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箕子硏究餘草 1 - 머리말과 緖論 본문

고전모음/箕子硏究餘草

箕子硏究餘草 1 - 머리말과 緖論

부르칸 2011. 9. 24. 19:51
箕子硏究餘草

朴魯哲

머리말
箕子說은 朝鮮史論에 잇서 자못 큰 部分으로 그 考尋(고심)에 疎忘(소망)히 볼수 업스니 이를 먼저 究明하야 朝鮮史의 實像을 들어내고 支那史의 僞冒(위모)를 밝히지 안흘수업다고본다. 이에 筆者는 淺識庸才(천식용재)를 무릅쓰고 그 全豹(전표)의 一班이나마 대총 그려볼가하야 己徃硏究하든 箕子都邑論에서 우선 疆域及洪範▦論을 내고 단지 遺蹟에 關한것만을 로히 簡草하얏다. 무론 未定稿(미정고)이니만치 布置, 排列考索 論繹에 잇서 어그러짐이 만흘줄 自量한다. 삼가 斯界의 洽博(흡박)한 先輩는 일일이 糾正(정)하야 輔導(보도)하기 바란다. 
 
緖論
史記의 『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宋微子世家)에 據하야 의심이 적지 안홈은 本文 그대로 箕子自身이 不臣의 節을 지키

고 잇는 以上 周의 姬發이 구타여 朝鮮侯란 이름아테서 河南西華 에서 隱遊한 殷箕子를 朝鮮에 封알 理由가 잇스랴. 支那史乘에 흔히들어나는 것처럼 支那서는 대개 四隣의 列邦을 自己네의 藩屬으로만 여겨 억지로 朝貢國을 맨들어내는 特質이 잇슴으로 解氏朝鮮도 殷箕子에 傳會하야 侯를 삼는것이니 涵虛子의 『武王封箕子爲朝鮮侯以奉殷祀爲中國藩邦』이란말도 遼東을 중심삼어 肅愼舊地에 이르기지 解氏朝鮮의 版圖를 周의 藩邦으로 自認한테서 架空的自國版圖의 擴展(확전)을 圖하야 解氏古疆을 어다 朝鮮侯란 이름을 지어낸 것인가 한다. 이른 支那史家의 通弊로 冒瀆的 誤說로 보지안흘수 업다. 朝鮮侯는 그실 箕子第三十二代赫聖王騭(?) 혹은 第四十一代哀平王否(?)를 ▦定한 것인데 箕子胥餘(?) 역시 朝鮮侯라함은 誤이니라. 
(支那史家는 대개 遼東附近에 朝鮮侯城을 두어 箕子時代의 侯國을 삼은바 이는 秦漢代의 侯城이오 箕代의 侯城은 아닐 것이다.)
 
殷箕子의 東來說에 대하야 宋의 范曄의 그 論에 『昔箕子違衰殷之運, 避地朝鮮, 始其國俗, 未有聞也』(후한서 동이전)라 하야 史記의 無稽한 史實을 拒否한 셈이니 范曄으로부터 殷箕子가 朝鮮에 亡命하야 그 國을 創始하얏다 함을 否定하는 이상 더욱 史記나 漢書의 주책업는 誤說을 疑駭(의해)하지 안흘수업다. 諸史翰에 殷箕子는 商의 宗室로 武乙瞿(무을구)의 佳胤(가윤) 곳 理의 子요 는 太丁后의 令孫 즉 帝乙의 嫡子라 하며 史記宋世家索隱에 馬融, 王肅은 太師箕子를 紂의 諸父라 하고(東國通鑑에도 이 말이 잇다) 東史에는 殷王受의 諸父라 하고 服虔(복건) 杜豫는 紂의 庶兄이라 하고 諸史에는 紂의 庶兄이라 하고 諸史에는 紂의 親戚이라 하야 그 血統이 一定하지 못하고(歷代通鑑輯覽에는 太師箕子와 小師比干을 王諸父라 하고 微子를 王庶兄이라 하얏다) 史記의 『箕子朝周過故殷墟, 感宮室毀壞生禾黍, 箕子傷之, 欲哭則不可欲泣為其近婦人, 乃作麥秀之詩以歌詠之. 其詩曰麥黍漸漸兮, 禾黍油油,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所謂狡童者, 紂也, 殷民聞之, 皆為流涕』(송미자세가)에 據하야 箕子에 대한 麥黍歌도 역시 미들수 업는 것이 이는 司馬遷이 欲哭則不可欲泣二句의 微妙한 文句로써 自意로 箕子의 心思를 酌하야 麥黍詩前篇을 지어 史記에 실은 것이 분명하니 陵稚隆(능치륭)의 『史記欲哭則不可欲泣二句, 太史公墓寫箕子心事』에 據에야보아도 이를 斟酌할수잇다. 그박게 顔師古는 『史記云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漢書云殷道衰箕子去之朝鮮不同』이라하야 箕子史實에 대한 모순점을 들은 것도 잇다.
 
이리하야 隋書列傳裵矩奏狀의 『周大以封于箕子』 禹貢錐指의 『箕子封於朝鮮』 說文의 『朝鮮箕子所封之地』 原齊憑椅의 『箕子封於朝鮮東夷之地』 漢書의 『箕子去之朝鮮』 涵虛子의 『武王封箕子爲朝鮮侯』 書傳의 『武王聞之因以朝鮮封之』 등등의 모든 어구가 거의 司馬遷의 史記의 『封箕子於朝鮮』(송미자세가)이란 杜撰에서 나오기 비롯하야 그후 支那各樣史傳에 一律로 流布된 것이니 그실 遷等의 無稽한 誕說로 인하야 朝鮮解氏王統을 亡처노혼셈이다. 이미 말한바가티 支那史官은 흔히 他邦의 系統을 어다 자가의 傍系에 列立하기를 例수로하니 羅馬人(로마인)을 匈奴의 遺種이라함을 미루어보아도 이를 알수잇다. 擬度컨대 遷等은 殷箕子의 去就未詳함을 애석히여겨 壇君苗裔의 解氏種姓을 어다 殷箕子의 系統을 이우려는 僭越慾에서 『封箕子於朝鮮』이란 誕說을 내세운바 이를 史記宋世家에 실어 그뒤 일반 史翰의 標準이 되어온것이다. 이럼으로 支那諸史輩는 수천년동안 箕國의 高官으로 一時狂人이 된 殷箕子가 朝鮮에 復活하야 천년왕국을 건설한 것처럼 미더왓스며 이에라 宋儒들도 扶餘部族時代의 解氏種姓을 殷箕子로만 誤認하여온것이다. 이미말한바이지만 支那서는 대개 列邦을 자기네의 藩邦으로여기는 先天的病質이 잇슴으로 何等의 奉公이 업는 遠邦을 自意로 侯와 公을 삼어 封公, 稱臣의 文句를 例事로 써왓스니 例를들면 隋唐魏가 高句麗에게 敗할적에도 自稱 樂浪公을 삼어 來朝하엿다 이르고 宋이 契丹에게 滅하엿스되 勝하엿다쓰고 西域使臣이 內華하여도 稱臣奉公이다하고 肅愼民이 장사차로 周에가서 弓矢를 禮로 獻하면 來貢하엿다하야 터문이 업는 말을 쓰는 이리 만타. 이가티 그 이름을 알만한 나라는 모조리 朝貢國으로 맨들어 自家의 屬地처럼 일커러왓스니 이에 憑하야 보아도 解氏王統을 殷箕子에 傳會하야 曰『封箕子于朝鮮侯』란 문구를 忌憚업시 써온것도 그 一理가 업지 안타. (寫眞은 箕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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