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고구려말 숫자가 일본말과 닮았다고? 본문

조선사독단/오국사

고구려말 숫자가 일본말과 닮았다고?

부르칸 2011. 8. 7. 18:23
고구려말 三, 五, 七, 九들의 발음이 일본말과 닮았단다.
주장은 근거는 아마도 삼국사기 지리지일게다.
어디 한번 그 근거를 보자.
삼국사기 잡지 지리 고구려 우수주
三峴縣一云密波兮 
삼현현은 달리 밀파혜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고구려 한산주
五谷郡一云于次呑忽
오곡군은 달리 우차탄홀이라고도 한다. (정덕본에는 弓次云忽)

삼국사기 잡지 지리 고구려 한산주
七重縣一云難隱別
칠중현은 달리 난은별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고구려 한산주
十谷縣一云德頓忽 (정덕본에는 德市頁忽)
십곡현은 달리 덕돈홀이라고도 한다.
여기 3, 5, 7, 10이 다 모였다.

우선 한산주에 나온것부터 살펴보자.
五를 于次에 대응하니 이는 현대 일본말 いつ(이쯔, itsu)와 닮았고 
七은 難隱에 대응하니 なな(나나, nana)와 닮았다
十은 德에 대응하니 とお(도~, to~)와 닮았다. 
뭐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를 주장한 자는 삼국사기 지리지만 보았지 삼국사기 본기를 보지 않은듯하다. 보았다고 하더라도 일본말과의 연관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모른척 넘어갔을수도있다. 

한산주가 어디인가?
이곳은 미추홀이 있고 한성(漢城)이 있으며 한산(漢山)이 있다.
백제는 처음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하였고 온조는 한산(漢山)에 올라 도읍할 곳을 찾아 위례성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말갈과 낙랑으로 인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여 漢水의 남쪽 漢山아래로 도읍하였는데 이때 백제의 북쪽 경계는 패하(浿河)까지이다.
그렇다면 비록 삼국사기 잡지에 한산주가 고구려의 地志로 써 있지만 이는 엄연히 백제의 영토이다. 그런데 백제가 충청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이곳 한산주가 고구려 땅이 되어버리자 김부식은 이곳 한산주를 고구려 잡지에 넣어버렸다.

따라서 일본말과 닮았다던 5, 7, 10들은 고구려말이 아니라 백제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제 우수주에 나온것을 살펴보자
三은 密에 대응하게되므로 密은 일본말 みつ(미쯔, mitsu)와 닮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우리말을 깊이 알지 못하기때문이다. 
우리말에 "수효가 많은"이라는 뜻을 갖는 관형사로 "뭇"이라는 말이 있다.
능엄경언해에는 "뭇"을 "뭀(물+ㅅ)"이라 하였다. 
원시언어에서 하나나 둘보다 큰 것을 그냥 많다고 했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뭀(물+ㅅ)"이라고 하였다가 고대에 들어 3을 "뭀(물+ㅅ)"이라고 표현하였다가 후대에 수효가 많다는 뜻을 갖는 관형어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런 흔적이 남은 말로서 "뭇떡잎식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싹이 날때 떡잎이 3장 이상 나는 식물을 말하는 것이니 '뭇' 곧 "뭀(물+ㅅ)"이 고대에 3을 뜻하는 말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일본말 숫자와 연관되는 5, 7, 10들은 고구려말이 아니라 오히려 백제말인데 왜냐하면 그 근거가 되는 한산주의 지명들은 고구려땅이 아니라 오히려 백제 초기 강역이기때문이다. 
또한 백제와 왜국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백제지명에 일본말이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또한 우수주에 나타난 三은 일본말이 아니라 고대국어에서 三을 뜻하던 "뭀(물+ㅅ)"을 密로 음차했을 가능성이 더 큰데 密의 음이 '밀'이고 종성이 'ㄹ'인바 つ로 끝나는 일본어 みつ(미쯔, mitsu)가 될 수 없으며 우리 고대국어에 三을 뜻하던 관형어가 "뭀(물+ㅅ)"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三은 오히려 '물'이었을것이며 이를 密로 음차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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