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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斷論
고조선 도읍 변천 정리 본문
규원사화 |
삼국유사 |
紀年東史約(1849) |
紀年兒覽(1778) |
大東歷史(1905) |
1)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曰壬儉城[i] 2)居牛首河畔十年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曰平壤卽第二壬儉城也.[ii] 3)御國三十餘年…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4)御國四十餘載,…乃益封夫餘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iii]), 使夫婁居壬儉城…[iv] 5)遷都樂浪忽, 使眞番侯監舊都. 6)避居於唐莊京, 入阿斯達[v] |
1)降於太伯山頂[vi]
2)唐高卽位五十年[vii]…都平壤城, 始稱朝鮮.
3)移都於白岳山阿斯達[viii]
4)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
1)檀君立都平壤
2)商武丁三十九祀, 入阿斯達 |
1)都平壤
2)後都白岳, 世號唐藏京
3)入阿斯達爲神 |
1)雄築室于太白山
2)都長安[今平壤]
3)一百二十七年都白岳
4)一千二百十年國遷於扶餘 |
규원사화 |
大東遺事(1829) |
大東掌攷(1774~1851) |
동국사략(1474~1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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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曰壬儉城 2)居牛首河畔十年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曰平壤卽第二壬儉城也. 3)御國三十餘年…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4)御國四十餘載,…乃益封夫餘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壬儉城… 5)遷都樂浪忽, 使眞番侯監舊都. 6)避居於唐莊京, 入阿斯達 |
1)初都平壤
2)後都白岳
3)商武丁乙未檀君入阿斯達…商紂戊寅檀君後孫避箕子利都于唐藏京[ix] |
1)都平壤
2)後徒白岳世號唐藏京
3)商武丁三十九年乙未入阿斯達山 |
245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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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滿洲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규원사화 저자는 牛首河를 “소머리강”으로 번역하여 단군조선의 첫 번째 도읍이 송화강 상류라고 하였으나 다시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牛首河(우수하)”란 곧 阿斯達(아사달) 근처에 있던 강으로 “우수”와 “아사”는 아우(弟)의 옛말인 “”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사에 부소량의 左蘇에 있던 아사달이 있다고 하였으니 아사달이란 아침산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소량의 아우가 되는 산이라는 말이다. “아우”는 중세국어에서 , 아, 앗, 앗, 아, 아오, 아으, 아우, 아이, 우, 오 등으로 나타나는 바, 그 원형이 “”이라는 것을 추론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국사기에 압록강 북쪽에 항복하지 않은 성으로 “助利非西(조리비서)”가 나오는데 “助利非西”란 곧 “北扶餘城州(북부여성주)”이다. “조리(助利)”란 우리 옛말로 북쪽이라는 뜻이며 “비서(非西)”란 곧 “부여”이니 북부여 땅이 곧 단군조선이 처음 도읍한 곳이다. 규원사화에 이런 기록이 있다.
御國四十餘載, 而有猰猶之亂. 猰猶者, 獫狁之屬也,…중략…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 討平之. 乃益封夫餘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壬儉城,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건국한지 40여 년 만에 설유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중략…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이에 부여국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즉, 첫 번째 도읍인 우수홀은 부여국 북쪽에 있던 땅이므로 곧 삼국사기에 나오는 북부여이다.
또한 淸平云 「粟末水之陽, 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동천왕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ii]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淥府地, 神州是也.
《新唐書․渤海傳》曰: 「高麗故地爲西京, 曰鴨淥府, 領神‧豊‧桓‧正四州.」
《遼史․地理志》曰: 「淥州, 鴨淥軍, 節度, 本高麗故國, 渤海號西京鴨淥府, 都督神‧桓‧豊‧正四州事. 故縣三, 神鹿‧神化‧劒門, 皆廢.」 又曰: 「桓州, 高麗中都城, 古縣三, 桓都‧神鄕‧淇水, 皆廢.」
《唐書․地理志》曰: 「自鴨淥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 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二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 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又正東如北六百里, 至渤海王城」云.
[iii] 先平壤이란 두 번째 임검성이 아니라 첫 번째 임검성일 것인데 왜냐하면 牛首河 근처에 牛首忽이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平壤을 도읍의 뜻으로 쓴 것 같다.
[iv] 도읍을 옮긴 것은 아니지만, 단군이 죽고 부루가 임검이 제위에 오르게 되면 부루의 봉지가 곧 도읍이 되므로 이에 도읍 변천기록에 수록하였다. 설유의 난이 있은 후에 부여에게 우수홀을 지키게 하고 부루에게는 임검성을 지키게 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부여는 북부여의 땅에 도읍한 것이며 부루는 임검성 즉 발해 서경 압록부 신주에 도읍한 것이다. 이제 단군은 여러 제후들을 둘러보는데 그 순행한 방향으로부터 대략의 위치를 알 수 있으니,
於是檀君西至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復南巡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즉 임검성(평양성)은 당장경의 서쪽에 있다. 그리고 태백산은 영토의 북쪽에 있으며 태백산 서남쪽 임검성인 우수홀을 (동북으로) 지나면 숙신에 이르는데 이곳에 동북제후의 중심이다. 또한 영토의 서쪽에 람국이 있고 이곳이 서남제후의 중심이다. 영토의 남쪽으로는 갑비고차가 있고 이곳에 마니산과 삼랑성이 있는 곳이다. 남동쪽에는 낙랑홀이 있는데 이곳이 남동제후의 중심이다. 또한 남쪽으로 당장경과 아사달에 이른다는 것은 임검성(평양 혹은 우수홀)로부터 남쪽으로 간다는 것이지 영토의 남쪽으로 내려가 청구국에 이른다는 뜻은 아니다.
평양성은 우수홀 남쪽 혹은 동남쪽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한서에서는 東沃沮 在 高句驪 蓋馬大山之東[蓋馬 縣名, 屬 玄菟郡. 其山 在 今 平壤城 西, 平壤 即 王險城也.]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王險城이란 임검성이 아니라 위만조선의 도읍이다. 태백산은 현재 대흥안령산맥일 것이며 개마대산도 대흥안령산맥 남쪽 줄기로부터 뻗어 나간 大馬群山이나 七老圖山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대흥안령산맥과 서납목륜하가 만나는 부분에 한산(罕山)이 있으니 이곳이 태백산이 아닐까?
우수홀이 고조선 영토 서쪽에 있다는 것은 牛首州復有盎骨者, 與其弟長骨作亂, 西鄙之民에서 알 수 있다.
[v] 당장경과 아사달은 모두 태백산에 있다. 두을임검때에 封太白之山, 使凡民不得恣意侵犯라고 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망할 때에 도피하기 위함이다. 고려사에 부소량의 좌소를 따라 아사달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단군조선시대의 도참을 따라 고려의 도읍을 건설한 것이다. 부소량은 곧 태백산 자락이다.
[vi] 비록 단군조선의 도읍은 아니지만 단군은 환웅이 세운 나라를 기반으로 건국하였기 첫 도읍은 이곳에서 시작하였으리라.
[vii] 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viii] 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백악 아사달에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규원사화의 도읍 이동을 보면 평양성에서 대부분 나라를 다스렸으니 차이가 심하다. 혹 乃益封夫餘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壬儉城에서 부여에게 봉한 우수홀이 2번째 임검성 즉 평양성이며, 부루에게 봉한 임검성이 우수하에 있던 첫 번째 임검성이 아닐까?
[ix] 당장경의 위치와 아사달의 위치는 근접하다. 이 기록은 단군이 아사달로 들어갔다고 한 상 무정 을미년이 기자가 조선으로 피한 무인년과 맞지가 않자 억지로 끌어 맞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