將富貴此翁矣." 請<唐>曆及廟諱而行, 曰: "吾欲掃平東夷, 頒大<唐>正朔於海表." <仁軌>御軍嚴整, 轉鬪而前. <福信>等, 立兩柵於<熊津江>口, 以拒之. <仁軌>與<新羅>兵合擊之, 我軍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溺及戰死者萬餘人. <福信>等乃釋都城之圍, 退保<任存城>, <新羅>人以粮盡引還. 時, <龍朔>元年三月也. 於是, <道琛>自稱領車{軍}??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集徒衆, 其勢益張. 使告<仁軌>曰: "聞大<唐>與<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 以國付<新羅>, 與其受死, 豈若戰亡! 所以聚結, 自固守耳." <仁軌>作書, 具陳禍福, 遣使諭之. <道琛>等, 恃衆驕倨, 置<仁軌>之使於外館, 만報曰: "使人官小{卑}??, 我是一國大將, 不合參." 不答書, 徒遣之. <仁軌>以衆小{少}??, 與<仁願>合軍, 休息士卒, 上表, 請合<新羅>圖之. <羅>王<春秋>奉詔, 遣其將<金欽>, 將兵救<仁軌>等, 至<古泗>. <福信>邀擊, 敗之. <欽>自<葛嶺道>遁還, <新羅>不敢復出. 尋而<福信>殺<道琛>, 幷其還{衆}??. <풍>不能制, 但主祭而已. <福信>等, 以<仁願>等孤城無援, 遣使慰之曰: "大使等, 何時西還? 當遣相送." 二年七月, <仁願>·<仁軌>等,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 以<眞峴城>臨江高험, 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夜督<新羅>兵, 薄城板堞, 比明而入城, 斬殺八百人, 遂通<新羅>양道. <仁願>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 統衆浮海, 以益<仁願>之衆. 時, <福信>旣專權, 與<扶餘풍>, 침相猜忌. <福信>稱疾, 臥於窟室, 欲俟<풍>問疾, 執殺之. <풍>知之, 帥親信, 掩殺<福信>. 遣使<高句麗>·<倭>國, 乞師以拒<唐>兵. <孫仁師>中路迎擊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士氣大振. 於是, 諸將議所向,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 '避實擊虛.'<加林>험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 <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 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추<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소,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풍>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獲其寶劒.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 與<倭>人병降. 獨<遲受信>據<任存城>, 未下. 初, <黑齒常之>嘯聚亡散, 旬日間, 歸附者三萬餘人. <定方>遣兵攻之. <常之>拒戰敗之, 復取二百餘城, <定方>不能克. <常之>與別部將<沙타相如>據험, 以應<福信>, 至是皆降. <仁軌>以赤心示之, 비取<任存>自效, 卽給鎧·仗·粮비. <仁師>曰: "野心難信. 若受甲濟粟, 資寇便也." <仁軌>曰: "吾觀<相如>·<常之>, 忠而謀, 因機立功, 尙何疑?" 二人訖取其城, <遲受信>委妻子, 奔<高句麗>, 餘黨悉平, <仁師>等振旅還. 詔留<仁軌>, 統兵鎭守. 兵火之餘, 比屋凋殘, 강屍如莽. <仁軌>始命, 예骸骨, 籍戶口, 理村聚, 署官長, 通道塗, 立橋梁, 補堤堰, 復坡塘, 課農桑, 賑貧乏, 養孤老, 立<唐>社稷, 頒正朔及廟諱. 民皆悅, 各安其所. 帝以<扶餘隆>爲<熊津>都督, 비歸國, 平<新羅>古憾, 招還遺人. <麟德>二年, 與<新羅>王會<熊津城>, 刑白馬以盟. <仁軌>爲盟辭, 乃作金書鐵契, 藏<新羅>廟中, 盟辭見『新羅紀』中. <仁願>等還, <隆>畏衆携散, 亦歸京師. <儀鳳>中, 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 遣歸國, 安輯餘衆,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時, <新羅>强, <隆>不敢入舊國, 寄理{治}??<高句麗>死. <武后>又以其孫<敬>襲王, 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 國系遂絶.

○論曰: <新羅>古事云: "天降金궤, 故姓<金>氏."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 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 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 <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 姓<高>氏."[見『晋書』載記.] 古史曰: "<百濟>與<高句麗>, 同出<扶餘>." 又云: "<秦>·<漢>亂離之時, <中國>人多竄海東." 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何其享國之長也? 至於<百濟>之季, 所行多非道, 又世仇<新羅>, 與<高句麗>連和, 以侵질之, 因利乘便, 割取<新羅>重城·巨鎭, 不已, 非所謂親仁善린, 國之寶也. 於是, <唐>天子再下詔, 平其怨, 陽從而陰違之, 以獲罪於大國, 其亡也亦宜矣.

三國史記卷第二十八.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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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 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에 들어 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 대장군 소 정방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좌위장군 유 백영과 우무위 장군 풍 사귀와 좌효위 장군 방 효공 등과 함께 군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공격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 춘추를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 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 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번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 나라 군사들이 들어 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할지를 몰랐다. 이 때 좌평 흥수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 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도 한다.]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왕은 또한 당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 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 때 당 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 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 오고, 소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 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 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 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 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좌위 낭장 왕 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삼아 유민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포로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고 용서하여 주었다. 왕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 호, 진 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융을 사가경으로 임명하였다. 왕 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 인궤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무왕의 조카 복신은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 때 중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가있던 부여 풍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서북부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유 인원을 포위했다.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 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여, 왕 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보내 유 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 인궤가 기뻐하며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 나라 책력과 묘휘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의 정삭을 해외에 반포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당 나라 용삭 원년 3월이었다. 이 때 도침은 영군 장군으로 자칭하고 복신은 상잠 장군으로 자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당 나라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후에는 우리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인궤는 편지로 화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

그는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다. 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 신라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당 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 흠에게 군사를 주어 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 흠이 고사에 이르자 복신이 그와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김 흠이 갈령도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 풍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하였다.

복신 등은, 인원 등이 성이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했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 때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당 용삭) 2년 7월에 인원, 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그곳에 계속하여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가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증파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여 새벽에 입성하여 8백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소통되었다. 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 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주, 청주, 내주, 해주의 군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 장군 손 인사에게 이 군사를 주어 바다를 건너 인원의 군사를 보충하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 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속에 누어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 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손 인사가 중도에서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자가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왕 김 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 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 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 때 왕 부여 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거처를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당 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 충승과 충지 등이 부여 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고, 지 수신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 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 정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이 이길 수 없었다. 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를 데리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은 야심이 있어 믿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얻는다면 이는 그들에게 도적질을 할 방책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심과 지모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인사 등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니,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인궤로 하여금 그곳에 주둔하며 수비하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영락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인궤가 이 때 처음으로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며,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가설하고, 제방을 수축하고, 저수지를 복구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게 하였으며, 당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과 묘휘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각각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 나라 임금이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인덕 2년, 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었으며, 이것을 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책을 만들어 신라 종묘 안에 두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기」에 보인다.

인원 등이 귀국하니, 융은 군사가 흩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또한 당 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당 의봉 년간에 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곧이어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 때 신라가 강성하여지니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 무후가 또한 그의 손자 경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 발해, 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

저자의 견해 : 신라 고사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 인선이 지은 김 유신의 비문과 박 거물이 지었고 요 극일이 쓴 삼랑사 비문에 보인다.] 고구려는 또한 고신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진서」의 기록에 보인다.] 옛 사기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며, 또한 "진, 한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해동으로 많이 도망왔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삼국의 조상들은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는가? 백제 말기에 와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를 맺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계속하면서 신라를 침공하여, 유리한 조건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을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이웃과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에 당 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 28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九.



正德本에는 BC와 AD의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삽입하기로 한다. 또한 正德本에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원년란에만 연호와 원년 표시가 동시에 있을 뿐, 해당 연호 사용의 다음 해부터는 연도만 기록되어 있고, 연호는 생략되어 있다. 왕의 즉위연도에는 왕명과 원년이 동시에 나와 있다. 그러나 왕의 즉위 다음 해부터는 왕명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연표에서는 매 해마다 연호와 왕명을 삽입하였다. 이것 또한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x?삼국사기 권 제 29??

正德本에는 BC와 AD의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삽입하기로 한다. 또한 正德本에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원년란에만 연호와 원년 표시가 동시에 있을 뿐, 해당 연호 사용의 다음 해부터는 연도만 기록되어 있고, 연호는 생략되어 있다. 왕의 즉위연도에는 왕명과 원년이 동시에 나와 있다. 그러나 왕의 즉위 다음 해부터는 왕명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연표에서는 매 해마다 연호와 왕명을 삽입하였다. 이것 또한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年表上.

○海東有國家久矣. 自<箕子>受封於<周>室, <衛滿>僭號於<漢>初, 年代綿邈, 文字소略, 固莫得而詳馬{焉}??. 至於三國鼎峙, 則傳世尤多. <新羅>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 <高句麗>二十八王, 七百五年; <百濟>三十一王, 六百七十八年. 其始終可得而考焉, 作三國年表.[<唐><買言忠{賈言忠}>??云: "<高且{高麗??

/高句麗??}>自<漢>有國, 今九百年." 誤也.]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唐書」.趙炳舜. 「新唐書」.李丙燾.

연표 상

해동에 국가가 형성된 것은 오래 전 이었다. 그러나 기자가 주 왕실에서 봉작을 받고, 위만이 한 나라 초기에 제호를 참칭한 이후로 시대가 멀고 기록이 소략하여, 실로 그 사적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삼국이 정립하여 대치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대대로 전해진 기록이 아주 많았다. 신라는 56대 왕 992년 동안 이어졌으며, 고구려는 28대 왕 705년 동안 이어졌고, 백제는 31대 왕 678년 동안 이어졌다. 이제 그 시말을 살필 수 있으므로 삼국의 연표를 작성하기로 한다.[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는 한대부터 국가를 형성하여 지금까지 900년이 되었다"라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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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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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7 | 甲子 | 前漢孝宣帝詢十    | 始祖朴赫居世居    |                   |                |

|      |      | 七年  五鳳元年    | 西干卽位元年      |                   |                |

|      |      |                   | 從此至眞德爲聖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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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6 | 乙丑 | 五鳳 二年         | 朴赫居世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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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5 | 丙寅 | 五鳳 三年         | 朴赫居世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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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4 | 丁卯 | 五鳳 四年         | 朴赫居世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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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3 | 戊辰 | 甘露 元年         | 朴赫居世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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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2 | 己巳 | 甘露 二年         | 朴赫居世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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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1 | 庚午 | 甘露 三年         | 朴赫居世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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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0 | 辛未 | 甘露 四年         | 朴赫居世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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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9 | 壬申 | 黃龍 元年         | 朴赫居世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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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8 | 癸酉 | 孝元帝奭初元元年  | 朴赫居世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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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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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7 | 갑자 | 전한 효선제 순   | 시조 박 혁거세   |                  |                     |

|      |      | 17년             | 거서간 즉위      |                  |                     |

|      |      | 오봉 원년        | 원년             |                  |                     |

|      |      |                  | 이로부터 진덕까  |                  |                     |

|      |      |                  | 지가 성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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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6 | 을축 | 오봉 2년         | 박혁거세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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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5 | 병인 | 오봉 3년         | 박혁거세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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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4 | 정묘 | 오봉 4년         | 박혁거세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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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3 | 무진 | 감로 원년        | 박혁거세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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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2 | 기사 | 감로 2년         | 박혁거세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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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1 | 경오 | 감로 3년         | 박혁거세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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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50 | 신미 | 감로 4년         | 박혁거세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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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9 | 임신 | 황룡 원년        | 박혁거세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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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8 | 계유 | 효원제 석        | 박혁거세 10년    |                  |                     |

|      |      | 초원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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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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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7 | 甲戌 | 初元 二年         | 朴赫居世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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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6 | 乙亥 | 初元 三年         | 朴赫居世          |                   |                |

|      |      |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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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5 | 丙子 | 初元 四年         | 朴赫居世          |                   |                |

|      |      |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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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4 | 丁丑 | 初元 五年         | 朴赫居世          |                   |                |

|      |      |                   | 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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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3 | 戊寅 | 永光 元年         | 朴赫居世          |                   |                |

|      |      |                   | 十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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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2 | 己卯 | 永光 二年         | 朴赫居世          |                   |                |

|      |      |                   | 十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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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1 | 庚辰 | 永光 三年         | 朴赫居世          |                   |                |

|      |      |                   | 十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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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0 | 辛巳 | 永光 四年         | 朴赫居世          |                   |                |

|      |      |                   | 十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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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9 | 壬午 | 永光 五年         | 朴赫居世          |                   |                |

|      |      |                   | 十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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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8 | 癸未 | 建昭 元年         | 朴赫居世          |                   |                |

|      |      |                   | 二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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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7 | 甲申 | 建昭 二年         | 朴赫居世          | 始祖東明聖王姓    |                |

|      |      |                   | 二十一年          | 高氏諱朱蒙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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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6 | 乙酉 | 建昭 三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二十二年          | 二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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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5 | 丙戌 | 建昭 四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二十三年          | 三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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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4 | 丁亥 | 建昭 五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二十四年          | 四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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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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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7 | 갑술 | 초원 2년         | 박혁거세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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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6 | 을해 | 초원 3년         | 박혁거세 1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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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5 | 병자 | 초원 4년         | 박혁거세 1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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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4 | 정축 | 초원 5년         | 박혁거세 1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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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3 | 무인 | 영광 원년        | 박혁거세 1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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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2 | 기묘 | 영광 2년         | 박혁거세 1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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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1 | 경진 | 영광 3년         | 박혁거세 1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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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0 | 신사 | 영광 4년         | 박혁거세 1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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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9 | 임오 | 영광 5년         | 박혁거세 1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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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8 | 계미 | 건소 원년        | 박혁거세 2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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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7 | 갑신 | 건소 2년         | 박혁거세 21년    | 시조 동명성왕    |                     |

|      |      |                  |                  | 고씨 주몽 즉위   |                     |

|      |      |                  |                  |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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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6 | 을유 | 건소 3년         | 박혁거세 22년    | 동명성왕 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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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5 | 병술 | 건소 4년         | 박혁거세 23년    | 동명성왕 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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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4 | 정해 | 건소 5년         | 박혁거세 24년    | 동명성왕 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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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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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3 | 戊子 | 竟寧{章寧}??元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成帝오            | 二十五年          | 五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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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2 | 己丑 | 律始{建始}??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元年              | 二十六年          | 六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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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1 | 庚寅 | 建始 二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二十七年          | 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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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0 | 辛卯 | 建始 三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二十八年          | 八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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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9 | 壬辰 | 建始 四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二十九年          | 九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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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8 | 癸巳 | 河平 元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年            | 十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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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7 | 甲午 | 河平 二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一年          | 十一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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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6 | 乙未 | 河平 三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二年          | 十二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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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5 | 丙申 | 河平 四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三年          | 十三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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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4 | 丁酉 | 陽朔 元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四年          | 十四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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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3 | 戊戌 | 陽朔 二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五年          | 十五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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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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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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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3 | 무자 | 장녕 원년        | 박혁거세 25년    | 동명성왕 5년     |                     |

|      |      | 성제 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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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2 | 기축 | 건시 원년        | 박혁거세 26년    | 동명성왕 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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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1 | 경인 | 건시 2년         | 박혁거세 27년    | 동명성왕 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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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0 | 신묘 | 건시 3년         | 박혁거세 28년    | 동명성왕 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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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9 | 임진 | 건시 4년         | 박혁거세 29년    | 동명성왕 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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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8 | 계사 | 하평 원년        | 박혁거세 30년    | 동명성왕 1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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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7 | 갑오 | 하평 2년         | 박혁거세 31년    | 동명성왕 1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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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6 | 을미 | 하평 3년         | 박혁거세 32년    | 동명성왕 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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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5 | 병신 | 하평 4년         | 박혁거세 33년    | 동명성왕 1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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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4 | 정유 | 양삭 원년        | 박혁거세 34년    | 동명성왕 1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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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3 | 무술 | 양삭 2년         | 박혁거세 35년    | 동명성왕 1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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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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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2 | 己亥 | 陽朔 三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六年          | 十六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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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1 | 庚子 | 陽朔 四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七年          | 十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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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0 | 辛丑 | 鴻嘉 元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八年          | 十八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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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9 | 壬寅 | 鴻嘉 二年         | 朴赫居世          | 東明聖王          |                |

|      |      |                   | 三十九年          | 十九年            |                |

|      |      |                   |                   | 東明王升遐        |                |

|      |      |                   |                   | 瑠璃明王類利      |                |

|      |      |                   |                   | 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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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8 | 癸卯 | 鴻嘉 三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始祖溫祚王     |

|      |      |                   | 四十年            | 二年              | 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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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7 | 甲辰 | 鴻嘉 四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二年    |

|      |      |                   | 四十一年          | 三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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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6 | 乙巳 | 永始 元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三年    |

|      |      |                   | 四十二年          | 四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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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5 | 丙午 | 永始 二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四年    |

|      |      |                   | 四十三年          | 五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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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4 | 丁未 | 永始 三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五年    |

|      |      |                   | 四十四年          | 六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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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3 | 戊申 | 永始 四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六年    |

|      |      |                   | 四十五年          | 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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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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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2 | 기해 | 양삭 3년         | 박혁거세 36년    | 동명성왕 1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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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1 | 경자 | 양삭 4년         | 박혁거세 37년    | 동명성왕 1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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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0 | 신축 | 홍가 원년        | 박혁거세 38년    | 동명성왕 1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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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9 | 임인 | 홍가 2년         | 박혁거세 39년    | 동명성왕 19년    |                     |

|      |      |                  |                  | 동명왕 사망.     |                     |

|      |      |                  |                  | 유리명왕 유리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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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8 | 계묘 | 홍가 3년         | 박혁거세 40년    | 유리명왕 2년     | 시조 온조왕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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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7 | 갑진 | 홍가 4년         | 박혁거세 41년    | 유리명왕 3년     | 온조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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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6 | 을사 | 영시 원년        | 박혁거세 42년    | 유리명왕 4년     | 온조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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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5 | 병오 | 영시 2년         | 박혁거세 43년    | 유리명왕 5년     | 온조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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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4 | 정미 | 영시 3년         | 박혁거세 44년    | 유리명왕 6년     | 온조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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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3 | 무신 | 영시 4년         | 박혁거세 45년    | 유리명왕 7년     | 온조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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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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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2 | 己酉 | 元延 元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七年    |

|      |      |                   | 四十六年          | 八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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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1 | 庚戌 | 元延 二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八年    |

|      |      |                   | 四十七年          | 九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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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0 | 辛亥 | 元延 三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九年    |

|      |      |                   | 四十八年          | 十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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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9 | 壬子 | 元延 四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十年    |

|      |      |                   | 四十九年          | 十一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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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8 | 癸丑 | 綏和 元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五十年            | 十二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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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7 | 甲寅 | 綏和 二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孝哀帝欣          | 五十一年          | 十三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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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6 | 乙卯 | 建平 元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五十二年          | 十四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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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5 | 丙辰 | 建平 二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五十三年          | 十五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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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4 | 丁巳 | 建平 三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五十四年          | 十六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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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3 | 戊午 | 建平 四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五十五年          | 十七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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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 | 己未 | 元壽 元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五十六年          | 十八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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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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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2 | 기유 | 원연 원년        | 박혁거세 46년    | 유리명왕 8년     | 온조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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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1 | 경술 | 원연 2년         | 박혁거세 47년    | 유리명왕 9년     | 온조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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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0 | 신해 | 원연 3년         | 박혁거세 48년    | 유리명왕 10년    | 온조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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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9 | 임자 | 원연 4년         | 박혁거세 49년    | 유리명왕 11년    | 온조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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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8 | 계축 | 수화 원년        | 박혁거세 50년    | 유리명왕 12년    | 온조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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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7 | 갑인 | 수화 2년         | 박혁거세 51년    | 유리명왕 13년    | 온조왕 12년         |

|      |      | 효애제 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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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6 | 을묘 | 건평 원년        | 박혁거세 52년    | 유리명왕 14년    | 온조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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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5 | 병진 | 건평 2년         | 박혁거세 53년    | 유리명왕 15년    | 온조왕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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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4 | 정사 | 건평 3년         | 박혁거세 54년    | 유리명왕 16년    | 온조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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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3 | 무오 | 건평 4년         | 박혁거세 55년    | 유리명왕 17년    | 온조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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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 | 기미 | 원수 원년        | 박혁거세 56년    | 유리명왕 18년    | 온조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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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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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1 | 庚申 | 元壽 二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孝平帝간          | 五十七年          | 十九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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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1 | 辛酉 | 元始 元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五十八年          | 二十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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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2 | 壬戌 | 元始 二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五十九年          | 二十一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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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3 | 癸亥 | 元始 三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六十年            | 二十二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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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4 | 甲子 | 元始 四年         | 朴赫居世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六十一年          | 二十三年          | 二十二年       |

|      |      |                   | 始祖赫居世薨      |                   |                |

|      |      |                   | 南解次次雄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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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5 | 乙丑 | 元始 五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二年              | 二十四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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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6 | 丙寅 | 孺子영  王莽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居攝 元年         | 三年              | 二十五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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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7 | 丁卯 | 居攝 二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四年              | 二十六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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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8 | 戊辰 | 居攝 三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初始 元年         | 五年              | 二十七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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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9 | 己巳 | 新室, 始建國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元年              | 六年              | 二十八年          | 二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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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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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1 | 경신 | 원수 2년         | 박혁거세 57년    | 유리명왕 19년    | 온조왕 18년         |

|      |      | 효평제 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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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1 | 신유 | 원시 원년        | 박혁거세 58년    | 유리명왕 20년    | 온조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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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2 | 임술 | 원시 2년         | 박혁거세 59년    | 유리명왕 21년    | 온조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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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3 | 계해 | 원시 3년         | 박혁거세 60년    | 유리명왕 22년    | 온조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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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4 | 갑자 | 원시 4년         | 박혁거세 61년    | 유리명왕 23년    | 온조왕 22년         |

|      |      |                  | 시조 박혁거세    |                  |                     |

|      |      |                  | 사망. 남해 차차  |                  |                     |

|      |      |                  | 웅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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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5 | 을축 | 원시 5년         | 남해차차웅 2년   | 유리명왕 24년    | 온조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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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6 | 병인 | 유자 영.왕 망.   | 남해차차웅 3년   | 유리명왕 25년    | 온조왕 24년         |

|      |      | 거섭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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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7 | 정묘 | 거섭 2년         | 남해차차웅 4년   | 유리명왕 26년    | 온조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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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8 | 무진 | 거섭 3년         | 남해차차웅 5년   | 유리명왕 27년    | 온조왕 26년         |

|      |      | 초시 원년  5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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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9 | 기사 | 신실             | 남해차차웅 6년   | 유리명왕 28년    | 온조왕 27년         |

|      |      | 시건국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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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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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0 | 庚午 | 始建國 二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七年              | 二十九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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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1 | 辛未 | 始建國 三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八年              | 三十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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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2 | 壬申 | 始建國 四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九年              | 三十一年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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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3 | 癸酉 | 始建國 五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十年              | 三十二年          | 三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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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4 | 甲戌 | 天鳳 元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十一年            | 三十三年          | 三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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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5 | 乙亥 | 天鳳 二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十二年            | 三十四年          | 三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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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6 | 丙子 | 天鳳 三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十三年            | 三十五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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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7 | 丁丑 | 天鳳 四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十四年            | 三十六年          | 三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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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8 | 戊寅 | 天鳳 五年         | 南解次次雄        | 瑠璃明王          | 溫祚王         |

|      |      |                   | 十五年            | 三十七年          | 三十六年       |

|      |      |                   |                   | 瑠璃明王薨        |                |

|      |      |                   |                   | 大武神王無恤      |                |

|      |      |                   |                   | 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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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9 | 己卯 | 天鳳 六年         | 南解次次雄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 十六年            | 二年              | 三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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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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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0 | 경오 | 시건국 2년       | 남해차차웅 7년   | 유리명왕 29년    | 온조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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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1 | 신미 | 시건국 3년       | 남해차차웅 8년   | 유리명왕 30년    | 온조왕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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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2 | 임신 | 시건국 4년       | 남해차차웅 9년   | 유리명왕 31년    | 온조왕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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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3 | 계유 | 시건국 5년       | 남해차차웅10년   | 유리명왕 32년    | 온조왕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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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4 | 갑술 | 천봉 원년        | 남해차차웅11년   | 유리명왕 33년    | 온조왕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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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5 | 을해 | 천봉 2년         | 남해차차웅12년   | 유리명왕 34년    | 온조왕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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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6 | 병자 | 천봉 3년         | 남해차차웅13년   | 유리명왕 35년    | 온조왕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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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7 | 정축 | 천봉 4년         | 남해차차웅14년   | 유리명왕 36년    | 온조왕 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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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8 | 무인 | 천봉 5년         | 남해차차웅15년   | 유리명왕 37년    | 온조왕 36년         |

|      |      |                  |                  | 유리명왕 사망.   |                     |

|      |      |                  |                  | 대무신왕 무휼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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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19 | 기묘 | 천봉 6년         | 남해차차웅16년   | 대무신왕 2년     | 온조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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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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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0 | 庚辰 | 地皇 元年         | 南解次次雄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 十七年            | 三年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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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1 | 辛巳 | 地皇 二年         | 南解次次雄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 十八年            | 四年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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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2 | 壬午 | 地皇 三年         | 南解次次雄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 十九年            | 五年              | 四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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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3 | 癸未 | 地皇 四年         | 南解次次雄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劉聖公            | 二十年            | 六年              | 四十一年       |

|      |      | 更始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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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4 | 甲申 | 更始 二年         | 南解次次雄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 二十一年          | 七年              | 四十二年       |

|      |      |                   | 南海次次雄薨      |                   |                |

|      |      |                   | 儒理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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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5 | 乙酉 | 後漢光武帝秀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八年     | 溫祚王         |

|      |      | 建武 元年         | 二年              |                   | 四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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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6 | 丙戌 | 建武 二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 三年              | 九年              | 四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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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7 | 丁亥 | 建武 三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 四年              | 十年              | 四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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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8 | 戊子 | 建武 四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溫祚王         |

|      |      |                   | 五年              | 十一年            | 四十六年       |

|      |      |                   |                   |                   | 溫祚王薨       |

|      |      |                   |                   |                   | 多婁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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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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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0 | 경진 | 지황 원년        | 남해차차웅17년   | 대무신왕 3년     | 온조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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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1 | 신사 | 지황 2년         | 남해차차웅18년   | 대무신왕 4년     | 온조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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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2 | 임오 | 지황 3년         | 남해차차웅19년   | 대무신왕 5년     | 온조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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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3 | 계미 | 지황 4년         | 남해차차웅20년   | 대무신왕 6년     | 온조왕              |

|      |      | 유성공           |                  |                  |                     |

|      |      | 경시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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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4 | 갑신 | 경시 2년         | 남해차차웅21년   | 대무신왕 7년     | 온조왕              |

|      |      |                  | 남해차차웅 사망. |                  |                     |

|      |      |                  | 유리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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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5 | 을유 | 후한 광무제 수   | 유리이사금 2년   | 대무신왕 8년     | 온조왕              |

|      |      | 건무 원년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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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6 | 병술 | 건무 2년         | 유리이사금 3년   | 대무신왕 9년     | 온조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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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7 | 정해 | 건무 3년         | 유리이사금 4년   | 대무신왕 10년    | 온조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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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8 | 무자 | 건무 4년         | 유리이사금 5년   | 대무신왕 11년    | 온조왕              |

|      |      |                  |                  |                  | 온조왕 사망         |

|      |      |                  |                  |                  | 다루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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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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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9 | 己丑 | 建武 五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六年              | 十二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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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0 | 庚寅 | 建武 六年         | 儒理尼師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七年              | 十三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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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1 | 辛卯 | 建武 七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八年              | 十四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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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2 | 壬辰 | 建武 八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九年              | 十五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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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3 | 癸巳 | 建武 九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年              | 十六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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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4 | 甲午 | 建武 十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一年            | 十七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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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5 | 乙未 | 建武 十一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二年            | 十八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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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6 | 丙申 | 建武 十二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三年            | 十九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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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7 | 丁酉 | 建武 十三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四年            | 二十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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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8 | 戊戌 | 建武 十四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五年            | 二十一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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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9 | 己亥 | 建武 十五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六年            | 二十二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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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0 | 庚子 | 建武 十六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七年            | 二十三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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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1 | 辛丑 | 建武 十七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八年            | 二十四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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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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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29 | 기축 | 건무 5년         | 유리이사금 6년   | 대무신왕 12년    | 다루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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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0 | 경인 | 건무 6년         | 유리이사금 7년   | 대무신왕 13년    | 다루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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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1 | 신묘 | 건무 7년         | 유리이사금 8년   | 대무신왕 14년    | 다루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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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2 | 임진 | 건무 8년         | 유리이사금 9년   | 대무신왕 15년    | 다루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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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3 | 계사 | 건무 9년         | 유리이사금10년   | 대무신왕 16년    | 다루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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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4 | 갑오 | 건무 10년        | 유리이사금11년   | 대무신왕 17년    | 다루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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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5 | 을미 | 건무 11년        | 유리이사금12년   | 대무신왕 18년    | 다루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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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6 | 병신 | 건무 12년        | 유리이사금13년   | 대무신왕 19년    | 다루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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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7 | 정유 | 건무 13년        | 유리이사금14년   | 대무신왕 20년    | 다루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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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8 | 무술 | 건무 14년        | 유리이사금15년   | 대무신왕 21년    | 다루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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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39 | 기해 | 건무 15년        | 유리이사금16년   | 대무신왕 22년    | 다루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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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0 | 경자 | 건무 16년        | 유리이사금17년   | 대무신왕 23년    | 다루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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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1 | 신축 | 건무 17년        | 유리이사금18년   | 대무신왕 24년    | 다루왕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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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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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2 | 壬寅 | 建武 十八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十九年            | 二十五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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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3 | 癸卯 | 建武 十九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二十年            | 二十六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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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4 | 甲辰 | 建武 二十年       | 儒理尼師今        | 大武神王          | 多婁王         |

|      |      |                   | 二十一年          | 二十七年          | 十七年         |

|      |      |                   |                   | 大武神王薨        |                |

|      |      |                   |                   | 閔中王解色朱      |                |

|      |      |                   |                   | 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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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5 | 乙巳 | 建武 二十一年     | 儒理尼師今        | 閔中王            | 多婁王         |

|      |      |                   | 二十二年          | 二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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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6 | 丙午 | 建武 二十二年     | 儒理尼師今        | 閔中王            | 多婁王         |

|      |      |                   | 二十三年          | 三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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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7 | 丁未 | 建武 二十三年     | 儒理尼師今        | 閔中王            | 多婁王         |

|      |      |                   | 二十四年          | 四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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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8 | 戊申 | 建武 二十四年     | 儒理尼師今        | 閔中王            | 多婁王         |

|      |      |                   | 二十五年          | 五年              | 二十一年       |

|      |      |                   |                   | 閔中王薨          |                |

|      |      |                   |                   | 慕本王解憂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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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9 | 己酉 | 建武 二十五年     | 儒理尼師今        | 慕本王            | 多婁王         |

|      |      |                   | 二十六年          | 二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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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0 | 庚戌 | 建武 二十六年     | 儒理尼師今        | 慕本王            | 多婁王         |

|      |      |                   | 二十七年          | 三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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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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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2 | 임인 | 건무 18년        | 유리이사금19년   | 대무신왕 25년    | 다루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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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3 | 계묘 | 건무 19년        | 유리이사금20년   | 대무신왕 26년    | 다루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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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4 | 갑진 | 건무 20년        | 유리이사금21년   | 대무신왕 27년    | 다루왕 17년         |

|      |      |                  |                  | 대무신왕 사망.   |                     |

|      |      |                  |                  | 민중왕 해색주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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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5 | 을사 | 건무 21년        | 유리이사금22년   | 민중왕 2년       | 다루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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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6 | 병오 | 건무 22년        | 유리이사금23년   | 민중왕 3년       | 다루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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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7 | 정미 | 건무 23년        | 유리이사금24년   | 민중왕 4년       | 다루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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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8 | 무신 | 건무 24년        | 유리이사금25년   | 민중왕 5년       | 다루왕 21년         |

|      |      |                  |                  | 민중왕 사망.     |                     |

|      |      |                  |                  | 모본왕 해우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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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49 | 기유 | 건무 25년        | 유리이사금26년   | 모본왕 2년       | 다루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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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0 | 경술 | 건무 26년        | 유리이사금27년   | 모본왕 3년       | 다루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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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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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1 | 辛亥 | 建武 二十七年     | 儒理尼師今        | 慕本王            | 多婁王         |

|      |      |                   | 二十八年          | 四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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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2 | 壬子 | 建武 二十八年     | 儒理尼師今        | 慕本王            | 多婁王         |

|      |      |                   | 二十九年          | 五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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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3 | 癸丑 | 建武 二十九年     | 儒理尼師今        | 慕本王            | 多婁王         |

|      |      |                   | 三十年            | 六年              | 二十六年       |

|      |      |                   |                   | 慕本王薨          |                |

|      |      |                   |                   | 國祖王宮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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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4 | 甲寅 | 建武 三十年       | 儒理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三十一年          | 二年              | 二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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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5 | 乙卯 | 建武 三十一年     | 儒理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三十二年          | 三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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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6 | 丙辰 | 建武中元 元年     | 儒理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三十三年          | 四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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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7 | 丁巳 | 建武中元 二年     | 儒理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孝明帝莊          | 三十四年          | 五年              | 三十年         |

|      |      |                   | 儒理尼師今薨      |                   |                |

|      |      |                   | 脫解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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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8 | 戊午 | 永平 元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二年              | 六年              | 三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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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9 | 己未 | 永平 二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三年              | 七年              | 三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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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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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1 | 신해 | 건무 27년        | 유리이사금28년   | 모본왕 4년       | 다루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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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2 | 임자 | 건무 28년        | 유리이사금29년   | 모본왕 5년       | 다루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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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3 | 계축 | 건무 29년        | 유리이사금30년   | 모본왕 6년       | 다루왕 26년         |

|      |      |                  |                  | 모본왕 사망.     |                     |

|      |      |                  |                  | 국조왕 궁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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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4 | 갑인 | 건무 30년        | 유리이사금31년   | 국조왕 2년       | 다루왕 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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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5 | 을묘 | 건무 31년        | 유리이사금32년   | 국조왕 3년       | 다루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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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6 | 병진 | 건무 중원 원년   | 유리이사금33년   | 국조왕 4년       | 다루왕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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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7 | 정사 | 건무 중원 2년    | 유리이사금34년   | 국조왕 5년       | 다루왕 30년         |

|      |      | 효명제 장        | 유리이사금 사망. |                  |                     |

|      |      |                  | 탈해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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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8 | 무오 | 영평 원년        | 탈해이사금 2년   | 국조왕 6년       | 다루왕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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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59 | 기미 | 영평 2년         | 탈해이사금 3년   | 국조왕 7년       | 다루왕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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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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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0 | 庚申 | 永平 三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四年              | 八年              | 三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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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1 | 辛酉 | 永平 四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五年              | 九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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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2 | 壬戌 | 永平 五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六年              | 十年              | 三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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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3 | 癸亥 | 永平 六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七年              | 十一年            | 三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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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4 | 甲子 | 永平 七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八年              | 十二年            | 三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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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5 | 乙丑 | 永平 八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九年              | 十三年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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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6 | 丙寅 | 永平 九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年              | 十四年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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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7 | 丁卯 | 永平 十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一年            | 十五年            | 四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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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8 | 戊辰 | 永平 十一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二年            | 十六年            | 四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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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9 | 己巳 | 永平 十二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三年            | 十七年            | 四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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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0 | 庚午 | 永平 十三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四年            | 十八年            | 四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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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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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0 | 경신 | 영평 3년         | 탈해이사금 4년   | 국조왕 8년       | 다루왕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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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1 | 신유 | 영평 4년         | 탈해이사금 5년   | 국조왕 9년       | 다루왕 34년         |

+------+------+------------------+------------------+------------------+---------------------+

| AD62 | 임술 | 영평 5년         | 탈해이사금 6년   | 국조왕 10년      | 다루왕 35년         |

+------+------+------------------+------------------+------------------+---------------------+

| AD63 | 계해 | 영평 6년         | 탈해이사금 7년   | 국조왕 11년      | 다루왕 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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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4 | 갑자 | 영평 7년         | 탈해이사금 8년   | 국조왕 12년      | 다루왕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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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5 | 을축 | 영평 8년         | 탈해이사금 9년   | 국조왕 13년      | 다루왕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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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6 | 병인 | 영평 9년         | 탈해이사금10년   | 국조왕 14년      | 다루왕 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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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7 | 정묘 | 영평 10년        | 탈해이사금11년   | 국조왕 15년      | 다루왕 40년         |

+------+------+------------------+------------------+------------------+---------------------+

| AD68 | 무진 | 영평 11년        | 탈해이사금12년   | 국조왕 16년      | 다루왕 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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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69 | 기사 | 영평 12년        | 탈해이사금13년   | 국조왕 17년      | 다루왕 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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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0 | 경오 | 영평 13년        | 탈해이사금14년   | 국조왕 18년      | 다루왕 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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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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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1 | 辛未 | 永平 十四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五年            | 十九年            | 四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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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2 | 壬申 | 永平 十五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六年            | 二十年            | 四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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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3 | 癸酉 | 永平 十六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七年            | 二十一年          | 四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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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4 | 甲戌 | 永平 十七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十八年            | 二十二年          | 四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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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5 | 乙亥 | 永平 十八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孝章皇帝달        | 十九年            | 二十三年          | 四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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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6 | 丙子 | 律初{建初}??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元年              | 二十年            |  二十四年         | 四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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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7 | 丁丑 | 建初 二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多婁王         |

|      |      |                   | 二十一年          | 二十五年          | 五十年         |

|      |      |                   |                   |                   | 多婁王薨       |

|      |      |                   |                   |                   | 己婁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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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8 | 戊寅 | 建初 三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二年          | 二十六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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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9 | 己卯 | 建初 四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三年          | 二十七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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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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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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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1 | 신미 | 영평 14년        | 탈해이사금15년   | 국조왕 19년      | 다루왕 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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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2 | 임신 | 영평 15년        | 탈해이사금16년   | 국조왕 20년      | 다루왕 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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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3 | 계유 | 영평 16년        | 탈해이사금17년   | 국조왕 21년      | 다루왕 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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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4 | 갑술 | 영평 17년        | 탈해이사금18년   | 국조왕 22년      | 다루왕 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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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5 | 을해 | 영평 18년        | 탈해이사금19년   | 국조왕 23년      | 다루왕 48년         |

|      |      | 효장 황제 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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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6 | 병자 | 건초 원년        | 탈해이사금20년   | 국조왕 24년      | 다루왕 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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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7 | 정축 | 건초 2년         | 탈해이사금21년   | 국조왕 25년      | 다루왕 50년         |

|      |      |                  |                  |                  | 다루왕 사망.        |

|      |      |                  |                  |                  | 기루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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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8 | 무인 | 건초 3년         | 탈해이사금22년   | 국조왕 26년      | 기루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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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79 | 기묘 | 건초 4년         | 탈해이사금23년   | 국조왕 27년      | 기루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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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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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0 | 庚辰 | 建初 五年         | 脫解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四年          | 二十八年          | 四年           |

|      |      |                   | 脫解尼師今薨      |                   |                |

|      |      |                   | 婆娑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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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1 | 辛巳 | 建初 六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年              | 二十九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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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2 | 壬午 | 建初 七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三年              | 三十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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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3 | 癸未 | 建初 八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四年              | 三十一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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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4 | 甲申 | 元和 元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五年              | 三十二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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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5 | 乙酉 | 元和 二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六年              | 三十三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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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6 | 丙戌 | 元和 三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七年              | 三十四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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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7 | 丁亥 | 章和 元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八年              | 三十五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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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8 | 戊子 | 章和 二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孝和皇帝肇        | 九年              | 三十六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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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9 | 己丑 | 永元 元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年              | 三十七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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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0 | 庚寅 | 永元 二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一年            | 三十八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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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1 | 辛卯 | 永元 三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二年            | 三十九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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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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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0 | 경진 | 건초 5년         | 탈해이사금24년   | 국조왕 28년      | 기루왕 4년          |

|      |      |                  | 탈해이사금 사망. |                  |                     |

|      |      |                  | 파사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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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1 | 신사 | 건초 6년         | 파사이사금 2년   | 국조왕 29년      | 기루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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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2 | 임오 | 건초 7년         | 파사이사금 3년   | 국조왕 30년      | 기루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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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3 | 계미 | 건초 8년         | 파사이사금 4년   | 국조왕 31년      | 기루왕 7년          |

+------+------+------------------+------------------+------------------+---------------------+

| AD84 | 갑신 | 원화 원년        | 파사이사금 5년   | 국조왕 32년      | 기루왕 8년          |

+------+------+------------------+------------------+------------------+---------------------+

| AD85 | 을유 | 원화 2년         | 파사이사금 6년   | 국조왕 33년      | 기루왕 9년          |

+------+------+------------------+------------------+------------------+---------------------+

| AD86 | 병술 | 원화 3년         | 파사이사금 7년   | 국조왕 34년      | 기루왕 10년         |

+------+------+------------------+------------------+------------------+---------------------+

| AD87 | 정해 | 장화 원년        | 파사이사금 8년   | 국조왕 35년      | 기루왕 11년         |

+------+------+------------------+------------------+------------------+---------------------+

| AD88 | 무자 | 장화 2년         | 파사이사금 9년   | 국조왕 36년      | 기루왕 12년         |

|      |      | 효화 황제 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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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89 | 기축 | 영원 원년        | 파사이사금10년   | 국조왕 37년      | 기루왕 13년         |

+------+------+------------------+------------------+------------------+---------------------+

| AD90 | 경인 | 영원 2년         | 파사이사금11년   | 국조왕 38년      | 기루왕 14년         |

+------+------+------------------+------------------+------------------+---------------------+

| AD91 | 신묘 | 영원 3년         | 파사이사금12년   | 국조왕 39년      | 기루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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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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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2 | 壬辰 | 永元 四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三年            | 四十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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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3 | 癸巳 | 永元 五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四年            | 四十一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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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4 | 甲午 | 永元 六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五年            | 四十二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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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5 | 乙未 | 永元 七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六年            | 四十三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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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6 | 丙申 | 永元 八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七年            | 四十四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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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7 | 丁酉 | 永元 九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八年            | 四十五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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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8 | 戊戌 | 永元 十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九年            | 四十六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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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9 | 己亥 | 永元 十一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年            | 四十七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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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0 | 庚子 | 永元 十二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一年          | 四十八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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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1 | 辛丑 | 永元 十三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二年          | 四十九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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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2 | 壬寅 | 永元 十四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三年          | 五十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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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3 | 癸卯 | 永元 十五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四年          | 五十一年          | 二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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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4 | 甲辰 | 永元 十六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五年          | 五十二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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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5 | 乙巳 | 元興 元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孝상帝隆          | 二十六年          | 五十三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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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6 | 丙午 | 延平 元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孝安帝祐          | 二十七年          | 五十四年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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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7 | 丁未 | 永初 元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八年          | 五十五年          | 三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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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8 | 戊申 | 永初 二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十九年          | 五十六年          | 三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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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9 | 己酉 | 永初 三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三十年            | 五十七年          | 三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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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0 | 庚戌 | 永初 四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三十一年          | 五十八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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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1 | 辛亥 | 永初 五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三十二年          | 五十九年          | 三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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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2 | 壬子 | 永初 六年         | 婆娑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三十三年          | 六十年            | 三十六年       |

|      |      |                   | 婆娑尼師今薨      |                   |                |

|      |      |                   | 祗摩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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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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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2 | 임진 | 영원 4년         | 파사이사금13년   | 국조왕 40년      | 기루왕 16년         |

+------+------+------------------+------------------+------------------+---------------------+

| AD93 | 계사 | 영원 5년         | 파사이사금14년   | 국조왕 41년      | 기루왕 17년         |

+------+------+------------------+------------------+------------------+---------------------+

| AD94 | 갑오 | 영원 6년         | 파사이사금15년   | 국조왕 42년      | 기루왕 18년         |

+------+------+------------------+------------------+------------------+---------------------+

| AD95 | 을미 | 영원 7년         | 파사이사금16년   | 국조왕 43년      | 기루왕 19년         |

+------+------+------------------+------------------+------------------+---------------------+

| AD96 | 병신 | 영원 8년         | 파사이사금17년   | 국조왕 44년      | 기루왕 20년         |

+------+------+------------------+------------------+------------------+---------------------+

| AD97 | 정유 | 영원 9년         | 파사이사금18년   | 국조왕 45년      | 기루왕 21년         |

+------+------+------------------+------------------+------------------+---------------------+

| AD98 | 무술 | 영원 10년        | 파사이사금19년   | 국조왕 46년      | 기루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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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99 | 기해 | 영원 11년        | 파사이사금20년   | 국조왕 47년      | 기루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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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0 | 경자 | 영원 12년        | 파사이사금21년   | 국조왕 48년      | 기루왕 24년         |

+------+------+------------------+------------------+------------------+---------------------+

|AD101 | 신축 | 영원 13년        | 파사이사금22년   | 국조왕 49년      | 기루왕 25년         |

+------+------+------------------+------------------+------------------+---------------------+

|AD102 | 임인 | 영원 14년        | 파사이사금23년   | 국조왕 50년      | 기루왕 26년         |

+------+------+------------------+------------------+------------------+---------------------+

|AD103 | 계묘 | 영원 15년        | 파사이사금24년   | 국조왕 51년      | 기루왕 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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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4 | 갑진 | 영원 16년        | 파사이사금25년   | 국조왕 52년      | 기루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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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5 | 을사 | 원흥 원년        | 파사이사금26년   | 국조왕 53년      | 기루왕 29년         |

|      |      | 효상제 융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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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6 | 병오 | 연평 원년        | 파사이사금27년   | 국조왕 54년      | 기루왕 30년         |

|      |      | 효안제 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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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7 | 정미 | 영초 원년        | 파사이사금28년   | 국조왕 55년      | 기루왕 31년         |

+------+------+------------------+------------------+------------------+---------------------+

|AD108 | 무신 | 영초 2년         | 파사이사금29년   | 국조왕 56년      | 기루왕 32년         |

+------+------+------------------+------------------+------------------+---------------------+

|AD109 | 기유 | 영초 3년         | 파사이사금30년   | 국조왕 57년      | 기루왕 33년         |

+------+------+------------------+------------------+------------------+---------------------+

|AD110 | 경술 | 영초 4년         | 파사이사금31년   | 국조왕 58년      | 기루왕 34년         |

+------+------+------------------+------------------+------------------+---------------------+

|AD111 | 신해 | 영초 5년         | 파사이사금32년   | 국조왕 59년      | 기루왕 35년         |

+------+------+------------------+------------------+------------------+---------------------+

|AD112 | 임자 | 영초 6년         | 파사이사금33년   | 국조왕 60년      | 기루왕 36년         |

|      |      |                  | 파사이사금 사망. |                  |                     |

|      |      |                  | 지마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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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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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3 | 癸丑 | 永初 七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二年              | 六十一年          | 三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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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4 | 甲寅 | 元初 元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三年              | 六十二年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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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5 | 乙卯 | 元初 二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四年              | 六十三年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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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6 | 丙辰 | 元初 三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五年              | 六十四年          | 四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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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7 | 丁巳 | 元初 四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六年              | 六十五年          | 四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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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8 | 戊午 | 元初 五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七年              | 六十六年          | 四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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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9 | 己未 | 元初 六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八年              | 六十七年          | 四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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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0 | 庚申 | 永寧 元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九年              | 六十八年          | 四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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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1 | 辛酉 | 建光 元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年              | 六十九年          | 四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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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2 | 壬戌 | 延光 元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一年            | 七十年            | 四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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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3 | 癸亥 | 延光 二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二年            | 七十一年          | 四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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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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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3 | 계축 | 영초 7년         | 지마이사금 2년   | 국조왕 61년      | 기루왕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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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4 | 갑인 | 원초 원년        | 지마이사금 3년   | 국조왕 62년      | 기루왕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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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5 | 을묘 | 원초 2년         | 지마이사금 4년   | 국조왕 63년      | 기루왕 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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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6 | 병진 | 원초 3년         | 지마이사금 5년   | 국조왕 64년      | 기루왕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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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7 | 정사 | 원초 4년         | 지마이사금 6년   | 국조왕 65년      | 기루왕 41년         |

+------+------+------------------+------------------+------------------+---------------------+

|AD118 | 무오 | 원초 5년         | 지마이사금 7년   | 국조왕 66년      | 기루왕 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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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19 | 기미 | 원초 6년         | 지마이사금 8년   | 국조왕 67년      | 기루왕 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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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0 | 경신 | 영녕 원년        | 지마이사금 9년   | 국조왕 68년      | 기루왕 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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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1 | 신유 | 건광 원년        | 지마이사금10년   | 국조왕 69년      | 기루왕 45년         |

+------+------+------------------+------------------+------------------+---------------------+

|AD122 | 임술 | 연광 원년        | 지마이사금11년   | 국조왕 70년      | 기루왕 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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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3 | 계해 | 연광 2년         | 지마이사금12년   | 국조왕 71년      | 기루왕 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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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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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4 | 甲子 | 延光 三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三年            | 七十二年          | 四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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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5 | 乙丑 | 孝順帝保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四年            | 七十三年          | 四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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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6 | 丙寅 | 永建 元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五年            | 七十四年          | 五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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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7 | 丁卯 | 永建 二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六年            | 七十五年          | 五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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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8 | 戊辰 | 永建 三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己婁王         |

|      |      |                   | 十七年            | 七十六年          | 五十二年       |

|      |      |                   |                   |                   | 己婁王薨       |

|      |      |                   |                   |                   | 蓋婁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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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9 | 己巳 | 永建 四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十八年            | 七十七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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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0 | 庚午 | 永建 五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十九年            | 七十八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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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1 | 辛未 | 永建 六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二十年            | 七十九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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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2 | 壬申 | 陽嘉 元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二十一年          | 八十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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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3 | 癸酉 | 陽嘉 二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二十二年          | 八十一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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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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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4 | 갑자 | 연광 3년         | 지마이사금13년   | 국조왕 72년      | 기루왕 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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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5 | 을축 | 효순제 보        | 지마이사금14년   | 국조왕 73년      | 기루왕 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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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6 | 병인 | 영건 원년        | 지마이사금15년   | 국조왕 74년      | 기루왕 5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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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7 | 정묘 | 영건 2년         | 지마이사금16년   | 국조왕 75년      | 기루왕 5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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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8 | 무진 | 영건 3년         | 지마이사금17년   | 국조왕 76년      | 기루왕 52년         |

|      |      |                  |                  |                  | 기루왕 사망         |

|      |      |                  |                  |                  | 개루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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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29 | 기사 | 영건 4년         | 지마이사금18년   | 국조왕 77년      | 개루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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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0 | 경오 | 영건 5년         | 지마이사금19년   | 국조왕 78년      | 개루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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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1 | 신미 | 영건 6년         | 지마이사금20년   | 국조왕 79년      | 개루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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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2 | 임신 | 양가 원년        | 지마이사금21년   | 국조왕 80년      | 개루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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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3 | 계유 | 양가 2년         | 지마이사금22년   | 국조왕 81년      | 개루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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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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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4 | 甲戌 | 陽嘉 三年         | 祗摩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二十三年          | 八十二年          | 七年           |

|      |      |                   | 祗摩尼師今薨      |                   |                |

|      |      |                   | 逸聖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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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5 | 乙亥 | 陽嘉 四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二年              | 八十三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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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6 | 丙子 | 永和 元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三年              | 八十四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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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7 | 丁丑 | 永和 二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四年              | 八十五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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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8 | 戊寅 | 永和 三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五年              | 八十六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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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9 | 己卯 | 永和 四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六年              | 八十七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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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0 | 庚辰 | 永和 五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七年              | 八十八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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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1 | 辛巳 | 永和 六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八年              | 八十九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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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2 | 壬午 | 漢安 元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九年              | 九十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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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3 | 癸未 | 漢安 二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 十年              | 九十一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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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4 | 甲申 | 建康 元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孝沖帝炳          | 十一年            | 九十二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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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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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4 | 갑술 | 양가 3년         | 지마이사금23년   | 국조왕 82년      | 개루왕  7년         |

|      |      |                  | 지마이사금 사망. |                  |                     |

|      |      |                  | 일성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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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5 | 을해 | 양가 4년         | 일성이사금 2년   | 국조왕 83년      | 개루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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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6 | 병자 | 영화 원년        | 일성이사금 3년   | 국조왕 84년      | 개루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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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7 | 정축 | 영화 2년         | 일성이사금 4년   | 국조왕 85년      | 개루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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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8 | 무인 | 영화 3년         | 일성이사금 5년   | 국조왕 86년      | 개루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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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39 | 기묘 | 영화 4년         | 일성이사금 6년   | 국조왕 87년      | 개루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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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0 | 경진 | 영화 5년         | 일성이사금 7년   | 국조왕 88년      | 개루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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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1 | 신사 | 영화 6년         | 일성이사금 8년   | 국조왕 89년      | 개루왕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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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2 | 임오 | 한안 원년        | 일성이사금 9년   | 국조왕 90년      | 개루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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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3 | 계미 | 한안 2년         | 일성이사금10년   | 국조왕 91년      | 개루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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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4 | 갑신 | 건강 원년        | 일성이사금11년   | 국조왕 92년      | 개루왕 17년         |

|      |      | 효충제 병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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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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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5 | 乙酉 | 永嘉 元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孝質帝纘          | 十二年            | 九十三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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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6 | 丙戌 | 本初 元年         | 逸聖尼師今        | 國祖王            | 蓋婁王         |

|      |      | 孝桓帝志          | 十三年            | 九十四年          | 十九年         |

|      |      |                   |                   | 國祖王遜位退居    |                |

|      |      |                   |                   | 後宮, 次大王遂    |                |

|      |      |                   |                   | 成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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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7 | 丁亥 | 建和 元年         | 逸聖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四年            | 二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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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8 | 戊子 | 建和 二年         | 逸聖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五年            | 三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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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9 | 己丑 | 建和 三年         | 逸聖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六年            | 四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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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0 | 庚寅 | 和平 元年         | 逸聖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七年            | 五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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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1 | 辛卯 | 元嘉 元年         | 逸聖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八年            | 六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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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2 | 壬辰 | 元嘉 二年         | 逸聖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九年            | 七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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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3 | 癸巳 | 永興 元年         | 逸聖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二十年            | 八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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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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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5 | 을유 | 영가 원년        | 일성이사금12년   | 국조왕 93년      | 개루왕 18년         |

|      |      | 효질제 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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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6 | 병술 | 본초 원년        | 일성이사금13년   | 국조왕 94년      | 개루왕 19년         |

|      |      | 효환제 지        |                  | 국조왕이 왕위를  |                     |

|      |      |                  |                  | 사양. 후궁으로   |                     |

|      |      |                  |                  | 물러남. 차대왕   |                     |

|      |      |                  |                  | 수성 즉위 원년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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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7 | 정해 | 건화 원년        | 일성이사금14년   | 차대왕 2년       | 개루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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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48 | 무자 | 건화 2년         | 일성이사금15년   | 차대왕 3년       | 개루왕 21년         |

+------+------+------------------+------------------+------------------+---------------------+

|AD149 | 기축 | 건화 3년         | 일성이사금16년   | 차대왕 4년       | 개루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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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0 | 경인 | 화평 원년        | 일성이사금17년   | 차대왕 5년       | 개루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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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1 | 신묘 | 원가 원년        | 일성이사금18년   | 차대왕 6년       | 개루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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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2 | 임진 | 원가 2년         | 일성이사금19년   | 차대왕 7년       | 개루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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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3 | 계사 | 영흥 원년        | 일성이사금20년   | 차대왕 8년       | 개루왕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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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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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4 | 甲午 | 永興 二年         | 逸聖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二十一年          | 九年              | 二十七年       |

|      |      |                   | 逸聖尼師今薨      |                   |                |

|      |      |                   | 阿達羅尼師今      |                   |                |

|      |      |                   | 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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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5 | 乙未 | 永壽 元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二年              | 十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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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6 | 丙申 | 永壽 二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十一年     | 蓋婁王         |

|      |      |                   | 三年              |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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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7 | 丁酉 | 永壽 三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四年              | 十二年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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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8 | 戊戌 | 延(??){延熹}??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元年              | 五年              | 十三年            | 三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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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9 | 己亥 | 延熹 二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六年              | 十四年            | 三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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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0 | 庚子 | 延熹 三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七年              | 十五年            | 三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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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1 | 辛丑 | 延熹 四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八年              | 十六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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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2 | 壬寅 | 延熹 五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九年              | 十七年            | 三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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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3 | 癸卯 | 延熹 六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年              | 十八年            | 三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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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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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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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4 | 갑오 | 영흥 2년         | 일성이사금21년   | 차대왕 9년       | 개루왕 27년         |

|      |      |                  | 일성이사금 사망. |                  |                     |

|      |      |                  | 아달라이사금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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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5 | 을미 | 영수 원년        | 아달라이사금 2년 | 차대왕 10년      | 개루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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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6 | 병신 | 영수 2년         | 아달라이사금 3년 | 차대왕 11년      | 개루왕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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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7 | 정유 | 영수 3년         | 아달라이사금 4년 | 차대왕 12년      | 개루왕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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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8 | 무술 | 연희 원년        | 아달라이사금 5년 | 차대왕 13년      | 개루왕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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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59 | 기해 | 연희 2년         | 아달라이사금 6년 | 차대왕 14년      | 개루왕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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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0 | 경자 | 연희 3년         | 아달라이사금 7년 | 차대왕 15년      | 개루왕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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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1 | 신축 | 연희 4년         | 아달라이사금 8년 | 차대왕 16년      | 개루왕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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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2 | 임인 | 연희 5년         | 아달라이사금 9년 | 차대왕 17년      | 개루왕 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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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3 | 계묘 | 연희 6년         | 아달라이사금10년 | 차대왕 18년      | 개루왕 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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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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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4 | 甲辰 | 延熹 七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一年            | 十九年            | 三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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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5 | 乙巳 | 延熹 八年         | 阿達羅尼師今      | 次大王            | 蓋婁王         |

|      |      |                   | 十二年            | 三{二}??十年      |  二{三}??      |

|      |      |                   |                   | 國祖王三月薨,     |                |

|      |      |                   |                   | 次大王二{十}??    |                |

|      |      |                   |                   | 月薨 新大王       |                |

|      |      |                   |                   | 伯固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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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6 | 丙午 | 延熹 九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蓋婁王         |

|      |      |                   | 十三年            | 二年              | 三十九年       |

|      |      |                   |                   |                   | 蓋婁王薨       |

|      |      |                   |                   |                   | 肖古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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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7 | 丁未 | 永康 元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十四年            | 三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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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8 | 戊申 | 孝靈帝宏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律寧{建寧}??      | 十五年            | 四年              | 三年           |

|      |      |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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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9 | 己酉 | 建寧 二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十六年            | 五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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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0 | 庚戌 | 建寧 三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十七年            | 六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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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1 | 辛亥 | 建寧 四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十八年            | 七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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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2 | 壬子 | 熹平 元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十九年            | 八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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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高句麗本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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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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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4 | 갑진 | 연희 7년         | 아달라이사금11년 | 차대왕 19년      | 개루왕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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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5 | 을사 | 연희 8년         | 아달라이사금12년 | 차대왕 20년      | 개루왕 38년         |

|      |      |                  |                  | 국조왕 3월,      |                     |

|      |      |                  |                  | 차대왕 2월에     |                     |

|      |      |                  |                  | 사망. 신대왕     |                     |

|      |      |                  |                  | 백고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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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6 | 병오 | 연희 9년         | 아달라이사금13년 | 신대왕 2년       | 개루왕 39년         |

|      |      |                  |                  |                  | 개루왕 사망.        |

|      |      |                  |                  |                  | 초고왕 즉위         |

|      |      |                  |                  |                  | 원년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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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7 | 정미 | 영강 원년        | 아달라이사금14년 | 신대왕 3년       | 초고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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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8 | 무신 | 효영제 굉        | 아달라이사금15년 | 신대왕 4년       | 초고왕 3년          |

|      |      | 건녕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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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69 | 기유 | 건녕 2년         | 아달라이사금16년 | 신대왕 5년       | 초고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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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0 | 경술 | 건녕 3년         | 아달라이사금17년 | 신대왕 6년       | 초고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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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1 | 신해 | 건녕 4년         | 아달라이사금18년 | 신대왕 7년       | 초고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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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2 | 임자 | 희평 원년        | 아달라이사금19년 | 신대왕 8년       | 초고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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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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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3 | 癸丑 | 熹平 二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二十年            | 九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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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4 | 甲寅 | 熹平 三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二十一年          | 十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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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5 | 乙卯 | 熹平 四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二十二年          | 十一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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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6 | 丙辰 | 熹平 五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二十三年          | 十二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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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7 | 丁巳 | 熹平 六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二十四年          | 十三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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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8 | 戊午 | 光和 元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二十五年          | 十四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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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9 | 己未 | 光和 二年         | 阿達羅尼師今      | 新大王            | 肖古王         |

|      |      |                   | 二十六年          | 十五年            | 十四年         |

|      |      |                   |                   | 新大王薨  故國    |                |

|      |      |                   |                   | 川(-責)王(+男武)??|                |

|      |      |                   |                   | 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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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0 | 庚申 | 光和 三年         | 阿達羅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二十七年          | 二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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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1 | 辛酉 | 光和 四年         | 阿達羅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二十八年          | 三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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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2 | 壬戌 | 光和 五年         | 阿達羅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二十九年          | 四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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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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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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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3 | 계축 | 희평 2년         | 아달라이사금20년 | 신대왕 9년       | 초고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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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4 | 갑인 | 희평 3년         | 아달라이사금21년 | 신대왕 10년      | 초고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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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5 | 을묘 | 희평 4년         | 아달라이사금22년 | 신대왕 11년      | 초고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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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6 | 병진 | 희평 5년         | 아달라이사금23년 | 신대왕 12년      | 초고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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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7 | 정사 | 희평 6년         | 아달라이사금24년 | 신대왕 13년      | 초고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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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8 | 무오 | 광화 원년        | 아달라이사금25년 | 신대왕 14년      | 초고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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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79 | 기미 | 광화 2년         | 아달라이사금26년 | 신대왕 15년      | 초고왕 14년         |

|      |      |                  |                  | 신대왕 사망      |                     |

|      |      |                  |                  | 고국천왕 남무    |                     |

|      |      |                  |                  | 즉위 원년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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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0 | 경신 | 광화 3년         | 아달라이사금27년 | 고국천왕 2년     |  초고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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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1 | 신유 | 광화 4년         | 아달라이사금28년 | 고국천왕 3년     |  초고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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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2 | 임술 | 광화 5년         | 아달라이사금29년 | 고국천왕 4년     |  초고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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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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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3 | 癸亥 | 光和 六年         | 阿達羅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三十年            | 五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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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4 | 甲子 | 中平 元年         | 阿達羅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三十一年          | 六年              | 十九年         |

|      |      |                   | &何達{阿達羅}??   |                   |                |

|      |      |                   | 尼師今薨          |                   |                |

|      |      |                   | 伐休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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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5 | 乙丑 | 中平 一{二}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二年              | 七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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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6 | 丙寅 | 中平 三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二{三}年??        | 八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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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7 | 丁卯 | 中平 四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四年              | 九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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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8 | 戊辰 | 中平 五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五年              | 十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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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9 | 己巳 | 中平 六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洪{弘}??農王辯    | 六年              | 十一年            | 二十四年       |

|      |      | 立, 改元光熹又改  |                   |                   |                |

|      |      | 元明{昭}??寧,     |                   |                   |                |

|      |      | 孝獻帝協改元      |                   |                   |                |

|      |      | 永漢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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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0 | 庚午 | 初平 元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七年              | 十二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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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1 | 辛未 | 初平 二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八年              | 十三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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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李丙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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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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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3 | 계해 | 광화 6년         | 아달라이사금30년 | 고국천왕 5년     |  초고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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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4 | 갑자 | 중평 원년        | 아달라이사금31년 | 고국천왕 6년     |  초고왕 19년        |

|      |      |                  | 아달라이사금사망.|                  |                     |

|      |      |                  | 벌휴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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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5 | 을축 | 중평 2년         | 벌휴이사금 2년   | 고국천왕 7년     | 초고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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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6 | 병인 | 중평 3년         | 벌휴이사금 3년   | 고국천왕 8년     | 초고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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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7 | 정묘 | 중평 4년         | 벌휴이사금 4년   | 고국천왕 9년     | 초고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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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8 | 무진 | 중평 5년         | 벌휴이사금 5년   | 고국천왕10년     | 초고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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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89 | 기사 | 중평 6년         | 벌휴이사금 6년   | 고국천왕11년     | 초고왕 24년         |

|      |      | 홍농왕 변이 황   |                  |                  |                     |

|      |      | 제가 되어 연호   |                  |                  |                     |

|      |      | 를 광희로 고쳤   |                  |                  |                     |

|      |      | 다가 명녕으로    |                  |                  |                     |

|      |      | 고침. 효헌제     |                  |                  |                     |

|      |      | 협이 연호를      |                  |                  |                     |

|      |      | 영한으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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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0 | 경오 | 초평 원년        | 벌휴이사금 7년   | 고국천왕 12년    | 초고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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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1 | 신미 | 초평 2년         | 벌휴이사금 8년   | 고국천왕 13년    | 초고왕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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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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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2 | 壬申 | 初平 三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九年              | 十四年            | 二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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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3 | 癸酉 | 初平 四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十年              | 十五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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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4 | 甲戌 | 興平 元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十一年            | 十六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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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5 | 乙亥 | 興平 二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十二年            | 十七年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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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6 | 丙子 | 建安 元年         | 伐休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十三年            | 十八年            | 三十一年       |

|      |      |                   | 伐休尼師今薨      |                   |                |

|      |      |                   | 奈解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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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7 | 丁丑 | 建安 二年         | 奈解尼師今        | 故國川王          | 肖古王         |

|      |      |                   | 二年              | 十九年             三十二年        |

|      |      |                   |                   | 故國川王薨        |                |

|      |      |                   |                   | 山上王延優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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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8 | 戊寅 | 建安 三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三年              | 二年              | 三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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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9 | 己卯 | 建安 四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四年              | 三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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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0 | 庚辰 | 建安 五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五年              | 四年              | 三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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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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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2 | 임신 | 초평 3년         | 벌휴이사금 9년   | 고국천왕 14년    | 초고왕 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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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3 | 계유 | 초평 4년         | 벌휴이사금10년   | 고국천왕 15년    | 초고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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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4 | 갑술 | 흥평 원년        | 벌휴이사금11년   | 고국천왕 16년    | 초고왕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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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5 | 을해 | 흥평 2년         | 벌휴이사금12년   | 고국천왕 17년    | 초고왕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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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6 | 병자 | 건안 원년        | 벌휴이사금13년   | 고국천왕 18년    | 초고왕 31년         |

|      |      |                  | 벌휴이사금 사망. |                  |                     |

|      |      |                  | 나해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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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7 | 정축 | 건안 2년         | 나해이사금 2년   | 고국천왕 19년    | 초고왕 32년         |

|      |      |                  |                  | 고국천왕 사망.   |                     |

|      |      |                  |                  | 산상왕 연우      |                     |

|      |      |                  |                  | 즉위 원년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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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8 | 무인 | 건안 3년         | 나해이사금 3년   | 산상왕 2년       | 초고왕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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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99 | 기묘 | 건안 4년         | 나해이사금 4년   | 산상왕 3년       | 초고왕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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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0 | 경진 | 건안 5년         | 나해이사금 5년   | 산상왕 4년       | 초고왕 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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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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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1 | 辛巳 | 建安 六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六年              | 五年              | 三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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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2 | 壬午 | 建安 七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七年              | 六年              | 三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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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3 | 癸未 | 建安 八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八年              | 七年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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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4 | 甲申 | 建安 九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九年              | 八年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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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5 | 乙酉 | 建安 十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年              | 九年              | 四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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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6 | 丙戌 | 建安 十一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一年            | 十年              | 四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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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7 | 丁亥 | 建安 十二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二年            | 十一年            | 四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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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8 | 戊子 | 建安 十三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三年            | 十二年            | 四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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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9 | 己丑 | 建安 十四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四年            | 十三年            | 四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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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0 | 庚寅 | 建安 十五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五年            | 十四年            | 四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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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1 | 辛卯 | 建安 十六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六年            | 十五年            | 四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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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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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1 | 신사 | 건안 6년         | 나해이사금 6년   | 산상왕 5년       | 초고왕 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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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2 | 임오 | 건안 7년         | 나해이사금 7년   | 산상왕 6년       | 초고왕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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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3 | 계미 | 건안 8년         | 나해이사금 8년   | 산상왕 7년       | 초고왕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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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4 | 갑신 | 건안 9년         | 나해이사금 9년   | 산상왕 8년       | 초고왕 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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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5 | 을유 | 건안 10년        | 나해이사금10년   | 산상왕 9년       | 초고왕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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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6 | 병술 | 건안 11년        | 나해이사금11년   | 산상왕 10년      | 초고왕 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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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7 | 정해 | 건안 12년        | 나해이사금12년   | 산상왕 11년      | 초고왕 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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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8 | 무자 | 건안 13년        | 나해이사금13년   | 산상왕 12년      | 초고왕 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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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09 | 기축 | 건안 14년        | 나해이사금14년   | 산상왕 13년      | 초고왕 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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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0 | 경인 | 건안 15년        | 나해이사금15년   | 산상왕 14년      | 초고왕 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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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1 | 신묘 | 건안 16년        | 나해이사금16년   | 산상왕 15년      | 초고왕 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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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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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2 | 壬辰 | 建安 十七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七年            | 十六年            | 四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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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3 | 癸巳 | 建安 十八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八年            | 十七年            | 四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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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4 | 甲午 | 建安 十九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肖古王         |

|      |      |                   | 十九年            | 十八年            | 四十九年       |

|      |      |                   |                   |                   | 肖古王薨       |

|      |      |                   |                   |                   | 仇首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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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5 | 乙未 | 建安 二十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 二十年            | 十九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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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6 | 丙申 | 建安 二十一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 二十一年          | 二十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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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7 | 丁酉 | 建安 二十二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 二十二年          | 二十一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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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8 | 戊戌 | 建安 二十三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 二十三年          | 二十二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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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9 | 己亥 | 建安 二十四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 二十四年          | 二十三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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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0 | 庚子 | 延康 元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魏文帝曹丕 皇初   | 二十五年          | 二十四年          | 七年           |

|      |      | {黃初}??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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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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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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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2 | 임진 | 건안 17년        | 나해이사금17년   | 산상왕 16년      | 초고왕 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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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3 | 계사 | 건안 18년        | 나해이사금18년   | 산상왕 17년      | 초고왕 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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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4 | 갑오 | 건안 19년        | 나해이사금19년   | 산상왕 18년      | 초고왕 49년         |

|      |      |                  |                  |                  | 초고왕 사망.        |

|      |      |                  |                  |                  | 구수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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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5 | 을미 | 건안 20년        | 나해이사금20년   | 산상왕 19년      | 구수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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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6 | 병신 | 건안 21년        | 나해이사금21년   | 산상왕 20년      | 구수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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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7 | 정유 | 건안 22년        | 나해이사금22년   | 산상왕 21년      | 구수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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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8 | 무술 | 건안 23년        | 나해이사금23년   | 산상왕 22년      | 구수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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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19 | 기해 | 건안 24년        | 나해이사금24년   | 산상왕 23년      | 구수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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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0 | 경자 | 연강 원년        | 나해이사금25년   | 산상왕 24년      | 구수왕 7년          |

|      |      | 위문제 조비      |                  |                  |                     |

|      |      | 황초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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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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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1 | 辛丑 | 黃初 二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蜀先主劉備卽帝    | 二十六年          | 二十五年          | 八年           |

|      |      | 位於成都, 建元    |                   |                   |                |

|      |      | 章武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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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2 | 壬寅 | 黃初 三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吳大帝孫權都武    | 二十七年          | 二十六年          | 九年           |

|      |      | 昌. 建元黃武. 自  |                   |                   |                |

|      |      | 此三國分矣.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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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3 | 癸卯 | 黃初 四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蜀後主禪立, 改    | 二十八年          | 二十七年          | 十年           |

|      |      | 元建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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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4 | 甲辰 | 黃初 五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 二十九年          | 二十八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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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5 | 乙巳 | 黃初 六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 三十年            | 二十九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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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6 | 丙午 | 黃初 七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明皇帝睿{叡}??    | 三十一年          | 三十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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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7 | 丁未 | 太和 元年         | 奈解尼師今        | 山上王            | 仇首王         |

|      |      |                   | 三十二年          | 三十一年          | 十四年         |

|      |      |                   |                   | 山上王薨          |                |

|      |      |                   |                   | 東川王憂位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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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8 | 戊申 | 太和 二年         | 奈解尼師今        | 東川王            | 仇首王         |

|      |      |                   | 三十三年          | 二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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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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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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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1 | 신축 | 황초 2년         |나해이사금26년    | 산상왕 25년      | 구수왕 8년          |

|      |      | 촉 선주 유 비    |                  |                  |                     |

|      |      | 성도에서 즉위.   |                  |                  |                     |

|      |      | 연호를 장무로    |                  |                  |                     |

|      |      | 선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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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2 | 임인 | 황초 3년         | 나해이사금27년   | 산상왕 26년      | 구수왕 9년          |

|      |      | 오의 대제 손 권  |                  |                  |                     |

|      |      | 무창에 도읍.     |                  |                  |                     |

|      |      | 연호를 황무로    |                  |                  |                     |

|      |      | 선포. 이로부터   |                  |                  |                     |

|      |      | 3국이 분립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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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3 | 계묘 | 황초 4년         | 나해이사금28년   | 산상왕 27년      | 구수왕 10년         |

|      |      | 촉의 후주 선     |                  |                  |                     |

|      |      | 즉위. 연호를     |                  |                  |                     |

|      |      | 건흥으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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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4 | 갑진 | 황초 5년         | 나해이사금29년   | 산상왕 28년      | 구수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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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5 | 을사 | 황초 6년         | 나해이사금30년   | 산상왕 29년      | 구수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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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6 | 병오 | 황초 7년         | 나해이사금31년   | 산상왕 30년      | 구수왕 13년         |

|      |      | 명황제 예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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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7 | 정미 | 태화 원년        | 나해이사금32년   | 산상왕 31년      | 구수왕 14년         |

|      |      |                  |                  | 산상왕 사망.     |                     |

|      |      |                  |                  | 동천왕 우위거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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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8 | 무신 | 태화 2년         | 나해이사금33년   | 동천왕 2년       | 구수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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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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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9 | 己酉 | 太和 三年         | 奈解尼師今        | 東川王            | 仇首王         |

|      |      | 吳改元黃龍, 遷    | 三十四年          | 三年              | 十六年         |

|      |      | 郡{都}??建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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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0 | 庚戌 | 太和 四年         | 奈解尼師今        | 東川王            | 仇首王         |

|      |      |                   | 三十五年          | 四年              | 十七年         |

|      |      |                   | 奈解尼師今薨      |                   |                |

|      |      |                   | 助賁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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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1 | 辛亥 | 太和 五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仇首王         |

|      |      |                   | 二年              | 五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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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2 | 壬子 | 太和 六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仇首王         |

|      |      | 吳改元嘉禾        |      三年         | 六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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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3 | 癸丑 | 靑龍 元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仇首王         |

|      |      |                   | 四年              | 七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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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4 | 甲寅 | 靑龍 二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仇首王         |

|      |      |                   | 五年              | 八年              | 二十一年       |

|      |      |                   |                   |                   | 仇首王薨       |

|      |      |                   |                   |                   | 長子沙伴王     |

|      |      |                   |                   |                   | 嗣位而幼少     |

|      |      |                   |                   |                   | 見廢. 古爾     |

|      |      |                   |                   |                   | 王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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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5 | 乙卯 | 靑龍 三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六年              | 九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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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6 | 丙辰 | 靑龍 四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七年              | 十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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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7 | 丁巳 | 景初 元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八年              | 十一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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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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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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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29 | 기유 | 태화 3년         | 나해이사금34년   | 동천왕 3년       | 구수왕 16년         |

|      |      | 오의 연호를      |                  |                  |                     |

|      |      | 황룡으로 개칭    |                  |                  |                     |

|      |      | 도읍을 건업으로  |                  |                  |                     |

|      |      | 이전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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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0 | 경술 | 태화 4년         | 나해이사금35년   | 동천왕 4년       | 구수왕 17년         |

|      |      |                  | 나해이사금 사망. |                  |                     |

|      |      |                  | 조분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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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1 | 신해 | 태화 5년         | 조분이사금 2년   | 동천왕 5년       | 구수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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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2 | 임자 | 태화 6년         | 조분이사금 3년   | 동천왕 6년       | 구수왕 19년         |

|      |      | 오의 연호를      |                  |                  |                     |

|      |      | 가화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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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3 | 계축 | 청룡 원년        | 조분이사금 4년   | 동천왕 7년       | 구수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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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4 | 갑인 | 청룡 2년         | 조분이사금 5년   | 동천왕 8년       | 구수왕 21년         |

|      |      |                  |                  |                  | 구수왕 사망.        |

|      |      |                  |                  |                  | 장자 사반왕         |

|      |      |                  |                  |                  | 즉위. 그러나        |

|      |      |                  |                  |                  | 사반왕이            |

|      |      |                  |                  |                  | 나이어려 폐위       |

|      |      |                  |                  |                  | 당함. 고이왕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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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5 | 을묘 | 청룡 3년         | 조분이사금 6년   | 동천왕 9년       | 고이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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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6 | 병진 | 청룡 4년         | 조분이사금 7년   | 동천왕 10년      | 고이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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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7 | 정사 | 경초 원년        | 조분이사금 8년   | 동천왕 11년      | 고이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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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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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8 | 戊午 | 景初 二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蜀改元延熙. 吳    | 九年              | 十二年            | 五年           |

|      |      | 改元赤烏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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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9 | 己未 | 景初 三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齊王芳            | 十年              | 十三年            | 六年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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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0 | 庚申 | 正始 元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十一年            | 十四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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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1 | 辛酉 | 正始 二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十二年            | 十五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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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2 | 壬戌 | 正始 三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十三年            | 十六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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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3 | 癸亥 | 正始 四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十四年            | 十七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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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4 | 甲子 | 正始 五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十五年            | 十八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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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5 | 乙丑 | 正始 六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十六年            | 十九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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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6 | 丙寅 | 正始 七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十七年            | 二十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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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7 | 丁卯 | 正始 八年         | 助賁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十八年            | 二十一年          | 十四年         |

|      |      |                   | 助賁尼師今薨.     |                   |                |

|      |      |                   | 沾解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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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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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8 | 무오 | 경초 2년         | 조분이사금 9년   | 동천왕 12년      | 고이왕 5년          |

|      |      | 촉의 연호를      |                  |                  |                     |

|      |      | 연희로 개칭.     |                  |                  |                     |

|      |      | 오의 연호를      |                  |                  |                     |

|      |      | 적오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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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39 | 기미 | 경초 3년         | 조분이사금10년   | 동천왕 13년      | 고이왕 6년          |

|      |      | 제왕 방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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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0 | 경신 | 정시 원년        | 조분이사금11년   | 동천왕 14년      | 고이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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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1 | 신유 | 정시 2년         | 조분이사금12년   | 동천왕 15년      | 고이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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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2 | 임술 | 정시 3년         | 조분이사금13년   | 동천왕 16년      | 고이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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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3 | 계해 | 정시 4년         | 조분이사금14년   | 동천왕 17년      | 고이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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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4 | 갑자 | 정시 5년         | 조분이사금15년   | 동천왕 18년      | 고이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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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5 | 을축 | 정시 6년         | 조분이사금16년   | 동천왕 19년      | 고이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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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6 | 병인 | 정시 7년         | 조분이사금17년   | 동천왕 20년      | 고이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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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7 | 정묘 | 정시 8년         | 조분이사금18년   | 동천왕 21년      | 고이왕 14년         |

|      |      |                  | 조분이사금 사망. |                  |                     |

|      |      |                  | 첨해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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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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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8 | 戊辰 | 正始 九年         | 沾解尼師今        | 東川王            | 古爾王         |

|      |      |                   | 二年              | 二十二年          | 十五年         |

|      |      |                   |                   | 東川王薨. 中川    |                |

|      |      |                   |                   | 王然弗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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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9 | 己巳 | (+魏嘉平元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三年              | 二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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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0 | 庚午 | 嘉平 二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四年              | 三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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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1 | 辛未 | 嘉平 三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吳改元太元        | 五年              | 四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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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2 | 壬申 | 嘉平 四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吳會稽王亮立      | 六年              | 五年              | 十九年         |

|      |      | 改元建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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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3 | 癸酉 | 嘉平 五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七年              | 六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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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4 | 甲戌 | 嘉平 六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高貴鄕公모        | 八年              | 七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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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5 | 乙亥 | 正元 二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九年              | 八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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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6 | 丙子 | 甘露 元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吳改元太平        | 十年              | 九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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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7 | 丁丑 | 甘露 二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十一年            | 十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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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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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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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8 | 무진 | 정시 9년         | 첨해이사금 2년   | 동천왕 22년      | 고이왕 15년         |

|      |      |                  |                  | 동천왕 사망.     |                     |

|      |      |                  |                  | 중천왕 연불      |                     |

|      |      |                  |                  | 즉위 원년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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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49 | 기사 | 위 가평 원년     | 첨해이사금 3년   | 중천왕 2년       | 고이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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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0 | 경오 | 가평 2년         | 첨해이사금 4년   | 중천왕 3년       | 고이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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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1 | 신미 | 가평 3년         | 첨해이사금 5년   | 중천왕 4년       | 고이왕 18년         |

|      |      | 오의 연호        |                  |                  |                     |

|      |      | 태원으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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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2 | 임신 | 가평 4년         |첨해이사금 6년    | 중천왕 5년       | 고이왕 19년         |

|      |      | 오의 회계왕      |                  |                  |                     |

|      |      | 양 즉위.         |                  |                  |                     |

|      |      | 연호를 건흥으로  |                  |                  |                     |

|      |      |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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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3 | 계유 | 가평 5년         | 첨해이사금 7년   | 중천왕 6년       | 고이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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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4 | 갑술 | 가평 6년         | 첨해이사금 8년   | 중천왕 7년       | 고이왕 21년         |

|      |      | 고귀향공 모위    |                  |                  |                     |

|      |      | 정원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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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5 | 을해 | 정원 2년         | 첨해이사금 9년   | 중천왕 8년       | 고이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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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6 | 병자 | 감로 원년        | 첨해이사금10년   | 중천왕 9년       | 고이왕 23년         |

|      |      | 오의 연호를 태평 |                  |                  |                     |

|      |      | 으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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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7 | 정축 | 감로 2년         | 첨해이사금11년   | 중천왕 10년      | 고이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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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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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8 | 戊寅 | 甘露 三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蜀改元景耀. 吳    | 十二年            | 十一年            | 二十五年       |

|      |      | 主休立, 改元永安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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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9 | 己卯 | 甘露 四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十三年            | 十二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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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0 | 庚辰 | 甘露 五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陳留王奐,         | 十四年            | 十三年            | 二十七年       |

|      |      | (+魏)??景元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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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1 | 辛巳 | 景元 二年         | 沾解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十五年            | 十四年            | 二十八年       |

|      |      |                   | 沾解尼師今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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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2 | 壬午 | 景元 三年         | 味鄒尼師今卽位    | 中川王            | 古爾王         |

|      |      |                   | 元年              | 十五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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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3 | 癸未 | 景元 四年 蜀改    | 味鄒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元炎異{興}??      | 二年              | 十六年            | 三十年         |

|      |      | 十月, 降於魏.     |                   |                   |                |

|      |      | 蜀二主四十三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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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4 | 甲申 | 咸熙元年  吳主    | 味鄒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孫皓立, 改元元    |  三年             | 十七年            | 三十一年       |

|      |      | 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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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5 | 乙酉 | 咸熙 二年         | 味鄒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魏禪于晉. 西晉    | 四年              | 十八年            | 三十二年       |

|      |      | 世祖武皇帝炎泰    |                   |                   |                |

|      |      | 始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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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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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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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8 | 무인 | 감로 3년         | 첨해이사금12년   | 중천왕 11년      | 고이왕 25년         |

|      |      | 촉의 연호를      |                  |                  |                     |

|      |      | 경요로 개칭.     |                  |                  |                     |

|      |      | 오주 휴 즉위.    |                  |                  |                     |

|      |      | 연호를 영안으로  |                  |                  |                     |

|      |      | 개칭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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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59 | 기묘 | 감로 4년         | 첨해이사금13년   | 중천왕 12년      | 고이왕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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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0 | 경진 | 감로 5년         | 첨해이사금14년   | 중천왕 13년      | 고이왕 27년         |

|      |      | 진류왕 환위      |                  |                  |                     |

|      |      | 경원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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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1 | 신사 | 경원 2년         | 첨해이사금15년   | 중천왕 14년      | 고이왕 28년         |

|      |      |                  | 첨해이사금 사망.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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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2 | 임오 | 경원 3년         | 미추이사금즉위   | 중천왕 15년      | 고이왕 29년         |

|      |      |                  | 원년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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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3 | 계미 | 경원 4년         | 미추이사금 2년   | 중천왕 16년      | 고이왕 30년         |

|      |      | 촉의 연호        |                  |                  |                     |

|      |      | 염흥으로 개칭    |                  |                  |                     |

|      |      | 10월, 위에 항복. |                  |                  |                     |

|      |      | 촉은 2대 43년만  |                  |                  |                     |

|      |      | 에 멸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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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4 | 갑신 | 함희 원년 오주   | 미추이사금 3년   | 중천왕 17년      | 고이왕 31년         |

|      |      | 손호 즉위.       |                  |                  |                     |

|      |      | 연호를 원흥으로  |                  |                  |                     |

|      |      |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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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5 | 을유 | 함희 2년         | 미추이사금 4년   | 중천왕 18년      | 고이왕 32년         |

|      |      | 위가 진에 나라   |                  |                  |                     |

|      |      | 를 양도. 서진    |                  |                  |                     |

|      |      | 세조 무황제 염   |                  |                  |                     |

|      |      | 태시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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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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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6 | 丙戌 | 泰始 二年         | 味鄒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吳改元寶鼎        | 五年              | 十九年            | 三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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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7 | 丁亥 | 泰始 三年         | 味鄒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六年              | 二十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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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8 | 戊子 | 泰始 四年         | 味鄒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七年              | 二十一年          | 三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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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9 | 己丑 | 泰始 五年         | 味鄒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吳改元建衡        | 八年              | 二十二年          | 三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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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0 | 庚寅 | 泰始 六年         | 味鄒尼師今        | 中川王            | 古爾王         |

|      |      |                   | 九年              | 二十三年          | 三十七年       |

|      |      |                   |                   | 中川王薨  西川    |                |

|      |      |                   |                   | 王藥盧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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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1 | 辛卯 | 泰始 七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十年              | 二年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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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2 | 壬辰 | 泰始 八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吳改元鳳凰        | 十一年            | 三年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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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3 | 癸巳 | 泰始 九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十二年            | 四年              | 四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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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4 | 甲午 | 泰始 十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十三年            | 五年              | 四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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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卷第二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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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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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6 | 병술 | 태시 2년         | 미추이사금 5년   | 중천왕 19년      | 고이왕 33년         |

|      |      | 오에서 연호를    |                  |                  |                     |

|      |      | 보정으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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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7 | 정해 | 태시 3년         | 미추이사금 6년   | 중천왕 20년      | 고이왕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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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8 | 무자 | 태시 4년         | 미추이사금 7년   | 중천왕 21년      | 고이왕 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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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69 | 기축 | 태시 5년         | 미추이사금 8년   | 중천왕 22년      | 고이왕 36년         |

|      |      | 오에서 연호를    |                  |                  |                     |

|      |      | 건형으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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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0 | 경인 | 태시 6년         | 미추이사금 9년   | 중천왕 23년      | 고이왕 37년         |

|      |      |                  |                  | 중천왕 사망.     |                     |

|      |      |                  |                  | 서천왕 약노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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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1 | 신묘 | 태시 7년         | 미추이사금10년   | 서천왕 2년       | 고이왕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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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2 | 임진 | 태시 8년         | 미추이사금11년   | 서천왕 3년       | 고이왕 39년         |

|      |      | 오의 연호        |                  |                  |                     |

|      |      | 봉황으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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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3 | 계사 | 태시 9년         | 미추이사금12년   | 서천왕 4년       | 고이왕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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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4 | 갑오 | 태시 10년        | 미추이사금13년   | 서천왕 5년       | 고이왕 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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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 29 끝




三國史記卷第三十.



삼국사기 권  제 30


年表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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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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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5 | 乙未 | 西晋, 咸寧元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吳改元天冊        | 十四年            | 六年               | 四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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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6 | 丙申 | 咸寧 二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吳改元天璽        | 十五年            | 七年               | 四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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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7 | 丁酉 | 咸寧 二{三}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吳改元天紀        | 十六年            | 八年               | 四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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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8 | 戊戌 | 咸寧 四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十七年            | 九年               | 四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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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9 | 己亥 | 咸寧 五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十八年            | 十年               | 四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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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0 | 庚子 | 太康 元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吳主隆於晉, 吳    | 十九年            | 十一年             | 四十七年       |

|      |      | 四主五十九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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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1 | 辛丑 | 太康 二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十二年      | 古爾王         |

|      |      |                   | 二十年            |                    | 四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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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2 | 壬寅 | 太康 三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二十一年          | 十三年             | 四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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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3 | 癸卯 | 太康 四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二十二年          | 十四年             | 五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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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연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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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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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5 | 을미 | 서진 함녕 원년    | 미추이사금14년    | 서천왕 6년       | 고이왕 42년       |

|      |      | 오의 연호를       |                   |                  |                   |

|      |      | 천책으로 개칭.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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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6 | 병신 | 함녕 2년          | 미추이사금15년    | 서천왕 7년       | 고이왕 43년       |

|      |      | 오의 연호를       |                   |                  |                   |

|      |      | 천새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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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7 | 정유 | 함녕 3년          | 미추이사금16년    | 서천왕 8년       | 고이왕 44년       |

|      |      | 오의 연호를       |                   |                  |                   |

|      |      | 천기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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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8 | 무술 | 함녕 4년          | 미추이사금17년    | 서천왕 9년       | 고이왕 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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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79 | 기해 | 함녕 5년          | 미추이사금18년    | 서천왕 10년      | 고이왕 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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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0 | 경자 | 태강 원년 오주    | 미추이사금19년    | 서천왕 11년      | 고이왕 47년       |

|      |      | 가 진에 항복.     |                   |                  |                   |

|      |      | 오는 4대          |                   |                  |                   |

|      |      | 59년이었음.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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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1 | 신축 | 태강 2년          | 미추이사금20년    | 서천왕 12년      | 고이왕 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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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2 | 임인 | 태강 3년          | 미추이사금21년    | 서천왕 13년      | 고이왕 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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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3 | 계묘 | 태강 4년          | 미추이사금22년    | 서천왕 14년      | 고이왕 5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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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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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4 | 甲辰 | 太康 五年         | 味鄒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二十三年          | 十五年             | 五十一年       |

|      |      |                   | 味鄒尼師今薨      |                    |                |

|      |      |                   | 儒禮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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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5 | 乙巳 | 太康 六年         | 儒禮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二年              | 十六年             | 五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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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6 | 丙午 | 太康 七年         | 儒禮尼師今        | 西川王             | 古爾王         |

|      |      |                   | 三年              | 十七年             | 五十三年       |

|      |      |                   |                   |                    | 古爾王薨       |

|      |      |                   |                   |                    | 責稽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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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7 | 丁未 | 太康 八年         | 儒禮尼師今        | 西川王             | 責稽王         |

|      |      |                   | 四年              | 十八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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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8 | 戊申 | 太康 九年         | 儒禮尼師今        | 西川王 十九年      | 責稽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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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9 | 己酉 | 太康 十年         | 儒禮尼師今        | 西川王             | 責稽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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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0 | 庚戌 | 太熙 元年         | 儒禮尼師今        | 西川王             | 責稽王         |

|      |      | 孝惠帝衷, 永熙    | 七年              | 二十一年           | 五年           |

|      |      |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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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1 | 辛亥 | 永平 元年         | 儒禮尼師今        | 西川王             | 責稽王         |

|      |      | 元康 元年         | 八年              | 二十二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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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2 | 壬子 | 元康 二年         | 儒禮尼師今        | 西川王             | 責稽王         |

|      |      |                   | 九年              | 二十三年           | 七年           |

|      |      |                   |                   | 西川王薨  烽上     |                |

|      |      |                   |                   | 王相夫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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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3 | 癸丑 | 元康 三年         | 儒禮尼師今        | 烽上王             | 責稽王         |

|      |      |                   | 十年              | 二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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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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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4 | 갑진 | 태강 5년          | 미추이사금23년    | 서천왕 15년      | 고이왕 51년       |

|      |      |                   | 미추이사금 사망.  |                  |                   |

|      |      |                   | 유례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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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5 | 을사 | 태강 6년          | 유례이사금 2년    | 서천왕 16년      | 고이왕 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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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6 | 병오 | 태강 7년          | 유례이사금 3년    | 서천왕 17년      | 고이왕 53년       |

|      |      |                   |                   |                  | 고이왕 사망.      |

|      |      |                   |                   |                  | 책계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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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7 | 정미 | 태강 8년          | 유례이사금 4년    | 서천왕 18년      | 책계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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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8 | 무신 | 태강 9년          | 유례이사금 5년    | 서천왕 19년      | 책계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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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89 | 기유 | 태강 10년         | 유례이사금 6년    | 서천왕 20년      | 책계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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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0 | 경술 | 태희 원년         | 유례이사금 7년    | 서천왕 21년      | 책계왕 5년        |

|      |      | 효혜제 충         |                   |                  |                   |

|      |      | 영희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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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1 | 신해 | 영평 원년         | 유례이사금 8년    | 서천왕 22년      | 책계왕 6년        |

|      |      | 원강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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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2 | 임자 | 원강 2년          | 유례이사금 9년    | 서천왕 23년      | 책계왕 7년        |

|      |      |                   |                   | 서천왕 사망.     |                   |

|      |      |                   |                   | 봉상왕 상부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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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3 | 계축 | 원강 3년          | 유례이사금 10년   | 봉상왕 2년       | 책계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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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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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4 | 甲寅 | 元康 四年         | 儒禮尼師今        | 烽上王             | 責稽王         |

|      |      |                   | 十一年            | 三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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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5 | 乙卯 | 元康 五年         | 儒禮尼師今        | 烽上王             | 責稽王         |

|      |      |                   | 十二年            | 四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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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6 | 丙辰 | 元康 六年         | 儒禮尼師今        | 烽上王             | 責稽王         |

|      |      |                   | 十三年            | 五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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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7 | 丁巳 | 元康 七年         | 儒禮尼師今        | 烽上王             | 責稽王         |

|      |      |                   | 十四年            | 六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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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8 | 戊午 | 元康 八年         | 儒禮尼師今        | 烽上王             | 責稽王         |

|      |      |                   | 十五年            | 七年               | 十三年         |

|      |      |                   | 儒禮尼師今薨      |                    | 責稽王薨       |

|      |      |                   | 基臨尼師今卽位    |                    | 汾西王卽位     |

|      |      |                   | 元年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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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9 | 己未 | 元康 九年         | 基臨尼師今        | 烽上王             | 汾西王         |

|      |      |                   | 二年              | 八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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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0 | 庚申 | 永康 元年         | 基臨尼師今        | 烽上王             | 汾西王         |

|      |      |                   | 三年              | 九年               | 三年           |

|      |      |                   |                   | 烽上王薨  美川王   |                |

|      |      |                   |                   | (  )(  ){乙弗}??   |                |

|      |      |                   |                   | 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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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1 | 辛酉 | 永寧 元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汾西王         |

|      |      |                   | 四年              | 二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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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2 | 壬戌 | 太安 元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汾西王         |

|      |      |                   | 五年              | 三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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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3 | 癸亥 | 太安 二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汾西王         |

|      |      |                   | 六年              | 四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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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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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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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4 | 갑인 | 원강 4년          | 유례이사금11년    | 봉상왕 3년       | 책계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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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5 | 을묘 | 원강 5년          | 유례이사금12년    | 봉상왕 4년       | 책계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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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6 | 병진 | 원강 6년          | 유례이사금13년    | 봉상왕 5년       | 책계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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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7 | 정사 | 원강 7년          | 유례이사금14년    | 봉상왕 6년       | 책계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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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8 | 무오 | 원강 8년          | 유례이사금15년    | 봉상왕 7년       | 책계왕 13년       |

|      |      |                   | 유례이사금 사망.  |                  | 책계왕 사망.      |

|      |      |                   | 기림이사금 즉위   |                  | 분서왕 즉위       |

|      |      |                   | 원년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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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299 | 기미 | 원강 9년          | 기림이사금 2년    | 봉상왕 8년       | 분서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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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0 | 경신 | 영강 원년         | 기림이사금 3년    | 봉상왕 9년       | 분서왕 3년        |

|      |      |                   |                   | 봉상왕 사망.     |                   |

|      |      |                   |                   | 미천왕 을불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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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1 | 신유 | 영녕 원년         | 기림이사금 4년    | 미천왕 2년       | 분서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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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2 | 임술 | 태안 원년         | 기림이사금 5년    | 미천왕 3년       | 분서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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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3 | 계해 | 태안 2년          | 기림이사금 6년    | 미천왕 4년       | 분서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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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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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4 | 甲子 | 永安 元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汾西王         |

|      |      | 建武 元年         | 七年              | 五年               | 七年           |

|      |      | 永興 元年         |                   |                    | 汾西王薨       |

|      |      |                   |                   |                    | 比流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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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5 | 乙丑 | 永興 二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八年              | 六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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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6 | 丙寅 | 光熙 元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孝懷帝熾          | 九年              | 七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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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7 | 丁卯 | 永嘉 元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年              | 八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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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8 | 戊辰 | 永嘉 二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一年            | 九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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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9 | 己巳 | 永嘉 三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二年            | 十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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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0 | 庚午 | 永嘉 四年         | 基臨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三年            | 十一年             | 七年           |

|      |      |                   | 基臨尼師今薨      |                    |                |

|      |      |                   | 訖解尼師今(  )    |                    |                |

|      |      |                   | {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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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1 | 辛未 | 永嘉 五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二年              | 十二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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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2 | 壬申 | 永嘉 六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三年              | 十三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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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3 | 癸酉 | 孝愍皇帝업, 建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興元年            | 四年              | 十四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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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4 | 甲戌 | 建興 二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五年              | 十五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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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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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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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4 | 갑자 | 영안 원년         | 기림이사금 7년    | 미천왕 5년       | 분서왕 7년        |

|      |      | 건무 원년         |                   |                  | 분서왕 사망.      |

|      |      | 영흥 원년         |                   |                  | 비류왕이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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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5 | 을축 | 영흥 2년          | 기림이사금 8년    | 미천왕 6년       | 비류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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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6 | 병인 | 광희 원년         | 기림이사금 9년    | 미천왕 7년       | 비류왕 3년        |

|      |      | 효회제 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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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7 | 정묘 | 영가 원년         | 기림이사금10년    | 미천왕 8년       | 비류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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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8 | 무진 | 영가 2년          | 기림이사금11년    | 미천왕 9년       | 비류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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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09 | 기사 | 영가 3년          | 기림이사금12년    | 미천왕 10년      | 비류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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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0 | 경오 | 영가 4년          | 기림이사금13년    | 미천왕 11년      | 비류왕 7년        |

|      |      |                   | 기림이사금 사망.  |                  |                   |

|      |      |                   | 흘해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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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1 | 신미 | 영가 5년          | 흘해이사금 2년    | 미천왕 12년      | 비류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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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2 | 임신 | 영가 6년          | 흘해이사금 3년    | 미천왕 13년      | 비류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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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3 | 계유 | 효민 황제 업      | 흘해이사금 4년    | 미천왕 14년      | 비류왕 10년       |

|      |      | 건흥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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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4 | 갑술 | 건흥 2년          | 흘해이사금 5년    | 미천왕 15년      | 비류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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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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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5 | 乙亥 | 建興 三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六年              | 十六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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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6 | 丙子 | 建興五{四}??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前趙劉曜陷長安,   | 七年              | 十七年             | 十三年         |

|      |      | 愍帝明年, 爲劉    |                   |                    |                |

|      |      | 聰所殺, 西晉四主  |                   |                    |                |

|      |      | 五十二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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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7 | 丁丑 | 建興 五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東晉中宗元皇帝    | 八年              | 十八年             | 十四年         |

|      |      | 睿  建武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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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8 | 戊寅 | 太興 元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九年              | 十九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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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9 | 己卯 | 太興 二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年              | 二十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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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0 | 庚辰 | 太興 三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一年            | 二十一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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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1 | 辛巳 | 太興 四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二年            | 二十二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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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2 | 壬午 | 永昌 元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三年            | 二十三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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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3 | 癸未 | 肅宗皇帝紹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永寧 元年         | 十四年            | 二十四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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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4 | 甲申 | 永寧 二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五年            | 二十五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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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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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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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5 | 을해 | 건흥 3년          | 흘해이사금 6년    | 미천왕 16년      | 비류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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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6 | 병자 | 건흥 4년          | 흘해이사금 7년    | 미천왕 17년      | 비류왕 13년       |

|      |      | 전조의 유요       |                   |                  |                   |

|      |      | 장안을 함락.      |                   |                  |                   |

|      |      | 민제가 다음해에   |                   |                  |                   |

|      |      | 유총에게 피살됨.  |                   |                  |                   |

|      |      | 서진은 4대        |                   |                  |                   |

|      |      | 52년이었음.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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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7 | 정축 | 건흥 5년          | 흘해이사금 8년    | 미천왕 18년      | 비류왕 14년       |

|      |      | 동진 중종         |                   |                  |                   |

|      |      | 원황제 예.        |                   |                  |                   |

|      |      | 건무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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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8 | 무인 | 태흥 원년         | 흘해이사금 9년    | 미천왕 19년      | 비류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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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19 | 기묘 | 태흥 2년          | 흘해이사금10년    | 미천왕 20년      | 비류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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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0 | 경진 | 태흥 3년          | 흘해이사금11년    | 미천왕 21년      | 비류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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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1 | 신사 | 태흥 4년          | 흘해이사금12년    | 미천왕 22년      | 비류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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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2 | 임오 | 영창 원년         | 흘해이사금13년    | 미천왕 23년      | 비류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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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3 | 계미 | 숙종 황제 소      | 흘해이사금14년    | 미천왕 24년      | 비류왕 20년       |

|      |      | 영녕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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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4 | 갑신 | 영녕 2년          | 흘해이사금15년    | 미천왕 25년      | 비류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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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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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5 | 乙酉 | 永寧 三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顯宗皇帝衍        | 十六年            | 二十六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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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6 | 丙戌 | 咸和 元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七年            | 二十七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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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7 | 丁亥 | 咸和 二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八年            | 二十八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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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8 | 戊子 | 咸和 三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十九年            | 二十九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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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9 | 己丑 | 咸和 四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二十年            | 三十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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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0 | 庚寅 | 咸和 五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二十一年          | 三十一年           | 二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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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1 | 辛卯 | 咸和 六年         | 訖解尼師今        | 美川王             | 比流王         |

|      |      |                   | 二十二年          | 三十二年           | 二十八年       |

|      |      |                   |                   | 美川王薨 故國      |                |

|      |      |                   |                   | 原王斯由卽位元     |                |

|      |      |                   |                   | 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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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2 | 壬辰 | 咸和 七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二十三年          | 二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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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3 | 癸巳 | 咸和 八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二十四年          | 三年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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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4 | 甲午 | 咸和 九年         | 訖解尼師今        | 故國元王           | 比流王         |

|      |      |                   | 二十五年          | 四年               | 三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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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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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5 | 을유 | 영녕 3년          | 흘해이사금16년    | 미천왕 26년      | 비류왕 22년       |

|      |      | 현종 황제 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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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6 | 병술 | 함화 원년         | 흘해이사금17년    | 미천왕 27년      | 비류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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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7 | 정해 | 함화 2년          | 흘해이사금18년    | 미천왕 28년      | 비류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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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28 | 무자 | 함화 3년          | 흘해이사금19년    | 미천왕 29년      | 비류왕 25년       |

+------+------+-------------------+-------------------+------------------+-------------------+

|AD329 | 기축 | 함화 4년          | 흘해이사금20년    | 미천왕 30년      | 비류왕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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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0 | 경인 | 함화 5년          | 흘해이사금21년    | 미천왕 31년      | 비류왕 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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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1 | 신묘 | 함화 6년          | 흘해이사금22년    | 미천왕 32년      | 비류왕 28년       |

|      |      |                   |                   | 미천왕 사망.     |                   |

|      |      |                   |                   | 고국원왕 사유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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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2 | 임진 | 함화 7년          | 흘해이사금23년    | 고국원왕 2년     | 비류왕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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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3 | 계사 | 함화 8년          | 흘해이사금24년    | 고국원왕 3년     | 비류왕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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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4 | 갑오 | 함화 9년          | 흘해이사금25년    | 고국원왕 4년     | 비류왕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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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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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5 | 乙未 | 咸康 元年         | 訖解尼師今        | 故國元王           | 比流王         |

|      |      |                   | 二十六年          | 五年               | 三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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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6 | 丙申 | 咸康 二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二十七年          | 六年               | 三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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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7 | 丁酉 | 咸康 三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二十八年          | 七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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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8 | 戊戌 | 咸康 四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二十九年          | 八年               | 三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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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9 | 己亥 | 咸康 五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三十年            | 九年               | 三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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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0 | 庚子 | 咸康 六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三十一年          | 十年               | 三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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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1 | 辛丑 | 咸康 七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三十二年          | 十一年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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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2 | 壬寅 | 咸康 八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康皇帝岳          | 三十三年          | 十二年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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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3 | 癸卯 | 建元 元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 三十四年          | 十三年             | 四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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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4 | 甲辰 | 建元 二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比流王         |

|      |      | 孝宗穆皇帝        | 三十五年          | 十四年             | 四十一年       |

|      |      |                   |                   |                    | 比流王薨       |

|      |      |                   |                   |                    | 契王卽位元     |

|      |      |                   |                   |                    | 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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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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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5 | 을미 | 함강 원년         | 흘해이사금26년    | 고국원왕 5년     | 비류왕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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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6 | 병신 | 함강 2년          | 흘해이사금27년    | 고국원왕 6년     | 비류왕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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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7 | 정유 | 함강 3년          | 흘해이사금28년    | 고국원왕 7년     | 비류왕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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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8 | 무술 | 함강 4년          | 흘해이사금29년    | 고국원왕 8년     | 비류왕 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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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9 | 기해 | 함강 5년          | 흘해이사금30년    | 고국원왕 9년     | 비류왕 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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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0 | 경자 | 함강 6년          | 흘해이사금31년    | 고국원왕 10년    | 비류왕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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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1 | 신축 | 함강 7년          | 흘해이사금32년    | 고국원왕 11년    | 비류왕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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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2 | 임인 | 함강 8년          | 흘해이사금33년    | 고국원왕 12년    | 비류왕 39년       |

|      |      | 강황제 악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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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3 | 계묘 | 건원 원년         | 흘해이사금34년    | 고국원왕 13      | 비류왕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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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4 | 갑진 | 건원 2년          | 흘해이사금35년    | 고국원왕 14년    | 비류왕 41년       |

|      |      | 효종 목황제       |                   |                  | 비류왕 사망.      |

|      |      |                   |                   |                  | 설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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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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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5 | 乙巳 | 永和 元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契王           |

|      |      |                   | 三十六年          | 十五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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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6 | 丙午 | 永和 二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契王           |

|      |      |                   | 三十七年          | 十六年             | 三年           |

|      |      |                   |                   |                    | 契王薨         |

|      |      |                   |                   |                    | 近肖古王卽     |

|      |      |                   |                   |                    | 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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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7 | 丁未 | 永和 三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三十八年          | 十七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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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8 | 戊申 | 永和 四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三十九年          | 十八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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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9 | 己酉 | 永和 五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十年            | 十九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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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0 | 庚戌 | 永和 六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十一年          | 二十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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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1 | 辛亥 | 永和 七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十二年          | 二十一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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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2 | 壬子 | 永和 八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十三年          | 二十二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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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3 | 癸丑 | 永和 九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十四年          | 二十三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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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4 | 甲寅 | 永和 十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十五年          | 二十四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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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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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5 | 을사 | 영화 원년         | 흘해이사금36년    | 고국원왕 15년    | 설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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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6 | 병오 | 영화 2년          | 흘해이사금37년    | 고국원왕 16년    | 설왕 3년          |

|      |      |                   |                   |                  | 설왕 사망.        |

|      |      |                   |                   |                  | 근초고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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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7 | 정미 | 영화 3년          | 흘해이사금38년    | 고국원왕 17년    | 근초고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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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8 | 무신 | 영화 4년          | 흘해이사금39년    | 고국원왕 18년    | 근초고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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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49 | 기유 | 영화 5년          | 흘해이사금40년    | 고국원왕 19년    | 근초고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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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0 | 경술 | 영화 6년          | 흘해이사금41년    | 고국원왕 20년    | 근초고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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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1 | 신해 | 영화 7년          | 흘해이사금42년    | 고국원왕 21년    | 근초고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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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2 | 임자 | 영화 8년          | 흘해이사금43년    | 고국원왕 22년    | 근초고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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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3 | 계축 | 영화 9년          | 흘해이사금44년    | 고국원왕 23년    | 근초고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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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4 | 갑인 | 영화 10년         | 흘해이사금45년    | 고국원왕 24년    | 근초고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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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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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5 | 乙卯 | 永和 十一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十六年          | 二十五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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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6 | 丙辰 | 永和 十二年       | 訖解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十七年          | 二十六年           | 十一年         |

|      |      |                   | 訖解尼師今薨      |                    |                |

|      |      |                   | 奈勿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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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7 | 丁巳 | 升平 元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二年              | 二十七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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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8 | 戊午 | 升平 二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三年              | 二十八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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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9 | 己未 | 升平 三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四年              | 二十九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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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0 | 庚申 | 升平 四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五年              | 三十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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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1 | 辛酉 | 升平 五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哀皇帝丕          | 六年              | 三十一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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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2 | 壬戌 | 隆和 元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七年              | 三十二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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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3 | 癸亥 | 興寧 元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八年              | 三十三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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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4 | 甲子 | 興寧 二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九年              | 三十四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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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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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5 | 을묘 | 영화 11년         | 흘해이사금46년    | 고국원왕 25년    | 근초고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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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6 | 병진 | 영화 12년         | 흘해이사금47년    | 고국원왕 26년    | 근초고왕 11년     |

|      |      |                   | 흘해이사금 사망.  |                  |                   |

|      |      |                   | 나물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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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7 | 정사 | 승평 원년         | 나물이사금 2년    | 고국원왕 27년    | 근초고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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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8 | 무오 | 승평 2년          | 나물이사금 3년    | 고국원왕 28년    | 근초고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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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59 | 기미 | 승평 3년          | 나물이사금 4년    | 고국원왕 29년    | 근초고왕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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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0 | 경신 | 승평 4년          | 나물이사금 5년    | 고국원왕 30년    | 근초고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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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1 | 신유 | 승평 5년          | 나물이사금 6년    | 고국원왕 31년    | 근초고왕 16년     |

|      |      | 애황제 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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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2 | 임술 | 융화 원년         | 나물이사금 7년    | 고국원왕 32년    | 근초고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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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3 | 계해 | 흥녕 원년         | 나물이사금 8년    | 고국원왕 33년    | 근초고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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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4 | 갑자 | 흥녕 2년          | 나물이사금 9년    | 고국원왕 34년    | 근초고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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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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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5 | 乙丑 | 興寧 三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廢帝海(+西公)??   | 十年              | 三十五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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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6 | 丙寅 | 太和 元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十一年            | 三十六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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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7 | 丁卯 | 太和 二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十二年            | 三十七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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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8 | 戊辰 | 太和 三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十三年            | 三十八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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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9 | 己巳 | 太和 四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十四年            | 三十九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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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0 | 庚午 | 太和 五年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 十五年            | 四十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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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1 | 辛未 | 簡文皇帝          | 奈勿尼師今        | 故國原王           | 近肖古王       |

|      |      | 咸安 元年         | 十六年            | 四十一年           | 二十六年       |

|      |      |                   |                   | 故國原王薨  小     |                |

|      |      |                   |                   | 獸林王丘夫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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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2 | 壬申 | 咸安 二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肖古王       |

|      |      | 孝武皇帝曜        | 十七年            | 二年               | 二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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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3 | 癸酉 | 寧康 元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肖古王       |

|      |      |                   | 十八年            | 三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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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4 | 甲戌 | 寧康 二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肖古王       |

|      |      |                   | 十九年            | 四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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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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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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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5 | 을축 | 흥녕 3년          | 나물이사금10년    | 고국원왕 35년    | 근초고왕 20년     |

|      |      | 폐제 해서공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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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6 | 병인 | 태화 원년         | 나물이사금11년    | 고국원왕 36년    | 근초고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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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7 | 정묘 | 태화 2년          | 나물이사금12년    | 고국원왕 37년    | 근초고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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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8 | 무진 | 태화 3년          | 나물이사금13년    | 고국원왕 38년    | 근초고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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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69 | 기사 | 태화 4년          | 나물이사금14년    | 고국원왕 39년    | 근초고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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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0 | 경오 | 태화 5년          | 나물이사금15년    | 고국원왕 40년    | 근초고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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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1 | 신미 | 간문황제          | 나물이사금16년    | 고국원왕 41년    | 근초고왕 26년     |

|      |      | 함안 원년         |                   | 고국원왕 사망.   |                   |

|      |      |                   |                   | 소수림왕 구부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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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2 | 임신 | 함안 2년          | 나물이사금17년    | 소수림왕 2년     |근초고왕 27년      |

|      |      |   효무황제 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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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3 | 계유 | 영강 원년         | 나물이사금18년    | 소수림왕 3년     |근초고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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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4 | 갑술 | 영강 2년          | 나물이사금19년    | 소수림왕 4년     |근초고왕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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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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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5 | 乙亥 | 寧康 三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肖古王       |

|      |      |                   | 二十年            | 五年               | 三十年         |

|      |      |                   |                   |                    | 近肖古王薨     |

|      |      |                   |                   |                    | 近仇首王卽     |

|      |      |                   |                   |                    | 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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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6 | 丙子 | 太元 元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一年          | 六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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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7 | 丁丑 | 太元 二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二年          | 七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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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8 | 戊寅 | 太元 三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三年          | 八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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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9 | 己卯 | 太元 四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四年          | 九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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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0 | 庚辰 | 太元 五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五年          | 十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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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1 | 辛巳 | 太元 六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六年          | 十一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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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2 | 壬午 | 太元 七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七年          | 十二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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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3 | 癸未 | 太元 八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八年          | 十三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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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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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5 | 을해 | 영강 3년          | 나물이사금20년    | 소수림왕 5년     |근초고왕 30년      |

|      |      |                   |                   |                  |근초고왕 사망.     |

|      |      |                   |                   |                  |근구수왕 즉위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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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6 | 병자 | 태원 원년         | 나물이사금21년    | 소수림왕 6년     | 근구수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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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7 | 정축 | 태원 2년          | 나물이사금22년    | 소수림왕 7년     | 근구수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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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8 | 무인 | 태원 3년          | 나물이사금23년    | 소수림왕 8년     | 근구수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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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79 | 기묘 | 태원 4년          | 나물이사금24년    | 소수림왕 9년     | 근구수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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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0 | 경진 | 태원 5년          | 나물이사금25년    | 소수림왕 10년    | 근구수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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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1 | 신사 | 태원 6년          | 나물이사금26년    | 소수림왕 11년    | 근구수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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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2 | 임오 | 태원 7년          | 나물이사금27년    | 소수림왕 12년    | 근구수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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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3 | 계미 | 태원 8년          | 나물이사금28년    | 소수림왕 13년    | 근구수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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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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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4 | 甲申 | 太元 九年         | 奈勿尼師今        | 小獸林王           | 近仇首王       |

|      |      |                   | 二十九年          | 十四年             | 十年           |

|      |      |                   |                   | 小獸林王薨         | 近仇首王薨     |

|      |      |                   |                   | 故國壤王伊連       | 枕流王卽位     |

|      |      |                   |                   | 卽位元年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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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5 | 乙酉 | 太元 十年         | 奈勿尼師今        | 故國壤王           | 枕流王         |

|      |      |                   | 三十年            | 二年               | 二年           |

|      |      |                   |                   |                    | 구流王{枕流    |

|      |      |                   |                   |                    | 王}??薨  辰斯  |

|      |      |                   |                   |                    | 王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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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6 | 丙戌 | 太元 十一年       | 奈勿尼師今        | 故國壤王           | 辰斯王         |

|      |      |                   | 三十一年          | 三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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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7 | 丁亥 | 太元 十二年       | 奈勿尼師今        | 故國壤王           | 辰斯王         |

|      |      |                   | 三十二年          | 四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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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8 | 戊子 | 太元 十三年       | 奈勿尼師今        | 故國壤王           | 辰斯王         |

|      |      |                   | 三十三年          | 五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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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9 | 己丑 | 太元 十四年       | 奈勿尼師今        | 故國壤王           | 辰斯王         |

|      |      |                   | 三十四年          | 六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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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0 | 庚寅 | 太元 十五年       | 奈勿尼師今        | 故國壤王           | 辰斯王         |

|      |      |                   | 三十五年          | 七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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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1 | 辛卯 | 太元 十六年       | 奈勿尼師今        | 故國壤王           | 辰斯王         |

|      |      |                   | 三十六年          | 八年               | 七年           |

|      |      |                   |                   | (+永樂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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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2 | 壬辰 | 太元 十七年       | 奈勿尼師今        | 故國壤王           | 辰斯王         |

|      |      |                   | 三十七年          | 九年               | 八年           |

|      |      |                   |                   | 故國壤王薨 (-廣    | 辰斯王薨       |

|      |      |                   |                   | 開土王談德卽位     | 阿莘王卽位     |

|      |      |                   |                   | 元年)??            | 元年           |

|      |      |                   |                   | (+永樂 二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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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李丙燾는, 廣開土大王碑에 의하면, 즉위년도가 일년 전인 辛卯年이므로 전 왕의 재위는 8년을 넘지 않는다고 보았다.

趙炳舜은 廣開土大王碑銘을 근거로 하여, 廣開土大王의 즉위년도를 이보다 일년 전인 辛卯年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이 10자가 삭제되어야 한다고 본다.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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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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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4 | 갑신 | 태원 9년          | 나물이사금29년    | 소수림왕 14년    | 근구수왕 10년     |

|      |      |                   |                   | 소수림왕 사망.   | 근구수왕 사망.    |

|      |      |                   |                   | 고국양왕 이련    | 침류왕 즉위       |

|      |      |                   |                   | 즉위 원년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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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5 | 을유 | 태원 10년         | 나물이사금30년    | 고국양왕 2년     | 침류왕 2년        |

|      |      |                   |                   |                  | 침류왕 사망.      |

|      |      |                   |                   |                  | 진사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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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6 | 병술 | 태원 11년         | 나물이사금31년    | 고국양왕 3년     | 진사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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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7 | 정해 | 태원 12년         | 나물이사금32년    | 고국양왕 4년     | 진사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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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8 | 무자 | 태원 13년         | 나물이사금33년    | 고국양왕 5년     | 진사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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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89 | 기축 | 태원 14년         | 나물이사금34년    | 고국양왕 6년     | 진사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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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0 | 경인 | 태원 15년         | 나물이사금35년    | 고국양왕 7년     | 진사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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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1 | 신묘 | 태원 16년         | 나물이사금36년    | 고국양왕 8년     | 진사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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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2 | 임진 | 태원 17년         | 나물이사금37년    | 고국양왕 9년     | 진사왕 8년        |

|      |      |                   |                   | 고국양왕 사망.   | 진사왕 사망.      |

|      |      |                   |                   | 광개토왕 담덕    | 아신왕 즉위       |

|      |      |                   |                   | 즉위 원년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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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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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3 | 癸巳 | 太元 十八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三十八年          | 二年               | 二年           |

|      |      |                   |                   | (+永樂 三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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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4 | 甲午 | 太元 十九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三十九年          | 三年               | 三年           |

|      |      |                   |                   | (+永樂 四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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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5 | 乙未 | 太元 二十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四十年            | 四年               | 四年           |

|      |      |                   |                   | (+永樂 五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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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6 | 丙申 | 太元 二十一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諱德宗安皇帝      | 四十一年          | 五年               | 五年           |

|      |      |                   |                   | (+永樂 六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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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7 | 丁酉 | 隆安 元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四十二年          | 六年               | 六年           |

|      |      |                   |                   | (+永樂 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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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8 | 戊戌 | 隆安 二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四十三年          | 七年               | 七年           |

|      |      |                   |                   | (+永樂 八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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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9 | 己亥 | 隆安 三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四十四年          | 八年               | 八年           |

|      |      |                   |                   | (+永樂 九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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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0 | 庚子 | 隆安 四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四十五年          | 九年               | 九年           |

|      |      |                   |                   | (+永樂 十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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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1 | 辛丑 | 隆安 五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四十六年          | 十年               | 十年           |

|      |      |                   |                   | (+永樂 十一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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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2 | 壬寅 | 元興 元年         | 奈勿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四十七年          | 十一年             | 十一年         |

|      |      |                   | 奈勿尼師今薨      | (+永樂 十二年)??   |                |

|      |      |                   | 實聖尼師今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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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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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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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3 | 계사 | 태원 18년         | 나물이사금38년    | 광개토왕 2년     | 아신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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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4 | 갑오 | 태원 19년         | 나물이사금39년    | 광개토왕 3년     | 아신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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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5 | 을미 | 태원 20년         | 나물이사금40년    | 광개토왕 4년     | 아신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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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6 | 병신 | 태원 21년         | 나물이사금41년    | 광개토왕 5년     | 아신왕 5년        |

|      |      | 휘 덕종안황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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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7 | 정유 | 융안 원년         | 나물이사금42년    | 광개토왕 6년     | 아신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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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8 | 무술 | 융안 2년          | 나물이사금43년    | 광개토왕 7년     | 아신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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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9 | 기해 | 융안 3년          | 나물이사금44년    | 광개토왕 8년     | 아신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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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0 | 경자 | 융안 4년          | 나물이사금45년    | 광개토왕 9년     | 아신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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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1 | 신축 | 융안 5년          | 나물이사금46년    | 광개토왕 10년    | 아신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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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2 | 임인 | 원흥 원년         | 나물이사금47년    | 광개토왕 11년    | 아신왕 11년       |

|      |      |                   | 나물이사금 사망.  |                  |                   |

|      |      |                   | 실성이사금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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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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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3 | 癸卯 | 元興 二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二年              | 十二年             | 十二年         |

|      |      |                   |                   | (+永樂 十三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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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4 | 甲辰 | 元興 三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三年              | 十三年             | 十三年         |

|      |      |                   |                   | (+永樂 十四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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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5 | 乙巳 | 義熙 元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阿莘王         |

|      |      |                   | 四年              | 十四年             | 十四年         |

|      |      |                   |                   | (+永樂 十五年)??   | 阿莘王薨       |

|      |      |                   |                   |                    | 전支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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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6 | 丙午 | 義熙 二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전支王         |

|      |      |                   | 五年              | 十五年             | 二年           |

|      |      |                   |                   | (+永樂 十六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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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7 | 丁未 | 義熙 三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전支王         |

|      |      |                   | 六年              | 十六年             | 三年           |

|      |      |                   |                   | (+永樂 十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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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8 | 戊申 | 義熙 四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전支王         |

|      |      |                   | 七年              | 十七年             | 四年           |

|      |      |                   |                   | (+永樂 十八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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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9 | 己酉 | 義熙 五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전支王         |

|      |      |                   | 八年              | 十八年             | 五年           |

|      |      |                   |                   | (+永樂 十九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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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0 | 庚戌 | 義熙 六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전支王         |

|      |      |                   | 九年              | 十九年             | 六年           |

|      |      |                   |                   | (+永樂 二十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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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1 | 辛亥 | 義熙 七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전支王         |

|      |      |                   | 十年              | 二十年             | 七年           |

|      |      |                   |                   | (+永樂 二十一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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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2 | 壬子 | 義熙 八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전支王         |

|      |      |                   | 十一年            | 二十一年           | 八年           |

|      |      |                   |                   | (+永樂 二十二年)?? |                |

|      |      |                   |                   | (+廣開土大王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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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3 | 癸丑 | 義熙 九年         | 實聖尼師今        | 廣開土王           | 전支王         |

|      |      |                   | 十二年            | 二十二年           | 九年           |

|      |      |                   |                   | (-廣土王{廣開土王} |                |

|      |      |                   |                   | 薨)??  長壽王巨連  |                |

|      |      |                   |                   | 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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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趙炳舜은 廣開土大王碑銘에 근거하여 이 해에 廣開土大王이 사망하였다고 본다. 趙炳舜은 廣開土大王碑銘에 근거하여 廣開土大王이 사망한 시기는 이보다 일년 전인 壬子      年이므로 이 기사는 삭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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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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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3 | 계묘 | 원흥 2년          | 실성이사금 2년    | 광개토왕 12년    | 아신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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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4 | 갑진 | 원흥 3년          | 실성이사금 3년    | 광개토왕 13년    | 아신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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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5 | 을사 | 의희 원년         | 실성이사금 4년    | 광개토왕 14년    | 아신왕 14년       |

|      |      |                   |                   |                  | 아신왕 사망.      |

|      |      |                   |                   |                  | 전지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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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6 | 병오 | 의희 2년          | 실성이사금 5년    | 광개토왕 15년    | 전지왕 2년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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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7 | 정미 | 의희 3년          | 실성이사금 6년    | 광개토왕 16년    | 전지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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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8 | 무신 | 의희 4년          | 실성이사금 7년    | 광개토왕 17년    | 전지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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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09 | 기유 | 의희 5년          | 실성이사금 8년    | 광개토왕 18년    | 전지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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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0 | 경술 | 의희 6년          | 실성이사금 9년    | 광개토왕 19년    | 전지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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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1 | 신해 | 의희 7년          | 실성이사금10년    | 광개토왕 20년    | 전지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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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2 | 임자 | 의희 8년          | 실성이사금11년    | 광개토왕 21년    | 전지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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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3 | 계축 | 의희 9년          | 실성이사금12년    | 광개토왕 22년    | 전지왕 9년        |

|      |      |                   |                   | 광개토왕 사망.   |                   |

|      |      |                   |                   | 장수왕 거련 즉위 |                   |

|      |      |                   |                   |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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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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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4 | 甲寅 | 義熙 十年         | 實聖尼師今        | 長壽王             | 전支王         |

|      |      |                   | 十三年            | 二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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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5 | 乙卯 | 義熙 十一年       | 實聖尼師今        | 長壽王             | 전支王         |

|      |      |                   | 十四年            | 三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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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6 | 丙辰 | 義熙 十二年       | 實聖尼師今        | 長壽王             | 전支王         |

|      |      |                   | 十五年            | 四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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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7 | 丁巳 | 義熙 十三年       | 實聖尼師今        | 長壽王             | 전支王         |

|      |      |                   | 十六年            | 五年               | 十三年         |

|      |      |                   | 實聖尼師今薨      |                    |                |

|      |      |                   | 訥祇麻立干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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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8 | 戊午 | 義熙 十四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전支王         |

|      |      | 恭帝德文          | 二年              | 六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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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9 | 己未 | 元熙 元年  禪於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전支王         |

|      |      | 宋, 東晉十二主    | 二{三}??年        | 七年               | 十五年         |

|      |      | 百四年, 西秦改    |                   |                    |                |

|      |      | 元建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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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0 | 庚申 | 宋高祖武帝劉裕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전支王         |

|      |      | 永初 元年         | 四年              | 八年               | 十六年         |

|      |      |                   |                   |                    | 전支王薨       |

|      |      |                   |                   |                    | 久이辛王       |

|      |      |                   |                   |                    | 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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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1 | 辛酉 | 永初 二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久이辛王       |

|      |      |                   | 五年              | 九年               | 二年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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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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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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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4 | 갑인 | 의희 10년         | 실성이사금13년    | 장수왕 2년       | 전지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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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5 | 을묘 | 의희 11년         | 실성이사금14년    | 장수왕 3년       | 전지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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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6 | 병진 | 의희 12년         | 실성이사금15년    | 장수왕 4년       | 전지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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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7 | 정사 | 의희 13년         | 실성이사금16년    | 장수왕 5년       | 전지왕 13년       |

|      |      |                   | 실성이사금 사망.  |                  |                   |

|      |      |                   | 눌지마립간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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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8 | 무오 | 의희 14년         | 눌지마립간 2년    | 장수왕 6년       | 전지왕 14년       |

|      |      | 공제 덕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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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19 | 기미 | 원희 원년 송에    | 눌지마립간 3년    | 장수왕 7년       | 전지왕 15년       |

|      |      | 선양. 동진은      |                   |                  |                   |

|      |      | 12대 104년이었음. |                   |                  |                   |

|      |      | 서진의 연호를     |                   |                  |                   |

|      |      | 건홍으로 개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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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0 | 경신 | 송 고조 무제      | 눌지마립간 4년    | 장수왕 8년       | 전지왕 16년       |

|      |      | 유유 영초 원년    |                   |                  | 전지왕 사망.      |

|      |      |                   |                   |                  | 구이신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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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1 | 신유 | 영초 2년          | 눌지마립간 5년    | 장수왕 9년       | 구이신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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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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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2 | 壬戌 | 永初 三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久이辛王       |

|      |      | 少帝義(??){符}??  | 六年              | 十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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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3 | 癸亥 | 景平 元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久이辛王       |

|      |      |                   | 七年              | 十一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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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4 | 甲子 | 景平 一{二}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久이辛王       |

|      |      | 太宗文皇帝        | 八年              | 十二年             | 五年           |

|      |      | 義隆              |                   |                    |                |

|      |      | 元嘉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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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5 | 乙丑 | 元嘉 二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久이辛王       |

|      |      |                   | 九年              | 十三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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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6 | 丙寅 | 元嘉 三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久이辛王       |

|      |      |                   | 十年              | 十四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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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7 | 丁卯 | 元嘉 四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久이辛王       |

|      |      |                   | 十一年            | 十五年             | 八年           |

|      |      |                   |                   |                    | 久이辛王薨     |

|      |      |                   |                   |                    | 毗有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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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8 | 戊辰 | 元嘉 五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十二年            | 十六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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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9 | 己巳 | 元嘉 六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十三年            | 十七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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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0 | 庚午 | 元嘉 七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十四年            | 十八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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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資治通鑑」.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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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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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2 | 임술 | 영초 3년          | 눌지마립간 6년    | 장수왕 10년      | 구이신왕 3년      |

|      |      | 소제 의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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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3 | 계해 | 경평 원년         | 눌지마립간 7년    | 장수왕 11년      | 구이신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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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4 | 갑자 | 경평 2년          | 눌지마립간 8년    | 장수왕 12년      | 구이신왕 5년      |

|      |      | 태종 문황제 의륭, |                   |                  |                   |

|      |      | 원가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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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5 | 을축 | 원가 2년          | 눌지마립간 9년    | 장수왕 13년      | 구이신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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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6 | 병인 | 원가 3년          | 눌지마립간10년    | 장수왕 14년      | 구이신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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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7 | 정묘 | 원가 4년          | 눌지마립간11년    | 장수왕 15년      | 구이신왕 8년      |

|      |      |                   |                   |                  | 구이신왕 사망.    |

|      |      |                   |                   |                  | 비유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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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8 | 무진 | 원가 5년          | 눌지마립간12년    | 장수왕 16년      | 비유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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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29 | 기사 | 원가 6년          | 눌지마립간13년    | 장수왕 17년      | 비유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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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0 | 경오 | 원가 7년          | 눌지마립간14년    | 장수왕 18년      | 비유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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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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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1 | 辛未 | 元嘉 八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十五年            | 十九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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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2 | 壬申 | 元嘉 九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十六年            | 二十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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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3 | 癸酉 | 元嘉 十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十七年            | 二十一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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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4 | 甲戌 | 元嘉 十一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十八年            | 二十二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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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5 | 乙亥 | 元嘉 十二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十九年            | 二十三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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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6 | 丙子 | 元嘉 十三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年            | 二十四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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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7 | 丁丑 | 元嘉 十四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一年          | 二十五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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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8 | 戊寅 | 元嘉 十五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二年          | 二十六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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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9 | 己卯 | 元嘉 十六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三年          | 二十七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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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0 | 庚辰 | 元嘉 十七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四年          | 二十八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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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1 | 辛巳 | 元嘉 十八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五年          | 二十九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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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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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1 | 신미 | 원가 8년          | 눌지마립간15년    | 장수왕 19년      | 비유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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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2 | 임신 | 원가 9년          | 눌지마립간16년    | 장수왕 20년      | 비유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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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3 | 계유 | 원가 10년         | 눌지마립간17년    | 장수왕 21년      | 비유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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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4 | 갑술 | 원가 11년         | 눌지마립간18년    | 장수왕 22년      | 비유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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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5 | 을해 | 원가 12년         | 눌지마립간19년    | 장수왕 23년      | 비유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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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6 | 병자 | 원가 13년         | 눌지마립간20년    | 장수왕 24년      | 비유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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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7 | 정축 | 원가 14년         | 눌지마립간21년    | 장수왕 25년      | 비유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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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8 | 무인 | 원가 15년         | 눌지마립간22년    | 장수왕 26년      | 비유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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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39 | 기묘 | 원가 16년         | 눌지마립간23년    | 장수왕 27년      | 비유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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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0 | 경진 | 원가 17년         | 눌지마립간24년    | 장수왕 28년      | 비유왕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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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1 | 신사 | 원가 18년         | 눌지마립간25년    | 장수왕 29년      | 비유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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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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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2 | 壬午 | 元嘉 十九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六年          | 三十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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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3 | 癸未 | 元嘉 二十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七年          | 三十一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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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4 | 甲申 | 元嘉 二十一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八年          | 三十二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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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5 | 乙酉 | 元嘉 二十二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二十九年          | 三十三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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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6 | 丙戌 | 元嘉 二十三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年            | 三十四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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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7 | 丁亥 | 元嘉 二十四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一年          | 三十五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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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8 | 戊子 | 元嘉 二十五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二年          | 三十六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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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9 | 己丑 | 元嘉 二十六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三年          | 三十七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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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0 | 庚寅 | 元嘉 二十七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四年          | 三十八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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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1 | 辛卯 | 元嘉 二十八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五年          | 三十九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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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2 | 壬辰 | 元嘉 二十九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六年          | 四十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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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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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2 | 임오 | 원가 19년         | 눌지마립간26년    | 장수왕 30년      | 비유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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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3 | 계미 | 원가 20년         | 눌지마립간27년    | 장수왕 31년      | 비유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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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4 | 갑신 | 원가 21년         | 눌지마립간28년    | 장수왕 32년      | 비유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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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5 | 을유 | 원가 22년         | 눌지마립간29년    | 장수왕 33년      | 비유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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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6 | 병술 | 원가 23년         | 눌지마립간30년    | 장수왕 34년      | 비유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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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7 | 정해 | 원가 24년         | 눌지마립간31년    | 장수왕 35년      | 비유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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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8 | 무자 | 원가 25년         | 눌지마립간32년    | 장수왕 36년      | 비유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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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49 | 기축 | 원가 26년         | 눌지마립간33년    | 장수왕 37년      | 비유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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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0 | 경인 | 원가 27년         | 눌지마립간34년    | 장수왕 38년      | 비유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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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1 | 신묘 | 원가 28년         | 눌지마립간35년    | 장수왕 39년      | 비유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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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2 | 임진 | 원가 29년         | 눌지마립간36년    | 장수왕 40년      | 비유왕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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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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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3 | 癸巳 | 元嘉 三十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元凶邵. 大初元年  | 三十七年          | 四十一年           | 二十七年       |

|      |      | 世祖孝武皇帝駿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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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4 | 甲午 | 孝建 元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八年          | 四十二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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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5 | 乙未 | 孝建 二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毗有王         |

|      |      |                   | 三十九年          | 四十三年           | 二十九年       |

|      |      |                   |                   |                    | 毗有王薨       |

|      |      |                   |                   |                    | 盖鹵王慶司     |

|      |      |                   |                   |                    | 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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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6 | 丙申 | 孝建 三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四十四年   | 盖鹵王 二年    |

|      |      |                   | 四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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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7 | 丁酉 | 大明 元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四十一年          | 四十五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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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8 | 戊戌 | 大明 一{二}年??   | 訥祇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四十二年          | 四十六年           | 四年           |

|      |      |                   | 訥祇麻立干薨      |                    |                |

|      |      |                   | 慈悲麻立干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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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9 | 己亥 | 大明 三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二年              | 四十七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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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0 | 庚子 | 大明 四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三年              | 四十八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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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1 | 辛丑 | 大明 五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四年              | 四十九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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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2 | 壬寅 | 大明 六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五年              | 五十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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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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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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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3 | 계사 | 원가 30년         | 눌지마립간37년    | 장수왕 41년      | 비유왕 27년       |

|      |      | 원흉 소           |                   |                  |                   |

|      |      | 대초 원년         |                   |                  |                   |

|      |      | 세조              |                   |                  |                   |

|      |      | 효무황제 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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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4 | 갑오 | 효건 원년         | 눌지마립간38년    | 장수왕 42년      | 비유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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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5 | 을미 | 효건 2년          | 눌지마립간39년    | 장수왕 43년      | 비유왕 29년       |

|      |      |                   |                   |                  | 비유왕 사망.      |

|      |      |                   |                   |                  | 개로왕 경사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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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6 | 병신 | 효건 3년          | 눌지마립간40년    | 장수왕 44년      | 개로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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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7 | 정유 | 대명 원년         | 눌지마립간41년    | 장수왕 45년      | 개로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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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8 | 무술 | 대명 2년          | 눌지마립간42년    | 장수왕 46년      | 개로왕 4년        |

|      |      |                   | 눌지마립간 사망.  |                  |                   |

|      |      |                   | 자비마립간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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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59 | 기해 | 대명 3년          | 자비마립간 2년    | 장수왕 47년      | 개로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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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0 | 경자 | 대명 4년          | 자비마립간 3년    | 장수왕 48년      | 개로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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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1 | 신축 | 대명 5년          | 자비마립간 4년    | 장수왕 49년      | 개로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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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2 | 임인 | 대명 6년          | 자비마립간 5년    | 장수왕 50년      | 개로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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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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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3 | 癸卯 | 大明 七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六年              | 五十一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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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4 | 甲辰 | 大明 八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前廢帝子業        | 七年              | 五十二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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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5 | 乙巳 | 永光 元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景和 元年         | 八年              | 五十三年           | 十一年         |

|      |      | 太宗明皇帝彧      |                   |                    |                |

|      |      | 泰始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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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6 | 丙午 | 泰始 二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九年              | 五十四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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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7 | 丁未 | 泰始 三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十年              | 五十五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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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8 | 戊申 | 泰始 四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十一年            | 五十六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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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9 | 己酉 | 泰始 五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十二年            | 五十七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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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0 | 庚戌 | 泰始 六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十三年            | 五十八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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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1 | 辛亥 | 泰始 七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十四年            | 五十九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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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2 | 壬子 | 泰豫 元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後廢帝(??){昱}??  | 十五年            | 六十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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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3 | 癸丑 | 元徽 元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十六年            | 六十一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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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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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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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3 | 계묘 | 대명 7년          | 자비마립간 6년    | 장수왕 51년      | 개로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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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4 | 갑진 | 대명 8년          | 자비마립간 7년    | 장수왕 52년      | 개로왕 10년       |

|      |      | 전폐제 자업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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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5 | 을사 | 영광 원년         | 자비마립간 8년    | 장수왕 53년      | 개로왕 11년       |

|      |      | 경화 원년         |                   |                  |                   |

|      |      | 태종 명황제 욱    |                   |                  |                   |

|      |      | 태시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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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6 | 병오 | 태시 2년          | 자비마립간 9년    | 장수왕 54년      | 개로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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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7 | 정미 | 태시 3년          | 자비마립간10년    | 장수왕 55년      | 개로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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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8 | 무신 | 태시 4년          | 자비마립간11년    | 장수왕 56년      | 개로왕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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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69 | 기유 | 태시 5년          | 자비마립간12년    | 장수왕 57년      | 개로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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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0 | 경술 | 태시 6년          | 자비마립간13년    | 장수왕 58년      | 개로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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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1 | 신해 | 태시 7년          | 자비마립간14년    | 장수왕 59년      | 개로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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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2 | 임자 | 태예 원년         | 자비마립간15년    | 장수왕 60년      | 개로왕 18년       |

|      |      | 후폐제 욱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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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3 | 계축 | 원휘 원년         | 자비마립간16년    | 장수왕 61년      | 개로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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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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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4 | 甲寅 | 元徽 二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十七年            | 六十二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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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5 | 乙卯 | 元徽 三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盖鹵王         |

|      |      |                   | 十八年            | 六十三年           | 二十一年       |

|      |      |                   |                   |                    | 盖鹵王薨       |

|      |      |                   |                   |                    | 文周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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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6 | 丙辰 | 元徽 四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文周王         |

|      |      |                   | 十九年            | 六十四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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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7 | 丁巳 | 元徽 五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文周王         |

|      |      | 順皇帝準,         | 二十年            | 六十五年           | 三年           |

|      |      | 昇明 元年         |                   |                    | 文周王薨       |

|      |      |                   |                   |                    | 三斤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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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8 | 戊午 | 昇明 二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文周王         |

|      |      |                   | 二十一年          | 六十六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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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9 | 己未 | 昇明 三年         | 慈悲麻立干        | 長壽王             | 三斤王         |

|      |      | 南齊太祖高皇帝    | 二十二年          | 六十七年           | 三年           |

|      |      | 道成              | 慈悲麻立干薨      |                    | 三斤王薨       |

|      |      | 建元 元年         | 炤知{照知}??麻    |                    |  東城王        |

|      |      |                   | 立干卽位元年      |                    | &平{牟大}??    |

|      |      |                   |                   |                    | 卽位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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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0 | 庚申 | 建元 二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二年              | 六十八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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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1 | 辛酉 | 建元 三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三年              | 六十九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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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2 | 壬戌 | 建元 四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世祖 무皇帝 이    | 四年              | 七十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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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記」 目錄.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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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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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4 | 갑인 | 원휘 2년          | 자비마립간17년    | 장수왕 62년      | 개로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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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5 | 을묘 | 원휘 3년          | 자비마립간18년    | 장수왕 63년      | 개로왕 21년       |

|      |      |                   |                   |                  | 개로왕 사망.      |

|      |      |                   |                   |                  | 문주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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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6 | 병진 | 원휘 4년          | 자비마립간19년    | 장수왕 64년      | 문주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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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7 | 정사 | 원휘 5년          | 자비마립간20년    | 장수왕 65년      | 문주왕 3년        |

|      |      | 순황제 준         |                   |                  | 문주왕 사망.      |

|      |      | 승명 원년         |                   |                  | 삼근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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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8 | 무오 | 승명 2년          | 자비마립간21년    | 장수왕 66년      | 삼근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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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79 | 기미 | 승명 3년          | 자비마립간22년    | 장수왕 67년      | 삼근왕 3년        |

|      |      | 남제 태조         | 자비마립간 사망.  |                  | 삼근왕 사망.      |

|      |      | 고황제 도성       | 소지마립간 즉위   |                  | 동성왕 모대       |

|      |      | 건원 원년         | 원년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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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0 | 경신 | 건원 2년          | 소지마립간 2년    | 장수왕 68년      | 동성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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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1 | 신유 | 건원 3년          | 소지마립간 3년    | 장수왕 69년      | 동성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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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2 | 임술 | 건원 4년          | 소지마립간 4년    | 장수왕 70년      | 동성왕 4년        |

|      |      | 세조 무황제 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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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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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3 | 癸亥 | 永明 元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五年              | 七十一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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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4 | 甲子 | 永明 二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六年              | 七十二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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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5 | 乙丑 | 永明 三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七年              | 七十三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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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6 | 丙寅 | 永明 四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八年              | 七十四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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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7 | 丁卯 | 永明 五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九年              | 七十五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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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8 | 戊辰 | 永明 六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十年              | 七十六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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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9 | 己巳 | 永明 七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十一年            | 七十七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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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0 | 庚午 | 永明 八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十二年            | 七十八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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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1 | 辛未 | 永明 九年         | 炤知麻立干        | 長壽王             | 東城王         |

|      |      |                   | 十三年            | 七十九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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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2 | 壬申 | 永明 十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羅雲       | 東城王         |

|      |      |                   | 十四年            | 卽位元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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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3 | 癸酉 | 永明 十一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 二年      | 東城王         |

|      |      | 廢帝鬱林王        | 十五年            |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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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4 | 甲戌 | 隆昌 元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 三年      | 東城王         |

|      |      | 廢帝海陵王        | 十六年            |                    | 十六年         |

|      |      | (+昭)??文延興     |                   |                    |                |

|      |      | 元年 高宗明皇帝鸞 |                   |                    |                |

|      |      | 建武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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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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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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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3 | 계해 | 영명 원년         | 소지마립간 5년    | 장수왕 71년      | 동성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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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4 | 갑자 | 영명 2년          | 소지마립간 6년    | 장수왕 72년      | 동성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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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5 | 을축 | 영명 3년          | 소지마립간 7년    | 장수왕 73년      | 동성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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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6 | 병인 | 영명 4년          | 소지마립간 8년    | 장수왕 74년      | 동성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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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7 | 정묘 | 영명 5년          | 소지마립간 9년    | 장수왕 75년      | 동성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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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8 | 무진 | 영명 6년          | 소지마립간10년    | 장수왕 76년      | 동성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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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89 | 기사 | 영명 7년          | 소지마립간11년    | 장수왕 77년      | 동성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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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0 | 경오 | 영명 8년          | 소지마립간12년    | 장수왕 78년      | 동성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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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1 | 신미 | 영명 9년          | 소지마립간13년    | 장수왕 79년      | 동성왕 13년       |

|      |      |                   |                   | 장수왕 사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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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2 | 임신 | 영명 10년         | 소지마립간14년    | 문자명왕 나운    | 동성왕 14년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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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3 | 계유 | 영명 11년         | 소지마립간15년    | 문자명왕 2년     | 동성왕 15년       |

|      |      | 폐제 울림왕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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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4 | 갑술 | 융창 원년         | 소지마립간16년    | 문자명왕 3년     | 동성왕 16년       |

|      |      | 폐제 해릉왕       |                   |                  |                   |

|      |      | 소문 연흥 원년    |                   |                  |                   |

|      |      | 고종 명황제 난    |                   |                  |                   |

|      |      | 건무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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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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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5 | 乙亥 | 建武 二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           | 東城王         |

|      |      |                   | 十七年            | 四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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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6 | 丙子 | 建武 三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           | 東城王         |

|      |      |                   | 十八年            | 五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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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7 | 丁丑 | 建武 四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           | 東城王         |

|      |      |                   | 十九年            | 六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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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8 | 戊寅 | 永泰 元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           | 東城王         |

|      |      | 廢帝              | 二十年            | 七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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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9 | 己卯 | 永元 元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           | 東城王         |

|      |      |                   | 二十一年          | 八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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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0 | 庚辰 | 永元 二年         | 炤知麻立干        | 文咨明王           | 東城王         |

|      |      |                   | 二十二年          | 九年               | 二十二年       |

|      |      |                   | 昭知{照知}??      |                    |                |

|      |      |                   | &摩王{麻立干}??薨 |                    |                |

|      |      |                   | 智證&摩王         |                    |                |

|      |      |                   | {麻立干}??        |                    |                |

|      |      |                   | 卽位元年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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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1 | 辛巳 | 永元 三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東城王         |

|      |      | 和帝寶融          | 二年              | 十年               | 二十三年       |

|      |      | 中興 元年         |                   |                    | 東城王薨       |

|      |      |                   |                   |                    | 武寧王斯摩     |

|      |      |                   |                   |                    | 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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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2 | 壬午 | 中興 二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梁高祖武皇帝      | 三年              | 十一年             | 二年           |

|      |      | 永{衍}??          |                   |                    |                |

|      |      | 天監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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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3 | 癸未 | 天監 二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四年              | 十二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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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記」 目錄. 「북한본」에는 '炤知'로 되어 있다.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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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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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5 | 을해 | 건무 2년          | 소지마립간17년    | 문자명왕 4년     | 동성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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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6 | 병자 | 건무 3년          | 소지마립간18년    | 문자명왕 5년     | 동성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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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7 | 정축 | 건무 4년          | 소지마립간19년    | 문자명왕 6년     | 동성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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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8 | 무인 | 영태 원년         | 소지마립간20년    | 문자명왕 7년     | 동성왕 20년       |

|      |      | 폐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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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9 | 기묘 | 영원 원년         | 소지마립간21년    | 문자명왕 8년     | 동성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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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0 | 경진 | 영원 2년          | 소지마립간22년    | 문자명왕 9년     | 동성왕 22년       |

|      |      |                   | 소지마립간 사망.  |                  |                   |

|      |      |                   | 지증마립간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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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1 | 신사 | 영원 3년          | 지증마립간 2년    | 문자명왕 10년    | 동성왕 23년       |

|      |      | 화제 보융         |                   |                  | 동성왕 사망.      |

|      |      | 중흥 원년         |                   |                  | 무령왕 사마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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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2 | 임오 | 중흥 2년          | 지증마립간 3년    | 문자명왕 11년    | 무령왕 2년        |

|      |      | 양 고조           |                   |                  |                   |

|      |      | 무황제 연         |                   |                  |                   |

|      |      | 천감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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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3 | 계미 | 천감 2년          | 지증마립간 4년    | 문자명왕 12년    | 무령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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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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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4 | 甲申 | 天監 三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五年              | 十三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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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5 | 乙酉 | 天監 四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六年              | 十四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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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6 | 丙戌 | 天監 五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七年              | 十五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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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7 | 丁亥 | 天監 六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八年              | 十六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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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8 | 戊子 | 天監 七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九年              | 十七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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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9 | 己丑 | 天監 八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十年              | 十八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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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0 | 庚寅 | 天監 九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十一年            |  十九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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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1 | 辛卯 | 天監 十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十二年            | 二十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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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2 | 壬辰 | 天監 十一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十三年            | 二十一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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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3 | 癸巳 | 天監 十二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十四年            | 二十二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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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4 | 甲午 | 天監 十三年       | 智證麻立干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十五年            | 二十三年           | 十四年         |

|      |      |                   | 智證麻立干薨      |                    |                |

|      |      |                   | 法興王            |                    |                |

|      |      |                   | 原宋{原宗}??      |                    |                |

|      |      |                   | 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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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5 | 乙未 | 天監 十四年       | 法興王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二年              |   二十四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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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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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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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4 | 갑신 | 천감 3년          | 지증마립간 5년    | 문자명왕 13년    | 무령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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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5 | 을유 | 천감 4년          | 지증마립간 6년    | 문자명왕 14년    | 무령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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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6 | 병술 | 천감 5년          | 지증마립간 7년    | 문자명왕 15년    | 무령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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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7 | 정해 | 천감 6년          | 지증마립간 8년    | 문자명왕 16년    | 무령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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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8 | 무자 | 천감 7년          | 지증마립간 9년    | 문자명왕 17년    | 무령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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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09 | 기축 | 천감 8년          | 지증마립간 10년   | 문자명왕 18년    | 무령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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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0 | 경인 | 천감 9년          | 지증마립간 11년   | 문자명왕 19년    | 무령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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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1 | 신묘 | 천감 10년         | 지증마립간 12년   | 문자명왕 20년    | 무령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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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2 | 임진 | 천감 11년         | 지증마립간 13년   | 문자명왕 21년    | 무령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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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3 | 계사 | 천감 12년         | 지증마립간 14년   | 문자명왕 22년    | 무령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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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4 | 갑오 | 천감 13년         | 지증마립간 15년   | 문자명왕 23년    | 무령왕 14년       |

|      |      |                   | 지증마립간 사망.  |                  |                   |

|      |      |                   |법흥왕원종 즉위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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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5 | 을미 | 천감 14년         | 법흥왕 2년        | 문자명왕 24년    | 무령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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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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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6 | 丙申 | 天監 十五年       | 法興王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三年              | 二十五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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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7 | 丁酉 | 天監 十六年       | 法興王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四年              | 二十六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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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8 | 戊戌 | 天監 十七年       | 法興王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五年              | 二十七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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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9 | 己亥 | 天監 十八年       | 法興王            | 文咨明王           | 武寧王         |

|      |      |                   | 六年              | 二十八年           | 十九年         |

|      |      |                   |                   | 文咨明王薨         |                |

|      |      |                   |                   | 安藏王興安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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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0 | 庚子 | 普通 元年         | 法興王            | 安藏王             | 武寧王         |

|      |      |                   | 七年              | 二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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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1 | 辛丑 | 普通 二年         | 法興王            | 安藏王             | 武寧王         |

|      |      |                   | 八年              | 三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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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2 | 壬寅 | 普通 三年         | 法興王            | 安藏王             | 武寧王         |

|      |      |                   | 九年              | 四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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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3 | 癸卯 | 普通 四年         | 法興王            | 安藏王             | 武寧王         |

|      |      |                   | 十年              | 五年               | 二十三年       |

|      |      |                   |                   |                    | 武寧王薨       |

|      |      |                   |                   |                    | 聖王明*농      |

|      |      |                   |                   |                    | 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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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4 | 甲辰 | 普通 五年         | 法興王            | 安藏王             | 聖王           |

|      |      |                   | 十一年            | 六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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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5 | 乙巳 | 普通 六年         | 法興王            | 安藏王             | 聖王           |

|      |      |                   | 十二年            | 七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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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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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6 | 병신 | 천감 15년         | 법흥왕 3년        | 문자명왕 25년    | 무령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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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7 | 정유 | 천감 16년         | 법흥왕 4년        | 문자명왕 26년    | 무령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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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8 | 무술 | 천감 17년         | 법흥왕 5년        | 문자명왕 27년    | 무령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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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19 | 기해 | 천감 18년         | 법흥왕 6년        | 문자명왕 28년    | 무령왕 19년       |

|      |      |                   |                   | 문자명왕 사망.   |                   |

|      |      |                   |                   | 안장왕 흥안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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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0 | 경자 | 보통 원년         | 법흥왕 7년        | 안장왕 2년       | 무령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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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1 | 신축 | 보통 2년          | 법흥왕 8년        | 안장왕 3년       | 무령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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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2 | 임인 | 보통 3년          | 법흥왕 9년        | 안장왕 4년       | 무령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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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3 | 계묘 | 보통 4년          | 법흥왕 10년       | 안장왕 5년       | 무령왕 23년       |

|      |      |                   |                   |                  | 무령왕 사망.      |

|      |      |                   |                   |                  | 성왕 명농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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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4 | 갑진 | 보통 5년          | 법흥왕 11년       | 안장왕 6년       | 성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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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5 | 을사 | 보통 6년          | 법흥왕 12년       | 안장왕 7년       | 성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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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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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6 | 丙午 | 普通 七年         | 法興王            | 安藏王             | 聖王           |

|      |      |                   | 十三年            | 八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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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7 | 丁未 | 大通 元年         | 法興王            | 安藏王             | 聖王           |

|      |      |                   | 十四年            | 九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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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8 | 戊申 | 大通 二年         | 法興王            | 安藏王             | 聖王           |

|      |      |                   | 十五年            | 十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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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9 | 己酉 | 中大通 元年       | 法興王            | 安藏王             | 聖王           |

|      |      |                   | 十六年            | 十一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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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0 | 庚戌 | 中大通 二年       | 法興王            | 安藏王             | 聖王           |

|      |      |                   | 十七年            | 十二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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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1 | 辛亥 | 中大通 三年       | 法興王            | 安藏王             | 聖王           |

|      |      |                   | 十八年            | 十三年             | 九年           |

|      |      |                   |                   | 安藏王薨           |                |

|      |      |                   |                   | 安原王寶延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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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2 | 壬子 | 中大通 四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十九年            | 二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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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3 | 癸丑 | 中大通 五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十年            | 三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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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4 | 甲寅 | 中大通 六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十一年          | 四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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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5 | 乙卯 | 大同 元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十二年          | 五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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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6 | 丙辰 | 大同 二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十三年          | 六年               | 十四年         |

|      |      |                   | 始稱建元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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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7 | 丁巳 | 大同 三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十四年          | 七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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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8 | 戊午 | 大同 四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十五年          | 八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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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9 | 己未 | 大同 五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十六年          | 九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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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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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6 | 병오 | 보통 7년          | 법흥왕 13년       | 안장왕 8년       | 성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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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7 | 정미 | 대통 원년         | 법흥왕 14년       | 안장왕 9년       | 성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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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8 | 무신 | 대통 2년          | 법흥왕 15년       | 안장왕 10년      | 성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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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29 | 기유 | 중대통 원년       | 법흥왕 16년       | 안장왕 11년      | 성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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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0 | 경술 | 중대통 2년        | 법흥왕 17년       | 안장왕 12년      | 성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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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1 | 신해 | 중대통 3년        | 법흥왕 18년       | 안장왕 13년      | 성왕 9년          |

|      |      |                   |                   | 안장왕 사망.     |                   |

|      |      |                   |                   | 안원왕 보연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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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2 | 임자 | 중대통 4년        | 법흥왕 19년       | 안원왕 2년       | 성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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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3 | 계축 | 중대통 5년        | 법흥왕 20년       | 안원왕 3년       | 성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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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4 | 갑인 | 중대통 6년        | 법흥왕 21년       | 안원왕 4년       | 성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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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5 | 을묘 | 대동 원년         | 법흥왕 22년       | 안원왕 5년       | 성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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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6 | 병진 | 대동 2년          | 법흥왕 23년       | 안원왕 6년       | 성왕 14년         |

|      |      |                   | 처음으로 연호     |                  |                   |

|      |      |                   | 사용              |                  |                   |

|      |      |                   | 건원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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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7 | 정사 | 대동 3년          | 법흥왕 24년       | 안원왕 7년       | 성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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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8 | 무오 | 대동 4년          | 법흥왕 25년       | 안원왕 8년       | 성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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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39 | 기미 | 대동 5년          | 법흥왕 26년       | 안원왕 9년       | 성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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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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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0 | 庚申 | 大同 六年         | 法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十七年          | 十年               | 十八年         |

|      |      |                   | 法興王薨          |                    |                |

|      |      |                   | 眞興王麥原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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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1 | 辛酉 | 大同 七年         | 眞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二年              | 十一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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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2 | 壬戌 | 大同 八年         | 眞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三年              | 十二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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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3 | 癸亥 | 大同 九年         | 眞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四年              | 十三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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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4 | 甲子 | 大同 十年         | 眞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五年              | 十四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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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5 | 乙丑 | 大同 十一年       | 眞興王            | 安原王             | 聖王           |

|      |      |                   | 六年              | 十五年             | 二十三年       |

|      |      |                   |                   | 安原王薨           |                |

|      |      |                   |                   | 陽原王平成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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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6 | 丙寅 | 中大同 元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 七年              | 二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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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7 | 丁卯 | 太淸 元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 八年              | 三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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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8 | 戊辰 | 太淸 二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 九年              | 四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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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9 | 己巳 | 太淸 三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太宗簡文皇帝      | 十年              | 五年               | 二十七年       |

|      |      | 綱{網}??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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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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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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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0 | 경신 | 대동 6년          | 법흥왕 27년       | 안원왕 10년      | 성왕 18년         |

|      |      |                   | 법흥왕 사망.      |                  |                   |

|      |      |                   | 진흥왕 맥원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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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1 | 신유 | 대동 7년          | 진흥왕 2년        |안원왕 11년       | 성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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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2 | 임술 | 대동 8년          | 진흥왕 3년        |안원왕 12년       | 성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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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3 | 계해 | 대동 9년          | 진흥왕 4년        |안원왕 13년       | 성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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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4 | 갑자 | 대동 10년         | 진흥왕 5년        |안원왕 14년       | 성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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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5 | 을축 | 대동 11년         | 진흥왕 6년        |안원왕 15년       | 성왕 23년         |

|      |      |                   |                   |안원왕 사망.      |                   |

|      |      |                   |                   |양원왕 평성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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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6 | 병인 | 중대동 원년       | 진흥왕 7년        |양원왕 2년        | 성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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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7 | 정묘 | 태청 원년         | 진흥왕 8년        |양원왕 3년        | 성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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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8 | 무진 | 태청 2년          | 진흥왕 9년        |양원왕 4년        | 성왕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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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49 | 기사 | 태청 3년          | 진흥왕 10년       |양원왕 5년        | 성왕 27년         |

|      |      | 태종 간문황제     |                   |                  |                   |

|      |      | 강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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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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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0 | 庚午 | 太寶 元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 十一年            | 六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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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1 | 辛未 | 太寶 二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豫章王棟          | 十二年            | 七年               | 二十九年       |

|      |      | 大正{天正}??      | 改元開國          |                    |                |

|      |      | 元年. 僞漢俟      |                   |                    |                |

|      |      | {侯}??景太始元    |                   |                    |                |

|      |      | 年. 世祖孝元帝繹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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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2 | 壬申 | 承聖 元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 十三年            | 八年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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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3 | 癸酉 | 承聖 二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 十四年            | 九年               | 三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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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4 | 甲戌 | 承聖 三年         | 眞興王            | 陽原王             | 聖王           |

|      |      | 敬皇帝方智        | 十五年            | 十年               | 三十二年       |

|      |      |                   |                   |                    | 聖王薨         |

|      |      |                   |                   |                    | 威德王昌       |

|      |      |                   |                   |                    | 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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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5 | 乙亥 | 承聖 四年         | 眞興王            | 陽原王             | 威德王         |

|      |      | 正陽侯大成        | 十六年            | 十一年             | 二年           |

|      |      | {天成}??元年      |                   |                    |                |

|      |      | 紹泰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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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6 | 丙子 | 太平 元年         | 眞興王            | 陽原王             | 威德王         |

|      |      |                   | 十七年            | 十二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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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7 | 丁丑 | 陳高祖武皇帝      | 眞興王            | 陽原王             | 威德王         |

|      |      | (-西)??覇先       | 十八年            | 十三年             | 四年           |

|      |      | 永定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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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8 | 戊寅 | 永定 二年         | 眞興王            | 陽原王             | 威德王         |

|      |      |                   | 十九年            | 十四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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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資治通鑑」.趙炳舜. 「資治通鑑」.趙炳舜. 「資治通鑑」.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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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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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0 | 경오 | 태보 원년         | 진흥왕 11년       |양원왕 6년        | 성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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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1 | 신미 | 태보 2년          | 진흥왕 12년       |양원왕 7년        | 성왕 29년         |

|      |      | 예장왕 동         | 연호를 개국으로   |                  |                   |

|      |      | 대정 원년         | 개칭.             |                  |                   |

|      |      | 위한 후경         |                   |                  |                   |

|      |      | 태시 원년         |                   |                  |                   |

|      |      | 세조 효원제 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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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2 | 임신 | 승성 원년         | 진흥왕 13년       | 양원왕 8년       | 성왕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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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3 | 계유 | 승성 2년          | 진흥왕 14년       | 양원왕 9년       | 성왕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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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4 | 갑술 | 승성 3년          | 진흥왕 15년       | 양원왕 10년      | 성왕 32년         |

|      |      | 경황제 방지       |                   |                  | 성왕 사망.        |

|      |      |                   |                   |                  | 위덕왕 창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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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5 | 을해 | 승성 4년          | 진흥왕 16년       | 양원왕 11년      | 위덕왕 2년        |

|      |      | 정양후 천성 원년  |                   |                  |                   |

|      |      | 소태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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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6 | 병자 | 태평 원년         | 진흥왕 17년       | 양원왕 12년      | 위덕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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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7 | 정축 | 진 고조 무황제    | 진흥왕 18년       | 양원왕 13년      | 위덕왕 4년        |

|      |      | 패선              |                   |                  |                   |

|      |      | 영정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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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8 | 무인 | 영정 2년          | 진흥왕 19년       | 양원왕 14년      | 위덕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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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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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9 | 己卯 | 永定 三年         | 眞興王            | 陽原王             | 威德王         |

|      |      | 世祖文皇帝        | 二十年            | 十五年             | 六年           |

|      |      |                   |                   | 陽原王薨           |                |

|      |      |                   |                   | 平原王陽成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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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0 | 庚辰 | 天嘉 元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十一年          | 二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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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1 | 辛巳 | 天嘉 二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十二年          | 三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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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2 | 壬午 | 天嘉 三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十三年          | 四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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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3 | 癸未 | 天嘉 四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十四年          | 五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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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4 | 甲申 | 天嘉 五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十五年          | 六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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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5 | 乙酉 | 天嘉 六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十六年          | 七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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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6 | 丙戌 | 天康 元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廢帝白宗{伯宗}??  | 二十七年          | 八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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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7 | 丁亥 | 光大 元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十八年          | 九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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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8 | 戊子 | 光大 二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高宗孝宣皇帝頊    | 二十九年          | 十年               | 十五年         |

|      |      |                   | 改元大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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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9 | 己丑 | 太建 元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十年            | 十一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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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0 | 庚寅 | 太建 二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十一年          | 十二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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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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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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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59 | 기묘 | 영정 3년          | 진흥왕 20년       | 양원왕 15년      | 위덕왕 6년        |

|      |      | 세조 문황제       |                   | 양원왕 사망.     |                   |

|      |      |                   |                   | 평원왕 양성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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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0 | 경진 | 천가 원년         | 진흥왕 21년       | 평원왕 2년       | 위덕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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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1 | 신사 | 천가 2년          | 진흥왕 22년       | 평원왕 3년       | 위덕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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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2 | 임오 | 천가 3년          | 진흥왕 23년       | 평원왕 4년       | 위덕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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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3 | 계미 | 천가 4년          | 진흥왕 24년       | 평원왕 5년       | 위덕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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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4 | 갑신 | 천가 5년          | 진흥왕 25년       | 평원왕 6년       | 위덕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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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5 | 을유 | 천가 6년          | 진흥왕 26년       | 평원왕 7년       | 위덕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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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6 | 병술 | 천강 원년         | 진흥왕 27년       | 평원왕 8년       | 위덕왕 13년       |

|      |      | 폐제 백종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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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7 | 정해 | 광대 원년         | 진흥왕 28년       | 평원왕 9년       | 위덕왕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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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8 | 무자 | 광대 2년          | 진흥왕 29년       | 평원왕 10년      | 위덕왕 15년       |

|      |      | 고종 효선황제     | 연호를 대창으로   |                  |                   |

|      |      | 욱                | 개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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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9 | 기축 | 태건 원년         | 진흥왕 30년       | 평원왕 11년      | 위덕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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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0 | 경인 | 태건 2년          | 진흥왕 31년       | 평원왕 12년      | 위덕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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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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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1 | 辛卯 | 太建 三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十二年          | 十三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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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2 | 壬辰 | 太建 四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十三年          | 十四年             | 十九年         |

|      |      |                   | 改元鳴濟{鴻濟}??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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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3 | 癸巳 | 太建 五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十四年          | 十五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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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4 | 甲午 | 太建 六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十五年          | 十六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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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5 | 乙未 | 太建 七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十六年          | 十七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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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6 | 丙申 | 太建 八年         | 眞興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十七年          | 十八年             | 二十三年       |

|      |      |                   | 眞興王薨          |                    |                |

|      |      |                   | 眞智王金輪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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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7 | 丁酉 | 太建 九年         | 眞智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年              | 十九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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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8 | 戊戌 | 太建 十年         | 眞智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三年              | 二十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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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9 | 己亥 | 太建 十一年       | 眞智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四年              | 二十一年           | 二十六年       |

|      |      |                   | 眞智王薨          |                    |                |

|      |      |                   | 眞平王            |                    |                |

|      |      |                   | 日南{伯淨}??      |                    |                |

|      |      |                   | 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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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0 | 庚子 | 太建 十二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二年              | 二十二年           | 二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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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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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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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1 | 신묘 | 태건 3년          | 진흥왕 32년       | 평원왕 13년      | 위덕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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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2 | 임진 | 태건 4년          | 진흥왕 33년       | 평원왕 14년      | 위덕왕 19년       |

|      |      |                   | 연호를 홍제로     |                  |                   |

|      |      |                   | 개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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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3 | 계사 | 태건 5년          | 진흥왕 34년       | 평원왕 15년      | 위덕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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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4 | 갑오 | 태건 6년          | 진흥왕 35년       | 평원왕 16년      | 위덕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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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5 | 을미 | 태건 7년          | 진흥왕 36년       | 평원왕 17년      | 위덕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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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6 | 병신 | 태건 8년          | 진흥왕 37년       | 평원왕 18년      | 위덕왕 23년       |

|      |      |                   | 진흥왕 사망.      |                  |                   |

|      |      |                   | 진지왕 금륜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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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7 | 정유 | 태건 9년          | 진지왕 2년        | 평원왕 19년      | 위덕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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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8 | 무술 | 태건 10년         | 진지왕 3년        | 평원왕 20년      | 위덕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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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79 | 기해 | 태건 11년         | 진지왕 4년        | 평원왕 21년      | 위덕왕 26년       |

|      |      |                   | 진지왕 사망.      |                  |                   |

|      |      |                   | 진평왕 백정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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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0 | 경자 | 태건 12년         | 진평왕 2년        | 평원왕 22년      | 위덕왕 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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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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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1 | 辛丑 | 太建 十三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隋高祖文皇帝      | 三年              | 二十三年           | 二十八年       |

|      |      | 楊堅              |                   |                    |                |

|      |      | 開皇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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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2 | 壬寅 | 太建 十四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後主叔寶          | 四年              | 二十四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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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3 | 癸卯 | 至德 元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五年              | 二十五年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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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4 | 甲辰 | 至德 二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六年              | 二十六年           | 三十一年       |

|      |      |                   | 改元 建福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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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5 | 乙巳 | 至德 三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七年              | 二十七年           | 三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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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6 | 丙午 | 至德 四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八年              | 二十八年           | 三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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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7 | 丁未 | 禎明 元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九年              | 二十九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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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8 | 戊申 | 禎明 二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十年              | 三十年             | 三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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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9 | 己酉 | 禎明 三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陳氏滅            | 十一年            | 三十一年           | 三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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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0 | 庚戌 | 隋 開皇十年       | 眞平王            | 平原王             | 威德王         |

|      |      |                   | 十二年            | 三十二年           | 三十七年       |

|      |      |                   |                   | 平原王薨           |                |

|      |      |                   |                   | 영陽王元卽位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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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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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1 | 신축 | 태건 13년         | 진평왕 3년        | 평원왕 23년      | 위덕왕 28년       |

|      |      | 수 고조 문황제    |                   |                  |                   |

|      |      | 양견              |                   |                  |                   |

|      |      | 개황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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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2 | 임인 | 태건 14년         | 진평왕 4년        | 평원왕 24년      | 위덕왕 29년       |

|      |      | 후주 숙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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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3 | 계묘 | 지덕 원년         | 진평왕 5년        | 평원왕 25년      | 위덕왕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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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4 | 갑진 | 지덕 2년          | 진평왕 6년        | 평원왕 26년      | 위덕왕 31년       |

|      |      |                   | 연호를 건복으로   |                  |                   |

|      |      |                   | 개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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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5 | 을사 | 지덕 3년          | 진평왕 8년        | 평원왕 28년      | 위덕왕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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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6 | 병오 | 지덕 4년          | 진평왕 8년        | 평원왕 28년      | 위덕왕 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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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7 | 정미 | 정명 원년         | 진평왕 9년        | 평원왕 29년      | 위덕왕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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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8 | 무신 | 정명 2년          | 진평왕 10년       | 평원왕 30년      | 위덕왕 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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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89 | 기유 | 정명 3년          | 진평왕 11년       | 평원왕 31년      | 위덕왕 36년       |

|      |      | 진씨 멸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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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0 | 경술 | 수 개황 10년      | 진평왕 12년       | 평원왕 32년      | 위덕왕 37년       |

|      |      |                   |                   | 평원왕 사망.     |                   |

|      |      |                   |                   | 영양왕 원        |                   |

|      |      |                   |                   | 늑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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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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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1 | 辛亥 | 開皇 十一年       | 眞平王            | 영陽王             | 威德王         |

|      |      |                   | 十三年            | 二年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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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2 | 壬子 | 開皇 十二年       | 眞平王            | 영陽王             | 威德王         |

|      |      |                   | 十四年            | 三年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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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3 | 癸丑 | 開皇 十三年       | 眞平王            | 영陽王             | 威德王         |

|      |      |                   | 十五年            | 四年               | 四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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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4 | 甲寅 | 開皇 十四年       | 眞平王            | 영陽王             | 威德王         |

|      |      |                   | 十六年            | 五年               | 四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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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5 | 乙卯 | 開皇 十五年       | 眞平王            | 영陽王             | 威德王         |

|      |      |                   | 十七年            | 六年               | 四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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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6 | 丙辰 | 開皇 十六年       | 眞平王            | 영陽王             | 威德王         |

|      |      |                   | 十八年            | 七年               | 四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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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7 | 丁巳 | 開皇 十七年       | 眞平王            | 영陽王             | 威德王         |

|      |      |                   | 十九年            | 八年               | 四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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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8 | 戊午 | 開皇 十八年       | 眞平王            | 영陽王             | 威德王         |

|      |      |                   | 二十(-一)年??     | 九年               | 四十五年       |

|      |      |                   |                   |                    | 威德王薨       |

|      |      |                   |                   |                    | 德王{惠王}??   |

|      |      |                   |                   |                    | 季(+明)??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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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9 | 己未 | 開皇 十九年       | 眞平王            | 영陽王             | 惠王 二年      |

|      |      |                   | 二十一年          | 十年               | 德王{惠王}??   |

|      |      |                   |                   |                    | 薨  法王宣     |

|      |      |                   |                   |                    | 卽位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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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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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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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1 | 신해 | 개황 11년         | 진평왕 13년       | 영양왕 2년       | 위덕왕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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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2 | 임자 | 개황 12년         | 진평왕 14년       | 영양왕 3년       | 위덕왕 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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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3 | 계축 | 개황 13년         | 진평왕 15년       | 영양왕 4년       | 위덕왕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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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4 | 갑인 | 개황 14년         | 진평왕 16년       | 영양왕 5년       | 위덕왕 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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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5 | 을묘 | 개황 15년         | 진평왕 17년       | 영양왕 6년       | 위덕왕 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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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6 | 병진 | 개황 16년         | 진평왕 18년       | 영양왕 7년       | 위덕왕 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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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7 | 정사 | 개황 17년         | 진평왕 19년       | 영양왕 8년       | 위덕왕 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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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8 | 무오 | 개황 18년         | 진평왕 20년       | 영양왕 9년       | 위덕왕 45년       |

|      |      |                   |                   |                  | 위덕왕 사망.      |

|      |      |                   |                   |                  | 혜왕 계명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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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99 | 기미 | 개황 19년         | 진평왕 21년       | 영양왕 10년      | 혜왕 2년          |

|      |      |                   |                   |                  | 혜왕 사망.        |

|      |      |                   |                   |                  | 법왕 선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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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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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0 | 庚申 | 開皇 二十年       | 眞平王            | 영陽王             | 法王           |

|      |      |                   | 二十二年          | 十一年             | 二年           |

|      |      |                   |                   |                    | 法王薨         |

|      |      |                   |                   |                    | 武王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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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1 | 辛酉 | 仁壽 元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二十三年          | 十二年             | 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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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2 | 壬戌 | 仁壽 二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二十四年          | 十三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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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3 | 癸亥 | 仁壽 三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二十五年          | 十四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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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4 | 甲子 | 仁壽 四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煬皇帝廣          | 二十六年          | 十五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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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5 | 乙丑 | 大業 元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二十七年          | 十六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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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6 | 丙寅 | 大業 二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二十八年          | 十七年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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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7 | 丁卯 | 大業 三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二十九年          | 十八年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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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8 | 戊辰 | 大業 四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年            | 十九年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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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卷第三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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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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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0 | 경신 | 개황 20년         | 진평왕 22년       | 영양왕 11년      | 법왕 2년          |

|      |      |                   |                   |                  | 법왕 사망.        |

|      |      |                   |                   |                  | 무왕 장           |

|      |      |                   |                   |                  | 즉위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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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1 | 신유 | 인수 원년         | 진평왕 23년       | 영양왕 12년      | 무왕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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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2 | 임술 | 인수 2년          | 진평왕 24년       | 영양왕 13년      | 무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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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3 | 계해 | 인수 3년          | 진평왕 25년       | 영양왕 14년      | 무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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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4 | 갑자 | 인수 4년          | 진평왕 26년       | 영양왕 15년      | 무왕 5년          |

|      |      | 양황제 광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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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5 | 을축 | 대업 원년         | 진평왕 27년       | 영양왕 16년      | 무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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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6 | 병인 | 대업 2년          | 진평왕 28년       | 영양왕 17년      | 무왕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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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7 | 정묘 | 대업 3년          | 진평왕 29년       | 영양왕 18년      | 무왕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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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8 | 무진 | 대업 4년          | 진평왕 30년       | 영양왕 19년      | 무왕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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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 30 끝




三國史記卷第三十一.



삼국사기 권 제 31


年表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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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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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9 | 己巳 | 大業 五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一年           | 二十年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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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0 | 庚午 | 大業 六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二年           | 二十一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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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1 | 辛未 | 大業 七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三年           | 二十二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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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2 | 壬申 | 大業 八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四年           | 二十三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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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3 | 癸酉 | 大業 九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五年           | 二十四年          | 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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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4 | 甲戌 | 大業 十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六年           | 二十五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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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5 | 乙亥 | 大業 十一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七年           | 二十六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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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6 | 丙子 | 大業 十二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 三十八年           | 二十七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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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7 | 丁丑 | 大業 十三年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恭皇帝유          | 三十九年           | 二十八年          | 十八年         |

|      |      |  義寧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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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8 | 戊寅 |  唐高祖神堯皇淵    | 眞平王             | 영陽王            | 武王           |

|      |      |  武德 元年         | 四十年             | 二十九年          | 十九年         |

|      |      |                    | (-영留)??          | 영陽王薨          |                |

|      |      |                    |                    | 榮留王建武        |                |

|      |      |                    |                    | 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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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9 | 己卯 |  武德 二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四十一年           | 二年              | 二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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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0 | 庚辰 |  武德 三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四十二年           | 三年              | 二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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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연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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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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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09 | 기사 | 대업 5년         | 진평왕 31년       | 영양왕 20년        | 무왕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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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0 | 경오 | 대업 6년         | 진평왕 32년       | 영양왕 21년        | 무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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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1 | 신미 | 대업 7년         | 진평왕 33년       | 영양왕 22년        | 무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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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2 | 임신 | 대업 8년         | 진평왕 34년       | 영양왕 23년        | 무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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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3 | 계유 | 대업 9년         | 진평왕 35년       | 영양왕 24년        | 무왕 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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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4 | 갑술 | 대업 10년        | 진평왕 36년       | 영양왕 25년        | 무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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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5 | 을해 | 대업 11년        | 진평왕 37년       | 영양왕 26년        | 무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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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6 | 병자 | 대업 12년        | 진평왕 38년       | 영양왕 27년        | 무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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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7 | 정축 | 대업 13년        | 진평왕 39년       | 영양왕 28년        | 무왕 18년        |

|      |      | 공황제 유        |                   |                    |                  |

|      |      | 의녕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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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8 | 무인 | 당 고조 신요     | 진평왕 40년       | 영양왕 29년        | 무왕 19년        |

|      |      | 황제 연          |                   | 영양왕 사망.       |                  |

|      |      | 무덕 원년        |                   | 영류왕 건무        |                  |

|      |      |                  |                   | 즉위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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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19 | 기묘 | 무덕 2년         | 진평왕 41년       | 영류왕 2년         | 무왕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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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0 | 경진 | 무덕 3년         | 진평왕 42년       | 영류왕 3년         | 무왕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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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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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1 | 辛巳 |  武德 四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四十三年           | 四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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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2 | 壬午 |  武德 五年         | 眞平王 四十四年    | 榮留王            | 武王           |

|      |      |                    |                    | 五年              | 二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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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3 | 癸未 |  武德 六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四十五年           | 六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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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4 | 甲申 |  武德 七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四十六年           | 七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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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5 | 乙酉 |  武德 八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四十七年           | 八年              | 二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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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6 | 丙戌 |  武德 九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太宗文武大聖      | 四十八年           | 九年              | 二十七年       |

|      |      |  皇帝世民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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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7 | 丁亥 |  貞觀 元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四十九年           | 十年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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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8 | 戊子 |  貞觀 二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五十年             | 十一年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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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9 | 己丑 |  貞觀 三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五十一年           | 十二年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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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0 | 庚寅 |  貞觀 四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五十二年           | 十三年            | 三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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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1 | 辛卯 |  貞觀 五年         | 眞平王             | 榮留王            | 武王           |

|      |      |                    | 五十三年           | 十四年            | 三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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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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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1 | 신사 | 무덕 4년         | 진평왕 43년       | 영류왕 4년         | 무왕 22년        |

+------+------+------------------+-------------------+--------------------+------------------+

|AD622 | 임오 | 무덕 5년         | 진평왕 44년       | 영류왕 5년         | 무왕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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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3 | 계미 | 무덕 6년         | 진평왕 45년       | 영류왕 6년         | 무왕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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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4 | 갑신 | 무덕 7년         | 진평왕 46년       | 영류왕 7년         | 무왕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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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5 | 을유 | 무덕 8년         | 진평왕 47년       | 영류왕 8년         | 무왕 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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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6 | 병술 | 무덕 9년         | 진평왕 48년       | 영류왕 9년         | 무왕 27년        |

|      |      | 태종문무대성황제 |                   |                    |                  |

|      |      | 세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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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7 | 정해 | 정관 원년        | 진평왕 49년       | 영류왕 10년        | 무왕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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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8 | 무자 | 정관 2년         | 진평왕 50년       | 영류왕 11년        | 무왕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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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29 | 기축 | 정관 3년         | 진평왕 51년       | 영류왕 12년        | 무왕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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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0 | 경인 | 정관 4년         | 진평왕 52년       | 영류왕 13년        | 무왕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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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1 | 신묘 | 정관 5년         | 진평왕 53년       | 영류왕 14년        | 무왕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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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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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2 | 壬辰 |  貞觀 六年         | 眞平王 五十四年    | 榮留王            | 武王           |

|      |      |                    | 眞平王薨  善德     | 十五年            | 三十三年       |

|      |      |                    | 王德曼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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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3 | 癸巳 |  貞觀 七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二年               | 十六年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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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4 | 甲午 |  貞觀 八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三年               | 十七年            | 三十五年       |

|      |      |                    | 改元仁平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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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5 | 乙未 |  貞觀 九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四年               | 十八年            | 三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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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6 | 丙申 |  貞觀 十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五年               | 十九年            | 三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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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7 | 丁酉 |  貞觀 十一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六年               | 二十年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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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8 | 戊戌 |  貞觀 十二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七年               | 二十一年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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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9 | 己亥 |  貞觀 十三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八年               | 二十二年          | 四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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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0 | 庚子 |  貞觀 十四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九年               | 二十三年          | 四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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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1 | 辛丑 |  貞觀 十五年       | 善德王             | 榮留王            | 武王           |

|      |      |                    | 十年               | 二十四年          | 四十二年       |

|      |      |                    |                    |                   | 武王薨         |

|      |      |                    |                    |                   | 義慈王卽位     |

|      |      |                    |                    |                   |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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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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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2 | 임진 | 정관 6년         | 진평왕 54년       | 영류왕 15년        | 무왕 33년        |

|      |      |                  | 진평왕 사망.      |                    |                  |

|      |      |                  | 선덕왕 덕만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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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3 | 계사 | 정관 7년         | 선덕왕 2년        | 영류왕 16년        | 무왕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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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4 | 갑오 | 정관 8년         | 선덕왕 3년        | 영류왕 17년        | 무왕 35년        |

|      |      |                  | 연호를            |                    |                  |

|      |      |                  | 인푠으로 개칭.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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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5 | 을미 | 정관 9년         | 선덕왕 4년        | 영류왕 18년        | 무왕 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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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6 | 병신 | 정관 10년        | 선덕왕 5년        | 영류왕 19년        | 무왕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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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7 | 정유 | 정관 11년        | 선덕왕 6년        | 영류왕 20년        | 무왕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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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8 | 무술 | 정관 12년        | 선덕왕 7년        | 영류왕 21년        | 무왕 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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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39 | 기해 | 정관 13년        | 선덕왕 8년        | 영류왕 22년        | 무왕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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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0 | 경자 | 정관 14년        | 선덕왕 9년        | 영류왕 23년        | 무왕 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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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1 | 신축 | 정관 15년        | 선덕왕 10년       | 영류왕 24년        | 무왕 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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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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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2 | 壬寅 |  貞觀 十六年       | 善德王             | 榮留王            | 義慈王         |

|      |      |                    | 十一年             | 二十五年          | 二年           |

|      |      |                    |                    | 榮留王薨  寶藏    |                |

|      |      |                    |                    | 王卽位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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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3 | 癸卯 |  貞觀 十七年       | 善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十二年             | 二年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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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4 | 甲辰 |  貞觀 十八年       | 善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十三年             | 三年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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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5 | 乙巳 |  貞觀 十九年       | 善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十四年             | 四年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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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6 | 丙午 |  貞觀 二十年       | 善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十五年             | 五年              | 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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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7 | 丁未 |  貞觀 二十一年     | 善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十六年             |  六年             |  七年          |

|      |      |                    | 善德王薨  眞德     |                   |                |

|      |      |                    | 勝曼王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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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8 | 戊申 |  貞觀 二十二年     | 眞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二年               | 七年              | 八年           |

|      |      |                    | 改元太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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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9 | 己酉 |  貞觀 二十三年     | 眞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高宗大聖孝皇帝    | 三年               | 八年              | 九年           |

|      |      |   治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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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0 | 庚戌 |  永徽 元年         | 眞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四年               | 九年              | 十年           |

|      |      |                    | 始行中國正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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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1 | 辛亥 |  永徽 二年         | 眞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五年               | 十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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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2 | 壬子 |  永徽 三年         | 眞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六年               | 十一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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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      |      |                  |                   |                    | 무왕 사망.       |

|      |      |                  |                   |                    | 의자왕 즉위      |

|      |      |                  |                   |                    |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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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2 | 임인 | 정관 16년        | 선덕왕 11년       | 영류왕 25년        | 의자왕 2년       |

|      |      |                  |                   | 영류왕 사망.       |                  |

|      |      |                  |                   | 보장왕 즉위        |                  |

|      |      |                  |                   | 원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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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3 | 계묘 | 정관 17년        | 선덕왕 12년       | 보장왕 2년         | 의자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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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4 | 갑진 | 정관 18년        | 선덕왕 13년       | 보장왕 3년         | 의자왕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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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5 | 을사 | 정관 19년        | 선덕왕 14년       | 보장왕 4년         | 의자왕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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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6 | 병오 | 정관 20년        | 선덕왕 15년       | 보장왕 5년         | 의자왕 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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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7 | 정미 | 정관 21년        | 선덕왕 16년       | 보장왕 6년         | 의자왕 7년       |

|      |      |                  | 선덕왕 사망.      |                    |                  |

|      |      |                  | 진덕왕 승만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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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8 | 무신 | 정관 22년        | 진덕왕 2년        | 보장왕 7년         | 의자왕 8년       |

|      |      |                  | 연호를 태화로     |                    |                  |

|      |      |                  | 개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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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49 | 기유 | 정관 23년        | 진덕왕 3년        | 보장왕 8년         | 의자왕 9년       |

|      |      | 고종대성효황제   |                   |                    |                  |

|      |      | 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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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0 | 경술 | 영휘 원년        | 진덕왕 4년        | 보장왕 9년         | 의자왕 10년      |

|      |      |                  | 중국의 정삭       |                    |                  |

|      |      |                  | 사용 시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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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1 | 신해 | 영휘 2년         | 진덕왕 5년        | 보장왕 10년        | 의자왕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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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2 | 임자 | 영휘 3년         | 진덕왕 6년        | 보장왕 11년        | 의자왕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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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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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3 | 癸丑 |  永徽 四年         | 眞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七年               | 十二年            | 十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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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4 | 甲寅 |  永徽 五年         | 眞德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八年               | 十三年            | 十四年         |

|      |      |                    | 眞德王薨           |                   |                |

|      |      |                    | 太宗王春秋         |                   |                |

|      |      |                    | 卽位元年           |                   |                |

|      |      |                    | 從此已下眞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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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5 | 乙卯 |  永徽 六年         | 太宗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二年               | 十四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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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6 | 丙辰 |  顯慶 元年         | 太宗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三年               | 十五年            | 十六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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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7 | 丁巳 |  顯慶 二年         | 太宗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四年               | 十六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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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8 | 戊午 |  顯慶 三年         | 太宗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五年               | 十七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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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9 | 己未 |  顯慶 四年         | 太宗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六年               | 十八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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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0 | 庚申 |  顯慶 五年         | 太宗王             | 寶藏王            | 義慈王         |

|      |      |                    | 七年               | 十九年            | 二十(-二)年??  |

|      |      |                    |                    |                   | 唐將蘇定方     |

|      |      |                    |                    |                   | 與羅人討之,    |

|      |      |                    |                    |                   | 王義慈除{降}?? |

|      |      |                    |                    |                   | 百濟三十一王   |

|      |      |                    |                    |                   | 六百七十八年   |

|      |      |                    |                    |                   | 而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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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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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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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3 | 계축 | 영휘 4년         | 진덕왕 7년        | 보장왕 12년        | 의자왕 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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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4 | 갑인 | 영휘 5년         | 진덕왕 8년        | 보장왕 13년        | 의자왕 14년      |

|      |      |                  | 진덕왕 사망.      |                    |                  |

|      |      |                  | 태종왕 춘추       |                    |                  |

|      |      |                  | 즉위 원년         |                    |                  |

|      |      |                  | 이 이하가 진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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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5 | 을묘 | 영휘 6년         | 태종왕 2년        | 보장왕 14년        | 의자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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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6 | 병진 | 현경 원년        | 태종왕 3년        | 보장왕 15년        | 의자왕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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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7 | 정사 | 현경 2년         | 태종왕 4년        | 보장왕 16년        | 의자왕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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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8 | 무오 | 현경 3년         | 태종왕 5년        | 보장왕 17년        | 의자왕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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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59 | 기미 | 현경 4년         | 태종왕 6년        | 보장왕 18년        | 의자왕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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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0 | 경신 | 현경 5년         | 태종왕 7년        | 보장왕 19년        | 의자왕 20년      |

|      |      |                  |                   |                    | 당장 소정방이    |

|      |      |                  |                   |                    | 신라와 함께      |

|      |      |                  |                   |                    | 토벌. 의자왕     |

|      |      |                  |                   |                    | 항복. 백제, 36대 |

|      |      |                  |                   |                    | 678년 만에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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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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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1 | 辛酉 |  龍朔 元年         | 太宗(+薨)??        | 寶藏王            |                |

|      |      |                    | 文武王(+法敏)??    | 二十年            |                |

|      |      |                    | (-武)??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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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2 | 壬戌 |  龍朔 二年         | 文武王             | 寶藏王 二十一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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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3 | 癸亥 |  龍朔 三年         | 文武王             | 寶藏王 二十二年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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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4 | 甲子 |  麟德 元年         | 文武王             | 寶藏王            |                |

|      |      |                    | 四年               | 二十三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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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5 | 乙丑 |  麟德 二年         | 文武王             | 寶藏王            |                |

|      |      |                    | 五年               | 二十四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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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6 | 丙寅 |  乾封 元年         | 文武王             | 寶藏王            |                |

|      |      |                    | 六年               | 二十五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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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7 | 丁卯 |  乾封 二年         | 文武王             | 寶藏王            |                |

|      |      |                    | 七年               | 二十六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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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8 | 戊辰 |  摠章 元年         | 文武王             | 寶藏王            |                |

|      |      |                    | 八年               | 二十七年          |                |

|      |      |                    |                    | 唐將李勣行軍(??), |                |

|      |      |                    |                    | {與}??羅人攻破擒王|                |

|      |      |                    |                    | 以歸. 高氏二十八王|                |

|      |      |                    |                    | 七百(??){五}??年而|                |

|      |      |                    |                    | 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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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9 | 己巳 |  摠章 二年         | 文武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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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0 | 庚午 |  成章{咸亨}??元年  | 文武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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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1 | 辛未 |  咸亨二年          | 文武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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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2 | 壬申 |  咸亨三年          | 文武王             |                   |                |

|      |      |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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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3 | 癸酉 |  咸亨四年          | 文武王             |                   |                |

|      |      |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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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4 | 甲戌 |  上元 元年         | 文武王             |                   |                |

|      |      |                    | 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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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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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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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1 | 신유 | 용삭 원년        | 태종 사망.        | 보장왕 20년        |                  |

|      |      |                  | 문무왕 법민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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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2 | 임술 | 용삭 2년         | 문무왕 2년        | 보장왕 2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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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3 | 계해 | 용삭 3년         | 문무왕 3년        | 보장왕 2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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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4 | 갑자 | 인덕 원년        | 문무왕 4년        | 보장왕 2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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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5 | 을축 | 인덕 2년         | 문무왕 5년        | 보장왕 2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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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6 | 병인 | 건봉 원년        | 문무왕 6년        | 보장왕 2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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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7 | 정묘 | 건봉 2년         | 문무왕 7년        | 보장왕 2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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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8 | 무진 | 총장 원년        | 문무왕 8년        | 보장왕 27년        |                  |

|      |      |                  |                   | 당의 장군 이적이   |                  |

|      |      |                  |                   | 진군. 신라와 함께  |                  |

|      |      |                  |                   | 고구려를 격파.     |                  |

|      |      |                  |                   | 왕을 잡아 귀국.    |                  |

|      |      |                  |                   | 고씨는 28대 705년  |                  |

|      |      |                  |                   | 만에 멸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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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69 | 기사 | 총장 2년         | 문무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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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0 | 경오 | 함형 원년        | 문무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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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1 | 신미 | 함형 2년         | 문무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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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2 | 임신 | 함형 3년         | 문무왕 1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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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3 | 계유 | 함형 4년         | 문무왕 1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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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4 | 갑술 | 상원 원년        | 문무왕 1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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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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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5 | 乙亥 |  上元 二年         | 文武王             |                   |                |

|      |      |                    | 十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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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6 | 丙子 |  儀鳳 元年         | 文武王             |                   |                |

|      |      |                    | 十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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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7 | 丁丑 |  儀鳳 二年         | 文武王             |                   |                |

|      |      |                    | 十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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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8 | 戊寅 |  儀鳳 三年         | 文武王             |                   |                |

|      |      |                    | 十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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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9 | 己卯 |  調露 元年         | 文武王             |                   |                |

|      |      |                    | 十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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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0 | 庚辰 |  永隆 元年         | 文武王             |                   |                |

|      |      |                    | 二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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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1 | 辛巳 |  開耀 元年         | 文武王             |                   |                |

|      |      |                    | 二十一年           |                   |                |

|      |      |                    | 文武王薨           |                   |                |

|      |      |                    | 神文王政明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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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2 | 壬午 |  永淳 元年         | 神文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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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3 | 癸未 |  洪道{弘道}??元年  | 神文王             |                   |                |

|      |      |  中宗大聖孝皇帝    | 三年               |                   |                |

|      |      |  顯  則天順聖      |                    |                   |                |

|      |      |  皇后武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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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4 | 甲申 |  嗣聖 元年  豫     | 神文王             |                   |                |

|      |      |  {睿}??王旦 文明   | 四年               |                   |                |

|      |      |  元年  光宅 元年   | 光宅羅不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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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5 | 乙酉 |  垂拱 元年         | 神文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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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6 | 丙戌 |  垂拱 二年         | 神文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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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資治通鑑」.趙炳舜.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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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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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5 | 을해 | 상원 2년         | 문무왕 1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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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6 | 병자 | 의봉 원년        | 문무왕 1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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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7 | 정축 | 의봉 2년         | 문무왕 1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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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8 | 무인 | 의봉 3년         | 문무왕 1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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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79 | 기묘 | 조로 원년        | 문무왕 1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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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0 | 경진 | 영륭 원년        | 문무왕 2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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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1 | 신사 | 개요 원년        | 문무왕 21년       |                    |                  |

|      |      |                  | 문무왕 사망.      |                    |                  |

|      |      |                  | 신문왕 정명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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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2 | 임오 | 영순 원년        | 신문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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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3 | 계미 | 홍도 원년 중종   | 신문왕 3년        |                    |                  |

|      |      | 대성효황제 현    |                   |                    |                  |

|      |      | 측천순성황후     |                   |                    |                  |

|      |      | 무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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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4 | 갑신 | 사성 원년        | 신문왕 4년        |                    |                  |

|      |      | 예왕 단          | 광택 연호를 신라  |                    |                  |

|      |      | 문명 원년        | 사용하지 않음.    |                    |                  |

|      |      | 광택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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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5 | 을유 | 수공 원년        | 신문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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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6 | 병술 | 수공 2년         | 신문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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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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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7 | 丁亥 |  垂拱 三年         | 神文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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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8 | 戊子 |  垂拱 四年         | 神文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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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9 | 己丑 |  永昌 元年         | 神文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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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0 | 庚寅 |  載初 元年         | 神文王             |                   |                |

|      |      |  周天授 元年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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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1 | 辛卯 |  天授一{二}??年    | 神文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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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2 | 壬辰 |  如意 元年         | 神文王             |                   |                |

|      |      |  長壽 元年         |  十二年            |                   |                |

|      |      |                    | 神文王薨           |                   |                |

|      |      |                    | 孝昭王{孝照王}??   |                   |                |

|      |      |                    | 理洪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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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3 | 癸巳 |  長壽 二年         | 孝昭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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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4 | 甲午 |  延載 元年         | 孝昭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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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5 | 乙未 |  證聖 元年         | 孝昭王             |                   |                |

|      |      |  天冊萬歲 元年     | 四年               |                   |                |

|      |      |                    | 天冊萬歲羅不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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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6 | 丙申 |  萬歲登封 元年     | 孝昭王             |                   |                |

|      |      |  萬歲通天 元年     | 五年               |                   |                |

|      |      |                    | 登封羅不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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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7 | 丁酉 |  神功 元年         | 孝昭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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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8 | 戊戌 |  聖曆 元年         | 孝昭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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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9 | 己亥 |  聖曆 二年         | 孝昭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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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0 | 庚子 |  久視 元年         | 孝昭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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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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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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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7 | 정해 | 수공 3년         | 신문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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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8 | 무자 | 수공 4년         | 신문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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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89 | 기축 | 영창 원년        | 신문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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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0 | 경인 | 재초 원년        | 신문왕 10년       |                    |                  |

|      |      | 주 천수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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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1 | 신묘 | 천수 2년         | 신문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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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2 | 임진 | 여의 원년        | 신문왕 12년       |                    |                  |

|      |      | 장수 원년        | 신문왕 사망.      |                    |                  |

|      |      |                  | 효소왕 이홍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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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3 | 계사 | 장수 2년         | 효소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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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4 | 갑오 | 연재 원년        | 효소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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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5 | 을미 | 증성 원년        | 효소왕 4년        |                    |                  |

|      |      | 천책만세 원년    | 천책만세 연호를   |                    |                  |

|      |      |                  | 신라에서 쓰지     |                    |                  |

|      |      |                  | 않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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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6 | 병신 | 만세등봉 원년    | 효소왕 5년        |                    |                  |

|      |      | 만세통천 원년    | 등봉 연호를       |                    |                  |

|      |      |                  | 신라에서 쓰지     |                    |                  |

|      |      |                  | 않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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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7 | 정유 | 신공 원년        | 효소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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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8 | 무술 | 성력 원년        | 효소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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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699 | 기해 | 성력 2년         | 효소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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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0 | 경자 | 구시 원년        | 효소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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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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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1 | 辛丑 |  大足 元年         | 孝昭王             |                   |                |

|      |      |  長安 元年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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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2 | 壬寅 |  長安 二年         | 孝昭王             |                   |                |

|      |      |                    | 十一年             |                   |                |

|      |      |                    | 孝昭王{孝照王}??   |                   |                |

|      |      |                    | 薨  聖德王興光     |                   |                |

|      |      |                    | 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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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3 | 癸卯 |  長安 三年         | 聖德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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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4 | 甲辰 |  長安 四年         | 聖德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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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5 | 乙巳 |  唐中宗            | 聖德王             |                   |                |

|      |      |  神龍 元年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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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6 | 丙午 |  神龍 二年         | 聖德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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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7 | 丁未 |  景龍 元年         | 聖德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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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8 | 戊申 |  景龍 二年         | 聖德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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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9 | 己酉 |  景龍 三年         | 聖德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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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0 | 庚戌 |  景龍 四年         | 聖德王             |                   |                |

|      |      |  睿宗大聖孝皇帝    | 九年               |                   |                |

|      |      |  溫  景雲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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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1 | 辛亥 |  景雲 二年         | 聖德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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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2 | 壬子 |  太極 元年         | 聖德王             |                   |                |

|      |      |  延和 元年         | 十一年             |                   |                |

|      |      |  玄宗大聖皇帝      |                    |                   |                |

|      |      |  隆基  先天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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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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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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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1 | 신축 | 대족 원년        | 효소왕 10년       |                    |                  |

|      |      | 장안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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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2 | 임인 | 장안 2년         | 효소왕 11년       |                    |                  |

|      |      |                  | 효소왕 사망.      |                    |                  |

|      |      |                  | 성덕왕 흥광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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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3 | 계묘 | 장안 3년         | 성덕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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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4 | 갑진 | 장안 4년         | 성덕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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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5 | 을사 | 당 중종          | 성덕왕 4년        |                    |                  |

|      |      | 신룡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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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6 | 병오 | 신룡 2년         | 성덕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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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7 | 정미 | 경룡 원년        | 성덕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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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8 | 무신 | 경룡 2년         | 성덕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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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09 | 기유 | 경룡 3년         | 성덕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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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0 | 경술 | 경룡 4년         | 성덕왕 9년        |                    |                  |

|      |      | 예종 대성        |                   |                    |                  |

|      |      | 효황제 온        |                   |                    |                  |

|      |      | 경운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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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1 | 신해 | 경운 2년         | 성덕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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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2 | 임자 | 태극 원년        | 성덕왕 11년       |                    |                  |

|      |      | 연화 원년        |                   |                    |                  |

|      |      | 현종대성황제     |                   |                    |                  |

|      |      | 융기             |                   |                    |                  |

|      |      | 선천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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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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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3 | 癸丑 |  開元 元年         | 聖德王             |                   |                |

|      |      |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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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4 | 甲寅 |  開元 二年         | 聖德王             |                   |                |

|      |      |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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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5 | 乙卯 |  開元 三年         | 聖德王             |                   |                |

|      |      |                    | 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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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6 | 丙辰 |  開元 四年         | 聖德王             |                   |                |

|      |      |                    | 十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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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7 | 丁巳 |  開元 五年         | 聖德王             |                   |                |

|      |      |                    | 十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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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8 | 戊午 |  開元 六年         | 聖德王             |                   |                |

|      |      |                    | 十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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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9 | 己未 |  開元 七年         | 聖德王             |                   |                |

|      |      |                    | 十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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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0 | 庚申 |  開元 八年         | 聖德王             |                   |                |

|      |      |                    | 十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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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1 | 辛酉 |  開元 九年         | 聖德王             |                   |                |

|      |      |                    | 二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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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2 | 壬戌 |  開元 十年         | 聖德王             |                   |                |

|      |      |                    | 二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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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3 | 癸亥 |  開元 十一年       | 聖德王             |                   |                |

|      |      |                    | 二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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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4 | 甲子 |  開元 十二年       | 聖德王             |                   |                |

|      |      |                    | 二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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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5 | 乙丑 |  開元 十三年       | 聖德王             |                   |                |

|      |      |                    | 二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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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6 | 丙寅 |  開元 十四年       | 聖德王             |                   |                |

|      |      |                    | 二十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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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7 | 丁卯 |  開元 十五年       | 聖德王             |                   |                |

|      |      |                    | 二十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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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8 | 戊辰 |  開元 十六年       | 聖德王             |                   |                |

|      |      |                    | 二十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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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9 | 己巳 |  開元 十七年       | 聖德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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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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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3 | 계축 | 개원 원년        | 성덕왕 1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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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4 | 갑인 | 개원 2년         | 성덕왕 1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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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5 | 을묘 | 개원 3년         | 성덕왕 1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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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6 | 병진 | 개원 4년         | 성덕왕 1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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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7 | 정사 | 개원 5년         | 성덕왕 1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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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8 | 무오 | 개원 6년         | 성덕왕 1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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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19 | 기미 | 개원 7년         | 성덕왕 1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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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0 | 경신 | 개원 8년         | 성덕왕 1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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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1 | 신유 | 개원 9년         | 성덕왕 2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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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2 | 임술 | 개원 10년        | 성덕왕 2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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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3 | 계해 | 개원 11년        | 성덕왕 2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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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4 | 갑자 | 개원 12년        | 성덕왕 2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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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5 | 을축 | 개원 13년        | 성덕왕 2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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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6 | 병인 | 개원 14년        | 성덕왕 2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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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7 | 정묘 | 개원 15년        | 성덕왕 2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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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8 | 무진 | 개원 16년        | 성덕왕 2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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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29 | 기사 | 개원 17년        | 성덕왕 2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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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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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0 | 庚午 |  開元 十八年       | 聖德王             |                   |                |

|      |      |                    | 二十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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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1 | 辛未 |  開元 十九年       | 聖德王             |                   |                |

|      |      |                    | 三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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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2 | 壬申 |  開元 二十年       | 聖德王             |                   |                |

|      |      |                    | 三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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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3 | 癸酉 |  開元 二十一年     | 聖德王             |                   |                |

|      |      |                    | 三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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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4 | 甲戌 |  開元 二十二年     | 聖德王             |                   |                |

|      |      |                    | 三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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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5 | 乙亥 |  開元 二十三年     | 聖德王             |                   |                |

|      |      |                    | 三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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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6 | 丙子 |  開元 二十四年     | 聖德王             |                   |                |

|      |      |                    | 三十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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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7 | 丁丑 |  開元 二十五年     | 聖德王             |                   |                |

|      |      |                    | 三十六年           |                   |                |

|      |      |                    | 聖德王薨           |                   |                |

|      |      |                    | 孝成王永{承}??     |                   |                |

|      |      |                    | 慶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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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8 | 戊寅 |  開元 二十六年     | 孝成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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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9 | 己卯 |  開元 二十七年     | 孝成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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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0 | 庚辰 |  開元 二十八年     | 孝成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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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1 | 辛巳 |  開元 二十九年     | 孝成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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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2 | 壬午 |  天寶 元年         | 孝成王             |                   |                |

|      |      |                    | 六年               |                   |                |

|      |      |                    | 孝成王薨           |                   |                |

|      |      |                    | 景泰王{景德王}??   |                   |                |

|      |      |                    | 憲英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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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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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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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0 | 경오 | 개원 18년        | 성덕왕 2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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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1 | 신미 | 개원 19년        | 성덕왕 3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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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2 | 임신 | 개원 20년        | 성덕왕 3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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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3 | 계유 | 개원 21년        | 성덕왕 3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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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4 | 갑술 | 개원 22년        | 성덕왕 3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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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5 | 을해 | 개원 23년        | 성덕왕 3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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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6 | 병자 | 개원 24년        | 성덕왕 3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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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7 | 정축 | 개원 25년        | 성덕왕 36년       |                    |                  |

|      |      |                  | 성덕왕 사망.      |                    |                  |

|      |      |                  | 효성왕 승경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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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8 | 무인 | 개원 26년        | 효성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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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39 | 기묘 | 개원 27년        | 효성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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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0 | 경진 | 개원 28년        | 효성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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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1 | 신사 | 개원 29년        | 효성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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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2 | 임오 | 천보 원년        | 효성왕 6년        |                    |                  |

|      |      |                  | 효성왕 사망.      |                    |                  |

|      |      |                  | 경덕왕 헌영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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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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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3 | 癸未 |  天寶 二年         | 景德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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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4 | 甲申 |  天寶 三載         | 景德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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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5 | 乙酉 |  天寶 四載         | 景德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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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6 | 丙戌 |  天寶 五載         | 景德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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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7 | 丁亥 |  天寶 六載         | 景德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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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8 | 戊子 |  天寶 七載         | 景德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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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9 | 己丑 |  天寶 八載         | 景德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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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0 | 庚寅 |  天寶 九載         | 景德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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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1 | 辛卯 |  天寶 十載         | 景德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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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2 | 壬辰 |  天寶 十一載       | 景德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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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3 | 癸巳 |  天寶 十二載       | 景德王             |                   |                |

|      |      |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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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4 | 甲午 |  天寶 十三載       | 景德王             |                   |                |

|      |      |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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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5 | 乙未 |  天寶 十四載       | 景德王             |                   |                |

|      |      |                    | 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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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6 | 丙申 |  天寶 十五載       | 景德王             |                   |                |

|      |      |  肅宗皇帝堯{亨}??  | 十五年             |                   |                |

|      |      |  至德 元載         | 至德維{羅}??不行,  |                   |                |

|      |      |                    | 猶用天寶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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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7 | 丁酉 |  至德 二載         | 景德王             |                   |                |

|      |      |                    | 十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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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8 | 戊戌 |  乾元 元年         | 景德王             |                   |                |

|      |      |                    | 十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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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資治通鑑」.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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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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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3 | 계미 | 천보 2년         | 경덕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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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4 | 갑신 | 천보 3년         | 경덕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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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5 | 을유 | 천보 4년         | 경덕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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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6 | 병술 | 천보 5년         | 경덕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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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7 | 정해 | 천보 6년         | 경덕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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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8 | 무자 | 천보 7년         | 경덕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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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49 | 기축 | 천보 8년         | 경덕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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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0 | 경인 | 천보 9년         | 경덕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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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1 | 신묘 | 천보 10년        | 경덕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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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2 | 임진 | 천보 11년        | 경덕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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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3 | 계사 | 천보 12년        | 경덕왕 1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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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4 | 갑오 | 천보 13년        | 경덕왕 1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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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5 | 을미 | 천보 14년        | 경덕왕 1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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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6 | 병신 | 천보 15년        | 경덕왕 15년       |                    |                  |

|      |      | 숙종 황제 형     | 지덕 연호를       |                    |                  |

|      |      | 지덕 원년        | 신라에서 쓰지     |                    |                  |

|      |      |                  | 않고 천보를       |                    |                  |

|      |      |                  | 여전히 사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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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7 | 정유 | 지덕 2년         | 경덕왕 1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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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8 | 무술 | 건원 원년        | 경덕왕 1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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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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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9 | 己亥 |  乾元 二年         | 景德王             |                   |                |

|      |      |                    | 十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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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0 | 庚子 |  上元 元年         | 景德王             |                   |                |

|      |      |                    | 十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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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1 | 辛丑 |  上元 二年         | 景德王             |                   |                |

|      |      |                    | 二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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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2 | 壬寅 |  寶應 元年         | 景德王             |                   |                |

|      |      |  代宗皇帝預        | 二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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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3 | 癸卯 |  廣德 元年         | 景德王             |                   |                |

|      |      |                    | 二十二年           |                   |                |

|      |      |                    | 廣德羅不行, 猶用   |                   |                |

|      |      |                    | 寶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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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4 | 甲辰 |  廣德 二年         | 景德王             |                   |                |

|      |      |                    | 二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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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5 | 乙巳 |  永泰 元年         | 景德王             |                   |                |

|      |      |                    | 二十四年           |                   |                |

|      |      |                    | 景德王薨           |                   |                |

|      |      |                    | 惠恭王(??)(??)     |                   |                |

|      |      |                    | {乾運}??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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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6 | 丙午 |  大曆 元年         | 惠恭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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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7 | 丁未 |  大曆 二年         | 惠恭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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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8 | 戊申 |  大曆 三年         | 惠恭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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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9 | 己酉 |  大曆 四年         | 惠恭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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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0 | 庚戌 |  大曆 五年         | 惠恭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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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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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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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59 | 기해 | 건원 2년         | 경덕왕 1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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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0 | 경자 | 상원 원년        | 경덕왕 1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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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1 | 신축 | 상원 2년         | 경덕왕 2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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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2 | 임인 | 보응 원년        | 경덕왕 21년       |                    |                  |

|      |      | 대종황제 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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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3 | 계묘 | 광덕 원년        | 경덕왕 22년       |                    |                  |

|      |      |                  | 광덕 연호를       |                    |                  |

|      |      |                  | 신라에서 쓰지 않  |                    |                  |

|      |      |                  | 고 여전히 보응을  |                    |                  |

|      |      |                  | 사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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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4 | 갑진 | 광덕 2년         | 경덕왕 2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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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5 | 을사 | 영태 원년        | 경덕왕 24년       |                    |                  |

|      |      |                  | 경덕왕 사망.      |                    |                  |

|      |      |                  | 혜공왕 건운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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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6 | 병오 | 대력 원년        | 혜공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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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7 | 정미 | 대력 2년         | 혜공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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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8 | 무신 | 대력 3년         | 혜공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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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69 | 기유 | 대력 4년         | 혜공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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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0 | 경술 | 대력 5년         | 혜공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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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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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1 | 辛亥 |  大曆 六年         | 惠恭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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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2 | 壬子 |  大曆 七年         | 惠恭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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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3 | 癸丑 |  大曆 八年         | 惠恭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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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4 | 甲寅 |  大曆 九年         | 惠恭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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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5 | 乙卯 |  大曆 十年         | 惠恭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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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6 | 丙辰 |  大曆 十一年       | 惠恭王             |                   |                |

|      |      |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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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7 | 丁巳 |  大曆 十二年       | 惠恭王             |                   |                |

|      |      |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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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8 | 戊午 |  大曆 十三年       | 惠恭王             |                   |                |

|      |      |                    | 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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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9 | 己未 |  大曆 十四年       | 惠恭王             |                   |                |

|      |      |  德宗皇帝适        | 十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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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0 | 庚申 |  建中 元年         | 惠恭王             |                   |                |

|      |      |                    | 十六年             |                   |                |

|      |      |                    | 惠恭王薨           |                   |                |

|      |      |                    | 宣德王良相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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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1 | 辛酉 |  建中 二年         | 宣德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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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2 | 壬戌 |  建中 三年         | 宣德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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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3 | 癸亥 |  建中 四年         | 宣德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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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4 | 甲子 |  興元 元年         | 宣德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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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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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1 | 신해 | 대력 6년         | 혜공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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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2 | 임자 | 대력 7년         | 혜공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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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3 | 계축 | 대력 8년         | 혜공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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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4 | 갑인 | 대력 9년         | 혜공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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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5 | 을묘 | 대력 10년        | 혜공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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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6 | 병진 | 대력 11년        | 혜공왕 1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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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7 | 정사 | 대력 12년        | 혜공왕 1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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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8 | 무오 | 대력 13년        | 혜공왕 1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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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79 | 기미 | 대력 14년        | 혜공왕 15년       |                    |                  |

|      |      | 덕종 황제 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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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0 | 경신 | 건중 원년        | 혜공왕 16년       |                    |                  |

|      |      |                  | 혜공왕 사망.      |                    |                  |

|      |      |                  | 선덕왕 양상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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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1 | 신유 | 건중 2년         | 선덕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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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2 | 임술 | 건중 3년         | 선덕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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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3 | 계해 | 건중 4년         | 선덕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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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4 | 갑자 | 흥원 원년        | 선덕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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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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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5 | 乙丑 |  貞元 元年         | 宣德王             |                   |                |

|      |      |                    | 六年               |                   |                |

|      |      |                    | 宣德王薨           |                   |                |

|      |      |                    | 元聖王敬信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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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6 | 丙寅 |  貞元 二年         | 元聖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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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7 | 丁卯 |  貞元 三年         | 元聖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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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8 | 戊辰 |  貞元 四年         | 元聖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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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9 | 己巳 |  貞元 五年         | 元聖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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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0 | 庚午 |  貞元 六年         | 元聖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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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1 | 辛未 |  貞元 七年         | 元聖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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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2 | 壬申 |  貞元 八年         | 元聖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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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3 | 癸酉 |  貞元 九年         | 元聖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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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4 | 甲戌 |  貞元 十年         | 元聖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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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5 | 乙亥 |  貞元 十一年       | 元聖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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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6 | 丙子 |  貞元 十二年       | 元聖王             |                   |                |

|      |      |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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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7 | 丁丑 |  貞元 十三年       | 元聖王             |                   |                |

|      |      |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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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8 | 戊寅 |  貞元 十四年       | 元聖王             |                   |                |

|      |      |                    | 十四年             |                   |                |

|      |      |                    | 元聖王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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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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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5 | 을축 | 정원 원년        | 선덕왕 6년        |                    |                  |

|      |      |                  | 선덕왕 사망.      |                    |                  |

|      |      |                  | 원성왕 경신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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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6 | 병인 | 정원 2년         | 원성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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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7 | 정묘 | 정원 3년         | 원성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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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8 | 무진 | 정원 4년         | 원성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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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89 | 기사 | 정원 5년         | 원성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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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0 | 경오 | 정원 6년         | 원성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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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1 | 신미 | 정원 7년         | 원성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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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2 | 임신 | 정원 8년         | 원성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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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3 | 계유 | 정원 9년         | 원성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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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4 | 갑술 | 정원 10년        | 원성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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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5 | 을해 | 정원 11년        | 원성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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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6 | 병자 | 정원 12년        | 원성왕 1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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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7 | 정축 | 정원 13년        | 원성왕 1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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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8 | 무인 | 정원 14년        | 원성왕 14년       |                    |                  |

|      |      |                  | 원성왕 사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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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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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9 | 己卯 |  貞元 十五年       | 昭聖王俊邕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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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0 | 庚辰 |  貞元 十六年       | 昭聖王薨           |                   |                |

|      |      |                    | 哀莊王重熙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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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1 | 辛巳 |  貞元 十七年       | 哀莊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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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2 | 壬午 |  貞元 十八年       | 哀莊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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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3 | 癸未 |  貞元 十九年       | 哀莊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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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4 | 甲申 |  貞元 二十年       | 哀莊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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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5 | 乙酉 |  貞元 二十一年     | 哀莊王             |                   |                |

|      |      |  順宗皇帝誦        | 六年               |                   |                |

|      |      |  永貞 元年         |                    |                   |                |

|      |      |  憲宗皇帝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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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6 | 丙戌 |  元和 元年         | 哀莊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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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7 | 丁亥 |  元和 二年         | 哀莊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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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8 | 戊子 |  元和 三年         | 哀莊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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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9 | 己丑 |  元和 四年         | 哀莊王             |                   |                |

|      |      |                    | 十年               |                   |                |

|      |      |                    | 哀莊王薨           |                   |                |

|      |      |                    | 憲德王彦昇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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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0 | 庚寅 |  元和 五年         | 憲德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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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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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799 | 기묘 | 정원 15년        | 소성왕 준옹 즉위  |                    |                  |

|      |      |                  |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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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0 | 경진 | 정원 16년        | 소성왕 사망.      |                    |                  |

|      |      |                  | 애장왕 중희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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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1 | 신사 | 정원 17년        | 애장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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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2 | 임오 | 정원 18년        | 애장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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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3 | 계미 | 정원 19년        | 애장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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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4 | 갑신 | 정원 20년        | 애장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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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5 | 을유 | 정원 21년        | 애장왕 6년        |                    |                  |

|      |      | 순종 황제 송     |                   |                    |                  |

|      |      | 영정 원년        |                   |                    |                  |

|      |      | 헌종 황제 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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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6 | 병술 | 원화 원년        | 애장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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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7 | 정해 | 원화 2년         | 애장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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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8 | 무자 | 원화 3년         | 애장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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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09 | 기축 | 원화 4년         | 애장왕 10년       |                    |                  |

|      |      |                  | 애장왕 사망.      |                    |                  |

|      |      |                  | 헌덕왕 언승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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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0 | 경인 | 원화 5년         | 헌덕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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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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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1 | 辛卯 |  元和 六年         | 憲德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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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2 | 壬辰 |  元和 七年         | 憲德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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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3 | 癸巳 |  元和 八年         | 憲德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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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4 | 甲午 |  元和 九年         | 憲德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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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5 | 乙未 |  元和 十年         | 憲德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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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6 | 丙申 |  元和 十一年       | 憲德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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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7 | 丁酉 |  元和 十二年       | 憲德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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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8 | 戊戌 |  元和 十三年       | 憲德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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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9 | 己亥 |  元和 十四年       | 憲德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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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0 | 庚子 |  元和 十五年       | 憲德王             |                   |                |

|      |      |  穆宗皇帝恒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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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1 | 辛丑 |  長慶 元年         | 憲德王             |                   |                |

|      |      |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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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2 | 壬寅 |  長慶 二年         | 憲德王             |                   |                |

|      |      |                    | 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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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3 | 癸卯 |  長慶 三年         | 憲德王             |                   |                |

|      |      |                    | 十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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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4 | 甲辰 |  長慶 四年         | 憲德王             |                   |                |

|      |      |  敬宗皇帝(??)      | 十六年             |                   |                |

|      |      |  {湛}??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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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5 | 乙巳 |  寶曆 元年         | 憲德王             |                   |                |

|      |      |                    | 十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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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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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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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1 | 신묘 | 원화 6년         | 헌덕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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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2 | 임진 | 원화 7년         | 헌덕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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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3 | 계사 | 원화 8년         | 헌덕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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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4 | 갑오 | 원화 9년         | 헌덕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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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5 | 을미 | 원화 10년        | 헌덕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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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6 | 병신 | 원화 11년        | 헌덕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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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7 | 정유 | 원화 12년        | 헌덕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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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8 | 무술 | 원화 13년        | 헌덕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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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19 | 기해 | 원화 14년        | 헌덕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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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0 | 경자 | 원화 15년        | 헌덕왕 12년       |                    |                  |

|      |      | 목종 황제 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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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1 | 신축 | 장경 원년        | 헌덕왕 1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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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2 | 임인 | 장경 2년         | 헌덕왕 1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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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3 | 계묘 | 장경 3년         | 헌덕왕 1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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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4 | 갑진 | 장경 4년         | 헌덕왕 16년       |                    |                  |

|      |      | 경종 황제 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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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5 | 을사 | 보력 원년        | 헌덕왕 1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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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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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6 | 丙午 |  寶曆 二年         | 憲德王             |                   |                |

|      |      |  文宗皇帝昻        | 十八年             |                   |                |

|      |      |                    | 憲德王薨           |                   |                |

|      |      |                    | 興德王景(??)       |                   |                |

|      |      |                    | {徽}??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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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7 | 丁未 |  太和 元年         | 興德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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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8 | 戊申 |  太和 二年         | 興德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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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9 | 己酉 |  太和 三年         | 興德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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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0 | 庚戌 |  太和 四年         | 興德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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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1 | 辛亥 |  太和 五年         | 興德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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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2 | 壬子 |  太和 六年         | 興德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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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3 | 癸丑 |  太和 七年         | 興德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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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4 | 甲寅 |  太和 八年         | 興德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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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5 | 乙卯 |  太和 九年         | 興德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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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6 | 丙辰 |  開成 元年         | 興德王             |                   |                |

|      |      |                    | 十一年             |                   |                |

|      |      |                    | 興德王薨  僖康     |                   |                |

|      |      |                    | 王悌隆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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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7 | 丁巳 |  開成 二年         | 僖康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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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8 | 戊午 |  開成 三年         | 僖康王             |                   |                |

|      |      |                    | 三年               |                   |                |

|      |      |                    | 僖康王薨           |                   |                |

|      |      |                    | 閔哀王明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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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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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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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6 | 병오 | 보력 2년         | 헌덕왕 18년       |                    |                  |

|      |      | 문종 황제 앙     | 헌덕왕 사망.      |                    |                  |

|      |      |                  | 흥덕왕 경휘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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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7 | 정미 | 태화 원년        | 흥덕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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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8 | 무신 | 태화 2년         | 흥덕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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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29 | 기유 | 태화 3년         | 흥덕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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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0 | 경술 | 태화 4년         | 흥덕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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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1 | 신해 | 태화 5년         | 흥덕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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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2 | 임자 | 태화 6년         | 흥덕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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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3 | 계축 | 태화 7년         | 흥덕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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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4 | 갑인 | 태화 8년         | 흥덕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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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5 | 을묘 | 태화 9년         | 흥덕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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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6 | 병진 | 개성 원년        | 흥덕왕 11년       |                    |                  |

|      |      |                  | 흥덕왕 사망.      |                    |                  |

|      |      |                  | 희강왕 제륭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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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7 | 정사 | 개성 2년         | 희강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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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8 | 무오 | 개성 3년         | 희강왕 3년        |                    |                  |

|      |      |                  | 희강왕 사망.      |                    |                  |

|      |      |                  | 민애왕 명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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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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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9 | 己未 |  開成 四年         | 閔哀王薨           |                   |                |

|      |      |                    | 神武王祐徵卽位,    |                   |                |

|      |      |                    | 不踰年而薨         |                   |                |

|      |      |                    | 文聖王慶膺         |                   |                |

|      |      |                    | 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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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0 | 庚申 |  開成 五年         | 文聖王             |                   |                |

|      |      |  武宗皇帝炎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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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1 | 辛酉 |  會昌 元年         | 文聖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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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2 | 壬戌 |  會昌 二年         | 文聖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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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3 | 癸亥 |  會昌 三年         | 文聖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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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4 | 甲子 |  會昌 四年         | 文聖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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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5 | 乙丑 |  會昌 五年         | 文聖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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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6 | 丙寅 |  會昌 六年         | 文聖王             |                   |                |

|      |      |  宣宗皇帝침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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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7 | 丁卯 |  大中 元年         | 文聖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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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8 | 戊辰 |  大中 二年         | 文聖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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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9 | 己巳 |  大中 三年         | 文聖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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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0 | 庚午 |  大中 四年         | 文聖王             |                   |                |

|      |      |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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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1 | 辛未 |  大中 五年         | 文聖王             |                   |                |

|      |      |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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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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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39 | 기미 | 개성 4년         | 민애왕 사망.      |                    |                  |

|      |      |                  | 신무왕 우징 즉위. |                    |                  |

|      |      |                  | 해를 넘기지 못하  |                    |                  |

|      |      |                  | 고 사망.          |                    |                  |

|      |      |                  | 문성왕 경응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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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0 | 경신 | 개성 5년         | 문성왕 2년        |                    |                  |

|      |      | 무종 황제 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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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1 | 신유 | 회창 원년        | 문성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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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2 | 임술 | 회창 2년         | 문성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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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3 | 계해 | 회창 3년         | 문성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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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4 | 갑자 | 회창 4년         | 문성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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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5 | 을축 | 회창 5년         | 문성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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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6 | 병인 | 회창 6년         | 문성왕 8년        |                    |                  |

|      |      | 선종 황제 침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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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7 | 정묘 | 대중 원년        | 문성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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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8 | 무진 | 대중 2년         | 문성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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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49 | 기사 | 대중 3년         | 문성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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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0 | 경오 | 대중 4년         | 문성왕 1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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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1 | 신미 | 대중 5년         | 문성왕 1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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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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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2 | 壬申 |  大中 六年         | 文聖王             |                   |                |

|      |      |                    | 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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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3 | 癸酉 |  大中 七年         | 文聖王             |                   |                |

|      |      |                    | 十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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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4 | 甲戌 |  大中 八年         | 文聖王             |                   |                |

|      |      |                    | 十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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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5 | 乙亥 |  大中 九年         | 文聖王             |                   |                |

|      |      |                    | 十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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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6 | 丙子 |  大中 十年         | 文聖王             |                   |                |

|      |      |                    | 十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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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7 | 丁丑 |  大中 十一年       | 文聖王             |                   |                |

|      |      |                    | 十九年             |                   |                |

|      |      |                    | 文聖王薨           |                   |                |

|      |      |                    | 憲安王誼靖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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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8 | 戊寅 |  大中 十二年       | 憲安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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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9 | 己卯 |  大中 十三年       | 憲安王             |                   |                |

|      |      |  懿宗皇帝(??)      | 三年               |                   |                |

|      |      |  {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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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0 | 庚辰 |  咸通 元年         | 憲安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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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1 | 辛巳 |  咸通 二年         | 憲安王             |                   |                |

|      |      |                    | 五年               |                   |                |

|      |      |                    | 憲安王薨           |                   |                |

|      |      |                    | 景文王膺廉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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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2 | 壬午 |  咸通 三年         | 景文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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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3 | 癸未 |  咸通 四年         | 景文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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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4 | 甲申 |  咸通 五年         | 景文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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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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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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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2 | 임신 | 대중 6년         | 문성왕 1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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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3 | 계유 | 대중 7년         | 문성왕 1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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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4 | 갑술 | 대중 8년         | 문성왕 1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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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5 | 을해 | 대중 9년         | 문성왕 1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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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6 | 병자 | 대중 10년        | 문성왕 1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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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7 | 정축 | 대중 11년        | 문성왕 19년       |                    |                  |

|      |      |                  | 문성왕 사망.      |                    |                  |

|      |      |                  | 헌안왕 의정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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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8 | 무인 | 대중 12년        | 헌안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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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59 | 기묘 | 대중 13년        | 헌안왕 3년        |                    |                  |

|      |      | 의종 황제 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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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0 | 경진 | 함통 원년        | 헌안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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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1 | 신사 | 함통 2년         | 헌안왕 5년        |                    |                  |

|      |      |                  | 헌안왕 사망.      |                    |                  |

|      |      |                  | 경문왕 응렴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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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2 | 임오 | 함통 3년         | 경문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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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3 | 계미 | 함통 4년         | 경문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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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4 | 갑신 | 함통 5년         | 경문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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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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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5 | 乙酉 |  咸通 六年         | 景文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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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6 | 丙戌 |  咸通 七年         | 景文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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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7 | 丁亥 |  咸通 八年         | 景文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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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8 | 戊子 |  咸通 九年         | 景文王             |                   |                |

|      |      |                    | 八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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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9 | 己丑 |  咸通 十年         | 景文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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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0 | 庚寅 |  咸通 十一年       | 景文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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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1 | 辛卯 |  咸通 十二年       | 景文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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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2 | 壬辰 |  咸通 十三年       | 景文王             |                   |                |

|      |      |                    | 十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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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3 | 癸巳 |  咸通 十四年       | 景文王             |                   |                |

|      |      |  僖宗皇帝*환       | 十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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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4 | 甲午 |  乾符 元年         | 景文王             |                   |                |

|      |      |                    | 十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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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5 | 乙未 |  乾符 二年         | 景文王             |                   |                |

|      |      |                    | 十五年             |                   |                |

|      |      |                    | 景文王薨           |                   |                |

|      |      |                    | 憲康王晸卽位       |                   |                |

|      |      |                    | 元年二月二十二     |                   |                |

|      |      |                    | 日,                |                   |                |

|      |      |                    | &(??)(??){知}??    |                   |                |

|      |      |                    | 中國改年號,        |                   |                |

|      |      |                    | 改爲乾符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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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6 | 丙申 |  乾符 三年         | 憲康王             |                   |                |

|      |      |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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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7 | 丁酉 |  乾符 四年         | 憲康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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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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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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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5 | 을유 | 함통 6년         | 경문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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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6 | 병술 | 함통 7년         | 경문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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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7 | 정해 | 함통 8년         | 경문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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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8 | 무자 | 함통 9년         | 경문왕 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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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69 | 기축 | 함통 10년        | 경문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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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0 | 경인 | 함통 11년        | 경문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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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1 | 신묘 | 함통 12년        | 경문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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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2 | 임진 | 함통 13년        | 경문왕 1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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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3 | 계사 | 함통 14년        | 경문왕 13년       |                    |                  |

|      |      | 희종 황제 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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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4 | 갑오 | 건부 원년        | 경문왕 1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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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5 | 을미 | 건부 2년         | 경문왕 15년       |                    |                  |

|      |      |                  | 경문왕 사망.      |                    |                  |

|      |      |                  | 헌강왕 정         |                    |                  |

|      |      |                  | 즉위 원년         |                    |                  |

|      |      |                  | 2월 22일 중국에서 |                    |                  |

|      |      |                  | 연호를 바꾼 것을  |                    |                  |

|      |      |                  | 알고 건부 2년으로 |                    |                  |

|      |      |                  | 개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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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6 | 병신 | 건부 3년         | 헌강왕 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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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7 | 정유 | 건부 4년         | 헌강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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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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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8 | 戊戌 |  乾符 五年         | 憲康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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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9 | 己亥 |  乾符 六年         | 憲康王             |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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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0 | 庚子 |  廣明 元年         | 憲康王             |                   |                |

|      |      |                    | 六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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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1 | 辛丑 |  中和 元年         | 憲康王             |                   |                |

|      |      |                    | 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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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2 | 壬寅 |  中和 二年         | 憲康王             |                   |                |

|      |      |                    | 八年               |                   |                |

|      |      |                    | 五月二十五日,      |                   |                |

|      |      |                    | 知(  )國           |                   |                |

|      |      |                    |{中國}??改          |                   |                |

|      |      |                    | 年號, 내用中和二 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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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3 | 癸卯 |  中和 三年         | 憲康王             |                   |                |

|      |      |                    | 九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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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4 | 甲辰 |  中和 四年         | 憲康王             |                   |                |

|      |      |                    | 十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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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5 | 乙巳 |  光啓 元年         | 憲康王             |                   |                |

|      |      |                    | 十一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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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6 | 丙午 |  光啓 二年         | 憲康王             |                   |                |

|      |      |                    | 十二年             |                   |                |

|      |      |                    | 憲康王薨           |                   |                |

|      |      |                    | 定康王晃卽位       |                   |                |

|      |      |                    | 元年  六月, 知     |                   |                |

|      |      |                    | 中國改年號, 내     |                   |                |

|      |      |                    | 爲光啓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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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7 | 丁未 |  光啓 三年         | 定康王             |                   |                |

|      |      |                    | 二年               |                   |                |

|      |      |                    | 定康王薨           |                   |                |

|      |      |                    | 眞聖王曼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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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8 | 戊申 |  文德 元年         | 眞聖王             |                   |                |

|      |      |  昭宗皇帝曄        | 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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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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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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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8 | 무술 | 건부 5년         | 헌강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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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79 | 기해 | 건부 6년         | 헌강왕 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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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0 | 경자 | 광명 원년        | 헌강왕 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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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1 | 신축 | 중화 원년        | 헌강왕 7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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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2 | 임인 | 중화 2년         | 헌강왕 8년        |                    |                  |

|      |      |                  | 5월 25일, 중국에서|                    |                  |

|      |      |                  | 연호를 바꾼 것을  |                    |                  |

|      |      |                  | 알고 곧 중화 2년을|                    |                  |

|      |      |                  | 사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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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3 | 계묘 | 중화 3년         | 헌강왕 9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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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4 | 갑진 | 중화 4년         | 헌강왕 1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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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5 | 을사 | 광계 원년        | 헌강왕 1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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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6 | 병오 | 광계 2년         | 헌강왕 12년       |                    |                  |

|      |      |                  | 헌강왕 사망.      |                    |                  |

|      |      |                  | 정강왕 황         |                    |                  |

|      |      |                  | 즉위 원년         |                    |                  |

|      |      |                  | 6월에 중국에서    |                    |                  |

|      |      |                  | 연호를 바꾼 것을  |                    |                  |

|      |      |                  | 알고 곧 광계 2년  |                    |                  |

|      |      |                  | 이라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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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7 | 정미 | 광계 3년         | 정강왕 2년        |                    |                  |

|      |      |                  | 정강왕 사망.      |                    |                  |

|      |      |                  | 진성왕 만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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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8 | 무신 | 문덕 원년        | 진성왕 2년        |                    |                  |

|      |      | 소종 황제 엽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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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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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9 | 己酉 |  龍紀 元年         | 眞聖王             |                   |                |

|      |      |                    | 三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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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0 | 庚戌 |  大順 元年         | 眞聖王             |                   |                |

|      |      |                    | 四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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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1 | 辛亥 |  大順 二年         | 眞聖王             | 弓裔始起投賊      |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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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2 | 壬子 |  景福 元年         | 眞聖王             |                   | 後百濟甄萱     |

|      |      |                    | 六年               |                   | 自稱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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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3 | 癸丑 |  景福 二年         | 眞聖王             |                   | 甄萱           |

|      |      |                    | 七年               |                   | 二年           |

|      |      |                    | 知中國改年號,      |                   |                |

|      |      |                    | 내爲景福二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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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4 | 甲寅 |  乾寧 元年         | 眞聖王             |                   | 甄萱           |

|      |      |                    | 八年               |                   | 三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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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5 | 乙卯 |  乾寧 二年         | 眞聖王             |                   | 甄萱           |

|      |      |                    | 九年               |                   | 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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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6 | 丙辰 |  乾寧 三年         | 眞聖王             |                   | 甄萱           |

|      |      |                    | 十年               |                   | 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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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7 | 丁巳 |  乾寧 四年         | 眞聖王             |                   | 甄萱           |

|      |      |                    | 十一年             |                   | 六年           |

|      |      |                    | 眞聖王禪位太子,    |                   |                |

|      |      |                    | 薨于後宮, 孝恭     |                   |                |

|      |      |                    | 王嶢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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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8 | 戊午 |  光化 元年         | 孝恭王             | 弓裔都松嶽郡      | 甄萱           |

|      |      |                    | 二年               |                   | 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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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9 | 己未 |  光化 二年         | 孝恭王             |                   | 甄萱           |

|      |      |                    | 三年               |                   | 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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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0 | 庚申 |  光化 三年         | 孝恭王             |                   | 甄萱           |

|      |      |                    | 四年               |                   | 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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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1 | 辛酉 |  天復 元年         | 孝恭王             | 弓裔自稱王        | 甄萱           |

|      |      |                    | 五年               |                   | 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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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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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89 | 기유 | 용기 원년        | 진성왕 3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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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0 | 경술 | 대순 원년        | 진성왕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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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1 | 신해 | 대순 2년         | 진성왕 5년        | 궁예가 봉기        |                  |

|      |      |                  |                   | 하기 시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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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2 | 임자 | 경복 원년        | 진성왕 6년        |                    | 후백제 견훤      |

|      |      |                  |                   |                    | 왕을 자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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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3 | 계축 | 경복 2년         | 진성왕 7년        |                    | 견훤 2년         |

|      |      |                  | 중국에서 연호를   |                    |                  |

|      |      |                  | 바꾼 것을 알고    |                    |                  |

|      |      |                  | 곧 경복 2년       |                    |                  |

|      |      |                  | 이라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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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4 | 갑인 | 건녕 원년        | 진성왕 8년        |                    | 견훤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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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5 | 을묘 | 건녕 2년         | 진성왕 9년        |                    | 견훤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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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6 | 병진 | 건녕 3년         | 진성왕 10년       |                    | 견훤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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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7 | 정사 | 건녕 4년         | 진성왕 11년       |                    | 견훤 6년         |

|      |      |                  | 진성왕이 왕위를   |                    |                  |

|      |      |                  | 태자에게 선양.    |                    |                  |

|      |      |                  | 후궁에서 사망.    |                    |                  |

|      |      |                  | 효공왕 요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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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8 | 무오 | 광화 원년        | 효공왕 2년        | 궁예가 송악군에    | 견훤 7년         |

|      |      |                  |                   | 도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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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899 | 기미 | 광화 2년         | 효공왕 3년        |                    | 견훤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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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0 | 경신 | 광화 3년         | 효공왕 4년        |                    | 견훤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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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1 | 신유 | 천복 원년        | 효공왕 5년        | 궁예가 왕을 자칭.  | 견훤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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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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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2 | 壬戌 |  天復 二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 六年               | 二年              | 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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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3 | 癸亥 |  天復 三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 七年               | 三年              | 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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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4 | 甲子 |  天德{天祐}??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元年  哀皇帝祝    | 八年               | 四年              | 十三年         |

|      |      |                    |                    | 國號摩震,         |                |

|      |      |                    |                    | 年號武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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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5 | 乙丑 |  天祐 二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 九年               | 五年              | 十四年         |

|      |      |                    |                    | 弓裔移都鐵圓,     |                |

|      |      |                    |                    | 改武泰爲聖冊      |                |

|      |      |                    |                    | 元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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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6 | 丙寅 |  天祐 三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 十年               | 六年              | 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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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7 | 丁卯 |  天祐 四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梁太祖皇帝        | 十一年             | 七年              | 十六年         |

|      |      |  朱晃              |                    |                   |                |

|      |      |  開平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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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8 | 戊辰 |  開平 二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 十二年             | 八年              | 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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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9 | 己巳 |  開平 三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 十三年             | 九年              | 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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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0 | 庚午 |  開平 四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 十四年             | (+十年)??         | 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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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1 | 辛未 |  乾化 元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 十五年             | 十一年            | 二十年         |

|      |      |                    |                    | 改國號爲泰封,     |                |

|      |      |                    |                    | 改元水德萬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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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2 | 壬申 |  乾化 二年         | 孝恭王             | 弓裔              | 甄萱           |

|      |      |  영王友珪          | 十六年             | 十二年            | 二十一年       |

|      |      |                    | 孝恭王薨  神德     |                   |                |

|      |      |                    | 王景暉卽位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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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舜. 「資治通鑑」.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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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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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2 | 임술 | 천복 2년         | 효공왕 6년        | 궁예 2년           | 견훤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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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3 | 계해 | 천복 3년         | 효공왕 7년        | 궁예 3년           | 견훤 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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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4 | 갑자 | 천우 원년        | 효공왕 8년        | 궁예 4년           | 견훤 13년        |

|      |      | 애황제 축        |                   | 국호는 마진        |                  |

|      |      |                  |                   | 연호는 무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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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5 | 을축 | 천우 2년         | 효공왕 9년        | 궁예 5년           | 견훤 14년        |

|      |      |                  |                   | 궁예, 철원으로     |                  |

|      |      |                  |                   | 도읍을 옮김.       |                  |

|      |      |                  |                   | 연호 무태를        |                  |

|      |      |                  |                   | 성책 원년으로 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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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6 | 병인 | 천우 3년         | 효공왕 10년       | 궁예 6년           | 견훤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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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7 | 정묘 | 천우 4년         | 효공왕 11년       | 궁예 7년           | 견훤 16년        |

|      |      | 양 태조 황제     |                   |                    |                  |

|      |      | 주황             |                   |                    |                  |

|      |      | 개평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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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8 | 무진 | 개평 2년         | 효공왕 12년       | 궁예 8년           | 견훤 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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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09 | 기사 | 개평 3년         | 효공왕 13년       | 궁예 9년           | 견훤 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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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0 | 경오 | 개평 4년         | 효공왕 14년       | 궁예 10년          | 견훤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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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1 | 신미 | 건화 원년        | 효공왕 15년       | 궁예 11년          | 견훤 20년        |

|      |      |                  |                   | 국호를 태봉으로    |                  |

|      |      |                  |                   | 개칭. 연호를       |                  |

|      |      |                  |                   | 수덕만세로 개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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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2 | 임신 | 건화 2년         | 효공왕 16년       | 궁예 12년          | 견훤 21년        |

|      |      | 영왕 우규        | 효공왕 사망.      |                    |                  |

|      |      |                  | 신덕왕 경휘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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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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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3 | 癸酉 |  乾化 三年         | 神德王             | 弓裔              | 甄萱           |

|      |      |  末帝진            | 二年               | 十三年            | 二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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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4 | 甲戌 |  乾化 四年         | 神德王             | 弓裔              | 甄萱           |

|      |      |                    | 三年               | 十四年            | 二十三年       |

|      |      |                    |                    | 改元政開, 太      |                |

|      |      |                    |                    | 祖爲百船將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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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5 | 乙亥 |  貞明 元年         | 神德王             | 弓裔              | 甄萱           |

|      |      |                    | 四年               | 十五年            | 二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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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6 | 丙子 |  貞明 二年         | 神德王             | 弓裔              | 甄萱           |

|      |      |                    | 五年               | 十六年            | 二十五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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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7 | 丁丑 |  貞明 三年         | 神德王             | 弓裔              | 甄萱           |

|      |      |                    | 六年               | 十七年            | 二十六年       |

|      |      |                    | 神德王薨           |                   |                |

|      |      |                    | 景明王昇英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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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8 | 戊寅 |  貞明 四年         | 景明王             | 弓裔              | 甄萱           |

|      |      |                    | 二年               | 十八年            | 二十七年       |

|      |      |                    |                    | 弓裔麾下人心忽    |                |

|      |      |                    |                    | 變, 推載太祖爲王, |                |

|      |      |                    |                    | 弓裔爲下所殺.     |                |

|      |      |                    |                    | 太祖卽位稱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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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9 | 己卯 |  貞明 五年         | 景明王             |                   | 甄萱           |

|      |      |                    | 三年               |                   | 二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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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0 | 庚辰 |  貞明 六年         | 景明王             |                   | 甄萱           |

|      |      |                    | 四年               |                   | 二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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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1 | 辛巳 |  龍德 元年         | 景明王             |                   | 甄萱           |

|      |      |                    | 五年               |                   | 三十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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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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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3 | 계유 | 건화 3년         | 신덕왕 2년        | 궁예 13년          | 견훤 22년        |

|      |      | 말제 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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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4 | 갑술 | 건화 4년         | 신덕왕 3년        | 궁예 14년          | 견훤 23년        |

|      |      |                  |                   | 연호를 정개로      |                  |

|      |      |                  |                   | 개칭.              |                  |

|      |      |                  |                   | 태조 백선 장군이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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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5 | 을해 | 정명 원년        | 신덕왕 4년        | 궁예 15년          | 견훤 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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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6 | 병자 | 정명 2년         | 신덕왕 5년        | 궁예 16년          | 견훤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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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7 | 정축 | 정명 3년         | 신덕왕 6년        | 궁예 17년          | 견훤 26년        |

|      |      |                  | 신덕왕 사망.      |                    |                  |

|      |      |                  | 경명왕 승영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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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8 | 무인 | 정명 4년         | 경명왕 2년        | 궁예 18년          | 견훤 27년        |

|      |      |                  |                   | 궁예 부하의 인     |                  |

|      |      |                  |                   | 심이 갑자기 변     |                  |

|      |      |                  |                   | 하여 태조를 왕     |                  |

|      |      |                  |                   | 으로 추대. 궁예는  |                  |

|      |      |                  |                   | 부하에게 피살.     |                  |

|      |      |                  |                   | 태조 즉위          |                  |

|      |      |                  |                   | 원년 선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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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19 | 기묘 | 정명 5년         | 경명왕 3년        |                    | 견훤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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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0 | 경진 | 정명 6년         | 경명왕 4년        |                    | 견훤 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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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1 | 신사 | 용덕 원년        | 경명왕 5년        |                    | 견훤 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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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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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2 | 壬午 |  龍德 二年         | 景明王             |                   | 甄萱           |

|      |      |                    | 六年               |                   | 三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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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3 | 癸未 |  龍德 三年         | 景明王             |                   | 甄萱           |

|      |      |  後唐同光 元年     | 七年               |                   | 三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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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4 | 甲申 |  同光 二年         | 景明王             |                   | 甄萱           |

|      |      |                    |  八年              |                   | 三十三年       |

|      |      |                    | 景明王薨           |                   |                |

|      |      |                    | 景哀王魏膺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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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5 | 乙酉 |  同光 三年         | 景哀王             |                   | 甄萱           |

|      |      |                    | 二年               |                   | 三十四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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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6 | 丙戌 |  同光 四年         | 景哀王             |                   | 甄萱           |

|      |      |  明宗皇帝亶        | 三年               |                   | 三十五年       |

|      |      |  天成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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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7 | 丁亥 |  天成 二年         | 景哀王             |                   | 甄萱           |

|      |      |                    | 四年               |                   | 三十六年       |

|      |      |                    | 景哀王薨           |                   |                |

|      |      |                    | 敬順王傅卽位       |                   |                |

|      |      |                    | 元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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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8 | 戊子 |  天成 三年         | 敬順王             |                   | 甄萱           |

|      |      |                    | 二年               |                   | 三十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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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9 | 己丑 |  天成 四年         | 敬順王             |                   | 甄萱           |

|      |      |                    | 三年               |                   | 三十八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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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0 | 庚寅 |  長興 元年         | 敬順王             |                   | 甄萱           |

|      |      |                    | 四年               |                   | 三十九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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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1 | 辛卯 |  長興 二年         | 敬順王             |                   | 甄萱 四十年    |

|      |      |                    | 五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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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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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2 | 임오 | 용덕 2년         | 경명왕 6년        |                    | 견훤 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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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3 | 계미 | 용덕 3년         | 경명왕 7년        |                    | 견훤 32년        |

|      |      | 후당 동광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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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4 | 갑신 | 동광 2년         | 경명왕 8년        |                    | 견훤 33년        |

|      |      |                  | 경명왕 사망.      |                    |                  |

|      |      |                  | 경애왕 위응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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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5 | 을유 | 동광 3년         | 경애왕 2년        |                    | 견훤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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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6 | 병술 | 동광 4년         | 경애왕 3년        |                    | 견훤 35년        |

|      |      | 명종 황제 단     |                   |                    |                  |

|      |      | 천성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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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7 | 정해 | 천성 2년         | 경애왕 4년        |                    | 견훤 36년        |

|      |      |                  | 경애왕 사망.      |                    |                  |

|      |      |                  | 경순왕 부         |                    |                  |

|      |      |                  | 즉위 원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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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8 | 무자 | 천성 3년         | 경순왕 2년        |                    | 견훤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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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29 | 기축 | 천성 4년         | 경순왕 3년        |                    | 견훤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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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0 | 경인 | 장흥 원년        | 경순왕 4년        |                    | 견훤 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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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1 | 신묘 | 장흥 2년         | 경순왕 5년        |                    | 견훤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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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曆 | 干支 |       中  國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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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2 | 壬辰 |  長興 三年         | 敬順王             |                   | 甄萱           |

|      |      |                    | 六年               |                   | 四十一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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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3 | 癸巳 |  閔帝從厚          | 敬順王             |                   | 甄萱           |

|      |      |                    | 七年               |                   | 四十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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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4 | 甲午 |  應順 元年         | 敬順王             |                   | 甄萱           |

|      |      |  末帝從珂          | 八年               |                   | 四十三年       |

|      |      |  淸秦{淸泰}??      |                    |                   |                |

|      |      |  元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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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5 | 乙未 |  淸泰 二年         | 敬順王             |                   | 甄萱           |

|      |      |                    | 九年               |                   | 四十四年       |

|      |      |                    | 王移書我太祖,      |                   |                |

|      |      |                    | 自降納土, 新羅     |                   |                |

|      |      |                    | 五十六王九百九     |                   |                |

|      |      |                    | 十二年而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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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6 | 丙申 |  淸泰 三年         |                    |                   | 甄萱           |

|      |      |  晋高祖石敬당      |                    |                   | 四十五年       |

|      |      |  天福 元年         |                    |                   | 甄萱子神劒囚   |

|      |      |                    |                    |                   | 父, 纂{簒}??   |

|      |      |                    |                    |                   | 位自稱將軍,    |

|      |      |                    |                    |                   | 甄萱出奔錦     |

|      |      |                    |                    |                   | 城, 投太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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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記卷第三十一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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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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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2 | 임진 | 장흥 3년         | 경순왕 6년        |                    | 견훤 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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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3 | 계사 | 민제 종후        | 경순왕 7년        |                    | 견훤 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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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4 | 갑오 | 응순 원년        | 경순왕 8년        |                    | 견훤 43년        |

|      |      | 말제 종가        |                   |                    |                  |

|      |      | 청태 원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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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5 | 을미 | 청태 2년         | 경순왕 9년        |                    | 견훤 44년        |

|      |      |                  | 왕이 우리 태조    |                    |                  |

|      |      |                  | 에게 글을 보내    |                    |                  |

|      |      |                  | 스스로 항복하고   |                    |                  |

|      |      |                  | 하고 국토를 바침. |                    |                  |

|      |      |                  | 신라는 56대       |                    |                  |

|      |      |                  | 992년만에 멸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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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936 | 병신 | 청태 3년         |                   |                    | 견훤 45년        |

|      |      | 진 고조 석 경당  |                   |                    | 견훤의 아들      |

|      |      | 천복 원년        |                   |                    | 신검이 아버      |

|      |      |                  |                   |                    | 지를 가두고      |

|      |      |                  |                   |                    | 왕위를 찬탈.     |

|      |      |                  |                   |                    | 장군을 자칭.     |

|      |      |                  |                   |                    | 견훤이 금성으    |

|      |      |                  |                   |                    | 로 도망하여      |

|      |      |                  |                   |                    | 태조에게         |

|      |      |                  |                   |                    | 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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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 31 끝




三國史記卷第三十二.



삼국사기 권 제 32


雜志第一.

祭祀·樂.


잡지 제 1.

제사. 음악.


祭祀.


제사.


○按<新羅>宗廟之制, 第二代<南解王>三年春, 始立始祖<赫居世>廟, 四時祭之, 以親妹<阿老>主祭. 第二十二代<智證主{智證王}>??, 於始祖誕降之地<奈乙>, 創立神宮, 以享之. 至第三十六代<惠恭王>, 始定五廟. 以<味鄒王>爲<金>姓始祖, 以<太宗大王>·<文武大王>, 平<百濟>·<高句麗>, 有大功德, 병爲世世不毁之宗, 兼親廟二爲五廟. 至第三十七代<宣德王>, 立社稷壇. 又見於祀典, 皆(+祭)??境內山川, 而不及天地者, 蓋以『王制』曰: "天子七廟, 諸侯五廟, 二昭·二穆與太祖之廟而五." 又曰: "天子祭天地·天下名山大川, 諸侯祭社稷·名山大川之在其地者." 是故, 不敢越禮而行之者歟. 然其壇堂之高下·유門之內外·次位之尊卑·陳設登降之節·尊爵·변豆·牲牢·冊祝之禮, 不可得而推也, 但粗記其大略云爾.


今西龍.『북한본』.

신라의 종묘 제도에 의하면, 제 2대 남해왕 3년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 제사를 지냈는데, 친 누이동생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제 22대 지증왕 때에 이르러 시조의 탄생지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제 36대 혜공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5묘를 제정하였는데,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가 된다고 하여, 그리고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으로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당 둘을 합하여 5묘를 만들었다. 제 37대 선덕왕 때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다. 또한 제사 예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국내의 명산대천에는 제사를 지내면서 천지신명에까지 지내지 않은 것은 아마 「왕제」에 "천자는 7묘이며, 제후는 5묘이니, 두 소(昭) 두 목(穆)과 태조의 사당을 합하여 5묘이다"라고 한 것과 또한 「왕제」에 "천자는 천지신명과 천하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제후는 사직과 그의 땅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하였으므로 함부로 예에 벗어나지 않고 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사직단 및 사당 높이, 사직단 주위의 담과 사당 문의 안팎 위치, 신위 순서의 높고 낮은 것, 제물 진설과 오르내리는 절차, 술잔, 제기, 제육, 축문 등에 대한 예법은 추측이 불가능하므로 그 대략의 내용만을 기록할 뿐이다.


○一年, 六祭五廟, 謂正月二日·五日, 五月五日, 七月上旬, 八月一日·十五日. 十二月寅日, <新城>北門, 祭八석{八사/八자}??, 풍年用大牢, 凶年用小牢. 立春後亥日, <明活城>南<熊殺谷>, 祭<先農>; 立夏後亥日, <新城>北門, 祭<中農>; 立秋後亥日, <산園>祭<後農>; 立春後丑日, <犬首谷>門, 祭<風伯>; 立夏後申日, <卓渚>祭<雨師>; 立秋後辰日, <本彼遊村>祭<靈星>.[檢諸禮典, 只祭<先農>, 無<中農>·<後農>.]


趙炳舜. 『三國史節要』에서는 '八사'로 교감하였고, 『북한본』에서는 '八자'로 교감하였다.

1년에 여섯 번씩 5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날짜는, 정월 2일과 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과 15일이었다. 12월 인(寅)일에는 신성 북문에서 팔자(八자)에 제사를 지내는데 풍년에는 큰 소를 잡았으며, 흉년에는 작은 소를 잡았다.

입춘 후 해(亥)일에 명활성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에 제사 지내고, 입하 후 해(亥)일에 신성 북문에서 중농에 제사 지내고, 입추 후 해(亥)일에 산원에서 후농에 제사 지내고, 입춘 후 축(丑)일에 견수곡 어구에서 풍백(風佰)에게 제사 지내고, 입하 후 신(申)일에 탁저에서 우사(雨師)에게 제사 지내고, 입추 후 진(辰)일에 본피유촌에서 영성(靈星)에 제사를 지냈었다.[여러 예전들을 상고하건대 선농에만 제사를 지냈고, 중농과 후농에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없다.]


○三山五岳已下名山大川, 分爲大·中·小祀.


3산 5악 이하 명산 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된다.


○大祀, 三山: 一<奈歷{柰歷}>??[<習比>部], 二<骨火>[<切也火郡>], 三<穴禮>[<大城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대사는 세 산에 지냈는데, 첫째 나력산[습비부], 둘째 골화산[절야화군], 셋째 혈례산[대성군]이었다.


○中祀, 五岳: 東<吐含山>[<大城郡>], 南<地理山>[<菁州>], 西<鷄龍山>[<熊川州>], 北<太伯山>[<奈已郡>], 中<父岳>[一云<公山>, <押督郡>.]. 四鎭: 東<溫沫懃>[<牙谷停>], 南<海恥也里>[一云<悉帝>, <推大郡{推火郡}>??.], 西<加耶岬岳>[<馬尸山郡>], 北<熊谷岳>[<比烈忽郡>]. 四海: 東<阿等邊>[一云<斤鳥兄邊{近烏兄邊??/近烏只邊??}>, <退火郡>.], 南<兄邊>[<居柒山郡>], 西<未陵邊>[<屎山郡>], 北<非禮山>[<悉直郡>]. 四瀆: 東<吐只河>[一云<참浦>, <退火郡>.], 南<黃山河>[<삽良州>], 西<熊川河>[<熊川州>], 北<漢山河>[<漢山州>], <俗離岳>[<三年山郡>], <推心>[<火加耶郡{大加耶郡}>??], <上助音居西>[<西林郡>], <烏西岳>[<結已郡>], <北兄山城>[<大城郡>], <淸海鎭>[<助音島>].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중사는 오악(五岳)과 사진(四鎭)과 사해(四海)와 사독(四瀆)에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오악(五岳)은 동쪽의 토함산[대성군], 남쪽의 지리산[청주], 서쪽의 계룡산[웅천주], 북쪽의 태백산[나이군], 중앙의 부악[공산이라고도 한다. 압독군]이다. 사진(四鎭)은 동쪽의 온말근[아곡정], 남쪽의 해치야리[실제라고도 한다. 추화군], 서쪽의 가야압악[마시산군], 북쪽의 웅곡악[비열홀군]이다. 사해(四海)는 동쪽의 아등변[근오형변이라고도 한다. 퇴화군], 남쪽의 형변[거칠산군], 서쪽의 미릉변[시산군], 북쪽의 비례산[실직군]이다. 사독(四瀆)은 동쪽의 토지하[참포라고도 한다. 퇴화군], 남쪽의 황산하[삽량주], 서쪽의 웅천하[웅천주], 북쪽의 한산하[한산주]이다. 이 이외에 속리악[삼년산군], 추심[대가야군], 상조음거서[서림군], 오서악[결이군], 북형산성[대성군], 청해진[조음도]에도 중사를 지냈다.


○小杞{小祀}??: <霜岳>[<高城郡>], <雪岳>[<수城郡>], <花岳>[<斤平郡>], <鉗岳>[<七重城>], <負兒岳>[<北漢山州>], <月奈岳>[<月奈郡>], <武珍岳>[<武珍州>], <西多山>[<伯海郡><難知可縣>], <月兄山>[<奈吐郡><沙熱伊縣{沙勳伊島}>??], <道西城>[<萬弩郡>], <冬老岳>[<進禮郡><丹川縣>], <竹旨>[<及伐山郡>], <熊只>[<屈自郡><熊只縣>], <岳髮>[一云<髮岳>, <于珍也郡>], <于火>[<生西良郡><于大縣{于火縣}>??], <三岐>[<大城郡>], <卉黃>[<牟梁>], <高墟>[<沙梁>], <嘉阿岳>[<三年山郡>], <波只谷原岳>[<阿支縣>], <非藥岳>[<退火郡>], <加林城>[<加林縣>, 一本有<靈암山><虞風山>, 無<加林城>.], <加良岳>[<菁州>], <西述>[<牟梁>].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소사를 지낸 곳은 다음과 같다. 상악[고성군], 설악[수성군], 화악[근평군], 감악[칠중성], 부아악[북한산주], 월나악[월나군], 무진악[무진주], 서다산[백해군 난지가현], 월형산[나토군 사열이현], 도서성[만노군], 동로악[진례군 단천현], 죽지[급벌산군], 웅지[굴자군 웅지현], 악발[발악이라고도 한다. 우진야군], 우화[생서량군 우대현], 삼기[대성군], 훼황[모량], 고허[사량], 가아악[삼년신군], 파지곡원악[아지현], 비약악[퇴화군], 가림성[가림현. 어떤 기록에는 영암산 우풍산은 있으나 가림성은 없다.], 가량악[청주], 서술[모량].


○四城門祭: 一<大井門>, 二<吐山良門>, 三<習比門>, 四<王后梯門>. 部庭祭, 梁部四川上祭: 一<犬首>, 二<文熱林>, 三<靑淵>, 四<樸樹>. <文熱林>行, 日月祭; <靈廟寺>南, 行五星祭; <惠樹>, 行祈雨祭. 四大道祭: 東<古里>, 南<첨幷樹>, 西<渚樹>, 北<活倂岐>. 壓丘祭, 벽氣祭. 上件, 或因別制, 或因水旱, 而行之者也.


사성문제는 첫째 대정문, 둘째 토산량문, 셋째 습비문, 넷째 왕후제문에서 지냈으며, 부정제는 양부에서 지냈다. 사천상제는 첫째 견수, 둘째 문열림, 셋째 청연, 넷째 박수에서 지냈다. 문열림에서는 일월제를 지냈고, 영묘사 남쪽에서는 오성제를 지냈고, 혜수에서는 기우제를 지냈으며, 사대도제는 동쪽은 고리, 남쪽은 첨병수, 서쪽은 저수, 북쪽은 활병기에서 지냈다. 구릉의 귀신을 진압하는 제사와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제사도 지냈다. 이상과 같은 제사는 특별한 제도에 의하여 지내기도 하였고,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였을 때 지내기도 하였다.


○<高句麗>·<百濟>祀禮不明, 但考古記及<中國>史書所載者, 以記云爾.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예전은 명확하지 않으므로 다만 고기와 중국 역사에 실린 내용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後漢書』云: "<高句麗>, 好祀鬼神·社稷·<靈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수神{隧神}??, 亦以十月迎而祭之."


李丙燾. 「魏志」.

「북한본」.

「후한서」에는 "고구려는, 귀신과 사직과 영성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를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이를 수신이라 부른다. 역시 10월에 그 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北史』云: "<高句麗>常以十月祭天,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二曰高登神, 云是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북사」에는 "고구려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음사(淫祠)가 많았다. 신묘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하여 부인상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고등신인데, 이 사람이 시조로서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두 곳에 모두 관서를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였다. 부인상은 하백녀이며 고등신은 주몽을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梁書』云: "<高句麗>, 於所居之左, 立大屋, 祭鬼神, 冬{又}??祠<零星>·社稷."


李丙燾.

「양서」에는 "고구려는 왕궁 왼편에 큰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겨울에는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國左有大穴, 曰神隧, 每十月, 王皆自祭."


「당서」에는 "고구려 풍속에는 음사(淫祠)가 많았으니, 영성과 해, 기자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나라의 왼쪽 지방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신수라 하여 매년 10월에 항상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古記云: "<東明王>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大后{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大祖{太祖}??王>六十九年, 冬十月, 幸<扶餘>, 祀大后{太后}??廟; <新大王>四{三}??年, 秋九月, 如<卒本>, 祀始祖廟; <故國川王>元年, 秋九月, <東川王>二年, 春二月, <中川王>十三年, 秋九月, <故國原王>二年, 春二月, <安臧王>三年, 夏四月, <平原王>二年, 春二月, <建武王>二年, 夏四月, 병如上行. <故國壤王>九年, 春三月, 立國社." 又云: "<高句麗>, 常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獲猪鹿, 祭天及山川."


『북한본』.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고기에는 "동명왕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나라의 왕 금와가 태후의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태조왕 69년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에 가서 태후 사당에 제사를 지냈으며, 신대왕 4년 가을 9월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냈으며, 고국천왕 원년 가을 9월과 동천왕 2년 봄 2월과 중천왕 13년 가을 9월과 고국원왕 2년 봄 2월과 안장왕 3년 여름 4월과 평원왕 2년 봄 2월과 건무왕 2년 여름 4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를 지냈다. 고국양왕 9년 봄 3월에 국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여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冊府元龜』云: "<百濟>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按『海東古記』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책부원구」에는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서울에 시조 구태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해동고기」에 의하면 시조 동명왕이라고 하기도 하고, 시조 우태라 하기도 한다.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예에 구태라는 이가 있어 대방에서 나라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시조 구태라 하였다. 그러나 동명이 시조인 것은 사적에 명백하므로 다른 주장은 믿을 수 없다.]


○古記云: "<溫祚王>二十年, 春二月, 設壇祠天地. 三十八年, 冬十月, <多婁王>二年, 春二月, <古이王>五年, 春正月, 十年, 春正月, 十四年, 春正月, <近肖古王>二年, 春正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전支王>二年, 春正月, <牟大王>十一年, 冬十月, 병如上行. <多婁王>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責稽王>二年, 春正月, <汾西王>二年, 春正月, <契王>二年, 夏四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전支王>二年, 春正月, 병如上行."


고기에는 "온조왕 20년 봄 2월에 단을 설치하여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으며, 온조왕 38년 겨울 10월, 다루왕 2년 봄 2월, 고이왕 5년 봄 정월과 10년 봄 정월, 14년 봄 정월, 근초고왕 2년 봄 정월, 아신왕 2년 봄 정월, 전지왕 2년 봄 정월, 모대왕 11년 겨울 10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지냈다. 다루왕 2년 봄 정월에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책계왕 2년 봄 정월, 분서왕 2년 봄 정월, 설왕 2년 여름 4월, 아신왕 2년 봄 정월, 전지왕 2년 봄 정월에 모두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樂.


음악


○<新羅>樂: 三竹·三絃·拍板·大鼓. 歌舞. 舞: 二人, 放角복頭·紫大袖公란·紅정鍍金과腰帶·烏皮靴. 三絃: 一玄琴, 二加耶琴, 三琵琶. 三竹: 一大금, 二中금, 三小금.


신라의 음악은 세 가지 관악기와 세 가지 현악기와 박판과 대고와 가무로 구성되었다. 춤에는 두 사람이 있는데, 방각복두를 쓰며 자대수공란을 입고, 홍정도금과요대를 띠고, 오피화를 신는다. 세 가지 현악기는 첫째 현금, 둘째 가야금, 셋째는 비파이다. 세 가지 관악기는 첫째 대함, 둘째 중함, 셋째 소함이다.


○玄琴, 衆{象}??<中國>樂部琴, 而爲之. 按『琴操』曰: "<伏犧>作琴, 以修身理性, 反其天眞也." 又曰: "琴長三尺六寸六分, 象三百六十六日; 廣六寸, 象六合. 文上曰池[池者水也, 言其平.]; 下曰濱[濱者服也.]. 前廣後狹, 象尊卑也; 上圓下方, 法天地也. 五絃, 象五行. 大賢{絃}??爲君, 十(+二)??絃(+琴以象十二月)??爲臣, <文王>·<武王>加二絃." 又『風俗通』曰: "琴長四尺五寸者, 法四時五行, 七絃, 法七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현금은 중국 악부의 금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금조」에는 "복희가 금을 만들어 수신 수양하여, 하늘이 내려준 천성을 회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금의 길이는 석 자 여섯 치 여섯 푼이니 366일을 상징하고, 넓이는 여섯 치이니 육합을 상징하였으며, 판 위를 지(池)[지는 연못이니 공평함을 의미한다.]라 하고, 판 밑을 빈(濱)[빈은 복종을 의미한다.]이라 하였으며, 앞이 넓고 뒤가 좁은 것은 사람의 존비를 표시함이오,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모방한 것이며, 다섯 줄은 오행을 상징한 것이오, 큰 줄은 임금, 10줄은 신하를 나타내는데, 문왕과 무왕이 두 줄을 더 첨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풍속통」에는 "금의 길이는 넉 자 다섯 치이니 이는 사시와 오행을 모방한 것이오, 일곱 줄은 칠성을 모방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玄琴之作也. <新羅>古記云: "初, 晋人以七絃琴, 送<高句麗>. <麗>人雖知其爲樂器, 而不知其聲音及鼓之之法, 購國人能識其音而鼓之者, 厚賞. 時, 第二相<王山岳>, 存其本樣, 頗改易其法制而造之, 兼製一百餘曲, 以奏之. 於時, 玄鶴來舞, 遂名玄鶴琴, 後但云玄琴."


현금의 제작과 관련하여 신라 고기에는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률과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 중에 그 음률을 알아서 연주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 때 둘째 재상인 왕 산악이 칠현금의 원형태를 그대로 두고, 만드는 방법을 약간 고쳐서 이를 다시 만들었다. 동시에 1백여 곡을 지어 그것을 연주하였다. 이 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마침내 현학금(玄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뒤로는 다만 현금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羅>人沙찬<공永>子<玉寶高>, 入<地理山><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十曲, 傳之<續命得>, <得>傳之<貴金>先生. 先生亦入<地理山>, 不出. <羅>王恐琴道斷絶, 謂伊찬<允興>, 方便傳得其音, 遂委<南原>公事. <允興>到官, 簡聰明少年二人, 曰<安長>·<淸長>, 使詣山中傳學. 先生敎之, 而其隱微不以傳. <允興>與婦偕進曰: "吾王遣我<南原>者, 無他, 欲傳先生之技, 于今三年矣, 先生有所秘而不傳, 吾無以復命." <允興>捧酒, 其婦執盞膝行, 致禮盡誠. 然後, 傳其所秘飄風等三曲. <安長>傳其子<克相>·<克宗>, <克宗>制七曲, <克宗>之後, 以琴自業者, 非一二, 所製音曲有二調, 一平調, 二羽調, 共一百八十七曲. 其餘聲遺曲流傳, 可記者無幾, 餘悉散逸, 不得具載.


신라 사람 사찬 공영의 아들 옥 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금을 연구하였다. 그는 스스로 30곡을 새로 지어 이것을 속명득에게 전하였고, 속명득은 이것을 귀금 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 선생이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니 신라왕이 금의 연주법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에게 명령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그 법을 배워 오게 하고, 마침내 그에게 남원의 공사를 맡겼다. 윤흥이 임지에 도착하여 총명한 소년 두 명, 즉 안장과 청장을 선발하여 지리산에 가서 금의 연주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귀금 선생이 그들에게 금의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 미묘한 부분은 알려 주지 않았다. 윤흥이 자기 처와 함께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으로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술을 이으려는 것인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이 숨기면서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내가 왕에게 복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윤흥은 술을 들고 그의 처는 잔을 잡고 무릎으로 기어 예의와 정성을 다하니, 그렇게 한 뒤에야 그가 숨겼던 표풍(飄風) 등의 세 곡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전하여 극종이 일곱 곡을 지었으며, 극종의 뒤에는 금으로써 자기의 업을 삼은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은 음률에는 두 가지 조가 있었는데 첫째는 평조(平調)요 둘째는 우조(羽調)이며 전부가 187곡이었다. 그 나머지의 곡이 세상에 유행하였으나 기록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며, 기타의 것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으므로 여기에 모두 등재하지 못한다.


○<玉寶高>所制三十曲: 上院曲一, 中院曲一, 下院曲一, 南海曲二, 倚암曲一, 老人曲七, 竹庵曲二, 玄合曲一, 春朝曲一, 秋夕曲一, 吾沙息曲一, 鴛鴦曲一, 遠岵曲六, 比目曲一, 入實相曲一, 幽谷淸聲曲一, 降天聲曲一. 克宗所製七曲, 今亡.


옥 보고가 지은 30곡은 상원곡 1, 중원곡 1, 하원곡 1, 남해곡 2, 의암곡 1, 노인곡 7, 죽암곡 2, 현합곡 1, 춘조곡 1, 추석곡 1, 오사식곡 1, 원앙곡 1, 원호곡 6, 비목곡 1, 입실상곡 1, 유곡 청성곡 1, 강천성곡 1이었으며, 극종이 지은 7곡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加耶琴, 亦法<中國>樂部箏而爲之. 『風俗通』曰: "爭, 秦聲也." 『釋名』曰: "箏施絃高, 箏箏然, <幷>·<梁>二州, 箏形如瑟." 『傅玄』曰: "上圓象天, 下平象地, 中空准六合, 絃·柱擬十二月, 斯乃仁智之器." <阮瑀>曰: "箏長六尺, 以應律數; 絃有十二, 象四時; 柱高三寸, 象三才." 加耶琴, 雖與箏制度小異, 而大槪似之.


가야금도 중국 악부의 쟁(箏)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풍속통」에는 "쟁은 진(秦)나라 악기"라 하였고, 「석명」에는 "쟁은 줄을 높이 걸었기 때문에 소리가 쟁쟁하며, 병(幷) 양(梁) 두 주의 쟁은 모양이 비파와 같다"고 하였다. 부 현은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 가운데가 빈 것은 육합을 모방한 것이고, 줄과 괘는 12달을 모방한 것인 바, 이야말로 어질고 슬기로움을 상징하는 기구이다"라고 말하였다. 완 우는 "쟁의 길이는 6자이니, 이는 율의 수에 맞춘 것이고, 현은 12줄이니, 이는 사시를 상징한 것이며, 괘의 높이는 3치이니, 이는 삼재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야금이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기는 하나 거의 그것과 유사하다.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 豈可一哉, 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 造十二曲. 後, <于勒>以其國將亂, 携樂器, 投<新羅><眞興王>. 王受之, 安置<國原>, 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 傳其業. 三人旣傳十一{二}??曲, 相謂曰: '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 遂約爲五曲. <于勒>始聞焉而怒, 及聽其五種之音, 流淚歎曰: '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爾其奏之王前.'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加耶>亡國之音, 不足取也. 王曰: '<加耶>王, 淫亂自滅, 樂何罪乎. 蓋聖人制樂, 緣人情以爲준節, 國之理亂, 不由音調.' 遂行之, 以爲大樂." 加耶琴有二調, 一河臨調, 二嫩竹調, 共一百八十五曲.


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라 고기에는 "가야국 가실왕이 당 나라 악기를 보고 만든 것인데, 가실왕이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모든 나라의 방언은 각각 그 성음이 다른 것인데 어찌 당나라의 노래만 부를 수 있으랴?'라고 말하고, 악사인 성열현 사람 우륵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창작하게 하였다. 그 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귀순하였다. 왕이 그를 받아 들여 국원에 정착시키고, 곧 대나마 주지, 계고와 대사 만덕 등을 보내 그에게서 수업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11곡을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여 우아한 음악이 될 수 없다'라 하고, 마침내 그것을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었으나 그 다섯 가지 음률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너희들이 왕의 앞에서 이를 연주하여라'라고 말하였다. 진흥왕이 그 곡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간관들이 건의하기를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을 취할 것이 없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라 하고, 마침내 이를 펼쳐 주된 음악을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금에는 두 조(調)가 있었는데 첫째는 하림조(河臨調)요, 둘째는 눈죽조(嫩竹調)이니 모두 185곡이었다.


○<于勒>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寶伎, 四曰達己,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下奇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奇物. <泥文{尼文}>??所製三曲: 一曰烏, 二曰鼠, 三曰순.[赦字未詳.]


趙炳舜. 『三國史節要』.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 둘째는 상가라도, 셋째는 보기, 넷째는 달기, 다섯째는 사물, 여섯째는 물혜, 일곱째는 하기물, 여덟째는 사자기, 아홉째는 거열, 열째는 사팔혜, 열 한째는 이사, 열 두째는 상기물이었다. 니문이 지은 3곡은 첫째는 까마귀, 둘째는 쥐, 셋째는 메추라기였다.['사(赦)'자의 뜻은 분명치 않다]


○琵琶, 『風俗通』曰: "近代樂家所作, 不知所起. 長三尺五寸, 法天地人與五行. 四絃, 象四時也." 『釋名』曰: "琵琶, 本胡中馬上所鼓, 推手前曰琵, 引手却曰琶, 因以爲名." 鄕琵琶, 與<唐>制度, 大同而少異, 亦始於<新羅>, 但不知何人所造. 其音有三調: 一宮調, 二七賢調, 三鳳皇調, 共二百一十二曲.


비파는, 「풍속통」에 "근대 음악가들이 만든 것으로서 그 시초는 알 수 없다. 비파 길이의 석 자 다섯 치는 하늘, 땅, 사람과 오행을 모방한 것이오, 네 줄은 사시를 상징한 것이다"라 고 기록되어 있고, 「석명」에는 "비파는 원래 호족들이 말 위에서 연주하던 것인데, 손을 앞으로 내미는 것을 비(琵)라 하고, 손을 끌어 당기는 것을 파(琶)라고 하기 때문에 이를 악기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비파(鄕琵琶)는 당 나라의 비파와 대체로 같으나 약간 다르며, 그것도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다만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음악에는 세 가지 조가 있는 바, 첫째는 궁조, 둘째는 칠현조, 셋째는 봉황조이니 모두 212곡이었다.


○三竹, 亦模倣<唐>笛, 而爲之者也. 『風俗通』曰: "笛, <漢><武帝>時, <丘仲>所作也." 又按: <宋玉>有『笛賦』, <玉>在<漢>前, 恐此說非也. <馬融>云: "近代雙笛, 從<羌>起. 又笛, 滌也, 所以滌邪穢, 而納之於雅正也. 長一尺, 四十七孔." 鄕三竹, 此亦起於<新羅>, 不知何人所作. 古記云: "<神女王{神文王}>??時, 東海中忽有一小山, 形如龜頭, 其上有一竿竹, 晝分爲二, 夜合爲一. 王使斫之作笛, 名萬波息." 雖有此說, 怪不可信. 三竹笛有七調: 一平調, 二黃鐘調, 三二雅調, 四越調, 五般涉調, 六出調, 七俊調. 大금三百二十四曲, 中금二百四十五曲, 小금二百九十八曲.


李丙燾. 「三國遺事」.

「북한본」.

삼죽은 역시 당 나라의 저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풍속통」에는 "저는 한 무제 때 구중이 만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 고찰하여 보면 송옥의 작품에 「적부」가 있는데 송옥은 한 나라 이전 사람이니, 이 설은 옳지 않은 듯하다. 마융은 "근대의 쌍저는 강(羌)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적(笛)은 척(滌)의 뜻이니,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고, 맑고 바른 데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길이는 한 자이며, 47개의 구멍이 있다"고 말하였다. 향삼죽(鄕三竹)은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기에는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에 갑자기 작은 산이 생겼는데,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고 그 위에 한 포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두 개가 되고, 밤에는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대나무를 쪼개어 저를 만들게 하고, 이름을 만파식(萬波息)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는 없다. 삼죽저에는 일곱 조가 있는바 첫째는 평조, 둘째는 황종조, 셋째는 이아조, 넷째는 월조, 다섯째는 반섭조, 여섯째는 출조, 일곱째는 준조이다. 대함은 324곡이오, 중함은 245곡이오, 소함은 298곡이다.


○會樂及辛熱樂, <儒理王>時作也; 突阿樂, <脫解王>時作也; 枝兒樂, <婆娑王>時作也; 思內[一作詩惱.]樂, <奈解王>時作也; 가舞, <奈密王>時作也; 憂息樂, <訥祗王>時作也; 대樂, <慈悲王>時人<百結>先生作也; 竿引, <智大路王>時人<川上><郁皆子>作也; 美知樂, <法興王>時作也; 徒領歌, <眞興王>時作也; 捺絃引, <眞平王>時人<淡水>作也; 思內奇物樂, <原郞徒>作也; 內知, <日上郡>樂也; 白實, <坤梁郡{押梁郡}>??樂也; 德思內, <河西郡>樂也; 石南思內道, <同伐郡>樂也; 祀中, <北외郡>樂也. 此皆鄕人喜樂之所由作也, 而聲器之數·歌舞之容, 不傳於後世. 但古記云: "<政明王{神文王}>??九年, 幸<新村>, 設포奏樂. 가舞: 監六人, 가尺二人, 舞尺一人. 下辛熱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三人. 思內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韓岐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上辛熱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小京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一人, 歌尺三人. 美知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哀莊王>八年, 奏樂, 始奏思內琴, 舞尺四{三}??人靑衣, 琴尺一人赤衣, 歌尺五人彩衣·繡扇병金鏤帶. 次奏대{砧}??琴(-舞)??, 舞尺赤衣, 琴尺靑衣." 如此而已, 則不可言其詳也. <羅>時樂工皆謂之尺. <崔致遠>詩, 有鄕樂雜詠五首, 今錄于此.

金丸: 廻身掉臂弄金丸, 月轉星浮滿眼看. 縱有<宜僚>那勝此, 定知鯨海息波瀾.

月顚: 肩高項縮髮崔嵬, 攘臂群儒鬪酒盃. 聽得歌聲人盡笑, 夜頭旗幟曉頭催.

大面: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神. 疾步徐추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束毒: 蓮頭藍面異人間, 押隊來庭學舞鸞. 打鼓冬冬風瑟瑟, 南奔北躍也無端.

산猊: 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搖頭掉尾馴仁德, 椎{雄}??氣寧同百獸才.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顯宗實錄字本』.

회악과 신열악은 유리왕 때 만들었으며, 돌아악은 탈해왕, 지아악은 파사왕, 사내[시뇌라고도 한다.]악은 나해왕, 가무는 나밀왕, 우식악은 눌지왕 때 만든 것이다. 대악은 자비왕 때 사람인 백결 선생이 만들었으며, 간인은 지대로왕 때 사람인 천상 욱개자가 만든 것이다. 미지악은 법흥왕 때 만든 것이며, 도령가는 진흥왕 때 만든 것이다. 날현인은 진평왕 때 사람인 담수가 만들었으며, 사내 기물악은 원랑도가 만든 것이오, 내지는 일상군의 음악이오, 백실은 압량군의 음악이오, 덕사내는 하서군의 음악이오, 석남사내도는 동벌군의 음악이오, 사중은 북외군의 음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웠을 때 만들었다. 그러나 곡조와 악기의 수 및 가무의 형태는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기에는 "정명왕(신문왕) 9년에 왕이 신촌에 거동하여 큰 술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가무(가舞)에는 감(監)이 6명, 가척(가尺)이 2명, 무척이 1명; 하신열무에는 감이 4명, 금(琴)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3명; 사내무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2명; 한기무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상신열무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2명; 소경무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1명, 가척이 3명; 미지무에는 감이 4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이었다. 애장왕 8년에 음악을 연주하는데 처음으로 사내금을 연주하였다. 무척 4명은 푸른 옷을 입었으며, 금척 1명은 붉은 옷을 입었고, 가척 5명은 채색 옷을 입고 수놓은 부채를 들고 금을 새겨 넣은 띠를 띠었다. 다음으로 대금무를 연주하는데 무척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금척은 푸른 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 이러할 뿐이니 자세한 것을 말할 수가 없다. 신라 시대에 악공은 모두 척(尺)이라고 불렀다. 최치원의 시에 향악잡영 5수가 있으므로 이제 다음에 기록한다.

금환(金丸): 몸을 돌리고 팔 휘두르며 금구슬을 희롱하니

달 흐르고 별 떠올라 눈에 가득 차누나.

의좋은 친구있다한들 어찌 이보다 더 좋으랴?

넓은 세상 태평한 것 이제야 알겠구나.

월전(月顚): 높은 어깨 움추린 목, 머리털 높이 세우고

팔을 걷은 뭇 선비들 술잔 시비 한창이네.

노래 소리 듣고서 사람 모두 웃는데

밤에 세운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누나.

대면(大面): 황금빛 얼굴 그 사람이

구슬 채찍 들고 귀신 부리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운치있게 춤추니

붉은 봉새가 요시대 봄철에 춤추는 것 같구나.

속독(束毒): 엉킨 머리 쪽빛 얼굴, 사람 같지 않은데

떼를 지어 뜰에 나와 난새 춤을 배우네.

북은 둥둥 울리고, 바람 솔솔 부는데

이리 저리 뛰어 놀아 끝이 없구나.

산예(산猊): 머나먼 길 걷고 걸어 사막을 지나오니

털 가죽은 헤어지고 먼지가 쌓였는데

흔드는 머리, 흔드는 꼬리에 어진 모습 배었구나.

웅장한 그의 기상, 모든 짐승이 못미치리.


○<高句麗>樂, 『通典』云: "樂工人紫羅帽, 飾以鳥羽, 黃大袖, 紫羅帶, 大口袴, 赤皮화, 五色緇繩. 舞者四人, 椎계於後, 以絳抹額, 飾以金당, 二人黃裙유·赤黃袴, 二人赤黃裙유·袴, 極長其袖, 烏皮화, 雙雙倂立而舞. 樂用: 彈箏一, 국箏一, 臥공후一, 竪공후一, 琵琶一, 五絃一, 義자笛一, 笙一, 橫笛一, 簫一, 小필률一, 大필률一, 桃皮필률一, 腰鼓一, 齋鼓一, 첨鼓一, 唄一. 大<唐><武太后>時, 尙二十五曲, 今唯能習一曲, 衣服亦침{침}??衰敗, 失其本風." 『冊府元龜』云: "樂有: 五絃琴·箏·필률·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趙炳舜

고구려 음악에 대해서는 「통전」에 "악공들은 자색 비단 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고, 황색의 큰 소매옷에 자색 비단 띠를 띠었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물을 들인 끈으로 장식하였다. 춤추는 자는 네 명인데, 복상투를 뒤에 늘이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매고, 금고리로 장식하였다. 두 명은 황색 치마 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고, 두 명은 적황색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으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두 명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악기로는 탄쟁 하나, 국쟁 하나, 와공후 하나, 수공후 하나, 비파 하나, 오현금 하나, 의취저 하나, 생(笙) 하나, 횡저 하나, 퉁소 하나, 소필률 하나, 대필률 하나, 도피필률 하나, 요고 하나, 재고 하나, 첨고 하나, 패 하나를 사용하였다. 당 무태후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상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책부원구」에는 "악기에 오현금, 쟁, 피리, 횡저, 퉁소, 북 등이 있고 갈대를 불어서 곡조를 조화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百濟>樂, 『通典』云: "<百濟>樂, <中宗>之代, 工人死散, <開元>中, <岐王範>爲大常卿{太常卿}??, 復奏置之, 是以音伎多闕. 舞者二人, 紫大袖·裙유, 章甫冠, 皮履. 樂之存者, 箏·笛·桃皮필률·공후, 樂器之屬, 多同於內地." 『北史』云: "有鼓角·공후·箏·우·지·笛之樂."

三國史記卷第三十二.


趙炳舜

백제의 음악에 대하여 「통전」에는 "백제 음악은 당 나라 중종 시대에 악공들이 죽고 흩어졌는데, 개원 연간에 기왕범이 태상경이 되어서야 다시 백제 음악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였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은 음곡이 많다. 춤추는 자 두 명은 자색 큰 소매 치마 저고리와 장보관(章甫冠)에 가죽신을 신었다. 악기로서 남아 있는 것은 쟁, 저, 도피필률, 공후인데, 악기류는 중국과 같은 것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사」에는 "고, 각, 공후, 쟁, 간, 저, 저와 같은 악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 제 32 끝




三國史記卷第三十三.



삼국사기 권 제 33


雜志第二.

色服·車騎·器用·屋舍.


잡지 제 2.

복색. 거마. 기물. 가옥.


色服)??.


허성도.

복색.


○<新羅>之初, 衣服之制, 不可考色. 至第二十三葉<法興王>, 始定六部人服色尊卑之制, 猶是夷俗. 至<眞德>在位二年, <金春秋>入<唐>, 請襲<唐>儀, <玄宗{太宗}>??皇帝詔可之, 兼賜衣帶. 遂還來施行, 以夷易華. <文武王>在位四年, 又革婦人之服, 自此已後, 衣冠同於<中國>. 我<太祖>受命, 凡國家法度, 多因<羅>舊, 則至今朝廷士女之衣裳, 蓋亦<春秋>請來之遺制歟. 臣三奉使上國, 一行衣冠, 與<宋>人無異. 嘗入朝尙早, 立<紫宸殿>門, 一閤門員來問: "何者是<高麗>人使?" 應曰: "我是." 則笑而去. 又<宋>使臣<劉逵>·<吳拭>來聘在館, 宴次見鄕粧倡女, 召來上階, 指闊袖衣·色絲帶·大裙, 漢{嘆}??曰: "此皆三代之服, 不擬{疑}??尙行." 於此, 知今之婦人禮服, 蓋亦<唐>之舊歟. <新羅>年代綿遠, 文史缺落, 其制不可루數, 但粗記其可見云爾.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顯宗實錄字本』.李丙燾.

신라 초기의 의복제도는 색채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다. 제 23대 법흥왕 때 처음으로 6부의 복색의 존비제도를 정하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오히려 동이의 풍속을 유지하였다. 진덕왕 2년에 김춘추가 당에 가서 당의 의식을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당 태종(현종의 잘못)이 이를 허락하고 동시에 의대를 주었다. 그가 돌아와서 이를 시행하여, 우리의 풍속을 중국의 풍속으로 바꾸었다.

문무왕 4년에는 또한 부인의 의복제도를 고치니, 이후로 우리의 의관이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은 후에도 모든 국가 제도는 신라의 옛 것을 많이 따랐으므로, 지금 조정과 상류 남녀들의 의복도 대개 춘추가 당 나라에서 받아 왔던 옛날 제도일 것이다. 내가 세 번 중국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우리 일행의 의관이 송 나라와 다른 것이 없었다. 한번은 조회에 들어가다가 너무 일찍 도착하여 자신전 정문에 서 있었는데 어떤 합문원(閤門員)이 와서 "누가 고려 사신이냐"고 묻기에 "내가 고려 사신이다"라고 말하니, 그가 웃으면서 간 일이 있었다. 그리고 송 나라 사신 유규, 오식 등이 와서 사관에 묵고 있을 때, 연회석상에서 우리 옷차림을 한 기생을 보고 섬돌 위로 불러 올려 소매 넓은 옷과 색실 띠와 긴 치마를 가리키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중국 3대의 의복인데 지금까지 여기에서 입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 부녀의 예복도 당 나라의 옛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문헌과 사서들이 인멸되어 그 제도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중에서 찾아볼만한 것을 대강 기록하기로 한다.


○<法興王>制: 自太大角干至大阿찬, 紫衣, 阿찬至級찬, 緋衣병牙笏, 大奈麻·奈麻, 靑衣, 大舍至先沮知, 黃衣.


법흥왕 때의 제령에는, 태대각간으로부터 대아찬까지는 자색 옷을 입었으며, 아찬으로부터 급찬까지는 붉은 옷에 상아홀을 들었으며, 대나마와 나마는 푸른 옷, 대사로부터 선저지까지는 황색 옷을 입는다고 되어 있다.


○伊찬·잡찬, 錦冠; 波珍찬·大阿찬·衿荷, 緋冠; 上堂大奈麻·赤位大舍, 組纓.


이찬과 잡찬은 비단 관을 쓰고, 파진찬과 대아찬과 금하는 진홍빛 관을 쓰며, 상당 대나마와 적위 대사는 실로 짠 갓끈을 매었다.


○<興德王>卽位九年, <太和>八年, 下敎曰: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요薄, 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固有常刑."


흥덕왕 9년, 즉 태화 8년에 교지를 내려 "사람에도 상하가 있고, 지위에도 높고 낮음이 있어서, 명칭과 법식이 같지 않으며 의복도 다른 법이다. 풍속이 점점 각박하여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기한 외래품만을 좋아한 나머지 도리어 순박한 우리의 것을 싫어하니, 예절은 곧잘 분수에 넘치는 폐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삼가 옛 법전에 따라 명확하게 법령을 선포하노니, 만일 고의로 이를 어기면 국법대로 처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眞骨大等: 복頭, 任意{用}??;; 表衣·半臂·袴, 병禁계·繡錦羅; 腰帶禁硏文白玉; 靴禁紫皮; 靴帶禁隱文白玉; 襪任用綾已下; 履任用皮·絲·麻; 布, 用二十六升已下.


趙炳舜. 『三國史節要』.

진골 대등은, 복두는 임의로 하되 겉옷과 반소매옷과 바지에는 모직이나 수놓은 비단 나직의 사용을 모두 금한다. 허리띠에는 연문 백옥의 사용을 금한다. 장화에는 자색 가죽의 사용을 금하며, 장화끈에는 은문백옥의 사용을 금한다. 버선은 능직 이하를 임의로 사용하며, 신은 가죽, 실, 삼을 임의로 사용하되 베는 26새 이하를 사용한다.


○眞骨女: 表衣, 禁계·繡錦羅; 內衣·半臂·袴·襪·履, 병禁계·繡羅; 표, 禁계及繡用金銀絲·孔雀尾·翡翠毛者; 梳, 禁瑟瑟鈿·玳瑁, 釵, 禁刻鏤及綴珠; 冠, 禁瑟瑟鈿; 布, 用二十八升已下. 九{凡}??色禁자黃.


趙炳舜. 『三國史節要』.

진골 여인은, 겉옷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의 사용을 금하며, 내의, 반소매옷, 바지, 버선, 신은 모두 모직과 수놓은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목도리에는 모직과 금은실로 수놓은 것과 공작꼬리와 비취털의 사용을 금하며, 빗에는 슬슬(瑟瑟)을 박은 것과 대모의 사용을 금한다. 비녀에는 금실을 새겨 넣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하며, 모자에는 슬슬을 박은 것을 금하며, 베는 28새 이하를 사용하며, 아홉 색깔 중에서 자황색의 사용을 금한다.


○六頭品: 복頭, 用세羅·시絹布; 表衣, 只用綿紬·紬{細}??布; 內衣, 只用小文綾·시絹布; 袴, 只用시絹·綿紬布; 帶, 只用烏犀·鍮·鐵·銅; 襪{履}??, 只用시綿紬布; 靴, 禁烏미{경}??皺文·紫皮; 靴, 帶用烏犀·鍮·鐵·銅; 履, 只用皮·麻; 布, 用十八升已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6두품은, 복두에는 가늘고 성긴 나직과 거친 견포를 사용하며, 겉옷에는 다만 면주와 주포를 사용한다. 내의에는 잔 무늬 능직과 거친 견포만을 사용하며, 바지에는 거친 견직과 면주포만을 사용한다. 띠는 검은 무소뿔과 놋쇠와 철과 구리만으로 장식하며, 버선은 거친 면주포만을 사용한다. 장화에는 검은 사슴 가죽으로 주름진 무늬를 입히는 것을 금하며 자색 가죽의 사용도 금한다. 장화끈은 검은 무소뿔과 놋쇠와 철과 구리를 사용한다. 신은 가죽과 삼만을 사용하며, 베는 18새 이하를 사용한다.


○六頭品女: 表衣, 只用中小文綾·시絹; 內衣, 禁계·繡錦·野草羅; 半臂, 禁계·繡羅·세羅; 袴, 禁계·繡錦羅·세羅金泥; 표, 禁계·繡錦·羅金銀泥; 褙·당·短衣, 병禁계·繡錦羅·布紡羅·野草羅金銀泥; 表裳, 禁계·繡錦羅·세羅·野草羅·金銀泥협힐; 요·반, 禁계·繡; 內裳, 禁계·繡錦羅·野草羅; 帶, 禁以金銀絲·孔雀尾·翡翠毛爲組; 襪요, 禁계羅·세羅; 襪, 禁계·繡錦羅·세羅·野草羅; 履, 禁계·繡錦羅·세羅; 梳, 禁瑟瑟鈿; 釵, 禁純金以銀刻鏤及綴珠; 冠, 用세羅·紗絹; 布, 用二十五升已下. 色, 禁자黃·紫·紫粉·金屑·紅.


6두품 여인은, 겉옷은 다만 중소 무늬 능직과 거친 견직만을 사용하며, 내의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반소매옷은 모직과 수놓은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의 사용을 금하며, 바지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에 금박 올린 것의 사용을 금한다. 목도리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에 금은박 올리는 것을 금하며, 배자와 잠방이와 짧은 옷에는 모두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베실 나직과 야초 나직에 금은박 올리는 것을 금한다. 겉치마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야초 나직과 금은박 올린 채색 비단의 사용을 금하며, 허리끈과 옷끈에는 모직과 수놓은 것을 금한다. 속치마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야초 나직을 금하며, 허리띠는 금은실과 공작꼬리와 비취털로 술 만드는 것을 금한다. 버선목은 털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을 금하며, 버선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야초 나직을 금한다. 신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을 금하며, 빗에는 슬슬의 장식을 금하며, 비녀에는 순금에 은을 새겨 넣거나 구슬매다는 것을 금한다. 모자에는 가늘고 성긴 나직과 엷은 견직을 사용하며, 베는 25새 이하를 사용한다. 색은 자황색과 자색과 자색 분과 금가루 빛과 붉은 빛의 사용을 금한다.


○五頭品: 복頭, 用羅·시絹布; 表衣, 只用布; 內衣·半臂, 只用小文綾·시絹布; 袴, 只用綿紬布; 腰帶, 只用鐵; 襪, 只用綿紬; 靴, 禁烏경皺文·紫皮; 靴帶, 只用鍮·鐵·銅; 履, 用皮·麻; 布, 用十五升已下.


5두품은, 복두에는 나직과 거친 견포를 사용하며, 겉옷은 다만 베를 사용한다. 내의와 반소매옷은 잔 무늬 능직과 거친 견포만을 사용한다. 바지는 면주포만을 사용하며, 허리띠는 다만 철로 장식한다. 버선에는 다만 면주를 사용하며, 장화는 주름 무늬로 된 검은 사슴 가죽과 자색 가죽을 금한다. 장화끈은 다만 놋쇠와 철과 구리로 장식한다. 신은 가죽과 삼을 사용하며, 베는 15새 이하를 사용한다.


○五頭品女: 表衣, 只用無文獨織; 內衣, 只用小文綾; 半臂, 禁계·繡錦·野草羅·세羅; 袴, 禁계·繡錦羅·세羅·野草羅金泥; 표, 用綾·絹已下; 개·당, 禁계·繡綿·野草羅·布紡羅·金銀泥협힐; 短衣, 禁계·繡錦·野草羅·布紡羅·세羅·金銀泥협힐; 表裳, 禁계·繡錦·野草羅·세羅·金銀泥협힐; 요·반, 禁계·繡錦羅; 內裳, 禁계·繡綿·野草羅·金銀泥협힐; 帶, 禁以金銀絲·孔雀尾·翡翠毛爲組; 襪요, 禁계·繡錦羅·세羅; 襪, 禁계·繡錦羅·세羅·野草羅; 履, 但用皮已下; 梳, 用素玳瑁已下; 釵, 用白銀已下; 無冠; 布, 用二十升已下; 色, 禁자黃·紫·紫粉·黃屑·紅緋.


5두품 여인은, 겉옷은 무늬없는 홑천을 사용하며, 내의는 잔무늬 능직만을 사용하며, 반소매옷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바지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야초 나직과 금박을 금한다. 목도리에는 능직과 견직 이하를 사용한다. 배자와 잠방이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베실 나직과 금은박 올린 채색 비단의 사용을 금한다.

짧은 옷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베실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금은박 올린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한다. 겉치마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금은박 올린 무늬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하며, 허리끈과 옷끈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속치마에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야초 나직과 금은박 올린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한다. 허리띠에는 금은실과 공작 꼬리와 비취 털로 만든 수술의 사용을 금한다. 버선목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버선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야초 나직의 사용을 금하며, 신은 가죽 이하만을 사용하며, 빗은 대모 이하를 사용한다. 비녀는 백은 이하를 사용하며, 모자는 쓰지 않는다. 베는 20새 이하를 사용한다. 색은 자황색과 자색과 자색 분과 누른 가루와 진홍빛의 사용을 금한다.


○四頭品: 복頭, 只用紗·시絹布; 表衣·袴, 只用布; 內衣·半臂, 只用시絹·綿紬布; 腰帶, 只用鐵·銅; 靴, 禁烏경皺文·紫皮; 靴帶, 只用鐵·銅; 履, 用牛皮·麻已下; 布, 用十三升已下.


4두품은, 복두는 다만 엷은 비단과 거친 견포만을 사용하며, 겉옷과 바지는 다만 베만을 사용한다. 내의와 반소매옷은 다만 거친 견직과 면주포만을 사용하며, 허리띠는 다만 철과 구리만으로 장식한다. 장화에는 주름 무늬의 검은 사슴가죽과 자색 가죽의 사용을 금하며, 장화끈에는 다만 철과 구리만으로 장식하며, 신은 소가죽과 삼 이하를 사용하며, 베는 13새 이하를 사용한다.


○四頭品女: 表衣, 只用綿紬已下; 內衣, 只用小文綾已下; 半臂·袴, 只用小文綾·시絹已下; 표·短衣, 只用絹已下; 개{褙}??·당, 只用綾已下; 表裳, 只用시絹已下; 요與裳同; 반, 用越羅; 無內裳; 帶, 禁繡組及野草羅·乘天羅·越羅, 只用錦{綿}??紬已下; 襪요, 只用小文綾已下; 襪, 只用小文綾·시綿紬布; 履, 用皮已下; 梳, 用素牙·角·木; 釵, 禁刻鏤·綴珠及純金; 無冠; 布, 用十八升; 色, 禁자黃·紫·紫粉·黃屑·緋·紅·滅紫.


『북한본』.今西龍.

4두품 여인은, 겉옷은 다만 면주 이하만을 사용하며, 내의는 다만 잔 무늬 능직 이하만을 사용하고, 반소매옷과 바지는 잔 무늬 능직과 거친 견직 이하만을 사용한다. 목도리와 짧은 옷은 다만 견직 이하만을 사용하며, 배자와 잠방이는 다만 능직 이하만을 사용하고, 겉치마는 다만 거친 견직 이하만을 사용한다. 허리끈은 치마와 같으며 옷끈은 월라를 사용한다. 속치마는 입지 않으며 허리띠는 수놓은 것과 땋은 것과 야초 나직과 승천 나직과 월라의 사용을 금하고 다만 면주 이하만을 사용한다. 버선목은 다만 잔 무늬 능직 이하만을 사용한다. 버선은 다만 잔 무늬 능직과 거친 면주포만을 사용하며, 신은 가죽 이하를 사용한다. 빗은 흰색의 뼈, 뿔, 나무 등을 사용하며, 비녀는 금실을 새겨 넣거나 구슬을 다는 것과 순금의 사용을 금한다. 모자는 쓰지 않는다. 베는 18새를 사용한다. 색은 자황색과 자색과 자색 분과 황색 가루와 진홍색과 홍색과 멸자색을 금한다.


○平人: 복頭, 只用絹布; 表衣·袴, 只用布; 內衣, 只用絹布; 帶, 只用銅·鐵; 靴, 禁烏경皺文·紫皮; 靴帶, 只用鐵·銅; 履, 用麻已下; 布, 用十二升已下.


평민은, 복두는 견포만을 사용하며 겉옷과 바지는 베만을 사용한다. 내의는 견포만을 사용하며 허리띠는 구리와 철로만 장식한다. 장화는 주름 무늬로 된 검은 사슴가죽과 자색 가죽의 사용을 금한다. 장화끈은 철과 구리로만 장식한다. 신발은 삼 이하를 사용하며 베는 12새 이하를 사용한다.


○平人女: 表衣, 只用綿紬布; 內衣, 只用시絹·綿紬布; 袴, 用시已下; 表裳, 用絹已下; 반, 只用綾已下; 帶, 只用綾·絹已下; 襪{글}??요, 用無文; 襪, 用시綿紬已下; 梳, 用素牙·角已下; 釵, 用鍮石已下; 布, 用十五升已下; 色, 與四頭品女同.


趙炳舜. 『三國史節要』.

평민 여인은, 겉옷은 면주포만을 사용하며 내의는 거친 견직과 면주포만을 사용한다. 바지는 거친 면주 이하를 사용하며 겉치마는 견직 이하를 사용한다. 옷끈은 능직 이하를 사용하며 띠는 다만 능직과 견직 이하를 사용한다. 버선목은 무늬 없는 천을 사용하며 버선은 거친 면주 이하를 사용한다. 빗은 흰색의 뼈와 뿔 이하를 사용하며 비녀는 황동 이하를 사용한다. 베는 15새 이하를 사용하며, 색의 사용은 4두품 여자와 같다.


○<高句麗>·<百濟>衣服之制, 不可得而考. 今但記見於<中國>歷代史書者.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제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이제 중국의 역대 사서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北史』云: "<高句麗>人皆頭着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 服大柚杉{袖衫}??·大口袴·素皮帶·黃革履, 婦人裙유加선."


趙炳舜. 『三國史節要』.

「북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을 썼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았다. 사인은 거기에 2개의 새깃을 더 꽂았다. 귀한 사람의 모자를 소골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자색 나직으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소매가 큰 웃옷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를 띠고, 황색 가죽신을 신었으며, 부녀들은 치마 저고리에 끝동을 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新唐書』云: "<高句麗>王服五采, 以白羅製冠, 革帶皆金구. 大臣靑羅冠. 次絳羅, 珥兩鳥羽, 金銀雜구, 衫용유, 袴大口, 白韋帶, 黃革履. 庶人衣褐, 戴弁, 女子首巾괵."


「신당서」에는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나직으로 관을 만들며, 가죽혁대에는 금단추를 달았다. 대신은 푸른 나직의 모자, 그 다음 신분은 진홍색의 모자를 쓰는데, 2개의 새 깃을 귀 부분에 꽂고 다양한 금은 단추를 달았다. 웃옷은 통소매요 바지는 통이 넓었으며 흰 가죽띠에 황색 가죽신을 신었다. 평민은 거친 옷을 입고 고깔을 썼으며, 여자는 머리에 장식삼아 수건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冊府元龜』云: "<高句麗>, 其公會, 皆錦繡·金銀以自飾. 大加·主薄皆着책, 如冠책而無後, 其小加着折風, 形如弁."


「책부원구」에는 "고구려는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금수와 금은으로 차림을 하였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머리에 수건을 썼다. 그것은 관책 같으면서 후면이 없었다. 소가는 절풍을 썼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北史』云: "<百濟>衣服與<高麗>略同. 若朝拜·祭祀, 其冠兩廂加翅, 戎事則不. 奈率已下{上}??, 冠飾銀花, 將德紫帶, 施德조帶, 固德赤帶, 季德靑帶, 對德·文督皆黃帶, 自武督至剋虞, 皆白帶."


李丙燾.

「북사」에는 "백제의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다. 조회의 배례와 제사 때는 그 관의 양쪽에 날개를 붙인다. 그러나 군대의 행사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나솔 이하는 관에 은꽃을 장식하였고, 장덕은 자색 띠, 시덕은 검은 띠, 고덕은 적색 띠, 계덕은 푸른 띠, 대덕과 문독은 모두 황색 띠, 무독으로부터 극우까지는 모두 흰 띠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隋書』云: "<百濟>自左平{佐平}??至將德, 服紫帶, 施德조帶, 固德赤帶, 季德靑帶, 對德以下, 皆黃帶, 自文督至剋虞, 皆白帶, 冠制병同, 唯奈率以上, 飾以銀花."


『북한본』.

「수서」에는 "백제에서는 좌평으로부터 장덕까지는 자색 띠, 시덕은 검은 띠, 고덕은 적색 띠, 계덕은 푸른 띠, 대덕 이하는 모두 황색 띠, 문독으로부터 극우까지는 모두 흰 띠를 사용하였다. 모자에 대한 제도는 모두 같은데 다만 나솔 이상은 은화로 장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唐書』云: "<百濟>, 其王服大袖紫袍, 靑錦袴, 烏羅冠, 金花爲飾, 素皮帶, 烏革履. 官人盡緋爲衣, 銀花飾冠. 庶人不得衣緋·紫."


「당서」에는 "백제에서는, 왕은 소매가 큰 자색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나직 모자에 금화 장식을 하고, 흰 가죽띠에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 관원들은 모두 진홍빛 옷을 입고, 은화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평민들은 진홍빛과 자색옷을 입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通典』云: "<百濟>其衣服, 男子略同於<高麗>, 婦人衣似袍而袖微大."


「통전」에는 "백제는 의복제도에 있어서 남자들은 고구려와 대략 유사하고, 부녀의 옷은 도포와 같으면서 소매가 약간 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車騎. <新羅>.


거기(車騎). 신라.


○眞骨: 車林{材}??不用紫檀·沈香, 不得帖玳瑁, 亦不敢飾以金銀玉. 褥子用綾·絹已下, 不過二重, 坐子用鈿錦·二色綾已下, 緣用錦已下, 前後헌用小文綾·紗·시已下, 色以深靑·碧·紫·紫粉, 絡網用사麻, 色以紅·緋·翠·碧, 粧表且{但}??用絹布, 色以紅·緋·靑·표, 牛勒及앙用시絹布, 環禁金·銀·鍮石, 步搖亦禁金·銀·鍮石.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진골은 수레 재목으로 자단과 침향을 쓰지 않고 대모를 붙이지 못한다. 또한 감히 금, 은, 옥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 요는 능직과 견직 이하를 사용하되 두 겹을 넘지 못한다. 방석은 금꽃 비단과 두 가지 색갈의 능직 이하를 사용하고 가장자리는 비단 이하를 사용한다. 수레의 앞뒤 휘장은 잔무늬 능직과 엷은 비단과 거친 면주 이하를 사용하되 색깔은 짙은 청색과 짙은 녹색과 자색과 자색 분으로 한다. 말머리 장식은 삼실을 사용하되 색깔은 홍색과 진홍색 청녹색과 짙은 녹색으로 한다. 겉 장식은 견포만을 사용할 수 있고, 색갈은 홍색과 진홍색과 청색과 당청색으로 한다. 소 굴레와 멍에끈은 거친 견포를 사용하며, 고리에는 금, 은, 황동의 사용을 금한다. 말방울도 금, 은, 황동의 사용을 금한다.


○六頭品: 褥子用시絹已下. 坐子用시絹布, 無緣, 前後헌, 若隨眞骨已上貴人行, 則不設, 但自行, 則用竹簾若莞席, 緣以시絹已下, 絡網用布, 色以赤·靑, 牛勒及앙用布, 環用鍮·銅·鐵.


6두품은, 요에는 거친 견직 이하를 사용한다. 방석은 거친 견포를 사용하되 가장자리를 꾸미지 못한다. 수레의 앞 뒤 휘장은, 진골 이상의 귀인을 수행할 때는 치지 않고, 혼자 다닐 때만 대발이나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 가장자리는 거친 견직 이하로 꾸민다. 말머리 장식은 베를 사용하되, 색깔은 붉은빛과 푸른빛으로 한다. 소 굴레와 멍에끈은 베를 사용한다. 고리는 놋쇠와 구리와 철을 사용한다.


○五頭品: 褥子只用氈若布, 前後헌只用竹簾·莞席, 緣以皮·布, 無勒, 앙用麻, 環用木·鐵.


5두품은, 요에는 다만 전 혹은 베를 사용한다.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 가장자리는 가죽과 베로 꾸민다. 굴레는 사용하지 않으며 멍에끈은 삼을 사용하고, 고리는 나무와 철을 사용한다.


○眞骨: 鞍橋禁紫檀·沈香, 鞍천禁계·繡錦羅, 鞍坐子禁계·繡羅, 障泥但用麻油染, 銜·등禁金·鍮石·鍍金·綴王{玉}??, 靷추禁組及紫조.


趙炳舜. 『三國史節要』.

진골은, 안장에 자단과 침향의 사용을 금한다. 안장 언치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의 사용을 금하며, 안장은 모직과 수놓은 나직을 금한다. 말 다래는 다만 마유로 염색한다. 재갈과 등자에 금과 황동으로 도금하거나 구슬을 다는 것을 금한다. 말 가슴 걸이에는 땋은 줄과 자색 줄의 사용을 금한다.


○眞骨女: 鞍橋禁寶鈿, 鞍천·鞍坐子禁계羅, 脊雜[一云체脊.]禁계·繡羅, 銜·등禁척金·綴玉, 靷추禁雜金銀絲組.


진골 여인은, 안장에 보석 장식을 금한다. 안장 언치와 방석은 털 나직의 사용을 금하며, 말등 장식물[혹은 체척이라고도 한다.]은 모직과 수놓은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재갈과 등자는 도금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말 가슴걸이는 금, 은실을 섞어 땋는 것을 금한다.


○六頭品: 鞍橋禁紫檀·沈香·黃楊·槐·자及金·銀·綴玉, 鞍천用皮, 鞍坐子用綿紬·시布·皮, 障泥用麻油染, 銜·등禁金·銀·鍮石及鍍金銀·綴玉, 靷추用皮·麻.


6두품은, 안장에 자단, 침향, 회양목, 괴목, 산뽕나무 등을 사용하거나, 금, 은을 사용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안장 언치로는 가죽을 사용한다. 안장 방석은 명주와 거친 베와 가죽을 사용하며, 말 다래는 마유로 염색한다. 재갈과 등자는 금, 은, 황동 등을 쓰거나 도금, 도은과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말의 가슴걸이로는 가죽과 삼을 사용한다.


○六頭品女: 鞍橋禁紫檀·沈香及척金·綴玉, 鞍천·鞍坐子禁계·繡錦羅·세羅, 替脊用綾·시絹, 銜등禁金·銀·鍮石及鍍金銀·綴玉, 障泥用皮, 靷추不用組.


6두품 여인은, 안장에 자단과 침향을 사용하는 것과 도금을 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안장 언치와 안장 방석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말등의 장식물은 능직과 거친 견직을 사용한다. 재갈과 등자에 금, 은, 황동 등을 사용하거나 도금, 도은과 구슬 다는 것을 금한다. 말 다래로는 가죽을 사용하며, 말 가슴걸이에 땋은 줄을 사용하지 않는다.


○五頭品: 鞍橋禁紫檀·沈香·黃楊·槐·자, 亦不得用金·銀·綴玉, 鞍천用皮, 障泥用麻油染, 銜·등禁金·銀·鍮石, 又不得鍍鏤金銀, 靷추用麻.


5두품은, 안장에 자단, 침향, 회양목, 괴목, 산뽕나무의 사용을 금하며, 금, 은을 사용하거나 구슬 다는 것도 금한다. 안장 언치는 가죽을 사용한다. 말 다래는 마유로 염색한다. 재갈과 등자는 금, 은, 황동의 사용을 금한다. 또한 금, 은으로 도금을 하거나 새겨 넣지도 못한다. 말 가슴걸이로는 삼을 사용한다.


○五頭品女: 鞍橋禁紫檀·沈香, 又禁飾以金·銀·玉, 鞍천·鞍坐子禁계·繡錦·綾·羅·虎皮, 銜·등禁金·銀·鍮石, 又禁飾以金·銀, 障泥用皮, 靷추禁組及紫·紫粉暈조.


5두품 여인은, 안장에 자단과 침향의 사용을 금하고, 금, 은, 옥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한다. 안장 언치와 안장 방석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과 능직과 나직과 호피를 금한다. 재갈과 등자는 금, 은, 황동 등을 금하고, 금, 은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한다. 말 다래로는 가죽을 사용하며, 말 가슴걸이는 땋은 줄과 자색과 자색 분으로 아롱지게 만든 줄의 사용을 금한다.


○四頭品至百姓: 鞍橋禁紫檀·沈香·黃楊·槐·자, 又禁飾以金·銀·玉, 鞍천用牛馬皮, (-鞍褥用皮)??, 障泥用楊·竹, 銜用鐵, 등用木·鐵, 靷추用筋若麻爲絞.


趙炳舜. 『三國史節要』.

4두품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는, 안장에 자단, 침향, 회양목, 괴목, 산뽕나무의 사용을 금하고, 금, 은, 옥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한다. 안장 언치로는 마소 가죽을 사용한다. 안장 요는 가죽을 사용하며, 말 다래는 버들과 대를 사용한다. 재갈은 철을 사용하며, 등자는 나무와 철을 사용한다. 말 가슴걸이는 힘줄 혹은 삼으로 꼰 끈을 사용한다.


○四頭品女至百姓女: 鞍橋禁紫檀·沈香·黃楊·槐, 又禁飾金·銀·玉, 鞍천·鞍坐子禁계·繡錦羅·세羅·綾·虎皮, 銜·등禁金·銀·鍮石{錫}??, 又禁飾金·銀, 障泥但用皮, 靷추禁組及紫·紫粉暈조.


趙炳舜. 『三國史節要』.

4두품 여인으로부터 민간 여인에 이르기까지는, 안장에 자단, 침향, 회양목, 괴목의 사용을 금하고, 금, 은, 옥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한다. 안장 언치와 안장 방석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 나직과 가늘고 성긴 나직과 능직과 호피의 사용을 금한다. 재갈과 등자는 금, 은, 황동의 사용을 금하고, 금, 은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한다. 말 다래로는 가죽만을 사용하며, 말 가슴걸이로는 땋은 줄과 자색과 자색 분으로 아롱지게 만든 줄의 사용을 금한다.


器用.


기물


○眞骨: 禁金·銀及鍍金.


진골은 금, 은과 도금한 것의 사용을 금한다.


○六頭·五頭品: 禁金·銀及鍍金銀. 又不用虎皮·毬수·탑등.


6두 및 5두품은, 금 은과 도금 도은의 사용을 금한다. 또한 호피와 모직 보료와 모포를 사용하지 않는다.


○四頭品至百姓, 禁金·銀·鍮石{錫}??·朱척平文物, 又禁毬수·탑등·虎皮·大<唐>담等.


趙炳舜. 『三國史節要』.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금 은 황동과 붉은 바탕에 금 은 돋움을 한 칠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또한 모직 보료와 모포와 호피와 중국 담요의 사용을 금한다.


屋舍.


가옥


○眞骨: 室長廣, 不得過二十四尺, 不覆唐瓦, 不施飛첨, 不雕懸魚, 不飾以金·銀·鍮石·五彩, 不磨階石, 不置三重階, 垣墻不施梁棟, 不塗石灰, 簾緣禁錦·계·繡·野草羅, 屛風禁繡, 床不飾玳瑁·沈香.


진골은, 방의 길이와 폭이 24자를 넘지 못한다. 당기와를 덮지 못하며, 부연을 달지 못하며, 조각한 현어를 달지 못하며, 금, 은, 황동과 오채색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계단 돌을 갈아 만들지 못하며, 3중의 돌층계를 놓지 못하며, 담에 들보와 상량을 설치하거나, 석회를 바르지 못한다. 발의 가장자리는 비단과 모직으로 수를 놓지 못하고 야초 나직의 사용을 금한다. 병풍에 수를 놓을 수 없고, 상은 대모나 침향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六頭品: 室長廣, 不過二十一尺, 不覆唐瓦, 不施飛첨·重복·공牙·懸魚, 不飾以金·銀·鍮石·白랍·五彩, 不置巾{中}??階及二重階, 階石不磨, 垣墻不過八尺, 又不施梁棟, 不塗石灰, 簾緣禁계·繡綾, 屛風禁繡, 床不得飾玳瑁·紫檀·沈香·黃楊, 又禁錦薦, 不置重門及四方門, 廐容五馬.


趙炳舜. 『三國史節要』.

6두품은, 방의 길이와 폭이 21자를 넘지 못한다. 당기와, 부연, 덧보, 도리 받침과 현어를 설치하지 못하며, 이에 금, 은, 황동, 백랍과 오채색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중계와 이중 층계를 설치하지 못하며, 섬돌을 갈아 만들지 못한다. 담장의 높이는 8자를 넘지 못한다. 담장에 들보와 상량을 설치하지 못하며 석회를 바르지 못한다. 발 가장자리는 모직과 수놓은 능직의 사용을 금한다. 병풍에는 수를 금한다. 상을 대모와 자단과 침향과 회양목으로 장식하지 못하며 또한 비단 깔개의 사용을 금한다. 겹문과 사방문을 설치하지 못하고, 마굿간은 말 5필을 둘 정도로 만든다.


○五頭品: 室長廣, 不過十八尺, 不用山楡木, 不覆唐瓦, 不置獸頭, 不施飛첨·重복{복}??·花斗牙·懸魚, 不以金·銀·鍮石·銅·랍·五彩爲飾, 不磨階石, 垣墻不過七尺, 不架以梁, 不塗石灰, 簾緣禁錦·계·綾·絹·시, 不作大門·四方門, 廐容三馬.


趙炳舜. 『三國史節要』.

5두품은 방의 길이와 폭이 18자를 넘지 못하며, 느릅나무 재목이나 당기와를 사용하지 못한다. 수두를 놓지 못하며, 부연과 덧보와 조각한 도리 받침과 현어를 설치하지 못하고, 금, 은, 황동, 구리, 백랍과 오채색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섬돌을 갈아 만들지 못하고, 담장은 높이가 7자를 넘지 못하며, 그 곳에 들보를 설치하거나 석회를 바르지 못한다. 발 가장자리는 비단과 모직과 능직과 견직과 거친 명주의 사용을 금한다. 대문과 사방문을 내지 못한다. 마굿간은 말 3필을 둘 정도로 만든다.


○四頭品至百姓: 室長廣, 不過十五尺, 不用山楡木, 不施藻井, 不覆唐瓦, 不置獸頭·飛첨·공牙·懸魚, 不以金·銀·鍮石{錫}??·銅·랍爲飾, 階체不用山石, 垣墻不過六尺, 又不架梁, 不塗石灰, 不作大門·四方門, 廐容二馬.


趙炳舜. 『三國史節要』.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방의 길이와 폭이 15자를 넘지 못하며, 느릅나무 재목을 사용하지 못한다. 무늬있는 천정을 설치하지 못하며, 당기와를 사용하지 못한다. 수두와 부연과 도리 받침과 현어를 설치하지 못하며, 금, 은, 황동, 구리, 백랍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층계와 섬돌에 산돌을 쓰지 못한다. 담장의 높이는 6자를 넘지 못하고, 거기에 들보를 설치하지 못하며, 석회를 바를 수 없다. 대문과 사방문을 내지 못한다. 마굿간은 말 2필을 둘 정도로 만든다.


○外眞村主與五品同, 次村主與四品同.

三國史記卷第三十三.


외진촌주는 5품과 같으며, 그 다음 촌주는 4품과 같다.

삼국사기 권 제 33 끝




三國史記卷第三十四.



삼국사기 권 제 34


雜志第三.

地理一.

(+<新羅>一)??


허성도.

잡지 제 3.

지리 1.


○<新羅>疆界, 古傳記不同. <杜佑>『通典』云: "其先本<辰韓>種, 其國在<百濟>·<&高麗{高句麗}??>二國東南, 東濱大海." <劉煦{劉구}>??『唐書』云: "東南俱限大海." <宋祁>『新書』云: "東南<日本>, 西<百濟>, 北<&高麗{高句麗}??>, 南濱海." <賈耽>『四夷述』曰: "<辰韓>在<馬韓>東, 東抵海, 北與<濊>接." <新羅><崔致遠>曰: "<馬韓>則<&高麗{高句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此諸說, 可謂近似焉. 若『新·舊唐書』皆云: "<卞韓>苗裔在<樂浪>之地." 『新唐書』又云: "東距長人, 長人者, 人長三丈, 鋸牙鉤爪, 搏人以食, <新羅>常屯弩士數千, 守之." 此皆傳聞懸說, 非實錄也. 按兩『漢志』: "<樂浪郡>距<洛陽>, 東北五千里." 注曰: "屬<幽州>, 故<朝鮮國>也." 則似與<계林>地分隔絶. 又相傳: 東海絶島上有大人國, 而人無見者, 豈有弩士守之者. 今按<新羅>始祖<赫居世>, <前漢><五鳳>元年甲子開國, 王都長三千七十五步, 廣三千一十八步, 三十五里, 六部. 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 <脫解王>九年, <始林>有계怪, 更名<계林>, 因以爲國號, <基臨王>十年, 復號<新羅>. 初<赫居世>二十一年, 築宮城, 號<金城>.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 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步. <新月城>北有<滿月城>, 周一千八百三十八步. 又<新月城>東有<明活城>, 周一千九百六步. 又<新月城>南有<南山城>, 周二千八百四步. 始祖已來處<金城>, 至後世多處兩<月城>. 始與<高句麗>·<百濟>, 地錯犬牙, 或相和親, 或相寇초. 後與(-大)??<唐>侵滅二邦, 平其土地, 遂置九州. 本國界內, 置三州: 王城東北, 當<唐恩浦>路曰<尙州>, 王城南曰<良州>, 西曰<康州>. 於故<百濟>國界, 置三州: <百濟>故城北<熊津>口曰<熊州>, 次西南曰<全州>, 次南曰<武州>. 於故<高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九州所管郡縣, 無慮四百五十.[方言所謂鄕·部·曲等, 雜所不復具錄.] <新羅>地理之廣무, 斯爲極矣, 及其衰也, 政荒民散, 疆土日蹙, 末王<金傳>, 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


허성도.李丙燾.허성도.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라의 국토 경계에 대하여는 옛날 기록들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다. 두우의 「통전」에는 "그 선조는 원래 진한의 종족인데, 그 나라가 백제, 고구려 두 나라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유구의 「당서」에는 "신라의 동남쪽이 모두 큰 바다에 닿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송기의 「신서」에는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 남쪽은 바다에 닿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 탐의 「사이술」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는데, 동쪽은 바다에 닿고, 북쪽은 예와 인접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최 치원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여러 설이 모두 유사하다고 할 만하다. 「신구당서」에서는 모두 "변한의 후예들이 낙랑 지방에 있었다"고 하였으며, 「신당서」에는 또한 "동쪽으로 장인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인이라는 것은 키가 세 길이며, 톱날 이빨과 갈구리 손톱으로 사람을 잡아 먹으므로 신라에서는 항상 활쏘는 군사 수천명을 주둔시켜 수비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모두 전해지는 소문이지 실제적인 기록은 아니다. 두 「한지」에 의하면 "낙랑군은 낙양 동북쪽으로 5천리에 있다"라고 하였고, 이 부분의 주에는 "유주에 속하였으니, 옛날 조선국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낙랑군은 계림과는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전래되는 말로는 동해의 외딴 섬에 대인국이 있다고 하지만 이를 본 사람이 없으니, 어찌 활쏘는 군사를 두어 수비하게 하는 일이 있겠는가?

이제 상고하건대 신라 시조 혁거세는 전한 오봉 원년 갑자에 나라를 세웠는데, 왕도는 길이가 3천 75보, 넓이는 3천 18보이며, 35리 6부로 되어 있었다. 국호는 서야벌이라 하였는데 혹은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고 하였다. 탈해왕 9년에 시림에서 닭소리가 들리는 괴이한 일이 있어 계림으로 바꾸어 불렀다. 이로 인하여 이것으로 국호를 삼았다가 기림왕 10년에 다시 신라라고 하였다. 처음 혁거세 21년에 궁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이라 하였으나, 파사왕 22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 혹은 재성이라고 불렀는데, 그 둘레가 1천 23보였다. 신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는데 둘레가 1천 8백 38보였다. 또한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이 있는데 둘레가 1천 9백 6보였다.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8백 4보였다. 시조 이래로 사람들은 금성에 살았고, 후세에 이르러서는 두 월성에서 많이 살았다. 처음에는 고구려 백제와는 국경이 들쑥날쑥 엇갈려 때로는 서로 화친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로 침략을 하다가, 후일 당 나라와 함께 두 나라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평정한 다음 마침내 9주를 설치하였다.

본국 경계 내에 3주를 설치하였다. 왕성 동북쪽의 당은포 방면을 상주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라 하고, 서쪽을 강주라 하였다. 이전의 백제 경내에 3주를 설치하였다. 백제의 옛성 북쪽 웅진 어구를 웅주라 하고, 그 다음 서남쪽을 전주, 그 다음 남쪽을 무주라고 하였다. 이전의 고구려 남쪽 지역에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으로부터 첫째를 한주, 그 다음 동쪽을 삭주, 그 다음 동쪽을 명주라고 하였다. 9주에서 관할하던 군, 현은 무려 4백 50개 소였다.[방언으로 말하던 향, 부, 곡 등 잡다한 것은 여기에 모두 적지 않는다] 신라 지역의 넓이와 길이가 이 때 가장 컸다. 신라가 쇠약하게 되자 정사가 거칠고 백성들이 흩어지니 강토가 날로 줄었다. 마지막 임금 김부가 나라를 가지고 우리 태조에게 귀순하니 그 나라를 경주로 정하였다.


○<尙州>, <沾解王>時取<沙伐國>爲州, <法興王>十一{二}??年, <梁><普通>六年, 初置軍主, 爲<上州>. <眞興王>十八年, 州廢, <神文王>七年, <唐><垂拱>三年, 復置, 築城, 周一千一百九步, <景德王>十六年, 改名<尙州>, 今因之. 領縣三: <靑驍縣>, 本<昔里火縣{音里火縣}>??, <景德王>改名, 今<靑理縣>; <多仁縣>, 本<達已縣>[或云<多已>.], <景德王>改名, 今因之; <化昌縣>, 本<知乃彌知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勝覽」.

趙炳舜. 「三國史節要」.

상주는 첨해왕 때 사벌국을 빼앗아 주로 삼은 지방이다. 법흥왕 11년 양 나라 보통 6년에 처음으로 군주를 배치하여 상주라고 하다가 진흥왕 18년에 주를 폐지하였다. 신문왕 7년 당 나라 수공 3년에 다시 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둘레가 1천 1백 9보였으며, 경덕왕 16년에 상주(尙州)로 개칭하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주에 속한 현은 셋이다. 청효현은 원래 석리화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청리현이다. 다인현은 원래 달이현[혹은 '다이'라고도 한다.]이었는데,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화창현은 원래 지내미지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醴泉郡>, 本<水酒郡>, <景德王>改名, 今<甫州>. 領縣四: <永安縣>, 本<下枝縣>, <景德王>改名, 今<풍山縣>; <安仁縣>, 本<蘭山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嘉猷縣>, 本<近[一作巾.]品{岩}??縣>, <景德王>改名, 今<山陽縣>; <殷正縣>, 本<赤牙縣>, <景德王>改名, 今<殷풍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예천군은 원래 수주군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보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영안현은 원래 하지현이었는데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풍산현이다. 안인현은 원래 난산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가유현은 원래 근[건(巾)이라고도 한다]품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산양현이다. 은정현은 원래 적아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은풍현이다.


○<古昌郡>, 本<古타耶郡>, <景德王>改名, 今<安東府>. 領縣三: <直寧縣>, 本<一直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日谿縣>, 本<熱兮縣>[或云<泥兮>.], <景德王>改名, 今未詳; <高丘縣>, 本<仇火縣>[或云<高近>.], <景德王>改名, 今合屬<義城府>.


고창군은 원래 고타야군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안동부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직녕현은 원래 일직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옛 이름을 다시 찾았다. 일계현은 원래 열혜현[혹은 이혜라고도 한다.]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고구현은 원래 구화현[혹은 '고근'이라고도 한다.]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의성부에 소속되어 있다.


○<聞韶郡>, 本<召文國>, <景德王>改名, 令{今}??<義城府>. 領縣四: <眞寶縣>, 本<柒巴火縣>, <景德王>改名, 今<甫城>; <比屋縣>, 本<阿火屋縣>[一云<幷屋>.], <景德王>改名, 今因之; <安賢縣>, 本<阿尸兮縣>[一云<阿乙兮>.], <景德王>改名, 今<安定縣>; <單密縣>, 本<武冬彌知>[一云<??冬彌知{曷冬彌知}>??.],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顯宗實錄字本』.李丙燾. 「勝覽」.

「북한본」.

문소군은 원래 소문국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의성부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진보현은 원래 칠파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보성이다. 비옥현은 원래 아화옥현[병옥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하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안현현은 원래 아시혜현[아을혜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안정현이다. 단밀현은 원래 무동미지현[갈동미지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嵩善郡>, 本<一善那{一善郡}>??, <眞平主{眞平王}>??三十六年, 爲<一善州>, 置軍主. <神文王>七年, 州廢, <景德王>改名, 今<善州>. 令縣三: <孝靈縣>, 本<芼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이同兮縣>, 今未詳; <軍威縣>, 本<奴同覓縣>[一云<如豆覓{如臣覓}>??.], <景德王>改名, 今因之.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숭선군은 원래 일선군으로서 진평왕 36년에 일선주라 하고 군주를 두었으나 신문왕 7년에 주가 폐지되었다가, 경덕왕이 일선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선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효령현은 원래 모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동혜현은 지금 분명치 않다. 군위현은 원래 노동멱현[여두멱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開寧郡>, 古<甘文小國>也. <眞興王>十八年, <梁{陳}>??<永定>元年, 置軍主, 爲<靑州>. <眞平王>時, 州廢, <文武王>元年, 置<甘文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 <禦侮縣>, 本<今勿縣>[一云<陰達>.], <景德王>改名, 今因之; <金山縣>, <景德王>改州·縣名, 及今병因之; <知禮縣>, 本<知品川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茂풍縣>, 本<茂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李丙燾. 年表.

개령군은 옛날 감문소국이었다. 진흥왕 18년, 진 나라 영정 원년에 군주를 두어 청주라 하였으나, 진평왕 때 폐지되었다가, 문무왕 원년에 감문군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개령군으로 개칭하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어모현은 원래 금물현['음달'이라고도 한다.]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금산현은 경덕왕이 주와 현의 명칭을 개칭하였는데 지금까지 모두 그대로 부른다. 지례현은 원래 지품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무풍현은 원래 무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永同郡>, 本<吉同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陽山縣>, 本<助比川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黃澗縣>, 本<召羅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영동군은 원래 길동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양산현은 원래 조비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황간현은 원래 소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管城郡>, 本<古尸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利山縣>, 本<所利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縣眞縣{安貞縣}>??, 本<阿冬號縣>, <景德王>改名, 今<安邑縣>.


李丙燾. 「麗志」. 「勝覽」.

趙炳舜. 「三國史節要」.

관성군은 원래 고시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이산현은 원래 소리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현진현은 원래 아동호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안읍현이다.


○<三年郡>, 本<三年山郡>, <景德王>改名, 今<保齡郡>. 領縣二: <淸川縣>, 本<薩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耆山縣>, 本<屈縣>, <景德王>改名, 今<靑山縣>.


삼년군은 원래 삼년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보령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청천현은 원래 살매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기산현은 원래 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청산현이다.


○<古寧郡>, 本<古寧加耶國>, <新羅>取之, 爲<古冬攬郡>[一云<古陵縣>.], <景德王>改名, 今<咸寧郡>. 領縣三: <嘉善縣>, 本<加害縣>, <景德王>改名, 今<加恩縣>; <冠山縣>, 本<冠縣>[一云<冠文縣>.], <景德王>改名, 今<聞慶縣>; <虎溪縣>, 本<虎側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고령군은 원래 고령가야국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빼앗아 고동람군[고릉현이라고도 한다]이 되었고, 경덕왕이 이를 고령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함령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가선현은 원래 가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가은현이다. 관산현은 원래 관현[관문현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문경현이다. 호계현은 원래 호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化寧郡>, 本<答達匕郡>[一云<沓達>.],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一: <道安縣>, 本<刀良縣>, <景德王>改名, 今<中牟縣>.


화령현은 원래 답달비군[답달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하나이다. 도안현은 원래 도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중모현이다.


○<良州>, <文武王>五年, <麟德>二年, 割<上州>·<下州>地, 置<삽良州>. <神文王>七年, 築城, 周一千二百六十步, <景德王>改名<良州>, 今<梁州>. 領縣一: <헌陽縣>, 本<居知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양주는 문무왕 5년 인덕 2년에 상주와 하주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를 설치한 곳으로서 신문왕 7년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60보였다. 경덕왕이 이를 양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양주이다. 이 주에 속한 현은 하나이다. 헌양현은 원래 거지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金海小京>, 古<金官國>[一云<伽落國>, 一云<伽耶>.], 自始祖<首露王>, 至十世<仇亥王{仇充王}>??, 以<梁><中大通>四年, <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 以其地爲<金官郡>. <文武王>二十年, <永隆>元年, 爲<小京>, <景德王>改名<&金海京{金海小京}>??, 今<金州>.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김해소경은 옛날 금관국['가락국' 또는 '가야'라고도 한다]이었다. 그 나라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10대왕인 구해왕이 양 나라 중대통 4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백성들을 거느리고 항복해와서 그 지역이 금관국이 되었으며, 문무왕 20년, 영륭 원년에는 소경이라고 하였다. 경덕왕이 김해경으로 개칭하였는데 지금의 금주이다.


○<義安郡>, 本<屈自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漆제縣{漆堤縣}>??, 本<漆吐縣>, <景德王>改名, 今<漆園縣>; <合浦縣>, 本<骨浦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熊神縣>, 本<熊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의안군은 원래 굴자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칠제현은 원래 칠토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칠원현이다. 합포현은 원래 골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웅신현은 원래 웅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密城郡>, 本<推火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五: <尙藥縣>, 本<西火縣>, <景德王>改名, 今<靈山縣>; <密津縣>, 本<推浦縣>[一云<竹山>.], <景德王>改名, 今未詳; <烏丘山絲{烏丘山縣}>??, 本<烏也山縣>[一云<仇道>, 一云<烏禮山>.], <景德王>改名, 今合屬<淸道郡>; <荊山縣>, 本<驚山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淸道郡>; <蘇山縣>, 本<率已山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淸道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밀성군은 원래 추화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다섯이다. 상약현은 원래 서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영산현이다. 밀진현은 원래 추포현[죽산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오구산현은 원래 오야산현[구도 또는 오례산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청도군에 병합되었다. 형산현은 원래 경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청도군에 병합되었다. 소산현은 원래 솔이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청도군에 병합되었다.


○<火王郡>, 本<比自火郡>[一云<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州, 名<下州>, 二十六年, 州廢, <景德王>改名, 今<昌寧郡>. 領縣一: <玄驍縣>, 本<推良火縣>[一云<三良火>.], <景德王>改名, 今<玄풍縣>.


화왕군은 원래 비자화군[비사벌이라고도 한다.]으로서 진흥왕 16년에 주를 설치하여 하주라고 불렀다가, 26년에 주가 폐지되었다. 경덕왕이 이를 화왕군으로 개칭하였는데 지금의 창녕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하나이다. 현효현은 원래 추량화현['삼량화'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현풍현이다.


○<壽昌郡>[壽一作嘉.], 本<위火郡>, <景德王>改名, 今<壽城郡>. 領縣四: <大丘縣>, 本<達句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八里縣>, 本<八居里縣>[一云<北치長里>, 一云<仁里>.], <景德王>改名, 今<八居縣>; <河濱縣>, 本<多斯只縣>[一云<沓只>.], <景德王>改名, 今因之: <花어縣{花園縣}>??, 本<舌火縣{古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수창군[수(壽)를 가(嘉)로 쓰기도 한다.]은 원래 위화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수성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대구현은 원래 달구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팔리현은 원래 팔거리현[북치장리 또는 인리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팔거현이다. 하빈현은 원래 다사지현[답지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화원현은 원래 설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獐山郡>, <祗味王{祗摩王}??>時, 伐取<押梁>[一作督.]小國, 置郡, <景德王>改名, 今<章山郡>. 領縣三: <解顔縣>, 本<雉省火縣>[一云<美里>.], <景德王>改名, 今因之; <餘糧縣>, 本<麻珍[一作彌.]良縣>, <景德王>改名, 今<仇史>部曲; <慈仁縣>, 本<奴斯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李丙燾.

장산군은 지마왕 때 압량[압독이라고도 한다.]이란 작은 나라를 탈취하여 군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이를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산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해안현은 원래 치성화현[미리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량현은 원래 마진량[마미량이라고도 한다.]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구사 부곡이다. 자인현은 원래 노사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臨고郡>, 本<切也火郡>, <景德王>改名, 今<永州>. 領縣五: <長鎭縣>, 今<竹長伊>部曲; <臨川縣>, <助貴王{助賁王}>??時, 伐得<骨大{骨火}>??小國, 置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永州>; <道同縣>, 本<刀冬火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永州>; <新寧縣>, 本<史丁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민白縣>, 本<買熱次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新寧縣>.


趙炳舜.趙炳舜. 『三國史節要』.

임고군은 원래 절야화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다섯이다. 장진현은 지금의 죽장이부곡이다. 임천현은 조분왕 때 골화라는 작은 나라를 빼앗아 현을 설치했던 곳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영주에 병합되었다. 도동현은 원래 도동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영주에 병합되었다. 신령현은 원래 사정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민백현은 원래 매열차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신령현에 병합되었다.


○<東萊郡>, 本<居柒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東平縣>, 本<大甑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機張縣>, 本<甲火良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동래군은 원래 거칠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동평현은 원래 대증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기장현은 원래 갑화량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東安郡>, 本<生西良郡>,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領縣一: <虞風縣>, 本<于火縣>, <景德王>改名, 今合屬<蔚州>.


동안군은 원래 생서량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이 군에 속한 현은 하나이다. 우풍현은 원래 우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울주에 병합되었다.


○<臨關郡>, 本<毛火[一作<蚊化>]郡>, <聖德王>築城, 以遮<日本>賊路,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領縣二: <東津縣>, 本<栗浦縣>, <景德王>改名, 今合屬<蔚州>; <河曲[一作西]縣>, <婆娑王>時, 取<屈阿火村>, 置縣, <景德王>改名, 今<蔚州>.


임관군은 원래 모화[문화라고도 한다.]군으로서 성덕왕이 성을 쌓아 일본의 침략로를 막았다. 경덕왕이 임관군으로 개칭하였는데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동진현은 원래 율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울주에 병합되었다. 하곡[곡(曲)을 서(西)로도 쓴다.]현은 파사왕 때 굴아화촌을 빼앗아 현을 설치한 곳인데, 경덕왕이 임관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울주이다.


○<義昌郡>, 本<退火郡>, <景德王>改名, 今<興海郡>. 領縣六: <安康縣>, 本<比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기立縣>, 本<只沓縣>, <景德王>改名, 今<長기縣>; <神光縣>, 本<東仍音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臨汀縣>, 本<斤烏支縣{斤烏友縣}>??, <景德王>改名, 今<迎日縣>; <杞溪縣>, 本<芼兮縣>[一云<化계>.], <景德王>改名, 今因之; <音汁火縣>, <婆娑王>時取<音汁伐國>, 置縣, 今合屬<安康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史』에는 '烏良友縣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되어 있다.

의창군은 원래 퇴화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흥해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여섯이다. 안강현은 원래 비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기립현은 원래 지답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기현이다. 신광현은 원래 동잉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임정현은 원래 근오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일현이다. 기계현은 원래 모혜현[화계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음집화현은 파사왕 때 음집벌국을 빼앗아 현을 만든 것인데 지금은 안강현에 병합되었다.


○<大城郡>, 本<仇刀城>境內, <率伊山城>·<茄山縣>[一云<驚山城>.]·<烏刀山城>等三城, 今合屬<淸道郡>. <約章縣>, 本<惡支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東畿停>, 本<毛只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대성군은 원래 구도성 경내의 솔이산성, 가산현[경산성이라고도 한다.], 오도산성 등의 세 성이었는데 지금은 청도군에 병합되었다. 약장현은 원래 악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동기정은 원래 모지정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商城郡>, 本<西兄山郡>,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南畿停>, 本<道品兮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中畿停>, 本<根乃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西畿停>, 本<豆良彌知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北畿停>, 本<雨谷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莫耶停>, 本<官阿良支停>[一云<北阿良>.],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상성군은 원래 서형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남기정은 원래 도품혜정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중기정은 원래 근내정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서기정은 원래 두량미지정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북기정은 원래 우곡정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막야정은 원래 관아량지정[북아량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경주에 병합되었다.


○<康州>, <神文王>五年, <唐><垂拱>元年, 分<居타州>, 置<菁州>, <景德王>改名, 分{今}??<晉州>. 領縣二: <嘉壽縣{嘉樹縣}>??, 本<加主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屈材縣{屈村縣}>??, 今未詳.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高麗史』.趙炳舜. 『三國史節要』.

강주는 신문왕 5년, 당 나라 수공 원년에 거타주를 분할하여 청주를 설치하였다가 경덕왕이 강주로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진주이다. 이 주에 속한 현은 둘이다. 가수현은 원래 가주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굴재현은 지금 분명치 않다.


○<南海郡>, <神文王>初置<轉也山郡>, 海中島也,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蘭浦縣>, 本<內浦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平山縣>, 本<平西山縣>[一云<西平>.], <景德王>改名, 今因之.


남해군은 신문왕이 처음 전야산군을 설치한 곳인데 바다에 있는 섬이다. 경덕왕이 개칭하여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난포현은 원래 내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평산현은 원래 평서산현[서평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河東郡>, 本<韓多沙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省良縣>, 今<金良>部曲; <嶽陽縣>, 本<小多沙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河邑縣>, 本<浦村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하동군은 원래 한다사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성량현은 지금의 금량 부곡이며, 악양현은 원래 소다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하읍현은 원래 포촌현으로서 경덕왕이 개칭하였으나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固城郡>, 本<古自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蚊火良縣>, 今未詳; <泗水縣>, 本<史勿縣>, <景德王>改名, 今<泗州>; <尙善縣>, 本<一善縣>, <景德王>改名, 今<永善縣>.


고성군은 원래 고자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문화량현은 지금 분명치 않다. 사수현은 원래 사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사주이다. 상선현은 원래 일선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선현이다.


○<咸安郡>, <法興王>以大兵, 滅<阿尸良國>[一云<阿郡加耶{阿那加耶/阿耶加耶}>??.], 以其地爲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玄武縣>, 本<召삼縣>, <景德王>改名, 今<召삼>部曲; <宜寧縣>, 本<獐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輿地勝覽』에는 '阿那加耶'로, 『三國遺事』에는 '阿耶加耶'로 되어 있다.

함안군은 법흥왕이 대군을 동원하여 아시량국[아나가야라고도 한다.]을 없애고, 그 지역을 군으로 만들었던 곳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현무현은 원래 소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소삼 부곡이다. 의령현은 원래 장함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巨濟郡>, <文武王>初置<裳郡>, 海中島也,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鵝洲縣>, 本<巨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溟珍縣>, 本<買珍伊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南垂縣>, 本<松邊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거제군은 문무왕이 처음으로 설치한 상군을 설치했던 곳으로써 바다에 있는 섬이었는데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아주현은 원래 거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명진현은 원래 매진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남수현은 원래 송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다시 옛 이름으로 회복되었다.


○<闕城郡>, 本<闕支郡>, <景德王>改名, 今<江城縣>. 領縣二: <丹邑縣>, 本<赤村縣>, <景德王>改名, 今<丹溪縣>; <山陰縣>, 本<知品川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궐성군은 원래 궐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강성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단읍현은 원래 적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단계현이다. 산음현은 원래 지품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天嶺郡>, 本<速含郡>, <景德王>改名, 今<咸陽郡>. 領縣二: <雲峰縣>, 本<母山縣>[或云<阿英城>, 或云<阿莫城>.], <景德王>改名, 今因之; <利安縣>, 本<馬利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천령군은 원래 속함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함양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운봉현은 원래 모산현[아영성 혹은 아막성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안현은 원래 마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居昌郡>, 本<居烈郡>[或云<居타>.],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餘善縣>, 本<南內縣>, <景德王>改名, 今<感陰縣>; <咸陰縣>, 本<(+大)??加召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趙炳舜. 『三國史節要』.

거창군은 원래 거열군[거타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여선현은 원래 남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감음현이다. 함음현은 원래 가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옛 이름으로 회복되었다.


○<高靈郡>, 本<大加耶國>, 自始祖<伊珍阿시王>[一云<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 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爲<大加耶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冶爐縣>, 本<赤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新復縣>, 本<加尸兮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고령군은 원래 대가야국으로서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내진주지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까지 16대 520년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으로만들었으며, 경덕왕이 고령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야로현은 원래 적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신복현은 원래 가시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江陽郡>, 本<大良[一作耶.]州郡>, <景德王>改名, 今<陜州>. 領縣三: <三岐縣>, 本<三支縣>[一云<麻杖>.], <景德王>改名, 今因之; <八谿縣>, 本<草八兮縣>, <景德王>改名, 今<草谿縣>; <宜桑縣>, 本<辛이縣>[一云<朱烏村>, 一云<泉州縣>.], <景德王>改名, 今<新繁縣>.


강양군은 원래 대량[야(耶)로도 쓴다.]주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합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삼기현은 원래 삼지현[마장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팔계현은 원래 초팔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초계현이다. 의상현은 원래 신이현[주오촌 또는 천주현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신번현이다.


○<星山郡>, 本<一利郡>[一云<里山郡>.], <景德王>改名, 今<加利縣>. 領縣四: <壽同縣>, 本<斯同火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谿子縣>, 本<大木縣>, <景德王>改名, 今<若木縣>; <新安縣>, 本<本彼縣>, <景德王>改名, 今<京山府>; <都山縣{都川縣}>??, 本<狄山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三國史記卷第三十四.


趙炳舜. 『三國史節要』.

성산군은 원래 일리군[이산군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가리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수동현은 원래 사동화현으로서 경덕왕이 개칭하였으나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계자현은 원래 대목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약목현이다. 신안현은 원래 본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경산부이다. 도산현은 원래 적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 권 제 34 끝




三國史記卷第三十五.



삼국사기 권 제 35


雜志第四.

地理二.

(+<新羅>二)??


허성도.

잡지 제 4.

지리 2.


○<漢州>, 本<高句麗><漢山郡>, <新羅>取之, <景德王>改爲<漢州>, 今<廣州>. 領縣二: <黃武縣>, 本<高句麗><南川縣{南買縣}>??, <新羅>幷之,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德王>改名, 今<利川縣>; <巨黍縣>, 本<高句麗><駒城縣>, <景德王>改名, 今<龍駒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한주는 원래 고구려의 한산군이었던 것을 신라가 빼앗은 것으로서 경덕왕이 한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광주이다. 이 주에 속한 현은 둘이다. 황무현은 원래 고구려의 남천현으로서 신라가 병합하였고, 진흥왕이 주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으며 경덕왕이 한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이천현이다. 거서현은 원래 고구려의 구성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용구현이다.


○<中原京>, 本<高句麗><國原城>, <新羅>平之, <眞興王>置小京, <文武王>時築城, 周二千五百九十二步, <景德王>改爲<中原京>, 今<忠州>.


중원경은 원래 고구려의 국원성으로서 신라가 이를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을 설치하였고, 문무왕 때 여기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백 92보였다.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충주이다.


○<槐壤郡>, 本<高句麗><仍斤內郡>, <景德王>改名, 今<槐州>.


괴양군은 원래 고구려의 잉근내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괴주이다.


○<소[一作沂]川郡>, 本<高句麗><述川郡>, <景德王>改名, 今<川寧郡>. 領縣二: <黃驍縣>, 本<高句麗><骨乃斤縣>, <景德王>改名, 今<黃驪縣>; <濱陽縣>, 本<高句麗><楊根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소[기(沂)로도 쓴다.]천군은 원래 고구려의 술천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천령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황효현은 원래 고구려의 골내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황려현이다. 빈양현은 원래 고구려의 양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옛 이름으로 회복되었다.


○<黑壤郡>[一云<黃壤郡>.], 本<高句麗><今勿奴郡>, <景德王>改名, 今<鎭州>. 領縣二: <都西縣>, 本<高句麗><道西縣>, <景德王>改名, 今<道安縣>; <陰城縣>, 本<高句麗><仍忽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흑양군[황양군이라고도 한다.]은 원래 고구려의 금물노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진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도서현은 원래 고구려의 도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도안현이다. 음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잉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介山郡>, 本<高句麗><皆次山郡>, <景德王>改名, 今<竹州>. 領縣一: <陰竹縣>, 本<高句麗><奴音竹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개산군은 원래 고구려의 개차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죽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하나이다. 음죽현은 원래 고구려의 노음죽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白城郡>, 本<高句麗><奈兮忽>, <景德王>改名, 今<安城郡>. 領縣二: <赤城縣>, 本<高句麗><沙伏忽>, <景德王>改名, 今<陽城縣>; <蛇山縣>, 本<&高句麗縣{高句麗蛇山縣}>??, <景德王>因之, 今<稷山縣>.


李丙燾. 「勝覽」.

백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나혜홀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의 안성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적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사복홀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양성현이다. 사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현으로서 경덕왕도 이 이름을 따랐다. 지금의 직산현이다.


○<水城郡>, 本<高句麗><買忽郡>, <景德王>改名, 今<水州>.


수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매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수주이다.


○<唐恩郡>, 本<高句麗><唐城郡>, <景德王>改名, 今復故. 領縣二: <車城縣>, 本<高句麗><上[一作車.]忽縣>, <景德王>改名, 今<龍城縣>; <振威縣>, 本<高句麗><釜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당은군은 원래 고구려의 당성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옛 이름으로 회복되었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거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상[거(車)로도 쓴다.]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용성현이다. 진위현은 원래 고구려의 부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栗津郡>, 本<高句麗><栗木郡>, <景德王>改名, 今<菓州>. 領縣三: <穀壤縣{穀陽縣}>??, 本<高句麗><仍伐奴縣>, <景德王>改名, 今<黔州>; <孔巖縣>, 本<高句麗><濟次巴衣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慶原買召>, 一作<彌鄒>.]


趙炳舜. 『三國史節要』.

율진군은 원래 고구려의 율목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과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곡양현은 원래 고구려의 잉벌노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금주이다. 공암현은 원래 고구려의 제차파의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소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인주이다[경원매소 또는 미추라고도 한다.].


○<獐口郡>, 本<高句麗><獐項口縣>, <景德王>改名, 今<安山縣>.


장구군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안산현이다.


○<長堤郡>, 本<高句麗><主夫吐郡>, <景德王>改名, 今<樹州>. 領縣四: <戍城縣>, 本<高句麗><首이忽>, <景德王>改名, 今<守安縣>; <金浦縣>, 本<高句麗><黔浦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童城縣>, 本<高句麗><童子忽>[一云<동山縣{幢山縣}??.]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分津縣>, 本<高句麗><平唯押縣{平淮押縣}>??, <景德王>改名, 今<通津縣>.


『북한본』.李丙燾. 「勝覽」.

「북한본」.

장제군은 원래 고구려의 주부토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수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수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수이홀로서 경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의 수안현이다. 김포현은 원래 고구려의 금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동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동자홀[동산현이라고도 한다]현으로서 경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분진현은 원래 고구려의 평유압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통진현이다.


○<漢陽郡>, 本<高句麗><北漢山郡>[一云<平壤>.],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德王>改名, 今<楊州>舊墟. 領縣二: <荒壤縣>, 本<高句麗><骨衣奴縣>, <景德王>改名, 今<풍壤縣>; <遇王縣>, 本<高句麗><皆伯縣>, <景德王>改名, 今<幸州>.


한양군은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평양이라고도 한다]으로서 진흥왕이 주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다. 경덕왕이 이를 한양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 양주의 옛 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황양현은 원래 고구려의 골의노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풍양현이다. 우왕현은 원래 고구려의 개백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행주이다.


○<來蘇郡>, 本<高句麗><買省縣>, <景德王>改名, 今<見州>. 領縣二: <重城縣>, 本<高句麗><七重縣>, <景德王>改名, 今<積城縣>; <波平縣>, 本<高句麗><波害平吏縣{坡害平吏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내소군은 원래 고구려의 매성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견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중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칠중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적성현이다. 파평현은 원래 고구려의 파해평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交河郡>, 本<高句麗><泉井口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峯城縣>, 本<高句麗><述이忽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高烽縣{高峰縣}>??, 本<高句麗><達乙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교하군은 원래 고구려의 천정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봉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술이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고봉현은 원래 고구려의 달을성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堅城郡>, 本<高句麗><馬忽郡>, <景德王>改名, 今<抱州>. 領縣二: <沙川縣>, 本<高句麗><內乙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洞陰縣>, 本<高句麗><梁骨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견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마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포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사천현은 원래 고구려의 내을매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동음현은 원래 고구려의 양골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鐵城郡>, 本<高句麗><鐵圓郡>, <景德王>改名, 今<東州>. 領縣二: <동梁縣>, 本<高句麗><僧梁縣>, <景德王>改名, 今<僧嶺縣>; <功成縣>, 本<高句麗><功木達縣>, <景德王>改名, 今<獐州>.


철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철원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동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동량현은 원래 고구려의 승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승령현이다. 공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공목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주이다.


○<富平郡>, 本<高句麗><夫如郡>, <景德王>改名, 今<金化縣>. 領縣一: <廣平縣>, 本<高句麗><斧壤縣>, <景德王>改名, 今<平康縣>.


부평군은 원래 고구려의 부여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금화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하나이다. 광평현은 원래 고구려의 부양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평강현이다.


○<兎山郡>, 本<高句麗><烏斯含達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安峽縣>, 本<高句麗><阿珍押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朔邑縣>, 本<高句麗><所邑豆縣>, <景德王>改名, 今<朔寧縣>; <伊川縣>, 本<高句麗><伊珍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토산군은 원래 고구려의 오사함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안협현은 원래 고구려의 아진압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삭읍현은 원래 고구려의 소읍두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삭녕현이다. 이천현은 원래 고구려의 이진매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牛峯郡>, 本<高句麗><牛岑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臨江縣>, 本<高句麗><獐項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長湍縣>, 本<高句麗><長淺城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臨端縣>, 本<高句麗><麻田淺縣>, <景德王>改名, 今<麻田縣>.


우봉군은 원래 고구려의 우잠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임강현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장단현은 원래 고구려의 장천성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임단현은 원래 고구려의 마전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마전현이다.


○<松岳郡>, 本<高句麗><扶蘇岬>, (+新羅改<松嶽郡>)?? <孝昭王{孝照王}>??三年築城, <景德王>因之. 我<太祖>開國爲王畿. 領縣二: <如비縣>, 本<高句麗><若豆恥縣>??, <景德王>改名, 今<松林縣>. 第四葉  <光宗>, 創置<佛曰寺{佛日寺}>??於其地, 移其縣於東北; <江陰縣>, 本<高句麗><屈押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李丙燾. 「高麗史, 地理志」.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李丙燾. 이를 <若只頭恥縣>이라고도 한다. 뒷 부분을 참고할 것.趙炳舜. 『三國史節要』.

송악군은 원래 고구려의 부소갑으로서 효소왕 3년에 성을 쌓았고, 경덕왕이 송악군으로 개칭하였다. 우리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자 왕도의 기내 지역이 되었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여비현은 원래 고구려의 약두치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송림현이다. 제 4대 광종이 그 곳에 불일사라는 절을 창건하고 그 현의 소재지를 동북쪽으로 옮겼다. 강음현은 원래 고구려의 굴압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開城郡>, 本<高句麗><冬比忽>, <景德王>改名, 今<開城府>. 領縣二: <德水縣>, 本<高句麗><德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第十一葉  <文宗>代, 創置<興王寺>於其地, 移其縣於南; <臨津縣>, 本<高句麗><津臨城>, <景德王>改名, 今因之.


개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동비홀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의 개성부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덕수현은 원래 고구려의 덕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제 11대 문종시대에 그 곳에 흥왕사라는 절을 세우고, 현의 소재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임진현은 원래 고구려의 진림성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海口郡>, 本<高句麗><穴口郡>, 在海中, <景德王>改名, 今<江華縣>. 領縣三: <泫陰縣{호陰縣??/江陰縣??}>, 本<高句麗><冬音奈縣>, <景德王>改名, 在<穴口島>內, 今<河陰縣>; <喬桐縣{교桐縣}>??, 本<高句麗><高木根縣>, 海島也, <景德王>改名, 今因之; <守鎭縣>, 本<高句麗><首知縣>, <景德王>改名, 今<鎭江縣>.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해구군은 원래 고구려의 혈구군으로서 바다에 있었는데 경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의 강화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강음현은 원래 고구려의 동음나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혈구도에 있었으며 지금의 하음현이다. 교동현은 원래 고구려의 고목근현으로서 바다에 있는 섬인데 경덕왕이 개칭하였고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수진현은 원래 고구려의 수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진강현이다.


??<永풍郡>, 本<高句麗><大谷郡>, <景德王>改名, 今<平州>. 領縣二: <檀溪縣>, 本<高句麗><水谷城縣{氷谷城縣}>??, <景德王>改名, 今<俠溪縣>; <鎭湍縣>, 本<高句麗><十谷城縣>, <景德王>改名, 今<谷州>.


趙炳舜. 『三國史節要』.

영풍군은 원래 고구려의 대곡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평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단계현은 원래 고구려의 수곡성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협계현이다. 진단현은 원래 고구려의 십곡성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곡주이다.


??<海고郡>, 本<高句麗><冬삼[一作音.]忽郡>, <景德王>改名, 今<鹽州>. 領縣一: <구澤縣>, 本<高句麗><刀臘縣>, <景德王>改名, 今<白州>.


해고군은 원래 고구려의 동삼[음(音)으로도 쓴다.]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염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구택현 하나이다. 구택현은 원래 고구려의 도랍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백주이다.


○<瀑池郡>, 本<高句麗><內米忽郡>, <景德王>改名, 今<海州>.


폭지군은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해주이다.


○<重盤郡>, 本<高句麗><息城郡>, <景德王>改名, 今<安州>.


중반군은 원래 고구려의 식성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안주이다.


○<栖암郡>, 本<高句麗><휴암郡>, <景德王>改名, 今<鳳州>.


서암군은 원래 고구려의 휴암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봉주이다.


○<五關郡{五開郡}>??, 本<高句麗><五谷郡>, <景德王>改名, 今<洞州>. 領縣一: <獐塞縣>, 本<高句麗>縣, <景德王>因之, 今<遂安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오관군은 원래 고구려의 오곡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동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장색현 하나이다. 장색현은 원래 고구려의 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를 따랐다. 지금의 수안군이다.


○<取城郡>, 本<高句麗><冬忽>, <憲德王>改名, 今<黃州>. 領縣三: <土山縣>, 本<高句麗><息達>, <憲德王>改名, 今因之; <唐嶽縣>, 本<高句麗><加火押>, <憲德王>置縣改名, 今<中和縣>; <松峴縣>, 本<高句麗><夫斯波衣縣>, <憲德王>改名, 今屬<中和縣>.


취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동홀로서 헌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의 황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토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식달로서 헌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당악현은 원래 고구려의 가화압으로서 헌덕왕이 현을 설치하고 개칭하였다. 지금의 중화현이다. 송현현은 원래 고구려의 부사파의현으로서 헌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은 중화현에 속한다.


○<朔州>, <賈耽>『古今郡國志』云: "<句麗>之東南, <濊{穢}>??之西, 古<貊>地. 盖今<新羅><北朔州>." <善德王>六年, <唐><貞觀>十一年, 爲<中首州{牛首州}>??, 置軍主,[一云: <文武王>十三年, <唐><咸亨>四年, 置<首若州>.] <景德王>改爲<朔州>, 今<春州>. 領縣三: <綠驍縣>, 本<高句麗><伐力川縣>, <景德王>改名, 今<洪川縣>; <潢川縣>, 本<高句麗><橫川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平縣{㈜平縣}??>, 本<高句麗><??峴縣{㈜平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은 『三國史節要』를 근거로 하여 '㈜平縣'으로 보며, 今西龍은 '砥平縣'으로 본다.趙炳舜은 『三國史節要』를 근거로 하여 '㈜平縣'으로 보며, 今西龍은 '砥平縣'으로 본다.

삭주는, 가 탐의 「고금군국지」에 "고구려의 동남쪽, 예의 서쪽, 옛날 맥의 땅으로서, 대략 지금 신라 북쪽 삭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덕왕 6년, 당 정관 11년에 우수주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고[문무왕 13년, 당 함형 4년에 수약주를 설치하였다고도 한다.], 경덕왕이 삭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춘주이다. 이 주에 속한 현은 셋이다. 녹효현은 원래 고구려의 벌력천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홍천현이다. 황천현은 원래 고구려의 횡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옛 이름으로 회복되었다. 지평현은 원래 고구려의 지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北原京>, 本<高句麗><平原郡>, <文武王>置<北原>小京, <神文王>五年築城, 周一千三十一步, <景德王>因之, 今<原州>.


북원경은 원래 고구려의 평원군으로서 문무왕이 북원소경을 설치하였고, 신문왕 5년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 31보였다. 경덕왕이 성의 이름을 그대로 지명으로 불렀다. 지금의 원주이다.


○<奈제郡>, 本<高句麗><奈吐郡>, <景德王>改名, 今<湜州{堤州}>??. 領縣二: <淸風縣>, 本<高句麗><沙熱伊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赤山縣>, 本<高句麗>縣, <景德王>因之, 今<丹山縣>.


李丙燾. 「麗志」. 「勝覽」.

「북한본」.

나제군은 원래 고구려의 나토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제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청풍현은 원래 고구려의 사열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적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를 따랐다. 지금의 단산현이다.


○<奈靈郡>, 本<&百濟{高句麗}>??<奈已郡>, <婆娑王>取之, <景德王>改名, 今<剛州>. 領縣二: <善谷縣>, 本<高句麗><買谷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玉馬縣{王馬縣}>??, 本<高句麗><古斯馬縣>, <景德王>改名, 今<奉化縣>.


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三國史節要』.

나령군은 원래 백제의 나이군으로서 파사왕이 이를 빼앗았고,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강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선곡현은 원래 고구려의 매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옥마현은 원래 고구려의 고사마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봉화현이다.


○<압山郡>, 本<高句麗><及伐山郡>, <景德王>改名, 今<興州>. 領縣一: <隣풍縣>, 本<高句麗><伊伐支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급산군은 원래 고구려의 급벌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흥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인풍현 하나이다. 인풍현은 원래 고구려의 이벌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嘉平郡{加平郡}>??, 本<高句麗><斤平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一: <浚水縣>, 本<高句麗><深川縣>, <景德王>改名, 今<朝宗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가평군은 원래 고구려의 근평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준수현 하나이다. 준수현은 원래 고구려의 심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조종현이다.


○<楊麓郡>, 本<高句麗><楊口郡>, <景德王>改名, 今<陽溝縣>. 領縣三: <희蹄縣>, 本<高句麗><猪足縣>, <景德王>改名, 今<麟蹄縣>; <馳道縣>, 本<高句麗><玉岐縣>, <景德王>改名, 今<瑞禾縣>; <三嶺縣>, 本<高句麗><三峴縣>, <景德王>改名, 今<方山縣>.


양록군은 원래 고구려의 양구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양구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희제현은 원래 고구려의 저족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인제현이다. 치도현은 원래 고구려의 옥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서화현이다. 삼령현은 원래 고구려의 삼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방산현이다.


○<狼川郡>, 本<高句麗><성川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낭천군은 원래 고구려의 성천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大楊郡>, 本<高句麗><大楊菅郡>, <景德王>改名, 今<長楊郡>. 領縣二: <藪川縣>, 本<高句麗><藪성川縣>, <景德王>改名, 今<和川縣>; <文登縣>, 本<高句麗><文峴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대양군은 원래 고구려의 대양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양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수천현은 원래 고구려의 수성천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화천현이다. 문등현은 원래 고구려의 문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益城郡>, 本<高句麗><母城郡>, <景德王>改名, 今<金城郡>.


익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모성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금성군이다.


○<岐城郡>, 本<高句麗><冬斯忽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一: <通溝縣{通口縣}>??, 本<高句麗><木入縣{水入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기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동사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통구현 하나이다. 통구현은 원래 고구려의 수입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連城郡>, 本<高句麗><各[一作客.]連城郡>, <景德王>改名, 今<交州>. 領縣三: <丹松縣>, 本<高句麗><赤本鎭{赤木鎭}>??, <景德王>改名, 今<嵐谷縣>; <질雲縣>, 本<高句麗><管述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희嶺縣>, 本<高句麗><猪守峴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趙炳舜. 『三國史節要』.

연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각[객(客)으로서도 쓴다.]련성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교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단송현은 원래 고구려의 적목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남곡현이다. 일운현은 원래 고구려의 관술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희령현은 원래 고구려의 저수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朔庭郡>, 本<高句麗><比列忽郡>, <眞興王>十七年, <梁><太平>元年, 爲<比列州>, 置軍主, <孝昭王{孝照王}>??時築城, 周一千一百八十步, <景德王>改名, 今<登州>. 領縣五: <瑞谷縣>, 本<高句麗><경谷縣{原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蘭山縣>, 本<高句麗><昔達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霜陰縣>, 本<高句麗><薩寒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菁山縣>, 本<高句麗><加支達縣>, <景德王>改名, 今<汶山縣>; <翊谿縣{翊溪縣}>??, 本<高句麗><翼谷縣{翊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삭정군은 원래 고구려의 비열홀군으로서 진흥왕 17년, 양 태평 원년에 비열주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고, 효소왕 때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80보였다. 경덕왕이 이를 삭정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등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다섯이다. 서곡현은 원래 고구려의 경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난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석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상음현은 원래 고구려의 살한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청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가지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문산현이다. 익계현은 원래 고구려의 익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井泉郡>, 本<高句麗><泉井郡>, <文武王>二十一年取之, <景德王>改名, 築<炭項>關門, 今<湧州>. 領縣三: <산山縣{蒜山縣}>??, 本<高句麗><買尸達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松山縣>, 本<高句麗><夫斯達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幽居縣>, 本<高句麗><東墟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趙炳舜. 『三國史節要』.

정천군은 원래 고구려의 천정군으로서 문무왕 21년에 이를 빼앗았으며 경덕왕이 개칭하고 탄항 관문을 쌓았다. 지금의 용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산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매시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송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부사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유거현은 원래 고구려의 동허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溟州>, 本<高句麗><河西良>[一作<何瑟羅>.], 後屬<新羅>. <賈耽>『古今郡國志』云: "今<新羅>北界<溟州>, 蓋<濊>之古國." 前史以<扶餘>爲<濊>地, 蓋誤. <善德王>時爲小京, 置仕臣, <太宗王>五年, <唐><顯慶>三年, 以<何瑟羅>地連<靺鞨>, 罷京爲州, 置軍主以鎭之, <景德王>十六年改爲<溟州>, 今因之. 領縣四: <旌善縣>, 本<高句麗><仍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속[一作棟]제縣>, 本<高句麗><束吐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支山縣>, 本<高句麗>縣, <景德王>因之, 今<連谷縣>; <洞山縣>, 本<高句麗><穴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명주는 원래 고구려의 하서량[하슬라라고도 한다.]으로서 뒷날 신라에 속하였다. 가 탐의 「고금군국지」에는 "지금 신라의 북부 경계에 있는 명주는 대부분이 예의 옛 나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전의 역사서에는 부여를 예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인 듯하다. 선덕왕 때 소경을 만들고 관리를 배치하였으나, 태종왕 5년, 당 현경 3년에 하슬라 지역이 말갈과 연결되어 있다 하여 소경을 폐지하여 주를 만들고 군주를 두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가 경덕왕 16년에 명주로 개칭하였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정선현은 원래 고구려의 잉매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속[동(棟)이라고도 한다.]제현은 원래 고구려의 속토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지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현이었다. 경덕왕이 이 이름을 따랐는데 지금의 연곡현이다. 동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혈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曲城郡>, 本<高句麗><屈火郡>, <景德王>改名, 今<臨河郡>. 領縣一: <緣[一作한{椽}??]武縣>, 本<高句麗><伊火兮縣>, <景德王>改名, 今<安德縣>.


『북한본』.

곡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굴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임하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연무현 하나이다. 연[연(椽)이라고도 한다.]무현은 원래 고구려의 이화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안덕현이다.


○<野城郡>, 本<高句麗><也尸忽郡>, <景德王>改名, 今<盈德郡>. 領縣二; <眞安縣>, 本<高句麗><助欖縣>, <景德王>改名, 今<甫城府>; <積善縣>, 本<高句麗><靑已縣>, <景德王>改名, 今<靑鳧縣>.


야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야시홀군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덕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진안현은 원래 고구려의 조람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보성부이다. 적선현은 원래 고구려의 청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청부현이다.


○<有隣郡>, 本<高句麗><于尸郡>, <景德王>改名, 今<禮州>. 領縣一: <海阿縣>, 本<高句麗><阿兮縣>, <景德王>改名, 今<淸河縣>.


유린군은 원래 고구려의 우시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예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하나이다. 해아현은 원래 고구려의 아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청하현이다.


○<蔚珍郡>, 本<高句麗><于珍也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一: <海曲[一作西.]縣>, 本<高句麗><波且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울진군은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해곡현 하나이다. 해곡[해서라고도 한다.]현은 원래 고구려의 파차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奈城郡{柰城郡}>??, 本<高句麗><奈生郡>, <景德王>改名, 今<寧越郡>. 領縣三: <子春縣>, 本<高句麗><乙阿旦縣>, <景德王>매{改}??名, 今<永春縣>; <白烏縣>, 本<高句麗><郁烏縣>, <景德王>매{改}??名, 今<平昌縣>; <酒泉縣>, 本<高句麗><酒淵縣>, <景德王>매{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북한본』.『북한본』.

나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나생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월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자춘현은 원래 고구려의 을아단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춘현이다. 백오현은 원래 고구려의 욱오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평창현이다. 주천현은 원래 고구려의 주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三陟郡>, 本<悉直國>, <婆娑王>世來降. <智證王>六年, <梁><天監>四年, 爲州, 以<異斯夫>爲軍主,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 <竹領縣>, 本<高句麗><竹峴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滿卿[一作鄕.]縣>, 本<高句麗><滿若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羽谿縣>, 本<高句麗><羽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海利縣>, 本<高句麗><波利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삼척군은 원래 실직국으로서 파사왕 때 항복하여 왔는데 지증왕 6년, 양 천감 4년에 주로 만들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는데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죽령현은 원래 고구려의 죽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만경[만향이라고도 한다.]현은 원래 고구려의 만약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우계현은 원래 고구려의 우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해리현은 원래 고구려의 파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守城郡>, 本<高句麗><수城郡>, <景德王>改名, 今<杆城縣>. 領縣二: <童山縣>, 本<高句麗><僧山縣>, <景德王>改名, 今<烈山縣>; <翼嶺縣>, 本<高句麗><翼峴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수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수성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간성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동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승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열산현이다. 익령현은 원래 고구려의 익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高城郡>, 本<高句麗><達忽>, <眞興王>二十九年, 爲州, 置軍主,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환가縣>, 本<高句麗><猪수穴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偏험縣>, 本<高句麗><平珍峴縣>, <景德王>改名, 今<雲巖縣>.


고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달홀로서 진흥왕 29년에 주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는데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환가현은 원래 고구려의 저수혈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편험현은 원래 고구려의 평진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운암현이다.


○<金壤郡>, 本<高句麗><休壤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五: <習谿縣>, 本<高句麗><習比谷縣>, <景德王>改名, 今<흡谷縣>; <제上縣>, 本<高句麗><吐上縣>, <景德王>改名, 今<碧山縣>; <臨道縣>, 本<高句麗><道臨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派川縣>, 本<高句麗><改淵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鶴浦縣>, 本<高句麗><鵠浦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三國史記卷第三十五.


금양군은 원래 고구려의 휴양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다섯이다. 습계현은 원래 고구려의 습비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흡곡현이다. 제상현은 원래 고구려의 토상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벽산현이다. 임도현은 원래 고구려의 도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파천현은 원래 고구려의 개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학포현은 원래 고구려의 곡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삼국사기 권 제 35 끝




三國史記卷第三十六.



삼국사기 권 제 36


雜志第五.

地理三.

(+<新羅>三)??


허성도.

잡지 제 5.

지리 3.


○<熊州>, 本<百濟>舊都. <唐><高宗>遺<蘇定方>平之, 置<熊津>都督府. <(+新)羅>??<文武王>取其地有之, <神文王>改爲<熊川州>, 置都督, <景德王>十六年, 改名<熊州>. 今<分州{公州}>??. 領縣二: <尼山縣>, 本<百濟><熱也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淸音縣>, 本<百濟><伐音支縣>, <景德王>改名, 今<新풍縣>.


今西龍.今西龍.今西龍.

웅주는 원래 백제의 옛 서울이었다. 당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 평정하여 웅진도독부를 두었었고, 신라 문무왕이 그 지역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며, 신문왕이 이를 웅천주로 고치고 도독을 두었으며, 경덕왕 16년에 웅주로 개칭하였는데 지금의 공주이다. 이 주에 속한 현은 둘이다. 이산현은 원래 백제의 열야산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청음현은 원래 백제의 벌음지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신풍현이다.


○<西原京>, <神文王>五年, 初置<西原>小京. <景德王>改名<西原京>, 今<淸州>.


서원경은,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서원소경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이 서원경으로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청주이다.


○<大麓郡>, 本<百濟><大木岳郡>, <景德王>改名, 今<木州>. 領縣二: <馴雉縣>, 本<百濟><甘買縣>, <景德王>改名, 今<풍歲縣>; <金池縣>, 本<百濟><仇知縣>, <景德王>改名, 今<全義縣>.


대록군은 원래 백제의 대목악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목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순치현은 원래 백제의 감매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풍세현이다. 금지현은 원래 백제의 구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전의현이다.


○<嘉林郡>, 本<百濟><加林郡>, <景德□{景德王}??>改加爲嘉, 今因之. 領縣二: <馬山縣>, 本<百濟>縣, <景德王>改州郡名, 及今병因之; <翰山縣>, 本<百濟><大山縣>, <景德王>改名, 今<鴻山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가림군은 원래 백제의 가림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가(嘉)를 가(加)로 고친 것으로서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마산현은 원래 백제의 현으로서 경덕왕이 주와 군의 명칭을 고친 것인데 지금도 모두 그대로 부른다. 한산현은 원래 백제의 대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홍산현이다.


○<西林郡>, 本<百濟><舌林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藍浦縣>, 本<百濟><寺浦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庇仁縣>, 本<百濟{高麗}>??<比衆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서림군은 원래 백제의 설림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남포현은 원래 백제의 사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비인현은 원래 백제의 비중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伊山郡>, 本<百濟><馬尸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目牛縣>, 本<百濟><牛見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今武縣>, 本<百濟><今勿縣>, <景德王>改名, 今<德풍縣>.


이산군은 원래 백제의 마시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목우현은 원래 백제의 우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금무현은 원래 백제의 금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덕풍현이다.


○<혜城郡>, 本<百濟><혜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唐津縣>, 本<百濟><伐首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餘邑縣>, 本<百濟><餘村縣>, <景德王>改名, 今<餘美縣>; <新乎縣{新平縣}>??, 本<百濟><沙平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북한본』.

혜성군은 원래 백제의 혜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당진현은 원래 백제의 벌수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읍현은 원래 백제의 여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여미현이다. 신평현은 원래 백제의 사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扶餘郡>, 本<百濟><所夫里郡>, <唐>將<蘇定方>與<庾信>平之. <文武王>十二年置摠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石山縣>, 本<百濟><珍惡山縣>, <景德王>改名, 今<石城縣>; <悅城縣>, 本<百濟><悅已縣>, <景德王>改名, 今<定山縣>.


부여군은 원래 백제의 소부리군인데 당 나라 장군 소정방이 유신과 함께 이를 평정하였고 문무왕 12년에 총관을 두었으며 경덕왕이 부여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석산현은 원래 백제의 진악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석성현이다. 열성현은 원래 백제의 열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정산현이다.


○<任城郡>, 本<百濟><任存城>, <景德王>改名, 今<大興郡>. 領縣二: <靑正縣>, 本<百濟><古良夫里縣>, <景德王>改名, 今<靑陽縣>; <孤山縣>, 本<百濟><烏山縣>, <景德王>改名, 今<禮山縣>.


임성군은 원래 백제의 임존성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대흥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청정현은 원래 백제의 고량부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청양현이다. 고산현은 원래 백제의 오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예산현이다.


○<黃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景德王>改名, 今<連山縣>. 領縣二: <鎭嶺縣>, 本<百濟><眞峴縣>[眞一作貞.], <景德王>改名, 今<鎭岑縣>; <珍同縣{珍洞縣}>??, 本<百濟>縣, <景德王>改州郡名, 及今병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황산군은 원래 백제의 황등야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연산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진령현은 원래 백제의 진현현[진(眞)을 정(貞)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진잠현이다. 진동현은 원래 백제의 현으로서 경덕왕이 주군의 명칭을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比풍郡>, 本<百濟><雨述郡>, <景德王>改名, 今<懷德郡>. 領縣二: <儒城縣>, 本<百濟><奴斯只縣{奴叱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赤鳥縣>, 本<百濟><所比浦縣>, <景德王>改名, 今<德津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비풍군은 원래 백제의 우술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회덕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유성현은 원래 백제의 노사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적조현은 원래 백제의 소비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덕진현이다.


○<潔城郡>, 本<百濟><結已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新邑縣>, 本<百濟><新村縣>, <景德王>改名, 今<保寧縣>; <新良縣>, 本<百濟><沙尸良縣>, <景德王>改名, 今<黎陽縣>.


결성군은 원래 백제의 결이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신읍현은 원래 백제의 신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보령현이다. 신량현은 원래 백제의 사시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여양현이다.


○<燕山郡>, 本<百濟><一牟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燕岐縣>, 本<百濟><豆仍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昧谷縣>, 本<百濟><未谷縣>, <景德王>改名, 今<懷仁縣>.


연산군은 원래 백제의 일모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연기현은 원래 백제의 두잉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매곡현은 원래 백제의 미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회인현이다.


○<富城郡>, 本<百濟><基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蘇泰縣>, 本<百濟><省大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地育縣>, 本<百濟><知六縣>, <景德王>改名, 今<北谷縣>.


부성군은 원래 백제의 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소태현은 원래 백제의 성대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지육현은 원래 백제의 지륙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북곡현이다.


○<湯井郡>, 本<百濟>郡, <文武王>十一年, <唐><咸亨>二年, 爲州치{置}??摠管. <咸亨>十二年, 廢州爲郡, <景德王>因之, 今<溫水郡>. 領縣二: <陰峯[一云陰岑]縣>, 本<百濟><牙述縣>, <景德王>改名, 今<牙州>; <祁梁縣{祈梁縣}>??, 本<百濟><屈直縣>, <景德王>改名, 今<新昌縣>.


趙炳舜.趙炳舜. 『三國史節要』.

탕정군은 원래 백제의 군이었는데 문무왕 11년, 당 함형 2년에 주를 만들어 총관을 두었다가 함형 12년에 주를 폐지하여 군으로 만들었으며, 경덕왕이 그 명칭대로 두었다. 지금의 온수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음봉[음잠이라고도 한다.]현은 원래 백제의 아술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아주이다. 기량현은 원래 백제의 굴직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신창현이다.


○<全州>, 本<百濟><完山>, <眞興王>十六年, 爲州, 二十六年, 州廢. <神文王>五年, 復置<完山州>. <景德王>十六年改名, 今因之. 領縣三: <杜城縣>, 本<百濟><豆伊縣>, <景德王>改名, 今<伊城縣>; <金溝縣>, 本<百濟><仇知只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高山縣>, 本<百濟>縣, <景德王>改州郡名, 及今因之.


전주는 원래 백제의 완산인데 진흥왕 16년에 주로 만들었고 26년에 주가 폐지되었다가 신문왕 5년에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였으며 경덕왕 16년에 전주로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주에 속한 현은 셋이다. 두성현은 원래 백제의 두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이성현이다. 금구현은 원래 백제의 구지지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고산현은 원래 백제의 현으로서 경덕왕이 주군의 명칭을 고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南原>小京, 本<百濟><古龍郡>, <新羅>幷之. <神文王>五年, 初置小京, <景德王>十六年, 置<南原>小京, 今<南原府>.


남원소경은 원래 백제의 고룡군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병합하였다.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소경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16년에 남원소경을 설치하였다. 지금의 남원부이다.


○<大山郡>, 本<百濟><大尸山郡>, <景德王>改名, 今<泰山郡>. 領縣三: <井邑縣>, 本<百濟><井村>, <景德王>改名, 今因之; <斌城縣>, 本<百濟><賓屈縣>, <景德王>改名, 今<仁義縣>; <野西縣>, 本<百濟><也西伊縣>, <景德王>改名, 今<臣野縣{巨野縣}>??.


趙炳舜. 『輿地勝覽』.

대산군은 원래 백제의 대시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태산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정읍현은 원래 백제의 정촌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빈성현은 원래 백제의 빈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인의현이다. 야서현은 원래 백제의 야서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거야현이다.


○<古阜郡>, 本<百濟><古묘夫里郡{古沙夫里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扶寧縣>, 本<百濟><皆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喜安縣>, 本<百濟><欣良買縣>, <景德王>改名, 今<保安縣>; <尙質縣>, 本<百濟><上柒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고부군은 원래 백제의 고묘부리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부령현은 원래 백제의 개화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희안현은 원래 백제의 흔량매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보안현이다. 상질현은 원래 백제의 상칠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進禮郡>, 本<百濟><進仍乙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伊城縣>, 本<百濟><豆尸伊縣>, <景德王>改名, 今<富利縣>; <淸渠縣>, 本<百濟><勿居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丹川縣>, 本<百濟><赤川縣>, <景德王>改名, 今<朱溪縣>.


진례군은 원래 백제의 진잉을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이성현은 원래 백제의 두시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부리현이다. 청거현은 원래 백제의 물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단천현은 원래 백제의 적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주계현이다.


○<德殷郡>, 本<百濟><德近郡>. <景德王>改名, 今<德恩郡>. 領縣三: <市津縣>, 本<百濟><加知奈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礪良縣{礪陽縣}>??, 本<百濟><只良肖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雲梯縣>, 本<百濟><只伐只縣{只失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덕은군은 원래 백제의 덕근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덕은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시진현은 원래 백제의 가지나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량현은 원래 백제의 지량초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운제현은 원래 백제의 지벌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臨陂郡>, 本<百濟><屎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咸悅縣>, 本<百濟><甘勿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沃溝縣>, 本<百濟><馬西良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澮尾縣>, 本<百濟><夫夫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임피군은 원래 백제의 시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함열현은 원래 백제의 감물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옥구현은 원래 백제의 마서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회미현은 원래 백제의 부부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金堤郡>, 本<百濟><碧骨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 <萬項縣{萬頃縣}>??, 本<百濟><豆乃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平고縣>, 本<百濟><首冬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利城縣>, 本<百濟><乃利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武邑縣>, 本<百濟><武斤村縣>, <景德王>改名, 今<富潤縣>.


『북한본』.

김제군은 원래 백제의 벽골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만경현은 원래 백제의 두내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평고현은 원래 백제의 수동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성현은 원래 백제의 내리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무읍현은 원래 백제의 무근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부윤현이다.


○<淳化郡[淳一作渟.]>, 本<百濟><道實郡>, <景德王>改名, 今<淳昌縣>. 領縣二: <적城縣>, 本<百濟><礫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九皐縣>, 本<百濟><??坪縣{돌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북한본』.

순화군[순(淳)을 정(渟)으로도 쓴다.]은 원래 백제의 도실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순창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적성현은 원래 백제의 역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구고현은 원래 백제의 돌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金馬郡>, 本<百濟><金馬渚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沃野縣>, 本<百濟><所力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野山縣>, 本<百濟><閼也山縣>, <景德王>改名, 今<朗山縣>; <紆洲縣{汚州縣}>??, 本<百濟><于召渚縣>, <景德王>改名, 今<紆州>.


趙炳舜. 『三國史節要』.

금마군은 원래 백제의 금마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옥야현은 원래 백제의 소력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야산현은 원래 백제의 알야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낭산현이다. 우주현은 원래 백제의 우소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우주이다.


○<壁谿郡>, 本<百濟><伯伊[一作海]郡>, <景德王>改名, 今<長溪縣>. 領縣二: <鎭安縣>, 本<百濟><難珍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高澤縣>, 本<百濟><雨坪縣>, <景德王>改名, 今<長氷縣{長水縣}>??.


『북한본』.

벽계군은 원래 백제의 백이[해(海)라고도 한다.]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계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진안현은 원래 백제의 난진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고택현은 원래 백제의 우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수현이다.


○<任實郡>, 本<百濟>郡, <景德王>改州郡名, 及今병因之. 領縣二: <馬靈縣>, 本<百濟><馬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靑雄縣>, 本<百濟><居斯勿縣>, <景德王>改名, 今<巨寧縣>.


임실군은 원래 백제의 군으로서 경덕왕이 주와 군의 명칭을 고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마령현은 원래 백제의 마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청웅현은 원래 백제의 거사물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거령현이다.


○<武州>, 本<百濟>地, <神文王>六年, 爲<武珍州>. <景德王>改爲<武州>, 今<光州>. 領縣三: <玄雄縣>, 本<百濟><未冬夫里縣>, <景德王>改名, 今<南平郡>; <龍山縣>, 本<百濟><伏龍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祁陽縣{祈陽縣}>??, 本<百濟><屈支縣>, <景德王>改名, 今<昌平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무주는 원래 백제의 땅인데 신문왕 6년에 무진주로 만들었고 경덕왕이 무주로 개칭한 것으로서 지금의 광주이다. 이 주에 속한 현은 셋이다. 현웅현은 원래 백제의 미동부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남평군이다. 용산현은 원래 백제의 복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옛 명칭으로 회복되었다. 기양현은 원래 백제의 굴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창평현이다.


○<分嶺郡>, 本<百濟><分嵯郡{分沙郡}>??, <景德王>改名, 今<樂安郡>. 領縣四: <忠烈縣>, 本<百濟><助助禮縣>, <景德王>改名, 今<南陽縣>; <兆陽縣>, 本<百濟><冬老賢>, <景德王>改名, 今因之; <薑原縣>, 本<百濟><豆힐縣>, <景德王>改名, 今<荳原縣>; <栢舟縣>, 本<百濟><比史縣>, <景德王>改名, 今<泰江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분령현은 원래 백제의 분차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낙안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충렬현은 원래 백제의 조조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남양현이다. 조양현은 원래 백제의 동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강원현은 원래 백제의 두힐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두원현이다. 백주현은 원래 백제의 비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태강현이다.


○<寶城郡>, 本<百濟><伏忽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 <代勞縣>, 本<百濟><馬斯良縣>, <景德王>改名, 今<會寧縣>; <季水縣>, 本<百濟><季川縣>, <景德王>改名, 今<長澤縣>; <烏兒縣>, 本<百濟><烏次縣>, <景德王>改名, 今<定安縣>; <馬邑縣>, 本<百濟><古馬며知縣{古馬며知縣}>??, <景德王>改名, 今<遂寧縣>.


『북한본』.

보성군은 원래 백제의 복홀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대로현은 원래 백제의 마사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회령현이다. 계수현은 원래 백제의 계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택현이다. 오아현은 원래 백제의 오차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정안현이다. 마읍현은 원래 백제의 고마며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수령현이다.


○<秋成郡>, 本<百濟><秋子兮郡>, <景德王>改名, 今<潭陽郡>. 領縣二: <王菓縣{玉菓縣}>??, 本<百濟><菓支縣{果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栗原縣>, 本<百濟><栗支縣>, <景德王>改名, 今<原栗縣>.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추성군은 원래 백제의 추자혜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담양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옥과현은 원래 백제의 과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율원현은 원래 백제의 율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원률현이다.


○<靈巖郡>, 本<百濟><月奈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영암군은 원래 백제의 월나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潘南郡>, 本<百濟><半奈夫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野老縣>, 本<百濟><阿老谷縣>, <景德王>改名, 今<安老縣>; <昆湄縣>, 本<百濟><古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반남군은 원래 백제의 반나부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야로현은 원래 백제의 아로곡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안로현이다. 곤미현은 원래 백제의 고미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岬城郡>, 本<百濟><古尸伊縣>, <景德王>改名, 今<長城郡>. 領縣二: <珍原縣>, 本<百濟><丘斯珍芳縣{丘斯珍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森溪縣>, 本<百濟><所非芳縣{所非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북한본』.『북한본』.

갑성군은 원래 백제의 고시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성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진원현은 원래 백제의 구사진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삼계현은 원래 백제의 소비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武靈郡>, 本<百濟><武尸伊郡>, <景德王>改名, 今<靈光郡>. 領縣三: <長沙縣>, 本<百濟><上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高敞縣>, 本<百濟><毛良夫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茂松縣>, 本<百濟><松彌知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무령군은 원래 백제의 무시이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광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장사현은 원래 백제의 상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고창현은 원래 백제의 모량부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무송현은 원래 백제의 송미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昇平郡{昇州郡}>??, 本<百濟><감乎郡{沙平郡??/武平郡??}, <景德王>改名, 今因之[一云<昇州>.]. 領縣三: <海邑縣>, 本<百濟><猿村縣>, <景德王>改名, 今<麗水縣>; <晞陽縣>, 本<百濟><馬老縣>, <景德王>改名, 今<光陽縣>; <廬山縣>, 本<百濟><突山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史』.

승평군은 원래 백제의 감평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승주라고도 한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해읍현은 원래 백제의 원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여수현이다. 희양현은 원래 백제의 마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광양현이다. 여산현은 원래 백제의 돌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옛 명칭으로 회복되었다.


○<谷城郡>, 本<百濟><欲乃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富有縣>, 本<百濟><遁支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求禮縣>, 本<百濟><仇次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同福縣>, 本<百濟><豆夫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곡성군은 원래 백제의 욕내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부유현은 원래 백제의 둔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구례현은 원래 백제의 구차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동복현은 원래 백제의 두부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陵城郡>, 本<百濟><이陵夫里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富里縣>, 本<百濟><波夫里郡>, <景德王>改名, 今<福城縣>; <汝湄縣>, 本<百濟><仍利阿縣>, <景德王>改名, 今<和順縣>.


능성군은 원래 백제의 이릉부리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부리현은 원래 백제의 파부리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복성현이다. 여미현은 원래 백제의 잉리아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화순현이다.


○<錦山郡>, 本<百濟><發羅郡{廢羅州}>??, <景德王>改名, 今<羅州牧>. 領縣三: <會津縣>, 本<百濟><豆힐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鐵冶縣>, 本<百濟><實於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艅황縣>, 本<百濟><水川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금산군은 원래 백제의 발라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나주목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회진현은 원래 백제의 두힐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철야현은 원래 백제의 실어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황현은 원래 백제의 수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陽武郡>, 本<百濟><道武郡>, <景德王>改名, 今<道康郡>. 領縣四: <固[一作同.]安縣>, 本<百濟><古西伊縣>, <景德王>改名, 今<竹山縣>; <耽津縣>, 本<百濟><冬音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浸溟縣>, 本<百濟><塞琴縣>, <景德王>改名, 今<海南縣>; <黃原縣>, 本<百濟><黃述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양무군은 원래 백제의 도무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도강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고[동(同)으로도 쓴다.]안현은 원래 백제의 고서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죽산현이다. 탐진현은 원래 백제의 동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침명현은 원래 백제의 새금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해남현이다. 황원현은 원래 백제의 황술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務安郡>, 本<百濟><勿阿兮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 <咸풍縣>, 本<百濟><屈乃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多岐縣>, 本<百濟><多只縣>, <景德王>改名, 今<牟平縣>; <海際縣>, 本<百濟><道際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珍島縣>, 本<百濟><因珍鳥郡{因珍島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무안군은 원래 백제의 물아혜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함풍현은 원래 백제의 굴내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다기현은 원래 백제의 다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모평현이다. 해제현은 원래 백제의 도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진도현은 원래 백제의 인진도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牢山郡>, 本<百濟><徒山縣>, <景德王>改名, 今<嘉興縣>. 領縣一: <瞻耽縣>, 本<百濟><買仇里縣>, <景德王>改名, 今<臨淮縣>.


노산군은 원래 백제의 도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가흥현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첨탐현 하나이다. 첨탐현은 원래 백제의 매구리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임회현이다.


○<壓海郡>, 本<百濟><阿次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碣島縣>, 本<百濟><阿老縣>, <景德王>改名, 今<六昌縣>; <鹽海縣>, 本<百濟><古祿只縣>, <景德王>改名, 今<臨淄縣>; <安波縣>, 本<百濟><居知山縣>[居一作屈.], <景德王>改名, 今<長山縣>.

三國史記卷第三十六.


압해군은 원래 백제의 아차산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갈도현은 원래 백제의 아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육창현이다. 염해현은 원래 백제의 고록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임치현이다. 안파현은 원래 백제의 거지산현[거(居)를 굴(屈)로도 쓴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산현이다.

삼국사기 권 제 36 끝




三國史記卷第三十七.



삼국사기 권 제 37


雜志第六.

地理四.

<高句麗>·<百濟>.


잡지 제 6.

지리 4.

고구려, 백제.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漢書志』云: "<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토郡>, 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 <高句麗>是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本>者, 蓋<漢><玄토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 『漢志』所謂<玄토>屬縣, <高句麗>是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계>, 故知其然也. 自<朱蒙>立都<紇升骨城>, 歷四十年, <孺留王>二十二年, 移都<國內城>.[或云<尉耶巖城{尉那巖城}>??, 或云<不而城>.]


趙炳舜. 『三國史節要』.

「통전」에는 "주몽이 한 나라 건소 2년에 북부여로부터 동남방으로 나와서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성씨를 '고'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듯하다. 「한서지」에는 "요동군은 낙양과의 거리가 3천 6백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서 무려현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에 이른바 북진의 의무려산이며, 대요 때는 그 아랫 쪽에 의주를 설치하였다. 현토군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아마도 한 나라 현토군의 경내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한서지」에 이른바 현토군의 속현으로서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대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요제가 연경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신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계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 22년에 도읍을 국내성[혹은 위나암성이라 하고 혹은 불이성이라고도 한다.]으로 옮겼다.


○按『漢書』: "<樂浪郡>屬縣, 有<不而>," 又<총章>二年, 英國公<李勣>奉勅, 以<高句麗>諸城, 置都督府及州縣. 『目錄』云: "<鴨綠>以北已降城十一, 其一<國內城>, 從<平壤>至此十七驛." 則此城亦在北朝境內, 但不知其何所耳. 都<國內>, 歷四百二十五年, <長壽王>十五年, 移都<平壤>. 歷一百五十六年, <平原王>二十八年, 移都<長安城>. 歷八十三年, <寶藏王>二十七年而滅.[古人記錄, 自始祖<朱蒙>, 王{至}??<寶藏王>, 歷年丁寧纖悉若此, 而或云: "<故國原王>十三年,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不可知其然否.]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 何以知之? 『唐書』云: "<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료爲부, 南涯<浿水>." 又『志』云: "<登州>東北海行, 南傍海연過<浿江>口<椒島>, 得<新羅>西北." 又<隋><煬帝>東征詔曰: "<滄海>道軍, 舟로千里, 高帆電逝, 巨艦雲飛, 橫絶<浿江>, 遙造<平壤>." 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 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唐書』云: "<平壤城>亦謂<長安>." 而古記云: "自<平壤>移<長安>." 則二城同異遠近, 則不可知矣. <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 <渤海>人<武藝>曰: "昔<高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則可謂地勝而兵强. 至于季末, 君臣昏虐失道, 大<唐>再出師, <新羅>援肋{助}??, 討平之. 其地多入<渤海>·<靺鞨>, <新羅>亦得其南境, 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 以備九州焉.


李丙燾.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한서」에는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불이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총장 2년에 영국공 이적이 칙명에 의하여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하였다. 「목록」에는 "압록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평양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성도 역시 북조(北朝) 경내에 있었으나 다만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고구려는) 국내성에 도읍한지 425년이 지난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평양에서 156년이 지난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이 지난 보장왕 27년에 멸망하였다.[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가 이와 같이 분명하고 상세하다. 그러나 혹자는 "고국원왕 33년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겼는데, 그 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었다"고 말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를 알 수 없다.]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인듯하고, 패수는 바로 대동강이다.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에는 "평양성은 한 나라의 낙랑군으로서 산굽이를 따라 성을 둘러 쌓았고 남으로 패수가 놓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한지」에는 "등주에서 동북쪽 바다길로 나서서 남쪽으로 해변을 끼고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수 양제의 동방 정벌 조서에는 "창해 방면 군사는 선박이 천 리에 뻗쳤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달리고 커다란 전함들은 구름같이 날아서 패강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에 다달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렇게 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인 것이 명백하며, 서경이 평양이라는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당서」에는 "평양성도 장안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기에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으니, 두 성이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점점 동방의 패수 옆으로 이동하였다. 발해 사람 무예는 "옛날 고구려의 전성 시대에는 군사 30만으로 당과 대적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고구려의 지세가 유리하고 군사가 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 이르러 임금과 신하가 우매하고 포학하여 각자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자, 당이 다시 군사를 출동시키고, 신라가 이를 도와 그들을 쳐서 평정했던 것이다.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와 말갈로 편입되고, 신라에서도 그 남쪽 지방을 차지하여, 한주, 삭주, 명주의 3주와 군현을 두어 아홉 주를 설치하였다.


○<漢山州>. <國原城>[一云<未乙省>. 一云<託長城{완長城}>??.]. <南川縣>[一云<南買>.]. <駒城>[一云<滅烏>.]. <仍斤內郡>. <述川郡>[一云<省知買>.]. <骨乃斤縣>. <楊根縣>[一云<去斯斬{未斯斬}>??.]. <今勿內郡>[一云<萬弩>.]. <道西縣>[一云<都盆{都蓋}>??.]. <仍忽>. <皆次山郡>. <奴音竹縣>. <奈兮忽>. <글伏忽{沙伏忽}>??. <蛇山縣>. <買忽>[一云<水城>.]. <唐城郡>. <上忽>[一云<車忽>.]. <釜山縣>[一云<松村活達{松材活達}>??.]. <栗木郡>[一云<冬斯혜{힐冬斯}>??.]. <仍伐奴縣>. <齊次巴衣縣>. <買召忽縣>[一云<彌鄒忽>.]. <獐項口縣>[一云<古斯也忽次{古斯也衣次}>??.]. <主夫吐郡>. <首이忽>. <黔浦縣>. <童子忽縣>[一云<仇斯波衣>.]. <平淮押縣>[一云<別史波衣>, 淮一作唯.]. <北漢山郡>[一云<平壤>.]. <骨衣內縣>. <王逢縣>[一云<皆伯>. <漢>氏美女迎<安臧王>之地, 故名<王逢>.]. <買省郡{買省縣}>??[一云<馬忽>.]. <七重縣>[一云<難隱別>.]. <波害乎史縣>[一云<액□{액蓬}>??.]. <泉井口縣>[一云<於乙買串>.]. <述이忽縣>[一云<首泥忽>.]. <達乙省縣>[<漢>氏美女, 於高山頭點烽火, 迎<安臧王>之處, 故後名<高烽>.]. <臂城郡>[一云<馬忽>.]. <內(-乙)買>??[一云<內이米>.]. <鐵圓郡>[一云<毛乙冬非>.]. <梁骨縣>. <僧梁縣>[一云<非勿>.]. <功木達>[一云<熊閃山>.]. <夫如郡>. <於斯內縣>[一云<斧壤>.]. <烏斯含達{鳥斯含達}>??. <阿珍押縣>[一云<窮嶽>.]. <所邑豆縣>. <伊珍買縣>. <牛岑郡>[一云<牛嶺>, 一云<首知衣>.]. <獐項縣>[一云<古斯也忽次>.]. <長淺城縣{郡}??>[一云<耶耶>, 一云<夜牙>.]. <麻田淺縣>[一云<泥沙波忽>.]. <扶蘇岬>. <若只頭치縣{若只頭恥縣}>??[一云<朔頭>, 一云<衣頭{夜頭}>??.]. <屈於押{屈於岬}>??[一云<紅西{西江}>??.]. <冬比忽>. <德勿縣>. <津臨城縣>[一云<烏阿忽>.]. <穴口郡>[一云<甲比古次>.]. <冬音奈縣>[一云<休陰>.]. <高木根縣>[一云<達乙斬>.]. <首知縣>[一云<新知>.]. <大谷郡>[一云<多知忽>.]. <水谷城縣>[一云<買旦忽>.]. <十谷縣>[一云<德頓忽>.]. <冬音忽>[一云<시鹽城>.]. <刀臘縣>[一云<雉嶽城>.]. <五谷郡>[一云<弓次云忽>.]. <內米忽>[一云<池城>, 一云<長池{長城}??>.]. <漢城郡>[一云<漢忽>, 一云<息城>, 一云<乃忽>.]. <휴류城>[一云<租波衣>, 一云<휴巖郡>.]. <獐塞縣>[一云<古所於>.]. <冬忽>[一云<于冬於忽>.]. <今達>[一云<薪達>, 一云<息達>.]. <仇乙峴>[一云<屈遷>.], 今<풍州>. <闕口>, 今<儒州>. <栗口>[一云<栗川>.], 今<殷栗縣>. <長淵>, 今因之. <麻耕伊>, 今<靑松縣>. <楊岳>, 今<安嶽郡>. <板麻串>, 今<嘉禾縣>. <熊閑伊>, 今<水寧縣>. <甕遷>, 今<甕津縣>. <付珍伊>, 今<永康縣>. <鵠島>, 今<白嶺鎭{白翎鎭}??>. <升山>, 今<信州>. <加火押>. <夫斯波衣縣>[一云<仇史峴>.]. <牛首州>[首一作頭. 一云<首次若>, 一云<烏根乃>.]. <伐力川縣{伐力州縣}??>. <橫川縣>[一云<於斯買>.]. <과峴縣{砥峴縣/㈜峴縣}>??. <平原郡>[<北原>]. <奈吐郡>[一云<大提{大堤}>??.]. <沙熱伊縣>. <赤山縣>. <斤平郡>[一云<병平>.]. <深川縣>[一云<伏斯買>.]. <楊口郡>[一云<要隱忽次>.]. <猪足縣>[一云<烏斯逈>.]. <壬岐縣{王岐縣??/玉岐縣??}>[一云<皆次丁>.]. <三峴縣>[一云<密波兮>.]. <성川郡>[一云<也尸買>.]. <大楊管郡>[一云<馬斤押>.]. <買谷縣>. <古斯馬縣>. <及伐山郡>. <伊伐支縣>[一云<自伐支>.]. <藪성川縣>[一云<藪川>.]. <文峴縣>[一云<斤尸波兮>.]. <母城郡>[一云<也次忽>.]. <冬斯忽>. <水入縣>[一云<買伊縣>.]. <客連郡>[客一作各. 一云<加兮牙>.]. <赤木縣>[一云<沙非斤乙>.]. <管述縣>. <猪란峴縣>[一云<烏生波衣

>, 一云<猪守>.]. <淺城郡>[一云<比烈忽>.]. <경谷縣>[一云<首乙呑>.]. <菁達縣>[一云<昔達>.]. <薩寒縣>. <加支達縣>. <於支呑>[一云<翼谷>.]. <買尸達>. <泉井郡>[一云<於乙買>.]. <夫斯達縣>. <東墟縣>[一云<加知斤>.]. <奈生郡>. <乙阿且縣>. <于烏縣>[一云<郁烏>.]. <酒淵縣>. <何瑟羅州>[一云<河西良>, 一云<河西>.]. <乃買縣>. <東吐縣>. <支山縣>. <穴山縣>. <수城郡>[一云<加阿忽>.]. <僧山縣>[一云<所勿達>.]. <翼峴縣>[一云<伊文縣>.]. <達忽>. <猪수穴縣>[一云<烏斯押{鳥斯押}>??.]. <平珍峴縣>[一云<平珍波衣>.]. <道臨縣>[一云<助乙浦>.]. <休壤郡>[一云<金惱>.]. <習比谷>[一作呑.]. <吐上縣>. <岐淵縣>. <鵠浦縣>[一云<古衣浦>.]. <竹峴縣>[一云<奈生於>.]. <滿若縣>[一云<沔兮>.]. <波利縣>. <于珍也郡>. <波且縣>[一云<波풍>.]. <也尸忽郡>. <助攬郡>[一云<才攬>.]. <靑已縣>. <屈火縣{屈大縣}??>. <伊火兮縣>. <于尸郡{于市郡}>??. <阿兮縣>. <悉直郡>[一云<史直>.]. <羽谷縣>.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에서는 '砥峴縣'으로, 趙炳舜은 『三國史節要』에 근거하여 '㈜峴縣'으로 교감하였다.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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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원성[미을성 또는 탁장성이라고도 한다.] 남천현[남매라고도 한다.]

구성[멸오라고도 한다.]    잉근내군

술천군[성지매라고도 한다.]   골내근현

양근현[거사참이라고도 한다.]   금물내군[만노라고도 한다.]

도서현[도분이라고도 한다.]   잉홀

개차산군     노음죽현

나혜홀      며복홀

사산현      매홀[수성이라고도 한다.]

당성군      상홀[차홀이라고도 한다.]

부산현[송촌활달이라고도 한다]   율목군[동사힐이라고도 한다.]

잉벌노현     제차파의현

매소홀현[미추홀이라고도 한다.]   장항구현[고사야홀차라고도 한다.]

주부토군     수이홀

금포현      동자홀현[구사파의라고도 한다.]

평회압현[펼사파의라고도 하며 회(淮)를 유(唯)로도 쓴다.]

북한산군[평양이라고도 한다.]   골의내현

왕봉현[개백이라고도 한다.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하여 왕봉으로 불렀다.]

매성군[마홀이라고도 한다.]   칠중현[난은별이라고도 한다.]

파해호사현[액봉이라고도 한다.]  천정구현[어을매곶이라고도 한다.]

술이홀현[수니홀이라고도 한다.]

달을성현[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 하여 후           일에 고봉이라고 불렀다.]

비성군[마홀이라고도 한다.]   내을매[내이미라고도 한다.]

철원군[모을동비라고도 한다.]   양골현

승량현[비물이라고도 한다.]   공목달[웅섬산이라고도 한다.]

부여군      어사내현[부양이라고도 한다.]

오사함달     아진압현[궁악이라고도 한다.]

소읍두현     이진매현

우잠군[우령 또는 수지의라고도 한다.]   장항현[고사야홀차라고도 한다]

장천성현[야야 또는 야아라고도 한다.]  마전천현[이사파홀이라고도 한다.]

부소압

약지두치현[삭두 또는 의두라고도 한다.]  굴어갑[홍서라고도 한다.]

동비홀      덕물현

진림성현[오아홀이라고도 한다.]   혈구군[갑비고차라고도 한다.]

동음나현[휴음이라고도 한다.]   고목근현[달을참이라고도 한다.]

수지현[신지라고도 한다.]   대곡군[다지홀이라고도 한다.]

수곡성현[매단홀이라고도 한다.]   십곡현[덕돈홀이라고도 한다.]

동음홀[시염성이라고도 한다.]   도랍현[치악성이라고도 한다.]

오곡군[궁차운홀이라고도 한다.]

내미홀[지성 또는 장지라고도 한다.]

한성군[한홀 또는 식성 또는 내홀이라고도 한다.]

휴류성[조파의 또는 휴암군이라고도 한다.] 장새현[고소어라고도 한다.]

동홀[우동어홀이라고도 한다.]

금달[신달 또는 식달이라고도 한다.]

구을현[굴천이라고도 한다.]은 지금의 풍주이다.

궐구는 지금의 유주이다.

율구[율천이라고도 한다.]는 지금의 은률현이다. 장연은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마경이는 지금의 청송현이다.   양악은 지금의 안악군이다.

판마곶은 지금의 가화현이다.   웅한이는 지금의 수녕현이다.

옹천은 지금의 옹진현이다.   부진이는 지금의 영강현이다.

곡도는 지금의 백령진이다.   승산은 지금의 신주이다.

가화압      부사파의현[구사현이라고도 한다.]

우수주[수(首)를 두(頭)로 쓰기도 하며 수차약 또는 오근내라고도 한다.]

벌력천현     횡천현[어사매라고도 한다.]

지현현      평원군[북원.]

나토군[대제라고도 한다.]   사열이현

적산현      근평현[병평이라고도 한다.]

심천현[복사매라고도 한다.]   양구군[요은홀차라고도 한다.]

저족현[오사형이라고도 한다.]   옥기현[개차정이라고도 한다.]

삼현현[밀파혜라고도 한다.]   성천군[야시매라고도 한다.]

대양관군[마근압이라고도 한다.]   매곡현

고사마현     급벌산군

이벌지현[자벌지라고도 한다.]   수성천현[수천이라고도 한다.]

문현현[근시파혜라고도 한다.]   모성군[야차홀이라고도 한다.]

동사홀      수입현[매이현이라고도 한다.]

객련군[객(客)을 각(各)으로도 쓰며 가혜아라고도 한다.]

적목현[사비근을이라고도 한다.]   관술현

저란현현[오생파의 또는 저수라고도 한다.] 천성군[비열홀이라고도 한다.]

경곡현[수을탄이라고도 한다.]   청달현[석달이라고도 한다.]

살한현      가지달현

어지탄[익곡이라고도 한다.]   매시달

천정군[어을매라고도 한다.]   부사달현

동허현[가지근이라고도 한다.]   나생군

을아차현     우오현[욱오라고도 한다.]

주연현

하슬라주[하서량 또는 하서라고도 한다.]

내매현      동토현

지산현      혈산현

수성현[가아홀이라고도 한다.]   승산현[소물달이라고도 한다.]

익현현[이문현이라고도 한다.]   달홀

저수혈현[오사합이라고도 한다.]   평진현현[평진파의라고도 한다.]

도림현[조을포라고도 한다.]   휴양군[금뇌라고도 한다.]

습비곡[탄이라고도 한다.]   토상현

기연현      곡포현[고의포라고도 한다.]

죽현현[나생어라고도 한다.]   만약현[면혜라고도 한다.]

파리현      우진야군

파차현[파풍이라고도 한다.]   야시홀군

조람군[재람이라고도 한다.]   청이현

굴화현      이화혜현

우시군      아혜현

실직군[사직이라고도 한다.]   우곡현


○右<高句麗>州郡縣, 共一百六十四, 其<新羅>改名及今名, 見『新羅志』.

<百濟>.


이상은 고구려의 주, 군, 현인데 모두 164개소이다. 신라에서 개칭한 것과 지금의 명칭은 「신라(지리)지」에 실려 있다.

백제.


○『後漢書』云: "三韓凡七十八國, <百濟>是其一國焉." 『北史』云: "<百濟>東極<新羅>, 西南俱限大海, 北際<漢江>, 其都曰<居拔城>, 又云<固麻城>, 其外更有<五方城>." 『通典』云: "<百濟>南接<新羅>, 北距<&高麗{高句麗}??>, 西限大海." 『舊唐書』云: "<百濟>, <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高句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 『新唐書』云: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移都<熊川>,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年一百二十二.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新羅><庾信>與<唐><蘇定方>討平之. 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唐>以其地. 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 仍以其酋長爲都督府刺史. 未幾, <新羅>盡幷其地, 置<熊>·<全>·<武>三州及諸郡縣, 與<高句麗>南境及<新羅>舊地, 爲九州."


허성도.허성도.

「후한서」에는 "삼한은 대략 78개 나라였는데, 백제가 바로 그 가운데의 하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사」에는 "백제가 동쪽으로는 신라에 닿았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와 닿았으며, 북쪽은 한강에 접하였고, 수도는 거발성 또는 고마성이라 하였으며, 그 밖에 다시 오방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전」에는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경계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에는 "백제는 부여의 또 다른 종족으로서 동북쪽에 신라가 있으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에 이르며, 북쪽에 고구려가 있고, 그 나라 왕이 있는 곳에 동서의 두 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며,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의 기록에는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묘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389년이 지난 13대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고 한성에 도읍을 정하여 105년을 지냈으며, 22대 문주왕에 이르러 도읍을 웅천으로 옮겨 63년을 지냈다. 26대 성왕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는데,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2년을 지냈다. 당 현경 5년은 바로 의자왕 20년이었는데, 이 때 신라 유신이 당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쳐서 평정하였다. 옛날 백제에는 5부가 있어서 37개 군, 2백개 성, 76만호를 나누어 통솔했었다. 그 후 당은 그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등 다섯 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곳 추장들을 도독부자사로 삼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신라가 그 지역을 모두 차지하여, 웅주, 전주, 무주의 3주와 여러 군현을 설치하였으니, 신라는 백제의 이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역, 그리고 신라의 본토를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熊川州>[一云<熊津>.]. <熱也山縣>. <伐音支縣>. <西原>[一云<臂城>, 一云<子谷>.]. <大木岳郡>. <其買縣{甘買縣}>??[一云<林川>.]. <仇知縣>. <加林郡>. <馬山縣>. <大山縣>. <舌林郡{舌林縣}>??. <寺浦縣>. <比衆縣>. <馬尸山郡>. <牛見縣>. <今勿縣>. <構郡{혜郡}>??. <伐首只縣>. <餘村縣>. <沙平縣>. <所夫里郡>[一云<泗비>.]. <珍惡山縣>. <悅已縣{悅己縣}>??[一云<豆陵尹城>, 一云<豆串城>, 一云<尹城>.]. <任存城>. <古良夫里縣>. <烏山縣>. <黃等也山郡>. <眞峴縣>[一云<貞峴>.]. <珍洞縣>. <雨述郡>. <奴斯只縣>. <所比浦縣>. <結已郡>. <新材縣{新村縣}>??. <沙尸良縣>. <一牟山郡>. <豆仍只縣>. <未谷縣>. <基郡>. <省大兮縣>. <知六縣>. <湯井郡>. <牙述縣>. <屈旨縣>[一云<屈直>.]. <完山>[一云<比斯伐>, 一云<比自火>.]. <豆伊縣>[一云<往武>.]. <仇智山縣>. <高山縣>. <南原>[一云<古龍郡>.]. <大尸山郡>. <井村縣>. <賓屈縣>. <也西伊縣>. <古沙夫里郡>. <皆火縣>. <欣良買縣>. <上柒縣>. <進乃郡>[一云<進仍乙>.]. <豆尸伊縣>[一云<富尸伊>.]. <勿居縣>. <赤川縣>. <德近郡>. <加知奈縣>[一云<加乙乃>.]. <只良肖縣>. <共伐共縣>. <屎山郡>[一云<折文{흔文}>??.]. <甘勿阿縣>. <馬西良縣>. <夫夫里縣>. <碧骨郡>. <豆乃山縣>. <首冬山縣>. <乃利阿縣>. <武斤縣>. <道實郡>. <礫坪縣>. <돌坪縣{돌平縣}>??. <金馬渚郡>. <所力只縣>. <閼也山縣>. <干召渚縣>. <伯海郡>[一云<伯伊>.]. <難珍阿縣>. <雨坪縣>. <任實郡>. <馬突縣>[一云<馬珍>.]. <居斯勿縣>. <武珍州>[一云<奴只>.]. <未冬夫里縣>. <伏龍縣>. <屈支縣>. <分嵯郡>[一云<夫沙>.]. <助助禮縣>. <冬老縣>. <豆힐縣>. <比史縣>. <伏忽郡>. <馬斯良縣>. <季川縣>. <烏次縣>. <古馬彌知縣>. <秋子兮郡>. <菓支縣>[一云<菓兮>.]. <栗支縣>. <月奈郡>. <半奈夫里縣>. <阿老谷縣>. <古彌縣>. <古尸伊縣>. <丘斯珍兮縣>. <所非兮縣>. <武尸伊郡>. <上老縣>. <毛良夫里縣>. <松彌知縣>. <감平郡{삽平郡}>??[一云武平.]. <猿村縣>. <馬老縣>. <突山縣>. <欲乃郡>. <遁支縣>. <仇次禮縣>. <豆夫只縣>. <이陵夫里郡>[一云<竹樹夫里>, 一云<仁夫里>.]. <波夫里郡>. <仍利阿縣>[一云<海濱>.]. <發羅郡{廢羅州}>??. <豆힐縣>. <實於山縣>. <水川縣>[一云<水入伊>.]. <道武郡>. <古西伊縣>. <冬音縣>. <塞琴縣>[一云<捉濱{投濱}>??.]. <黃述縣>. <勿阿兮郡>. <屈乃縣>. <多只縣>. <道계縣{道際縣}>??[一云<陰海>.]. <因珍島郡>[海道也.]. <徒山縣>[海島也. 或云<猿山>.]. <買仇里縣>[海島也.]. <阿次山郡>. <葛草縣>[一云<何老>, 一云<谷野>.]. <古祿只縣>[一云<開要>.]. <居知山縣>[一云<安陵>.]. <奈已郡>.


李丙燾. 「新羅志」.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웅천주[웅진이라고도 한다.]

열야산현     벌음지현

서원[비성 또는 자곡이라고도 한다.]  대목악군

기매현[임천이라고도 한다.]   구지현

가림군      마산현

대산현      설림군

사포현      비중현

마시산군     우견현

금물현      구군

벌수지현     여촌현

사평현      소부리군[사비라고도 한다.]

진악산현

열이현[두릉윤성이라고도 하며 두곶성 또는 윤성이라고도 한다.]

임존성      고량부리현

오산현      황등야산군

진현현[정현이라고도 한다.]   진동현

우술군      노사지현

소비포현     결이군

신촌현      사시량현

일모산군     두잉지현

미곡현      기군

성대혜현     지륙현

탕정현      아술현

굴지현[굴직이라고도 한다.]

완산(주)[비사벌 또는 비자화라고도 한다.]

두이현[왕무라고도 한다.]   구지산현

고산현      남원[고룡군이라고도 한다.]

대시산군     정촌현

빈굴현      야서이현

고사부리군     개화현

흔량매현     상칠현

진내군[진잉을이라고도 한다.]   두시이현[부시이라고도 한다.]

물거현      적천현

덕근군      가지나현[가을내라고도 한다.]

지량초현     공벌공현

시산군[절문이라고도 한다.]   감물아현

마서량현     부부리현

벽골군      두내산현

수동산현     내리아현

무근현      도실군

역평현      돌평현

금마저군     소력지현

알야산현     간소저현

백해군[백이라고도 한다.]   난진아현

우평현      임실군

마돌현[마진이라고도 한다.]   거사물현.

무진주[노지라고도 한다.]

미동부리현     복룡현

굴지현      분차군[부사라고도 한다.]

조조례현     동로현

두힐현      비사현

복흘군      마사량현

계천현      오차현

고마미지현     추자혜군

과지현[과혜라고도 한다.]   율지현

월나군      반나부리현

아로곡현     고미현

고시이현     구사진혜현

소비혜현     무시이군

상로현      모량부리현

송미지현     삽평군[무평이라고도 한다.]

원촌현      마로현

돌산현      욕내군

둔지현      구차례현

두부지현

이릉부리군[죽수부리 또는 인부리라고도 한다.] 파부리군

잉리아현[해빈이라고도 한다.]   발라군

두힐현      실어산현

수천현[수입이라고도 한다.]   도무군

고서이현     동음현

새금현[착빈이라고도 한다.]   황술현

물아혜군     굴내현

다지현      도제현[음해라고도 한다.]

인진도군[바다 섬이다.]

도산현[바다 섬이며 원산이라고도 한다.]  매구리현[바다 섬이다.]

아차산군

갈초현[하로 또는 곡야라고도 한다.]  고록지현[개요라고도 한다.]

거지산현[안릉이라고도 한다.]   나이군


○右<百濟>州郡縣, 共一百四十七, 其<新羅>改名及今名, 見『新羅志』.


이상 백제의 주, 군, 현은 모두 147개소이다. 신라에서 개칭한 것과 지금의 명칭들은 「신라(지리)지」에 실려 있다.


○三國有名未詳地分.

<調駿鄕>. <神鶴村>. <翔鸞村>. <對仙宮>.

<鳳庭村>. <飛龍村>. <飼龍鄕>. <接仙鄕>.

<敬仁鄕>. <好禮鄕>. <積善鄕>. <守義鄕>.

<斷金鄕>. <海풍鄕>. <北溟鄕>. <麗金成{麗金戍??/麗金城??}>.

<接靈鄕>. <河淸鄕>. <江寧鄕>. <咸寧鄕>.

<馴雉鄕>. <建節鄕>. <救民鄕>. <鐵山鄕>.

<金川鄕>. <睦仁鄕>. <靈池鄕>. <永安鄕>.

<武安鄕>. <富平鄕>. <穀成鄕>. <密雲鄕>.

<宜祿鄕>. <利人鄕>. <賞仁鄕>. <封德鄕>.

<歸德鄕>. <永풍鄕{咸平縣}>??. <律功鄕>.

<龍橋鄕>. <臨川鄕>. <海洲成{海州成}>??.

<江陵鄕>. <鐵求鄕>. <江南鄕>. <河東鄕>.

<激瀾鄕>. <露均成{露均戍??/露均城??}>. <永壽成{永壽戍??/永壽城??}>.

<寶劒成{寶劒戍??/寶劒城??}>. <岳陽成{岳陽戍??/岳陽城??}>.

<萬壽成{萬壽戍??/萬壽城??}>. <濯錦成{濯錦戍??/濯錦城??}>.

<河曲成{河曲戍??/河曲城??}>. <岳南成{岳南戍??/岳南城??}>.

<推畔成{推畔戍??/推畔城??}>. <進錦成{進錦戍??/進錦城??}>.

<澗水成{澗水戍??/澗水城??}>. <傍海成{傍海戍??/傍海城??}>.

<萬年鄕>. <飮仁鄕>. <通路鄕>. <懷信鄕>.

<江西鄕>. <利上鄕>. <抱忠鄕>. <連嘉鄕>.

<天露鄕>. <漢寧成{漢寧戍??/漢寧城??}>. <會昌宮>.

<邀仙宮>. <北海通>. <鹽池通>. <東海通>.

<海南通>. <北요通>. <末康成{末康戍??/永康城??}>.

<脣氣成{脣氣戍/??/脣氣城??}>. <奉天成{奉天戍??/奉天城??}>.

<방定成{방定戍/??/방定城??}>. <萊遠城>.

<萊津成{萊津戍??/萊津城??}>. <乾門驛>. <坤門驛>.

<坎門驛>. <艮門驛>. <兌門驛>. <大岵城>.

<岱山郡>. <枯彌縣>. <北외郡>. <非惱城>.

<瓢川縣>. <皐夷島>. <泉州>. <冷井縣>.

<慰禮城>. <比只國>. <南新縣>. <腰車城>.

<沙道城>. <骨火國>. <馬頭柵>. <槐谷城>.

<長峰鎭>. <獨山城>. <活開城>. <芼老城>.

<廣石城>. <坐羅城>. <狐鳴城>. <刀耶城>.

<狐山城>. <臨海鎭>. <長嶺鎭>. <牛山城>.

<汲里彌城{波里彌城}>??. <實珍城>. <德骨城>. <大林城>.

<伐音城>. <수山城{株山城}>??. <多伐國>. <近암城>.

<점노城{근노城}>??. <가岑城>. <당項城>. <石吐城>.

<富山城>. <阿旦城>. <컴羅城}>. <耳山城>.

<甘勿城>. <桐岑城>. <骨平城>[一云骨爭.]. <達咸城>.

<西谷城>. <勿伐城>. <小타城>. <畏石城>.

<泉山城>. <雍岑城>. <獨母城>. <컴谷城>.

<西單城>. <□후城{미후城}>??. <櫻岑城>. <岐岑城>.

<旗懸城>. <퓨??城{冗柵城}>??. <蛙山城>.

<濕水>. <龍馬>. <猪岳>. <준山{甁山}>??. <直朋>.

<達伐>. <목山{葉山??/터山??}>. <木出島>. <狗壤>.

<大丘>. <沙峴>. <熊谷>. <風島>.

<斧峴>. <狼山>. <叢山>. <安北河>.

<泊灼城>. <蓋馬國>. <句茶國>. <華麗城>.

<藻??國{藻開國??/藻那國??}>. <공??鎭{兼烽鎭??/赤烽鎭??}>.

<檀廬城>. <加尸城>. <石城>. <水口城>.

<卑倉城>. <蓋牟城>. <沙卑城>. <牛山城>.

<道薩城>. <白암城>. <建安城>. <蒼암城>.

<辱夷城>. <松讓國>. <荇人國>. <橫山>.

<白水山>. <迦葉原>. <東牟河>. <優渤水>.

<淹표水>[或云<蓋斯水>.]. <沸流水>. <薩水>.

<毛屯谷>. <골嶺>. <龍山>. <골川>. <凉谷>.

<箕山>. <長屋澤>. <易山>. <礪津>. <尉中林>.

<烏骨>. <沙勿澤>. <貴湍水>. <安地>.

<薩賀水>. <矛川>. <馬嶺>. <鶴盤嶺>.

<馬邑山>. <王骨嶺>. <豆谷>. <骨句川>.

<理勿林>. <車廻谷>. <曷思水>. <椽耶部{椽那部}>??.

<北溟山>. <閔中原>. <慕本>. <계山>.

<倭山>. <蠶支落>. <平儒原>. <狗山瀨>.

<坐原>. <質山>. <故國谷>. <左勿村>.

<故國原>. <裴嶺>. <酒桶村>. <巨谷>.

<靑木谷>. <杜訥河>. <柴原>. <箕丘>.

<中川>. <海谷>. <西川>. <鵠林>.

<烏川>. <水室村>. <思收村>. <烽山>.

<候山>. <美川>. <斷熊谷>. <馬首山>.

<長城>. <磨米山>. <銀山>. <後黃>.

<영留山>. <小獸林>. <禿山>. <武려邏>.

<大斧峴>. <馬首城>. <甁山柵>. <普述水>.

<烽峴>. <禿山柵>. <狗川柵>. <走壤城>.

<石頭城>. <高木城>. <圓山城>. <錦峴城>.

<大豆山城>. <牛谷城>. <橫岳>. <犬牙城>.

<赤峴城>. <沙道城>, <德安城>. <寒泉>.

<釜山>. <石川>. <狗原>. <八押城{八坤城}>??.

<關彌城>. <石峴城>. <雙峴城>. <沙口城>.

<斗谷>. <耳山城>. <牛鳴谷>. <沙井城>.

<馬浦村>. <長嶺城>. <加弗城>. <葦川>.

<狐山>. <穴城>. <獨山城>, <金峴城>.

<角山城>. <松山城>. <赤암城>. <生草原>.

<馬川城>. <沈峴>. <眞都城>. <高鬱府>.

<葛嶺>. <支羅城>[或云<周留城>.]. <大山柵>. <郁里阿{郁里河}>??.

<崇山>. <張吐野>. <絶影山>. <淸津>.

<遺鳳島>. <大거>. <견롱>. <鳧栖島>.

<鳳澤>. <龍丘>. <連城原>. <浮雲島>.

<天馬山>. <海濱島>. <壑中島>. <玉塞>.

<連峯>. <叢林>. <升天島>. <乘黃島>.

<八駿山>. <絶群山>. <求麟島>. <負圖島>.

<吐景山>. <河精島>. <遊氣山>. <平原>.

<大澤>. <騏린澤{騏린澤}>??. <섭景山>. <金穴>.

<蘭池>. <西極山>. <浦陽丘>. <鐵伽山>.

<桃林>. <石礫山>. <瑞린苑>. <麓苑>.

<沙苑>. <風達郡>. <曰上郡>.


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 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 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 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 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 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 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輿地勝覽』. 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日本書陵部本』.『북한본』.『북한본』.今西龍.『북한본』.『북한본』.『북한본』.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日本書陵部本』.『북한본』.趙炳舜. 『日本書陵部本』.『북한본』.李丙燾.趙炳舜. 『日本書陵部本』.李丙燾.李丙燾.

????????????????????????????????????????? ?위치가 분명하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지명

조준향  신학촌  상란촌  대선궁  봉정촌

비룡촌  사룡향  접선향  경인향  호례향

적선향  수의향  단금향  해풍향  북명향

여금성  접령향  하청향  강녕향  함녕향

순치향  건절향  구민향  철산향  금천향

목인향  영지향  영안향  무안향  부평향

곡성향  밀운향  의록향  이인향  상인향

봉덕향  귀덕향  영풍향  율공향  용교향

임천향  해주성  강릉향  철구향  강남향

하동향  격란향  노균성  영수성  보검성

악양성  만수성  탁금성  하곡성  악남성

추반성  진금성  간수성  방해성  만년향

음인향  통로향  회신향  강서향  이상향

포충향  연가향  천로향  한녕성  회창궁

요선궁  북해통  염지통  동해통  해남통

북요통  말강성  순기성  봉천성  방정성

내원성  내진성  건문역  곤문역  감문역

간문역  태문역  대호성  대산군  고미현

북외군  비뇌성  표천현  고이도  천주

냉정현  위례성  비지국  남신현  요거성

사도성  골화국  마두책  괴곡성  장봉진

독산성  활개성  모로성  광석성  좌라성

호명성  도야성  호산성  임해진  장령진

우산성  급리미성 실진성  덕골성  대림성

벌음성  주산성  다벌국  근암성  점노성

가잠성  당항성  석토성  부산성  아단성

부라성  이산성  감물성  동잠성

골평성[골쟁이라고도 한다.]  달함성  서곡성  물벌성

소타성  외석성  천산성  옹잠성  독모성

부곡성  서단성  미후성  앵잠성  기잠성

기현성  용책성  와산성  습수  용마

저악  병산  직붕  달벌  엽산

목출도  구양  대구  사현  웅곡

풍도  부현  낭산  총산  안북하

박작성  개마국  구다국  화려성  조나국

적봉진  단려성  가시성  석성  수구성

비창성  개모성  사비성  우산성  도살성

백암성  건안성  창암성  욕이성  송양국

행인국  횡산  백수산  가섭원  동모하

우발수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한다.] 비류수  살수

모둔곡  골령  용산  골천  양곡

기산  장옥택  역산  여진  위중림

오골  사물택  귀단수  안지  살하수

모천  마령  학반령  마읍산  왕골령

두곡  골구천  이물림  거회곡  갈사수

연야부  북명산  민중원  모본  계산

왜산  잠지락  평유원  구산뢰  좌원

질산  고국곡  좌물촌  고국원  배령

주통촌  거곡  청목곡  두눌하  시원

기구  중천  해곡  서천  곡림

오천  수실촌  사수촌  봉산  후산

미천  단웅곡  마수산  장성  마미산

은산  후황  영류산  소수림  독산

무려라  대부현  마수성  병산책  보술수

봉현  독산책  구천책  주양성  석두성

고목성  원산성  금현성  대두산성 우곡성

횡악  견아성  적현성  사도성  덕안성  한천

부산  석천  구원  팔압성  관미성

석현성  쌍현성  사구성  두곡  이산성

우명곡  사정성  마포촌  장령성  가불성

위천  호산  혈성  독산성  금현성  각산성

송산성  적암성  생초원  마천성  침현

진도성  고울부  갈령  지라성[주류성이라고도 한다.]

대산책  욱리아  숭산  장토야  절영산

청진  유봉도  대거  견롱  부서도

봉택  용구  연성원  부운도  천마산

해빈도   학중도  옥새  연봉  총림

승천도  승황도  괄준산  절군산  구린도

부도도  토경산  하정도  유기산  평원

대택  기린택  섭경산  금혈  난지

서극산  포양구  철가산  도림  석력산

서린원  녹원  사원  풍달군  왈상군


○<총章{總章}??>二年二月, 前司空兼太子大師{太師}??<英國公><李勣>等, 奏稱"奉 勅<&高麗{高句麗}??>諸城, 堪置都督府及州郡者, 宜共<男生>商量准擬, 奏聞件狀如前." 勅:"依奏, 其州郡應須隸屬, 宜委<遼東>道安撫使兼右相<劉仁軌>." 遂便穩分割, 仍摠??{????/隸??}<安東>都護府.


허성도.趙炳舜. 『日本書陵部本』.허성도.趙炳舜. 『日本書陵部本』.『북한본』.

총장 2년 2월, 전 사공겸태자태사영국공 이 적 등이 (당 고종에게) 상주하기를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 및 주, 군을 설치하는 건은, 마땅히 남생과 함께 토의 작성하여 상주하라는 칙명을 받들었기에, 이상과 같은 문건을 상주합니다"라고 하니, (고종이) 칙명을 내려 "주청에 의해서 그 주군은 모름지기 (중국에) 예속시켜야 하겠으므로 요동도안무사겸우상 유 인궤에게 위임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지역을 적당히 분할하여 모두 안동도호부에 예속시켰다.


○<鴨록水>以北, 未降十一城: <北扶餘城州>, 本<助利非西>; <節城>, 本<蕪子忽{燕子忽}>??; <풍夫城>, 本<肖巴忽{肖巳忽}>??; <新城州>, 本<仇次忽>[或云<敦城>.]; <도城{桃城}>??, 本<波尸忽>; <大豆山城>, 本<非達忽>; <遼東城州>, 本<烏列忽{鳥列忽}>??; <屋城州>; <白石城>; <多伐嶽州>; <安市城>, 舊<安寸忽{安十忽}>??[或云<丸都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日本書陵部本』.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압록강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원래 조리비서였던 북부여성주   원래 무자홀이었던 절성

원래 초파홀이었던 풍부성

원래 구차홀[돈성이라고도 한다.]이었던 신성주

원래 파시홀이었던 도성    원래 비달홀이었던 대두산성

원래 오열홀이었던 요동성주   옥성주

백석성      다벌악주

옛날 안시홀[환도성이라고도 한다.]이었던 안시성


○<鴨록水>以北, 已降城十一: <량암城>; <木底城{木저城}>??; <藪口城>; <南蘇城>; <甘勿主城>, 本<甘勿伊忽>; <릉田谷城{凌田谷城/??/麥田谷城??}>; <心岳城>, 本<居尸押>; <國內州>[一云<不耐>, 或云<尉那암城>.]; <屑夫婁城{屑夫萎城}>??, 本<肖利巴利忽>; <朽岳城{杆岳城}>??, 本<骨尸押>; <자木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압록강 이북의 항복한 11개 성

양암성      목저성

수구성      남소성

원래 감물이홀이었던 감물주성   능전곡성

원래 거시압이었던 심악성

국내주[불내 혹은 위나암성이라고도 한다.] 원래 초리파리홀이었던 설부루성

원래 골시압이었던 후악성    자목성


○<鴨록江}>以北, 逃城七: <연城>, 本<乃勿忽>; <面岳城>; <牙岳城>, 本<皆尸押忽>; <鷲岳城>, 本<甘彌忽>; <積利城>, 本<赤里忽>; <木銀城>, 本<召尸忽>; <梨山城>, 本<加尸達忽>.


압록강 이북의 도망한 7개 성

원래 내물홀이었던 연성    면악성

원래 개시압홀이었던 아악성    원래 감미홀이었던 취악성

원래 적리홀이었던 적리성    원래 소시홀이었던 목은성

원래 가시달홀이었던 이산성


○<鴨록>以北, 打得城三: <穴城>, 本<甲忽>; <銀城>, 本<折忽{탁忽}>??; <似城>, 本<史忽>.


趙炳舜. 『三國史節要』.

압록강 이북에서 정복한 3개 성

원래 갑홀이었던 혈성    원래 절홀이었던 은성

원래 사홀이었던 사성


○都督府一十三縣: <우夷縣>; <神丘縣>; <尹城縣>, 本<悅已>; <麟德縣>, 本<古良夫里>; <散昆縣>, 本<新村>; <安遠縣>, 本<仇尸波知>; <賓汶縣>, 本<比勿>; <歸化縣>, 本<麻斯良>; <邁羅縣>; <甘蓋縣>, 本<古莫夫里>; <奈西縣>, 本<奈西兮>; <得安縣>, 本<德近支>; <龍山縣>, 本<古麻山{古麻古}>??.


趙炳舜. 『三國史節要』.

도독부의 13개 현

우이현      신구현

원래 열이였던 윤성현    원래 고량부리였던 인덕현

원래 신촌이었던 산곤현    원래 구시파지였던 안원현

원래 비물이었던 빈문현    원래 마사량이었던 귀화현

매라현      원래 고막부리였던 감개현

원래 나서혜였던 나서현    원래 덕근지였던 득안현

원래 고마산이었던 용산현


○<東明州>四縣: <熊津縣>, 本<熊津村{熊津材}>??; <鹵辛縣>, 本<阿老谷>; <久遲縣>, 本<仇知>; <富林縣>, 本<伐音村>.


趙炳舜. 『三國史節要』.

동명주의 4개 현

원래 웅진촌이었던 웅진현    원래 아로곡이었던 노신현

원래 구지였던 구지현    원래 벌음촌이었던 부림현


○<支심州>九縣: <已汶縣>, 本<今勿>; <支심縣>, 本<只삼村>; <馬津縣>, 本<孤山>; <子來縣>, 本<夫首只>; <解禮縣>, 本<皆利伊>; <古魯縣>, 本<古麻只>; <平夷縣>, 本<知留>; <珊瑚縣>, 本<沙好薩>; <隆化縣>, 本<居斯勿>.


지심주의 9개 현

원래 금물이었던 이문현    원래 지삼촌이었던 지심현

원래 고산이었던 마진현    원래 부수지였던 자래현

원래 개리이였던 해례현    원래 고마지였던 고로현

원래 지류였던 평이현    원래 사호살이었던 산호현

원래 거사물이었던 융화현


○<魯山州>六縣: <魯山縣>, 本<甘勿阿>; <唐山縣>, 本<仇知只山>; <淳遲縣>, 本<豆尸>; <支牟縣>, 本<只馬馬知>; <烏蠶縣{鳥蠶縣}>??, 本<馬知沙>; <阿錯縣>, 本<源村{原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노산주의 6개 현

원래 감물아였던 노산현    원래 구지지산이었던 당산현

원래 두시였던 순지현    원래 지마마지였던 지모현

원래 마지사였던 오잠현    원래 원촌이었던 아착현


○<古四州>, 本<古沙夫里>, 五縣: <平倭縣>, 本<古沙夫村>; <帶山縣>, 本<大尸山>; <벽城縣>, 本<벽骨>; <佐贊縣>, 本<上杜>; <淳牟縣>, 本<豆奈只>.


원래 고사부리였던 고사주의 5개 현

원래 고사부촌이었던 평왜현   원래 대시산이었던 대산현

원래 벽골이었던 벽성현    원래 상두였던 좌찬현

원래 두나지였던 순모현


○<沙泮州>, 本<號尸伊城>, 四縣: <牟支縣>, 本<號尸伊村>; <無割縣>, 本<毛良夫里>; <佐魯縣>, 本<上老>; <多支縣>, 本<夫只>.


원래 호시이성이었던 사반주의 4개 현

원래 호시이촌이었던 모지현   원래 모량부리였던 무할현

원래 상로였던 좌로현    원래 부지였던 다지현


○<帶方州>, 本<竹軍城>, 六縣: <至留縣>, 本<知留>; <軍那縣>, 本<屈奈>; <徒山縣>, 本<抽山>; <半那縣>, 本<半奈夫里>; <竹軍縣>, 本<豆힐>; <布賢縣>, 本<巴老彌>.


원래 죽군성이었던 대방주의 6개 현

원래 지류였던 지류현    원래 굴나였던 군나현

원래 추산이었던 도산현    원래 반나부리였던 반나현

원래 두힐이었던 죽군현    원래 파로미였던 포현현


○<分嵯州>, 本<波知城>, 四縣: <貴旦縣>, 本<仇斯珍兮>; <首原縣>, 本<買省坪>; <皐西縣{阜西縣}>??, 本<秋子兮>; <軍支縣>.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래 파지성이었던 분차주의 4개 현

원래 구사진혜였던 귀단현   원래 매성평이었던 수원현

원래 추자혜였던 고서현    군지현


○<賈耽>『古今郡國志』云: "<渤海>國<南海>·<鴨록>·<扶餘>·<柵城>四府, 병是<高句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 凡三十九驛."

三國史記卷第三十七.


가 탐의 「고금군국지」에는 "발해국의 남해·압록·부여·책성 등 4개 부(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었으며, 신라의 천정군으로부터 책성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39개의 역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제 권 37 끝




三國史記卷第三十八.



삼국사기 권 제 38


雜志第七.

職官上.


잡지 제 7.

관직 상.


○<新羅>官號, 因時沿革, 不同其名言, <唐>夷相雜, 其曰侍中·郞中等者, 皆<唐>官名, 其義若可考. 曰伊伐찬·伊찬等者, 皆夷言, 不知所以言之之意. 當初之施設, 必也職有常守, 位有定員, 所以辨其尊卑, 待其人才之大小. 世久, 文記缺落, 不可得핵考而周詳. 觀其第二<南解王>, 以國事委任大臣, 謂之大輔, 第三<儒理王>, 設位十七等. 自是之後, 其名目繁多, 今採其可考者, 以著于篇.


신라 관직의 호칭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그 명칭이 같지 않다. 이에는 당 나라의 명칭과 우리나라의 명칭이 섞여 있다. 예컨대 시중이나 낭중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당의 관직명으로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나 이벌찬 혹은 이찬과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나라 말로서 그 명칭을 붙이게 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처음 이러한 관직을 두었을 때는, 틀림없이 관직마다 일정한 임무가 있고, 직위마다 일정한 인원이 있었을 것이며, 그것으로써 직책의 상하를 구분하고, 능력의 대소에 따라 임무를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문헌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고증하거나 상세하게 밝힐 수 있는 방도가 없어져 버렸다. 신라의 2대 임금 남해왕이 나라 일을 대신에게 위임하고 그를 대보라 하였으며, 3대 임금 유리왕이 17등급의 작위를 두었다는 것은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는 관직명이 복잡하게 많아졌다. 이제 고증할 수 있는 부분을 모아 이 책에 기록한다.


○大輔, <南解王>七年, 以<脫解>爲之. <儒理王>九年, 置十七等: 一曰伊伐찬[或云伊罰干, 或云于伐찬, 或云角干, 或云角粲, 或云舒發翰, 或云舒弗邯.]; 二曰伊尺찬[或云伊찬.]; 三曰잡찬[或云잡判, 或云蘇判]; 四曰波珍찬[或云海干, 或云破彌干.]; 五曰大阿찬, 從此至伊伐찬, 唯眞骨受之, 他宗則否; 六曰阿찬[或云阿尺干, 或云阿粲.], 自重阿찬至四重阿찬; 七曰一吉찬[或云乙吉干.]; 八曰沙찬[或云薩찬, 或云沙돌干.]; 九曰級伐찬[或云級찬, 或云及伏干.]; 十曰大奈麻[或云大奈末.], 自重奈麻至九重奈麻; 十一曰奈麻[或云奈末.], 自重奈麻至七重奈麻; 十二曰大舍[或云韓舍.]; 十三曰舍知[或云小舍.]; 十四曰吉士[或云稽知, 或云吉次.]; 十五曰大烏[或云大烏知.]; 十六曰小烏[或云小烏知.]; 十七曰造位[或云先沮知.].


대보: 남해왕 7년에 탈해를 대보로 삼았다.

유리왕 9년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첫째는 이벌찬[혹은 이벌간, 우벌찬, 각간, 각찬, 서발한, 서불한이라고도 한다.]이다.

둘째는 이척찬[혹은 이찬이라고도 한다.]이다.

셋째는 잡찬[혹은 잡판 혹은 소판이라고도 한다.]이다.

넷째는 파진찬[혹은 해간 혹은 파미간이라고도 한다.]이다.

다섯째는 대아찬이다. 이로부터 위로 이벌찬까지는 오직 진골만이 될 수 있으며, 다른 계통은 안된다.

여섯째는 아찬[혹은 아척간 혹은 아찬이라고도 한다.]이다. 이에는 중아찬으로부터 사중아찬까지 있다.

일곱째는 일길찬[혹은 을길간이라고도 한다.]이다.

여덟째는 사찬[혹은 살찬 혹은 사돌간이라고도 한다.]이다.

아홉째는 급벌찬[혹은 급찬이나 급복간이라고도 한다.]이다.

열째는 대나마[혹은 대나말이라고도 한다.]이다. 이에는 중나마로부터 구중나마까지의 구분이 있다.

열한째는 나마[혹은 나말이라고도 한다.]이다. 이에는 중나마로부터 칠중나마까지의 구분이 있다.

열두째는 대사[혹은 한사라고도 한다.]이다.

열세째는 사지[혹은 소사라고도 한다.]이다.

열네째는 길사[혹은 계지, 길차라고도 한다.]이다.

열다섯째는 대오[혹은 대오지라고도 한다.]이다.

열여섯째는 소오[혹은 소오지라고도 한다.]이다.

열일곱째는 조위[혹은 선저지라고도 한다.]이다.


○上大等[或云上臣], <法興王>十八年, 始置.


상대등[혹은 상신이라고 한다.]: 법흥왕 18년에 처음으로 상대등을 두었다.


○大角干[或云大舒發翰.], <太宗王>七年, 滅<百濟>論功, 授大將軍<金庾信>大角干, 於前十七位之上加之, 非常位也.


대각간[혹은 대서발한이라고 한다.]: 태종왕 7년, 백제를 격멸하고 공로를 평가할 때 대장군 김 유신을 대각간으로 임명하여 이전 17등급의 작위의 윗 등급에 이를 첨가하였다. 따라서 대각간은 고정적인 작위는 아니였다.


○太大角干[或云太大舒發翰.], <文武王>八年, 滅<高句麗>, 授留守<金庾信>以太大角干, 賞其元謀也. 於前十七位及大角干之上, 加此位, 以示殊尤之禮.


태대각간[혹은 태대서발한이라고 한다.]: 문무왕 8년에 고구려를 격멸하자 유수 김 유신을 태대각간에 임명하여 그의 원훈을 표창하였다. 이는 이전 17등급의 작위 및 대각간 보다 상위에 이 작위를 두어 특별한 우대의 예를 표시한 것이다.


○執事省, 本名稟主[或云祖主.], <眞德王>五年, 改爲執事部. <興德王>四年, 又改爲省. 中侍一入{中侍一人??/執事中侍??}, <眞德王>五年置. <景德王>六年, 改爲侍中, 位自大阿찬至伊食{伊찬}??爲之. 典大等二人, <眞興王>二十六年置. <景德王>六年, 改爲侍郞, 位自奈麻至阿찬爲之. 大舍二人, <眞平王>十一年置. <景德王>十八年, 改爲郞中[一云<眞德王>五年改.], 位自舍知主{至}??奈麻爲之. 舍知二人, <神文王>五年置. <景德王>十八年, 改爲員外郞. <惠恭王>十二年, 復稱舍知, 位自舍知至大舍爲之. 史十四人, <文武王>十一{二}??年, 加六人. <景德王>改爲郞, <惠恭王>復稱史, 位自先沮知至大舍爲之.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집사성: 본래는 늠주[혹은 조주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진덕왕 5년에 집사부로 고쳤고, 흥덕왕 4년에 다시 집사성으로 개칭하였다. 여기에는 1명의 중시가 있었는데 이 제도는 진덕왕 5년에 시작되었다. 경덕왕 6년에 다시 이를 시중이라 하였고,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이찬까지이다. 2명의 전대등은 진흥왕 26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6년에 시랑으로 고쳤다. 관등은 나마로부터 아찬까지이다. 2명의 대사를, 진평왕 11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18년에 낭중으로 고쳤다[진덕왕 5년에 고쳤다고 한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2명의 사지를 신문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18년에 원외랑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에 다시 사지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14명의 사는 문무왕 11[원문 1자 결자.]년에 6명을 증원하였고, 경덕왕 때 낭으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때 다시 사로 바꾸었다. 관등은 선저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兵部, 令一人, <法興王>三{四}??年始置. <眞興王>五年, 加一人, <太宗王>六年, 又加一人, 位自大阿찬至太大角干爲之, 又得兼宰相·私臣. 大監二人, <眞平王>四十五年初置, <太宗王>十五年??, 加一人, <景德王>改爲侍郞, <惠恭王>復稱大監, 位自□찬{級찬}??至阿食{阿찬}??爲之. 第監二人, <眞平王>十一年置. <太宗王>五年, 改爲大舍. <景德王>改爲郞中, <惠恭王>復稱大舍, 位自舍知王{至}??奈麻爲之. 弩舍知一人, <文武王>十二年, 始置. <景德王>改爲司兵, <惠恭王>復稱弩舍知, 位自舍知至大舍爲之. 史十二人, <文武王>十一年, 加二人, 十二年, 加三人, 位自先沮知至大舍爲之. 弩幢一人, <文武王>十一年置. <景德王>改爲小司兵, <惠恭王>復故, 位與史同.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新羅本紀.趙炳舜은 太宗의 재위년수가 8년이므로 '<太宗王>十五年'이라는 기사는 잘못된 것으로 본다.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병부: 1명의 영을, 법흥왕 3년에 처음으로 두었다. 진흥왕 5년에 1명을 증원하였으며, 태종왕 6년에 다시 1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태대각간까지이다. 영은 또한 재상과 사신(私臣)을 겸할 수 있었다. 2명의 대감을, 진평왕 45년에 처음으로 두었는데, 태종왕 15년에 1명을 증원하였고, 경덕왕 때 시랑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감으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원문 1자 결자.]찬으로부터 아찬까지이다. 2명의 제감을, 진평왕 11년에 두었는데, 태종왕 5년에 이를 대사로 고쳤고, 경덕왕 때 낭중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1명의 노사지를, 문무왕 12년에 처음으로 두었는데, 경덕왕 때 사병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노사지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병부에는 12명의 사를 두었는데 문무왕 11년에 2명을 증원하였고, 12년에 다시 3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선저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1명의 노당을, 문무왕 11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때 소사병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이전의 명칭으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사와 동일하다.


○調府, <眞平王>六年置. <景德王>改爲大府, <惠恭王>復故. 令二人, <眞德王>五年置, 位自衿荷至太大角干爲之. 卿二人, <文武王>十五年, 加一人, 位與兵部大監同. 大舍二人, <眞德王>置. <景德王>改爲主簿, <惠恭王>復稱大舍, 位自舍知至奈麻爲之. 舍知一人, <神文王>五年置. <景德王>改爲司庫, <惠恭王>復稱舍知, 位自舍知至大舍爲之. 史八人, <孝昭王{孝照王}>??四年, 加二人, 位與兵部史同.


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조부: 진평왕 6년에 설치하였는데, 경덕왕 때 대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이전 명칭으로 개칭하였다. 진덕왕 5년에 조부에 2명의 영을 두었다. 관등은 금하로부터 태대각간까지이다. 2명의 경을 두었는데, 문무왕 15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병부의 대감과 동일하다. 진덕왕 때 2명의 대사를 두었는데, 경덕왕 때 주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신문왕 5년에 1명의 사지를 두었는데, 경덕왕 때 사고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사지라고 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8명의 사를 두었는데, 효소왕 4년에 2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병부의 사와 동일하다.


○京城周作典, <景德王>改爲修城府, <惠恭王>復故. 令五人, <聖德王>三十一年置, 位自大阿찬至大角干爲之. 卿六人, <聖德王>三十二年置, 位與執事侍郞同. 大舍六人, <景德王>改爲主簿, <惠恭王>復稱大舍,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舍知一人, <景德王>改爲司功, <惠恭王>復稱舍知, 位自舍知至大舍爲之. 史八人, 位與調府史同.


경성주작전: 이 관청은 경덕왕 때 수성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5명의 영을, 성덕왕 31년에 두었다.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대각간까지이다. 6명의 경을, 성덕왕 32년에  두었다. 관등은 집사성의 시랑과 동일하다. 이 관청에는 6명의 대사가 있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라고 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사지는 1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사공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사지라고 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사는 8명인데 관등은 조부의 사와 동일하다.


○四天王寺成典, <景德王>改爲監四天王寺府, <惠恭王>復故. 衿荷臣一人, <景德王>改爲監令, <惠恭王>復稱衿荷臣, <哀莊王>又改爲合{令}??, 位自大阿찬至角干爲之. 上堂一人, <景德王>改爲卿, <惠恭王>復稱上堂, <哀莊王>又改爲卿, 位自奈麻至阿찬爲之. 赤位一人, <景德王>改爲監, <惠恭王>復稱赤位. 靑位二人, <景德王>改爲主簿, <惠恭王>復稱靑位, <哀莊王>改爲大舍, 省一人,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二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사천왕사성전: 경덕왕 때 감사천왕사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는 1명의 금하신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감령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금하신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 영으로 고쳤다.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각간까지이다. 상당은 1명이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경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상당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 다시 경으로 고쳤다. 관등은 나마로부터 아찬까지이다. 적위는 1명이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감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적위라고 하였다. 청위는 2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청위라 하였으며 애장왕 때는 대사로 고치고, 1명을 감원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2명이었다.


○奉聖寺成典, <景德王>改爲修營奉聖寺(-使)??院, 後復故{古}??. 衿荷臣一人, <景德王>改爲檢校使, <惠恭王>復稱衿荷臣, <哀莊王>改爲令. 上堂一人, <景德王>改爲副使, 後復稱上堂. 赤位一人, <景德王>改爲判官, 後復稱赤位. 靑位一人, <景德王>改爲錄事, 後復稱靑位. 史二人, <景德王>改爲典, 後復稱史.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봉성사성전: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수영봉성사사원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의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는 1명의 금하신이 있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검교사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금하신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 영으로 고쳤다. 상당은 1명이었는데 경덕왕 때 부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상당으로 고쳤다. 적위는 1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판관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적위라고 하였다. 청위는 1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녹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청위라고 하였다. 사는 2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전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라고 하였다.


○感恩寺成典, <景德王>改爲修營感恩寺使院, 後復故{古}??. 衿荷臣一人, <景德王>改爲檢校使, <惠恭王>復稱衿荷臣. <哀莊王>改爲合{令}??, 上堂一人, <景德王>改爲副使, <惠恭王>復稱上堂, <哀莊王>改爲卿[一云省卿置赤位.], 赤位一人, <景德王>改爲判官, 後復稱赤位. 靑位一人, <景德王>改爲錄事, 後復稱靑位. 史二人, <景德王>改爲典, 後復稱史.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감은사성전: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수영감은사사원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는 금하신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검교사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금하신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 영으로 고쳤다. 상당은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부사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상당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 경으로 고쳤다.[혹은 경을 없애고 적위를 두었다고도 한다.] 적위는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판관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적위라고 하였다. 청위는 1명인데 경덕왕 때 녹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청위라고 하였다. 사는 2명인데 경덕왕 때 전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라고 하였다.


○奉德寺成典, <景德王>十八年, 改爲修營奉德寺使院, 後復故{古}??. 衿荷臣一人, <景德王>改爲檢校使, <惠恭王>復稱衿荷臣, <哀莊王>又改爲卿. 上堂一人, <景德王>改爲副使, <惠恭王>復稱上堂, <哀莊王>又改爲卿. 赤位一人, <景德王>改爲判官, <惠恭王>復稱赤位. 靑位二人, <景德王>改爲錄事, <惠恭王>復稱靑位. 史六人, 後省四人, <景德王>改爲典, <惠恭王>復稱史.


趙炳舜. 『三國史節要』.

봉덕사성전: 경덕왕 18년에 그 명칭을 수영봉덕사사원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는 금하신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검교사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금하신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 다시 경으로 고쳤다. 상당은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부사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상당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 다시 경으로 고쳤다. 적위는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판관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적위라고 하였다. 청위는 2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녹사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청위라 하였다. 사는 6명을 두었는데 뒤에 4명을 감원하였다.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전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사라고 하였다.


○奉思寺{奉恩寺}??成典, 衿荷臣一人, <惠恭王>始置, <哀莊王>改爲令. 副使一人, <惠恭王>始置, 尋改爲上堂, <哀莊王>又改爲卿. 大舍二人, 史二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봉은사성전: 금하신 1명을, 혜공왕 때 처음으로 두었고 애장왕 때 영으로 고쳤다. 부사 1명을 혜공왕 때 처음으로 두었고, 얼마 후에 상당으로 개칭하였으며, 애장왕 때 경으로 고쳤다. 대사는 2명, 사도 2명을 두었다.


○靈廟寺成典, <景德王>十八年, 改爲修營靈廟寺使院, 後復故{古}??. 上堂一人, <景德王>改爲判官, 後復稱上堂. 靑位一人, <景德王>改爲錄事, 後又改爲大舍. 史二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영묘사성전: 경덕왕 18년에 수영영묘사사원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는 상당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판관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상당이라고 하였다. 청위는 1명인데 경덕왕 때 녹사로 고쳤다가 뒤에 대사로 개칭하였다. 사는 2명이었다.


○永興寺成典, <神文王>四年始置, <景德王>十八年, 改爲監永興寺館. 大奈麻一人, <景德王>改爲監. 史三人.


영흥사성전: 신문왕 4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경덕왕 18년에 그 명칭을 감영흥사관으로 개칭하였다. 여기에는 대나마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감으로 고쳤다. 사는 3명을 두었다.


○倉部, 昔者, 倉部之事, 兼於稟主, 至<眞德王>五年, 分置此司. 令二人, 位自大阿찬至大角干爲之. 卿二人, <眞德王>五年置, <文武王>十五年, 加一人. <景德王>改爲侍郞, <惠恭王>復稱卿, 位與兵部大監同. 大舍二人, <眞德王>置. <景德王>改爲郞中, <惠恭王>復稱大舍, 位與兵部大舍同. 租舍知一{二}??人, <孝昭王{孝照王}>??八年置, <景德王>改爲司倉, <惠恭王>復故, 位與弩舍知同. 史八人, <眞德王>置. <文武王>十一年, 加三人, 十二年, 加七入{人}??; <孝昭王{孝照王}>??八年, 加一人; <景德王>十一年, 加三人; <惠恭王>加八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창부: 옛날에는 창부의 일을 늠주에게 겸임시켰는데, 진덕왕 5년에 이 기관을 나누었다. 여기에는 영 2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대각간까지이다. 진덕왕 5년에 경 2명을 두었고, 문무왕 15년에 1명을 증원하였으며, 경덕왕 때 시랑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경이라고 하였다. 관등은 병부의 대감과 동일하다. 대사 2명을 진덕왕 때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낭중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병부의 대사와 동일하다. 효소왕 8년에 조사지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사창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되었다. 관등은 노사지와 동일하다. 사 8명을 진덕왕 때 두었고, 문무왕 11년에 3명, 12년에 7명, 효소왕 8년에 1명, 경덕왕 11년에 3명, 혜공왕 때 8명을 증원하였다.


○禮部, 令二人, <眞平王>八年置, 位與兵部令同. 卿二人, <眞德王>二年[一云五年.]置, <文武王>十五年, 加一人, 位與調府卿同. 大舍二人, <眞德王>五年置. <景德王>改爲主簿, 後復稱大舍, 位與調府大舍同. 舍知一人, <景德王>改爲司禮, ??{後}??復稱舍知, 位與調府舍知同. 史八人, <眞德王>五年, 加三人, 位與調府史同.


今西龍.

예부: 영 2명을 진평왕 8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병부의 영과 동일하다. 경 2명을 진덕왕 2년[5년이라고도 한다.]에 두었다가, 문무왕 15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경과 동일하다. 대사 2명을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부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대사와 동일하다. 사지는 1명인데 경덕왕 때 사례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지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사지와 동일하다. 사는 8명이었는데 진덕왕 5년에 3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사와 동일하다.


○乘府, <景德王>改爲司馭府, <惠恭王>復故. 令二人, <眞平王>六年置, 位自大阿찬至角于{角干}??爲之. 卿二人, <文武王>十五年, 加一人, 位與調府卿同. 大舍二人, <景德王>改爲主簿, 後復稱大舍, 位與兵部大舍同. 舍知一人, <景德王>改爲司牧, 後復稱舍知, 位與調府舍知同. 史九人, <文武王>十一年, 加三人, 位與調府史同.


今西龍.

승부: 경덕왕 때 사어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영 2명을 진평왕 6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각간까지이다. 경은 2명인데 문무왕 15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경과 동일하다. 대사가 2명인데 경덕왕 때 주부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병부의 대사와 동일하다. 사지가 1명인데 경덕왕 때 사목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지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사지와 동일하다. 사는 9명인데 문무왕 11년에 3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사와 동일하다.


○司正府, <太宗王>六年置. <景德王>改爲肅正臺, <惠恭王>復故. 令一人, 位自大阿찬至角干爲之. 卿二人, <眞興王>五年置. <文武王>十五年, 加一人, 位與乘府卿同. 佐二人. <孝成王>元年, 爲犯大王諱, 凡丞皆稱佐. <景德王>改爲評事, 後復稱佐, 位自奈麻至天奈麻{大奈麻}??爲之. 大舍二人,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十人, <文武王>十一年, 加五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사정부: 태종왕 6년에 설치하였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숙정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는 영 1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각간까지이다. 진흥왕 5년에 경 2명을 두었는데, 문무왕 15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승부의 경과 동일하다. 좌 2명을 두었다. 효성왕 원년에는 대왕의 휘와 같다고 하여 모든 승을 좌로 개칭하였다. 경덕왕 때 그 명칭을 평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좌라고 하였다. 관등은 나마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대사가 2명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10명인데 문무왕 11년에 5명을 증원하였다.


○例作府[一云例作典.], <景德王>改爲修例府, <惠恭王>復故. 令一人, <神文王>六年置, 位自大阿찬至角于{角干}??爲之. 卿二人, <神文王>置, 位與司正卿同. 大舍四人, <哀莊王>六年, 省二人, <景德王>改爲主簿, 後復稱大舍, 位與兵部大舍同. 舍知二人, <景德王>改爲司例, 後復稱舍知, 位與弩舍知同. 史八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예작부[예작전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 수례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영 1명을 신문왕 6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각간까지이다. 경 2명을 신문왕 때 두었는데, 관등은 사정부의 경과 동일하다. 대사가 4명이었으나 애장왕 6년에 2명을 감하였고,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부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병부의 대사와 동일하다. 사지는 2명인데 경덕왕 때 사례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지라고 하였다. 관등은 노사지와 같았다. 사는 8명을 두었다.


○船府, 舊以兵部大監·弟監, 掌舟楫之事. <文武王>十八年別置, <景德王>改爲利濟府, <惠恭王>復故. 令一人, 位自大阿찬至角干爲之. 卿二人, <文武王>三年置, <神文王>八年, 加一人, 位與調府卿同. 大舍二人, <景德王>改爲主簿, <惠恭王>復稱大舍, 位與調府大舍同. 舍知一人, <景德王>改爲司舟, <惠恭王>復稱舍知, 位與調府舍知同. 史八人, <神文王>元年, 加二人, <哀莊王>六年, 省二人.


선부: 예전에는 병부의 대감과 제감으로 하여금 선박에 관한 일을 담당하게 하였으나 문무왕 18년에 선부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이제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는 영 1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각간까지이다. 경 2명을 문무왕 3년에 두었는데, 신문왕 8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경과 동일하다. 대사는 2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라고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대사와 동일하다. 사지는 1명인데 경덕왕 때 사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사지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사지와 동일하다. 사는 8명인데 신문왕 원년에 2명을 증원하였고 애장왕 6년에 2명을 감하였다.


○領客府, 本名倭典, <眞平王>四十三年, 改爲領客典[後又別置倭典.], <景德王>又改爲司賓府, <惠恭王>復故. 令二人, <眞德王>五年置, 位自大阿찬至角干爲之. 卿二人, <文武王>十五年, 加一人, 位與調府卿同. 大舍二人, <景德王>改爲主簿, <惠恭王>復稱大舍, 位與調府大舍同. 舍知一人, <景德王>改爲司儀, <惠恭王>復稱舍知, 位與調府舍知同, 史八人.


영객부: 본래의 명칭은 왜전인데 진평왕 43년에 영객전으로 개칭하였고[뒤에 다시 왜전을 별도로 두었다.], 경덕왕 때 다시 사빈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영 2명을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각간까지이다. 경은 2명인데 문무왕 15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경과 동일하다. 대사 2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대사와 동일하다. 사지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사의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사지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사지와 동일하다. 사는 8명을 두었다.


○位和府, <眞平王>三年始置, <景德王>改爲司位府, <惠恭王>復故. 衿荷臣二人, <神文王>二年始置, 五年, 加一人, <哀莊王>六年, 改爲令, 位自伊찬至大角干爲之. 上堂二人, <神文王>置, <聖德王>二年, 加一人. <哀莊王>改爲卿, 位自級찬至阿찬爲之. 大舍二人, <景德王>改爲主簿, 後復稱大舍, 位與調府大舍同. 史八人.


위화부: 진평왕 3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사위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금하신 2명을 신문왕 2년에 처음으로 두었는데, 5년에 1명을 증원하였고 애장왕 6년에 영으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이찬으로부터 대각간까지이다. 상당 2명을 신문왕 때 두었는데, 성덕왕 2년에 1명을 증원하였고, 애장왕 때 경으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아찬까지이다. 대사 2명은 경덕왕 때 주부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대사와 동일하다. 사는 8명을 두었다.


○左理方府, <眞德王>五年置, <孝昭王{孝照王}>??元年, 避大王諱, 改爲議方府. 令二人, 位自級찬至잡찬爲之. 卿二人, <眞德王>置, <文武王>十八年, 加一人, 位與他卿同. 佐二人, <眞德王>置, <景德王>改爲評事, <惠恭王>復稱佐, 位與司正佐同. 大舍二人, 位與兵部大舍同. 史十五人, <元聖王>十三年, 省五人.


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좌이방부: 진덕왕 5년에 설치하였는데 효소왕 원년에 대왕의 휘와 같다고 하여 의방부로 개칭하였다. 여기에는 영 2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잡찬까지이다. 경 2명을 진덕왕 때 두었는데, 문무왕 18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은 다른 경과 동일하다. 좌 2명을 진덕왕 때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평사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좌라고 하였다. 관등은 사정부의 좌와 동일하다. 대사가 2명인데 관등은 병부의 대사와 동일하다. 사는 15명이었는데 원성왕 13년에 5명을 감하였다.


○右理方府, <文武王>七年置. 令二人, 卿二人, 佐二人, 大舍二人, 史十人.


우이방부: 문무왕 7년에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영 2명, 경 2명, 좌 2명, 대사 2명, 사 10명을 두었다.


○賞賜署, 屬倉部. <景德王>改爲司勳監, <惠恭王>復故. 大正{大匠}??一人, <眞平王>四十六年置. <景德王>改爲正, 後復稱大正, 位自級찬至阿찬爲之. 佐一人, 位自大奈麻至級찬爲之. 大舍二人, <眞德王>五年置, <景德王>改爲主書, <惠恭王>復稱大舍,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六人, <文武王>二十年, 加二人, <哀莊王>六年, 省二{三}??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상사서: 창부에 속하였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사훈감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대정 1명을 진평왕 46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정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정이라 하였다.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아찬까지이다. 좌는 1명인데 관등은 대나마로부터 급찬까지이다. 대사 2명을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6명이었는데 문무왕 20년에 2명을 증원하였고 애장왕 6년에 2명을 감하였다.


○大道署[或云寺典, 或云內道監.], 屬禮部. 大正一人, <眞平王>四十六年置. <景德王>改爲正, 後復稱大正, 位自級찬至阿찬爲之.[一云: 大正下有大舍二人.] 主書{主簿}??二人, <景德王>改爲主事.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八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대도서[혹은 사전 혹은 내도감이라고 한다.]: 예부에 속하였다. 대정 1명을 진평왕 46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정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정이라 하였다.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아찬까지이다.[대정 밑에 대사 2명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주서가 2명인데 경덕왕 때 주사로 개칭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8명을 두었다.


○典邑署, <景德王>改爲典京府, <惠恭王>復設{稱??/故??}. 卿二人[本置監六人, 分領六部, <元聖王>六年, 升二人爲卿], 位自奈麻至沙찬爲之. 監四人, 位自奈麻至大奈麻爲之. 大司邑六人, 位自舍知至奈麻爲之. 中司邑六人, 位自舍知至大舍爲之. 小司邑九人, 位與弩舍知同. 史十六人, 木尺七十人.


趙炳舜.『三國史節要』.今西龍.

전읍서: 경덕왕 때 전경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 경 2명[원래 감 6명을 두어 6부를 각각 통솔하게 하였는데 원성왕 6년에 2명을 경으로 발탁하였다.]을 두었다. 관등은 나마로부터 사찬까지이다. 감은 4명인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대사읍은 6명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중사읍은 6명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소사읍은 9명인데 관등은 노사지와 동일하다. 사는 16명, 목척은 70명이었다.


○永昌宮成典, <文武王>十七年置. 上堂一人, <景德王>置, 又改爲卿. <惠恭王>復稱上堂, <哀莊王>六年又改爲卿, 位自級찬至阿찬爲之. 大舍二人, <景德王>改爲主簿, <惠恭王>復稱大舍,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四人.


영창궁성전: 문무왕 17년에 설치하였다. 상당 1명을 경덕왕 때 두었다가, 그 명칭을 경으로 고쳤으며, 혜공왕 때 다시 상당으로 개칭하였다가 애장왕 6년에 다시 경으로 고쳤다.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아찬까지이다. 대사는 2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주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라고 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4명이었다.


○國學, 屬禮部. <神文王>二年置, <景德王>改爲大學監, <惠恭王>復故. 卿一人, <景德王>改爲司業, <惠恭王>復稱卿, 位與他卿同. 博士[若干人, 數不定.], 助敎[若干人, 數不定], 大舍二人, <眞德王>五年置, <景德王>改爲主簿, <惠恭王>復稱大舍,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二人, <惠恭王>元年, 加二人. 敎授之法, 以『周易』·『尙書』·『毛詩』·『禮記』·『春秋左氏傳』·『文選』, 分而爲之業. 博士若助敎一人, 或以『禮記』·『周易』·『論語』·『孝經』, 或以『春秋左傳』·『毛詩』·『論語』·『孝經』, 或以『尙書』·『論語』·『孝經』·『文選』, 敎授之. 諸生讀書, 以三品出身, 讀『春秋左氏傳』, 若『禮記』, 若『文選』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能兼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或差算學博士若助敎一人, 以『綴經』·『三開』·『九章』·『六章』, 敎授之. 凡學生, 位自大舍已下至無位, 年自十五至三十, 皆充之. 限九年, 若朴魯不化者罷之. 若才器可成, 而未熟者, 雖踰九年, 許在學, 位至大奈麻·奈麻而後, 出學.


국학: 예부에 속하였는데 신문왕 2년에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그 명칭을 태학감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경은 1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사업으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때 다시 경으로 바꾸었다. 관등은 다른 경과 동일하다. 박사[약간명으로서 정원은 정하지 않았다.]와 조교[약간명으로서 정원은 정하지 않았다.]와 대사 2명을,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로 바꾸었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가 2명인데 혜공왕 원년에 2명을 증원하였다. 교수하는 방법은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으로 구분하여 과정을 삼았으며, 박사와 조교 1명이 「예기」, 「주역」, 「논어」, 「효경」을 가르치거나, 혹은 「춘추좌전」, 「모시」, 「논어」, 「효경」을 가르치거나, 혹은 「상서」, 「논어」, 「효경」, 「문선」을 가르쳤다.  모든 학생들이 독서함에 있어서, 3품 출신으로서 「춘추좌씨전」을 읽고, 「예기」나 「문선」의 뜻을 통달하고 동시에 「논어」, 「효경」에 밝은 자는 상급이 되고, 「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는 중급이 되었으며, 「곡례」, 「효경」만을 읽은 자는 하급이 되었다. 5경, 3사, 제자백가서를 전부 통달한 자는 등급에 관계하지 않고 발탁하였다. 경우에 따라 산학박사와 조교 1명으로 하여금 「철경」, 「삼개」, 「구장」, 「육장」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대사 이하의 관등으로부터 작위가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나이가 15세에서 30세 된 자들이 모두 학생이 되었다. 학업은 9년을 한도로 하되 만일 재질이 노둔하여 인재가 될 가능성이 없는 자는 퇴학시켰다. 재주와 도량은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성숙되지 못한 자는 비록 9년을 초과하더라도 국학에 있게 하였고, 작위가 대나마와 나마에 이른 뒤에는 국학에서 나가게 된다.


○音聲署, 屬禮部, <景德王>改爲大樂監, <惠恭王>復故. 長二人, <神文王>七年, 改爲卿, <景德王>又改爲司樂, <惠恭王>復稱卿, 位與他卿同, 大舍二人, <眞德王>五年置, <景德王>改爲主簿, 後復稱大舍,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四人.


음성서: 예부에 속하였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대악감으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장 2명을 두었는데, 신문왕 7년에 경으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다시 사악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경이라고 하였다. 관등은 다른 경과 동일하다. 대사 2명을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주부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고 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4명을 두었다.


○大日任典, <太宗王>四年置, <景德王>合典京府. 大都司六人, <景德王>改爲大典儀, 後復故,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小都司二人, <景德王>改爲小典儀, 後復故, 位自舍知至大舍爲之. 都事大舍二人, <景德王>改爲大典事, 後復故, 位自舍知至奈麻爲之. 都事舍知{舍人}??四人, <景德王>改爲中典事, 後復故, 位自舍知至大舍爲之. 都謁舍知八人, <景德王>改爲典謁, 後復故, 位自舍知至大舍爲之. 都引舍知一人, <景德王>改爲典引, 後復故. 位與弩舍知同. 幢六人, <景德王>改爲小典事, 後復故. 位與調府史同. 都事稽知六人, 都謁稽知六人, 都引稽知五人[或云都引幢, 或云少典引.], 比伐首十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대일임전: 태종왕 4년에 설치하였는데 경덕왕 때 전경부에 통합시켰다. 대도사 6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대전의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소도사가 2명인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소전의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도사대사는 2명인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대전사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도사사지는 4명인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중전사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도알사지는 8명인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전알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도인사지는 1명인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전인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관등은 노사지와 동일하였다. 당은 6명인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소전사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관등은 조부의 사와 동일하다. 도사계지는 6명, 도알계지는 6명, 도인계지는 5명[혹은 도인당, 혹은 소전인이라고 한다.], 비벌수는 10명을 두었다.


○工匠府, <景德王>改爲典祀署, 後復故. 監一人, <神文王>二年置, 位自大奈麻至級찬爲之. 主書二人[或云主事, 或云大舍.], <眞德王>五年置,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四人.


공장부: 경덕왕 때 전사서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감 1명을 신문왕 2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대나마로부터 급찬까지이다. 주서 2명[혹은 주사, 혹은 대사라고 한다.]을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4명을 두었다.


○彩典, <景德王>改爲典彩署, 後復故{古}??. 監一人, <神文王>二年置, 位自奈麻至大奈麻爲之. 主書二人, <眞德王>五年置,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三人[一云四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채전: 경덕왕 때 전채서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감 1명을 신문왕 2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주서 2명을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3명[4명이라고도 한다.]을 두었다.


○左司祿館, <文武王>十七年置. 監一人, 位自奈麻至大奈麻爲之. 主書二人[或云主事.],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四人.


좌사록관: 문무왕 17년에 설치하였다. 감은 1명인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주서가 2명[혹은 주사라고 한다.]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4명을 두었다.


○右司祿館, <文武王>二十一年置. 監一人, 主書二人, 史四人.


우사록관: 문무왕 21년에 설치하였는데 감 1명, 주서 2명, 사 4명을 두었다.


○典祀署, 屬禮部, <聖德王>十二年置. 監一人, 位自奈麻至大奈麻爲之. 大舍二人, <眞德王>五年置,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四人.


전사서: 예부에 속하였다. 성덕왕 12년에 설치하였다. 감이 1명인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대사 2명을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는 4명을 두었다.


○新宮, <聖德王>十六年置. <景德王>改爲典設館, 後復故. 監一人, 位與典祀署監同. 主書二人, 位與典祀署大舍同. 史三人.


신궁: 성덕왕 16년에 설치하였다. 경덕왕 때 명칭을 전설관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감이 1명인데 관등은 전사서의 감과 동일하다. 주서가 2명인데 관등은 전사서의 대사와 동일하다. 사는 3명을 두었다.


○東市典, <智證王>九{十}??年置. 監二人, 位自奈麻至大奈麻爲之. 大舍二人, <景德王>改爲主事, 後復稱大舍, 位自舍知至奈麻爲之. 書生二人, <景德王>改爲司直, 後復稱書生, 位與調府史同. 史四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동시전: 지증왕 9년에 설치하였다. 감이 2명인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2명의 대사를 두었는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주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2명의 서생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사직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서생이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사와 동일하다. 사는 4명을 두었다.


○西市典, <孝昭王{孝照王}>??四年置. 監二人, 大舍二人, <景德王>改爲主事, 後復稱大舍. 書生二人, <景德王>改爲司直, 後復稱書生. 史四人.


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서시전: 효소왕 4년에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감 2명, 대사 2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대사라는 명칭을 주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 하였다. 2명의 서생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사직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서생이라 하였다. 사는 4명을 두었다.


○南市典, 亦<孝昭王>四年置. 監二人, 大舍二人, <景德王>改爲主事, 後復稱大舍. 書生二人, <景德王>改爲司直, 後復稱書生. 史四人.


남시전: 효소왕 4년에 설치하였다. 감 2명, 대사 2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대사를 주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 하였다. 2명의 서생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사직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서생이라 하였다. 사는 4명을 두었다.


○司範署, 屬禮部. 大舍二人[或云主書.], <景德王>改爲主事, 後復稱大舍, 位與調府舍知同. 史四人.


사범서: 예부에 속하였다. 대사[혹은 주서라고 한다.] 2명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주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라 하였다. 관등은 조부의 사지와 동일하다. 사는 4명을 두었다.


○京都驛, <景德王>改爲都亭驛, 後復故. 大舍二人,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二人.


경도역: 경덕왕 때 도정역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대사 2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사 2명을 두었다.


○漏刻典, <聖德王>十七年始置. 博士六人, 史一人.


누각전: 성덕왕 17년에 설치하였는데 박사 6명, 사 1명을 두었다.


○六部少監典[一云六部監典.], 梁部·沙梁部, 監郞各一人, 大奈麻各一人, 大舍各二人, 舍知各一人. 梁部, 史六人, 沙梁部, 史五人; 本彼部, 監郞一人, 監大舍一人, 舍知一人, 監幢五人, 史一人; 牟梁部, 監臣一人, 大舍一人, 舍知一人, 監幢五人, 史一人; 漢祗部·習比部, 監臣各一人, 大舍各一人, 舍知各一人, 監幢各三人, 史各一人.


6부소감전[6부감전이라고도 한다.]: 양부와 사량부에 감랑 각 1명, 대나마 각 1명, 대사 각 2명, 사지 각 1명을 두었다. 양부에 사 6명, 사량부에 사 5명을 두었다. 본피부에 감랑 1명, 감대사 1명, 사지 1명, 감당 5명, 사 1명을 두었다. 모량부에 감신 1명, 대사 1명, 사지 1명, 감당 5명, 사는 1명을 두었다. 한기부와 습비부에 감신 각 1명, 대사 각 1명, 사지 각 1명, 감당 각 3명, 사는 각 1명을 두었다.


○食尺典, 大舍六人, 史六人.


식척전: 대사 6명, 사 6명을 두었다.


○直徒典, 大舍六人, 舍知八人, 史二十六人.


직도전: 대사 6명, 사지 8명, 사 26명을 두었다.


○古官家典, 幢[一云稽知.]四人, 鉤尺六人, 水主六人, 禾主十五人.

三國史記卷第三十八.


고관가전: 당[계지라고도 한다.] 4명, 구척 6명, 수주 6명, 화주 15명을 두었다.

삼국사기 권 제 38 끝




三國史記卷第三十九.



삼국사기 권 제 39


雜志第八.

職官中.


잡지 제 8.

관직 중.


○內省, <景德王>十八年, 改爲殿中省, 後復故. 私臣一人, <眞平王>七年, 三宮, 各置私臣. 大宮, 和文大阿찬; 梁宮, 首힐夫阿찬; 沙梁宮, 弩知伊찬. 至四十四年, 以一員兼掌三宮, 位自衿荷至太大角干, 惟其人則授之, 亦無年限. <景德王>又改爲殿中令, 後復稱私臣. 卿二人, 位自奈麻至阿찬爲之. 監二人, 位自奈麻至沙찬爲之. 大舍一人, 舍知一人.

○內司正典, <景德王>五年置. 十八年, 改爲建平省, 後復故. 議決一人, 貞察{員察}??二人, 史四人.

○典大舍典, 典大舍一人, 典翁一人, 史四人.

○上大舍典, 上大舍一人, 上翁一人.

○黑鎧監, <景德王>改爲衛武監, 後復故. 大舍一人, 史八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내성: 경덕왕 18년에 명칭을 전중성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사신 1명을 두었는데 진평왕 7년에는 세 궁에 각각 사신을 두었다. 대궁은 화문 대아찬, 양궁은 수힐부 아찬, 사량궁은 노지 사찬이 맡았다. 44년에 이르러 한 사람이 세 궁을 동시에 관리하게 하였다. 관등은 금하로부터 태대각간 중에서 적임자로 인정되면 이 벼슬을 주었으며, 임기 제한은 없었다.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전중령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신이라 하였다. 경 2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아찬까지이다. 감 2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사찬까지이다. 대사 1명, 사지 1명을 두었다.

내사정전: 경덕왕 5년에 설치하였다. 18년에 이 명칭을 건평성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의결 1명, 정찰 2명, 사 4명을 두었다.

전대사전: 전대사 1명, 전옹 1명, 사 4명을 두었다.

상대사전: 상대사 1명, 상옹 1명을 두었다.

흑개감: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위무감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대사 1명, 사 4명을 두었다.


○本彼宮, <神文王>元年置. 虞一人, 私母一人, 工翁{上翁}??二人, 典翁一人, 史二人.

○引道典, <景德王>改爲禮成典, 後復故. 上引道二人, □{黃??/下??}位引道三人, 官引道四人.

○村徒典, <文武王>十年置. (+저)??于{干}??一人, 宮翁一人, 大尺{火尺}??一人, 史二人.

○尻驛典, 看翁一人, 宮翁一人.

○平珍音典, <景德王>改爲소宮, 後復故. 看翁一人, 筵翁一人, 典翁二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본피궁: 신문왕 원년에 설치하였다. 우 1명, 사모 1명, 공옹 2명, 전옹 1명, 사 2명을 두었다.

인도전: 경덕왕 때 예성전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상인도 2명[원문 1자 결자]위인도 3명, 관인도 4명을 두었다.

촌도전: 문무왕 10년에 설치하였다. 간 1명, 궁옹 1명, 대척 1명, 사 2명을 두었다.

구역전: 간옹 1명, 궁옹 1명을 두었다.

평진음전: 경덕왕 때 명칭을 소궁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간옹 1명, 연옹 1명, 전옹 2명을 두었다.


○煙舍典, <聖德王>十七年置. 看翁一人.

○詳文師{詳文司}??, <聖德王>十三年, 改爲通文博士. <景德王>又改爲翰林, 後置學士.

○所內學生, <聖德王>二十年置.

○天文博士, 後改爲司天博士.

○醫學, <孝昭王{孝照王}>??元年初置. 敎授學生, 以『本草經』·『甲乙經』·『素問經』·『針經』·『脈經』·『明堂經』·『難經』爲之業. 博士二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연사전: 성덕왕 17년에 설치하였다. 간옹 1명을 두었다.

상문사: 성덕왕 13년에 명칭을 통문박사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다시 한림으로 고쳤다. 뒤에 학사를 두었다.

소내학생: 성덕왕 20년에 설치하였다.

천문박사: 뒤에 사천박사로 개칭하였다.

의학: 효소왕 원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과 과정은 「본초경」, 「갑을경」, 「소문경」, 「침경」, 「맥경」, 「명당경」, 「난경」이었다. 박사 2명을 두었다.


○供奉乘師[闕].

○律令典, 博士六人.

○藪宮典, 大舍二人, 史二人.

○靑淵宮典, <景德王>改爲造秋亭, 後復故. 大舍二人, 史二人, 宮翁一人.

○夫泉宮典, 大舍二人, 史二人, 宮翁一人.


공봉 승사: [궐문]

율령전: 박사 6명을 두었다.

수궁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청연궁전: 경덕왕 때 조추정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대사 2명, 사 2명, 궁옹 1명을 두었다.

부천궁전: 대사 2명, 사 2명, 궁옹 1명을 두었다.


○且熱音宮典, 大舍二人, 史四人, 宮翁一人.

○坐山典, 大舍二人, 史三人, 宮翁一人.

○屛村宮典, <景德王>改爲玄龍亭, 後復故. 大舍二人, 史二人, 宮翁一人.

○北吐只宮典, 大舍二人, 史二人.


차열음궁전: 대사 2명, 사 4명, 궁옹 1명을 두었다.

좌산전: 대사 2명, 사 3명, 궁옹 1명을 두었다.

병촌궁전: 경덕왕 때 현룡정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대사 2명, 사 2명, 궁옹 1명을 두었다.

북토지궁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弘峴宮[已下五宮, 通謂之古奈宮]典, 大舍二人, 史二人.

○葛川宮典, 大舍二人, 史二人.

○善坪宮典, 大舍二人, 史二人.

○伊同宮典, 大舍二人, 史二人.

○平立宮典, 大舍二人, 史二人.

○明活典, <景暉王{神德王}>??二年置. 大舍一人, 看翁一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홍현궁[이하의 다섯 궁을 고나궁으로 통칭하였다.]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갈천궁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선평궁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이동궁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평립궁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명활전: 경휘왕 2년에 설치하였다. 대사 1명, 간옹 1명을 두었다.


○源谷羊典, <興德王>四年置. 大舍一人, 看翁一人.

○染谷典, 看翁一人.

○壁典, 看翁一人, 下典四人.

○자園典, 看翁一人, 下典二人.

○豆화炭典{豆谷炭典}??, 看翁一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곡양전: 흥덕왕 4년에 설치하였다. 대사 1명, 간옹 1명을 두었다.

염곡전: 간옹 1명을 두었다.

벽전: 간옹 1명, 하전 4명을 두었다.

척원전: 간옹 1명, 하전 2명을 두었다.

두화탄전: 간옹 1명을 두었다.


○少年監典, <景德王>改爲釣天省, 後復故. 大舍二人, 史二人.

○會宮典, <景德王>改爲北司設, 後復故. 宮翁一人, 助舍知四人.

○上新謀典, 大舍一人, 史二人.

○下新謀典, 大舍一人, 史二人.

○左新謀典, 大舍一人, 史二人.


소년감전: 경덕왕 때 조천성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회궁전: 경덕왕 때 북사설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궁옹 1명, 조사지 4명을 두었다.

상신모전: 대사 1명, 사 2명을 두었다.

하신모전: 대사 1명, 사 2명을 두었다.

좌신모전: 대사 1명, 사 2명을 두었다.


○右新謀典, 大舍一人, 史二人.

○租典, 大舍一人, 史一人.

○新園典, 大舍一人, 史一人.

○氷庫典, 大舍一人, 史一人.

○白川목숙典, 大舍一人, 史一人.


우신모전: 대사 1명, 사 2명을 두었다.

조전: 대사 1명, 사 1명을 두었다.

신원전: 대사 1명, 사 1명을 두었다.

빙고전: 대사 1명, 사 1명을 두었다.

백천목숙전: 대사 1명, 사 1명을 두었다.


○漢지목숙典, 大舍一人, 史一人.

○蚊川목숙典, 大舍一人, 史一人.

○本彼목숙典, 大舍一人, 史一人.

○陵色典, 大舍一人, 史一人.

○穢宮典, <景德王>改爲珍閣省, 後復故. 稚省十人, 宮翁一人, 助舍知四人, 從舍知二人.


한지목숙전: 대사 1명, 사 1명을 두었다.

문천목숙전: 대사 1명, 사 1명을 두었다.

본피목숙전: 대사 1명, 사 1명을 두었다.

능색전: 대사 1명, 사 1명을 두었다.

예궁전: 경덕왕 때 진각성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치성 10명, 궁옹 1명, 조사지 4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朝霞房, 母二十三人.

○染宮, 母十一人.

○疏典, 母六人.

○紅典, 母六人.

○蘇芳典, 母六人.


조하방: 모 23명을 두었다.

염궁: 모 11명을 두었다.

소전: 모 6명을 두었다.

홍전: 모 6명을 두었다.

소방전: 모 6명을 두었다.


○찬染典, 母六人.

○漂典, 母十人.

○倭典, 已下十四官員數闕.

○錦典, <景德王>改爲織錦房, 後復故.

○鐵鍮典, <景德王>改爲築冶房, 後復故.


찬염전: 모 6명을 두었다.

표전: 모 10명을 두었다.

왜전: 이하 14개 부서의 인원 수는 빠져있다.

금전: 경덕왕 때 명칭을 직금방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철유전: 경덕왕 때 명칭을 축야방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寺典.

○漆典, <景德王>改爲飾器房, 後復故.

○毛典, <景德王>改爲聚취房, 後復故.

○皮典, <景德王>改爲포人房, 後復故.

○추典.


사전

칠전: 경덕왕 때 식기방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모전: 경덕왕 때 취췌방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피전: 경덕왕 때 포인방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추전


○皮打典, <景德王>改爲운{운}??工房, 後復故.

○磨典, <景德王>改爲梓人房, 後復故.

○탑典.

○靴典.

○打典.

○麻履典.


『북한본』.

피타전: 경덕왕 때 운공방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마전: 경덕왕 때 재인방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답전

화전

타전

마리전


○御龍省, 私臣一人, <哀莊王>二年置. 御伯郞二人, <景德王>九年改爲奉御. <宣德王>元年, 又改爲卿, 尋改爲監. (+置)??稚省十四人.

○洗宅, <景德王>改爲中事省, 後復故. 大舍八人, 從舍知二人.

○崇文臺, 郞二人, 史四人, 從舍知二人.

○嶽典, 大舍二人, 史四人, 從舍知二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어룡성: 사신 1명을 애장왕 2년에 두었다. 2명의 어백랑을 두었는데 경덕왕 9년에 명칭을 봉어로 고쳤다가 선덕왕 원년에 경으로 고쳤고, 얼마 후에 감으로 개칭하였다. 치성 14명을 두었다.

세택: 경덕왕 때 중사성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대사 8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숭문대: 낭 2명, 사 4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악전: 대사 2명, 사 4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監典, 大舍二人, 舍知二人, 史四人, 都官四人, 從舍知二人, 樂子無定數.

○름典, <景德王>改爲天祿司, 後復故. 大舍二人, 舍知二人, 史八人, 름翁四人, 從舍知二人.

○春典{용典}??, 舍知二人, 史八人.

○祭典, 舍知二人, 史六人.

○藥典, <景德王>改爲保命司, 後復故. 舍知二人, 史六人, 從舍知二人.


李丙燾.

「북한본」.

감전: 대사 2명, 사지 2명, 사 4명, 도관 4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악자는 정해진 수가 없었다.

늠전: 경덕왕 때 명칭을 천록사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대사 2명, 사지 2명, 사 8명, 늠옹 4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용전: 사지 2명, 사 8명을 두었다.

제전: 사지 2명, 사 6명을 두었다.

약전: 경덕왕 때 보명사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사지 2명, 사 6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供奉醫師, 無定數.

○供奉卜師, 無定數.

○麻典, <景德王>十八年, 改爲織紡局, 後復故. 于{干}??一人, 史八人, 從舍知四人.

○曝典, 屬縣三.

○肉典, <景德王>改爲尙膳局, 後復故. 于{干}??二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공봉의사: 일정한 수가 없었다.

공봉복사: 일정한 수가 없었다.

마전: 경덕왕 18년에 명칭을 직방국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간 1명, 사 8명, 종사지 4명을 두었다.

폭전: 이에 속한 현이 셋이었다.

육전: 경덕왕 때 명칭을 상선국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간 2명을 두었다.


○滓典, 干一人, 史四人.

○阿尼典, 母六人.

○綺典, <景德王>改爲別錦房, 後復故. 母八人.

○席典, <景德王>改爲奉座局, 後復故. 于{干}??一人, 史二人.

○机槪典, <景德王>改爲机盤局, 後復故. 于{干}??一人, 史六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재전: 간 1명, 사 4명이다.

아니전: 모 6명을 두었다.

기전: 경덕왕 때 명칭을 별금방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모 8명을 두었다.

석전: 경덕왕 때 명칭을 봉좌국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간 1명, 사 2명을 두었다.

궤개전: 경덕왕 때 명칭을 궤반국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간 1명, 사 6명을 두었다.


○楊典, <景德王>改爲司비局, 後復故. 于{干}??一人, 史六人.

○瓦器典, <景德王>改爲陶登局, 後復故. 干一人, 史六人.

○監夫大典, 大舍二人, 史二人, 從舍知二人.

○大傅典, 大舍二人, 史二人, 從舍知二人.

○行軍典, 大舍二人, 史四人, 從舍知二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양전: 경덕왕 때 명칭을 사비국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간 1명, 사 6명을 두었다.

와기전: 경덕왕 때 명칭을 도등국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간 1명, 사 6명을 두었다.

감부대전: 대사 2명, 사 2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대부전: 대사 2명, 사 2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행군전: 대사 2명, 사 4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永昌典, 大舍二人, 史二人.

○古昌典, 大舍二人, 史四人.

○番監, 大舍二人, 史二人.

○願堂典, 大舍二人, 從舍知二人.

○物藏典, 大舍四人, 史二人.


영창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고창전: 대사 2명, 사 4명을 두었다.

번감: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원당전: 대사 2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물장전: 대사 4명, 사 2명을 두었다.


○北廂典, 大舍二人, 史四人.

○南下所宮, <景德王>改爲雜工司, 後復故. 翁一人, 助四人.

○南桃園宮, 翁一人.

○北園宮, 翁一人.

○新靑淵宮, 翁一人.


북상전: 대사 2명, 사 4명을 두었다.

남하소궁: 경덕왕 때 명칭을 잡공사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옹 1명, 조 4명을 두었다.

남도원궁: 옹 1명을 두었다.

북원궁: 옹 1명을 두었다.

신청연궁: 옹 1명을 두었다.


○針房, 女子十六人.

○東宮官.

○東宮衙, <景德王>十一年置. 上大舍一人, 次大舍一人.

○御龍省, 大舍二人, 稚省六人.

○洗宅, 大舍四人, 從舍知二人.


침방: 여자 16명을 두었다.

동궁관

동궁아: 경덕왕 11년에 설치하였다. 상대사 1명, 차대사 1명을 두었다.

어룡성: 대사 2명, 치성 6명을 두었다.

세택: 대사 4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給帳典[一云□典.], 典四人, 稚四人.

○月池典[闕].

○僧房典, 大舍二人, 從舍知二人.

○포典, 大舍二人, 史二人, 從舍知二人.

○月池嶽典, 大舍二人, 水主一人.


급장전[(원문 1자 결자)전이라고도 한다.]: 전 4명, 치 4명을 두었다.

월지전: 궐문

승방전: 대사 2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포전: 대사 2명, 사 2명, 종사지 2명을 두었다.

월지악전: 대사 2명, 수주 1명을 두었다.


○龍王典{龍主典}??, 大舍二人, 史二人.

三國史記卷第三十九.


趙炳舜. 『三國史節要』.

용왕전: 대사 2명, 사 2명을 두었다.

삼국사기 권 제 39 끝




三國史記卷第四十.



삼국사기 권 제 40


雜志第九.

職官下.


잡지 제 9.

관직 하.


武官.


무관


○侍衛府, 有三徒, <眞德王>五年置. 將軍六人, <神文王>元年, 罷監置將軍, 位自級찬至阿찬爲之. 大監六人, 位自奈麻至阿찬爲之. 隊頭十五人, 位自舍知至沙찬爲之. 項三十六人,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卒百十七人, 位自先沮知至大舍爲之.


시위부: 삼도가 있었는데 진덕왕 5년에 설치하였다. 장군은 6명이니, 신문왕 원년에 감을 폐지하고 장군을 둔 것이다.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아찬까지이다. 대감은 6명인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아찬까지이다. 대두가 15명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사찬까지이다. 항이 36명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졸은 117명인데 관등은 선저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諸軍官, 將軍共三十六人, 掌大幢四人, 貴幢四人. <漢山>停[<羅>人謂營爲停.]三人, <完山>停三人, <河西>□□{停十}??二人, <牛首>停二人, 位自眞骨上堂至上臣爲之. 綠衿幢二人, 紫衿幢二人, 白衿幢二人, 緋衿幢二人, 黃衿幢二人, 黑衿幢二人, 碧衿幢二人, 赤衿幢二人, 靑衿幢二人, 位自眞骨級찬至角干爲之. 至<景德王>時, <熊川州>停加置三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제군관: 장군은 모두 36명이다. 대당을 맡은 장군이 4명, 귀당을 맡은 장군이  4명, 한산정[신라 사람은 군영을 정이라 하였다.]에 3명, 완산정에 3명, 하서정에 2명, 우수정에 2명이다. 관등은 진골 상당으로부터 상신까지이다. 녹금당에 2명, 자금당에 2명, 백금당에 2명, 비금당에 2명, 황금당에 2명, 흑금당에 2명, 벽금당에 2명, 적금당에 2명, 청금당에 2명이다. 관등은 진골 급찬으로부터 각간까지이다. 경덕왕 때에 웅천주정에 3명을 더 두었다.


○大官大監, <眞興王>十年置. 掌大幢五人, 貴幢五人, <漢山>停四人, <牛首>停四人, <河西>停四人, <完山>停四人, 無衿. 綠衿幢四人, 紫衿幢四人, 白衿幢四人, 緋衿幢四人, 黃衿幢四人, 黑衿幢四人, 碧衿幢四人, 赤衿幢四人, 靑衿幢四人, 共六十二人, 着衿. (-眞骨)??, 位自舍知至阿찬爲之. 次品自奈麻至四重阿찬爲之.


李丙燾.

대관대감: 진흥왕 10년에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대당을 맡은 대관대감이 5명, 귀당을 맡은 대관대감이 5명, 한산정에 (대관대감이) 4명, 우수정에 4명, 하서정에 4명, 완산정에 4명인데 무금이고, 녹금당에 4명, 자금당에 4명, 백금당에 4명, 비금당에 4명, 황금당에 4명, 흑금당에 4명, 벽금당에 4명, 적금당에 4명, 청금당에 4명으로써 모두 62명이 착금하였다. (진골은) 관등은 사지로부터 아찬까지이고, 차품은 나마로부터 사중아찬까지이다.


○隊大監, 領馬兵, 계衿一人, <音里火>停一人, <古良夫里>停一人, <居斯勿>停一人, <參良火>停一人, <召參>停一人, <未多夫里>停一人, <南川>停一人, <骨乃斤>停一人, <伐力川>停一人, <伊火兮>停一人. 綠衿幢三人, 紫衿幢三人, 白衿幢三人, 黃衿幢三人, 黑衿幢三人, 碧衿幢三人, 赤衿幢三人, 靑衿幢三人. <菁州>誓一人, <漢山州>誓一人, <完山州>誓一人. 領步兵, 大幢三人, <漢山>停三人, 貴幢二人, <牛首>停二人, <完山>停二人, 碧衿幢二人, 綠衿幢二人, 白衿幢二人, 黃衿幢二人, 黑衿幢二人, 紫衿幢二人, 赤衿幢二人, 靑衿幢二人, 緋衿幢四人, 共七十人. 병着衿, 位自奈麻至阿찬爲之.


제대감: 마병을 영솔하는 자는 계금에 1명, 음리화정에 1명, 고량부리정에 1명, 거사물정에 1명, 삼량화정에 1명, 소삼정에 1명, 미다부리정에 1명, 남천정에 1명, 골내근정에 1명, 벌력천정에 1명, 이화혜정에 1명, 녹금당에 3명, 자금당에 3명, 백금당에 3명, 황금당에 3명, 흑금당에 3명, 벽금당에 3명, 적금당에 3명, 청금당에 3명, 청주서에 1명, 한산주서에 1명, 완산주서에 1명을 두었다. 보병을 영솔하는 자는 대당에 3명, 한산정에 3명, 귀당에 2명, 우수정에 2명, 완산정에 2명, 벽금당에 2명, 녹금당에 2명, 백금당에 2명, 황금당에 2명, 흑금당에 2명, 자금당에 2명, 적금당에 2명, 청금당에 2명, 비금당에 4명을 두었으니, 전부 70명으로서 모두 착금하였다. 관등은 나마로부터 아찬까지이다.


○弟監, <眞興王>二十三年置. 領大幢五人, 貴幢五人, <漢山>停四人, <牛首>停四人, <河西>停四人, <完山>停四人, 無衿. 碧衿幢四人, 綠衿幢四人, 白衿幢四人, 緋衿幢四人, 黃衿幢四人, 黑衿幢四人, 紫衿幢四人, 赤衿幢四人, 靑衿幢四人, 계衿一人, 共六十三人.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제감: 진흥왕 23년에 설치하였다. 영대당에 5명, 귀당에 5명, 한산정에 4명, 우수정에 4명, 하서정에 4명, 완산정에 4명이니 이들은 모두 무금이다. 벽금당에 4명, 녹금당에 4명, 백금당에 4명, 비금당에 4명, 황금당에 4명, 흑금당에 4명, 자금당에 4명, 적금당에 4명, 청금당에 4명, 계금에 1명이니 이들은 전부 63명으로서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監舍知, 共十九人, <法興王>十年置. 大幢一人, <上州>停一人, <漢山>停一人, <牛首>停一人, <河西>停一人, <完山>停一人, 碧衿幢一人, 綠衿幢一人, 白衿幢一人, 緋衿幢一人, 黃衿幢一人, 黑衿幢一人, 紫衿幢一人, 赤衿幢一人, 靑衿幢一人, 계衿幢一人, 白衿武幢一人, 赤衿武幢一人, 黃衿武幢一人, 無衿. 位自舍知至大舍爲之.


감사지: 전부 19명인데 법흥왕 10년에 설치하였다. 대당에 1명, 상주정에 1명, 한산정에 1명, 우수정에 1명, 하서정에 1명, 완산정에 1명, 벽금당에 1명, 녹금당에 1명, 백금당에 1명, 비금당에 1명, 황금당에 1명, 흑금당에 1명, 자금당에 1명, 적금당에 1명, 청금당에 1명, 계금당에 1명, 백금무당에 1명, 적금무당에 1명, 황금무당에 1명이니, 이들은 무금이었고,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少監, <眞興王>二十三年置. 大幢十五人, 貴幢十五人, <漢山>停十五人, <河西>□{停}??□{十}??二人, <牛首>停十三人, <完山>停十三人, 碧衿幢十三人, 綠衿幢十三人, 白衿幢十三人, 緋衿幢十三人, 黃衿幢十三人, 黑衿幢十三人, 紫衿幢十三人, 赤衿幢十三人, 靑衿幢十三人. 領騎兵: 音里火停二人, <古良夫里{古良夫里}>??停二人, <居斯勿>停二人, <參良火>停二人, <召參>停二人, <未多夫里>停二人, <南川>停二人, <骨乃斤>停二人, <伐力川>停二人, <伊火兮>停二人. 緋衿幢三人, 碧衿幢六人, 綠衿幢六人, 白衿幢六人, 黃衿幢六人, 黑衿幢六人, 紫衿幢六人, 赤衿幢六人, 靑衿幢六人, 계衿幢(+幢)??一{六}??人, <菁州>誓三人, <漢山州>誓三人, <完山州>誓三人. 領步兵: 大幢六人, <漢山>停六人, 貴幢四人, <牛首>停四人, <完山>停四人, 碧衿幢四人, 綠衿幢四人, 白衿幢四人, 黃衿幢四人, 黑衿幢四人, 紫衿幢四人, 赤衿幢四人, 靑衿幢四人, 緋衿幢八人, <菁州>誓九人, <漢山州>誓九人, <完山州>誓九人, 共三百七十二人. 六停無衿, 此外皆着衿. 位自大舍已下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소감: 진흥왕 23년에 설치하였다. 대당에 15명, 귀당에 15명, 한산정에 15명, 하서정에 12명, 우수정에 13명, 완산정에 13명, 벽금당에 13명, 녹금당에 13명, 백금당에 13명, 비금당에 13명, 황금당에 13명, 흑금당에 13명, 자금당에 13명, 적금당에 13명, 청금당에 13명을 두었다. 기병을 영솔하는 소감은 음리화정에 2명, 고량부리정에 2명, 거사물정에 2명, 삼량화정에 2명, 소삼정에 2명, 미다부리정에 2명, 남천정에 2명, 골내근정에 2명, 벌력천정에 2명, 이화혜정에 2명, 비금당에 3명, 벽금당에 6명, 녹금당에 6명, 백금당에 6명, 황금당에 6명, 흑금당에 6명, 자금당에 6명, 적금당에 6명, 청금당에 6명, 계금당에 1명, 청주서에 3명, 한산주서에 3명, 완산주서에 3명을 두었다. 보병을 영솔하는 소감은 대당에 6명, 한산정에 6명, 귀당에 4명, 우수정에 4명, 완산정에 4명, 벽금당에 4명, 녹금당에 4명, 백금당에 4명, 황금당에 4명, 흑금당에 4명, 자금당에 4명, 적금당에 4명, 청금당에 4명, 비금당에 8명, 청주서에 9명, 한산주서에 9명, 완산주서에 9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372명으로서 여섯 정에는 무금이며, 이 이외에는 모두 착금하였다. 관등은 대사로부터 그 이하까지이다.


○火尺, 大幢十五人, 貴幢十人, <漢山>停十人, <牛首>停十人, <河西>停十人, <完山>停十人, 綠衿幢十人, 緋衿幢十人, 紫衿幢十人, 白衿幢十三人, 黃衿幢十三人, 黑衿幢十三人, 碧衿幢十三人, 赤衿幢十三人, 靑衿幢十三人, 屬大官. 계衿七人, <音里火>停二人, <古良夫里>停二人, <居斯勿>停二人, <參良火>停二人, <召參>停二人, <未多夫里>停二人, <南川>停二人, <骨乃斤>停二人, <伐力川>停二人, <伊火兮>停二人, 碧衿幢六人, 綠衿幢六人, 白衿幢六人, 黃衿幢六人, 黑衿幢六人, 紫衿幢六人, 赤衿幢六人, 靑衿幢六人, <菁州>誓二人, <漢山州>誓二人, <完山州>誓二人, 領騎兵. 大幢六人, <漢山>停六人, 貴幢四人, <牛首>停四人, <完山>停四人, 碧衿幢四人, 綠衿幢四人, 白衿幢四人, 黃衿幢四人. 黑衿幢四人, 紫衿幢四人, 赤衿幢四人, 靑衿幢四人, 緋衿幢八人, 白衿武幢八人, 赤衿武幢八人, 黃衿武幢八人, 領步兵. 共三百四十二人, 位與少監同.


화척: 대당에 15명, 귀당에 10명, 한산정에 10명, 우수정에 10명, 하서정에 10명, 완산정에 10명, 녹금당에 10명, 비금당에 10명, 자금당에 10명, 백금당에 13명, 황금당에 13명, 흑금당에 13명, 벽금당에 13명, 적금당에 13명, 청금당에 13명이니 이들은 대관에 속하였으며, 계금에 7명, 음리화정에 2명, 고량부리정에 2명, 거사물정에 2명, 삼량화정에 2명, 소삼정에 2명, 미다부리정에 2명, 남천정에 2명, 골내근정에 2명, 벌력천정에 2명, 이화혜정에 2명, 벽금당에 6명, 녹금당에 6명, 백금당에 6명, 황금당에 6명, 흑금당에 6명, 자금당에 6명, 적금당에 6명, 청금당에 6명, 청주서에 2명, 한산주서에 2명, 완산주서에 2명을 두었다. 이들은 기병을 영솔하였다. 대당에 6명, 한산정에 6명, 귀당에 4명, 우수정에 4명, 완산정에 4명, 벽금당에 4명, 녹금당에 4명, 백금당에 4명, 황금당에 4명, 흑금당에 4명, 자금당에 4명, 적금당에 4명, 청금당에 4명, 비금당에 8명, 백금무당에 8명, 적금무당에 8명, 황금무당에 8명이니 이들은 보병을 영솔하였다. 이들은 모두 342명으로서 관등은 소감과 동일하다.


○軍師幢王{幢主}??, <法興王>十一年置. 王都一人, 無衿. 大幢一人, <上州>停一人, <漢山>停一人, <牛首>停一人, <河西>停一人, <完山>停一人, 碧衿幢一人, 綠衿幢一人, 緋衿幢一人, 白衿幢一人, 黃衿幢一人, 黑衿幢一人, 紫衿幢一人, 赤衿幢一人, 靑衿幢一人, 白衿武幢一人, 赤衿武幢一人, 黃衿武幢一人, 共十九人, 著衿. 位自奈麻至一吉찬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군사당주: 법흥왕 11년에 설치하였다. 서울에 1명을 두었으니, 무금이고, 대당에 1명, 상주정에 1명, 한산정에 1명, 우수정에 1명, 하서정에 1명, 완산정에 1명, 벽금당에 1명, 녹금당에 1명, 비금당에 1명, 백금당에 1명, 황금당에 1명, 흑금당에 1명, 자금당에 1명, 적금당에 1명, 청금당에 1명, 백금무당에 1명, 적금무당에 1명, 황금무당에 1명을 두었으니, 이들은 모두 19명으로서 착금하였다. 관등은 나마로부터 일길찬까지이다.


○六{大}??匠尺幢主, 大幢一人, <上州>停一人, <??山{漢山}>??停一人, <牛首>停一人, <河西>停一人, <完山>停一人, 碧衿幢一人, 綠衿幢一人, 緋衿幢一人, 白衿幢一人, 黃衿幢一人, 黑衿幢一人, 紫衿幢一人, 赤衿幢一人, 靑衿幢一人, 共十五人, 無衿. 位與軍師幢主同.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대장척당주: 대당에 1명, 상주정에 1명, 한산정에 1명, 우수정에 1명, 하서정에 1명, 완산정에 1명, 벽금당에 1명, 녹금당에 1명, 비금당에 1명, 백금당에 1명, 황금당에 1명, 흑금당에 1명, 자금당에 1명, 적금당에 1명, 청금당에 1명을 두었으니, 모두 15명으로서 무금이었다. 관등은 군사당주와 동일하다.


○步騎幢主, 王都一人, 無衿. 大幢六人, <漢山>六人, 貴幢四人, <牛首州>四人, <完山州>四人, 碧衿幢四人, 綠衿幢四人, 白衿幢四人, 黃衿幢四人, 黑衿幢四人, 紫衿幢四人, 赤衿幢四人, 靑衿幢四人, 白衿武幢二人, 赤衿武幢二人, 黃衿武幢一{二}??人, 共六十三人, 位自奈麻至沙찬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보기당주: 서울에 1명을 두었으니 무금이었다. 대당에 6명, 한산에 6명, 귀당에 4명, 우수주에 4명, 완산주에 4명, 벽금당에 4명, 녹금당에 4명, 백금당에 4명, 황금당에 4명, 흑금당에 4명, 자금당에 4명, 적금당에 4명, 청금당에 4명, 백금무당에 2명, 적금무당에 2명, 황금무당에 1명을 두었으니 모두 63명이다. 관등은 나마로부터 사찬까지이다.


○三千幢主, <音里水{音里火}>??停六人, <古良夫里>停六人, <居斯勿>停六人, <參良火>停六人, <召參>停六人, <未多夫里>停六人, <南州{南川}>??停六人, <骨乃斤>停六人, <伐力川>停六人, <伊伐兮>停六人, 共六十人, 著衿. 位自舍知至沙찬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삼천당주: 음리화정에 6명, 고량부리정에 6명, 거사물정에 6명, 삼량화정에 6명, 소삼정에 6명, 미다부리정에 6명, 남천정에 6명, 골내근정에 6명, 벌력천정에 6명, 이벌혜정에 6명을 두었으니 전부 60명으로서 착금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사찬까지이다.


○著衿騎幢主, 碧衿幢十八人, 綠衿幢十八人, 白衿幢十八人, 黃衿幢十八人, 黑衿幢十八人, 紫衿幢十八人, 赤衿幢十八人, 靑衿幢十八人, 계심{衿}??(+幢)??六人, <菁州>六人, <完山州>六人, <漢山州>六人, <河西州>四人, <牛首>幢三人, 四千幢三人, 共一百七十八人, 位與三千幢主同.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착금기병당주: 벽금당에 18명, 녹금당에 18명, 백금당에 18명, 황금당에 18명, 흑금당에 18명, 자금당에 18명, 적금당에 18명, 청금당에 18명, 계금당에 6명, 청주에 6명, 완산주에 6명, 한산주에 6명, 하서주에 4명, 우수당에 3명, 사천당에 3명을 두었으니 모두 178명으로서 관등은 삼천당주와 동일하다.


○緋衿幢主, 四十人, <沙伐州>三人, <삽良州>三人, <菁州>三人, <漢山州>二人, <牛首州>六人, <河西州>六人, <熊川州>五人, <完山州>四人, <武珍州>八人, 共四十人, 著衿. 位自舍知至沙찬爲之.


비금당주: 모두 40명이다. 사벌주에 3명, 삽량주에 3명, 청주에 3명, 한산주에 2명, 우수주에 6명, 하서주에 6명, 웅천주에 5명, 완산주에 4명, 무진주에 8명이니 모두 40명으로서 착금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사찬까지이다.


○師子衿幢主, 王都三人, <沙伐州>三人, <삽良州>三人, <菁州>三人, <漢山州>三人, <牛首州>三人, <河西州>三人, <熊川州>三人, <完山州>三人, <武珍州>三人, 共三十人, 著심{衿}??. 位自舍知至一吉찬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사자금당주: 서울에 3명, 사벌주에 3명, 삽량주에 3명, 청주에 3명, 한산주에 3명, 우수주에 3명, 하서주에 3명, 웅천주에 3명, 완산주에 3명, 무진주에 3명이니 전부 30명으로서 착금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일길찬까지이다.


○法幢主, 百官幢主三十人, 京餘甲幢主十五人, 小京餘甲幢主十六人, 外餘甲幢主五十二人, 弩幢主十五人, 雲梯幢主六人, 衝幢主十二人, 石投幢主十二人, 共一百五十八人, 無衿.


법당주: 백관당주가 30명, 경여갑 당주가 15명, 소경여갑 당주가 16명, 외경여갑 당주가 52명, 노당주가 15명, 운제당주가 6명, 충당주가 12명, 석투당주가 12명이니 모두 158명으로서 무금이다.


○黑衣長槍末步幢主, 大幢三十人, 貴幢二十二人, <漢山>二十八人, <牛首>二十人, <完山>二十人, 紫衿二十人, 黃衿二十人, 黑衿二十人, 碧衿二十人, 赤衿二十人, 靑衿二十人, 綠衿二十四人, 共二百六十四人, 位自舍知至級찬爲之.


흑의장창말보당주: 대당에 30명, 귀당에 22명, 한산에 28명, 우수에 20명, 완산에 20명, 자금에 20명, 황금에 20명, 흑금에 20명, 벽금에 20명, 적금에 20명, 청금에 20명, 녹금에 24명이니 전부 264명으로서 관등은 사지로부터 급찬까지이다.


○三武幢主, 白衿武幢十六人, 赤衿武幢十六人, 黃衿武幢十六人, 共四十八人, 位與末步幢主同.


삼무당주: 백금무당에 16명, 적금무당에 16명, 황금무당에 16명이니 전부 48명으로서 관등은 말보당주와 동일하다.


○萬步幢主, 京五種幢主十五人, 節末幢主四人, 九州萬步幢主十八人, 共三十七人, 無衿.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만보당주: 경오종당주가 15명, 절말당주가 4명, 구주만보당주가 18명이니 전부 37명으로서 무금이이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軍師監, 王都二人, 無衿. 大幢二人, <上州>停二人, <漢山>停二人, <牛首>停二人, <河西>停二人, <完山>停二人, 碧衿幢二人, 綠衿幢二人, 緋衿幢二人, 白衿幢二人, 黃衿幢二人, 黑衿幢二人, 紫衿幢二人, 赤衿幢二人, 靑衿幢二人, 共三十二人, 著衿. 位自舍知至奈麻爲之.


군사감: 서울에 2명을 두었으니 무금이고, 대당에 2명, 상주정에 2명, 한산정에 2명, 우수정에 2명, 하서정에 2명, 완산정에 2명, 벽금당에 2명, 녹금당에 2명, 비금당에 2명, 백금당에 2명, 황금당에 2명, 흑금당에 2명, 자금당에 2명, 적금당에 2명, 청금당에 2명이니 전부 32명으로서 착금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大匠大{尺}??監, 大幢一人, <上州>停一人, <漢山>停一人, <牛首>停一人, <河西>停一人, <完山>停一人, 碧衿幢一人, 綠衿幢一人, 緋衿幢一人, 白衿幢一人, 黃衿幢一人, 黑衿幢一人, 紫衿幢一人, 赤衿幢一人, 靑衿幢一人, 共十五人, 無衿.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대장대감: 대당에 1명, 상주정에 1명, 한산정에 1명, 우수정에 1명, 하서정에 1명, 완산정에 1명, 벽금당에 1명, 녹금당에 1명, 비금당에 1명, 백금당에 1명, 황금당에 1명, 흑금당에 1명, 자금당에 1명, 적금당에 1명, 청금당에 1명을 두었으니 전부 15명으로서 무금이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步騎監, 六十三人, 王都一人, 大幢六人, <漢山>六人, 貴幢四人, <牛首>四人, <完山>四人, 碧衿幢四人, 綠衿幢四人, 白衿幢四人, 黃衿幢四人, 黑衿幢四人, 紫衿幢四人, 赤衿幢四人, 靑衿幢四人, 白衿武幢二人, 赤衿武幢二人, 黃衿武幢二人, 著衿. 共六十三人, 位與軍師監同.


보기감: 모두 63명이다. 서울에 1명, 대당에 6명, 한산에 6명, 귀당에 4명, 우수에 4명, 완산에 4명, 벽금당에 4명, 녹금당에 4명, 백금당에 4명, 황금당에 4명, 흑금당에 4명, 자금당에 4명, 적금당에 4명, 청금당에 4명, 백금무당에 2명, 적금무당에 2명, 황금무당에 2명이니 착금하였다. 전부 63명으로서 관등은 군사감과 동일하다.


○三千監, <音里水>停六人, <古良夫里>停六人, <居斯勿>停六人, <參良火>停六人, <召參>停六人, <未多夫里>停六人, <南川>停六人, <骨乃斤>停六人, <伐力川>停六人, <伊火兮>停六人, 共六十人, 著衿.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삼천감: 음리화정에 6명, 고량부리정에 6명, 거사물정에 6명, 삼량화정에 6명, 소삼정에 6명, 미다부리정에 6명, 남천정에 6명, 골내근정에 6명, 벌력천정에 6명, 이화혜정에 6명을 두었으니 전부 60명으로서 착금하였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師子衿幢監, 三十人, 位自幢至奈麻爲之.


사자금당감: 30명이다. 관등은 당으로부터 나마까지이다.


○法幢監, 百官幢三十人, 京餘甲幢十五人, 外餘甲幢六十八人, 石投幢十二人, 衝幢十二人, 弩幢四十五人, 雲梯幢十二人, 共一百九十四人, 無衿. 位自舍知至奈麻爲之.


법당감: 백관당이 30명, 경여갑당이 15명, 외여갑당이 68명, 석투당이 12명, 충당이 12명, 노당이 45명, 운제당이 12명이니 전부 194명으로서 무금이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緋衿監, 四十八人, 領幢四十人, 領馬兵八人.


비금감: 모두 48명으로서 영당이 40명, 영마병이 8명이다.


○著衿監, 碧衿幢十八人, 綠衿幢十八人, 白衿幢十八人, 黃衿幢十八人, 黑衿幢十八人, 紫衿幢十八人, 赤衿幢十八人, 靑衿幢十八人, 계衿六人, <靑州>六人, <漢山>六人, <完山>六人, <河西>三人, <牛首>幢三人, 四子{千}??幢三人, 共一百七十五人, 位自幢至奈麻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착금감: 벽금당에 18명, 녹금당에 18명, 백금당에 18명, 황금당에 18명, 흑금당에 18명, 자금당에 18명, 적금당에 18명, 청금당에 18명, 계금에 6명, 청주에 6명, 한산에 6명, 완산에 6명, 하서에 3명, 우수당에 3명, 사천당에 3명이니 전부 175명이다. 관등은 당으로부터 나마까지이다.


○皆知戟幢監, 四人, 병王都, 位自舍知至奈麻爲之.


개지극당감: 4명으로서 모두 서울에 있었다. 관등은 사지로부터 나마까지이다.


○法幢頭上, 百九十二人, 餘甲幢四十五人, 外法幢百二人, 弩幢四十五人.


법당두상: 192명이니, 여갑당에 45명, 외법당에 102명, 노당에 45명을 두었다.


○法幢火尺, 軍師幢三十人, 師子衿幢二十人, 京餘甲幢十五人, 外餘甲幢百二人, 弩幢四十五人, 雲梯幢十一人, 衝幢十八人, 石投幢十八人, 共二百五十九人.


법당화척: 군사당에 30명, 사자금당에 20명, 경여갑당에 15명, 외여갑당에 102명, 노당에 45명, 운제당에 11명, 충당에 18명, 석투당에 18명이니 전부 259명을 두었다.


○法幢벽主, 餘甲幢四十五人, 外法幢三百六人, 弩幢百三十五人, 共四百八十六人.


법당벽주: 여갑당에 45명, 외법당에 306명, 노당에 135명이니 전부 486명을 두었다.


○三千卒, 百五十人, 位自大奈麻已下爲之.


삼천졸: 모두 150명이다. 관등은 대나마로부터 그 이하이다.


○凡軍號, 二十三. 一曰六停, 二曰九誓幢, 三曰十幢, 四曰五州誓, 五曰三武幢, 六曰계衿幢, 七曰急幢, 八曰四千幢, 九曰京五種幢, 十曰二節末幢, 十一曰萬步幢, 十二曰大匠尺幢, 十三曰軍師幢, 十四曰仲幢, 十五曰百官幢, 十六曰四設幢, 十七曰皆知戟幢, 十八曰三十九餘甲幢, 十九曰仇七幢, 二十曰二계, 二十一曰二弓, 二十二曰三邊守, 二十三曰新三千幢.


모든 군사의 칭호는 23종이었다. 1은 육정, 2는 구서당, 3은 십당, 4는 오주서, 5는 삼무당, 6은 계금당, 7은 급당, 8은 사천당, 9는 경오종당, 10은 이절말당, 11은 만보당, 12는 대장척당, 13은 군사당, 14는 중당, 15는 백관당, 16은 사설당, 17은 개지극당, 18은 삼십구여갑당, 19는 구칠당, 20은 이계, 21은 이궁, 22는 삼변수, 23은 신삼천당이라 한다.


○六停: 一曰大幢, <眞興王>五年始置, 衿色紫白; 二曰<上州>停, <眞興王>十三年置, 至<文武王>十三年, 改爲貴幢, 衿色靑赤; 三曰<漢山>停, 本<新州>停, <眞興王>二十九年, 罷<新州>停, 置<南川>停, <眞平王>二十六年, 罷<南川>停, 置<漢山>停, 衿色黃靑; 四曰<牛首>停, 本<比烈忽>停, <文武王>十三年, 罷<比烈忽>停, 置<牛首>停, 衿色綠白; 五曰<河西>停, 本<悉直>停, <太宗王>五年, 罷<悉直>停, 置<河西>停, 衿色綠白; 六曰<完山>停, 本<下州>停, <神文王>五年, 罷<下州>停, 置<完山>停, 衿色白紫.


육정: 1은 대당이라하여 진흥왕 5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띠의 색깔은 자백색이다. 2는 상주정으로서 진흥왕 13년에 설치하였다가 문무왕 13년에 귀당으로 고쳤는데 띠의 색깔은 청적색이다. 3은 한산정으로서 원래의 신주정이다. 진흥왕 29년에 신주정을 폐지하여 남천정을 설치하였다가 진평왕 26년에 남천정을 폐지하여 한산정을 설치하였는데 띠의 색깔은 황청색이다. 4는 우수정으로서 원래의 비열홀정이다. 문무왕 13년에 비열홀정을 폐지하여 우수정을 설치하였는데 띠의 색깔은 녹백색이다. 5는 하서정으로서 원래의 실직정이다. 태종왕 5년에 실직정을 폐지하여 하서정을 설치하였는데 띠의 색깔은 녹백색이다. 6은 완산정으로서 원래의 하주정이다. 신문왕 5년에 하주정을 폐지하여 완산정을 설치하였는데 띠의 색깔은 백자색이다.


○九誓幢: 一曰綠衿誓幢, <眞平王>五年始置, 但名誓幢, 三十五年, 改爲綠衿誓幢, 衿色綠紫; 二曰紫衿誓幢, <眞平王>四十七年, 始置郞幢, <文武王>十七年, 改爲紫衿誓幢, 衿色紫綠; 三曰白衿誓幢, <文武王>十二年, 以<百濟>民爲幢, 衿色白靑; 四曰緋衿誓幢, <文武王>十二年, 始置長槍幢, <孝昭王{孝照王}>??二年, 改爲緋衿誓幢; 五曰黃衿誓幢, <神文王>三年, 以<高句麗>民爲幢, 衿色黃赤; 六曰黑衿誓幢, <神文王>三年, 以<靺鞨國>民爲幢, 衿色黑赤; 七曰碧衿誓幢, <神文王>六年, 以<報德城>民爲幢, 衿色碧黃; 八曰赤衿誓幢, <神文王>六年, 又以<報德城>民爲幢, 衿色赤黑; 九曰靑衿誓幢, <神文王>七年, (+又)??以<百濟>殘民爲幢, 衿色靑白.


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趙炳舜. 『三國史節要』.

구서당: 1은 녹금서당으로서 진평왕 5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서당으로만 부르다가 35년에 녹금서당으로 고쳤는데 띠의 색깔은 녹자색이다. 2는 자금서당으로서 진평왕 47년에 처음으로 낭당을 설치하였다가 문무왕 17년에 자금서당으로 고쳤는데 띠의 색깔은 자녹색이다. 3은 백금서당으로서 문무왕 12년에 백제 사람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띠의 색깔은 백청색이다. 4는 비금서당으로서 문무왕 12년에 처음으로 장창당을 설치하였다가 효소왕 2년에 비금서당으로 개칭한 것이다. 5는 황금서당으로서 신문왕 3년에 고구려 사람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띠의 색깔은 황적색이다. 6은 흑금서당으로서 신문왕 3년에 말갈국 사람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띠의 색깔은 흑적색이다. 7은 벽금서당으로서 신문왕 6년에 보덕성 사람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띠의 색깔은 벽황색이다. 8은 적금서당으로서 신문왕 6년에 역시 보덕성 사람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띠의 색깔은 적흑색이다. 9는 청금서당으로서 신문왕 7년에 백제의 남은 백성으로 당을 만들었는데 띠의 색깔은 청백색이다.


○十停[或云三千幢.]: 一曰<音里火>停, 二曰<古良夫里>停, 三曰<居斯勿>停, 衿色靑; 四曰<參良火>停, 五曰<召參>停, 六曰<未多夫里>停, 衿色黑; 七曰<南川>停, 八曰<骨乃斤>停, 衿色黃; 九曰<伐力川>停, 十曰<伊火兮>停, 衿色綠. 병<眞興王>五年置.


십정[혹은 삼천당이라 한다.]: 1은 음리화정, 2는 고량부리정, 3은 거사물정이니 띠의 색깔은 청색이다. 4는 삼량화정, 5는 소삼정, 6은 미다부리정이니 띠의 색깔은 흑색이다. 7은 남천정, 8은 골내근정이니 띠의 색깔은 황색이다. 9는 벌력천정, 10은 이화혜정이니 띠의 색깔은 녹색이다. 모두 진흥왕 5년에 설치하였다.


○五州誓: 一曰<菁州>誓, 二曰<完山州>誓, 三曰<漢山州>誓, 衿色紫綠; 四曰<牛首州>誓, 五曰<河西州>誓, 衿色綠紫. 병<文武王>十二年置.


오주서: 1은 청주서, 2는 완산서, 3은 한산주서이니 띠의 색깔은 자녹색이다. 4는 우수주서, 5는 하서주서이니 띠의 색깔은 녹자색이다. 모두 문무왕 12년에 설치하였다.


○三武幢: 一曰白衿武幢, <文武王>十五年置; 二曰赤衿武幢, <神文王>七年置; 三曰黃衿武幢, 九年置.


삼무당: 1은 백금무당이니 문무왕 15년에 설치하였으며, 2는 적금무당이니 신문왕 7년에 설치하였으며, 3은 황금무당이니 신문왕 9년에 설치하였다.


○계衿幢, <太宗王>元年置, 衿色계.


계금당: 태종왕 원년에 설치하였고 띠는 계색이다.


○急幢, <眞平王>二十七年置, 衿色黃綠.


급당: 진평왕 27년에 설치하였고 띠는 황녹색이다.


○四千幢, <眞平王>十三年置, 衿色黃黑.


사천당: 진평왕 13년에 설치하였고 띠는 황흑색이다.


○京五種幢, 衿色, 一靑綠, 二赤紫, 三黃白, 四白黑, 五黑靑.


경오종당: 띠의 색깔이, 1은 청녹색, 2는 적자색, 3은 황백색, 4는 백흑색, 5는 흑청색이다.


○二節未{末}??幢, 衿色, 一綠紫, 二紫綠.


『북한본』.

이절말당: 띠의 색깔이, 1은 녹자색, 2는 자녹색이다.


○萬步幢, 九州各二. 衿色, <沙伐州>, 靑黃靑紫; <삽良州>, 赤靑赤白; <菁州>, 赤黃赤綠; <漢山州>, 黃黑黃綠; <牛首州>, 黑綠黑白; <熊川州>, 黃紫黃靑; <河西州>, 靑黑靑赤; <武珍州>, 白赤白黃.


만보당: 9주에 각각 2개씩 있었다. 띠의 색깔이 사벌주는 청황색과 청자색, 삽량주는 적청색과 적백색, 청주는 적황색과 적녹색, 한산주는 황흑색과 황녹색, 우수주는 흑녹색과 흑백색, 웅천주는 황자색과 황청색, 하서주는 청흑색과 청적색, 무진주는 백적색과 백황색이다.


○大匠尺幢, 無衿.


대장척당: 띠는 없다.


○軍師幢, <眞平王>二十六年始置, 衿色白.


군사당: 진평왕 26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띠의 색깔은 백색이다.


○仲幢, <文武王>十一年始置, 衿色白.


중당: 문무왕 11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띠의 색깔은 백색이다.


○百官幢, 無衿.


백관당: 띠는 없다.


○四設幢: 一曰弩幢, 二曰雲梯幢, 三曰衝幢, 四曰石投幢, 無衿.


사설당: 1은 노당, 2는 운제당, 3은 충당, 4는 석투당이다. 띠는 없다.


○皆知戟幢, <神文王>十年始置, 衿色黑赤白.


개지극당: 신문왕 10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띠의 색깔은 흑색과 적색과 백색이다.


○三十九餘甲幢, 無衿[謂京餘甲·小京餘甲·外餘甲等也, 其數未詳.]


삼십구여갑당: 띠는 없다[경여갑, 소경여갑, 외여갑 등을 말한 것이나 그 수는 분명치 않다.]


○仇七幢, <文武王>十六年始置, 衿色白.


구칠당: 문무왕 16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띠의 색깔은 백색이다.


○二계幢[或云外계.]: 一曰<漢山州>계幢, <太宗王>&十七{元}??年置; 二曰<牛首州>계幢, <文武王>十二年置. 衿色皆계.


趙炳舜. 『三國史節要』.

이계당[혹은 외계라 한다.]: 1은 한산주계당이니 태종왕 17년에 설치하였으며, 2는 우수주계당이니 문무왕 12년에 설치하였다. 띠는 모두 계색이다.


○二弓[或云外弓.]: 一曰<漢山州>弓尺, <眞德王>六年置; 二曰<河西州>弓尺, <眞平王>二十年置. 無衿.


이궁[혹은 외궁이라 한다.]: 1은 한산주 궁척이니 진덕왕 6년에 설치하였으며, 2는 하서주궁척이니 진평왕 20년에 설치하였다. 띠는 없다.


○三邊守幢[一云邊守.], <神文王>十年置: 一曰漢山邊, 二曰牛首邊, 三曰河西邊. 無衿.


삼변수당[변수라고도 한다.]: 신문왕 10년에 설치하였다. 1은 한산변, 2는 우수변, 3은 하서변이다. 띠는 없다.


○新三千幢[一云外三千.]: 一曰<牛首州>三千幢, 二曰<奈吐郡>三千幢, <文武王>十二年置, 三曰<奈生郡>三千幢, 十六年置. 衿色未詳.


신삼천당[외삼천이라고도 한다.]: 1은 우수주삼천당, 2는 나토군삼천당이니 문무왕 12년에 설치하였으며, 3은 나생군삼천당이니 문무왕 16년에 설치하였다. 띠의 색깔은 분명치 않다.


○衿, 蓋『書傳』所謂徽織. 『詩』云: "織文鳥章." 箋云: "織, 徽織也. 鳥章, 鳥集之文章. 將帥以下, 衣皆著焉." 『史記』·『漢書』, 謂之旗熾. 熾與織, 字異音同. 『周禮』司常九旗, 所畵異物者, 徽織, 所以相別. 在國以表朝位, 在軍又象其制而爲之, 被之以備死事. <羅>人徽織, 以靑赤等色爲別者, 其形象半月, 계亦著於衣上, 其長短之制未詳.


금(衿)이란 대략 「좌전」에서 말하는 띠의 표식이다. 「시경」에 "織文鳥章"이라 하였는데, 그 주석에 "織은 수를 놓아 짠 직물이며, 鳥章은 새나 새매의 무늬이니 장수 이하가 모두 옷에 그러한 무늬를 달았다."고 되어 있다. 「사기」와 「한서」에는 기치(旗幟)라고 하였는데, 치(幟)와 직(織)은 글자는 다르지만 음은 동일하다. 「주례」 사상조(司常條)의 아홉 가지 깃발에 그린 여러가지 물건은 각각의 상징을 나타낸 것인데, 이로써 각각의 소속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 있어서는 조정의 지위를 표시하고, 군사에서는 그 조직을 상징한 것으로써 그것을 입고 전투에 대비하였다. 신라 사람은 띠를 청홍색으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계)는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장단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大將軍花, 三副, 長九寸, 廣三寸三分. 上將軍花, 四副, 長九寸五分. 下將軍花, 五副, 長一尺. 大監花, 大虎頰皮, 長九寸, 廣二寸五分, 鈴黃金, 圓一尺二寸. 弟監花, 熊頰皮, 長八寸五分, 鈴白銀, 圓九寸. 少監花, 鷲尾, 鈴白銅, 圓六寸. 火尺花, 與少監同, 鈴鐵, 圓二寸. 軍師幢主花, 大虎尾, 長一尺八寸. 軍師監花, 熊胸皮, 長八寸五分. 大匠尺幢主花, 熊臂皮, 長七寸[一云中虎額皮, 長八寸五分.], 鈴黃金, 圓九寸. 三千幢主花, 大虎尾, 長一尺八寸. 三千監花, 鷲尾. 諸著衿幢主花, 大虎尾, 長一尺八寸五分. 花以猛獸皮若鷲鳥羽作之, 置강上. 若所謂豹尾者, 今人謂之面槍. 將軍花, 不言物名. 其數或多或少, 其義未詳. 鈴, 行路置馱馬上, 或云鐸.


대장군화는 세 쪽으로 되어 있으며 길이가 9치, 너비가 3치 3푼이다. 상장군화는 네 쪽으로 되어 있으며 길이가 9치 5푼이다. 하장군화는 다섯 쪽으로 되어 있으며 길이가 1자이다. 대감화는 큰 호랑이의 얼굴 가죽인데 길이가 9치, 너비가 2치 5푼이고 방울은 황금인데 둘레가 1자 2치이다. 제감화는 곰의 얼굴 가죽인데 길이가 8치 5푼, 방울은 백은인데 둘레가 9치이다. 소감화는 독수리 꼬리이고, 방울은 백동인데 둘레가 6치이다. 화척화는 소감과 같고 방울은 철인데 둘레가 2치이다. 군사당주화는 큰 호랑이의 꼬리인데 길이가 1자 8치이다. 군사감화는 곰의 가슴 가죽인데 길이가 8치 5푼이다. 대장척당주화는 곰의 어깨 가죽인데 길이가 7치[혹은 중 호랑이의 이마 가죽인데 길이가 8치 5푼이라고도 한다.]이고, 방울은 황금인데 둘레가 9치이다. 삼천당주화는 큰 호랑이의 꼬리인데 길이가 1자 8치이다. 삼천감화는 독수리 꼬리이다. 모든 착금당주화는 큰 호랑이의 꼬리인데 길이가 1자 8치 5푼이다. 화는 맹수의 가죽이나 독수리의 깃으로 만들어 깃대 위에 다는 것이니, 소위 표범의 꼬리 같은 것으로서, 지금 사람들은 면창이라고 한다. 장군화는 어떤 것을 사용하는지를 말하지 않았으며, 그 수도 혹은 많고 혹은 적은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령(鈴)은 길을 갈 때 말에 매다는 것인데 탁(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政官[或云政法典.], 始以大舍一人, 史二人爲司, 至<元聖王>元年, 初置僧官, 簡僧中有才行者, 充之, 有故則遞, 無定年限.


정관[혹은 정법전이라 한다.]: 처음에는 대사 1명과 사 2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원성왕 원년에 처음으로 승관을 두고, 중 가운데에서 재주와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이에 충당하되, 사고가 있으면 교체하였고 근무기한은 정하지 않았다.


○國統{僧統}??, 一人[一云寺主.], <眞興王>十二年, 以<高句麗><惠亮>法師爲寺主. 都唯那娘一人, 阿尼大都唯那一人. <眞興王>始以<寶良>法師爲之, <眞德王>元年加一人. 大書省, 一人, <眞興王>以<安臧>法師爲之, <眞德王>元年, 加一人. 少年書省, 二人, <元聖王>三年, 以<惠英>·<梵如>二法師爲之.


趙炳舜. 『三國史記』 列傳, 『三國史節要』.

국통은 1명[사주라고도 한다.]이니, 진흥왕 12년에 고구려의 혜량법사를 사주로 삼았다. 도유나랑 1명, 아니대도유나 1명을 두었다. 진흥왕 때 처음으로 보량법사를 이에 임명하였다. 진덕왕 원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대서성은 1명인데 진흥왕 때 안장법사를 이에 임명하였고, 진덕왕 원년에 1명을 증원하였다. 소년서성은 2명인데 원성왕 3년에 혜영과 범여 두 법사를 이에 임명하였다.


○州統, 九人; 郡統, 十八人.


주통은 9명, 군통은 10명을 두었다.


外官.


외관


○都督九人, <智證王>六年, 以<異斯夫>爲<悉直州>軍主, <文武王>元年, 改爲摠管, <元聖王>元年, 稱都督. 位自級찬至伊찬爲之. 仕{使}??臣[或云仕大等.]五人, <眞興王>二十五年始置, 位自級찬至波珍찬爲之. 州助[或云州輔.]九人, 位自奈麻至重阿찬爲之. 郡大守{太守}??百十五人, 位自舍知至重阿찬爲之. 長史[或云司馬.]九人,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仕大舍[或云少尹.]五人,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外司正百三十三人, <文武王>十三年置, 位未詳. 少守[或云制守.]八十五人, 位自幢至大奈麻爲之. 縣令二百一人, 位自先沮知至沙찬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도독: 9명이다. 지증왕 6년에 이사부를 실직주 군주로 삼았고, 문무왕 원년에 총관으로 개칭하였다가 원성왕 원년에 도독이라고 하였다.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이찬까지이다. 사신[혹은 사대등이라 한다.] 5명을 진흥왕 25년에 처음으로 두었다.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파진찬까지이다. 주조[혹은 주보라 한다.]는 9명인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중아찬까지이다. 군태수는 115명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중아찬까지이다. 장사[혹은 사마라 한다.]는 9명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사대사[혹은 소윤이라 한다.]는 5명인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외사정은 133명인데 문무왕 13년에 두었고, 관등은 분명치 않다. 소수[혹은 제수라 한다.]는 85명인데 관등은 당으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현령은 201명인데 관등은 선저지로부터 사찬까지이다.


○浿江鎭典.


패강진전


○頭上大監一人, <宣德王>三年, 始置大谷城頭上, 位白{自}??級찬至四重阿찬爲之. 大監七人, 位與太守同. 頭上弟監一人, 位自舍知至大奈麻爲之. 弟監一人, 位自幢至奈麻爲之. 步監一人, 位與縣令同. 少監六人, 位自先沮知至大舍爲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두상대감 1명을 두었다. 선덕왕 3년에 처음으로 대곡성두상을 두었고, 관등은 급찬으로부터 사중아찬까지이다. 대감 7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태수와 동일하다. 두상제감 1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사지로부터 대나마까지이다. 제감 1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당으로부터 나마까지이다. 보감 1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현령과 동일하다. 소감 6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선저지로부터 대사까지이다.


○外位, <文武王>十四年, 以六徒眞骨出居??{於}??五京九州, 別稱官名, 其位視京位. 嶽干視一吉찬, 述干視沙찬, 高干視級찬, 貴于{貴干}??視大奈麻, 選干[一作撰干]視奈麻, 上干視大舍, 干視舍知. 一伐視吉次, 彼日視小烏, 阿尺視先沮知.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외위: 문무왕 14년에 여섯 도(徒)의 진골로서 5경과 9주에 나가 있던 관직의 별칭이다. 관등은 서울에 있는 관등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악간은 일길찬에 준하고, 술간은 사찬에 준하고, 고간은 급찬에 준하고, 귀간은 대나마에 준하고, 선간[찬간이라고도 한다.]은 나마에 준하고, 상간은 대사에 준하고, 간은 사지에 준하고, 일벌은 길차에 준하고, 피일은 소오에 준하고, 아척은 선저지에 준한다.


○<高句麗>人位, <神文王>六年, 以<高句麗>人授京官, 量本國官品授之. 一吉찬本主簿, 沙찬本大相, 級찬本位頭大兄·從大相, 奈麻本小相·狄相, 大舍本小兄, 舍知本諸兄, 吉次本先人, 烏知本自位.


고구려 사람들에게 주는 관등: 신문왕 6년에 고구려 사람들에게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고구려의 관품에 준하였다. 일길찬은 고구려의 주부, 사찬은 고구려의 대상, 급찬은 고구려의 위두대형과 종대상, 나마는 고구려의 소상과 적상, 대사는 고구려의 소형, 사지는 고구려의 제형, 길차는 고구려의 선인, 오지는 고구려의 조위에 준하도록 하였다.


○<百濟>人位, <文武王>十三年, 以<百濟>來人授內外官, 其位次視在本國官銜. 京官: 大奈麻本達率, 奈麻本恩率, 大舍本德率, 舍知本한率, 幢本奈率, 大烏本將德. 外官: 貴干本達率, 選干本恩率, 上干本德率, 干本한率, 一伐本奈率, 一尺本將德.


백제 사람들에게 주는 관등: 문무왕 1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관등은 백제의 관직에 준하였다. 경관으로서 대나마는 백제의 달솔, 나마는 백제의 은솔, 대사는 백제의 덕솔, 사지는 백제의 한솔, 당은 백제의 나솔, 대오는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외관으로서 귀간은 백제의 달솔, 선간은 백제의 은솔, 상간은 백제의 덕솔, 간은 백제의 한솔, 일벌은 백제의 나솔, 일척은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其官銜見於雜傳記, 而未詳其設官之始及位之高下者, 書之於後.


관직명이 여러 전기에 보이는데, 그 관직을 두었던 시기와 관등의 고하가 분명치 않은 것을 다음에 기록한다.


○葛文王·檢校尙書·左僕射·上柱國·知元鳳省事·興文監卿·大子{太子}??侍書學士·元鳳省待詔·記室郞·瑞書郞·孔子廟堂大舍錄事·參軍·右衛將軍·功德司·節度使·安撫諸軍事·州都令·佐·丞·上舍人·下舍人·中事省·南邊第一.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갈문왕. 검교상서. 좌복야. 상주국. 지원봉성사. 흥문감경. 태자시서학사. 원봉성대조. 기실랑. 서서랑. 공자묘당대사록사. 참군. 우위장군. 공덕사. 절도사. 안무제군사. 주도령, 좌, 승. 상사인. 하사인. 중사성. 남변제일.


○<高句麗>·<百濟>職官, 年代久遠, 文墨晦昧. 是故不得詳悉, 今但以其著於古記及<中國>史書者, 爲之志.


고구려와 백제의 관직은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기록이 모호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이제 다만 고기와 중국의 사서에 나타나 있는 것을 기록하여 지(志)를 만든다.


○『隋書』云:"<高句麗>官, 有太大兄·次大兄·次小兄·次對盧·次意侯奢·次烏拙·次太大使者·次大使者·次小使者·次褥奢·次예屬·次仙人, 凡十二木{等}??, 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수서」에는 "고구려 관직에 태대형이 있고, 다음은 대형, 다음은 소형, 다음은 대로, 다음은 의후사, 다음은 오졸, 다음은 태다사자, 다음은 대사자, 다음은 소사자, 다음은 욕사, 다음은 예속, 다음은 선인 등 12등급이 있으며 또한 내평, 외평과 5부욕살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新唐書』云: "<高句麗>官凡十二級: 曰大對盧, 或曰吐□{졸}??, 曰鬱折, 主圖簿者. 曰太大使者. 曰조衣頭大兄, 所謂조衣者, 仙人也, ??{秉}??國政, 三歲一易, 善職則否. 凡代日, 有不服則相攻, 王爲閉宮守, 勝者聽爲之. 曰大使者, 曰大兄, 曰上位使者, 曰諸兄, 曰小使者, 曰過節, 曰先人, 曰古鄒大加." 又云: "莫離支·大莫離支·中裏小兄·中裏大兄."


趙炳舜. 『新唐書』.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신당서」에는 "고구려의 관직은 12등급이 있는데, 첫째는 대대로 혹은 돌졸이라 하며, 다음은 울절이니 도서와 문부를 주관한다. 다음은 태대사자라 한다. 다음은 조의두대형이니 이른바 조의란 곧 선인으로서 국정을 담당하는데, 3년에 한번씩 교체하되 직책을 잘 처리하면 교체하지 않는다. 대체로 교대하는 날 복종하지 않는 경우에는 서로 공격을 하는데, 왕은 대궐문을 닫고 지키다가 승리하는 자에게 정권을 맡긴다. 다음은 대사자, 다음은 대형, 다음은 상위사자, 다음은 제형, 다음은 소사자, 다음은 과절, 다음은 선인, 다음은 고추대가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막리지, 대막리지, 중리소형, 중리대형이라는 관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冊府元龜』云: "<高句麗>, <後漢>時其國置官, 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古鄒大加, <高句麗>掌賓客之官, 如大鴻려也.]·主簿·優[一作于]台·使者·조衣·先人. 一說, 大官有大對盧, 次有太大兄·大兄·小兄·意俟奢·烏拙·太大使者·小使者·褥奢·예屬·仙人, 幷褥薩, 凡十三{二}??等. 復有內評外評, 分掌內外事焉." 右見<中國>歷代史.


趙炳舜. 『冊府元龜』.

「책부원구」에는 "고구려는 후한 시대에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상가, 대로, 패자, 고추대가[고추대가는 고구려의 빈객 접대를 맡는 관리로서 대홍려와 같은 것이다.], 주부, 우(優)[우(于)로도 쓴다.]태, 사자, 조의, 선인 등이 있으며, 일설에는 대관으로서 대대로가 있고, 다음에 태대형, 대형, 소형, 의사사, 오졸, 태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과 욕살을 합하여 12등급이 있으며, 또한 내평과 외평을 두어, 내외의 사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중국의 역대 사서에서 참고한 것이다.


○左輔·右輔·大主簿·國相·九使者·中畏大夫. 右見本國古記.


좌보, 우보, 대주부, 국상, 구사자, 중외 대부.

이상은 본국 고기에 보인다.


○廣評省·匡治奈[今侍中]·徐事[今侍郞]·外書[今員外郞]·兵部·大龍部[謂倉部]·壽春部[今禮部]·奉賓部[今禮賓省]·義刑臺[今刑部]·納貨府[今大府寺]·調位府[今三司]·內奉省[今都省]·禁書省[今秘書省]·南廂壇[今將作監]·水壇[今水部]·元鳳省[今翰林院]·飛龍省[今太僕寺]·物藏省[今少府監]·史臺[掌習諸譯語]·植貨府[掌栽植菓樹]·障繕府[掌修理城隍]·珠淘省[掌造成器物]·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右<弓裔>所制官號.


趙炳舜. 『三國史節要』.

광평성, 광치나[지금의 시중], 서사[지금의 시랑], 외서[지금의 원외랑], 병부, 대룡부[창부를 말함], 수춘부[지금의 예부], 봉빈부[지금의 예빈성], 의형대[지금의 형부], 납화부[지금의 대부사], 조위부[지금의 삼사], 내봉성[지금의 도성], 금서성[지금의 비서성], 남상단[지금의 장작감], 수단[지금의 수부], 원봉성[지금의 한림원], 비룡성[지금의 태복시], 물장성[지금의 소부감], 사대[모든 외국어 학습을 맡은 기관], 식화부[과수 재배를 맡은 기관], 장선부[성황의 수리를 맡은 기관], 주도성[기물의 제작을 맡은 기관],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이상은 궁예가 제정한 관직명이다.


○『北史』云: "<百濟>官有十六品: 佐平五人一品, 達率三十人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한率五品, 奈率六品, 將德七品, 施德八品, 固德九品, 季德十品,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剋虞十六品. 自恩率以下, 官無常員, 各有部司, 分掌衆務. 內官有前內部·穀內部·內경部·外경部·馬部·刀部·功德部·藥部·木部·法部·後宮部, 外官有司軍部·司徒部·司空部·司寇部·點口部·(+客部)??·外舍部·綢部·日官部·市部, 長吏三年一交代. 都下有方, 各爲五部, 曰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 部有五巷, 士庶居焉. 部統兵五百人. 五方各有方鎭{領}??一人, 以達率爲之,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三人, 以德率爲之, 統兵一千一百人以下七百人以上."


李丙燾. 「北史」.李丙燾. 「北史」.

「북사」에는 "백제의 관직에는 16품이 있었다. 좌평 5명은 1품, 달솔 30명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다. 은솔 이하의 관직에는 정원이 없고, 각각 부서를 두어 여러 가지 사무를 분담하였다. 내직에는 전내부, 곡내부, 내경부, 외경부, 마부, 도부, 공덕부, 약부, 목부, 법부, 후궁부가 있으며, 외직에는 사군부, 사도부, 사공부, 사구부, 점구부, 외사부, 주부, 일관부, 시부가 있고, 책임관은 3년에 한번씩 교체하였다. 서울에는 방을 두고, 각각의 방을 5부로 나누었는데, 이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라 하였다. 부에는 5개의 항을 두었는데 이곳에 평민들이 거주하였다. 부는 군사 500명을 통솔하며, 5방에 방진을 각각 1명씩 두었는데 달솔을 이에 임명하고, 방좌를 두어 그를 보좌케 하였다. 방에는 10개 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 3명을 두었는데, 덕솔을 이에 임명하여 군사 1100명 이하 700명 이상을 통솔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隋書』云: "<百濟>官有十六品, 長曰左平, 次大率, 次恩率, 次德率, 次한率, 次奈率, 次將德, 次施德, 次固德, 次季德, 次對德, 次文督, 次武督, 次佐軍, 次振武, 次剋虞. 五方各有方領二人,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


「수서」에는 "백제의 관직에는 16품이 있었는데, 우두머리를 좌평이라 하고, 다음은 대솔, 다음은 은솔, 다음은 덕솔, 다음은 한솔, 다음은 나솔, 다음은 장덕, 다음은 시덕, 다음은 고덕, 다음은 계덕, 다음은 대덕, 다음은 문독, 다음은 무독, 다음은 좌군, 다음은 진무, 다음은 극우라 하였다. 5방에 각각 방령 2명을 두고, 방좌를 두어 그들을 보좌케 하였다. 방에는 10개 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唐書』云: "<百濟>所置(-內)??官, 曰{有}??內臣佐平, 掌宣納事; 內頭佐平, 掌庫藏事; 內法佐平, 掌禮儀事; 衛士佐平, 掌宿衛兵事; 朝廷佐平, 掌刑獄事; 兵官佐平, 掌外兵馬事." 右見<中國>歷代史.


李丙燾. 「唐書」.李丙燾. 「唐書」.

「당서」에는 "백제에서 두었던 내직으로서 내신좌평은 명령의 출납을 맡고, 내두좌평은 창고의 저장 사무를 맡고, 내법좌평은 의례에 관한 사무를 맡고, 위사좌평은 수직 시위에 대한 군사 사무를 맡고, 조정좌평은 형벌과 옥사에 관한 일을 맡고, 병관좌평은 지방 군사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중국 역대 사서에서 참고한 것이다.


○左輔·右輔·左將·上佐平·北門頭. 右見本國古記.

三國史記卷第四十.


좌보, 우보, 좌장, 상좌평, 북문두.

이상은 본국 고기에 나오는 관명이다.

삼국사기 권 제 40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一.



삼국사기 권 제 41


列傳第一.

<金庾信>上.


열전 제 1

김 유신 상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仇充}>??,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 同姓也.


李丙燾.

김 유신은 경주 사람이다. 12대조 수로는 어느 곳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귀봉에 올라가 가락의 구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국가를 건설하고, 국호를 가야라 하였다가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에 이르렀다. 구차휴라고도 하는 구해는 유신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고 생각하여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종손"이라 하였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동성이다.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조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과 그 장수 네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한 일이 있었다. 부친 서현은 벼슬이 소판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문에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이다"라고 하였으니, 서현이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이 그의 자인지를 알 수 없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해둔다.


○初, <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작而合. <舒玄>爲<萬弩郡>太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 疾之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赴<萬弩郡>.


처음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았을 때, 내심으로 기뻐하여 그녀에게 눈짓을 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었을 때, 만명과 함께 가려 하니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사실을 알고, 그녀를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만명이 창문으로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舒玄>庚辰之夜, 夢熒或{熒惑}??鎭二星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 夢見童子衣金甲, 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七}??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吾以庚辰夜吉夢, 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聲相近, 황古之賢人有名<庾信>, 합以命之." 遂名<庾信>焉.[<萬弩郡>, 今之<鎭州>, 初以<庾信>胎, 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


趙炳舜. 『顯宗實錄字本』.『북한본』.

서현은 경진일 밤에 화성과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도 역시 신축일 밤에 동자가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잉태하여 스무달 만에 유신을 낳았다. 이 때가 진평왕 건복 17년, 수 문제 개황 15년 을묘였다.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에 좋은 꿈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오. 그러므로 마땅히 이 날짜로 이름을 지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예법에는 날자로 이름을 짓지 않게 되어 있다하오. 그런즉 경(庚)은 유(庾)와 글자가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발음이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의 현인 중에도 유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이를 이름으로 삼지 않으리오?"라 하고 마침내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만노군은 지금의 진주인데 애초에 유신의 태를 높은 산에 묻었으므로 지금도 그 산을 태영산이라고 한다.]


○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眞平王><建福>二十八{三十三}??年辛未, 公年十七歲, 見<高句麗>·<百濟>·<靺鞨>侵질國疆, 慷慨有平寇賊之志, 獨行入<中嶽>石굴, 齊{齋}??戒告天誓盟曰: "敵國無道, 爲豺虎, 以擾我封역, 略無寧歲. 催{僕}??是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天降監, 假手於我." 居四日, 忽有一老人, 被褐而來曰: "此處, 多毒蟲猛獸, 可畏之地, 貴少年爰來獨處, 何也." 答曰: "長者從何許來, 尊名可得聞乎?" 老人曰: "吾無所住, 行止隨緣, 名則<難勝>也." 公聞之, 知非常人, 再拜進曰: "僕<新羅>人也, 見國之讐, 痛心疾首, 故來此, 冀有所遇耳. 伏乞長者憫我精誠, 受{授}??之方術." 老人默然無言. 公涕淚懇請不倦, 至于六七. 老人乃言曰: "子幼而有幷三國之心, 不亦壯乎." 万{乃}??授以秘法曰: "愼勿妄傳, 若用之不義, 反受其殃." 言訖而辭, 行二里許, 追而望之, 不見, 唯山上有光, 爛然若五色焉.


『북한본』.李丙燾.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33년 신미, 공의 나이 17세 때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혼자 중악 석굴에 들어갔다. 그는 목욕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하여 짐승같이 우리의 영역을 소란케 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일개 미약한 신하로서 능력을 생각치 않고 나라의 환란을 없애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하늘은 굽어 살펴 저를 도와 주소서!" 4일이 지나자 갑자기 한 노인이 갈옷을 입고 와서 말했다.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곳인데, 귀소년이 여기에서 혼자 거처하니 무슨 일인가?" 공이 대답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나는 일정한 주거가 없고 인연 닿는 대로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난승이다."라고 말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재배하고 말하기를 "저는 신라인으로서 나라의 원수를 보니 가슴이 아파 여기에 와서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였다. 노인은 묵묵히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예닐곱 번이나 거듭 열심히 간청하였다. 노인은 그 때서야 말했다. "그대가 어린 나이로 삼국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노인은 말을 마치고 곧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부디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이를 의롭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으리라."라고 말하였다. 말이 끝나자 작별을 했다. 노인이 2리쯤 갔을 때 뒤쫓아가 그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흔적이 없고 오직 산 위에 오색 찬란한 빛이 서려 있었다.


○<建福>二十九{三十四}??年, 隣賊轉迫, 公愈激壯心, 獨携寶劒, 入<咽薄山>深壑之中, 燒香告天, 祈祝若在<中嶽>, 誓辭仍禱. 天官垂光, 降靈於寶劒. 三日夜, 虛角二星, 光芒赫然下垂, 劒若動搖然.


『북한본』.

건복 34년에 인접한 적국의 침략이 점점 긴박하여지자, 공은 더욱 더 장한 뜻을 품고 보검을 차고 홀로 인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향을 피워 놓고 하늘에 고하며 중악에서와 같이 축원하고 맹세하면서 기도하였다. 그 때 천관신이 빛을 비추며 보검에 영기를 쬐어 주었다. 3일째 되는 날 밤에 허수와 각수 두 별자리의 빛이 환하게 내려오자, 칼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建福>四十六{五十一}??年, 己丑秋八月, 王遣伊찬<任永里{任末里}>??, 波珍찬<龍春>·<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麗>人出兵逆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뉵, 無復鬪心. <庾信>時爲中幢幢主, 進於父前, 脫胄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盖聞: '振領而구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내跨馬拔劒跳坑, 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건복 51년 기축년 가을 8월에 왕이 이찬 임 영리·파진찬 용춘·백룡, 소판 대인과 서현 등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략하게 했다. 그 때 고구려인들이 군사를 출동시켜 역으로 공격해오자, 우리 측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여러 사람들의 사기가 꺾여 더 이상 싸울 생각을 못하게 되었다. 유신은 당시 중당 당주였다. 그는 부친 앞으로 나아가 투구를 벗고 말했다. "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를 다하기로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감히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옷깃을 들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고 들었으니,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며 적장의 머리를 베어들고 돌아왔다. 아군이 이를 보고 승세를 타고 분연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의 목을 베고 1천 명을 사로잡았다. 성 안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이 모두 나와서 항복하였다.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타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 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 <庾信>曰: "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 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以見國人乎." <春秋>感悅, 與公互서手指, 삽血以盟曰: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 遂相別. 後<庾信>爲<押梁州>軍主. <春秋>與<訓信>沙于{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盖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 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비無後患."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與<竹嶺>, 本我國地, 若不我還, 則不得歸." <春秋>답{對}??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以饌具來, 相飮酒감,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 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免{兎}??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준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曰{日}??者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재上岸, 兎脫入草中, 請{謂}??龜曰: '愚哉, 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默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 本大國地. 分{令}??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교日." 王내悅焉.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當百人, 百人致死當千人, 千人致死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於是衆人日{曰}??: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以定行期. 時, <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 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 與大王書者, 비{圖}??환死耳."[此與本言{書??/記??}<眞平王>十二{<善德王>十一}??年所書,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李丙燾.「북한본」.李丙燾. 本紀.

「북한본」.

선덕대왕 11년 임인에 백제가 대량주를 격파하였다. 그 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낭이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는 이를 한탄하며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길을 떠나기 전에 춘추가 유신에게 말했다.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오. 이번에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오?" 유신이 대답하였다. "공이 만일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오?"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함께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그들은 드디어 작별하였다. 그 뒤에 유신은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춘추가 훈신 사간과 함께 고구려에 사절로 가는 도중 대매현에 도착하였다. 그 때 고을 사람 두사지 사간이 푸른 베 3백 보를 그에게 주었다.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태대대로 개금을 보내 객관을 정해주고 또한 연회를 열어 우대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 왕에게 말했다. "신라 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그가 온 것은 아마도 우리의 형세를 정탐하려는 것 같으니 왕께서는 잘 처리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 왕은 춘추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여 그를 곤혹스럽게 하고자 하여 그에게 물었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이니 만약 이를 우리에게 돌려 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하리라." 춘추가 대답하였다.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하다가 미처 죽이지 않고 있었다. 춘추는 푸른 베 3백 보를 왕의 총신 선도해에게 몰래 주었다. 도해가 음식을 준비해와서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자 농담으로 말했다. "그대도 일찌기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오.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에 병이 났는데, 의사가 '토끼의 간을 얻어 약에 섞어 먹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였오. 그러나 바다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오. 그 때 마침 거북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었다오. '제가 그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북이는 마침내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말했소. '바다에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맑은 샘과 흰 돌이 있고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실이 있다.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맹금도 침범할 수 없다. 네가 갈 수만 있다면 근심걱정 없이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북이는 토끼를 등에 업고 2∼3리쯤 헤엄쳐 갔다오. 그제서야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지금 용왕의 딸이 병에 걸렸는데 토끼 간으로 약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수고를 마다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소. 이를 듣고 토끼가 말했다오. '아! 나는 천지신명의 후예인지라 오장을 꺼내어 씻어서 다시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속이 약간 불편한 듯하여 잠시 간과 심장을 꺼내어 씻은 후에 바위 밑에 두었다. 그런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 바로 오는 바람에 간이 아직도 거기에 있으니, 어찌 돌아가서 간을 가지고 오지 않으리?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려는 약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더라도 살 수 있으니 어찌 둘이 서로 좋은 일이 아니랴?' 거북이 그 말을 곧이 듣고 돌아갔는데, 언덕에 오르자 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뛰어들어가면서 거북에게 말했다오. '어리석기도 하구나. 네놈은! 어찌 간이 없이 사는 놈이 있겠느냐?' 거북은 이 말을 듣고 멍청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는 말이 있다오." 춘추는 이 말을 듣고 그의 뜻을 알아 차렸다. 그는 왕에게 글을 보내 말했다. "두 영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여 우리 왕에게 이를 돌려 보내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미덥지 않다면 저 태양을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왕은 그 때서야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간 지 60일이 지나도록 안돌아오자 유신은 국내의 용사 3천 명을 선발하여 놓고 말했다.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움을 당하면 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의 뜻이라고 나는 들었다. 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백 명을 대적하고, 백 명이 목숨을 바쳐서 천 명을 대적하고, 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만 명을 대적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타국에 구금되어 있는데 어찌 두렵다 하여 일을 도모하지 않겠느냐?" 이에 모든 사람들이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에 나아갈지라도, 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유신은 마침내 왕에게 떠날 날짜를 정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고구려의 간첩인 중 덕창이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고구려의 왕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고구려 왕은 전날 춘추의 맹세를 들었고, 또한 첩자의 말을 들은지라 그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후한 예로 대우하여 춘추를 귀국케 하였다. 고구려 국경을 벗어나자 춘추가 전송하러 나온 자에게 말했다. "내가 백제에 원수를 갚기 위하여 고구려에 와서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대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전에 대왕에게 보낸 글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이는 본기 선덕왕 11년 기록과 같은 사건인데 내용이 약간 다르다. 그러나 모두 고기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그대로 기록하기로 한다.]


○<庾信>爲<押梁州>軍主, 十三年爲蘇判. 秋九月, 王命爲上將軍, 使領兵伐<百濟><加兮城>·<省熱城>·<同大城{同火城}>??等七城, 大克之, 因開<加兮>之津. 乙丑{乙巳}??正月, 歸未見王, 封人急報: <百濟>大軍來, 攻我<買利浦>城. 王又拜<庾信>爲<上州>將軍, 令拒之. <庾信>聞命卽駕, 不見妻子, 逆擊<百濟>軍走之, 斬首二千級. 三月, 還命王宮, 未歸家, 又急告: <百濟>兵出, 屯于其國界, 將大擧兵侵我. 王復告<庾信>曰: "請公不憚勞천行, 及其未至備之." <庾信>又不入家, 練軍繕兵, 向西行.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북한본」.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다가 13년에 소판이 되었다. 가을 9월에 왕은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백제의 가혜성·성열성·동화성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인하여 가혜에 나루를 개설하였다. 유신은 을사 정월에 돌아왔다. 그러나 미처 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의 매리포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봉인이 급히 알려왔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상주장군을 제수하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유신은 왕명을 받자 처자도 만나지 않고 즉시 말을 몰아 백제군을 역습하여 패주시키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유신이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이었다. 백제병이 다시 출동하여 국경에 주둔하며, 장차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신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했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빨리 가서 적들이 도착하기 전에 대비하기 바란다."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들르지도 않고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于時, 其家人皆出門外待來. <庾信>過門, 不顧而行, 至五十步許, 駐馬, 令取漿水於宅, 철之曰: "吾家之水, 尙有舊味." 於是, 軍衆皆云: "大將軍猶如此, 我輩豈以離別骨肉爲恨乎." 及至疆역, <百濟>人望我兵衛, 不敢迫, 乃退. 大王聞之甚喜, 加爵賞.


그 때 유신의 가족들은 모두 문 밖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신은 문을 지나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서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말을 멈추고 자기 집의 물을 떠오게 하였다. 그는 그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우리 집의 물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구나." 그 때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르자 백제인들이 우리 군사의 진영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다.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屯於<明活城>, 王師營於<月城>, 攻守十日不解. 丙夜, 大星落於<月城>. <毗曇>等謂士卒曰: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뉵}??之兆也." 士卒呼吼聲振(+天)??地.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정미는 선덕왕 말년이며, 진덕왕 원년이었다. 대신 비담과 염종 등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군사를 동원하여 폐위시키려 하였다. 왕은 궁안에서 이들을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친 채 10일 동안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은 사졸들에게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리라."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병졸들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구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 乃造偶人抱大{火}??, 載於風鳶而양之, 若上天然.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昨夜, 落星還上."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祝{呪}??曰: "天道則陽剛, 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果{卑}??.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 <毗曇>等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 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 於是, 督諸將卒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族{連坐者三十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대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 하였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했다. "길흉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니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어 주가 멸망하였고, 기린을 잡았기 때문에 노 나라가 쇠퇴했으며, 꿩의 울음으로 인하여 고종이 흥기했고, 용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유신은 말을 마치고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서 띄워 보냈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그는 "어제 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 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여, 적들로 하여금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하였다. 유신은 또한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에는 양이 강하고 음이 부드러우며, 인도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일 이 순서를 바꾸면 큰 변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비담의 도당이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하여 도리어 별의 변괴를 왕성에 보인 것이라면, 이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위엄으로서 인간이 소망하는대로,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나서 그는 장졸들을 독려하여 분연 돌격하였다. 비담 등은 패하여 도망하였다. 유신은 그들을 추격하여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다.


○冬十月, <百濟>兵來, 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침입하여 무산·감물·동잠 등의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마침내 기력이 없어지자 비녕자에게 말했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으랴!" 비녕자가 절을 하고 말했다.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비녕자는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이 그를 따라 적의 칼과 창 속으로 돌진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이를 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대파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眞德王><大和>元年戊申, <春秋>以不得請於<高句麗>, 遂入<唐>乞師. <太宗>皇帝曰: "聞爾國<庾信>之名, 其爲人也如何?" 對曰: "<庾信>雖少有才智, 若不籍天威, 豈易除隣患." 帝曰: "誠君子之國也." 乃詔許, 래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조征<百濟>. 時, <庾信>爲<押梁州>軍主, 若無意於軍事, 飮酒作樂, 屢經旬月. 州人以<庾信>爲庸將, 譏謗之曰: "衆人安居日久, 力有餘, 可以一戰, 而將軍용惰, 如之何?"


진덕왕 대화 원년 무신에 춘추는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마침내 당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다. 태종 황제가 "나는 너희 나라의 유신에 대한 명성을 들었다. 그의 위인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유신이 비록 재능과 지혜가 조금 있다고 하나 황제의 위력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쉽사리 주변국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하며 조서를 내려 춘추의 요청을 허락하고, 장군 소정방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백제를 치도록 하였다. 이 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었다. 그는 군무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수개월을 지냈다. 고을 사람들은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여기면서 "백성들이 편하게 생활한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힘의 여유가 있어 한바탕 싸울 만한데 장군이 저렇게 나태하니 이 일을 어찌할까?"라고 비방하였다.


○<庾信>聞之, 知民可用, 告大王曰: "今觀民心, 可以有事. 請伐<百濟>, 以報<大梁州>之役." 王曰: "以小觸大, 危將奈何?" 對曰: "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故<紂>有億兆人, 離心離德, 不如<周>家十亂同心同德. 今, 吾人一意, 可與同死生, 彼<百濟>者不足畏也." 王乃許之. 遂簡練州兵赴敵. 至<大梁城>外, <百濟>逆拒之. 佯北不勝, 至<玉門谷>. <百濟>輕之, 大率衆來, 伏發擊其前後, 大敗之, 獲<百濟>將軍八人, 斬獲一千級, 於是, 使告<百濟>將軍曰: "我軍主<品釋>及其妻金氏之骨, 埋於爾國獄中. 今, 爾裨將八人, 見捉於我匍匐, 請命. 我以狐豹首丘山之意, 未忍殺之. 今, 爾送死二人之骨, 易生八人, 可乎." <百濟><仲常>[一作<忠常>.]佐平言於王曰: "<羅>人骸骨, 留之無益, 可以送之. 若<羅>人失信, 不還我八人, 則曲在彼, 直在我, 何患之有?" 乃掘<品釋>夫妻之骨, 독而送之. <庾信>曰: "一葉落, 茂林無所損, 一塵集, 大山無所增." 許八人生還. 遂乘勝入<百濟>之境, 攻拔<嶽城>等十二城, 斬首二萬餘級, 生獲九千人. 論功, 增秩伊찬, 爲<上州>行軍大摠管. 又入賊境, 屠<進禮>等九城, 斬首九千餘級, 虜得六百人. <春秋>入<唐>, 請得兵二十萬來, 見<庾信>曰: "死生有命, 故得生還, 復與公相見, 何幸如焉." <庾信>對曰: "下臣仗國威靈, 再與<百濟>大戰, 拔城二十, 斬獲三萬餘人, 又使<品釋>公及夫人之骨, 得反鄕里. 此皆天幸所致也, 吾何力焉."

三國史記卷第四十一.


유신은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의 자질이 훌륭함을 알았다. 그는 대왕에게 말했다. "민심을 살펴보니 이제 일을 할 만 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싸움의 원수를 갚으십시오." 왕이 말했다. "작은 힘으로 큰 세력을 건드리면 그 위태로움을 어찌 할 것인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세력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민심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억조의 백성이 있었으나, 인심이 떠나고 덕이 떠나버려 주(周)의 열 명의 신하가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것만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뜻이 되어 생사를 같이할 수 있으니 저 백제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유신은 드디어 각 주의 병사를 선발 훈련하여 적진으로 갔다. 대량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역습으로 대항하였다. 그는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하고 일부러 패주하여 옥문곡에 이르렀다. 백제는 그를 얕잡아 보고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왔다. 그 때 복병이 일어나 백제군의 앞뒤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유신은 사람을 시켜 백제의 장군에게 말했다. "우리 군주 품석과 그 아내 김씨의 뼈가 너희 나라 옥중에 묻혀 있다. 이제 너희들의 비장 8명이 우리에게 잡혀서 꿇어 엎드려 살려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나는 여우와 표범이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두는 뜻을 생각하여 그들을 차마 죽이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너희는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여덟 명의 산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백제의 중상[충상이라고도 한다.] 좌평이 왕에게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 유익할 것이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신라인이 신의를 버리고 우리 여덟 사람을 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저들이 잘못한 것이요, 우리가 옳은 것이니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곧 품석 부처의 유골을 파서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은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숲이 상하지 않으며, 티끌 하나가 더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여덟 사람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승세를 타고 백제 경내에 들어가 악성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왕은 공을 논하여 유신에게 이찬의 작위를 주고 상주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유신은 다시 적의 경내에 들어가서 진례 등의 아홉 성을 공격하여 9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6백 명을 사로 잡았다. 춘추가 당으로 들어가 병력 20만을 얻기로 하고 돌아와 유신을 만나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천 명이 달려서인지 내가 살아와 다시 공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유신이 대답하기를 "제가 나라의 힘에 의지하고 영령의 위세를 빌어, 다시 백제와 크게 싸워서 20개의 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또한 품석공과 부인의 유골을 향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행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1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二.



삼국사기 권 제 42


列傳第二.

(+<金庾信>中>)??


趙炳舜.

열전 제 2

김 유신 중


○(+太和)??二年秋八月, <百濟>將軍<殷相>, 來攻<石吐>等七城. 王命<庾信>及<竹旨>·<陳春>·<天存>等將軍, 出禦之. 分三軍爲五道, 擊之, 互相勝負, 經旬不解, 至於강屍滿野, 流血浮杵. 於是, 屯於<道薩城>下, 歇馬餉士, 以圖再擧. 時, 有水鳥東飛, 過<庾信>之幕, 將士見之, 以爲不祥. <庾信>曰: "此不足怪也." 謂衆曰: "今日, 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又使徇于軍中曰: "堅壁不動, 待明日援軍至, 然後, 決戰."


趙炳舜. 『三國史記』 列傳41卷.

2년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이 쳐들어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유신과 죽지·진춘·천존 등의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삼군을 오도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승패를 서로 주고받아 10일이 지나도록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쓰러진 시체는 들에 가득 하고, 절굿공이가 뜰 정도로 피가 흐르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도살성 아래 주둔하면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여서 다시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 때 물새 한 마리가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유신의 군막을 지나치자 장병들은 이를 보고 흉조라고 여겼다. 유신이 말하기를 "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 반드시 정탐을 하려는 백제의 첩자가 올 것이다.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며 누구냐고 묻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큰소리로 각 진영에 명령을 내렸다.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도착한 다음 결전을 하리라."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一時奮擊, 大克之, 生獲將軍達率<正仲>·士卒一百人, 斬佐平<殷相>·達率<自堅>等十人及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是. 及歸還, 路見<百濟>佐平<正福>與卒一千人來降, 皆放之, 任其所往. 至京城, 大王迎門, 勞慰優厚.


첩자는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였다. 은상 등은 신라의 병력이 증가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일시에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들은 장군 달솔 정중과 군사 1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 은상과 달솔 자견 등 10명과 군사 8천9백8십 명의 목을 베었고, 말 1만 필과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하였다. 이 이외에 노획한 각종 기구도 이와 비슷하였다. 그들이 돌아올 때 길에서 백제의 좌평 정복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항복하여 왔다. 유신은 이들을 모두 풀어 주어 마음대로 돌아가게 하였다. 경성에 이르니 대왕이 문까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후대하였다.


○<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찬謀, 迎<春秋>伊찬, 卽位, 是爲<太宗大王>.


영휘 5년에 진덕대왕이 사망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유신은 재상인 이찬 알천과 상의하여 이찬 춘추를 즉위하게 하였다. 이가 곧 태종대왕이다.


○<永徽>六年乙卯秋九月, <庾信>入<百濟>, 攻<刀比川城>克之. 是時, <百濟>君臣, 奢泰淫逸, 不恤國事. 民怨神怒, 災怪屢見. <庾信>告於王曰: "<百濟>無道, 其罪過於<桀>·<紂>, 此誠順天弔民伐罪之秋也." 先是, <租未押>級찬爲<夫山>縣令, 被虜於<百濟>, 爲佐平<任子>之家奴. 從事勤恪, 曾無懈慢, <任子>憐之不疑, 縱其出入, 乃逃歸, 以<百濟>之事, 告<庾信>. <庾信>知<租未押>忠正而可用, 乃語曰: "吾聞<任子>專<百濟>之事, 思有以與謀而未{末}??由. 子其爲我, 再歸言之." 答曰: "公不以僕爲不肖, 而指使之, 雖死無悔."


今西龍.

영휘 6년 을묘 가을 9월에 유신은 백제에 진공하여 도비천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 때 백제는 임금과 신하가 사치하고 음란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백성들은 이를 원망하고, 신령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유신이 왕에게 "백제가 무도하여 죄악이 걸, 주보다 심하니, 이제는 실로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그 죄를 다스릴 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앞서 급찬 조미압이 부산 현령으로 있다가 백제로 잡혀가서 좌평 임자의 종이 되었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태만한 적이 없었다. 임자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의심하지 않았고, 마음대로 외부 출입을 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백제를 탈출하여 신라로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보고하였다. 유신은 조미압이 충직하여 쓸만한 인물임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임자가 백제의 국사를 전담한다고 듣고 있다. 내가 그와 의논을 하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서 이것을 이야기하라." 그는 "공이 저를 불초하다고 여기지 않고 일을 맡기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遂復入於<百濟>, 告<任子>曰: "奴自以謂旣爲國民, 宜知國俗, 是以, 出遊累旬不返, 不勝犬馬戀主之誠, 故此來耳." <任子>信之不責. <租未押>伺間報曰: "前者, 畏罪不敢直言, 其實, 往<新羅>還來. <庾信>諭我來告於君曰: '邦國興亡, 不可先知, 若君國亡, 則君依於我國, 我國亡, 則吾依於君國.'" <任子>聞之, 묵然無言. <租未押>惶懼而退, 待罪數月. <任子>喚而問之曰: "汝前說<庾信>之言, 若何?" <租未押>驚恐而對, 如前所言. <任子>曰: "爾所傳, 我已悉知, 可歸告之." 遂來說兼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 愈急幷呑之謀.


그는 마침내 다시 백제로 가서 임자에게 말했다. "제가 기왕 백제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나라의 풍습을 알아야겠기에 수십 일 동안 다니면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개와 말이 주인을 그리는 마음처럼 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돌아 왔습니다." 임자는 그 말을 믿고 책망하지 않았다. 조미압이 기회를 타서 임자에게 말했다. "전번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이 전하라고 하면서 저에게 '나라의 흥망은 예측할 수 없으니, 만일 백제가 망하면 그대는 신라에 의탁하고, 신라가 망하면 내가 백제에 의탁하기로 하자'고 말하였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듣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조미압은 황송스러워하며 물러나와 여러 달 동안 내내 처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에 임자가 불러서 물었다. "네가 지난 번에 이야기한 유신의 말이 어떤 것인가?" 조미압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지난 번에 말한 것과 똑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했다. "네가 전한 말을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서 알려라." 조미압이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 임자의 말을 전하고, 동시에 백제의 내외 사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니, 유신은 서둘러 백제를 병합할 계획을 세웠다.


○<太宗大王>七年庚申夏六月, 大王與太子<法敏>, 將伐<百濟>, 大發兵, 至<南川>而營. 時, 入<唐>請師波珍찬<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到<德物島>, 先遣從者<文泉>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船一百소, 載兵士會之. 太子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泗비>之城." 太子來告大王, 率將士, 行至<沙羅>之停.


태종대왕 7년 경신 여름 6월, 대왕은 태자 법민을 데리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남천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 때 당 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갔던 파진찬 김 인문이 당 나라 대장군 소정방, 유백영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까지 와서 먼저 종자 문천을 보내 보고하게 하였다.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진주·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백 척에 병사들을 함께 태우고 가서 회합케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자 정방이 태자에게 "나는 해로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 사비성에서 만나자"고 말하였다. 태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이 말을 전한 다음 장병들을 거느리고 사라의 군영에 이르렀다.


○將軍<蘇定方>·<金仁問>等, 沿海入<依伐浦{技伐浦??/伎伐浦??}>. 海岸泥녕, 陷不可行. 乃布柳席, 以出師. <唐>·<羅>合擊<百濟>滅之. 此役也, <庾信>之功爲多. 於是, <唐>皇帝聞之, 遣使부{褒}??嘉之. 將軍<定方>謂<庾信>·<仁問>·<良圖>三人曰: "吾受命以便宜從事, 今以所得<百濟>之地, 分錫公等爲食邑, 以酬厥功, 如何?" <庾信>對曰: "大將軍以天兵來, 副寡君之望, 雪小國之讐, 寡君及一國臣民, 喜변之不暇, 而吾等獨受賜以自利, 其如義何." 遂不受.


李丙燾.『북한본』.今西龍.

장군 소정방·김 인문 등은 해안을 따라 의벌포에 이르렀으나 해안이 갯벌이어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버들을 자리로 만들어 깔아놓고 군사들을 하선케 하였다. 당군과 신라군은 연합 공격하여 백제를 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유신의 공로가 컸다. 당 나라 황제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그를 표창하였다. 장군 정방이 유신·인문·양도 등 세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이제 빼앗은 백제 땅을 공들의 식읍으로 나누어 줌으로써 여러분의 공에 보답코자 하는데 어떤가?" 유신이 "대장군이 귀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임금의 소망에 부응하고 우리 나라의 원수를 갚았으니, 우리 임금과 온 나라 신민들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유독 우리만이 땅을 받아 자신을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의로운 일이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받지 않았다.


○<唐>人旣滅<百濟>, 營於<泗비>之丘, 陰謀侵<新羅>. 我王知之, 召群臣問策. <多美公>進曰: "令我民, 詐爲<百濟>之人, 服其服, 若欲爲賊者, <唐>人必擊之. 因與之戰, 可以得志矣." <庾信>曰: "斯言可取, 請從之." 王曰: "<唐>軍爲我滅敵, 而反與之戰, 天其祐我耶." <庾信>曰: "犬畏其主, 而主踏其脚, 則咬之, 豈可遇難, 而不自救乎. 請大王許之." <唐>人諜知我有備, 虜<百濟>王及臣寮九十三人·卒二萬人, 以九月三日, 自<泗비>泛船而歸, 留郞將<劉仁願>等, 鎭守之. <定方>旣獻부, 天子慰藉之曰: "何不因而伐<新羅>." <定方>曰: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 如父兄, 雖小, 不可謀也."


당 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사비 지역에 진영을 치고 신라에 대한 침공을 음모하였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다미공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 나라 사람을 백제인으로 가장하여, 백제의 의복을 입혀서 역적행위를 하게 하면 당군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을 공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이 말했다. "이 의견이 취할 만하니 시행하기 바라나이다." 왕이 말했다. "당군이 우리를 위하여 적을 격멸하였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 주겠는가?" 유신이 말했다. "개가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자기의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국난을 당하여 어찌 자위책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이를 허락하소서." 당 나라가 우리의 대비책을 정탐하여 알고, 백제 왕과 신하 93명, 군사 2만 명을 사로잡아 9월 3일에 사비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면서 낭장 유 인원 등을 남겨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정방이 귀국하여 천자에게 포로를 바쳤다. 천자가 위로하며 말했다. "어찌하여 뒤이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정방이 말했다. "신라 왕은 인자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들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아랫 사람들은 웃 사람을 부형과 같이 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비록 작지만 일을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龍朔>元年春, 王謂<百濟>餘燼尙在, 不可不滅, 以伊찬<品日>·蘇判<文王>·大阿찬<良圖>等, 爲將軍, 往伐之, 不克. 又遣伊찬<欽純>[一作<欽春>]·<眞欽>·<天存>·蘇判<竹旨>等, 濟師. <高句麗>·<靺鞨>, 謂<新羅>銳兵皆在<百濟>, 內虛可도, 發兵, 水陸병進, 圍<北漢山城>. <高句麗>營其西, <靺鞨>屯其東, 攻擊浹旬,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賊營, 又雷雨震擊, 賊等疑駭, 解圍而遁. 初, <庾信>聞賊圍城曰: "人力旣竭, 陰助可資." 詣佛寺, 設壇祈禱. 會有天變, 皆謂至誠所感也.


용삭 원년 봄에 왕은 백제의 잔적이 아직 남아있으니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여 이찬 품일·소판 문왕·대아찬 양도 등을 장군으로 삼아 백제로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이찬 흠순[흠춘으로도 쓴다]·진흠·천존과 소판 죽지 등을 보내 우리 군사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말갈은 신라의 정예병이 모두 백제에 출병하여 국내가 비었으므로 신라를 공략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군사를 출동시켜 수로와 육로로 동시에 진격하여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성의 서쪽에 진을 치고 말갈은 성의 동쪽에 주둔하여 10일 동안 공격을 계속하자 성 안은 공포와 두려움에 싸였다. 그 때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지에 떨어지고 또한 뇌우와 함께 벼락이 쳤다. 그러자 적들은 당혹하고 놀라며 포위를 풀고 도주하였다. 처음에 유신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말했다. "사람의 힘은 이미 다하였으나 하늘의 도움은 얻을 수 있다." 그는 사찰로 가서 제단을 쌓고 기도를 하였는데, 마침 천변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이 유신의 지성에 감동된 결과라고 말하였다.


○<庾信>嘗以中秋夜, 領子弟, 立大門外, 忽有人從西來. <庾信>知<高句麗>諜者, 呼使之前曰: "而國有底事乎." 其人俯而不敢對. <庾信>曰: "無畏也, 但以實告." 又不言. <庾信>告之曰: "吾國王, 上不違天意, 下不失人心, 百姓欣然, 皆樂其業, 今爾見之, 往告而國人." 遂慰送之. <麗>人聞之曰: "<新羅>雖小國, <庾信>爲相, 不可輕也."


유신이 일찌기 추석 날 밤에 자제들을 데리고 대문 밖에 서있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왔다. 유신은 그가 고구려 첩자인 것을 알고 불러 앞으로 오게 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감히 대답을 못하였다. 유신이 "두려워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유신이 "우리 나라 임금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흔쾌히 각자의 생업을 즐기고 있다. 이제 네가 이것을 보았으니 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라!"하고는 곧 그를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고구려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유신이 재상이 되었으니 경시할 수 없다."


○六月, <唐><高宗皇帝>遣將軍<蘇定方>等, 征<高句麗>. 入<唐>宿衛<金仁問>, 受命來告兵期, 兼諭出兵會伐. 於是, <文武大王>率<庾信>·<仁問>·<文訓>等, 發大兵向<高句麗>, 行次<南川州>. 鎭守<劉仁願>, 以所領兵, 自<泗비>泛船, 至<鞋浦>下陸, 亦營於<南川州>. 時, 有司報: "前路有<百濟>殘賊, 屯聚<瓮山城>遮路, 不可直前." 於是, <庾信>以兵進而圍城. 使人近城下, 與賊將語曰: "而國不공, 致大國之討. 順命者賞, 不順命者戮. 今汝等, 獨守孤城, 欲何爲乎. 終必塗地, 不如出降. 非獨存命, 富貴可期也."


6월, 당의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케 하였다. 당 나라에 가서 숙위하던 김 인문이 명을 받고 와서 출병 기일을 보고하는 동시에 신라에서도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고구려를 치라는 황제의 뜻을 전했다. 이에 따라 문무대왕이 유신·인문·문훈 등을 대동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로 가는 도중 남천주에 이르렀다. 진수하던 당장 유 인원도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띄워 혜포에 내려 역시 남천주에 진을 쳤다. 이 때 유사가 와서 보고하였다. "앞에 백제의 잔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옹산성에 주둔하면서 길을 차단하고 있으니 앞으로 전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사신이 성 아래로 가까이 접근하여 적장에게 말했다. "네 나라가 공손치 않았기 때문에 대국의 토벌을 받게 된 것이다. 명령에 따르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이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서 무엇을 하겠느냐? 결국 비참하게 궤멸될 것이니 나와서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이리하면 목숨을 보존할 뿐 아니라 부귀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賊高聲唱曰: "雖최爾小城, 兵食俱足, 士卒義勇, 寧爲死戰, 誓不生降." <庾信>笑曰: "窮鳥困獸, 猶知自救, 此之謂也." 乃揮旗鳴鼓攻之. 大王登高見戰士, 淚語激勵之, 士皆奮突, 鋒刃不顧. 九月二十七日, 城陷, 捉賊將戮之, 放其民. 論功賞뇌將士, <劉仁願>亦分絹有差. 於是, 饗士말馬, 欲往會<唐>兵. 大王前遣太監{大監}??<文泉>, 移書<蘇>將軍, 至是復命, 遂傳<定方>之言曰: "我受命萬里, 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糧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 大王問群臣如之何而可. 皆言深入敵境輸糧, 勢不得達矣. 大王患之, 咨嗟. <庾信>前對曰: "臣過도恩遇, 첨辱重寄. 國家之事, 雖死不避, 今日是老臣盡節之日也. 當向敵國, 以副<蘇>將軍之意." 大王前席執其手下淚曰: "得公賢弼, 可以無憂. 若今玆之役, 罔愆于素, 則公之功德, 曷日可忘." <庾信>旣受命, 至<懸鼓岑>之岫寺, 齊戒卽靈室, 閉戶獨坐, 焚香累日夜而後出. 私自喜曰: "吾今之行, 得不死矣." 將行, 王以手書告<庾信>: "出疆之後, 賞罰專之, 可也."


趙炳舜.

적이 큰 소리로 외쳤다. "비록 하찮은 작은 성이지만 병기와 식량이 충족하며, 병사들이 의롭고 용감하니 차라리 목숨을 걸고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겠다." 유신이 웃으며 말했다. "궁지에 몰린 새나 곤경에 처한 짐승은 자신을 위하여 싸운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그는 곧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공격하였다. 대왕이 높은 곳에 올라 전사들을 보며 눈물어린 말로 격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분격 돌진하여 창과 칼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9월 27일, 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처형하고 백성들은 놓아 주었다. 공에 따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었으며, 유 인원도 역시 차등을 두어 비단을 나누어 주었다. 이리하여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배불리 먹인 다음 당군과 합세하고자 하였다. 대왕은 이보다 앞서 태감 문천을 소장군에게 파견하여 편지를 보냈었다. 그 문천이 이 때 돌아와 복명하고 소정방의 말을 전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만리 밖에서 창해를 건너 적을 토벌하러 와서 해안에 배를 정박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대왕의 군사가 오지 않고 군량의 수송이 계속되지 않아 심히 위태로우니 왕께서는 대책을 세워주소서."

왕이 군신들에게 어찌하면 좋은가를 물었다. 그들은 모두 말했다. "적의 경내에 깊이 들어가 군량을 운반하는 것은 대세로 보아 불가능합니다." 대왕이 이를 걱정하며 한탄하자 유신이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였다. "제가 과분한 은총을 받아 외람스럽게 중책을 지니고 있으니, 나라의 일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늙은 몸이 충성을 다할 때이오니, 제가 적국으로 들어가 소장군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왕은 자리를 앞으로 당겨 유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공 같은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걱정할 일이 없오. 만약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그대의 공덕을 잊을 날이 없을 것이오." 유신은 명령을 받은 후 현고잠의 수사에 갔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영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향을 피운 지 며칠이 지나서야 나왔다. 그는 혼자 기뻐하며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는 죽지 않는다." 그가 떠나려 할 때 왕이 직접 유신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국경을 나선 뒤에는 상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


○十二月十日, 與副將軍<仁問>·<眞服>·<良圖>等九將軍, 率兵載糧, 入<高句麗>之界. 壬戌正月二十三日, 至<七重河>, 人皆恐懼, 不敢先登. <庾信>曰: "諸君若파死, 豈合來此." 遂先自上船而濟, 諸將卒, 相隨渡河. 入<高句麗>之境, 慮<麗>人要於大路, 遂自險隘以行, 至於<산壤>.


12월 10일, 부장군 인문, 진복, 양도 등 아홉 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양곡을 싣고 고구려 경계로 들어 갔다. 임술 정월 23일에 칠중하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승선하려는 자가 없었다. 유신이 말했다.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왜 여기에 왔는가?" 유신이 마침내 스스로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니, 모든 장졸이 그 뒤를 따라 강을 건넜다.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서는, 큰 길에서 고구려군에게 요격 당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에 도착하였다.


○<庾信>與諸將士曰: "<麗>·<濟>二國, 侵凌我疆역, 賊害我人民, 或虜丁壯, 以斬戮之, 或부幼少, 以奴使之者, 久矣, 其可不痛乎. 吾今所以不畏死赴難者, 欲藉大國之力, 滅二城, 以雪國讐. 誓心告天, 以期陰助, 而未知衆心如何, 故言及之. 若輕敵者, 必成功而歸, 若畏敵, 則豈免其禽獲乎. 宜同心協力, 無不以一當百, 是所望於諸公者也." 諸將卒皆曰: "願奉將軍之命, 不敢有偸生之心." 乃鼓行向<平壤>.


유신이 여러 장병들에게 말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우리 백성을 해쳤도다. 더러는 장정들을 포로로 데려가 죽이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어린이들을 사로잡아 노비로 부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오래 계속되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하려는 것은, 대국의 힘을 빌어 두 나라를 멸망시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마음에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며 조국 영령의 가호를 기대하는데,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기에 말하는 것이다. 만약 적을 가벼이 여긴다면 필히 공을 이루고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사로잡힘을 면할 수 있으랴?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누구나 일당백의 용기를 갖기를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모든 장졸들이 말했다.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구차하게 살아갈 마음을 감히 갖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곧 북을 치고 행진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路逢賊兵, 逆擊克之, 所得甲兵, 甚多. 至<障塞>之險, 會天寒烈, 人馬疲憊, 往往강부. <庾信>露肩執鞭, 策馬以前驅. 衆人見之, 努力奔走出汗, 不敢言寒. 遂過險, 距<平壤>不遠, <庾信>曰: "<唐>軍乏食窘迫, 宜先報之." 乃喚步騎監<裂起>曰: "吾少與爾遊, 知爾志節, 今欲致意於<蘇>將軍, 而難其人, 汝可行否." <裂起>曰: "吾雖不肖, 濫中軍職, 況辱將軍便{使}??令. 雖死之日, 猶生之年." 遂與壯士<仇近>等十五人, 詣<平壤>, 見<蘇>將軍曰: "<庾信>等領兵致資糧, 已達近境." <定方>喜以書謝之. <庾信>等行抵<楊오>, 見一老人, 問之, 具悉敵國消息, 賜之布帛, 辭不受而去. <庾信>營<楊오>, 遣解漢語者<仁問>·<良圖>及子<軍勝>等, 達<唐>營, 以王旨궤軍糧. <定方>以食盡兵疲, 不能力戰, 及得糧, 便廻<唐>. <良圖>以兵八百人, 泛海還國. 時, <麗>人伏兵, 欲要擊我軍於歸路. <庾信>以鼓及부, 繫群牛腰尾, 使揮擊有聲, 又積柴草燃之, 使煙火不絶, 夜半, 潛行至<표河>, 急渡岸休兵. <麗>人知之來追, <庾信>使萬弩俱發. <麗>軍且退, 率勵諸幢將士分發, 拒擊敗之, 生禽將軍一人, 斬首一萬餘級. 王聞之, 遣使勞之. 及至, 賞賜封邑爵位有差.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도중에 적병을 만나 역습하여 이기고, 많은 갑옷과 무기를 노획하였다. 험준한 장새에 이르자 때마침 날씨가 몹시 춥고 사람과 말이 지쳐서 더러는 쓰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어깨를 벗어 붙이고 말에 채찍을 가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여러 사람들이 이를 보고 힘껏 달리며 땀을 흘리면서 감히 춥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험한 곳을 지나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당군이 식량 부족으로 궁색하여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먼저 소식을 알려야겠다." 그는 보기감 열기를 불러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알고 있다. 이제 소장군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려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열기가 말했다. "내가 비록 불초한데도 중군직에 있는 것이 외람된 일인데, 황차 장군의 명령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내가 죽는 날이 바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장사 구근 등 1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소 장군을 만나 말했다. "유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운반하여 이미 가까운 곳에 도달하였소." 소정방이 기뻐하여 편지를 주어 사례하였다. 유신 등이 양오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을 만나 여러 가지 상황을 물었는데, 노인은 적국의 소식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유신은 노인에게 포백을 주었는데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버렸다. 유신이 양오에 진을 치고 중국어를 아는 인문, 양도와 아들 군승 등을 당영으로 파견하여 왕의 뜻으로 군량을 주게 하였다. 소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 힘껏 싸우지 못하다가 식량을 얻게되자 곧 당으로 돌아갔다. 양도도 병력 8백 명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매복시켜 우리 군사를 귀로에서 요격하려 하였다. 유신은 북과 북채를 여러 마리의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서 후려치면 소리가 나게 하고, 또한 섶과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한 다음, 밤에 몰래 행군하여 포하에 이르자 급히 강을 건너 군사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인들이 이것을 알고 추격하자 유신은 만노를 일시에 쏘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이 퇴각하자 여러 당(幢)의 장병들을 지휘하여 여러 길로 출동하여 그들과 대항해 싸워 승리하고, 장군 한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다. 그들이 돌아오자 왕은 공로를 세운 정도에 따라 봉읍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 分兵擊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攻之三旬, 不能下, 士卒疲困연{厭}??兵. 大王曰: "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皆降, 不可謂無功." 乃振旅而還.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餘將卒賞賜有差.

三國史記卷第四十二.


『북한본』.

용삭 3년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에 웅거하면서 왜에게 병력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 인문, 천존, 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그들은 웅진주에 가서 진수관 유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여 8월 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백제인들은 왜인과 함께 진을 쳤는데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대파시키니 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했다. "우리와 너희 나라가 바다를 경계로 하여 일찌기 싸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우호 관계를 맺고 화친을 맺는 등 서로 예방하고 교유하여 왔는데, 무슨 이유로 오늘날 백제와 악행을 함께 하여 우리 나라를 치려 하는가? 이제 너희 군졸들의 생명이 나의 손 안에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의 국왕에게 이 말을 고하라!" 그리고 왕은 그들 마음대로 돌아가게 한 후,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다만 임존성만은 지리가 험준하고 성이 견고하며 더우기 양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공격한 지 30일이 되어도 항복을 받지 못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피로해지자 싸우고자 하지 않았다. 대왕은 "지금 성 하나가 함락되지 않았으나 다른 여러 성과 보루가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여 유신에게 밭 5백 결을 하사하고 기타 장졸들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상을 주었다.

삼국사기 권 42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三.



삼국사기 권 제 43


列傳第三.

<金庾信>下.


열전 제 3

김 유신 하


○<麟德>元年□□□{甲子三}??月, <百濟>餘衆, 又聚<泗비城>反叛, <熊州>都督, 發所管兵士攻之, 累日霧塞, 不辨人物, 是故, 不能戰, 使<伯山>來告之, <庾信>授之陰謀, 以克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인덕 원년 갑자 3월, 백제의 잔적이 다시 사비성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웅주 도독이 자기 소관의 병력으로 공격했으나, 여러 날 안개가 끼어서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싸움을 할 수 없었다. 백산으로 하여금 그 사정을 보고하게 하니 유신이 비밀 계책을 알려 주어 이들을 격파하게 하였다.


○<麟德>二年, <高宗>遣使<梁冬碧>·<任智高>等來聘. 兼冊<庾信>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 食邑二千戶.


인덕 2년, 당 나라 고종이 사신 양동벽과 임지고 등을 보내와 빙문하고, 동시에 유신을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에 책봉하고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乾封>元年, 皇帝래召<庾信>長子大阿찬<三光>, 爲左武衛翊府中郞將, 仍令宿衛.


건봉 원년, 황제가 칙명으로 유신의 장자 대아찬 삼광을 불러 좌무위익부 중랑장으로 삼고 궁전에서 숙위하게 하였다.


○<摠章>元年戊辰, <唐><高宗>皇帝, 遣英國公<李勣>, 興師伐<高句麗>, 遂徵兵於我. <文武大王>, 欲出兵應之, 遂命<欽純>·<仁問>爲將軍. <欽純>告王曰: "若不與<庾信>同行, 恐有後悔."王曰: "公等三臣, 國之寶也. 若摠向敵場, 당有不虞之事, 而不得歸, 則其如國何. 故欲留<庾信>守國, 則隱然若長城, 終無憂矣." <欽純>, <庾信>之弟, <仁問>, <庾信>之外甥, 故尊事之, 不敢抗. 至是, 告<庾信>曰: "吾等不材, 今從大王, 就不測之地, 爲之奈何, 願有所指誨." 答曰: "夫爲將者, 作國之干城, 君之爪牙. 決勝否於矢石之間, 必上得天道, 下得地理, 中得人心, 然後可得成功. 今我國以忠信而存, <百濟>以오慢而亡, <高句麗>以驕滿而殆, 今若以我之直, 擊彼之曲, 可以得志. 況憑大國, 明天子之威稜哉. 往矣勉焉, 無墮乃事!" 二公拜曰: "奉以周旋, 不敢失墮." <文武大王>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群臣曰: "昔者, <百濟><明농王>在<古利山>, 謀侵我國, <庾信>之祖<武力>角干, 爲將逆擊之, 乘勝부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故邊民安農桑之業, 君臣無宵간之憂. 今, <庾信>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績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 未可知也, 其於職賞, 宜如何也." 群臣曰: "誠如王旨." 於是, 授太大舒發翰之職,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其諸察{寮}??佐, 各賜位一級.


今西龍.

총장 원년 무진에 당 나라 고종 황제가 영국공 이 적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마침내 우리에게도 군사를 징발케 하였다. 문무대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에 호응하고자 흠순과 인문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흠순이 왕에게 말했다. "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공들 세 신하는 국가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적지로 갔다가 불의의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하니 유신을 이곳에 남아있게 하면 은연중 나라의 장성과 같아 종내 근심이 없으리라." 흠순은 유신의 동생이었으며, 인문은 유신의 생질이었다. 그들은 유신을 높이 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감히 왕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자질이 부족한 우리가 지금 대왕의 뜻에 따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유신이 대답했다. "무릇 장수란 나라의 간성과 임금의 손발이 되어 전쟁터에서 승부를 결정내는 것이다. 반드시 위로는 천도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민심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충신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백제는 오만으로 인하여 멸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 인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 편의 그릇됨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 하물며 큰 나라의 현명하신 천자의 위엄에 힘입고 있으니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가서 노력하여 너희들의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라!" 이에 두 사람이 절을 하면서 말했다. "공의 뜻을 두루 받들어 감히 실패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문무대왕이 영공과 함께 평양을 격파하고 남한주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이 고리산에서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무력 각간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아 싸워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또한 유신의 부친 서현은 양주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상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이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사직을 맡는 신하가 되었다. 그는 나가면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말했다. "저희들의 생각이 실로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유신에게 태대 서발한의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을 5백 호로 하였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전상에 오를 때도 빨리 오르지 않게 하였으며, 그의 속관들에게도 각각 위계를 한 급씩 올려 주었다.


○<摠章>元年, <唐>皇帝, 旣策英公之功, 遂遣使宣慰, 濟師助戰, 兼賜金帛. 亦授詔書於<庾信>, 以褒奬之, 且諭入朝, 而不果行. 其詔書傳於家, 至五世孫失焉.


총장 원년에 당 나라 황제가 영공의 전공을 책명하고 바로 사자를 보내 그를 위로하는 동시에 군사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하였다. 그리고 황금과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황제는 유신에게도 조서를 내려 그의 전공을 표창하고 또한 입조를 하라고 유시하였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조서는 그의 집안에 전하여 오다가 5세 손 때 잃어버렸다.


○<咸寧{咸亨}>?? 四年癸酉, 是<文武大王>十三年. 春, 妖星見地震, 大王憂之. <庾信>進曰: "今之變異, 厄在老臣, 非國家之災也, 王請勿憂." 大王曰: "若此則寡人所深憂也." 命有司祈禳之. 夏六月, 人或見戎服持兵器數十人, 自<庾信>宅泣而去, 俄而不見. <庾信>聞之曰: "此必陰兵護我者, 見我福盡, 是以去, 吾其死矣." 後, 旬有餘日, 寢疾, 大王親臨慰問, <庾信>曰: "臣願竭股肱之力, 以奉元首, 而犬馬之疾至此, 今日之後, 不復再見龍顔矣." 大王泣曰: "寡人之有卿, 如魚有水, 若有不可諱, 其如人民何, 其如社稷何." <庾信>對曰: "臣愚不肖, 豈能有益於國家, 所幸者, 明上, 用之不疑, 任之勿貳, 故得攀附王明, 成尺寸功,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臣觀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 累世功績, 一朝휴廢, 甚可痛也. 伏願: 殿下, 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疏遠小人, 親近君子, 使朝廷和於上, 民物安於下, 禍亂不作, 基業無窮, 則臣死且無憾." 王泣而受之. 至秋七月一日, 薨于私第之正寢, 享年七十有九. 大王聞訃震慟, 贈賻彩帛一千匹·租二千石, 以供喪事, 給軍樂鼓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命有司立碑, 以紀功名, 又定入民戶, 以守墓焉.


李丙燾.

함녕 4년 계유는 곧 문무대왕 13년이다. 그 해 봄에 요성이 나타나고 지진이 발생하자 대왕이 이를 걱정하였다. 유신이 나아가 말했다. "오늘의 변괴는 그 죄가 노신에게 있는 것이지 국가의 재앙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대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는 과인에게 큰 걱정거리요." 왕은 기도를 하여 재액을 물리치도록 유사에게 명령하였다. 여름 6월에 난데없이 융복을 입고 병기를 든 수십 명이 유신의 집으로부터 나와 울며 가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간혹 있었다. 유신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는 필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이 나의 복이 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니,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 후 십여 일 지나서 유신이 병들어 눕게되자 왕이 직접 행차하여 그를 위문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신이 모든 힘을 다하여 원수를 모시려 하였으나 소신의 몸에 병이 들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이후로 다시는 용안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은 울면서 말했다.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았오. 만일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하리오?" 유신이 대답하였다. "신은 우둔하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에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오직 다행스럽게도 현명하신 임금께서 의심없이 등용하였고, 의심없이 임무를 맡겼기에, 대왕의 밝은 덕에 힘입어 약간의 공로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을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못하는 일이 없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왕이 울면서 그 말을 받아 들였다.

가을 7월 1일, 유신이 자기 집의 침실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하게 생각하여 채색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석을 부의로 보내 상사에 쓰게 하고 군악의 고취수 1백 명을 보내 주었다. 금산원에 장사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비를 세워서 그의 공명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민호를 지정하여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妻<智炤>夫人, <太宗大王>第三女也. 生子五人, 長曰<三光>伊찬, 次<元述>蘇判, 次<元貞>海干, 次<長耳>大阿찬, 次<元望>大阿찬. 女子四人, 又庶子<軍勝>阿찬, 失其母姓氏. 後, <智炤>夫人, 落髮衣褐, 爲比丘尼, 時, 大王謂夫人曰: "今, 中外平安, 君臣高枕而無憂者, 是太大角干之賜也, 惟夫人宜其室家, 儆誡相成, 陰功茂焉, 寡人欲報之德, 未嘗一日忘于心. 其궤<南城>租每年一千石." 後, <興德大王>封公爲<興武大王>.


아내 지소부인은 태종대왕의 셋째 딸이다.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삼광 이찬이요, 다음은 원술 소판이요, 다음은 원정 해간이요, 다음은 장이 대아찬이요, 다음은 원망 대아찬이다. 딸이 넷이었으며 또한 서자로서 아찬 군승이 있는데 그 어머니의 성씨는 전해지지 않는다. 후일, 소지부인은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때 대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라 안팎이 편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바로 태대 각간이 우리에게 내려준 것이오. 이는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태대 각간을 성심으로 도와 준 숨은 공로가 컸던 결과였소. 과인은 이러한 덕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오. 그런즉 남성에서 받는 조를 매년 1천 석씩을 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뒤에 흥덕대왕이 공을 흥무대왕에 봉했다.


○初, <法敏王>, 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有之. <唐><高宗>大怒, 遣師來討, <唐>軍與<靺鞨>, 營於<石門>之野. 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 營於<帶方>之野. 時, 長槍幢獨別營, 遇<唐>兵三千餘人, 捉送大將軍之營. 於是, 諸幢共言: "長槍營獨處成功, 必得厚賞, 吾等不宜屯聚, 徒自勞耳." 遂各別兵分散. <唐>兵與<靺鞨>, 乘其未陣擊之, 吾人大敗, 將軍<曉川>·<義文>等死之. <庾信>子<元述>, 爲裨將, 亦欲戰死, 其佐<淡凌>, 止之曰: "大丈夫, 非死之難, 處死之爲難也. 若死而無成, 不若生而圖後效." 答田{曰}??: "男兒不苟生, 將何面目以見吾父乎." 便欲策馬而走, <淡凌>攬비不放, 遂不能死, 隨上將軍出<蕪荑嶺>, <唐>兵追及之. <居烈州>大監<阿珍含>一吉干, 謂上將軍曰: "公等努力速去. 吾年已七十, 能得幾時活也! 此時是吾死日也." 便橫戟突陣而死, 其子亦隨而死. 大將軍等, 微行入京. 大王聞之, 問<庾信>曰: "軍敗如此, 奈何." 對曰: "唐人之謀, 不可測也. 宜使將卒各守要害. 但<元述>不惟辱王命, 而亦負家訓, 可斬也." 大王曰: "<元述>裨將, 不可獨施重刑." 乃赦之. <元述>慙懼, 不敢見父, 隱遁於田園, 至父薨後, 求見母氏. 母氏曰: "婦人有三從之義, 今旣寡矣, 宜從於子. 若<元述>者, 旣不得爲子於先君, 吾焉得爲其母乎." 遂不見之. <元述>慟哭벽용而不能去, 夫人終不見焉. <元述>嘆曰: "爲<淡凌>所誤, 至於此極." 乃入<大伯山{太伯山}>??. 至乙亥年, <唐>兵來, 攻<買蘇川城>, <元述>聞之, 欲死之, 以雪前恥, 遂力戰有功賞, 以不容於父母, 憤恨不仕, 以終其身.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처음에 법민왕이 고구려 반군의 무리를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여 소유하였다. 당 고종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치게 하였다. 당군이 말갈과 함께 석문 들판에 진을 치자 왕은 장군 의복, 장춘 등을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하여 대방 들판에 진을 쳤다. 이 때 장창당만은 별도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천여 명과 싸워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이에 여러 당들이 함께 말하기를 "장창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각자 군대를 나누어 분산하였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가 아직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해오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장군 효천, 의문 등이 여기서 죽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이 비장으로서 역시 나아가 전사하려고 하니, 그의 보좌관 담릉이 만류하여 말하기를 "대장부는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경우를 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죽어서 성과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살아서 뒷날의 공적을 도모하느니 만 못하다" 하니 원술이 대답하였다. "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법이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를 뵙겠는가?" 그는 곧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 하였으나, 담릉이 말고삐를 붙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마침내 죽지 못하고 상장군을 따라 무이령으로 나왔다. 그러자 당병이 뒤를 추격하여 왔다. 거열주 대감 아진함 일길간이 상장군에게 말했다. "공들은 힘을 다하여 빨리 가라! 내 나이 벌써 70이니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는가?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그가 창을 비껴들고 진중으로 달려들어 전사하자 그의 아들도 따라서 죽었다. 대장군 등이 다른 사람들 모르게 서울로 들어 왔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유신에게 물었다. "군사가 이렇게 패하였으니 어찌하랴?" 유신이 대답하였다. "당인들의 모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제각기 요충지대를 지키게 해야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까지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대왕이 말했다. "원술 비장에게만 유독 중형을 줄 수 없다." 그리고 원술의 죄를 용서하였다. 원술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에 은둔하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다. 어머니는 "부인에게는 삼종의 의리가 있다. 이제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응당 아들을 좇아야 하겠으나 원술과 같은 자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라 말하고 만나보지 않았다. 원술이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떠나지 못하였으나 부인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원술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담릉 때문에 그르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곧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을해년에 당병이 와서 매소천성을 치니 원술이 이 소문을 듣고 이 기회에 죽음으로써 전일의 치욕을 씻고자 드디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嫡孫<允中>, 仕<聖德大王>, 爲大阿찬, 屢承恩顧, 王之親屬, 頗嫉妬之. 時, 屬仲秋之望, 王登<月城>岑頭眺望, 乃與侍從官, 置酒以娛, 命喚<允中>, 有諫者曰: "今, 宗室戚里, 豈無好人, 而獨召疎遠之臣, 豈所謂親親者乎." 王曰: "今, 寡人與卿等, 安平無事者, <允中>祖之德也, 若如公言, 忘棄之, 則非善善及子孫之義也." 遂賜<允中>密坐, 言及其祖平生, 日晩告退, 賜<絶影山>馬一匹, 群臣결望而已.


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대왕 때 벼슬이 대아찬에 이르고, 여러 차례 왕의 은총을 입게되자 왕의 친족들이 그를 몹시 시기하였다. 때는 8월 보름날이었는데 왕이 월성 꼭대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불러오라 하니 어떤 자가 간언하였다. "지금 종실과 척리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지 않은데 어찌하여 유독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 이것이 어찌 소위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여겨야 한다는 도리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의 조부의 덕이다. 만일 공의 말대로 그를 잊어 버린다면 선한 이를 선하게 대우하여 그의 자손에게도 덕이 미쳐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난다." 왕은 마침내 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의 평생에 대하여 담론하였다. 날이 저물어 윤중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절영산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은 서운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開元>二十一年, 大<唐>遣使敎翰{諭}??曰: "<靺鞨>·<渤海>, 外稱蕃翰, 內懷狡猾, 今欲出兵問罪, 卿亦發兵, 相爲기角, 聞有舊將<金庾信>孫<允中>在, 須差此人爲將." 仍賜<允中>金帛若干. 於是, 大王命<允中>·弟<允文>等四將軍, 率兵會<唐>兵, 伐<渤海>. <允中>庶孫<巖>, 性聰敏, 好習方術, 少壯爲伊찬, 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 聞一隅, 則反之以三隅, 自述遁甲立成之法, 呈於其師, 師撫{憮}??然曰: "不圖吾子之明達, 至於此也." 從是而後, 不敢以弟子待之. <大曆>中還國, 爲司天大博士, 歷<良>·<康>·<漢>三州大守{太守}??, 復爲執事侍郞·<浿江鎭>頭上. 所至盡心撫字, 三務之餘, 敎之以六陣兵法, 人皆便之. 嘗有蝗蟲, 自西入<浿江>之界, 蠢然蔽野, 百姓憂懼. <巖>登山頂, 焚香析{祈}??天, 忽風雨大作, 蝗蟲盡死. <大曆>十四年己未, 受命聘<日本國>. 其國王, 知其賢, 欲勒留之. 會, 大<唐>使臣<高鶴林>來, 相見甚환. <倭>人認<巖>爲大國所知, 故不敢留乃還. 夏四月, 旋風분起, 自<庾信>墓, 至始祖大王之陵, 塵霧暗冥, 不辨人物, 守陵人聞其中若有哭泣悲嘆之聲. <惠恭大王>, 聞之恐懼, 遣大臣(+<金敬信>)??, 致祭謝過, 仍於<鷲仙寺>, 納田三十結, 以資冥福. 是寺, <庾信>平<麗>·<濟>二國, 所營立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개원 21년에 대당에서 사신을 보내 권유하기를 "말갈과 발해가 겉으로는 번신이라 일컬으면서도 속으로는 교활한 음모를 품고 있으므로, 이제 군사를 출동시켜 문죄하려 하니 경도 군사를 출동시켜 앞뒤에서 서로 견제하도록 하라! 듣건대 옛 장수 김 유신의 손자 윤중이 있다고 하니 반드시 이 사람을 차출하여 장수로 삼으라!"하고, 동시에 윤중에게 약간의 황금과 비단을 주었다. 이에 대왕이 윤중과 그의 아우 윤문 등 네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당병과 합세하여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윤중의 서손인 암은 천성이 총민하고 방술 익히기를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이찬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하면서 이따금 스승을 찾아 가서 음양가의 술법을 배웠는데, 한 가지를 배우면 세 가지를 이해하였다. 스스로 둔갑입성법을 지어 스승에게 바치니 스승이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그대의 명석하고 통달함이 여기에까지 이른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이로부터는 감히 제자로 대하지 못하였다. 대력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가 되었고, 양주, 강주, 한주 세 주의 태수를 역임하고 다시 집사 시랑, 패강진 두상이 되었다. 그는 이르는 곳마다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돌봐주며,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의 농사 때는 여가를 이용하여 육진병법을 가르치니 사람마다 이를 편하게 배웠다. 일찌기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서쪽으로부터 패강 지역으로 만연되어 모든 평야를 뒤덮자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 때, 암이 산정에 올라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 메뚜기 떼가 모두 죽었다. 대력 14년 기미에 그는 왕명을 받고 일본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다. 그 때 마침 대당 사신 고 학림이 와서 서로 만나 매우 기뻐하니 왜인들이 이를 보고 암이 대국에까지 알려진 인물임을 알았다. 그리고는 감히 억류하지 못하고 돌려 보냈다.

여름 4월에 회오리바람이 뭉쳐 일어나 유신의 무덤에서 시조 대왕의 능에 이르렀는데, 먼지와 안개가 자욱하여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수 없었다. 능지기가 들으니 그 속에서 울면서 슬피 탄식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혜공대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서 대신을 보내 제사를 드려 사과하고, 이어서 추선사에 밭 30결을 주어 명복을 비는 자산으로 삼게 하였다. 추선사는 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한 뒤에 세운 절이다.


○<庾信>玄孫<新羅>執事郞<長淸>, 作行錄十卷, 行於世. 頗多釀辭, 故刪落之, 取其可書者, 爲之傳.


유신의 현손으로서 신라의 집사랑인 장청이 행록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날조해 넣은 말이 아주 많기 때문에 이를 간추려 쓸 만한 것만을 취하여 전으로 삼는다.


○論曰: <唐><李絳>對<憲宗>曰: "遠邪녕, 進忠直, 與大臣言, 敬而信, 無使小人參焉, 與賢者遊, 親而禮, 無使不肖預焉." 誠哉, 斯言也, 實爲君之要道也. 故『書』曰: "任賢勿貳, 去邪勿疑." 觀夫<新羅>之待<庾信>也, 親近而無間, 委任而不貳, 謀行言聽, 不使怨乎不以, 可謂得六五童蒙之吉. 故<庾信>得以行其志, 與上國協謀, 合三土爲一家, 能以功名終焉.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고>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滅而無聞, 若<庾信>, 則鄕人稱頌之, 至今不亡. 士大夫知之, 可也, 至於추童牧竪, 亦能知之, 則其爲人也, 必有以異於人矣.

三國史記卷第四十三.


저자의 견해 : 당의 이 강이 헌종에게 말했다.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자를 등용하며, 대신과 대화할 때는 공경스럽고 믿음직하게 하여 소인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며, 어진 사람과 어울리는 경우에는 친하게 지내되 예절을 갖추어 불초한 자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소서." 성실하도다, 이 말이여! 이는 실로 임금이 갖추어야 할 요긴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상서」에서 말했다.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길 때는 의심하지 말며, 간사한 자를 버릴 때도 의심하지 말라."

신라가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고, 임무를 맡길 때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그의 계책은 실행되고 그의 말은 채용되어, 그로 하여금 자신의 계책이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원망을 품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가히 육오동몽의 길함[六五童蒙之吉]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은 자신의 뜻한 바를 행할 수 있어 중국과 협력하여 삼국을 합쳐서 한 나라로 만들었고, 능히 공명으로써 일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 보고의 의용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없었다면 그들에 대한 사적이 없어져서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 같은 사람은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도 능히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위인이 틀림없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 43 끝




三國史記卷第四十四.



삼국사기 권 제 44


列傳第四.

<乙支文德>·<居柒夫>·<居道>·<異斯夫>·<金仁問>·<金陽>·<黑齒常之>·<張保고>·(+<鄭年>)??·<斯多含>.


趙炳舜.

열전 제 4

을지문덕.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 인문. 김 양. 흑치상지. 장 보고. 사다함.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지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大業}??>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록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 則執之, <仲文>等, 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태<文德>曰: "更欲有議{言}??,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록>而歸.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自不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록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走}??,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을지문덕은 가문의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가 있었고 동시에 글도 지을 줄 알았다.

수 나라 개황 연간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자,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 대장군 우 중문은 낙랑도로 나와서 9군과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이 왕의 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가서 항복하는 체하였으나, 이는 사실 그들의 허실을 보려는 것이었다. 술과 중문은 이 보다 앞서 황제의 비밀 교지를 받았었다. 이에는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을 만나거든 체포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따라 중문 등은 문덕을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로 있던 상서 우승 유 사룡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뒤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문덕을 속여서 말하기를 "재차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왔다. 술과 중문은 문덕을 놓친 뒤에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는데, 중문은 정예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술이 이를 말렸다. 중문이 화를 내어 말했다.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옵겠는가?" 술 등은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수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매번 패배한 척하며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술은 하룻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뱃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중의에 몰리기도 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文德>出軍, 四面초擊之, <述>等且戰且行, (+秋七月)??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君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록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遼>, 九{凡}??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문덕이 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알았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

중문이 답서를 보내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가장하고 술에게 요청하였다.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조견하겠다." 술은 군사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방어진을 만들며 행군하였다.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니 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갔다. 그들이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강을 건너 갔을 때, 문덕이 군사를 몰아 그들의 후군을 맹공하여 우둔위장군 신 세웅을 죽였다. 이렇게 되자 모든 적군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 장졸이 달려서 패주하였는데,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압록강에 이르니 그들은 4백 50리를 간 셈이다. 처음 요수를 건너 올 때 그들은 9군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저자의 견해 : 양제의 요동 전역은, 출동 병력이 전례가 없을 만큼 거대하였다. 고구려가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능히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춘추좌전」]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居柒夫>[或云<荒宗>.]姓金氏, <奈勿王>五世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찬, <居柒夫>少탁弛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첨<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堂說經, 遂詣聽講經. 一日, <惠亮>問曰: "沙{汝}??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 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趨}??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연함鷹視, 將來必爲將師{將帥}??.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相}??好者, 有如교日." 遂還國返本從仕, 職至大阿찬.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거칠부[혹은 황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고, 나물왕의 5세손이며, 조부는 잉숙 각간이요, 아버지는 물력 이찬이었다. 거칠부는 젊었을 때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원대한 뜻을 품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을 유람하였는데, 문득 고구려를 정탐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 나라 경내로 들어 갔다가 법사 혜량이 강당을 열고 불경을 강설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불경 강의를 들었다.

하루는 혜량이 물었다. "사미는 어디서 왔는가?" 거칠부가 대답하였다. "저는 신라인입니다." 그 날 밤에 법사가 그를 불러 놓고 손을 잡으며 은밀히 말했다.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너의 용모를 보니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마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테지?" 거칠부가 대답하였다. "제가 외딴 지방에서 성장하여 참된 도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스님의 높으신 덕망과 명성을 듣고 와서 말석에 참여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여 주소서." 법사가 말했다. "노승이 불민하지만 그대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네. 이 나라가 비록 작지만 그대가 하려는 일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대가 잡힐까 염려되어 일부러 은밀히 일러 주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 거칠부가 돌아가려 하니 법사가 다시 말했다. "그대의 상을 보니 제비턱에 매눈이로다. 앞으로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거칠부가 말했다. "만일 스님의 말씀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이는 스님과 제가 모두 바라지 않는 일이니, 밝은 해를 두고 그런 일이 없도록 맹세하겠습니다." 그는 마침내 귀국하여 본심대로 벼슬길에 나아가 직위가 대아찬에 이르렀다.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찬.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찬·<比台>角찬·<耽知>잡찬·<非西>잡찬·<奴夫>波珍찬·<西力夫>波珍찬·<比次夫>大阿찬·<未珍夫>阿찬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 <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 領其徒, 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 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 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진흥대왕 6년 을축에 그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들을 소집하여 신라의 국사를 편찬하였고, 파진찬 벼슬을 더 받았다.

진흥왕 12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여덟 장군으로 하여금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 때 혜량 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읍배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성명을 보전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아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의 나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이에 거칠부가 그를 말에 태워 함께 돌아 와서 왕에게 배알시키니, 왕이 그를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를 열고 팔관법을 실시하였다.

진지왕 원년 병신에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어 스스로 군국사무를 담당하다가 늙은 뒤에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居道>, 失其族姓, 不知何所人也, 仕<脫解>尼師今, 爲干. 時, <于尸山國>·<居柒山國>, 介居隣境, 頗爲國患. <居道>爲邊官, 潛懷幷呑之志, 每年一度, 集群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之, 馳走以爲戱樂, 時人稱爲馬叔{技}??. 兩國人, 習見之, 以爲<新羅>常事, 不以爲怪. 於是, 起兵馬, 擊其不意, 以滅二國.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거도는 성이 전해지지 않고 어느 곳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탈해 이사금 때 벼슬을 하여 간이 되었는데, 이 때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이웃 국경에 끼어 있으면서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거도가 변경 관장으로서 은근히 그 나라들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매년 한 차례씩 장토 들에 말 떼를 모아 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즐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숙이라고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이를 항상 보아 왔으므로 신라인들의 일반적인 행사라고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거도가 병마를 출동시켜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멸하였다.


○<異斯夫>[或云<苔宗>.]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何瑟羅州}>??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獅子}??,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卽}??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乃}??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太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主{王}??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申{甲}??士(+一千)??戍之. 時, <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고, 나물왕의 4세 손이다. 지도로왕 때 변경 관장이 되어 거도의 권모를 모방하여 마희로써 가야[혹은 가라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지증왕 13년 임진에 그는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병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나 전략으로 항복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 거짓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 원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은 다음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대승하였다.


○<金仁問>, 字<仁壽>, <大宗大王{太宗大王}>??第二子也. 幼而就學, 多讀儒家之書, 兼涉<莊>·<老>·浮屠之說. 又善隸書射御鄕樂, 行藝純熟, 識量宏弘, 時人推許. <永徽>二年, <仁問>年二十三歲, 受主{王}??命, □{入}??大<唐>宿衛, <高宗>謂涉海來朝, 忠誠可尙, 特授左領軍衛將軍. 四年, 詔許歸國覲省, <太宗大王>授以<押督州>援管{摠管}??. 於是, 築<獐山城>, 以設險, <太宗>錄其功, 授食邑三百戶. <新羅>屢爲<百濟>所侵, 願得<唐>兵爲援助, 以雪着{羞}??恥, 擬諭宿衛<仁問>乞師. 會, <高宗>, 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討<百濟>. 帝徵<仁問>, 問道路險易, 去就便宜. <仁問>應對尤詳, 帝悅制授<神丘>道副大摠管, 래赴軍中. 遂與<定方>濟海, 到<德物島>. 主{王}??命太子, 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巨艦一百소, 載兵迎延之. 至<熊津>口, 賊瀕江屯兵, 戰破之, 乘勝入其都城滅之. <定方>부王<義慈>及太子<孝>·王子<泰>等, 廻<唐>.


趙炳舜.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인문의 자는 인수이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여 유가의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동시에 「장자」, 「노자」 및 불교 서적을 널리 섭렵하였다. 또한 예서를 잘 쓰고, 활쏘기, 말타기, 향악을 잘 하였는데, 이처럼 기예에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였다.

영휘 2년 인문의 나이 23세 때, 왕명을 받들고 당 나라에 가서 숙위하였다. 고종은 그가 바다를 건너와 내조하자 충성이 가상하다 하여 특별히 좌령군위장군을 제수하였고, 4년에 조칙을 내려 본국으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게 하였다. 태종대왕이 그에게 압독주 총관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을 쌓아 요새를 설치하였으므로 태종이 그의 공로를 기록하고 식읍 3백 호를 주었다. 신라가 여러 번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되자, 태종은 당 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원수를 갚고자 하여, 숙위하러 가는 인문으로 하여금 당의 원군을 청하려 하였다. 때마침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도록 하였다.

황제가 인문을 불러 도로의 험난한 사정과 행군의 편의에 대하여 물었는데, 인문이 일일이 소상하게 대답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인문에게 신구도 부대총관의 관직을 주어 정방의 병영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인문은 마침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이르렀다. 왕은 태자에게 명령하여 장군 유신, 진주, 천존 등을 데리고 큰 전함 1백 척에 군사를 싣고 당군을 맞이 하게 하였다. 웅진 어귀에 이르니 적이 강가에 집결하여 있었으므로 그들과 싸워서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백제의 서울에 들어가 그들을 격파하였다. 정방은 백제의 왕 의자와 태자 효, 왕자 태 등을 사로잡아 당 나라로 돌아갔다.


○大王嘉尙<仁問>功業, 授波珍찬, 又加角千{角干}??. 尋, 入<唐>宿衛如前. <龍朔>元年, <高宗>召謂曰: "朕旣滅<百濟>, 除爾國患, 今, <高句麗>負固, 與<穢貊>同惡, 違事大之禮, 棄善隣之義, 朕欲遣兵致討, 爾歸告國王, 出師同伐, 以殲垂亡之虜." <仁問>便歸國, 以致帝命, 國王使<仁問>與<庾信>等, 練兵以待. 皇帝命邢國公<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以六軍, 長驅萬里, 오<麗>人於<須江{浿江}>??, 擊破之, 遂圍<平壤>, <麗>人固守, 故不能克. 士馬多死傷, 糧道不繼. <仁問>與留鎭<劉仁願>, 率兵兼輸米四千石·租二萬餘斛, 赴之, <唐>人得食, 以大雪, 解圍還.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대왕이 인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고 또한 각간 벼슬을 더 주었다. 그는 얼마 후 당에 들어 가서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

용삭 원년에 고종이 불러 말했다. "내가 이미 백제를 격멸하여 너희 나라의 근심을 제거하였으나, 지금 고구려가 견고한 요새를 믿고 예맥과 더불어 악한 짓을 하여 사대의 예를 어기고 선린의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 내가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코자 하니 너도 돌아가서 국왕에게 이 말을 고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우리와 함께 거의 망하게 된 적을 섬멸케 하라."

인문은 즉시 본국으로 돌아와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왕은 인문으로 하여금 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정비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황제는 형국공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소정방은 6군을 거느리고 만리길을 달려 패강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하여 이를 격파하고, 그 길로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가 굳게 수비하자 승리하지 못하고, 도리어 많은 병마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다. 그 뿐 아니라 군량미의 운송로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인문은 유진장 유 인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쌀 4천 석과 벼 2만여 곡을 싣고 평양으로 갔다. 이에 따라 당군은 식량을 얻었으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羅>人將歸, <高句麗>謀要擊於半塗, <仁問>與<庾信>, 詭謀夜遁. <麗>人翌日覺而追之, <仁問>等, 廻擊大敗之, 斬首一萬餘級, 獲人五千餘口而歸. <仁問>又入<唐>, 以<乾封>元年, 扈駕登封<泰山>, 加授右驍衛大將軍, 食邑四百戶. <摠章>元年戊辰, <高宗>皇帝遣英國公<李勣>, 帥師伐<高句麗>, 又遣<仁問>徵兵於我. <文武大王>與<仁問>, 出兵二十萬, 行至<北漢山城>, 王住此, 先遣<仁問>等, 領兵會<唐>兵, 擊<平壤>月餘, 執王<臧>, <仁問>使主{王}??궤於英公前, 數其罪, 王再拜, 英公禮答之, 卽以王及<男産>·<男律{男建}>??·<男生>等還. <文武大王>, 以<仁問>英略勇功, 特異常倫, 賜故大琢角干<朴紐>食邑五百戶. <高宗>亦聞<仁問>屢有戰功, 制曰: "爪牙良將, 文武英材, 制爵疏封, 尤宜嘉命." 仍加爵秩, 食邑二千戶. 自後, 侍衛宮禁, 多歷年所.


李丙燾.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라군이 돌아가려 했을 때, 고구려군이 돌아오는 길목을 막고 공격하려 하자 인문은 유신과 함께 꾀를 내어 야음을 기하여 도망하였다. 고구려인이 다음날에야 이를 알고 추격해오자 인문 등이 반격하여 대파하고,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5천여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인문은 다시 당에 갔다. 그가 건봉 원년에 거가를 따라 태산에 올라가 봉선의 의식을 행하였다 하여, 추가로 우효위 대장군을 제수하고 식읍 4백 호를 더 주었다.

총장 원년 무진에 고종 황제가 영국공 이 적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치게 하고, 또한 인문을 보내 우리에게도 군사의 징발을 요구하였다. 문무대왕은 군사 20만을 출동시켜 인문과 함께 북한산성으로 갔다. 왕은 그곳에 머무르며 먼저 인문 등에게 군사를 주어 당군과 회합하여 평양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한달 남짓 만에 보장왕을 생포하였다. 인문이 고구려왕을 영공 앞에 꿇어 앉히고 그의 죄를 따지니, 고구려왕이 재배하고 영공이 그에 답례를 하였다. 영공은 곧 왕과 남산, 남건, 남생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 문무대왕은 인문의 지략이 훌륭하고 공로가 뛰어나다 하여 대탁 각간 박유의 식읍 5백 호를 주었다. 고종도 인문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제서를 내려 "조아의 양장이요, 문무의 영재이다. 작위를 제정하여 새로운 봉읍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 하고, 작위를 더하고 식읍 2천 호를 더 주었다. 그 뒤로 그는 궁궐에서 황제를 시위하며 많은 세월을 보냈다.


○<上元>元年, <文武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唐>皇帝大怒, 以<劉仁軌>爲<계林>道大摠管, 發兵來討, 詔削王官爵. 時, <仁問>爲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在京師, 立以爲王, 令歸國, 以代其兄, 仍策爲<계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 <仁問>懇辭不得命, 遂上道. 會, 王遣使, 入貢且謝罪, 皇帝赦之, 復王官爵, <仁問>中路而還, 亦復前銜. <調露>元年, 轉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 <載初>元年, 授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 <延載>元年四月二十九日, 寢疾薨於帝都, 享年六十六. 訃聞, 上震悼, 贈수加等, 命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陸元景>·判官朝散郞直司禮寺某等, 押送靈柩{樞}??. <孝昭大王{孝照大王}>??追贈太大角干, 命有司, 以<延載>二年十月二十七日, 폄于京<西原>. <仁問>七入大<唐>, 在朝宿衛, 計月日, 九{凡}??二十二年. 時, 亦有<良圖>海찬, 六入唐, 死千{于}??<西京>, 失其行事始末.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상원 원년에 문무왕은 고구려의 반군을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고토를 차지하였다. 당 나라 황제는 크게 노하여 유 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케 하고,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 때 인문은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이 되어 당 나라 서울에 있었다. 황제는 그를 임금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형을 대신하게 하고,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하였다. 인문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황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길을 떠났다. 그 때 마침 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며 사죄하였므로 황제는 죄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으며 인문은 중도에서 돌아가 역시 이전의 관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조로 원년에 진군 대장군 행우무위위 대장군에 전임되었고, 재초 원년에는 보국 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 장군에 제수되었다.

연재 원년 4월 29일, 당 나라 서울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6세였다.

부음을 듣고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 높여 주었다. 그리고 조산대부행사례시대의서령 육 원경과 판관 조산랑, 직사례시 모 등에게 명하여 영구를 호송하게 하였다. 효소대왕은 그에게 태대 각간을 추증하고, 유사에게 명령하여 연재 2년 10월 27일 서울 서원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인문은 일곱 번이나 당에 들어갔으니, 당의 조정에서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22년이나 된다. 그 당시 양도 해찬도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金陽>字<魏昕>, <太宗大王>九世孫也. 曾祖<周元>伊찬,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찬,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大和{太和}>??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大武{太守}??, 尋, 拜<中原>大尹, 俄, 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開成>元年丙辰, <興德王>薨, 無嫡嗣, 王之堂弟<均貞>, 堂弟之子<悌隆>, 爭嗣位. <陽>與<均貞>之子阿찬<祐徵>·<均貞>妹서<禮徵>, 奉<均貞>爲王, 入<積板宮>, 以族兵宿衛. <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 <陽>陳兵宮門, 以拒之曰: "新君在此, 爾等何敢兇逆如此." 遂引弓射殺十數人. <悌隆>下<裴萱伯>, 射<陽>中股. <均貞>曰: "彼衆我寡, 勢不可알, 公其佯退, 以爲後圖." <陽>, 於是, 突圍而出, 至<韓기>[一作<潢祇>.]市, <均眞{均貞}>??沒於亂兵, <陽>號泣旻天, 誓心白日, 潛藏山野, 以俟時來.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김 양의 자는 위흔이니, 태종대왕의 9세 손이다. 증조는 주원 이찬이오, 조부는 종기 소판이오, 부친은 정여 파진찬이니 대대로 모두가 장상이었다. 양은 태어날 때부터 영특하였다. 태화 2년, 흥덕왕 3년에 고성군 태수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중원 대윤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무주 도독으로 전직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다.

개성 원년 병진에 흥덕왕이 죽고 그를 계승할 적장자가 없자 왕의 당제 균정과 당제의 아들 제륭 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때 양은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과 균정의 매부인 예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세워 적판궁에 들어가 사병으로 숙위케 하였다. 그 때 제륭의 도당인 김 명, 이 홍 등이 적판궁을 포위하였다. 양은 군사들을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했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토록 흉악하게 거역할 수 있느냐?" 그는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제륭의 부하 배 훤백이 양을 쏘아 다리를 적중시켰다. 균정이 말했다. "저 쪽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므로 그 세력을 막을 수 없다. 공은 물러나는 체하여 후일을 도모하라!" 이에 양이 포위를 뚫고 나와서 한기(韓岐)[한기(漢祈)라고도 한다.]시에 이르렀고, 균정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양은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해를 두고 결심을 다진 다음,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至<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徵>, 收殘兵, 入<淸海鎭>, 結大使<弓福>, 謀報不同天之讐. <陽>聞之, 募集謀士兵卒, 以三年二月, 入海, 見<枯徵{祐徵}>??, 與謀擧事. 三月, 以勁卒五千人, 襲<武州>, 至城下, 州人悉降, 進次<南原>, 오<新羅>兵, 與戰克之. <祐徵>以士卒久勞, 且歸<海鎭>, 養兵말馬. 冬, 彗패見西方, 芒角指東, 衆賀曰: "此除舊布新, 報寃雪恥之祥也." <陽>號爲乎東將軍{平東將軍}??, 十二月再出, <金亮詢>以<鵡洲>軍來, <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律榮{張建榮}>??·<李順行>六將統兵, 軍容甚盛, 鼓行至<武州><鐵冶縣>北州{川}??. <新羅>大監<金敏周>, 以兵逆之, 將軍<駱金>·<李順行>, 以馬兵三千, 突入彼軍, 殺傷殆盡.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개성 2년 8월이 되자 전 시중 우징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대사 궁복(장 보고)과 손을 잡고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양은 이 말을 듣고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3년 2월에 해중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정예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에 이르러 신라군과 싸워 승리했다. 우징은 군사들이 오랫 동안 싸워서 피로해졌다 하여 다시 해진으로 돌아가서 병마를 휴양시켰다. 겨울에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양을 평동장군이라 하였다. 12월에 재차 출동하자 김 양순이 무주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우징이 또한 용사들인 염 장, 장 변, 정 년, 낙 금, 장 건영, 이 순행 등 여섯 장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군사의 위풍이 막강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 북쪽에 도착하니, 신라 대감 김 민주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였다. 장군 낙 금과 이 순행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상대 군중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모두 살상하였다.


○四年正月十九日, 軍至<太丘{大丘}>??, 王以兵迎拒, 逆擊之, 王軍敗北, 生擒斬獲, 莫之能計. 時, 王顚沛逃人{入}??離宮, 兵士尋害之. <陽>於是命左右將軍領騎土{士}??, 徇曰: "本爲報讐, 今, 渠魁就戮, 衣冠士女百姓, 宜各安居, 勿妄動." 遂牧{收}??復王城, 人民案堵. <陽>召<萱伯>曰: "犬各吠非其主, 爾以其主射我, 義士也, 我勿校, 爾安無恐." 衆聞之曰: "<萱伯>如此, 其他何憂." 無不感悅. 四月淸宮, 奉迎侍中<祐徵>卽位, 是爲<神武王>. 至七月二十三日, 大王薨, 太子嗣位, 是爲<文聖王>. 迫{追}??錄功, 授蘇判兼倉部令, 轉侍中兼兵部令, <唐>聘問, 兼授公檢校衛尉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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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정월 19일, 양의 군사가 대구에 도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항거하였다. 양의 군사가 이들을 역습하니 왕의 군사가 패배하여, 양에게 생포되거나 죽고 노획 당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때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궁으로 도망쳐 갔으나 군사들이 곧 찾아서 살해하였다. 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사를 인솔하게 하고 널리 알렸다. "이 싸움은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괴수가 죽었으니 의관, 사녀, 백성 모두는 각자 안심하고 살 것이며 망동하지 말라!"

그가 드디어 서울을 수습 정돈하니,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살게 되었다. 양이 훤백을 불러 말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네가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로다. 내가 탓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훤백에게도 저렇게 하니 다른 사람이야 무엇을 근심하랴?" 그들은 감복하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월에 왕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 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신무왕인데, 신무왕이 7월 23일에 죽고 태자가 뒤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이다. 양의 공로를 추가로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고, 다시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시켰다. 당에서 빙문하고 동시에 공에게 검교 위위경을 제수하였다.


○<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 薨于私第, 享年五十. 訃聞, 大王哀慟, 追贈舒發翰, 其贈賻殮葬, 一依<金庾信>舊例. 以其年十二月八日, 陪葬于<太宗大王>之陵. 從父兄<昕>, 字<泰>, 父<璋如>, 仕至侍中波珍찬. <昕>幼而聰悟, 好學問. <長慶>二年,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昕><太宗>之裔, 精神朗秀, 器宇深沈, 可以當選. 遂令入朝宿衛. 歲餘請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大常卿{太常卿}??. 及歸, 國王以不辱命, ??{擢}??授<南原>大守{太守}??, 累遷至<康州>大都督, 尋加伊찬兼相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

대중 11년 8월 13일에 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니 왕이 슬퍼하며 서발한을 추중하고, 부의와 염장을 모두 김 유신의 장례 때와 같게 하여,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에 배장하였다.

양의 종부형 흔은 자가 태이며 부친 장여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다. 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 2년에 헌덕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김 흔을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태종의 후예요, 두뇌가 총명하며, 도량이 깊고 침착하니 뽑아 보낼 만하다"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당에 보내 숙위하게 하였다. 그가 한 해 남짓 당에 있다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로써 금자 광록 대부 시태상경을 제수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국왕이 그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남원 태수를 제수하였고, 그 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 대도독에 이르렀으며, 얼마 안 되어 이찬 겸 상국 벼슬을 더 주었다.


○<開成>已未{己未}??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 敗績. 自以敗軍, 又不能死綏, 不復仕官. 入<小白山>, 葛衣蔬食, 與浮圖遊. 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 感疾終於山齋, 享年四十七歲, 以其年九月十日, 葬於<奈靈郡>之南原. 無嗣子, 夫人主喪事, 後爲比丘尼.


趙炳舜.

그는 개성 기미 윤 정월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전하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하였다 하여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백산에 들어가 칡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지내다가 대중 3년 8월 27일에 병으로 인하여 산재에서 죽었다. 향년 47세였다. 그 해 9월 10일에 나령군 남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그의 부인이 상사를 주관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黑齒常之>,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毅有謀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遂復二百餘城.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軌>降, 入<唐>爲左領軍員外將軍<양州{洋州}>??刺史. 累從征伐積功, 授爵賞殊等. 久之, 爲<燕然道>大摠管, 與<李多祚>等, 擊<突厥>破之. 左監門衛中郞將<寶璧>, 欲窮追邀功, 詔與<常之>共討, <寶璧>獨進, 爲虜所覆, 擧軍沒. <寶璧>下吏誅, <常之>坐無功. 會, <周興>等誣其與鷹揚將軍<趙懷節>叛, 捕繫詔獄, 投환死. <常之>御下有恩, 所乘馬爲士所추, 或請罪之. 答曰: "何遽以私馬, 鞭官兵乎?" 前後賞賜分麾下, 無留자. 及死, 人皆哀其枉.


李丙燾. 「唐書」.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신장이 7척여가 되었으며, 동작이 빠르고 힘이 강하였으며 지략이 훌륭하였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의 자사와 동일하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와 함께 항복하였다. 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겁을 내어 좌우 관장 10여 명과 함께 도주하여,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웅거하며 굳게 수비하니 열흘이 못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를 독려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용삭 연간에 고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불러 타이르자 그는 유 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그는 당에 들어가서 좌령군 원외 장군 양주 자사가 되었으며, 수차례의 정벌에 종사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특별한 작위와 상을 받았다. 오랜 뒤에는 연연도 대총관이 되어 이 다조 등과 함께 돌궐을 격파하였다. 이 때 좌감문위 중랑장 보벽이 돌궐을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세우려 하자 황제가 상지와 함께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보벽이 혼자 진공하다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전군이 패배하였다. 보벽은 옥리에게 보내져 처형되고, 상지도 공을 세우지 못한 죄를 짓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주 흥 등이 그가 응양 장군 조 회절과 함께 반란을 음모한다고 무고하였으므로, 상지는 조옥에 갇혔다가 교형을 당하였다. 상지는 아랫 사람들을 은덕으로 다스렸다. 병졸들이 그의 말을 때린 적이 있었다. 어떤 자가 그 병졸을 처벌하자고 하자 상지가 대답하였다. "어찌 사사로운 개인의 말에 대한 일로, 관병을 매로 때릴 수 있는가?"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휘하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겨두는 것이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張保고>[<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일, 角其勇壯, <保고>差不及也, <年>以兄呼<保고>. <保고>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 <保고>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고>萬人, 此後, 海上無죽鄕人者. <保고>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氷縣{漣水縣}>??. 一日, 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고>." <元規>曰: "若與<保고>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謁, <保고>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고>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고>爲相, 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言傳, 故兩存之.]


李丙燾.

「북한본」.

장 보고[「신라 본기」에는 궁복으로 되어 있다]와 정 년[년(年)은 연(連)으로도 쓴다.]은 모두 신라인이다.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전투를 잘하였으며, 정 년은 또한 바닷물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잠수하여 다녀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보고가 연에게 약간 모자랐으나 연은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그러나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 항상 맞수가 되어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당 나라에 가서 무녕군 소장으로 있을 때, 말을 달리며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 뒤에 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에게 말했다. "중국을 두루 돌아다녀 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약취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은 완도라고 부른다. 대왕이 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진영을 설치케 하니, 이 뒤로는 바다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파는 자가 없어졌다. 보고는 이미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년은 직업을 잃고 굶주림 속에서 사수의 연수현에서 살았다. 하루는 수비하는 장수 풍 원규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서 장 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 하니 원규가 말하기를 "그대와 장 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년이 말하기를 "배고픔으로 죽는 것은 싸우다가 죽는 것 만큼 통쾌하지 못하다. 더구나 고향에서 죽으니 좋은 일이 아닌가?"라 하고 드디어 그곳을 떠나 장 보고를 만났다.

그가 보고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기는데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고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임금이 없다는 소문이 들렸다. 보고가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연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그대가 아니면 나라의 화란을 평정할 수 없다." 연이 국도에 들어가 배반한 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은 장 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연으로 하여금 보고를 대신하여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것은 신라의 전기와는 매우 다르지만, 두 목이 말하여 전해오는 것이므로 두 가지를 그대로 기록해둔다.]


○論曰: <杜牧>言: "<天寶><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 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俱爲牙門都將, 二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제相視, 不交一言.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 計未決, 詔<臨淮>, 分<汾陽>半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추下, 持手上堂, 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及別, 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巨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 心不疑, 兵可分. 平生積憤, 知其心, 難也. 忿必見短, 知其材, 益難也. 此<保고>與<汾陽>之賢等耳. <年>投<保고>, 必曰: '彼貴我賤, 我降下之, 不宜以舊忿殺我.' <保고>果不殺, 人之常情也; <臨淮>請死於<汾陽>, 亦人之常情也. <保고>任<年>事, 出於己. <年>且饑寒, 易爲感動. <汾陽>·<臨淮>平生抗立, <臨淮>之命, 出於天子, 확於<保고>, <汾陽>爲優, 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 彼無他也, 仁義之心, 與雜情병植, 雜情勝則仁義滅, 仁義勝則雜情消. 彼二人, 仁義之心旣勝, 復資之以明, 故卒成功. 世稱<周>·<召>爲百代之師, <周公>擁孺子, 而<召公>疑之. 以<周公>之聖·<召公>之賢, 少事<文王>, 老佐<武王>, 能平天下, <周公>之心, <召公>亦且不知之. 苟有仁義之心, 不資以明, 雖<召公>尙爾, 況其下哉. 語曰: '國有一人, 其國不亡.' 夫亡國, 非無人也, 丁其亡時, 賢人不用. 苟能用之, 一人足矣." <宋祈>??曰: "嗟乎, 不以怨毒相甚{기}??, 而先國家之憂, <晉>有<祁奚>, <唐>有<汾陽>, <保고>, 孰謂<夷>無人哉."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저자의 견해 : 두 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보 연간의 안 녹산의 난 때, 삭방 절도사 안사순은 녹산의 종제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곽 분양에게 조서를 주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열흘 후에는 다시 이 임회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가지고 가서 삭방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동으로 조, 위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사순 때는 분양과 임회가 모두 아문 도장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항상 서로 눈을 흘기고 한 마디 말도 주고 받지 않았었다. 분양이 사순의 직무를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미처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분양은 임회에게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주고 동쪽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임회가 들어가 분양에게 청하였다. '이 한 몸이 죽는 것은 실로 달게 받겠으나 처자만은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시오.' 분양은 내려가서 임회의 손을 잡고 당상으로 올라와 마주 앉아 말했다.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의 적을 평정할 수 없네. 어찌 사사로운 원한을 생각할 때란 말인가?' 그들은 작별할 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충성과 의리로써 서로 격려하였으니, 나라의 큰 도적을 평정하게 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배반할 마음이 없음을 알고,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인물임을 안 뒤에야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법이다. 평생토록 상대에 대하여 분한 심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상대의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상대의 단점이 먼저 보이게 되므로 상대의 재능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으로 보면 장보고와 분양의 현명한 정도는 비슷하다. 정 년이 보고에게 갈 때 틀림없이 "저 사람은 귀하게 되었고 나는 천하니, 내가 자신을 낮춘다면 응당 옛날의 분노로 말미암아 나를 죽이지는 않으리라"라고 하였을 것이다. 보고는 과연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인지상정이오, 임회가 분양에게 죽기를 청한 것도 역시 인지상정이었다. 장 보고가 정 년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우러나온 것이다. 정 년은 또한 굶주린 상황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도 쉬운 일이었다. 분양과 임회는 평생 대립하였지만, 임회에게 내린 명령은 천자에게서 전권을 받은 분양에게서 나왔으니, 장 보고와 비교하자면 곽 분양이 더욱 훌륭한 편이다. 이것이 바로 성현들이 성패를 속단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의 마음이 잡스런 감정과 함께 존재하여, 잡스런 감정이 이기면 인의가 사라지고, 인의가 이기면 잡스런 감정이 사라지는 이치이다. 장 보고와 곽 분양,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긴 데다가 총명함이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하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공과 소공을 백 대의 스승으로 칭송하지만, 주공이 어린 임금을 보좌할 때 소공이 그를 의심했었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현명함으로 젊어서는 문왕을 섬겼고, 늙어서는 무왕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지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인의의 마음이 있다할지라도 바탕에 총명함이 없으면, 비록 소공일지라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는가? '나라에 군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대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쓸 줄 안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한 것이다."

송 기는 말했다.

"아아! 개인적인 원망으로 상호 해치지 않고, 나라 일을 먼저 걱정한 사람으로는 진에 기 해가 있었고, 당에 분양과 장 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이족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斯多含>, 系出眞骨, <奈密王>七世孫也, 父<仇梨知>級찬. 本高門華胄, 風標淸秀, 志氣方正, 時人請奉爲花郞, 不得已爲之. 其徒無慮一千人, 盡得其歡心. <眞興王>命伊찬<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 <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확{確}??,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 領麾下兵, 先入<전檀梁>[<전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云.]. 其國人, 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 계師還, 王策功, 賜<加羅>人口三百, 受已皆放, 無一留者. 又賜田, 固辭, 王强之, 請賜<閼川>不毛之地而已. <含>始與<武官郞>, 約爲死友. 及<武官>病卒, 哭之慟甚, 七日亦卒, 時年十七歲.

三國史記卷第四十四.


今西龍.

사다함은 그 계통이 진골 출신으로 나밀왕의 7세 손이요, 부친은 구리지 급찬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청수하고 지기가 방정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 못하여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라[가야라고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 때 사다함은 나이가 십 오륙 세로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요청이 간절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비장으로 임명하니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돌)이라 하였다.]으로 들어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뜻밖에도 군사들이 갑자기 들어닥치자 놀란 나머지 방어를 하지 못했으므로, 대군이 이 틈을 이용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멸하였다. 군사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전공을 책정하여 가라 인구 3백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는 즉시로 전부 석방하여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에게 또한 토지를 주었으나 굳이 사양하므로 왕이 받을 것을 강권하니 알천에 있는 불모지만을 요청하였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과 목숨을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나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자기도 죽으니 당시 나이가 17세였다.

삼국사기 권 제 44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五.



삼국사기 권 제 45


列傳第五.

<乙巴素>·<金后稷>·<祿眞>·<密友>·<紐由>·<明臨답夫>·<昔于者{昔于老}>??·<朴堤上>·<貴山>·<溫達>.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열전 제 5

을파소. 김 후직. 녹진. 밀우. 유유. 명림답부. 석우로. 박 제상. 귀산. 온달.


○<乙巴素>, <高句麗>人也. <國川王>時, 沛者<於비留{於卑留}>??·評者<左可慮>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左可慮>等謀反, 王誅竄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 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을파소는 고구려인이다.

국천왕 때의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등이 모두 왕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부리고 그릇된 행동을 많이 하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자 좌가려 등이 모반하므로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명을 내려 말했다. "근자에 벼슬이 측근에게 주어지고, 지위가 덕행에 따라 올라 가지 못하는 일이 많아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왕실을 동요시켰다. 이는 과인이 총명치 못한 탓이었다. 이제 너희들 4부에서는 각기 재야에 있는 현량을 천거토록 하라!" 이에 4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자 왕이 그를 불러서 국정을 맡기려 하였다.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록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도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정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후손입니다. 그는 의지가 강하고 지혜가 깊은데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그를 초빙하여 중외 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으며 말했다. "내가 외람되이 선대의 왕업을 계승하여 신민의 위에 처하게 되었으나, 덕과 자질이 부족하여 정치를 잘하지 못하고 있소. 선생이 자질을 감추고 현명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초야에 묻힌 지 오래였으나, 지금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고쳐 잡고 이렇게 와주었으니, 이는 비단 나에게 다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사직과 백성의 복이라오.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는 바이니 공은 마음을 다하여 주기 바라오."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 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巴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巴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 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 庶績之凝, 子之功也." 내拜爲大使者. 至<山上王>七年秋八月, <巴素>卒, 國人哭之慟.


파소는 생각은 비록 몸을 나라에 바치고 싶었으나 맡은 바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말했다. "신의 노둔함으로 감히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발하여 높은 관직을 줌으로써 위업을 달성케 하소서!" 왕이 그의 뜻을 알고 곧 국상을 제수하여 정사를 맡겼다. 이 때 조정의 신하들과 외척들은 파소가 새로 등용되어 이전의 대신들을 이간한다 하여 그를 미워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려 말했다.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일족을 멸하리라." 파소가 물러 나와서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살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떳떳한 행동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우하시니 어찌 다시 예전의 은거를 생각하랴?"라고 말하며, 곧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내외가 무사하였다. 왕이 안류에게 "만일 그대의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얻어서 그와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모든 치적이 이루어진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라 말하고, 그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파소가 죽자 백성들이 통곡하였다.


○<金后稷>, <智證王>之曾孫. 事<眞平大王>, 爲伊찬, 轉兵部令. 大王頗好日{田}??獵, <后稷>諫曰: "古之王者, 必一日萬機, 深思遠慮, 左右正士, 容受直諫, 자자골골, 不敢逸豫, 然後, 德政醇美, 國家可保. 今, 殿下日與狂夫獵士, 放鷹犬, 逐雉兎, 奔馳山野, 不能自止. <老子>曰: '馳聘田獵, 令人心狂.' 『書』曰: '內作色荒, 外作禽荒, 有一于此, 未或不亡.' 由是觀之, 內則蕩心, 外則亡國, 不可不省也, 殿下其念之." 王不從, 又切諫, 不見聽.


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후직은 지증왕의 증손이다. 그는 진평대왕을 섬겨 이찬이 되었다가 병부령으로 전직하였다. 대왕이 사냥을 몹시 좋아하자 후직이 간하였다. "옛날 임금들은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반드시 심사원려하여, 좌우에 바른 선비를 두고 그들의 바른 말을 받아 들였으며, 부지런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감히 안일하고 편안할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뒤에야 덕정이 순미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매일 광부와 포수을 데리고 매와 사냥개를 놓아 꿩과 토끼를 잡기 위하여 산과 들로 뛰어 다니기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하였으며, 「서경」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을 일삼는 것 가운데 한 가지만 저질러도 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사냥은 안으로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밖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그러나 왕이 말을 듣지 않아 다시 간절하게 충언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後, 后稷疾病, 將死, 謂其三子曰: "吾爲人臣, 不能匡救君惡, 恐大王遊娛不已, 以至於亡敗, 是吾所憂也. 雖死, 必思有以悟君, 須예吾骨於大王遊전之路側." 子等皆從之. 他日, 王出行, 半路有遠聲, 若曰莫去. 王顧問: "聲何從來." 從者告云: "彼<后稷>伊찬之墓也." 遂陳<后稷>臨死之言, 大王산然流涕曰: "夫子忠諫, 死而不忘, 其愛我也深矣. 若終不改, 其何顔於幽明之間耶." 遂終身不復獵.


그 후, 후직이 병들어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자기의 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하로서 임금의 단점을 바로잡아 주지 못하였다. 아마 대왕은 놀고 즐기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아 패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것이다. 죽어서라도 꼭 임금을 깨우쳐 주려 하니, 나의 시체를 대왕이 사냥다니는 길 옆에 묻어라." 세 아들은 그의 유언대로 실행하였다.

후일 왕이 사냥을 가다가 도중에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왕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서 나느냐?"고 물었다. 종자가 말하기를 "저것은 후직 이찬의 무덤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후직이 죽을 때 남긴 말을 전해 주었다. 대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충성으로 간언하고 죽어서도 잊지 않으니, 나에 대한 사랑이 깊도다.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가!" 왕은 마침내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祿眞>, 姓與字, 未詳. 父<秀奉>一吉찬. <祿眞>二十三歲始仕, 屢經內外官, 至<憲德大王>十年戊戌, 爲執事侍郞. 十四年, 國王無嗣子, 以母弟<秀宗>, 爲儲貳, 入<月池宮>. 時, <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內外官, 退公感疾, 召國醫診脈, 曰: "病在心臟, 須服龍齒湯." 遂告暇三七日, 杜門不見賓客.


녹진의 성과 자는 자세하지 않다. 아버지는 수봉 일길찬이다. 녹진은 23세에 비로소 관직에 올라 여러 차례 내외의 직책을 역임하다가 헌덕대왕 10년 무술에 집사 시랑이 되었다. 14년에 국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왕의 아우 수종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하였다. 이 때 충공 각간이 상대등이 되어 정사당에 앉아서 내외의 관원을 전형했는데, 하루는 퇴근하여 집에 있다가 병이 들었다. 국의를 불러 진맥하니 그가 말했다. "병이 심장에 있으니 용치탕을 복용해야 합니다." 그는 곧 21일 간의 휴가를 얻어 문을 닫고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於是, <祿眞>造而請見, 門者拒焉. <祿眞>日{曰}??: "下官非不知相公移疾謝客, 須獻一言於左右, 以開鬱읍之慮, 故此來耳, 若不見, 則不敢退也." 門者再三復之, 於是, 引見. <祿眞>進曰: "伏聞寶體不調, 得非早朝晩罷, 蒙犯風露, 傷榮衛之和, 失支體之安乎?" 曰: "未至是也, 但昏昏默默, 精神不快耳." <祿眞>曰: "然則公之病, 不須藥石, 不須針폄, 可以至言高論, 一攻而破之也, 公將聞之乎?" 曰: "吾子不我遐遺, 惠然光臨, 願聽玉音, 洗我胸臆."


『북한본』.

이 때 녹진이 가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문지기가 이를 거절하였다. 녹진이 말했다. "나는 상공께서 병 때문에 빈객을 사절하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꼭 한 마디 말씀을 좌우에 드려서 답답한 근심을 풀어드려야겠기에 이렇게 온 것이다. 만나지 않고는 물러갈 수 없다." 문지기가 두 세 번 이 뜻을 전하자 충공은 그를 불러들여 만나 주었다.

녹진이 들어가 말했다. "제가 듣건대 귀중한 몸이 편치 못하시다고 하니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느라 바람과 이슬을 맞아 혈기의 조화를 손상시켜 지체의 편안함을 잃은 것이 아닙니까?" 충공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고 다만 머리가 멍하고 정신이 상쾌하지 못할 뿐이다." 녹진이 말했다. "그렇다면 공의 병은 약이나 침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말과 고상한 담론으로 단번에 고칠 수 있을 것이니 공께서 이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충공이 말했다. "그대가 나를 멀리 여기지 않고 고맙게도 와주었으니 옥음을 들려주어 내 가슴 속을 씻어 주기 바란다."


○<祿眞>曰: "彼梓人之爲室也, 材大者爲梁柱, 小者爲椽최, 偃者植者各安所施, 然後, 大廈成焉. 古者, 賢宰相之爲政也, 又何異焉? 才巨者, 置之高位, 小者授之薄任. 內則六官·百執事, 外則方伯·連率·郡守·縣令, 朝無闕位, 位無非人, 上下定矣, 賢不肖分矣, 然後, 王政成焉. 今則不然, 徇私而滅公, 爲人而擇官, 愛之則雖不材, 擬送於雲소, 憎之則雖有能, 圖陷於溝壑. 取捨混其心, 是非亂其志, 則不獨國事혼濁, 而爲之者, 亦勞且病矣. 若其當官淸白, 리事恪恭, 杜貨賂之門, 遠請託之累, 黜陟只以幽明, 予奪不以愛憎, 如衡焉, 不可枉以輕重, 如繩焉, 不可欺以曲直. 如是, 則刑政允穆, 國家和平, 雖曰開<孫弘>之閤, 置<曹參>之酒, 與朋友故舊, 談笑自樂可也. 又何必區區於服餌之間, 徒自費日廢事爲哉?"


녹진이 말했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큰 재목으로는 들보와 기둥을 만들고, 작은 재목으로는 서까래를 만들어 굽은 것과 바른 것이 각각 알맞게 자리잡은 뒤에야 큰 집이 지어집니다. 옛날에 어진 재상이 정치를 하는 법도도 무엇이 이와 달랐겠습니까? 재능이 많은 자는 높은 자리에 앉히고, 재능이 적은 자는 가벼운 소임을 맡기어, 안으로 6관 백집사와 밖으로 방백, 연솔, 군수, 현령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빈 직위가 없고, 직위마다 부당한 자가 없어서 위아래가 정연하고, 현명함과 불초함이 구별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왕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공적인 일을 그르치고, 사람을 위하여 관직을 고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재능이 없어도 아주 높은 직을 주려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유능하더라도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합니다. 취하고 버림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옳고 그름이 뜻을 어지럽게 하니, 나라 일이 혼탁해질 뿐 아니라,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도 괴롭고 병이 날 것입니다. 만일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일에 근신하며, 뇌물이 오가는 문을 막고, 청탁의 폐단을 멀리하며, 승진과 강등을 오직 그 사람의 총명에 따르고, 관직을 주고 빼앗는 것을 애증에 의하여 하지 않는다면, 마치 저울처럼 경중을 잘못 가릴리 없으며, 먹줄처럼 곡직을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정이 믿음직스럽고 국가가 화평하여, 비록 손 홍과 같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조 참과 같이 잔치를 베풀어 친구들과 한담 오락을 하고 있어도 좋을 것입니다. 어찌 꼭 약을 먹기에 몰두하고 부질없이 시일을 소비하여 공사를 폐지하겠습니까?"


○角干, 於是, 謝遣醫官, 命駕朝王室. 王曰: "謂卿剋日服藥, 何以來朝?" 答曰: "臣聞<祿眞>之言, 同於藥石, 豈止飮龍齒湯而已哉?" 因爲王一一陳之. 王曰: "寡人爲君, 卿爲相, 而有人直言如此, 何喜如焉? 不可使儲君不知, 宜往<月池宮>." 儲君聞之. 入賀曰: "嘗聞君明則臣直, 此亦國家之美事也." 後, <熊川州>都督<憲昌>反叛, 王擧兵討之, <祿眞>從事有功, 王授位大阿찬, 辭不受.


각간이 이 말을 듣자 의원을 사절하여 보내고 수레를 타고 왕궁으로 입조하였다. 왕이 말했다. "경은 날을 정해 놓고 복약한다더니 어찌하여 내조하는가?" 충공이 대답하였다.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석과 같았습니다. 어찌 용치탕을 마시는 것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는 그 자리에서 왕에게 녹진의 말을 낱낱이 고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임금이 되고, 경은 재상이 되었는데, 이와 같이 바른 말 하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태자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으니 월지궁으로 가야 되겠다"고 하였다. 태자가 이 말을 듣고 들어와서 치하하기를 "일찌기 듣건대 임금이 명철하면 신하가 바르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시 나라의 아름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웅천주 도독 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이를 치는데, 녹진이 종군하여 공로가 있었으므로 왕이 대아찬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양하고 이를 받지 않았다.


○<密友>·<紐由>者, 병<高句麗>人也. <東川王>二十年, <魏><幽州>刺史<관丘儉>, 將兵來侵, 陷<丸都城>. 王出奔, 將軍<王기>追之. 王欲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奔散殆盡. 唯<東部><密友>, 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遁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밀우와 유유는 모두 고구려인이다. 동천왕 20년에 위 나라 유주 자사 관 구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키니 왕이 성에서 나와 도주하였다. 장군 왕 흔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기 위하여 죽령에 이르렀을 때 군사들은 거의 모두 흩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이제 추격해 오는 군사가 매우 가까이 있으니 형세가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결사적으로 막겠사오니 왕께서는 도망하소서." 밀 우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힘껏 싸웠다. 왕은 이 틈을 타서 겨우 탈출하였다. 왕은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아 방어하면서 말했다. "만일 밀우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의 유 옥구가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하였다. "신이 가보겠습니다." 그는 곧 싸움터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즉시 업어 왔다. 그는 왕이 무릎을 베어주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소생했다.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호<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王曰: "諾."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전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왕은 사잇길을 헤매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마땅한 방법도 없고 형세도 궁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때, 동부 사람 유유가 말했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사온 바, 음식을 차려 가지고 위 나라 군사를 한턱 먹이는 체하다가 틈을 타서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신의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이 때 왕께서 공격하여 승부를 결판 내소서."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의 군중에 들어가서 거짓 항복하는 체하며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다. 장차 진 앞에 나아가 항복을 청하고 형리의 처벌을 받으려 하는데, 먼저 소신을 보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종자들에게 먹이려 한다." 위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칼을 음식 그릇에 숨겼다가 앞으로 달려 들어 칼을 뽑아 위장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중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 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였다. 위군이 혼란해져 진을 정비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으로부터 물러 갔다.

왕이 서울로 돌아와서 전공을 평정하면서 밀우와 유유의 공로를 첫째로 삼아 밀우에게 거곡과 청목곡을 하사하고, 옥구에게 압록강의 두눌하원을 하사하여 그들의 식읍으로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추증하여 구사자로 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明臨답夫>,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漢><玄토郡>大守{太守}??<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執{孰}??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답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小{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 <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 영城固守.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명림답부는 고구려인이다. 신대왕 때 국상이 되었다. 한 나라 현토 태수 경림이 대군을 발동하여 우리를 침공하려 하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에서 어느 것이 유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는 병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이요, 반면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관문을 지켜도 만 명이 당하지 못하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군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우리를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으며, 지금 정예병이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또한 군사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병가의 상법입니다. 지금 한 나라 사람들은 천 리 길에 군량을 운반해 왔으므로 오랫 동안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을 비워 놓고 기다린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강병을 앞세워 추격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답夫>帥師數千騎, 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答夫><坐原>及<質山>, 爲食邑.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한 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렸으므로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교전하였는데, 한 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하사하여 그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가 15년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통해 하며 7일 간 조회를 금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하고 묘지기 20가를 두었다.


○<昔于老>, <奈解>尼師今之子.[或云, 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찬爲大將軍, 出討<甘文國>, 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水{火}??,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耶{舒弗邯}??兼知兵馬事. 十六年, (+冬十月)??<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유}??, 暖熱之, 群心感喜, 如夾광. <沽解王{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석 우로는 나해 이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조분왕 2년 7월에 이찬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을 토벌하여 이를 격파하고 그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었다. 4년 7월에 왜인이 침략해오자 우로가 사도에서 역습하였다. 그가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적의 전함을 불태우자 적들은 물로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그는 15년 정월에 서불한으로 승급되고 동시에 병마사도 겸하였다. 16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로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마두책을 지켰다. 밤에 군사들이 몹시 추워하므로 우로가 직접 다니면서 위로하고, 직접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기쁘게 느껴 마치 솜을 두르고 있는 것 같이 여겼다. 첨해왕이 왕위에 있을 때, 이전부터 우리에게 속해있던 사량벌국이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로 투항하므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여 멸해버렸다.


○七年癸酉, <倭國>使臣<葛那古{葛耶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戱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찬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戱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 幼弱不能步,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未鄒王{味鄒王}>??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記』 目錄, 新羅本紀.

7년 계유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사관에 와 있었다. 우로가 주인처럼 행세하며 손님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건넸다. "조만간에 너의 국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너의 왕비는 취사부로 만들겠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공격하자 대왕이 유촌에 나가 있었다. 우로가 말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우로는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하기를 "전일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군사를 일으킬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랴?"라 하니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을 쌓아 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몸이 약한 탓에 걸음을 걷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항상 그를 안아다가 말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왕 때 왜국 대신이 예방하여 왔었는데 우로의 처는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할 기회를 얻었다. 왜국의 사신이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는 장사로 하여금 그를 뜰에 내려놓고 불에 태워 전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금성에 침공하여 왔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論曰: <于老>爲當時大臣, 掌軍國事, 戰必克, 雖不克, 亦不敗, 則其謀策必有過人者. 然以一言之悖, 以自取死, 又令兩國交兵, 其妻能報怨, 亦變而非正也. 若不爾者, 其功業, 亦可錄也.


저자의 견해 : 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서, 군국의 사무를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또한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모책이 틀림없이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 한 마디를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싸움까지 일으켰다. 그의 아내가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이것도 역시 변칙이요 올바른 길은 아니었다. 만약 이러하지 않았다면 그의 공적도 기록에 남길 만하였다.


○<朴堤上>[或云<毛末>.],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世孫. 祖, <阿道>葛文王; 父, <勿品>波珍찬. <堤上>仕爲<삽良州>干. 先是, <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又十一年王子{壬子}??, <高句麗>, 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祗王>卽位, 思得辯士, 往迎之. 聞<水酒村>千{干}??<伐寶靺>·<一利村>干<仇里내>·<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 質於<倭>·<麗>二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三人同對曰: "臣等聞<삽良州>千{干}??<堤上>, 剛勇而有謀, 可得以解殿下之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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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제상[혹은 모말이라고도 한다.]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요, 파사 이사금의 5세 손이고, 조부는 아도 갈문왕이었으며,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었다. 제상은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 간이 되었다.

이 보다 앞서 실성왕 원년 임인에 왜국과 화친을 맺을 때, 왜왕이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요구하였다. 실성왕은 일찌기 나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그 아들에게 분풀이를 하고자 했기 때문에, 왜왕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그를 인질로 보내게 하였다. 또한 11년 임자에 고구려에서도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요구하여 대왕이 또한 그를 보냈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변사를 구하여 그들을 데려 오기로 하였다. 대왕은 수주촌 간 벌보말과 일리촌 간 구리내와 이이촌 간 파로 등 세 사람이 어질고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불러 물었다. "나의 아우 두 사람이 왜국과 고구려 두 나라에 인질로 가서 수 년 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인 까닭에 보고 싶은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지라 그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신들이 듣건대 삽량주 간 제상은 사람이 굳세고 용감하며 지모가 있다 하니, 그가 족히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於是, 徵<堤上>使前, 告三臣之言, 而請行. <堤上>對曰: "臣雖愚不肖, 敢不唯命저{祗}??承." 遂以聘禮入<高句麗>, 語王曰: "臣聞交隣國之道, 誠信而已. 若交質子, 則不及五覇, 誠未{末}??世之事也. 今, 寡君之愛第{弟}??在此, 殆將十年. 寡君以조령在原之意, 永懷不已. 若大王惠然歸之, 則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 而寡君之德大王也, 不可量也, 王其念之." 王曰: "諾." 許與同歸. 及歸國, 大王喜慰曰: "我念二弟, 如左右臂, 今只得一臂, 奈何?"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에 제상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세 신하의 말을 전하며 고구려로 가주기를 요청하니 제상이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불초하나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제상은 드디어 빙례를 갖추고 고구려로 들어가서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는 성실과 신의뿐이라고 합니다. 만일 인질을 서로 주고 받는다면 이는 오패만도 못한 것이니 실로 말세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됩니다. 우리 임금은 척령이 들판에 있는 듯이 영영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이 고맙게도 그를 돌려 보내 주신다면, 이는 마치 구우일모 격으로서 대왕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으나, 우리 임금은 한없이 대왕의 유덕함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유념하여 주소서!" 왕은 "좋다"고 하면서 그들이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들이 귀국하자 대왕은 기뻐하고 위로하면서 말했다. "나는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두 팔과 같이 하는데, 이제 다만 한 팔만 찾았으니 어찌 해야 하는가?"


○<堤上>報曰: "臣雖奴才, 旣以身許國, 終不辱命. 然, <高句麗>大國, 王亦賢君, 是故, 臣得以一言悟之. 若<倭>人, 不可以口舌諭, 當以詐謀, 可使王子歸來. 臣適彼, 則請以背國論使彼聞之." 乃以死自誓, 不見妻子, 지{祗}??<粟浦>, 汎舟向<倭>. 其妻聞之, 奔至浦口, 望舟大哭曰: "好歸來." <堤上>回顧曰: "我將命入敵國, 爾莫作再見期." 遂徑入<倭國>, 若叛來者, <倭>王疑之. <百濟>人, 前入<倭>, 讒言: <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 邏戍<新羅>境外. 會<高句麗>來侵, 幷擒殺<倭>邏人, <倭>王乃以<百濟>人言爲實. 又聞<羅>王囚<未斯欣>·<堤上>之家人, 謂<堤上>實叛者.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제상이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재주가 노둔하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까지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국이고 왕도 역시 어진 임금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써 그를 깨우칠 수 있었지만, 왜인들은 말로써 달랠 수 없으니 속임수로써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합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신이 반역하였다는 죄를 씌우고, 이 소식이 저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소서." 제상은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만나지 않은 채 율포로 가서 배를 타고 왜로 향하였다. 그의 아내가 이 소문을 듣고 포구로 달려가 배를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 오시오!" 제상이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명을 받들고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대는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라 하고, 드디어 그 길로 곧장 왜국에 들어갔다. 그는 마치 모반하다가 그곳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왜왕이 그를 의심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얼마 전에 백제인이 왜국에 가서 '신라와 고구려가 모의하여 왕의 나라를 침공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왜국에서는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염탐하게 하였다. 그 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염탐꾼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왜왕은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겼으며,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제상의 가족을 가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제상이 정말 배반자라고 믿게 되었다.


○於是, 出師將, 襲<新羅>, 兼差<堤上>與<未斯欣>爲將, 兼使之鄕導. 行至海中山島, <倭>諸將密議, 滅<新羅>後, 執<堤上>·<未斯欣>妻노以還. <堤上>知之, 與<未斯欣>乘舟遊, 若捉魚鴨者, <倭>人見之, 以謂無心喜焉. 於是, <堤上>勸<未斯欣>潛歸本國. <未斯欣>曰: "僕奉將軍如父, 豈可獨歸." <堤上>曰: "若二人俱發, 則恐謀不成." <未斯欣>抱<堤上>項, 泣辭而歸. <堤上>獨眠室內, 晏起, 欲使<未斯欣>遠行. 諸人問: "將軍何起之晩?" 答曰: "前日, 行舟勞困, 不得夙興." 及出, 知<未斯欣>之逃, 遂縛<堤上>, 行舡追之. 適, 煙霧晦冥, 望不及焉.


이에 왜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고, 제상과 미사흔을 장수 겸 향도로 삼았다. 행렬이 바다에 있는 산으로 된 섬에 이르자 왜의 여러 장수들이, 신라를 멸한 뒤에는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 오자고 은밀히 의논하였다. 제상이 이를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면서 마치 물고기와 오리를 잡는 것 같이 행동하니, 왜인들은 이것을 보고 그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좋아하였다. 이 때 제상이 미사흔에게 슬며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미사흔은 "내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 돌아가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제상이 말했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일이 성사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안고 울면서 하직하고 돌아왔다. 제상은 방안에서 혼자 자다가 늦게야 일어났다. 이는 미사흔으로 하여금 멀리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장군은 왜 늦게 일어나느냐"고 물으니, 제상은 "전 날 배를 탔더니 피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왜인들은 마침내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고 제상을 결박해 놓은 채 배를 풀어 추격하였다. 때마침 안개가 대단히 짙게 끼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歸<堤上>於王所, 則流於<木島>, 未幾, 使人以薪火燒爛支體, 然後, 斬之. 大王聞之哀慟, 追贈大阿찬, 厚賜其家, 使<未斯欣>, 娶其<堤上>之第二女爲妻, 以報之. 初, <未斯欣>之來也, 命六部遠迎之, 及見, 握手相泣. 會兄弟置酒極娛, 王自作歌舞, 以宣其意. 今, 鄕樂<憂息曲>, 是也.


왜인은 제상을 왕의 처소로 돌려보내고, 곧바로 목도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불로 온 몸을 태운 뒤에 목을 베었다. 대왕은 이 소문을 듣고 애통해 하며 대아찬을 추층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후하게 물건을 하사하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함으로써 은혜에 보답케 하였다. 처음 미사흔이 돌아올 때 대왕은 6부에 명령하여 멀리 나가서 그를 맞게 하였으며, 그를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들이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겼으며, 왕이 가무를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 향악 가운데의 우식곡이 그것이다.


○<貴山>, <沙梁部>人也. 父, <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추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합聞道於賢者之側乎." 時, <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귀산은 사량부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무은 아간이다. 귀산은 젊어서 같은 부에 있는 사람 추항을 벗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아마도 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어진 사람 옆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 법사가 수 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에 있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그를 높이 예우하였다.


○<貴山>等詣門, 구衣進告曰: "俗士전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 行之無忽!"


귀산 등이 그 거처에 가서 옷자락을 여미고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 해주시어 평생의 계명으로 삼게 해주소서"라고 공손히 말하였다.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벗을 신의로 사귀는 것이요, 넷째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치 말라!"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계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련, 是擇物也. 如此, 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것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만, 소위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말씀만은 잘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했다. "육재일과 봄 여름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뜻이니, 이는 죽이는 시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가축은 죽이지 않는 법이니, 이는 말, 소, 닭, 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며, 하찮은 것을 죽여서는 안되나니, 고기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죽이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직 소용되는 경우에만 죽이고 그 이상은 죽이지 말 것이니, 이는 세속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만하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이 가르침을 받들어 두루 실행하고, 감히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眞平王><사福{建福}>??&十九{二十四}??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一作莫{暮}??.](+山)??城>. 王使將軍波珍干<乾品>·<武梨屈>·<伊梨伐>·級干<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추項>, 幷以少監赴焉. <百濟>敗, 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 <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貴山>大言曰: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擊殺賊數十人, 以己馬出父, 與<추項>揮戈力鬪. 諸軍見之奮擊, 橫尸滿野, 匹馬隻輪, 無反者. <貴山>等金瘡滿身, 半路而卒. 王與群臣, 迎於<阿那>之野, 臨尸痛哭, 以禮殯葬, 追賜位<貴山>奈麻, <추項>大舍.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진평왕 건복 24년 임술 가을 8월에 백제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아막[막(莫)을 영(英)으로도 쓴다.]성을 포위했다. 왕은 장군 파진간 건품, 무리굴, 이리벌, 급간 무은, 비리야 등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 때 귀산과 추항은 소감의 관직으로 함께 전선으로 나갔다. 그 때 백제가 패하여 천산의 연못으로 물러가 군사를 매복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는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돌아오고 있었다. 이 때 무은은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오고 있었는데, 복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갈고리로 그를 잡아당겨 떨어뜨렸다. 귀산이 "내 일찌기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패하여 달아날 수 있으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적을 쳐서 수십 명을 죽인 다음 자기 말에 아버지를 태워 보내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여러 군사들이 이를 보고 분발하여 진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은 온 몸이 창칼에 찔려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의 들판에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왕은 그들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귀산에게는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를 각각 추증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행{曉??/수??/曄??}??{然}??. 蒙{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괄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북한본』.李丙燾.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今西龍.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시정간을 왕래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곧잘 울었으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야 되겠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녀가 울 때마다 이런 말을 하였다.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딸을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화를 내어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정말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너는 너 갈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


○於是, 公主以實{寶}??釧數十枚繫주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具{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주, 以至於此乎? 惟我息, 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 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구,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용,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乃賣金釗{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노모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인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귀인이 거처할 수 없습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꼭 부귀해야만 같이 살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서 전지,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구비되었다.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 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부디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선택하되, 병들고 수척한 말을 골라 사오세요." 라고 하니 온달이 그대로 말을 사왔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월 3일을 기하여 낙랑 언덕에 모여서 사냥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이 때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그는 항상 앞장 서서 달리고, 또한 포획한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듣고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肄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 寵榮尤渥, 威權日盛. 及<陽岡王{영陽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북}??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 歸矣." 遂擧而폄. 大王聞之悲慟.

三國史記卷第四十五.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공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양강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북 지역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이 통탄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단번에 우리 땅을 도로 찾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길을 떠날 때 맹세하였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격하여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를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사생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라 말하고, 마침내 영구를 들어 하관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5 끝




三國史記卷第四十六.



삼국사기 권 제 46


列傳第六.

<强首>·<崔致遠>·<薛聰>.


열전 제 6

강수. 최 치원. 설 총.


○<强首>, <中原京><沙梁>人也. 父<昔諦>奈麻. 其母, 夢見人有角, 而妊身反{及}??生, 頭後有高骨. <昔諦>以兒就當時所謂賢者, 問曰: "此兒頭骨如此, 何也?" 答曰: "吾聞之, <伏羲>虎形, <女왜>蛇身, <神農>牛頭, <皇陶{皐陶}>??馬口, 則聖賢同類, 而其相亦有不凡者. 又觀兒首有염子, 於相法, 面염無好, 頭염無惡, 則此必奇物乎!"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강수는 중원경 사량 사람으로 아버지는 석 체 나마이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머리 뒷부분에 불거진 뼈가 있었다. 석 체가 이 아이를 안고 당시의 현자라고 알려진 사람에게 가서 "아이의 두골이 이렇게 생겼으니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들으니 복희씨는 범의 형상이요, 여와씨는 뱀의 몸이요, 신농씨는 소의 머리요, 고요는 말의 입이라 하였으니, 성현은 동류지만 그 상이 역시 범상치 않은 바가 있다. 또한 이 아이를 보니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데 상법에 얼굴의 사마귀는 좋지 않지만 머리의 사마귀는 나쁘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는 기이한 아이임에 틀림없도다."라고 하였다.


○父還謂其??{妻}??曰: "爾子非常兒也, 好養育之, 當作將來之國士也." 及壯, 自知讀書, 通曉義理. 父欲觀其志, 問曰: "爾學佛乎? 學儒乎?" 對曰: "愚聞之, 佛世外敎也. 愚人間人, 安用學佛爲? 願學儒者之道." 父曰: "從爾所好." 遂就師讀<孝經>·<曲禮>·<爾雅>·<文選>. 所間{聞}??雖淺近, 而所得愈高遠, 魁然爲一時之傑. 遂入仕歷官, 爲時聞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아버지가 돌아와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당신 아들이 보통 아이가 아니니 잘 길러서 장차 국사가 되게 해야겠소"라고 하였다. 아이가 장성하자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문장의 뜻에 통달하였다. 아버지가 그의 뜻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너는 불도를 배우겠느냐 유도를 배우겠느냐?"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불교는 세상 밖의 종교라 합니다. 저는 세속에 사는 사람인데 불도는 배워서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유가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이를 듣고 아버지가 "너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 「곡례」, 「이아」, 「문선」을 읽었다. 배운 것은 비록 적었으나 깨달은 바는 고원하여,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당시에 소문난 사람이 되었다.


○<强首>常{嘗}??與<釜谷>冶家之女野合, 情好頗篤. 及年二十歲, 父母媒邑中之女有容行者, 將妻之, <强首>辭不可以再娶. 父怒曰: "爾有時名, 國人無不知, 而以微者爲偶, 不亦可恥乎." <强首>再拜曰: "貧且賤非所羞也, 學道而不行之, 誠所羞也. 嘗聞古人之言曰: '糟糠之妻, 不下堂; 貧賤之交不可忘.' 則賤妾所不忍棄者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강수가 일찌기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하여 정이 매우 돈독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고을의 처녀들 가운데 용모와 행실이 좋은 자를 중매하여 아내로 삼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강수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고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아버지가 노하여 말했다. "너는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배필로 삼는다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강수가 재배하고 말했다.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찌기 듣건대 옛 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조강지처는 쫓아내지 아니하고, 빈천할 때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及<太宗大王>卽位, 唐使者至, 傳詔書. 其中有難讀處, 王召問之. 在王前一見說釋無疑滯. 王驚喜, 恨相見之晩, 問其姓名. 對曰: "臣本<任那><加良>人, 名<字頭{牛頭}>??." 王曰: "見卿頭骨, 可稱<强首>先生." 使製廻謝<唐>皇帝詔書表. 文工而意盡, 王益奇之, 不稱名, 言<任生>而已. <强首>未嘗謀生, 家貧怡如也. 王命有司, 歲賜新城租一百石. <文武王>曰: "<强首>文章自任, 能以書翰致意於<中國>及<麗>·<濟>二邦, 故能結好成功. 我先王請兵於<唐>, 以平<麗>·<濟>者, 雖曰武功, 亦由文章之助焉. 則<强首>之功, 豈可忽也?" 授位沙찬, 增俸歲租二百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태종대왕이 즉위하자 당의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하였다. 그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그가 왕 앞에서 그 부분을 한 번 보고는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데 없이 설명하고 해석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고 그의 성명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 가량 사람이며 이름은 자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의 두골을 보니 강수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라 하고, 당 나라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회답의 표를 짓게 하였다. 그의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깊었으므로 왕이 더욱 그를 기특히 여겨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이라고만 하였다. 강수가 일찌기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 집안이 가난하여도 태연하므로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에서 거두는 곡식 일백 섬을 주게 하였다. 문무왕이 말하기를 "강수가 문장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편지로써 중국 및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의사를 잘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호를 맺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 선왕이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이 비록 무공이기는 하지만 문장의 도움도 있었으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라 하고, 그에게 사찬의 작위를 주고 봉록을 매년 곡식 이백 석으로 올려 주었다.


○至<神文大王>時卒, 葬事官供其賻. 贈衣物匹段尤多, 家人無所私, 皆歸之佛事. 其妻之{乏}??於食, 欲還鄕里. 大臣聞之, 請王賜租百石. 妻辭曰: "妾, 賤者也, 衣食從夫, 受國恩多矣. 今旣獨矣, 豈敢再辱厚賜乎?" 遂不受而歸. <新羅>古記曰: "文章則<强首>·<帝文>·<守眞>·<良圖>·<風訓>·<骨폭{骨番}>??." <帝文>已下事逸, 不得立傳.


今西龍.『북한본』.

신문대왕 때에 그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관청에서 부의를 주었는데, 옷과 피륙이 아주 많았으나 집안 사람들이 사사로이 가지지 않고 모두 불사에 쓰도록 보내주었다. 그의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대신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 1백 석을 하사케 하였다. 그의 아내는 사양하며 말했다. "첩은 천한 몸으로 의식을 남편에게 의지하여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홀 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더 이상 나라의 후한 하사를 받겠습니까?" 그녀는 끝내 이를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라 고기에 "문장은 강수, 제문, 수진, 양도, 풍훈, 골번이다"라고 하였는데, 제문 이하의 사람들은 사적이 유실되어 전을 만들 수 없다.


○<崔致遠>,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致遠>至<唐>追師, 學問無怠.


최 치원은 자가 고운[혹은 해운이라고도 한다.]이며 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사서가 인멸되어 그의 집안 계통은 알 수가 없다. 치원은 소년시절부터 성격이 세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가 유학을 하려할 때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노력하라!" 치원은 당에 도착하여 스승을 따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乾符>元年甲午, 禮部侍郞<裴瓚>下, 一擧及第, 調授<宣州><률水>縣尉. 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時<黃巢>叛, <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 벽<致遠>爲從事, 以姿{委}??書記之任, 其表狀書啓傳之至今. 及年二十八歲, 有歸寧之志, <僖宗>知之, <光啓>元年, 使將詔書來聘. 留爲侍讀, 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致遠>自以西學多所得, 及來將行己志, 而衰季多疑忌, 不能容, 出爲<大山郡>大守{太守}??.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

건부 원년 갑오에 예부시랑 배 찬의 고시에서 단번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 현위에 임명되었고, 치적의 고과를 통하여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를 받았다. 이 때 황 소가 반란을 일으켜, 고 병이 제도 행영 병마도통이 되어 이를 토벌하게 되었다. 그 때, 치원을 불러 종사로 삼아 서기의 임무를 맡겼는데, 그 표장과 서계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28세가 되자 귀국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희종이 그의 뜻을 알고 광계 원년에 그로 하여금 조서를 가지고 내빙케 하였다. 그는 본국에 머물며 시독 겸 한림학사병부시랑지서서감이 되었다. 치원은 스스로 서쪽으로 유학하여 얻은 바가 많다고 생각하여, 돌아온 뒤에 자기의 뜻을 실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말세를 당하여 의심과 시기가 많아 이러한 생각이 용납되지 못하고 외직으로 나가 대산군 태수가 되었다.


○<唐><昭宗><景福>二年, 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 沒於海, 卽差<추城郡>大守{太守}??<金峻>爲告奏使. 時<致遠>爲<富城郡>大守{太守}??, 저{王}??召爲賀正使, 以比歲饑荒, 因之, 盜賊交午, 道梗不果行. 其後<致遠>亦嘗奉使如<唐>, 但不知其歲月耳. 故其文集有上大師{太師}??侍中狀云: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두. <隋>皇失馭, 由於征<遼>. <貞觀>中, 我<唐><大宗{太宗}>??皇帝, 親統六軍渡海, 恭行天罰, <高麗>畏威請和, 文皇受降廻필. 此際我<武烈大王>, 請以犬馬之誠, 助定一方之難, 入<唐>朝謁, 自此而始. 後以<高麗>·<百濟>, 踵前造惡, <武烈七{武烈入??/武烈王??}>朝請爲鄕導. 至<高宗>皇帝<顯慶>五年, 勅<蘇定方>, 統十道强兵·樓舡萬隻, 大破<百濟>, 乃於其地, 置<扶餘>都督府, 招緝遺氓, 리{리}??以<漢>官, 以臭味不同, 屢聞離叛, 遂徙其人於<河南>. <摠章>元年, 命英公<徐勣{李勣}??>, 破<高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롱右>. <高句麗>殘蘖類聚, 北依<大白山{太白山}>??下, 國號爲<渤海>. <開元>二十年,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大怒, 命內史<高品>·<何行成>·大??卿{太僕卿}??<金思蘭>, 發兵過海攻討, 仍就加我王<金>某, 爲正大尉{太尉}??持節充寧海軍事<계林州>大都督. 以冬深雪厚, <蕃>·<漢>苦寒, 勅命廻軍. 至今三百餘年, 一方無事, 滄海晏然, 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 今某儒門未{末}??學, 海外凡村{材}??, 謬奉表章, 來朝樂土, 凡有誠懇, 禮合披陳. 伏見: <元和>十二年, 本國王子, <金張廉>風飄, 至<明州>下岸, 浙東某官, 發送入京. <中和>二年, 入朝使<金直諒>, 爲叛臣作亂, 道路不通, 遂於<楚州>下岸, 리이至<楊州>, 得知聖駕幸<蜀>. <高>大尉{太尉}??差都頭<張儉>, 監押送至<西川>. 已前事例分明. 伏乞: 大師{太師}??侍中, 俯降台恩, 特賜水陸券牒, 令所在供給舟舡, 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幷差軍將, 監送至駕前."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今西龍.『북한본』.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당 소종 경복 2년에 납정절사 병부시랑 김 처회가 바다에 빠져 죽었으므로 곧 추성군 태수 김 준을 고주사로 임명하였다. 이 때 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있다가 부름을 받아 하정사가 되었는데, 당 나라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이로 인하여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도 치원은 당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으나 그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그가 당에 여러 번 갔기 때문에 그의 문집에는 태사 시중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명칭이 마한, 진한, 변한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는 강한 군사가 1백 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 연과 제, 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으며, 수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기인한 것입니다. 정관 연간에 우리 당 태종 황제가 직접 6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벌을 집행하니, 고구려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므로 문황이 항복을 받고 수레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이 무렵 우리 무열대왕이 견마의 정성으로 한 쪽의 혼란을 당의 협조를 얻어 평정하고자 하였으니, 당 나라 조정에 들어가 배알하는 일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과 같이 흉악한 행위를 계속하므로, 무열왕이 당의 조정으로 들어가 향도가 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종 황제 현경 5년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칙령을 내려 10도의 강병과 누선 일만척을 이끌고 백제를 대파하고, 그 땅에 부여 도독부를 설치하여 유민을 모으고 한인 관리를 배치했는데, 생활양식이 서로 달라 자주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으로 옮겼습니다. 총장 원년에 영공 서 적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격파케 하고 안동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의봉 3년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로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잔민들이 서로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원 20년에 당 나라 조정에 원한을 품어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를 습격하여 자사 위 준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 황제가 대노하여 내사 고 품, 하 행성과 태복경 김 사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격케 하고, 우리 임금 김 아무개에게 벼슬을 더하여 정대위 지절 충녕해 군사 계림주 대도독으로 삼았는데, 겨울이 깊어 눈이 많이 쌓인 바람에 번, 한 양군의 추위가 심했기 때문에 칙명을 내려 회군케 했습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3백여 년 동안 이 지역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하니, 이는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입니다. 지금 저는 유림의 말단 학자요, 해외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표장을 받들고 낙토에 내조하였으니, 모든 정성을 토로하는 것이 예에 맞을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원화 12년에 본국의 왕자 김 장렴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명주에 상륙하였을 때, 절동의 어떤 관리가 서울까지 보내 주었고, 중화 2년에는 입조사 김 직량이 반란군이 일어나 길이 막혔기에 마침내 초주에 상륙하여 헤매다가 양주에 이르러 황제의 행차가 촉으로 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고 태위가 도두 장 검을 보내 그를 감시압송하여 서천에 이르렀습니다. 이전의 사례가 이처럼 분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사 시중께서는 큰 은혜를 베푸시어 특별히 수륙의 권첩을 주시고, 저희들의 소재지에 선박, 식사 및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나귀와 말 그리고 사료를 공급하게 해주시고, 아울러 군장을 보내 어가 앞까지 호송하여 주소서."

여기서 말한 태사 시중도 그 성명을 알 수 없다.


○<致遠>自西事大<唐>, 東歸故國, 皆遭亂世, 屯전蹇連, 動輒得咎, 自傷不偶{遇}??,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江海之濱, 營臺사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淸凉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 此皆遊焉之所. 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 以終老焉. 始西遊時, 與<江東>詩人<羅隱>相知. <隱>負才自高, 不輕許可人, 示<致遠>所製歌詩五軸.


『북한본』.

치원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항상 난세를 만나 처신하기가 어려웠고 곧잘 비난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산림과 강해를 소요하며 누대와 정자를 지어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 속에 묻혀서 풍월을 읊었다. 경주의 남산과 강주의 빙산과 협주의 청양사와 지리산의 쌍계사와 합포현의 별장이 모두 그가 놀았던 곳이다. 그는 최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스님과 도우를 맺고 한가로이 은거생활을 하다가 노년을 마쳤다.

그가 처음 서쪽으로 가서 유학할 때 강동 시인 나 은과 알게 되었다. 은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잘난 체하여 쉽사리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시가 다섯 축을 보여 주었다.


○又與同年<顧雲>友善, 將歸, <顧雲>以詩送別, 略曰: "我聞海上三金鼈, 金鼈頭戴山高高. 山之上兮, 珠宮, 貝闕, 黃金殿, 山之下兮, 千里萬里之洪濤. 傍邊一點<계林>碧, 鼈山孕秀生奇特.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新唐書藝文志』云: "<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 注云: "<崔致遠><高麗>人, 賓貢及第爲<高騈>從事." 其名聞上國如此. 又有『文集』三十卷, 行於世. 初我<太祖>作興, <致遠>知非常人, 必受命開國, 因致書問有"<계林>黃葉, <鵠嶺>靑松"之句. 其門人等, 至國初來朝, 仕至達官者非一. <顯宗>在位, 爲<致遠>密贊祖業, 功不可忘, 下敎, 贈內史令, 至十四歲<大平{太平}>??二{三}??年壬戌{癸亥}??五{二}??月, 贈諡<文昌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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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동년인 당 나라 사람 고 운과도 잘 사귀었는데, 치원이 돌아오려 할 때 고 운은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들었네, 바다 위에 세 마리 금자라 있어

머리 위에 높은 산을 이고 있다네.

산 위에 주궁, 패궐, 황금전이 있고

산 아래 천리 만리 넓은 파도 있다네.

그 곁에 점 하나 푸르른 계림 땅

자라산의 정기 어려 기특한 인재 났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문장이 중화국을 감동시켰네.

열 여덟 되던 해 전사원에 횡행하여

화살 한대 날려보내 금문책을 깨뜨렸네.

「신당서 예문지」에는 "최 치원의 「사륙집」 1권과 「계원필경」 20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주에는 "최 치원은 고려인으로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 병의 종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이와 같이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또한 문집 30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처음 우리 태조가 흥기하였을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인물이므로 그가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임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문안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계림은 누른 잎이오, 곡령은 푸른 솔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의 문인들 중에는 국초에 내조하여 높은 관직에 이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현종이 왕위에 있을 때 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연히 협찬하였으니, 그의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교시를 내려 내사령을 추증했고, 14년 태평 2년 임술 5월에는 문창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薛聰>, 字<聰智>, 祖<談捺>奈麻, 父<元曉>. 初爲桑門, 掩{淹}??該佛書, 旣而返本, 自號<小性居士>. <聰>性明銳, 生知道待{道術}??. 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至今學者宗之. 又能屬文, 而世無傳者. 但今南地, 或有<聰>所製碑銘, 文字결{缺}??落不可讀, 竟不知其何如也. <神文大王>以仲夏之月, 處高明之室, 顧謂<聰>曰: "今日, 宿雨初歇, 薰風微凉, 雖有珍饌哀音, 不如高談善謔, 以舒伊鬱. 吾子必有異聞, 합爲我陳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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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총은 자가 총지이고, 조부는 담날 나마이며 부친은 원효이다. 원효는 처음에 중이 되어 불서에 통달하였으나 얼마 후에 속인으로 되돌아와 스스로 소성 거사라고 불렀다. 총은 성질이 총명하고 예리하며, 나면서부터 도술을 알았다. 그는 우리말로 9경을 해독하여 후생을 훈도하였으므로, 지금까지 학자들이 그를 종주로 삼고 있다. 그는 또한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있으나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으므로 끝내 그것이 어떠한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신문대왕이 중하월에 높고 밝은 방에 거처하면서 총을 돌아 보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오래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개고, 훈풍이 시원하니 비록 맛있는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고상한 담론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못하구나. 그대는 필시 색다른 이야기도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나를 위하여 이야기해 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聰>曰: "唯, 臣聞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翠幕, 當三春而發艶, 凌百花而獨出. 於是, 自邇及遐, 艶艶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 唯恐不及.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정服, 伶빙而來, 綽約而前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而{面}??沐春雨以去??{垢}??, 快{袂}??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유, 王其容我乎!' 又有一丈夫, 布衣韋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구루而來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峨之山色, 其名曰白頭翁. 竊謂左右供給雖足, 膏梁以充腸, 茶酒以淸神, 巾衍儲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견毒. 故曰雖有絲麻, 無棄管괴, 凡百君子, 無不代궤. 不識, 王亦有意乎?' 或曰: '二者之來, 何取何捨?' 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 丈夫進而言曰: '吾謂王聰明識理義, 故來焉耳, 今則非也. 凡爲君者, 鮮不親近邪첩{녕}??, 疎遠正直, 是以, <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郞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奈何?' 花王曰: '吾過矣, 吾過矣!'" 於是, 王초然作色曰: "子之寓言, 誠有深志, 請書之, 以謂{爲}??王者之戒." 遂擢<聰>以高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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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신이 들으니 예전에 화왕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이 되어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며 배알하려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한 가인이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또한 한 장부가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힘없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걸어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경성 밖의 한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 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색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름은 할미꽃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비록 좌우의 공급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상자 속의 준비물에는 반드시 양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극약이 있어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 말에 생사와 삼베 같은 좋은 물건이 있다해도, 왕골과 띠풀 같은 천한 물건을 버리지 않아서, 모든 군자들은 결핍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오니,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두 명이 왔는데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리시겠습니까?' 화왕이 '장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어여쁜 여자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할까?'라고 말했습니다. 장부가 다가서서 말하기를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왔더니,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무릇 임금된 사람치고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이 때문에 맹가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풍 당은 낭서에 잠기어 흰 머리가 되었습니다. 옛 날부터 도리가 이러하였거늘 저인들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니, 화왕이 '내가 잘못했노라, 내가 잘못했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왕이 안색을 바로 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 있도다. 기록해두어 왕자의 경계로 삼게하기 바란다" 하고 마침내 총을 높은 관직에 발탁하였다.


○世傳<日本>國眞人, 贈<新羅>使<薛>判官詩序云: "嘗覽<元曉>居士所著, 『金剛三時論{金剛三昧論}』??, 深恨不見其人, 聞<新羅>國使<薛>, 卽是居士之抱孫, 雖不見其祖, 而喜遇其孫, 乃作詩贈之." 其詩至今存焉, 但不知其子孫名字耳. 至我<顯宗>在位十三歲, <天禧{乾興}>??五{元}??年辛酉{壬戌}??, 追贈爲弘儒侯. 或云, <薛聰>嘗入唐學, 未知然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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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본국의 진인이 신라 사신 설 판관에게 준 시의 서문에 이르기를 "일찌기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본 적이 있으나, 그 사람을 보지 못했음을 심히 한스럽게 여겼는데, 듣자하니 신라국 사신 설이 바로 거사의 손자라고 하니, 비록 그의 조부는 보지 못하였으나 그의 손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이에 시를 지어 그에게 준다"라고 하였다. 그 시는 지금도 남아 있으나 그 자손의 이름은 모른다. 우리 현종이 왕위에 있은 지 13년인 건흥 원년 임술에 설 총에게 홍유후를 추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설 총이 일찌기 당에 들어가서 유학하였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崔承祐>, 以<唐><昭宗><龍紀>二年入<唐>, 至<景福>二年, 侍郞<楊涉>下及第. 有四六五卷, 自序爲<호本集>. 後爲<甄萱>作檄書, 移我<太祖>.


최 승우는 당 소종 용기 2년에 당에 가서 경복 2년에 시랑 양 섭의 문하에 있다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사륙집 5권이 있는데 자신이 쓴 서문에서 「호본집」이라 하였다. 그 뒤에 견 훤을 위하여 격문을 지어 우리 태조에게 보냈다.


○<崔彦휘>年十八, 入<唐>遊學, 禮部侍郞<薛廷珪>下及第. 四十二還國爲執事侍郞瑞書院學士, 及<太祖>開國, 入朝, 仕至翰林院大學士{太學士}??平章事. 卒諡<文英>.


趙炳舜. 『高麗史』.

최 언위는 나이 18세에 당에 유학하다가 예부 시랑 설정규의 문하에 있다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시랑 서서원학사가 되었고, 태조가 개국하자 조정에 들어와서 벼슬이 한림원태학사 평장사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시호를 문영이라 하였다.


○<金大問>本<新羅>貴門子弟. <聖德王>三年, 爲<漢山州>都督, 作傳記若干卷. 其『高僧傳』·『花郞世記』·『樂本』·『漢山記』猶存.


김 대문은 원래 신라 귀족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는데 그 중에서 「고승전」, 「화랑 세기」, 「악본」, 「한산기」는 아직도 남아 있다.


○<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輩, 雖僅有文字傳者, 而史失行事, 不得立傳.

三國史記卷第四十六.


박 인범, 원 걸, 거인, 김 운경, 김 수훈 등은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열전을 만들 수 없다.

삼국사기 권 제 46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七.



삼국사기 권 제 47


列傳第七.

<奚論>·<素那>·<驟徒>·<訥催>·<薛계頭>·<金令胤>·<官昌>·<金部軍{金歆運}>??·<裂起>·<丕寧子>·<竹竹>·<匹夫>·<階伯>.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열전 제 7

해론. 소나. 취도. 눌최. 설 계두. 김 영윤. 관창. 김 흠운.

열기. 비녕자. 죽죽. 필부. 계백.


○<奚論>, <牟梁>人也. 其父<讚德>, 有勇志英節, 名高一時. <建福>二十七年庚午{乙丑}??, <眞平大王>選爲<가岑城>縣令. 明年辛未{丙寅}??冬十月, <百濟>大發兵, 來攻<가岑城>一百餘日. <眞平>王命將, 以<上州>·<下州>·<新州>之兵救之, 遂往與<百濟>人戰不克, 引還. <讚德>憤恨之, 謂士卒曰: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乃激昻奮勵, 且戰且守, 以至粮盡水竭, 而猶食屍飮尿, 力戰不怠. 至春正月, 人旣疲, 城將破, 勢不可復完, 乃仰天大呼曰: "吾王委我以一城, 而不能全, 爲敵所敗, 願死爲大려, 喫盡<百濟>人, 以復此城." 遂攘臂瞋目, 走觸槐樹而死. 於是, 城陷, 軍士皆降


『북한본』.『북한본』.

해론은 모량 사람이다. 그의 부친 찬덕은 용감한 뜻과 영특한 절개가 있어 한 때 명망이 높았다. 건복 27년 을축에 진평대왕이 그를 선발하여 가잠성 현령으로 삼았다. 이듬해인 병인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여 일 동안 가잠성을 공격하자 진평왕이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상주, 하주, 신주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가서 백제인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한 채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찬덕이 그것을 분하게 여겨 사졸들에게 말했다. "세 주의 장수들이 적의 강함을 보고는 진격하지 않아 성이 위급한데도 구원하지 않았다. 이는 의리가 없는 행위이다. 의리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리있게 죽는 것이 나으리라." 그는 곧 격앙되고 분발하여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방어하면서 양식과 물이 떨어졌는데도 오히려 시체를 뜯어먹고 오줌을 마시며 힘써 싸우고 나태하지 않았다. 봄 정월에 이르자 사람들은 이미 지치고, 성은 곧 함락되려 하니 대세는 회복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쳤다. "우리 왕이 나에게 이 성을 맡겼는데,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도 커다란 악귀가 되어 백제인들을 모조리 잡아 먹고 이 성을 회복하리라." 그는 마침내 팔을 걷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나가 홰나무에 부딪쳐 죽었다. 이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奚論>年二十餘歲, 以父功, 爲大奈麻. 至<建福>&三十五{四十}??年戊寅, 王命<奚論>, 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 興師襲<가岑城>, 取之. <百濟>聞之, 擧兵來, <奚論>等逆之. 兵旣相交, <奚論>謂諸將曰: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 遂以短兵赴敵, 殺數人而死. 王聞之, 爲流涕, 贈술其家甚厚. 時人無不哀悼, 爲作長歌弔之.


『북한본』.

해론이 나이 20여 세 되었을 때 부친의 공으로 대나마가 되었다. 건복 40년 무인에 왕이 해론을 금산 당주로 임명하여 한산주 도독 변품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하여 이를 빼앗도록 하였다. 백제가 이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오자 해론 등이 이들과 싸웠다. 교전이 시작되었을 때 해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부친이 여기에서 전사하셨는데, 나도 지금 여기서 백제인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그는 드디어 칼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족을 보살펴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장가를 지어 그를 조문하였다.


○<素那>[或云<金川>.], <白城郡><蛇山>人也. 其父<沈那>[或云<煌川>.], 旅{려}??力過人, 身輕且捷. <蛇山>境與<百濟>相錯, 故互相寇擊無虛月. <沈那>每出戰, 所向無堅陣. <仁平>中, <白城郡>出兵, 往抄<百濟>邊邑, <百濟>出精兵急擊之, 我士卒亂退. <沈那>獨立拔劒, 怒目大叱, 斬殺數十餘人, 賊懼不敢當, 遂引兵而走.


趙炳舜. 『三國史節要』.

소나[혹은 금천이라고 한다.]는 백성군 사산 사람이다. 그의 부친 심나[혹은 황천이라고 한다.]는 힘이 세고 몸이 가볍고 날래었다. 사산은 경계가 백제와 연이어 있있었기 때문에 상호 간에 노략질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심나는 그 때마다 나가서 싸웠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견고한 적의 진지가 무너졌었다. 인평 연간에 백성군에서 군사를 내어 백제의 변경을 치자, 백제도 정예병을 보내 갑자기 공격해왔으므로 우리 사졸들이 혼란스럽게 퇴각하였다. 그러나 심나는 홀로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성난 눈으로 크게 꾸짖으며 수십여 명을 베어 죽이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도주하였다.


○<百濟>人, 指<沈那>曰: "<新羅>飛將." 因相謂曰: "<沈那>尙生, 莫近白城." <素那>雄豪有父風. <百濟>滅後, <漢州>都督都儒&公請大王遷{白王遣}??<素那>於<阿達城>, 비禦北鄙. <上元>二年乙亥春, <阿達城>大守{太守}??級찬<漢宣>, 敎民以某日齊出種麻, 不得違令. <靺鞨>諜者認之, 歸告其酋長. 至其日, 百姓皆出城在田, <靺鞨>潛師猝入城, 剽掠一城, 老幼狼狽, 不知所爲. <素那>奮刃向賊, 大呼曰: "爾等知<新羅>有<沈那>之子<素那>乎? 固不畏死以圖生, 欲鬪者曷不來耶?" 遂憤怒突賊, 賊不敢迫, 但向射之. <素那>亦射, 飛矢如蜂, 自辰至酉, <素那>身矢如위, 遂倒而死.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백제인들이 심나를 가리켜 '신라의 비장'이라 하고, 서로 말하기를 "심나가 아직 살았으니 백성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였다. 소나는 영웅스럽고 호걸스러움이 아버지의 풍모를 지녔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한주 도독 유공이 대왕에게 청하여 소나를 아달성으로 보내 북쪽 변방을 방어하게 하였다. 상원 2년 을해년 봄에 아달성 태수 급찬 한선이 백성들로 하여금 아무 날 모두 나가 삼을 심게 하고는 이 명령을 어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말갈의 첩자가 이를 탐지하고 돌아가 자기 추장에게 보고하였다. 그 날이 되어 백성들이 모두 성에서 나와 밭에 있는데, 말갈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성으로 들어가서 성 전체를 노략질하니 늙은이 어린이 할 것없이 모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때 소나가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아느냐? 나는 실로 죽기가 두려워 살기를 도모하지는 않는다. 싸우려는 자가 있으면 왜 나오지 않느냐?" 그가 곧 분격하여 적진으로 돌진하니,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그를 향하여 활을 쏠 뿐이었다. 소나도 활을 쏘았는데 날아 오는 화살이 마치 벌떼와 같이 많았다. 진시로부터 유시에 이르자 소나의 몸에는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박혀 마침내 쓰러져 죽었다.


○<素那>妻, <加林郡>良家女子. 初<素那>以<阿達城>隣敵國, 獨行, 留其妻而在家. 郡人聞<素那>死, 弔之, 其妻哭而對曰: "吾夫常曰: '丈夫固當兵死, 豈可臥牀席, 死家人之手乎!' 其平昔之言如此, 今死如其志也." 大王聞之, 涕泣沾襟曰: "父子勇於國事, 可謂世濟忠義矣." 贈官잡찬.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의 양가 여자였다. 처음에 소나는 아달성이 적국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혼자 가고 자기 아내는 집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그 고을 사람들이 소나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하니 그의 아내가 울면서 대답하였다. "나의 남편이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 어찌 침상에 누워서 집안 사람의 손에 죽을 수 있으랴!'하였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지금의 죽음은 자기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말했다. "부자가 모두 국사에 용감하였으니, 가히 대대로 충의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대왕은 그에게 잡찬을 추증하였다.


○<驟徒>, <沙梁>人, 奈麻<聚福>之子, 史失其姓. 兄弟三人, 長<夫果>, 仲<驟徒>, 季<逼實>. <驟徒>嘗出家, 名<道玉>, 居<實際寺>. <大宗大王{太宗大王}>??時, <百濟>來伐<助川城>, 大王興師出戰, 未決. 於是, <道玉>語其徒曰: "吾聞: 爲僧者, 上則精術業, 以復性. 次則起道用, 以益他.' 我形似桑門而已,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 以報國." 脫法衣, 著戎服, 改名曰<驟徒>, 意謂馳驟而爲徒也. 乃詣兵部, 請屬三千幢, 遂隨軍赴敵場. 及旗鼓相當, 持槍劒, 突陣力鬪, 殺賊數人而死.


趙炳舜. 『三國史節要』.

취도는 사량 사람으로서 나마 취복의 아들이다. 그의 성씨는 역사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형제가 셋인데 맏이는 부과요, 가운데는 취도요, 막내는 핍실이다. 취도가 일찌기 출가하여 이름을 도옥이라 하고 실제사에 거주했다.

태종대왕 때 백제가 와서 조천성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일으켜 나가 싸웠으나 싸움이 결판나지 않았다. 이 때 도옥이 자기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상등의 중은 술업에 정진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의 효용을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고 하였는데, 나는 외형만 중과 같을 뿐이며, 한 가지도 취할 만한 선행이 없으니, 군대에 들어가 몸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만 못하다"라 하고, 법의를 벗고 군복을 입은 다음 이름을 취도로 고쳤다. 이 이름은 빨리 군대로 간다는 뜻이다. 그는 곧 병부로 가서 삼천당에 속하기를 청하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지로 갔다. 깃발과 북이 서로 어울리자 창과 칼을 잡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적군 여러 명을 죽인 다음 자신도 죽었다.


○後<咸享>二年辛未, <文武大王>發兵, 使踐<百濟>邊地之禾. 遂與<百濟>人, 戰於<熊津>之南. 時<夫果>以幢主戰死, 論功第一. <文明>元年甲申, <高句麗>殘賊, 據<報德城>而叛, <神文大王>命將討之, 以<逼實>爲貴幢弟監{第監}??.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 旣死於王事, 名垂不朽, 吾雖不肖, 何得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好住無傷." 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大王聞之, 流涕嘆曰: "<驟徒>知死所, 而激昆弟之心. <未果>·<逼實>亦能勇於義, 不顧其身, 不其壯歟!" 皆追贈官沙찬.


『북한본』.

그 후 함형 2년 신미에 문무대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 변경의 벼를 짓밟게 하자, 마침내 백제인들과 웅진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부과가 당주로서 전사하여 논공이 제일이었다. 문명 원년 갑신에 고구려의 잔적이 보덕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대왕이 장수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그 때 핍실을 귀당 제감으로 삼았다. 그는 떠날 때 아내에게 말했다. "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로 죽어서 이름이 영원히 남아 있거늘, 내 비록 불초하나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는가? 오늘 그대와의 생이별은 결국 사별이 될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잘사시오!" 그가 적과 대진하게 되자 단신으로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고 자기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였다. "취도가 죽을 자리를 알아서 형제의 마음을 격동시켰으며, 부과와 핍실도 정의 앞에 용감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 대왕은 모두에게 사찬 벼슬을 추증하였다.


○<訥催>, <沙梁>人, 大奈麻<都非>之子也. <眞平王><建福>四十一年甲申{己卯}??冬十月, <百濟>大擧來侵, 分兵圍攻<速含>·<櫻岑>·<岐岑>·<烽岑>·<旗懸>·<冗柵{穴柵}>??等六城, 王命<上州>·<下州>·<貴幢>·<法幢>·<誓幢>五軍, 往救之. 旣到, 見<百濟>兵陣堂堂, 鋒不可當, 盤桓不進. 或立議曰: "大王以五軍委之諸將, 國之存亡, 在此一役. 兵家之言曰: '見可而進, 知難而退.' 今强敵在前, 不以好謀而直進, 萬一有不如意, 則悔不可追." 將佐皆以爲然, 而業已受命出師, 不得徒還. 先是, 國家欲築<奴珍>等六城而未遑, 遂於其地, 築畢而歸.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눌최는 사량 사람인데 대나마 도비의 아들이다. 진평왕 건복 41년 기묘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거 침입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여섯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상주·하주·귀당·법당·서당 등 5군에 명하여 이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전장에 이르러 백제의 군진이 당당하여 예봉을 당할 수가 없음을 보고는 머뭇거리며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어떤 자가 건의하여 말했다. "대왕이 5군을 여러 장수에게 맡겼으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다. 병가에 이르기를 '가능성을 보면 나아가고, 어려움을 알면 물러선다'고 하였는데, 지금 강력한 적이 눈 앞에 있는데 좋은 계책을 쓰지 않고 곧장 나아갔다가는, 만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후회해도 때가 늦을 것이다." 장수와 보좌관들이 모두 그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명령을 받고 군사를 출동시킨 이상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나라에서는 노진 등의 여섯 성을 쌓으려다가 미처 겨를이 없었는데, 그들은 드디어 그곳에서 성쌓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於是, <百濟>侵攻愈急, <速含>·<岐岑>·<冗柵{穴柵}>??三城, 或滅或降, <訥催>以三城固守, 及聞五軍不救而還, 慷慨流涕, 謂士卒曰: "陽春和氣, 草木皆華, 至於歲寒, 獨松栢後彫. 今孤城無援, 日益점危, 此誠志士義夫, 盡節揚名之秋, 汝等將若之何?" 士卒揮淚曰: "不敢惜死, 唯命是從." 及城將퇴, 軍士死亡無幾, 人皆殊死戰, 無苟免之心. <訥催>有一奴, 强力善射. 或嘗語曰: "小人而有異才, 鮮不爲害, 此奴宜遠之." <訥催>不聽. 至是城陷賊入, 奴張弓挾矢, 在<訥催>前, 射不虛發, 賊懼不能前. 有一賊出後, 以斧擊<訥催>, 乃부, 奴反與鬪俱死. 王聞之, 悲慟, 追贈<訥催>職級찬.


趙炳舜. 『三國史節要』.

이 때 백제가 더욱 급공하여 속함, 기잠, 용책 등 세 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눌최는 나머지 세 성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에게 말했다. "봄철의 온화한 기운에는 초목이 모두 번성하지만, 겨울이 되면 유독 송백만이 남는다. 이제 우리의 외로운 성이 구원하는 군사는 없고 날로 위급하여지니, 이제는 실로 지조있는 사나이와 의리있는 사나이가 절개를 다하고 이름을 날릴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사졸들은 모두 눈물을 뿌리면서 말했다. "감히 죽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성이 함락될 무렵, 군사들이 거의 모두 죽어 몇 명 남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눌최에게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어떤 자가 전에 "소인배가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이니, 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눌최는 이를 듣지 않았다. 그 때 성이 함락되고 적이 들어오자 그 종이 활을 당겨 화살을 끼운 채 눌최의 앞에 버티고 서서 활을 쏘았다. 그 화살은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적들이 이를 무서워 하여 앞으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한 적병이 뒤로 돌아가 눌최를 도끼로 쳐서 쓰러뜨리자 그 종은 돌아서서 그와 싸우다가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며 눌최에게 급찬 벼슬을 추증하였다.


○<薛[一本作薛{사}??]계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燕飮, 各言其志. <계頭>曰: "<新羅>用人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會<大宗{太宗}>??<文皇帝>親征<高句麗>, 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駐필山>下, 深入疾鬪而死, 功一等. 皇帝問: "是何許人?" 左右奏<新羅>人<薛계頭>也. 皇帝泫然曰: "吾人尙畏死, 顧望不前, 而外國人, 爲吾死事, 何以報其功乎?" 問從者聞其平生之願, 脫御衣覆之, 授職爲大將軍, 以禮葬之.


李丙燾.趙炳舜.

설 계두도 역시 신라의 사대부집 자손이다. 그는 일찌기 친구 네 사람과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그들은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하였다. 계두가 말했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에도 골품을 따지니, 만일 그 해당하는 골품이 아니면 큰 재능과 훌륭한 공로가 있다고 해도 일정한 계급 이상 진급할 수가 없다. 나는 서쪽으로 중화국에 유학하여 불세출의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서 스스로 영화의 길을 열고, 고관의 복장에다 검패를 차고 천자의 곁을 드나들어야 만족하겠다." 그는 무덕 4년 신사에 남몰래 배를 타고 당에 갔다. 그 때 마침 태종 문황제가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였므로, 그는 자천하여 좌무위과의가 되었다. 그가 요동에 이르러 주필산 밑에서 고구려인과 싸우는데, 적진 깊이 들어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으니 공이 1등이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측근자들이 신라인 설 계두라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우리 나라 사람도 죽음이 두려워 이리저리 돌아보며 전진하지 않는데, 외국인이 우리를 위하여 국사에 죽었으니 무엇으로 그의 공을 갚으랴?" 황제는 종자에게 그의 평생 소원을 듣고, 어의를 벗어 덮어 주었으며, 대장군의 관직을 제수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金令胤>, <沙梁>人, 級찬<盤屈>之子. 相{祖}??<欽春>[或云<欽純>.]角干, <眞平王>時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及壯, <文武大王>陟爲총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大宗大王{太宗大王}>??七年庚申, <唐><高宗>命大將軍<蘇定方>, 伐<百濟>,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戰, 不利. <欽春>召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唯." 乃入賊陣, 力戰死. <令胤>生長世家, 以名節自許.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日本書陵部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

김 영윤은 사량 사람으로서 급찬 반굴의 아들이다. 조부는 흠춘[혹은 흠순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니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다. 그 때, 그는 인덕이 많고 신의가 두터워 인심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장성하자 문무대왕이 재상으로 올려주었는데, 임금을 충심으로 섬기고, 인자한 자세로 백성을 대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태종대왕 7년 경신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을 때,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였다. 가을 7월에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과 마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흠춘은 아들 반굴을 불러 말했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이 으뜸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만 충성과 효성이 모두 온전해진다." 반굴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영윤은 명문세가 출신답게 명예와 절개를 지켰다.


○<神文大王>時, <高句麗>殘賊<悉伏>, 以<報德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黃衿誓幢步騎監. 將行, 謂人曰: "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 聞其惡聲." 及見<悉伏>, 出<가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연巢幕上, 魚戱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窮寇勿迫.' 宜左次以待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 諸將然其言, 暫退, 獨<令胤>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今諸將豈盡偸生之人, 惜死之輩哉? 而以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而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 <令胤>曰: "臨陣無勇, 禮經之所識{誡}??,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 遂赴敵陣, 格鬪而死. 王聞之, 悽慟流涕曰: "無是父, 無是子, 其義烈可嘉者也." 追贈爵賞尤厚.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日本書陵部本』.

신문대왕 때, 고구려의 잔적 실복이 보덕성에서 모반하자 왕이 그의 토벌을 명령하고, 영윤을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았다. 그가 떠날 때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가면 가족이나 친구들로 하여금 악명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그가 출정하여 실복을 보니, 그는 가잠성 남쪽 7리 지점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제 이 흉악한 무리들은 제비가 장막 위에 집을 짓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 같은 형세로서, 만 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하루 사는 목숨 밖에 안된다. 옛 말에 이르기를 '궁지에 몰린 도둑은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 약간 후퇴하여 적이 극도로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면 칼날에 피도 묻히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다." 모든 장수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잠시 후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독 영윤만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싸우려 하였다. 그의 종자가 말했다. "지금 모든 장수들이 구차하게 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며,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의 의견이 옳다고 여긴 것은, 기회를 보아 이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만이 혼자 앞으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영윤이 말했다. "적진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에서 경계한 것이니,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이 사졸로서 지켜야 할 당당한 본분이다. 대장부가 일을 당하면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꼭 여러 사람의 의견만을 따르겠는가?" 그는 말을 마치고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 그의 의롭고 장렬함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 왕은 후하게 상을 주고, 작위를 추증하였다.


○<官昌>[一云<官狀>.], <新羅>將軍<品日>之子. 儀表都雅, 少而爲花郞,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大監某薦之<大宗大王{太宗大王}>. 至<唐><顯慶>五年庚申, 王出師, 與<唐>將軍侵<百濟>, 以<官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兩兵相對. 父<品日>謂曰: "爾雖幼年, 有志氣, 今日是立功名取富貴之時, 其可無勇乎?" <官昌>曰: "唯." 卽上馬橫槍, 直도敵陣, 馳殺數人. 而彼衆我寡, 爲賊所虜, 生致<百濟>元帥<階伯>前. <階伯>비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官昌>曰: "向吾入賊中, 不能斬將건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 以手국井水, 飮訖, 再突賊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送之.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 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조進擊, <百濟>大敗. 大王贈位級찬, 以禮葬之, 賻其家唐絹三十匹·二十升布三十匹·穀一百石.


관창[관장이라고도 한다.]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이다. 그는 용모가 우아하여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과 곧잘 사귀었다. 16세에 기마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어느 대감이 그를 태종대왕에게 천거하였다. 당 나라 현경 5년 경신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당 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침공하는데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사가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의 부친 품일이 관창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기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관창은 "그렇습니다"라 하고,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말을 달리면서 여러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 계백이 그의 투구를 벗게하니, 그가 어리고 용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백은 이를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기특한 사람이 많구나. 소년도 이렇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계백은 곧 그를 살려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했다.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히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그의 말 안장에 매어 돌려 보냈다.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내 아들의 면목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줄을 알았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3군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의지를 다진 다음,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공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이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그 가족들에게 당견 30필과 이십승포 30필과 곡식 1백 섬을 부의로 주었다.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父<達福>잡찬.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時, 徒衆言及某戰死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永徽>六年, <大宗大王{太宗大王}>??憤<百濟>與<高句麗>梗邊, 謀伐之. 及出師, 以<歆運>爲郞幢大監. 於是, 不宿於家, 風梳雨沐, 與士卒同甘苦. 抵<百濟>之地, 營<陽山>下, 欲進攻<助川城>. <百濟>人乘夜疾驅, 黎明緣壘而入, 我軍驚견{駿}??顚沛, 不能定. 賊因亂急擊, 飛矢雨集. <歆運>橫馬握삭待敵, 大舍<詮知>說曰: "今賊起暗中, 咫尺不相辨, 公雖死, 人無識者. 況公<新羅>之貴骨, 大王之半子, 若死賊人手, 則<百濟>所誇타, 而吾人之所深羞者矣." <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不知一也, 豈敢求名乎?" 强立不動. 從者, 握비勸還, <歆運>拔劒揮之, 與賊鬪殺數人而死. 於是, 大監<穢破>·少監<狄得>相與戰死. 步騎幢主<寶用那>聞<歆運>死曰: "彼骨貴而勢榮, 人所愛惜, 而猶守節以死, 況<寶用那>生而無益, 死而無損乎?" 遂赴敵, 殺三數人而死. 大王聞之傷慟, 贈<歆運>·<穢破>位一吉찬, <寶用那>·<狄得>位大奈麻. 時人聞之, 作<陽山歌>, 以傷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흠운은 나밀왕의 8세 손으로 아버지는 달복 잡찬이다. 흠운이 소년 시절에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을 때,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흠운은 개연히 눈물을 흘리고 감동되어 자기도 그와 같이 되려는 의지를 보였다.

같은 문하에 있던 중 전밀이 말했다. "이 사람이 만일 전쟁에 나가면 틀림없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영휘 6년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음을 분하게 여겨 정벌할 것을 계획하고 군사를 동원할 때, 흠운을 낭당 대감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흠운은 집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사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다. 그가 백제 지역에 도달하여 양산 밑에 진을 치고 조천성을 진공하려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야음을 기하여 급히 달려와 이른 새벽에 성루로 올라왔다. 우리 군사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서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군이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급히 공격해오니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흠운이 말을 비껴 탄 채 창을 잡고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사 전지가 달래며 말했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따라서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진골이며 대왕의 사위이므로,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의 대단한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했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추구하겠느냐?" 그는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종자가 말 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흠운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여러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이 때 대감 예파와 소감 적득도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당주 보용나는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그는 골품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와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다. 황차 나 보용나는 살아도 이익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실될 것 없다." 그는 곧 적진으로 달려가 적병 몇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보용나와 적득에게 대나마의 직위를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슬퍼하며 양산가를 지었다.


○論曰: <羅>人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 擧用之. 遂取美貌男子, 장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邪正, 擇而薦之於朝. 故<大問>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者." 此也. 三代花郞, 無慮二百餘人, 而芳名美事, 具如傳記. 若<歆運>者, 亦郞徒也. 能致命於王事, 可謂不辱其名者也.


저자의 견해 : 신라인은 사람을 알아 볼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여,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무리를 지어서 놀게 해놓고, 그 행실과 의리를 살펴서 등용하였다. 그리고 용모가 뛰어난 남자를 뽑아 단장시켜서 화랑이라 부르며 받들었다. 이에 낭도의 무리가 운집하여 혹은 도의로 서로 절차탁마하고, 혹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수를 찾아 노니는데, 멀다고 하여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살폈으며, 이에 따라 사람을 선발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김 대문이 "어진 보좌와 충신이 여기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여기에서 생긴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3대의 화랑이 무려 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사적은 전기에 기재된 바와 같다. 흠운과 같은 사람도 역시 낭도였는데,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裂起>, 史失族姓. <文武王>元年, <唐>皇帝遣<蘇定方>, 討<高句麗>, 圍<平壤城>. <含資道>摠管<劉德敏>傳宣國王, 送軍資<平壤>. 王命大角干<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 到<獐塞>, 風雪??{호}??寒, 人馬多凍死. <麗>人知兵疲, 欲要擊之. 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 欲移書而難其人. 時<裂起>以步騎監輔行, 進而言曰: "某雖駑蹇, 願備行人之數." 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 持弓劒走馬, <麗>人望之, 不能遮閼. 凡兩日致命於<蘇>將軍, <唐>人聞之, 喜慰廻書. <裂起>又兩日廻, <庾信>嘉其勇, 與級찬位. 及軍還, <庾信>告王曰: "<裂起>·<仇近>, 天下之勇士也. 臣以便宜許位級찬, 而未副功勞, 願加位沙찬." 王曰: "沙찬之秩, 不亦過乎?" <庾信>再拜曰: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 王允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열기는 역사기록에 집안 내력과 성씨가 전하여지지 않는다. 문무왕 원년에 당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 때, 함자도 총관 유 덕민이 국왕에게 국서를 전하여 군수물자를 평양으로 보내게 하였다. 왕이 대각간 김 유신에게 명하여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2백5십 석을 수송하게 하였는데, 유신이 장새에 이르렀을 때 풍설이 몹시 사나워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인들은 우리 군사가 지쳐있음을 알고 요격하려 하였다. 당 진영까지의 거리가 3만여 보였는데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편지를 보내려 해도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 열기가 보기감보행으로서 나아가 말하기를 "제가 비록 노둔하나 가는 사람의 수를 채우고 싶습니다"라 하고, 마침내 군사 구근 등 15명과 함께 활과 칼을 가지고 말을 달려 나가니, 고구려인들이 바라만 보고 막지 못하였다. 이틀 만에 그들이 소장군에게 사명을 전하니 당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위로하고 회신를 보냈다. 열기가 다시 이틀이 지나서 돌아오니, 유신이 그의 용맹을 가상히 여겨 급찬의 벼슬을 주었다. 군사가 돌아오자 유신이 왕에게 말하기를 "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편의에 따라 급찬의 벼슬을 허락하였으나 공로에 맞지 않사오니 사찬의 벼슬을 더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사찬의 벼슬은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라고 대답하였다. 유신이 재배하고 말했다. "작록은 공기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 하겠습니까?"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後<庾信>之子<三光>執政, <裂起>就求郡守, 不許. <裂起>與<祗園寺>僧<順憬>曰: "我之功大, 請郡不得, <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 <順憬>說<三光>, <三光>授以<三年山>郡大守{太守}??. <仇近>從<元貞公>, 築<西原述城>, <元貞公>聞人言, 謂怠於事, 杖之. <仇近>曰: "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 不辱大角干之命, 大角干不以僕爲無能, 待以國士, 今以浮言罪之, 平生之辱, 無大此焉." <元貞>聞之, 終身羞悔.


趙炳舜. 『三國史節要』.

뒤에 유신의 아들 삼광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열기가 찾아가서 군수 자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지원사의 중 순경에게 말했다. "나의 공로가 큰 데도 군수의 자리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삼광은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아마도 나를 잊어버린 것이리라." 순경이 삼광에게 이를 말하였더니 삼광이 삼년산군 태수직을 주었다.

구근이 원정공을 따라가 서원술성을 쌓았다. 그 때 원정공이, 구근이 일을 태만히 하였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에게 곤장을 쳤다. 구근이 말하기를 "내가 일찌기 열기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며, 대각간도 나를 무능하다고 여기지 않고 국사로 대우하였는데, 지금 허황된 말을 믿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의 치욕 중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원정공이 이 말을 듣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워하며 회개하였다.


○<丕寧子>, 不知鄕邑族姓. <眞德王>元年丁未, <百濟>以大兵, 來攻<茂山>·<甘勿>·<桐岑>等(+三)??城, <庾信>率步騎一萬, 拒之. <百濟>兵甚銳, 苦戰不能克, 士氣索而力憊. <庾信>知<丕寧子>有力戰深入之志, 召謂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 今日之事, 急矣, 非子誰能奮勵出奇, 以激衆心乎?" 因與之飮酒, 以示殷勤. <丕寧子>再拜云: "今於稠人廣衆之中, 獨以事屬我, 可謂知己矣, 固當以死報之." 出謂奴<合節>曰: "吾今日上爲國家, 下爲知己, 死之. 吾子<擧眞>, 雖幼年, 有壯志, 必欲與之俱死, 若父子倂命, 則家人其將疇依? 汝其與<擧眞>好收吾骸骨, 歸以慰母心."


趙炳舜. 『三國史節要』.

비녕자는 고향과 집안의 성씨를 알 수 없다. 진덕왕 원년 정미에 백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무산, 감물, 동잠 등의 성을 공격하므로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대항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은 정예군이었기 때문에 유신이 고전하고 승리하지 못하여 사기는 꺾이고 힘이 빠졌다. 유신은 비녕자가 힘껏 싸워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그를 불러 말했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법이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용감히 싸우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유신이 이어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은근한 마음을 표시하니 비녕자가 재배하고 말했다. "지금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저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가히 지기라 할 만합니다. 진실로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그가 나와서 종 합절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 아래로는 지기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나의 아들 거진이 나이 비록 어리나 장한 뜻이 있어서 틀림없이 나를 따라 함께 죽으려 할 것인데, 만일 부자가 함께 죽는다면 집안 사람이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랴?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 그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言畢, 卽鞭馬橫삭, ??{突}??賊陣, 格殺數人而死. <擧眞>望之欲去, <合節>請曰: "大人有言, 令<合節>與阿郞還家, 安慰夫人. 今子負父命棄母慈, 可謂孝乎?" 執馬비不放. <擧眞>曰: "見父死而苟存, 豈所謂孝子乎?" 卽以劒擊折<合節>臂, 奔入敵中戰死. <合節>曰: "私天崩矣, 不死何爲?" 亦交鋒而死. 軍士見三人之死, 感激爭進, 所向挫鋒陷陣,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庾信>收三屍, 脫衣覆之, 哭甚哀. 大王聞之涕淚, 以禮合葬於<反知山>, 恩賞妻子·九族尤渥.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말이 끝나자 그는 곧 말에 채찍질을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전사하였다. 거진이 바라보다가 나가려고 하니 합절이 말했다. "대인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마님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어머님의 자애를 저버린다면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합절은 말 고삐를 잡고 놓치 않았다.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도 구차하게 산다면 이것이 어찌 이른바 효자이겠느냐?" 하고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치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합절이 "상전이 모두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말하고 그도 역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군사들이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적의 예봉을 꺾고 진지를 함락시켰으며 적군을 대파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서 자기의 옷을 벗어 덮어 주고 슬프게 울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예로써 반지산에 합장하고, 그들의 처자와 9족에게 은혜로운 상을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竹竹>, <大耶州>人也, 父<학熱{학勢}>??爲撰干. <善德王>時爲舍知, 佐<大耶城>都督<金品釋>幢下. <王>十一年壬寅秋八月, <百濟>將軍<允忠>領兵, 來攻其城. 先是, 都督<品釋>, 見幕客舍知<黔日>之妻有色, 奪之, <黔日>恨之. 至是爲內應, 燒其倉庫, 故城中兇懼, 恐不能固守. <品釋>之佐阿찬<西川>[一云방찬{沙찬}??<祗之那{祗삼那}>??.], 登城謂<允忠>曰: "若將軍不殺我, 願以城降." <允忠>曰: "若如是, 所不與公同好者, 有如白日." <西川>勸<品釋>及諸將士欲出城, <竹竹>止之曰: "<百濟>反覆之國, 不可信也. 而<允忠>之言甘, 必誘我也. 若出城, 必爲賊之所虜. 與其竄伏而求生, 不若虎鬪而至死." <品釋>不聽開門. 士卒先出, <百濟>發伏兵, 盡殺之. <品釋>將出, 聞將士死, 先殺妻子而自刎. <竹竹>收殘卒, 閉城門自拒, 舍知<龍石>謂<竹竹>曰: "今兵勢如此, 必不得全, 不若生降以圖後效." 答曰: "君言當矣, 而吾父名我以<竹竹>者, 使我歲寒不凋, 可折而不可屈, 豈可畏死而生降乎?" 遂力戰, 至城陷, 與<龍石>同死. 王聞之, 哀傷, 贈<<竹竹>以級찬, <龍石>以大奈麻{太奈麻}??, 賞其妻子, 遷之王都.


趙炳舜. 『三國史節要』에는 '勢'로 되어 있고,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에는 '熱'로 되어 있다.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죽죽은 대야주 사람이고, 부친 학열은 찬간이었다. 선덕왕 때 죽죽이 사지가 되어 대야성 도독 김 품석 당하에서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선덕왕 11년 임인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앞서 도독 품석이 자기의 막객인 사지 검일의 아내가 아름다와 그녀를 빼앗은 일이 있었다. 검일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이 때 적과 내응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니, 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성을 고수하지 못할 것 같았다. 품석의 보좌관인 아찬 서천[혹은 사찬 지지나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 윤충에게 말했다.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바치고 항복하겠습니다." 윤충이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 하고도 공과 내가 함께 만족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 때는 밝은 태양이 있으니 태양을 두고 맹세합시다." 서천이 품석과 여러 장병들에게 권고하여 성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죽죽이 이들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백제는 말을 번복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다.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필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성 밖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품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사졸들이 먼저 나가자 백제가 복병을 출동시켜 모조리 죽여 버렸다. 품석이 나가려다가 장병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자기의 처자를 죽인 다음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죽죽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성문을 닫은 채 방위하고 있는데 사지 용석이 죽죽에게 말했다. "지금 전세가 이러하니 틀림없이 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항복하고 살아서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다." 죽죽이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도 당연하지만,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나로 하여금 날씨가 추워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것이니, 어찌 죽기가 두렵다 하여 항복하여 살겠는가?"라 하고, 드디어 힘껏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전사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죽죽에게는 급찬을 추증하고, 용석에게는 대나마를 추증하였으며, 그들의 처자에게 상을 주어 왕도로 옮겨 살게 했다.


○<匹夫>, <沙梁>人也, 父<尊臺>阿찬. <大宗大王{太宗大王}>??以<百濟>·<高句麗>·<靺鞨>轉相親比, 爲脣齒, 同謀侵奪, 求忠勇材堪綏禦者, 以<匹夫>爲<七重城>下縣令. 其明年庚申秋七月, 王與<唐>師滅<百濟>. 於是, <高句麗>疾我, 以冬十月, 發兵來圍<七重城>, <匹夫>守且戰二十餘日. 賊將見我士卒盡誠, 鬪不內顧, 謂不可猝拔, 便欲引還. 逆臣大奈麻<比삽>密遣人告賊, 以城內食盡力窮, 若攻之必降, 賊遂復戰. <匹夫>知之, 拔劒斬<比삽>首, 投之城外. 乃告軍士曰: "忠臣義士, 死且不屈, 勉哉努力! 城之存亡, 在此一戰." 乃奮拳一呼, 病者皆起, 爭先登, 而士氣疲乏, 死傷過半. 賊乘風縱火, 攻城突入. <匹夫>與上干<本宿>·<謀支>·<美齊>等, 向賊對射. 飛矢如雨, 支體穿破, 血流至踵, 乃부而死. 大王聞之, 哭甚痛, 追贈級찬.


趙炳舜. 『三國史節要』.

필부는 사량 사람이며 아버지는 존대 아찬이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점점 친해지다가 아주 밀접한 사이가 되어 그들이 함께 신라 침탈을 도모하자, 태종대왕이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재로서 능히 적을 방어할 만한 사람을 구하여 필부를 칠중성 하의 현령으로 삼았다. 그 이듬해인 경신 가을 7월에 왕이 당 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격멸하였다. 이에 고구려가 우리를 미워하여 겨울 10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칠중성을 포위하였므로, 필부가 이를 수비하면서 20여 일 동안 계속하여 싸웠다. 적장은 우리 사졸이 성의를 다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고, 이들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였다. 이 때 역신 대나마 비삽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적에게 고하기를, 성 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으니 만약 이를 친다면 반드시 항복할 것이라고 알리는 바람에 적은 다시 공격해왔다. 필부가 이 사실을 알고 칼을 뽑아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밖으로 던지고 군사들에게 말했다. "충신과 의사는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것이니 힘써 노력하라! 이 성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며 한바탕 호통을 치니 병 든 자들도 모두 일어나 앞을 다투어 성에 올랐으나, 곧 사기가 사라져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그 때 적이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지르고 성안으로 공격해왔다. 필부는 상간 본숙, 모지, 미제 등과 함께 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그러나 빗발같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온 몸에 상처를 입어,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 내리자 땅에 쓰러져 전사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프게 울며 그에게 급찬을 추증하였다.


○<階伯>, <百濟>人, 仕爲達率. <唐><顯慶>五年庚申, <高宗>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濟海, 與<新羅>伐<百濟>. <階伯>爲將軍, 簡死士五千人拒之, 曰: "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吾妻노,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遂盡殺之.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誓衆曰: "昔<句踐>以五千人, 破兵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遂오戰, 無不以一當千, <羅>兵乃却. 如是進退, 至四合, 力屈以死.

三國史記卷第四十七.


계백은 백제인으로 관직이 달솔이었다. 당 현경 5년 경신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했다.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선발하여 이를 방어하며 말했다.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그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그가 황산벌에 이르러 세 개의 진영을 치고 있다가 신라 군사를 만나 곧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였다.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들이 드디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사람마다 일당천의 전과를 올리자 신라 군사가 퇴각하였다. 이렇게 그는 진퇴를 네 번이나 거듭하다가 마침내 힘이 부족하여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7 끝




三國史記卷第四十八.



삼국사기 권 제 48


列傳第八.

<向德>·<聖覺>·<實兮>·<勿稽子>·<百結先生>·<劒君>·<金生>·<率居>·孝女<知恩>·<薛氏>·<都彌>.


열전 제 8

상덕. 성각. 실혜. 물계자. 백결선생. 검군. 김 생. 솔거. 효녀 지은. 설씨. 도미.


○<向德>, <熊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려, 父母飢且病, 母又發癰,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규비肉以食之. 又연母癰,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宅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 人號其地云孝家(+里)??.


今西龍.

상덕은 웅천주 판적향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이고 자는 반길인데, 품성이 온순하고 선량하여 향리에서 그의 품행을 높이 칭송하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상덕도 효성스럽고 공손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천보 14년 을미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렸고 더욱이 전염병까지 겹치는 바람에 부모가 굶주리고 병들었으며, 어머니는 또한 종기가 나서 거의 죽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덕은 밤낮으로 옷을 벗을 틈도 없이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간호하였으나, 특별히 봉양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넙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병을 치료하였다. 향사에서는 이 일을 주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하교하여 벼 3백 섬과 집 한 채와 구분전 약간을 주었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여 이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하였으니, 오늘날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그 곳을 효가라고 부른다.


○<聖覺>, <菁州>人. 史失其氏族. 不樂世間名官, 自號爲居士, 依止<一利縣><法定寺>. 後歸家養母, 以老病難於蔬食, 割股肉以食之. 及死, 至誠爲佛事資薦. 大臣角干<敬信>·伊찬<周元>等, 聞之國王以<熊川州><向德>故事, 賞近縣사{租}??三百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성각은 청주 사람인데 기록에 그의 가계가 전해지지 않는다. 세상의 이름난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거사라고 자칭하며 일리현 법정사에 머물렀다. 나중에 본가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서 채식만으로는 부족하였으므로 다리 살을 베어서 먹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지성으로 불공을 드려 복을 빌었다. 대신 각간 경신과 이찬 주 원 등이 국왕에게 웅천주 상덕의 이야기를 하니, 국왕이 가까운 고을의 조 3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論曰: <宋祁>『唐書』云: "善乎, <韓愈>之論也! 曰: '父母疾, 烹藥餌, 以是爲孝, 未聞毁支體者也. 苟不傷義, 則聖賢先衆而爲之. 是不幸因而且死, 則毁傷滅絶之罪, 有歸矣, 安可旌其門, 以表異之?' 雖然, 委巷之陋, 非有學術禮義之資, 能忘身以及其親, 出於誠心, 亦足稱者, 故列焉." 則若<向德>者, 亦可書者乎!


저자의 견해 : 송 기의 「당서」에 이르기를 "한 유의 논지는 훌륭하도다! 그가 말하기를 '부모의 병환에 약을 달여서 드리는 것을 효도라고 하는데, 아직 자신의 몸을 훼손하여 봉양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진실로 이 일이 의리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면 성현들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이렇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 불행하게도 잘못되어 목숨을 잃게 된다면, 도리어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하고 대를 잇지 못하는 죄가 돌아갈 것이니, 어찌 그 집에 정문을 세워 표창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누추한 마을에 살아 학술과 예의의 자질을 갖추지도 못했으면서도 능히 자기의 몸을 잊고 부모를 생각한 것은 성심에서 나온 것이니, 이 또한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기록해 둔다"고 하였다. 그런즉 상덕과 같은 이도 기록해 둘 만한 인물일 것이다.


○<實兮>, 大舍<純德>之子也. 性剛直, 不可屈以非義. <眞平王>&時{五十三年}??, 爲上舍人. 時下舍人<珍堤>, 其爲人便첩{녕}??, 爲王所嬖. 雖與<實兮>同寮, 臨事互相是非, <實兮>守正不苟且. <珍堤>嫉恨, 屢讒於王曰: "<實兮>無智慧, 多膽氣, 急於喜怒, 雖大王之言, 非其意則憤不能已. 若不懲艾, 其將爲亂, 합黜退之? 待其屈服, 而後用之, 非晩也." 王然之, 謫官<령林>. 或謂<實兮>曰: "君自祖考, 以忠誠公材, 聞於時. 今爲첩{녕}??臣之讒毁, 遠宦於<竹嶺>之外·荒僻之地, 不亦痛乎? 何不直言自辨?" <實兮>答曰: "昔, <屈原>孤直, 爲<楚>빈黜, <李斯>盡忠, 爲<秦>極刑. 故知녕臣或{惑}??主, 忠士被斥, 古亦然也, 何足悲乎?" 遂不言而往, 作長歌見意.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실혜는 대사 순덕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로써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진평왕 때 그가 상사인이 되었는데, 당시 하사인이었던 진제는 아첨을 잘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가 비록 실혜와 동료로 있었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서로 시비를 다툴 때가 있었는데 실혜는 정도를 지키고 구차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진제가 이를 시기하고 원망하여 누차 왕에게 참소하기를 "실혜는 지혜가 없고 담기가 많아서 곧잘 기뻐하거나 화를 내어, 비록 대왕의 말이라도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분을 참지 못합니다. 만약 이를 징계하지 않는다면 장차 난을 일으킬 것인데 왜 그를 내쫓지 않습니까? 그가 굴복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때 등용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말을 옳게 여겨 그를 영림으로 귀양보냈다. 어떤 사람이 실혜에게 말했다. "그대는 조부 때부터 충성과 나라의 재목감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는데, 이제 아첨 잘하는 신하의 참소와 훼방을 입어 멀리 죽령 밖의 황폐하고 궁벽한 곳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니 통탄스럽지 않은가? 왜 바른 대로 말하여 사실을 밝히지 않는가?" 실혜가 대답하였다. "옛날 굴 원은 고고하고 충직하여 초왕에게서 쫓겨났고, 이 사는 충성을 다하다가 진의 극형을 받았다. 그러므로 아첨 잘하는 신하가 임금을 미혹케 하여 충신이 배척 당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니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그는 마침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서 긴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노래하였다.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 家世平微, 爲人倜당, 少有壯志.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내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是役也, <勿稽子>有大功, 以見憎於王孫, 故不記其功. 或謂<勿稽子>曰: "子之功莫大, 而不見錄, 怨乎?" 曰: "何怨之有?" 或曰: "합聞之於王?" <勿稽子>曰: "矜功求名, 志士所不爲也. 但當勵志, 以待後時而已."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乃語其婦曰: "嘗聞爲臣之道, 見危則致命, 臨難則志{忘}??身, 前日<浦上竭火>之役, 可謂危且難矣, 而不能以致命忘身, 聞於人, 將何面目以出市朝乎?" 遂被髮携琴, 入<師체山>, 不反{返}??.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물계자는 나해 이사금 때 사람으로서 집안은 미천하였으나 사람됨이 활달하였으며 젊어서는 장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포상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아라국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나음에게 근군 및 6부의 군사를 주어 그들을 돕게하여 마침내 여덟 나라의 병사를 격파하였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으나 왕손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에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했다. "그대의 공이 컸는데도 기록이 되지않아 원망스러운가?" 물계자가 말했다.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왜 임금님께 아뢰지 않는가?" 하니, 물계자가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지사가 할 일이 아니다. 다만 마음을 갈고 닦아 후일을 기다릴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 3년이 지나 골포, 칠포, 고사포 등 세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갈화성을 침공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파하였는데, 물계자가 수십여 명을 잡아 목베었으나 공을 논할 때 또한 소득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부인에게 말했다. "일찌기 듣건대 신하된 도리는 위급한 것을 보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기 몸을 잊는다고 하였소. 전 날의 포상갈화에서의 싸움은 위급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건만 목숨을 내놓거나 몸을 버리며 싸울 수 없었고. 이것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거리에 나가겠소?" 그는 마침내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지닌 채 사체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百結先生>, 不知何許人. 居<狼山>下, 家極貧, 衣百結若懸순, 時人號爲東里<百結先生>. 嘗慕<榮啓期>之爲人, 以琴自隨, 凡喜怒悲歡不平之事, 皆以琴宣之. 歲將暮, 隣里용粟, 其妻聞杵聲曰: "人皆有粟용之, 我獨無焉, 何以卒歲?" 先生仰天嘆曰: "夫死生有命, 富貴在天. 其來也不可拒, 其往也不可追. 汝何傷乎? 吾爲汝, 作杵聲以慰之." 乃鼓琴作杵聲, 世傳之, 名爲대樂.


백결 선생은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는 낭산 밑에 살았는데 아주 가난하였다. 그는 백 군데나 기워 마치 메추라기를 달아맨 것 같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동리 백결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찌기 영 계기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쁘고 성나고 슬프고 즐거운 일과 불평스러운 일을 모두 거문고로써 풀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이웃에서 곡식을 찧으면 그의 아내가 방아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찧을 곡식이 있는데 우리만 곡식이 없으니 무엇으로 설을 쇠리오?" 하니 백결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기를 "무릇 죽고 사는 것에는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 그것이 와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가도 좇을 수 없는 법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마음 아파하는가?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아소리를 내어 위로하겠소"라 하고, 곧 거문고를 타서 방아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이것이 전하는데 대악이라고 부른다.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九}??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 宮中諸舍人同謀, 盜<唱예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時<大日>伊찬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劒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不殺此人, 必有漏言, 遂召之. <劒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復相見." <郞>問之, <劒君>不言, 再三問之, 乃略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 <劒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합逃乎?" 曰: "彼曲我直, 而反自逃, 非丈夫也." 遂往. 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劒君>知而强食, 乃死. 君子曰: "<劒君>死非其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


『북한본』.

검군은 구문 대사의 아들로 사량궁 사인이 되었다. 건복 49년 정해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모든 곡식을 죽이는 바람에 이듬해 봄과 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먹고 사는 형편이 되었다.

이 때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공모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만은 홀로 받지 않았다. 모든 사인들이 말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거절하니 무슨 일인가? 만일 적어서 그렇다면 더 주겠다." 검군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근랑의 문도에 이름을 두었고, 풍월도의 마당에서 수행을 하였으니, 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천금의 이익이라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 때 대일 이찬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검군은 그곳을 나와 근랑의 집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은밀히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말이 누설될 것이라 하여 드디어 그를 불렀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줄 알고 근랑에게 하직하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는 다시 뵙지 못하겠습니다." 근랑이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이 말하지 않다가, 재삼 묻자 그 이유를 대략 이야기하였다. 근랑이 말했다. "왜 유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가?" 검군이 말했다. "자기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죄에 걸리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근랑이 말했다. "그러면 왜 도망하지 않느냐?" 검군이 대답하였다. "저들이 잘못되고 내가 바른데 도리어 내가 도망한다면 이는 장부의 행동이 아닙니다." 검군은 말을 마치고 마침내 사인들에게 갔다. 여러 사인들이 술을 대접하며 사죄하면서 검군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검군은 이를 눈치채고도 억지로 그것을 먹고 죽었다. 군자가 말했다. "검군은 죽을 자리가 아닌데 죽었으니, 이는 태산같이 소중한 목숨을 홍모보다 가벼이 여긴 것이라 하겠다."


○<金生>, 父母微, 不知其世系. 生於<景雲>二年, 自幼能書, 平生不攻他藝, 年踰八十, 猶操筆不休. 隸書行草皆入神, 至今, 往往有眞蹟, 學者傳寶之. <崇寧>中, 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館於<卞京>. 時翰林待詔<楊球>·<李革>, 奉帝勅至館, 書圖簇. <洪灌>以<金生>行草一卷, 示之, 二人大駭曰: "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洪灌>曰: "非是, 此乃<新羅>人<金生>所書也." 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洪灌>屢言之, 終不信. 又有<姚克一>者, 仕至侍中兼侍書學士, 筆力주勁, 得<歐陽>率更法. 雖不及<生>, 亦奇品也.


김 생은 부모가 미천하여 가문의 내력을 알 수 없다. 경운 2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그는 평생동안 다른 기예는 닦지 않았으며 나이 80세가 넘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예서와 행서 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여서 지금까지도 더러 그의 진필이 남아 있는데 학자들이 보배로 여겨 전하고 있다. 숭녕 연간에 학사 홍 관이 진봉사를 따라 송에 들어가서 변경에 묵고 있었는데, 이 때 한림 대조 양 구, 이 혁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사관에 와서 그림 족자에 글씨를 썼다. 홍 관이 그들에게 김 생이 쓴 행초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오늘날 왕 우군의 친필을 보게 될 줄 몰랐다"고 하였다. 홍 관이 말하기를 "아니오. 이것은 신라인 김 생이 쓴 것이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왕 우군말고 어찌 이런 묘필이 있겠오?"라고 하였다. 홍 관이 여러 번 말하였지만 그들이 끝내 믿지 않았다. 또한 요 극일이라는 사람이, 벼슬이 시중 겸 시서 학사에 이르렀는데 필력이 좋아 구양 순의 솔경의 필법을 터득하였다. 비록 김 생에게는 못 미쳤지만 역시 특이한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率居>, <新羅>人, 所出微, 故不記其族系. 生而善畵, 嘗於<皇龍寺>壁畵老松, 體幹鱗준, 枝葉盤屈, 烏鳶燕雀, 往往望之飛入. 及到, 층등而落. 歲久色暗, 寺僧以丹靑補之, 烏雀不復至. 又<慶州><芬皇寺>觀音菩薩·<晉州><斷俗寺><維摩>像, 皆其筆蹟, 世傳爲神畵.


솔거는 신라인인데 출신이 미천하여 가문의 내력을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일찌기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줄기가 비늘 같았으며,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하여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가끔 멀리서 바라보고 날아들다가 벽화에 이르러서는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어 색깔이 변하자 절의 승려들이 단청으로 덧칠을 하였다. 그 후로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또한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 화상이 모두 그가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대대로 신화라고 말한다.


○孝女<知恩>, <韓기部>百姓<連權>女子也. 性至孝, 少喪父, 獨養其母. 年三十二, 猶不從人, 定省不離左右, 而無以爲養, 或傭作或行乞, 得食以飼之. 日久不勝困憊, 就富家請賣身爲婢, 得米十餘石. 窮日行役於其家, 暮則作食歸養之. 如是三四日, 其母謂女子曰: "向, 食추而甘, 今則食雖好, 味不如昔, 而肝心若以刀刃刺之者, 是何意耶?" 女子以實告之. 母曰: "以我故使爾爲婢, 不如死之速也." 乃放聲大哭, 女子亦哭, 哀感行路. 時<孝宗>郞出遊, 見之, 歸請父母, 輸家粟百石及衣物予之, 又償買主以從良. 郞徒幾千人, 各出粟一石爲贈. 大王聞之, 亦賜租五百石, 家一區, 復除征役. 以粟多恐有剽竊者, 命所司差兵番守. 標榜其里曰<孝養坊>, 仍奉表, 歸美於<唐>室. <孝宗>, 時第三宰相舒發翰<仁慶>子, 少名<化達>, 王謂雖當幼齒, 便見老成, 卽以其兄<憲康王>之女, 妻之.


효녀 지은은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이다. 그녀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그리하여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모셨다. 그녀는 나이 32세가 되어도 시집을 가지 않고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하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거리가 없으면 어떤 때는 품팔이도 하고 어떤 때는 구걸도 하여 밥을 구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한 생활이 오래 되자,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부잣집에 가서 자청하여 몸을 팔아 종이 되고 쌀 10여 석을 얻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그 집에서 일을 해주고 날이 저물면 밥을 지어 가지고 돌아와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렇게 3, 4일 지나자 그의 어머니가 딸에게 이르기를 "전에는 밥이 나빠도 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밥이 좋은데도 맛이 옛날만 못하고, 마치 살 속을 칼로 찌르는 듯하니 이것이 웬일이냐?"라고 하였다. 딸이 사실대로 고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를 종이 되게 하였으니 차라리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하면서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딸도 따라 울어서 그 슬픔이 길 가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 때 효종랑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보고 돌아와서 부모에게 청하여 자기집 곡식 1백 석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그리고 또한 그녀가 몸을 판 사람에게 몸 값을 보상해 주고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낭도 몇 천 명이 각각 곡식 1섬 씩을 주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또한 벼 5백 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으며, 곡식이 많아서 도둑이 들까 염려하여 관계자에게 명하여 군사를 보내 교대로 지켜주게 하였다. 그리고 그 마을을 효양방이라 하고 표문을 올려 당 나라 왕실에도 그녀의 아름다운 행실을 알렸다.

효종(랑)은 당시 제삼 재상인 서발한 인경의 아들로서 아명은 화달이었다. 왕이 생각하기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고 여겨 즉시 형 헌강왕의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薛>氏女, <栗里>民家女子也. 雖寒門單族, 而顔色端正, 志行脩整, 見者無不歆艶, 而不敢犯. <眞平王>時, 其父年老, 番當防秋於<正谷>. 女以父衰病, 不忍遠別, 又恨女身不得待{代}??行, 徒自愁悶. <沙梁部>少年<嘉實>, 雖貧且구, 而其養志貞男子也, 嘗悅美<薛>氏, 而不敢言. 聞<薛>氏憂父老而從軍, 遂請<薛>氏曰: "??{僕}??雖一懦夫, 而嘗以志氣自許, 願以不肖之身, 代嚴君之役." <薛>氏甚喜, 入告於父. 父引見曰: "聞公欲代老人之行, 不勝喜懼, 思所以報之, 若公不以愚陋見棄, 願薦幼女子, 以奉箕추." <嘉實>再拜曰: "非敢望也, 是所願焉." 於是, <嘉實>退而請期. <薛>氏曰: "婚姻人之大倫, 不可以倉猝. 妾旣以心許, 有死無易, 願君赴防. 交代而歸, 然後卜日成禮, 未晩也." 乃取鏡分半, 各執一片云: "此所以爲信, 後日當合之." <嘉實>有一馬, 謂<薛>氏曰: "此, 天下良馬, 後必有用. 今我徒行, 無人爲養, 請留之, 以爲用耳." 遂辭而行.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설씨 여자는 율리에 사는 백성 집안의 딸이었다. 비록 빈한하고 외로운 집안이었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품행이 얌전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그 아름다움에 반하였지만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 그의 아버지가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정곡에서 곡식을 지키는 당번을 서게 되었다. 딸은 아버지가 노쇠하고 병들어 차마 멀리 보낼 수 없고 또한 여자의 몸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도 없어서 고민만 하고 있었다. 사량부 소년 가실은 비록 가난하고도 궁핍하나 의지를 곧게 기른 남자로서, 일찌기 설씨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설씨가, 아버지가 늙어서 종군하게 되었음을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설씨에게 말했다. "내 비록 일개 나약한 사나이지만 일찌기 의지와 기개로 자부하던 터이니, 원컨대 불초의 몸이 엄친의 일을 대신코자 하오." 설씨가 매우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들어가 이 말을 고하였다. 아버지가 그를 불러서 보고 말하기를 "공이 이 늙은이의 행역을 대신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만약 공이 어리석고 누추하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을 주어 받들게 하고 싶네"라고 하니, 가실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랄 수는 없으나 원하는 바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 나와 혼인할 기일을 청하였다. 설씨가 말했다. "혼인은 인간의 대사이니, 함부로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이니, 그대가 방위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뒤에 날을 받아 혼례를 치루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거울을 절반으로 나누어 각각 한 쪽씩 지니며 말했다. "이것을 신표로 삼아 뒷날 맞추어 봅시다."

가실에게는 말이 한 필 있었다. 그는 설씨에게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양마라오. 훗날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오. 지금 내가 가고 나면 기를 사람이 없으니 여기에 두었다가 쓰기 바라오." 그는 드디어 설씨와 작별하였다.


○會, 國有故, 不使人交代, 淹六年未還. 父謂女曰: "始以三年爲期, 今旣踰矣. 可歸于他族矣." <薛>氏曰: "向以安親, 故强與<嘉實>約. <嘉實>信之, 故從軍累年, 飢寒辛若{苦}??. 況迫賊境, 手不釋兵, 如近虎口, 恒恐見질, 而棄信食言, 豈人情乎? 終不敢從父之命, 請無復言." 其父老且모, 以其女壯而無伉儷, 欲强嫁之, 潛約婚於里人, 旣定日引其人. <薛>氏固拒, 密圖遁去而未果. 至廐, 見<嘉實>所留馬, 大{太}??息流淚. 於是<嘉實>代來, 形骸枯槁, 衣裳藍縷, 室人不知, 謂爲別人. <嘉實>直前, 以破鏡投之, <薛>氏得之呼泣, 父反{及}??室人失喜. 遂約異日相會, 與之偕老.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趙炳舜.

공교롭게도 나라에 일이 있어서, 기한 내에 교대를 시켜주지 않는 바람에 가실은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3년을 기한으로 하였는데 지금 이미 기한이 지났으니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야겠다" 하니, 설씨가 말하기를 "전일에 아버지를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억지로 가실과 약속을 하였고, 가실이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군무에 종사하여 춥고 배고픔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적의 국경에 접근하여 손에 병기를 놓지 않고 있으니, 이는 호랑이 입에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은지라 항상 물릴까봐 염려되는데,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어기는 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이겠습니까? 아무래도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으니 다시는 말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늙고 정신이 맑지 않아 딸이 장성하도록 짝이 없다 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고 몰래 마을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여 날을 정해 놓고 그 사람을 맞아 들였다. 설씨가 굳이 거절하고 몰래 도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때 가실이 교대되어 돌아 왔는데 그의 형상이 초췌하고 의복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들도 알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에 가실이 앞으로 나아가 깨어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가 이것을 받아들고 소리내어 울고 아버지와 집안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내 다른 날로 약정하여 서로 만나 해로하였다.


○<都彌>, <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聞之, 召<都彌>與語曰: "凡婦人之德, 雖以貞潔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不動心者, 鮮矣乎!" 對曰: "人之情, 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無貳者也." 王欲試之, 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來日入爾爲宮人, 自此後, 爾身吾所有也."


도미는 백제인이다. 비록 소민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의리에 아주 밝았다. 그의 아내는 예쁘기도 하고 행실에 절조가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대체로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치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도미가 대답하였다.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저의 아내와 같은 여자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사람입니다."

왕이 이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 두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왕의 의복과 말과 종자를 가장하여 밤에 도미의 집으로 가게 하고, 사람을 보내 미리 왕이 온다고 알리게 하였다. 가짜 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래전부터 네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이겼다. 내일 너를 데려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지금부터 너의 몸은 내 것이다"라고 하였다.


○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人{入}??室! 吾更衣乃進." 退而雜희一婢子薦之. 王後知見欺, 大怒, 誣<都彌>以罪, 학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泛之河上. 遂引其婦, 强欲淫之. 婦曰: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汚穢, 請俟他日, 薰浴而後來." 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 隨波而至, 乘至<泉城島>, 遇其夫未死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高句麗><산山>之下. <麗>人哀之, 개以衣食. 遂苟活, 終於羈旅.

三國史記卷第四十八.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그가 마침내 덤벼들려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은 망언을 하지 않을 것이니 제가 어찌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 입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어여쁜 여종 하나를 단장시켜 모시게 하였다. 왕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서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조그마한 배에 싣고 강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부인을 끌어 들여 억지로 간음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이제 이미 남편을 잃어 혼자 몸으로는 스스로를 부지할 수 없사온데 더구나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제가 월경으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 목욕을 깨끗이 한 뒤에 오겠습니다." 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그녀는 곧 도망하여 강 어구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널 수가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다가오자, 그녀는 그 배를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주었다. 그리하여 구차스럽게 살다가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권 제 48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九.



삼국사기 권 제 49


列傳第九.

<倉助利>·<蓋蘇文>.


열전 제 9

창 조리. 개소문.


○<倉助利>, <高句麗>人也, <烽上王>時, 爲國相. 時<慕容외>爲邊患. 王謂群臣曰: "<慕容>氏兵强, 屢犯我疆역, 爲之奈何?"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爲新城太守, <慕容외>不復來. 九年秋八月, 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천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창 조리는 고구려인인데 봉상왕 때 국상이 되었다. 당시에는 모용 외가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어 있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모용씨는 병력이 강력하여 누차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하니, 창 조리가 대답하기를 "북부 대형 고노자가 현명하고도 용감하니, 대왕께서 외적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으니, 모용 외가 다시는 오지 못했다. 9년 가을 8월에 왕이 15세 이상 되는 전국의 장정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자, 백성들이 식량이 부족하고 노역에 시달리게 되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였다. 창 조리가 간하여 말하기를 "천재가 거듭되고 곡식이 잘 익지 않아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고, 장정들은 사방으로 유랑하고, 노인과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할 때입니다.


○大王曾是不思, 驅飢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隣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온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相國, 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復}??言." <助利>知王之不悛, 退與群臣謀廢之. 王知不免, 自縊.


李丙燾.

대왕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부려 토목공사에 시달리게 하시니, 이것은 백성의 부모된 사람이 할 일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까운 이웃에 강한 적이 있는데, 만약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 온다면 사직과 생민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이제 상국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아마도 백성들의 칭송을 얻으려는 모양이구나."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인한 것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을 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국상의 빈 자리를 이어받고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바라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가? 다시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조리는 왕에게 개전의 정이 없음을 알고 물러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폐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왕은 사태를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蓋蘇文>[或云<蓋金>.], 姓<泉>氏. 自云生氷{水}??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其父東部[或云西部.]大人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不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 嗣位而凶殘不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幷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賓至, 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弑王, 斷爲數段, 棄之溝中.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支,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개소문[혹은 개금이라고 한다.]은 성이 천씨이다. 스스로 물 속에서 났다고 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그는 외양이 웅장하고 의기가 호방하였다. 그의 부친 동부[혹은 서부라고 한다.] 대인 대대로가 사망하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뒤를 이어야 할 것이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하였기 때문에 뒤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그 직위를 서리할 것을 간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행위를 하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직위를 계승하더니 흉포하고 잔인하여 무도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것이 그만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자기 부의 군사를 전부 모아 마치 사열하는 것 처럼 하고, 동시에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사열하기를 권하였다. 손님들이 오자 그는 그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사망자가 모두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궁중으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여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 그리고는 왕의 동생의 아들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이 관직은 당 나라의 병부 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한다.


○於是, 號令遠近, 專制國事, 甚有威嚴. 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 而履之. 出行, 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병, 不避坑谷, 國人甚苦之. <唐><穆宗{太宗}>??聞<蓋蘇文>弑君而專國, 欲伐之.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設其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愈肆其惡, 然後取之, 未晩也." 帝從之. <蘇文>告王曰: "聞中國三敎병行, 而國家道敎尙缺, 請遣使於<唐>求之." 王遂表請. <唐>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道德經』. 於是, 取浮屠寺館之. 會<新羅>入<唐>, 告<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小國不得已出師, 伏乞天兵救援.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렇게 되자 그는 원근을 호령하고 국사를 전횡하여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는 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으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과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으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대오를 벌려 세우고 갔는데, 앞에서 대오를 인도하는 사람이 길게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면서 구덩이나 골짜기도 피하지 않았으니, 국인들이 이를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다.

당 태종은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국사를 전횡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치려 하였다. 이 때 장손 무기가 말했다. "소문은 자신의 죄가 큰 줄을 스스로 알고, 또한 대국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수비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참고 계시다가 그가 스스로 안심하여 나쁜 일을 더욱 마음대로 하고 난 뒤에 그를 공격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소문이 왕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중국에는 삼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도교가 아직 없으니, 당에 사신을 보내 구해 오기를 바랍니다" 하니, 왕이 마침내 표문을 보내 이를 청하였다. 당에서는 도사 숙달 등 8명을 보내며 동시에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그들을 사찰에 묵게 하였다. 그 때 마침 신라가 당에 가서 말하기를,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또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가 당 나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려하므로, 신라가 부득이 군사를 출동시킬 것이니, 이에 당병의 구원을 엎드려 빈다고 하였다.


○於是, <太宗>命司農丞<相里玄奬>賚璽書, 勅王曰: "<新羅>委眞{質}??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各집兵. 若更攻之, 明年, 發兵討爾國矣." 初<玄奬>入境, <蘇文>已將兵擊<新羅>, 王使召之乃還. <玄奬>宣勅, <蘇文>曰: "往者, 隋人侵我, <新羅>乘흔, 奪我城邑五百里. 自此怨隙已久, 若非還我侵地, 兵不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不言, <句麗>豈得必求故地?" <蘇文>不從. <玄奬>還具言之,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不可以不討." 又遣使<蔣儼>諭旨, <蘇文>竟不奉詔, 乃以兵脅, 使者不屈, 遂囚之窟室中. 於是, <太宗>大擧兵, 親征之, 事具『句麗本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에 태종이 사농승 상리 현장으로 하여금 새서를 가지고 고구려에 와서 왕에게 칙명을 내리기를 "신라는 우리의 맹방으로서 조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대와 백제는 각각 군사를 거두어야 하리라. 만일 다시 공격한다면 명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의 나라를 토벌하겠노라" 하였다. 처음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쳤었는데 왕이 그를 소환하였다. 현장이 칙서를 선포하니 소문이 말하기를 "옛날 수 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신라가 이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백 리를 빼앗아 갔다. 이로부터 원한과 간극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일 잃어버린 우리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하였다. 현장이 말하기를 "기왕의 일을 어찌 추론하겠는가? 지금의 요동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에서는 이를 오히려 따지지 않는데, 어찌 고구려가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하였으나 소문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서 사실대로 모두 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고 그의 대신들을 살해했으며, 백성들을 못 살게 하고 지금은 또한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은 다시 사신 장 엄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은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고 군사로써 위협하였다. 사자가 이에 굴하지 않자 소문은 마침내 그를 굴 속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직접 정벌하였으니, 이 사실이 모두 「고구려본기」에 기재되어 있다.


○<蘇文>至<乾封>元年死. 子<男生>, 字<元德>. 九歲以父任爲先人, 遷中裏小兄, 猶<唐>謁者也. 又爲中裏大兄, 知國政, 凡辭令皆<男生>主之, 進中裏位頭大兄. 久之, 爲莫離支兼三軍大將軍, 加大莫離支. 出按諸部, 而弟<男建>·<男産>, 知國事. 或曰: "<男生>惡君等逼己, 將除之." <建>·<産>未之信. 又有謂<男生>: "將不納君." <男生>遣諜往, <男建>捕得. 卽矯王命召之, <男生>懼不敢入. <男建>殺其子<獻忠>,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 與<契丹><靺鞨>兵附<唐>, 遣子<獻誠>訴之. <高宗>拜<獻誠>右武衛將軍, 賜乘輿馬·瑞錦寶刀, 使還報.


소문은 건봉 원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남생은 자가 원덕인데 9세에 아버지의 임명으로 선인이 되었다가 중리 소형으로 영전되었으니, 이는 당의 알자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다. 남생은 또한 중리 대형이 되어 국정을 보살피게 되었으니, 모든 사령을 그가 주관하게 되었고, 중리 위두 대형으로 승진되었다. 오랜 뒤에 그는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이 되었고, 결국 대막리지가 되었다. 그가 여러 부에 나가서 안찰하게 됨에 따라 그의 아우 남건과 남산이 국사를 보살피게 되었다. 누군가 남건과 남산에게 말하기를 "남생은 그대들이 자신을 핍박해 오는 것을 싫어하여 없애버리려 한다"고 하였으나, 남건과 남산이 이를 믿지 않았다. 또한 어떤 자가 남생에게 남건과 남산이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남생이 첩자를 보내 두 동생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남건이 그 첩자를 잡아 두었다. 그리고 즉시 왕명을 가장하여 남생을 소환하니, 남생이 두려워 하여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남건이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였다.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을 지키며 무리를 거느리고 거란, 말갈병과 함께 당 나라에 투항하였다. 그는 아들 헌성을 보내 하소연하였다.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 장군을 제수하고, 수레, 말,비단, 보검을 주어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詔<契苾何力>率兵援之, <男生>乃免. 授<平壤>道行軍大摠管, 兼持節安撫大使, 擧<哥勿>·<南蘇>·<倉巖>等城以降. 帝又命西臺舍人<李虔繹>, 就軍慰勞, 賜포{袍}??帶金구七事. 明年, 召入朝, 遷<遼東>大都督<玄토郡>公, 賜第京師. 因詔還軍, 與<李勣>攻<平壤>, 入禽王. 帝詔遣子, 卽<遼水>勞賜. 還, 進右衛大將軍<卞國公>. 年四十六卒. <男生>純厚有禮, 奏對敏辯, 善射藝. 其初至, 伏斧질待罪, 世以此稱焉.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고종이 설필하력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남생을 구원하게 하니 남생이 이에 화를 면하였다. 고종이 남생에게 평양도 행군 대총관 겸 지절 안무 대사를 제수하니, 그는 가물, 남소, 창암 등의 성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황제가 또한 서대 사인 이 건역에게 명하여 남생의 군중에 가서 위로하게 하고 포대 금구 일곱 가지를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그를 불러 입조케 하여, 요동대도독현토군공의 직함으로 바꾸고 서울에 거처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군중으로 돌아가 이 적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왕을 사로잡게 하였다. 황제는 자기의 아들에게 조서를 주어 요수로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상을 주게 하였다. 남생은 군중에서 돌아와 우위 대장군 변국공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46세에 죽었다. 남생은 순후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이치에 합당하게 상주를 올렸으며, 말을 잘 하였고, 또한 활을 잘 쏘았다. 그가 처음 당에 갔을 때 도끼에 엎드려 대죄하니 세상에서 이것으로 그를 칭찬하였다.


○<獻誠>, <天授>中以右衛大將軍兼羽林衛. <武后>嘗出金幣, 於文武官內, 擇善射者五人, 中者以賜之. 內史<張光輔>先讓<獻誠>, 爲第一, <獻誠>後讓右王鈐衛大將軍<薛吐摩支>, <摩支>又讓<獻誠>. 旣而, <獻誠>奏曰: "陛下擇善射者, 然多非華人, 臣恐<唐>官以射爲恥, 不如罷之." <后>嘉納. <來俊臣>嘗求貨, <獻誠>不答. 乃誣其謀叛, 縊殺之. <后>後知其寃, 贈右羽林衛大將軍, 以禮改葬.


헌성은 천수 연간에 우위 대장군으로 우림위를 겸하였다. 무후가 일찌기 금폐를 내놓고, 문무관 중에서 활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골라 이것을 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내사 장 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양보하여 그가 제일이 되었고, 헌성은 다시 우왕 검위 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양보하니, 마지는 또한 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얼마 후에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으셨지만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 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까 두렵사오니 그만 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무후가 옳다고 여겨 받아들였다.

내 준신이 일찌기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했는데, 헌성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내 준신이 헌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목매어 죽였다. 무후가 나중에 헌성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우우림위 대장군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지냈다.


○論曰: <宋><神宗>與<王介甫>論事曰: "<太宗>伐<高句麗>, 何以不克?" <介甫>曰: "<蓋蘇文>, 非常人也." 然則<蘇文>, 亦才士也, 而不能以直道奉國, 殘暴自肆, 以至大逆. <春秋>"君弑賊不討, 謂之國無人", 而<蘇文>保腰領, 以死於家, 可謂幸而免者. <男生>·<獻誠>, 雖有聞於唐室, 而以本國言之, 未免爲叛人者矣.

三國史記卷第四十九.


저자의 견해 : 송 신종이 왕 개보와 사적을 논하여 말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왜 승리하지 못하였는가?" 개보가 대답하였다. "개소문은 비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즉 소문도 역시 재사였는데, 정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춘추」에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소문이 몸을 보전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가히 요행으로 토벌을 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 나라의 황실에 이름이 알려졌지만, 본국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반역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 49 끝




三國史記卷第五十.



삼국사기 권 제 50


列傳第一{十}??.

<弓裔>·<甄萱>.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열전 제 10

궁예. 견 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묘其一目. 抱而逃竄, 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子{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 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그 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이리하여 그는 한 쪽 눈이 멀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양육하였다.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니 이를 어찌 하랴?"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곧 세달사로 갔다. 지금의 흥교사가 바로 그 절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


○及壯不拘檢僧律軒지有膽氣. 嘗赴齋行次有烏鳥銜物落所持鉢中. 視之牙籤書王字. 則비而不言頗自負. 見<新羅>衰季政荒民散. 王畿外州縣叛附相半遠近群盜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大順>二年辛亥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善宗>鬱읍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投<北原>賊<梁吉><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그가 장성하자 중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방종하였으며 뱃심이 있었다. 어느 때 재를 올리러 가는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리대에 떨어뜨렸다. 궁예가 그것을 보니 점을 치는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그것을 비밀에 부쳐 소문을 내지 않고 스스로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분산되어 왕기의 밖에 있는 주현 중에서 신라 조정을 반대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던가 개미같이 모여 들었다. 선종은 이를 보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 재위 5년, 대순 2년 신해에 그는 죽주에 있는 반란군의 괴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이 오만무례하므로 선종의 마음이 침울하여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기훤의 휘하인 원회, 신헌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그는 경복 원년 임자에 북원의 반란군 양 길의 휘하로 들어갔다. 양 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선종은 치악산 석남사에 묵으면서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흔>·<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성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現{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선종은 건녕 원년에 명주로 들어가 3천5백 명을 모집하여, 이를 14개 대오로 편성하였다. 그는 김 대검, 모 흔, 장 귀평, 장 일 등을 사상[사상은 부장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 생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쳐부수니 군사의 성세가 대단하였으며, 패서에 있는 적들이 선종에게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창건하고 스스로 임금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찬之職.


우리 태조가 송악군으로부터 선종에게 가서 의탁하니, 단번에 철원군 태수를 제수하였다. 태조는 3년 병진에 승령, 임강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에는 인물현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야말로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 검포, 혈구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 길은 그 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 등 30여 성을 빼앗아 소유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 기미를 알아 차리고 먼저 양 길을 쳐서 대파하였다. 선종은 광화 원년 무오 봄 2월에 송악성을 수축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 대감으로 삼고, 양주와 견주를 쳤다. 겨울 11월에 팔관회를 시작하였다. 3년 경신에 다시 태조로 하여금 광주, 충주, 당성, 청주[혹은 청천이라고 한다.], 괴양 등의 고을을 공격하여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공으로 말미암아 선종은 태조에게 아찬의 위품을 주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拔}??劒擊之, 其刃 ??{迹}??猶在.<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沇}??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壽春部[今禮部]·奉賓部[今禮賓省]·義刑臺[今刑部]·納貨府[今大府寺]·調位府[今三司]·內奉省[今都省]·禁書省[今秘書省]·南廂壇[今將作監]·水壇[今水部]·元鳳省[今翰林院]·飛龍省[今天僕寺{太僕寺}??]·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植貨府{殖貨府}??[掌栽植菓樹.]·障繕府[掌修理城隍.]·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單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북한본」.『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천복 원년 신유에 선종이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전에 신라가 당 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자기가 태어났을 때 신라에서 버림받은 일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젠가 남쪽 지방을 다니다가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화에 있는 신라왕의 화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 원년 갑자에 나라를 창건하여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광평성을 설치하여 광치나[지금의 시중], 서사[지금의 시랑], 외서[지금의 원외랑] 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또한 병부, 대룡부[창부를 이른 것], 수춘부[지금의 예부], 봉빈부[지금의 예빈성], 의형대[지금의 형부], 납화부[지금의 대부시], 조위부[지금의 삼사], 내봉성[지금의 도성], 금서성[지금의 비서성], 남상단[지금의 장작감], 수단[지금의 수부], 원봉성[지금의 한림원], 비룡성[지금의 태복시], 물장성[지금의 소부감] 등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모든 외국어의 학습을 맡은 기관], 식화부[과수 재배를 맡은 기관], 장선부[성황 수리를 맡은 기관], 주도성[기물 제조를 맡은 기관] 등을 설치하고 또한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등의 직품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에 청주의 민가 1천 호를 철원성에 옮겨 살게하고, 이를 서울로 정하였다. 상주 등 30여 주를 쳐서 빼앗았다. 공주 장군 홍기가 항복해왔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찬將軍.


천우 2년 을축에 궁예는 새로운 서울로 가서 궁궐과 누대를 대단히 사치스럽게 수축하였다. 연호였던 무태를 고쳐 성책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13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 성주인 장군 검 용이 항복하였고, 증성의 적의적과 황의적 명귀 등이 항복하여 왔다. 선종은 자기의 강대한 기세를 믿고 신라를 병탄하려 하였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주량 건화 원년 신미에 연호였던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 등지를 치게 하여, 금성을 나주로 고치고,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책,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종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以)??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찬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舡將軍.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선종은 미륵불이라고 자칭하여, 머리에 금고깔을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 보살이라 하고 막내 아들을 신광 보살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탔는데,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동녀들로 하여금 일산과 향과 꽃을 받쳐들고 앞을 인도하게 하였으며, 또한 비구 2백여 명으로 하여금 범패를 부르면서 뒤따르게 하였다. 그는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바르지 않았다. 선종은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다. 중 석총이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오, 괴이한 이야기로서 남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선종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어 그를 철퇴로 쳐 죽였다. 3년 계유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에 연호였던 수덕만세를 고쳐서 정개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 장군으로 삼았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迪{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적{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빈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정명 원년에 그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하여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녀를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고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고 하면서,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그가 의심이 많고 곧잘 갑자기 성을 내므로,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 창근이란 자가 당 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살았다. 정명 4년 무인에 그가 저자 거리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생김새가 매우 크고 모발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을 입고 왼 손에는 자기 사발을 들었으며, 오른 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는가?" 하므로,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에 있는 거지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후에는 간 곳이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에 비치자 가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은 것으로서,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을 것이며,

사(巳)년 중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 동쪽에 몸을 나타낸다."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발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 解之. <含弘>等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찬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찬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으나, 이를 발견한 뒤에는 심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해 찾게 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고, 다만 발삽사 불당에 진성 소상이 있었는데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한참 한탄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 함홍, 백 탁, 허 원 등으로 하여금 그 뜻을 해석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말한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에 몸을 나타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는 소나무를 말함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으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나니, 이는 지금의 파진찬 시중을 이른 것이다.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뜻하는 바,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빼앗고, 뒤에 압록강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저해, 波珍찬亦必遭害." 내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辭{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송 함홍 등이 서로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렇게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일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젓갈이 될 뿐 아니라 파진찬도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이 때문에 거짓말을 지어 보고하였다. 왕이 흉포한 일을 제멋대로 하니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는 바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젊은 시절의 이름이었는데, 이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살육하며,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매한 임금을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과 무왕의 일을 실행할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며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는 자신이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으므로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의 자리에 바꾸어 앉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 나는 실로 덕이 적은 데 감히 은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라고 하였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내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조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내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 오지 않는 것으로서,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어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와 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 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 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한 필부의 손에 죽음을 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때 부인 유씨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말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듣고 첩도 오히려 분노하게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였으니 천 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대문으로 나가면서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달아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모르다가 미천한 차림으로 산의 숲 속으로 들어 갔다. 그는 얼마 안가서 부양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 나라 대순 2년에 일어나 주량 정명 4년까지 활동하였으니, 전후 28년 만에 망한 것이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당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견 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서 본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부친 아자개는 농사를 지며 생활하다가 뒤에 출세하여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 훤이 어려 강보에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점심을 대접하면서 아이를 숲 속에 두었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이 말을 들은 그 고장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그가 종군하여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쪽 해변으로 가서 수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잘 때에도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 보다 앞장 섰으며, 이러한 공로로 인하여 비장이 되었다. 당 나라 소종 경복 원년은 바로 신라 진성왕 6년인데, 총신들이 임금 가까이 있으면서 정권을 농락하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 기근이 곁들어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於是, <萱>竊有유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良吉{梁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梁吉}>??職爲裨將.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이에 견 훤은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현을 다니며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달포 동안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그는 마침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드러내 놓고 왕이라고는 일컫지 못하고 스스로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2천호"라고 하였다. 이 때 북원의 도적인 양 길이 강성하자 궁예는 자진하여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견 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서 양 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을 삼았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차{泗비}>??,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子{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大保{太保}??, 餘如故.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견 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내 백성들이 견 훤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견 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하여 보건대, 마한이 먼저 일어 났고, 뒤에 혁거세가 일어 났으며, 진한과 변한이 뒤따라 일어 났다. 이 때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지났는데, 총장 연간에 당 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 유신도 땅을 휩쓸고 와서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 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백제를 격멸하였으니, 이제 내가 어찌 서울을 완산에 정하여 의자왕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그는 곧 후백제왕이라 자칭하였으며, 관제를 설정하고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 나라 광화 3년이오,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동시에 견 훤에게 검교 태보의 벼슬을 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干{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찬<閔극{閔합}>??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천복 원년에 견 훤이 대야성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 4년에 금성이 궁예에게 귀순한 것을 분하게 여겨 견 훤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포위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 2년에 견 훤이 덕진포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 4년 무인에 철원경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케 하였다. 견 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 각을 보내 축하를 표하고, 이어 공작선과 지리산의 대화살을 바쳤다. 또한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견 훤에게 중대부 벼슬을 첨가하여 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찬<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須彌康}>??,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須彌康}>??失利而歸. 八月, 遣使獻총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학.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勞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大尉{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총馬, <太祖>笑還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에 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군사를 진례성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 률을 보내 태조에게 원조를 청하였으므로 태조가 군사를 출동시켰다. 견 훤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견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상극이었다. 동광 2년 가을 7월에 견 훤이 아들 수미강을 보내 대야, 문소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면서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실패하고 돌아갔다. 8월에 견 훤이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얼룩말을 바쳤다. 3년 겨울 10월에 견 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으므로 태조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견 훤의 군사가 매우 강성하여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임시로 평화를 유지하는 술책으로써 견 훤의 군사를 피곤케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당제 왕 신을 인질로 보냈다. 견 훤도 그의 사위 진호를 보내 인질을 교환하였다. 12월에 견 훤이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속국이라 일컬으니, 당 나라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 훤은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이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는 곧 왕신을 옥에 가두고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전년에 주었던 얼룩말을 돌려 보내기를 요청하였다.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 주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近암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九}??月, <太祖>, 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장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돌>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돌>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史節要』.

천성 2년 가을 9월에 견 훤이 근품성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그는 이어서 신라의 고울부를 습격하였으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태조가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지만, 견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에 들어가니, 이 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다가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관원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혔다. 견 훤은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자기 앞에서 죽였다. 그는 곧 내궁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친족 동생인 김 부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잡고, 또한 국고에 있는 재물과 귀중한 보배와 군기, 자녀와 백공 가운데 솜씨있는 자를 빼앗아 자신이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 밑에서 견 훤을 기다리다가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 락과 숭겸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견 훤은 승세를 몰아 대목군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절 사고, 마돌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견 훤이 장군 최 견으로 하여금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거쳐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 나라 등주에 도착하여 모두 학살되었다.


??時<新羅>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원聲. 是欲안披준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교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憲康王}>??之外孫, 勸郞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유, 灸{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主{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집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恒{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준??{로}??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 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하기 시작한 시대를 다시 회복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우리 태조와 우호 관계를 맺어 서로 도울 것을 상의하고 있었다. 견 훤은 내심으로 나라를 빼앗을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태조가 먼저 이에 성공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서 횡포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는 12월 모일에 태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전번에 (신라의) 국상 김 응렴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 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고, 참새가 새매의 날개를 헤치려고 하는 행위로서 이는 반드시 생령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먼저 조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씨의 도끼를 휘둘렀으며, 모든 관리들에게 태양을 두고 맹세하고, 6부에 올바른 취지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변을 당해 죽었으므로,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여 위태한 나라를 재건하였으니, 임금을 잃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그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헛되이 떠도는 말을 들어 온갖 술책으로 기회를 노리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 나의 말머리마저 보지 못하였고 내 소의 터럭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 색상이 성산진 밑에서 손이 묶였으며, 이 달에는 좌상 김 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드러내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추격하여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약이 이와 같으니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다락에 활을 걸고 패강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 상서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거기에는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 동안 좋게 지내면서 서로 이웃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요사이 두 명의 인질이 모두 죽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 관계를 끊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그대의 본도로 보내고, 또한 고려에도 보내니 각자가 마땅히 서로 친하게 지내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왕실을 높이는 의리를 두터이 하고, 대국을 극진히 섬기고 있다. 따라서 이 조칙을 보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싸움을 그치려 하다가도 다시 시작하고, 어려운 지경에서도 오히려 싸우려 한다. 내가 이를 염려하여 이제 조서를 복사하여 부치노니 주의 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토끼와 날센 개가 싸우다가 서로 피곤해지면 결국 모두 남에게 잡히는 조롱을 받을 것이오, 황새와 조개가 서로 물고 있다가 또한 모두 남에게 잡히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지난 날의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후회할 일을 스스로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초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鬪{闢??/開??}華전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枉{임}??. 僕承天假, 俯迫人推. 過도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미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랑{당螂}??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투盟, 神其극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삽血未乾, 凶威復作, 蜂채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저해卿七{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곤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鏡{경}??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전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빈{尹卿}??>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오>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川{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지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환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집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저{祗}??承睿旨, 悉집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 반 상서가 전해준 한 장의 조서를 받들고, 동시에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온 대사가 제서를 보내주니, 편지의 좋은 소식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다. 그대의 좋은 편지를 받게되어 비록 감격하기는 하였으나, 편지 글을 펴보니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는 사절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다른 사람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전국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 가운데 반란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요행히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선린 정책으로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 이후로 과연 수천리 영역의 백성들이 농업에 힘을 쓰고, 7∼8년 동안 군사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유년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 나를 업신여겨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막듯이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모기새끼가 산을 진 것처럼 어려움을 알고 용퇴하였다. 그리고 공손히 사죄하였으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부터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만일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명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전쟁을 끝내는 무력을 인정하고,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인을 약속하여 마침내 겹겹으로 에워쌓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인질의 교환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남방 사람들에게도 나의 덕이 크게 베풀어졌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독충 같은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행패가 전국을 몰아쳐서, 금성이 위험에 빠지고 왕궁에 혼란이 일어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정의에 입각하여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일에 제환, 진문의 패업과 같은 자가 누구이겠는가? 기회를 엿보아 한 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 망, 동 탁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존의 왕으로 하여금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자 상하가 모두 근심에 잠겼으니,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야심이 없고 존왕의 정신이 간절하다 하여, 나를 조정에 두어 국가의 위급한 처지를 구하도록 하였다. 그대는 털끝 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륙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잡아 수레에 같이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짐으로 실어 갔다. 그대는 걸, 주보다 더 포악하며, 맹수 보다 더욱 잔인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의 원수를 물리칠 마음에 충만되어 있다. 역적의 처단에 진력하여 미미한 충성을 표하기로 하고, 다시 무기를 든 후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뢰와 같이 내닫고 번개와 같이 빨랐으며, 수전에서는 호랑이나 용처럼 뛰어 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반드시 헛된 적이 없었다. 윤빈을 해안에서 쫓을 때 그가 버리고 간 갑옷이 산 같이 쌓였고, 추 조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 부근에서는 길 환을 군문에서 베었고, 마리성 부근에서는 수 오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을 함락시키던 날, 형 적 등 수백 명의 몸이 사라졌고, 청천을 쳐부수던 때는 직심 등 너댓 명이 머리를 바쳤었다. 동수의 군사는 깃발만 보고도 도망하였고, 경산의 군사는 구슬을 물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강주 고을은 남쪽으로부터 항복해왔고, 나주 고을은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공격하는 솜씨가 이러하니 국토를 회복할 날이 어찌 멀겠는가? 저수의 병영에서 장 이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 가에서 한왕이 최후의 일전에 성공한 것과 같은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제 전란을 평정

하여 전국을 안정시키려 하니,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 그런즉 천 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화가 넘쳐 외방에 이르고, 인자함은 지극하여 어린 백성을 사랑하니,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전란을 끝내라고 타일렀으니, 이미 이 가르침을 받은 이상 어찌 존중하지 않으랴? 만일 그대가 공손히 이 지시를 받들어 싸움을 그친다면, 이는 대국의 어진 은덕에 보답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왕통을 다시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여름 5월, 견 훤이 비밀리에 군사를 보내 강주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이 견 훤에게 항복하였다. 가을 8월, 견 훤이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 장군 왕 충으로 하여금 이를 공격하게 하니 관흔은 물러가 대야성을 수비하였다. 겨울 11월, 견 훤이 강병을 선발하여 부곡성을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 지, 명 식 등이 항복하였다. 4년 가을 7월, 견 훤이 갑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 술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하였다. 견 훤이 대병을 동원하여 고창군의 증산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견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 봉이 이를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견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로 이주시켰다. 태조가 예전의 공로를 참작하여 원 봉을 용서하고, 순주의 이름을 하지현으로 고쳤다.


○<長興>三年, <甄萱>臣<공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공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찬<相貴>, 以舡兵入<高麗><禮城江{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소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渾州{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趙炳舜. 『三國史節要』. 『日本書陵部本』.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장흥 3년, 용감하고 지략이 있는 견 훤의 부하 공 직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견 훤은 공 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가을 9월, 견 훤이 일길찬 상귀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에 들어와 3일 간 머물면서 염주, 백주, 정주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에 있는 목마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 원년 정월, 견 훤이 태조가 운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갑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왔다. 그가 미처 포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장군 검 필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 훤의 부하인 술사 종훈과 의원 훈겸, 용감한 장수 상달, 최 필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찬<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찬<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견 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견 훤은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 때 양검은 강주 도독, 용검은 무주 도독이 되었으며, 다만 신검만이 견 훤의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사람을 시켜 강주와 무주에 가서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 3월에 파진찬 신덕, 영순 등과 함께 신

검에게 권고하여 견 훤을 금산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律成{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晉><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빙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維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벽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今西龍.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 나라) 여의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가 임금이 되었고, (당 나라) 건성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 명은 바뀌는 법이 없고, 왕위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대왕의 신통한 무위는 출중하였고, 영명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태어나서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였으며, 도탄의 괴로움을 깨끗이 씻어주어,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다. 그가 바람과 우뢰처럼 떠다니니, 다니는 곳마다 원근에서 그에게 달려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왕업의 중흥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지혜가 한 번 잘못되어,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세를 농락하였다. 그들은 임금을 진 나라의 혜공처럼 우매하게 하였으며, 어진 아버지를 헌공처럼 미혹한 길로 빠지게 하여, 철모르는 아이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다행히 하늘이 내린 충정으로 군자(견 훤)께서 허물을 바로 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따라서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연못의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다. 맏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특별한 은혜를 마땅히 백성들에게도 베풀어 혁신된 정치를 해야할 것이므로, 국내의 죄수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 10월 17일 동트기 전을 기준으로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혹은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하여 면제한다. 주관자가 이를 시행하라."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衰福{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李丙燾. 「高麗史」.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견 훤은 금산에서 석 달 동안 있었다. 6월에 이르러 그는 막내아들 능예, 딸 쇠복, 첩 고비 등과 함게 금성으로 도망하여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나 주기를 요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검 필, 만세 등을 파견하여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 훤이 오자 태조는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 훤의 나이가 태조보다 10년 위라 하여 그를 높여 상보라고 불렀으며, 남궁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 보다 상위에 있었다. 또한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동시에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 명씩과 궁중의 말 10필을 주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합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懃}??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견 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가 남모르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사업이 거의 성취되려다가 하루 아침에 집안 사람의 재화를 입어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대저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일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인후하고 근검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그는 반드시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동시에 왕공에게 성의를 보여 장래의 행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니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이 바로 나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郡)??>,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趙炳舜. 『高麗史』.

천복 원년 2월에 영규가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며 말했다. "만일 정의의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만일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치게 된다면, 길이 막히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장군을 뵈온 뒤에 마루에 올라가 부인에게 절하고, 장군을 형으로 섬기고 부인을 누님으로 높여, 필히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모두 천지신명이 들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여름 6월에 견 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신병을 빌려 주어 난신 적자를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천안부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가을 9월에 태조가 직접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도착하여 군사를 합치고 일선에 진주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진을 쳤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守卿}>??·將軍<王順{三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大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도中軍, 一軍{三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李丙燾. 「高麗史」.李丙燾. 「高麗史」.李丙燾. 「高麗史」.

태조가 상보 견 훤과 함께 열병하고, 대상 견권·술희·금 산과 장군 용 길·기 언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을 삼고, 대상 김 철·홍 유·수향과 장군 왕 순·준량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을 삼고, 대광 순식과 대상 긍준·왕 겸·왕 예·검필과 장군 정순·종희 등에게 정예 기병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철리 등 여러 도의 정예 기병 9천5백 명을 주어 중군을 삼고, 대장군 공 훤과 장군 왕 함윤에게 군사 1만 5천 명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군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덕술·명길 등이 고려 군사의 기세가 웅장하며 잘 정비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린 채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의 장수가 있는 곳을 물었다.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 훤으로 하여금 곧바로 중군을 공격케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사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그의 두 아우와 장군 부달·소달·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노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면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만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 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음모를 꾸며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이럴 수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마침내 그를 주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은, 왕위의 찬탈이 타인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한 나라를 바치고 자기의 죄과를 사죄했다 하여 특별히 사형을 면하였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처형당하였다고도 한다.] 견 훤은 근심과 고뇌로 말미암아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의 불사에서 생애를 마쳤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二}??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晉><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日本書陵部本』.

태조의 군령이 엄격하고 공정하였으므로, 군졸들이 조금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수와 병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살펴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에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로서 한 사람도 자기 임금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장군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또한 나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태조는 곧 그에게 좌승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을 주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 훤은 당 나라 경복 원년에 일어나 진 나라 천복 원년까지 활동하였으니, 도합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위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질都邑, 虔劉君臣, 若禽미而草치之, 實天下之元惡大대.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三國史記卷第五十.



저자의 견해 : 신라는 운세가 기울고 도가 사라졌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도적들이 무수하게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처럼 되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극렬한 자는 궁예와 견 훤 두 사람 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신라의 전복을 기도하였으며, 심지어 선조의 초상화까지 참수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였다. 견 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불칙한 마음을 품었으며, 나라의 위기를 다행으로 여겨 도성과 고을을 침략하였다. 그는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였으니 천하의 원흉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자기 부하로부터 버림을 당하였고, 견 훤은 제 자식으로부터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자업자득이었으니, 누구를 다시 원망하겠는가? 항 우와 같이 뛰어난 재주로도 한 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하였고, 이 밀과 같이 뛰어난 재주로도 당 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하였거늘, 황차 궁예나 견 훤과 같은 흉한이 어찌 우리 태조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랴? 그들은 다만 태조에게 백성들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 50 끝


참考寶文閣修校文林郞禮賓丞同正  臣 <金 永溫>

참考西林{材}??場判官儒林郞尙衣直長同正

臣 <崔 祐甫>

참考文林郞國學學諭禮賓丞同正   臣 <李 黃中>

참考儒林郞前國學學正    臣 <朴 東桂{朴 東柱}>??

참考儒林郞金吾衛錄事참軍事   臣 <徐 安貞>

참考文林郞守宮署令兼直史館   臣 <許 洪材>

참考將仕郞分司司宰注簿   臣 <李 溫文>

참考文林郞試掌治{冶}??署令兼寶文閣校勘

臣 <崔 山甫>

編修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同德贊化}??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大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

臣 <金 富軾>

同管句內侍寶文閣校勘將仕郞尙食直長同正 臣 <金 忠孝>

管句右丞{承}??宣尙書工部侍郞翰林侍講學士知制誥

臣 <鄭 襲明>

府使嘉善大夫兼管內勸農防禦使  臣 <金 居斗>

權知經歷前奉正大夫三司左咨議   臣 <崔 得경>

嘉靖大夫慶尙道都觀察陟黜使兼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提調刑獄兵馬公事同知中樞院事

臣 <閔   開>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史』.趙炳舜. 『高麗史』.

참고보문각수교문림랑예빈승동정  신  김 영온

참고서림장판관유림랑상의직장동정  신  최 우보

참고문림랑국학학유례빈승동정   신  이 황중

참고유림낭전국학학정    신  박 동계

참고유림랑김오위록사참군사   신  서 안정

참고문림랑수궁서령겸직사관   신  허 홍재

참고장사랑분사사재주부   신  이 온문

참고문림랑시장치서령겸보문각교감  신  최 산보

편수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수대보문하시중판상서이예부사집현전태학사감수국사상주국치사   신  김 부식

동관구내시보문각교감장사랑상식직장동정 신  김 충효

관구우승선상서공부시랑한림시강학사지제고 신  정 습명

부사가선대부겸관내권농방어사   신  김 거두

권지경력전봉정대부삼사좌자의   신  최 득경

가정대부경상도도관찰척출사겸감창안집전수권농관학사제조형옥병마공사동지중추원사

신  민   개


○三國史印本之在<계林>者, 歲久而泯, 世以寫本行. 按廉使<沈>公<孝生>得一本, 與前府使<陳>公<義貴>圖所以刊行, 於癸酉七月, 下牒于府. 八月, 始침諸梓, 未幾, 二公見代. 余以其年冬十月至府, 承觀察使<閔>相公之命, 因繼其志, 乃助之施令, 工不斷手, 至甲戌夏四月告成. 嗚呼! 指揮能事, 以至於成, 惟三公是賴, 余何力之有焉? 但具事之終始, 書于卷末耳. 府使嘉善大夫<金居斗>跋.


「삼국사기」 영인본으로서 경주에 보관되어 있던 것은 세월이 흘러 없어지고, 세상에는 사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안렴사 심공 효생이 영인본 한 권을 구하여 이전의 부사 진공 의귀와 이의 간행 문제를 의논하고, 계유년 7월에 경주부에 통첩을 내렸다. 8월에 각판을 시작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이 관직을 옮기게 되었다. 나는 그 해 겨울 10월 경주부에 부임하였다. 나는 관찰사 민 상공의 지시를 받고, 두 분의 뜻을 계승하기 위하여 이 일의 실행을 명령하였고 중단없이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일은 갑술년 여름 4월에 완성되었다. 아아! 이 사업을 지휘하여 진행하도록 하고 완성에 이르게 한 것은, 오직 위 세 분에게서 힘입은 것이니, 나에게 무슨 능력이 있으랴? 다만 일의 전말을 모아 이 책의 말미에 기록이나 할 뿐이다.

부사가선대부 김 거두가 발문을 쓰다.


○吾東方三國本史·遺事兩本, 他無所刊, 而只在本府. 歲久완缺, 一行可解僅四五字. 余惟士生斯世, 歷觀諸史, 其於天下治亂興亡, 與諸異跡, 尙欲博識, 況居是邦, 不知其國事, 可乎! 因欲改刊, 廣求完本, 閱數載不得焉. 其曾罕行于世, 人未易得見, 可知若今不改則將爲失傳. 東方往事, 後學竟莫聞知, 可歎也已. 幸吾斯文<星州>牧使<權>公<輳>, 聞余之求, 求得完本送余, 余喜受, 具告監司<安>相國<당>·都事<朴>候<佺>, 僉曰善. 於是, 分刊列邑, 令還藏于本府. 噫! 物久則必有廢, 廢則必有興, 興而廢, 廢而興, 是理之常. 知理之常, 而有時興, 以永其傳, 亦有望於後來之惠學者云.

皇明<正德>壬申季冬, 府尹推誠定難功臣嘉善大夫<慶州>鎭兵馬節制使全平君<李繼福>謹跋.


生員     <李 山甫>

校正生員     <崔 起潼>

中訓大夫慶州府判官慶州鎭兵馬節制都尉     <李   瑠>

奉直郞守慶尙道都事       <朴   佺>

推誠定難功臣嘉靖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安   당>


우리 동방의 삼국 본사와 유사 두 책은 다른 곳에서는 간행되지 않았고 오직 본 경주부에만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되자 마멸되고 낙장이 생겨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한 줄에 겨우 너댓 자 밖에 없었다. 내가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나 여러 역사 서적들을 보아가며, 천하의 흥망성쇠와 기이한 역사의 흔적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자 하거늘,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이 나라의 사적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이러한 뜻으로 이 책을 다시 간행하기 위하여 완전한 판본을 널리 구하였으나, 수 년이 지나도록 얻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예전부터 세상에 많았던 것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이 쉽사리 얻어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만약 지금이라도 복각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완전히 없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지난 사적을 후학들이 필경 알 수 없을 것이니 이는 대단히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 나의 선배인 성주목사 권공 주는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한 책을 얻어 나에게 보내 주었다. 내가 이를 반가이 받아들고, 감사 안 상국 당과 도사 박 후 전에게 고하였더니 모두 이의 복각에 찬성하였다. 이렇게 되어 여러 고을에 판각 사업을 분담시키고, 판각이 완성되는대로 경주부에 보내 보관토록 하였다. 아아! 사물이란 오래되면 반드시 없어지고, 없어지면 반드시 생기는 것이니, 생겼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 당연한 이치를 알아서 어느 시기엔가 이러한 사업이 다시 진행되어 이 책이 영원히 전해지기를, 훗날의 지혜로운 학자에게 기대한다.

명 정덕 임신년 섣달에 부윤추성정난공신가선대부경주진병마                    절제사전평군 이 계복이 삼가 발문을 쓰다.

생원       이 산보

교정생원      최 기동

중훈대부경주부판관경주진병마절제도위   이   유

봉직랑수경상도도사     박   전

추성정난공신가정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안   당


進三國史表.

○臣<富軾>言: 古之列國, 亦各置史官, 以記事. 故<孟子>曰: "<晉>之『乘』, <楚>之『도올』, <魯>之『春秋』, 一也." 惟此海東三國, 歷年長久, 宜其事實著在方策. 乃命老臣, 비之編集, 自顧缺爾, 不知所爲. 伏惟聖上陛下, 性<唐堯>之文思, 體<夏禹>之勤儉, 宵간餘閑, 博覽前古. 以爲今之學士大夫, 其於五經諸子之書, <秦><漢>歷代之史, 或有淹通而詳說之者, 至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 甚可嘆也. 況惟<新羅>氏·<高句麗>氏·<百濟>氏, 開基鼎峙, 能以禮通於<中國>. 故<范曄>『漢書』·<宋祁>『唐書』, 皆有列傳. 而詳內略外, 不以具載. 又其古記, 文字蕪굴, 事迹闕亡. 是以君后之善惡, 臣子之忠邪, 邦業之安危, 人民之理亂, 皆不得發路以垂勸戒. 宜得三長之才, 克成一家之史, 貽之萬世, 炳若日星. 如臣者, 本非長才, 又無奧識. 계至遲暮, 日益昏蒙, 讀書雖勤, 淹卷卽忘, 操筆無力, 臨紙難下. 臣之學術, 蹇淺如此, 而前言往事, 幽昧如彼, 是故疲精竭力, 僅得成編, 訖無可觀, 祗自愧耳. 伏望聖上陛下, 諒狂簡之裁, 赦妄作之罪. 雖不足藏之名山, 庶無使만之醬부. 區區妄意, 天日照臨.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

신 부식은 아뢰나이다. 옛날의 열국에서도 각각 사관을 두어 사적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진 나라의 「승」, 초나라의 「도올」, 노 나라의 「춘추」는 똑같은 역사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해동 삼국은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니, 그 사적들이 책으로 저술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리하여 이 늙은 신하에게 편집의 명을 내리셨으나 저의 부족한 역량을 생각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상 폐하의 품성은 요 임금의 경륜과 사상을 타고 나셨으며, 몸은 우 임금의 근검을 얻었으니, 아침 저녁의 여가에 옛날의 사적들을 널리 섭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학자와 관리들 가운데 오경 제자의 서적과 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통하여,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우리 나라의 사적에 대해서는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이는 심히 개탄할 일이라고 생각하시게 되었습니다. 황차 신라·고구려·백제는 개국 때부터 삼국으로 우뚝 솟았고, 중국과는 예의로 관계를 맺어올 수 있었습니다. 범 엽의 「한서」와 송 기의 「당서」에는 모두 열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는 중국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있지만, 외국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다루어 상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삼국의 고기는 문장이 거칠고 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사적들이 누락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임금과 왕후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국가 사업의 평안과 위기, 백성의 안녕과 혼란에 관한 사실들이 후세에 교훈으로 전하여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재능와 학문과 견식을 겸비한 인재를 찾아 권위있는 역사서를 완성하여 자손만대에 전함으로써 우리의 역사가 해와 별 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신은 원래 훌륭한 인재도 아니며, 심오한 지식도 갖추지 못한 데다가, 나이들어서는 나날이 정신이 혼미하여 책을 열심히 읽어도 덮고나면 바로 잊어 버리며, 붓을 잡기에도 힘이 들어 종이를 대하면 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소신의 학문이 이와 같이 천박하고, 옛 말과 지난 일에 대해서 몽매하기가 또한 이와 같았기에, 소신은 정기와 힘을 모두 기울여서야 간신히 이 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볼 만한 것이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좋은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뜻만 높았던 점을 양해하여 주시고, 잘못 기록한 한 죄가 있다면 그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이 책이 비록 명산의 史庫에 보관될 가치는 없을지라도 버리는 종이로 사용되지 않게하여 주시옵고, 숨어 버리고 싶은 망령된 이 심정에 햇빛으로 밝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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