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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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독단/오국사

고구려의 3경

부르칸 2012. 9. 17. 17:23

우리나라의 사료가 너무 부족하여 가끔가다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은 제가 알기로 앞쪽을 남쪽으로 보는 습성이 있다고 하죠.

우리나라도 고려중기와 중세조선을 지나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앞쪽을 남쪽으로 보는 습성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대에 앞쪽을 북쪽으로 보았던 것 같고, 그렇기에 하평양(下平壤)이 남평양(南平壤)이 되는 것입니다. 

(이하 글에서는 "앞쪽=위쪽"으로 봤다는 전제가 들어갑니다)

 

고구려 사람이 생각하는 앞쪽은 북쪽


고구려는 어떤 책력을 사용하였을까요?

해동역사에서 유환기문(游宦記聞)의 기록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해동역사 권17 성력지

고려국에는 구집력(九執曆)이 있다. 그 법은 하늘은 왼쪽으로 돌고, 해와 달 역시 왼쪽으로 돈다. 하루의 밤과 낮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해가 3백 65도 4분의 1을 운행하면 하늘이 도는 것에 비해 한 바퀴가 적은데, 날마다 하늘의 운행에 미치지 못하는 바를 28수(宿)로써 계산하여 도수를 잰다. 대개 28수는 바로 경성(經星)으로 하늘에 붙어서 운행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하여 도수(度數)를 잴 수가 있다. 그리고 땅의 거리를 잴 수가 있다고 하는데, 만약에 천리의 주군(州郡)에 정해진 장소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곳을 알고 있을 경우, 이곳을 가지고 기준점으로 삼아서 거리를 재는 것이다.

한치윤은 유환기문에서 기록한 고려국(高麗國)이 왕건이 건국한 고려라고 단정지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고려사를 보면 고려가 어떤 책력을 사용하였는지 나옵니다.

고려사 권 50

고려(高麗)는 따로 력(曆)을 만들지 아니하고 당(唐)의 선명력(宣明曆)을 승용(承用)하였던 것이나 (唐에서 宣明曆을 쓰게된) 장경임인년(長慶壬寅年, AD822)으로부터 고려 태조 개국까지는 거의 100년이 지났으며 그 술(術)도 이미 차(差)가 생겼으므로 이에 앞서 당(唐)에서는 이미 개력(改曆)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중국에서는 선명력으로부터) 22번이나 바뀌어졌으나 고려(高麗)에서는 아직 이것으로 그대로 써왔던 것이다. 충선왕(忠宣王)에 이으러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는 쭉~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하였다는 겁니다.

만약 한치윤이 유환기문을 인용한 구집력이 고려의 것이라면 그 좋은 구집력을 두고 선명력을 사용하였을리는 없을겁니다.

이는 구집력을 고구려에서 사용한 것이라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기때문에 영류왕이 당나라에게 책력을 요구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집력은 당나라에서 당개원점경(唐開元占經)이라는 책의 권104에 일부분이 소개되어 있다고 합니다. 네이버사전을 보니 718년에 번역되었다고 하네요. 아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책력에 관한 책자들을 모아 중국말로 번역한 것 같습니다.

유환기문 권8

髙麗國有九執厯....

고려국에는 구집력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朱子語類卷二

季通云西域有九執厯却是順筭(胡泳)

季通이 말하기를 서역에는 구집력이 있다...

고 하였죠.

文苑英華巻七百三十六

天竺九執厯一巻(九執厯名出西域集本文粹無天竺九以上十七字)

천축구집력 1권(구집력은 서역에서 나온 이름인데, 집본에는 천축이라는 글자가 없고....)

고 하였습니다.

즉, 고구려에서 사용한 구집력이라는 책력은 서역과 천축에서 사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역과 천축이 과연 어디냐 하는 문제는 여러분들께 맡깁니다. 아마도 지나들이 말하는 견융(犬戎)들의 나라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혹 竺은 毒과 통하는 글자이므로 天竺은 天毒이며 이는 산해경에 나오는 고조선이 아닐까요? 고구려는 고조선에서 만든 천독구집력을 쭉~ 사용해왔던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집력을 만든 곳이 고구려냐 서역이냐 하는 문제도 여러분에게 맡깁니다. 저의 실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라서....

중요한 것은 구집력의 앞뒤 방향이 우리가 고대에 앞뒤 방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 법은 하늘은 왼쪽으로 돌고, 해와 달 역시 왼쪽으로 돈다. "

해와 달이 왼쪽으로 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한참 생각해 봤습니다. 

이 말은 앞쪽을 북쪽으로 두었을때 해와 달이 오른쪽에서 떠서 왼쪽으로 진다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고대에 앞쪽을 남쪽으로 생각하였다고 보통 알고 있습니다만,

고구려에서는 구집력을 사용하였기에 북쪽이 앞쪽이며, 동쪽은 오른쪽이고, 서쪽은 왼쪽이됩니다.

 

아마도 백제도 고구려와 친하기때문에 같은 책력을 사용하지 않았나 짐작은 됩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면서 당나라의 책력을 이용하게 되고 그것이 고려에까지 이어지면서 앞뒤좌우가 바뀌게되죠.

그래서 삼국사기에 백제 고구려관련 기사에서 동서남북이 바뀐 기록이 나타나지 않나 합니다. 

 

上都, 中都, 下都의 문제


이렇게 앞쪽을 북쪽으로 본다면, 사람의 통념상 앞쪽이 위쪽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도읍중에 上, 中, 河를 찾아봅시다.

 

* 上都

남당사료 고구려사략 중에 이런 구절이 있쬬.

 

고구려사략 유리왕조

二十二年癸亥 十月移居于尉那岩徵河北河南民築城是爲北都

유리왕 22년 계해년 10월에 尉那岩으로 이사하여 하북과 하남의 백성을 징발하여 성을 쌓고 이곳을 北都로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 2개가 나옵니다. 

尉那岩이라는 곳인데....

보통 이것을 "위나암성"으로 고유지명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위쪽(尉) 나라(那)의 바위성이란 말이지요.

즉, 위쪽인 북쪽의 바위성에 국내성을 쌓고 이곳을 北都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는 국내성이 上都라는 말입니다.

 

* 中都

요사지리지를 보면 해석하기 애매한 구절이 하나있죠.

요사지리지

桓州 髙麗中都城, 故縣三, 桓都 神鄉 浿水, 皆廢

환주는 고구려 中都城(중도성)으로 옛 현이 3개인데 환도현, 신향현 패수현으로 모두 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中都城(중도성),

이는 국내성을 上都(상도)로 하였을때 그 남쪽에 있는 환도현의 환도성이 바로 中都城(중도성)이라는 말입니다.

 

* 下都

下都는 가장 남쪽에 있는 평양성입니다.

광개토왕비에 巡下平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巡下,  平壤이 아니라 巡,  下平壤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광개토왕이 돌아본 평양성은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아니라 한산주 남평양을 돌아봤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南平壤이 곧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下平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에는 上都 中都 下都가 있는데

上都는 국내성이고

中都는 환도성이며

下都는 한산주 남평양이라는 결론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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