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관구검이 새겼다는 不耐城은 국내성일까 본문

조선사독단/오국사

관구검이 새겼다는 不耐城은 국내성일까

부르칸 2012. 9. 13. 14:22

유리왕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한다.

그 당시 국제적 성황으로 볼때 유리왕은 동부여를 피하여 서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당사료에는 국내성 즉 불이성이 북부여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개 환도성과 국내성이 서로 인접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관구검이 새긴 不耐城과 국내성인 不而城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유리왕이 천도한 不而城과 관구검이 공격한 丸都城의 위치


不而城은 漢의 낙랑군 不而縣으로 생각된다.

그 위치를 살펴보면...

新唐書 卷四十三下 志 第三十三下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泝(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又東北泝(溯)流二百里,至神州。

압록강 어귀에서 배로 100여리를 가고, 이내 작은 배를 타고 동북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汋口)에 이르는데, 발해의 경계가 된다. 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는데, 옛 고구려 왕도(故高麗王都)이다. 다시 동북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른다.

즉 환도성은 고대 압록강인 현재의 요하로부터 630리를 가면 환도성이고 830리를 가면 신주라고 한다.

요사지리지를 보면

渌州 鴨渌軍節度, 本 髙麗故國, 渤海 號 西京鴨渌府, 城髙 三丈, 廣輪 二十里, 都督 神桓豐正四州事, 故縣三, 神鹿 神化 劔門, 皆廢.  大延琳 叛, 遷 餘黨於上京, 置易俗縣居之.  在者户 二千, 隸東京留守司, 統 州四 縣二.  弘聞縣.  神鄉縣.  桓州髙麗中都城, 故縣三, 桓都 神鄉 浿水, 皆廢.  髙麗王於此 剏立 宫闕, 國人 謂之 新國.  五世孫 釗晉康帝 建元初 為 慕容皝所敗, 宫室焚蕩.  户七百, 隸渌州, 在西南二百里.  豐州 渤海置 盤安郡, 故縣四, 安豐 渤恪隰壤 硤石, 皆廢.  户三百, 隸渌州, 吊北二百一十里.  正州 本 沸流王故地國, 為公孫康所併, 渤海置 沸流郡, 有沸流水.  户五百, 隸渌州, 在西北三百八十里.  統縣一, 東那縣 本 漢 東暆 不而縣地, 在州西七十里.  慕州 本 渤海安逺府地, 故縣二, 慕化 崇平 乆廢. 户二百, 隸渌州, 在西北二百里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은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 옛 도읍이며 발해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 3길이며 너비는 20리나 된다.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豐州)·정주(正州) 등 4주의 일을 관할하였다. 옛 현은 신록(神鹿)·신화(神化)·검문(劍門)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머지 잔당들을 상경으로 옮겨 역속현(易俗縣)을 두어 거주시켰다. 호구수는 2,000이며,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4주와 2현을 관할하였다. 

홍문현(弘聞縣)  

신향현(神鄕縣)  

환주(桓州) 고구려 중도성(中都城)으로 옛 현은 환도(桓都)·신향(神鄕)·패수(浿水)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고구려 왕은 여기에 궁궐을 처음 세웠는데 나라 사람들이 신국(新國)이라고 불렀다. 5대손 소(釗 ; 고국원왕)는 진(晉)나라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년에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하고 궁실이 불타버렸다. 호구수는 7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는데, 녹주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

풍주(豐州) 발해가 반안군(盤安郡)을 설치하였는데 옛 현은 안풍(安豐)·발각(渤恪)·습양(隰壤)·협석(硤石) 등 넷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3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다. 동북쪽으로 210리 떨어져 있다.

정주(正州) 본래 비류왕(沸流王)의 옛 지역으로 공손강(公孫康)에게 병합되었다. 발해가 비류군(沸流郡)을 설치하였다.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호구수는 5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다. 서북쪽으로 38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  동나현(東那縣) 본래 후한의 동이(東暆) 부이현(不而縣)땅으로 정주에서 서쪽으로 70리 떨어져 있다.

모주(慕州) 본래 발해의 안원부(安遠府) 지역으로 옛 현은 모화(慕化)·숭평(崇平) 둘이 있는데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2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다. 서북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

록주 압록군의 중심지는 신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하로부터 830리를 가야되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 환주를 보면 록주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고 하므로 요하로부터 630리를 가야된다. 

신당서 가탐도리기와 일치한다.

유리왕이 천도한 不而城은 어디냐면...

신주에서 서북쪽으로 380리에 비류국 정주가 있고...

이 정주로부터 또한 70리를 서쪽으로 가면 동나현이 있는데 이는 不而縣 즉 不而城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주에서 서북쪽으로 450리를 가야지 유리왕이 천도한 不而城이며

신주에서 서남쪽으로 200리를 가야지 관구검이 공격한 丸都城이 나온다.


不而城과 丸都城은 가깝지 않다.

그런데 왜 서로 인접하였다고 생각했을까?


2) 오해의 사연

그것은 관구검이 숙신의 남계에 이르러 새긴 기공의 기록때문이다.


위서를 보면

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刋丸都之山銘不耐之城...

옥저에서 1000여리를 지나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였는데 刋丸都之山銘不耐之城

보통 이 문장을 해석하기를 "丸都山이라 새기고 不耐城이라 기록하였다"고 해석하고 耐와 而는 고대에 발음이 같으므로 환도성 근처에 不而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사지리지를 살펴본 바와 같이 환도성과 不而城은 꾀 멀다.

그렇다면 刋丸都之山銘不耐之城을 '丸都山이라 새기고 不耐城이라 기록하였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쉽게 무너뜨린 것을 돌에다가 새긴 것이므로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刋丸都之山銘不耐之城

"丸都山이라 새기고 견디지 못하는 城이다라고 하였다"

즉, 자신이 환도산의 城을 공격하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而와 耐를 같은 것으로 보고 환도성과 不而城이 인접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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