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기자(箕子)와 풍백(風伯) 본문

조선사독단/기자조선

기자(箕子)와 풍백(風伯)

부르칸 2012. 10. 2. 15:15

기자조선은 단군조선 1000년 통치기간 후에 기자가 정권을 이어받아 다시 또 1000년을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조선을 이어받은 기자는 주나라에서 망명온 기자가 아니라 아마도 풍백 운사 우사 중 풍백의 자손이 아닌가 한다.


우선 箕의 뜻을 살펴보면

존한자사전

【기】키; 삼태기; 쓰레받기; 별 이름; 바람 귀신(風伯); 다리를 뻗고 앉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바람귀신이라고 하는 풍백(風伯)인데, 

환웅이 나라를 세울때 개국공신이었던 풍백과 한자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강희자전

【書·洪範註】好風者箕星,好雨者畢星。바람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기성(箕星)이라고 합니다.

【註】箕伯,風師。기백(箕伯)은 풍사(風師)이다.

위 한자의 뜻으로부터 꼭 사서에 나오는 箕子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箕의 자손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풍사(風師) 혹은 풍백(風伯)의 자손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자를 풍백의 자손으로 볼수 있는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1. 규원사화


  -   獨藍侯者出諸家之右, 時常役率羣后, 以行國政。  유독 남후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항상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였다.

  -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풍이는 곧 치우씨의 일족이다.

  -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치우씨족들은 서남쪽의 땅에 자리를 잡았다.

  -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 宅奄慮忽.。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단군조선 개국때 서남쪽의 땅에 자리를 잡았으며, 풍이라고도 불리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단군조선 1000년이 지나서 치우씨의 후손인 람국이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2. 환단고기

   -   乙未五十二年右賢王高登薨基孫索弗婁襲爲右賢王   을미 52년(B.C.1286),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右賢王)이 되었다. 

   -  二十二世 檀君 索弗婁  22세 단군 색불루이다.

이 기록은 우현왕의 아들 색불루가 대통을 잇는 기록인데 우현왕은 곧 단군조선의 서쪽에 있던 제후국이므로 규원사화 기록과 마찬가지로 단군조선 1000년 후에 단군조선 서쪽에 있던 나라가 대통을 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규원사화와 결부시켜 생각하면 우현왕은 곧 치우의 후손의 나라인 남국이라는 것도 유추할 수 있다.


3.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기록을 같이 생각해보면

   - 환단고기

      桓雄天皇使風伯釋提羅雖除鳥獸蟲魚之害  한웅천왕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 규원사화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 두개의 기록을 비교하여 보면 짐승들의 해를 제거한 것은 풍백이고 그가 바로 치우임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 석제라라고 한 것은 아마 치우가 성씨이고 석제라가 이름이 아닌가 한다)


단군조선 1000년 후에 대통을 이은 것은 람국의 제후이며 이는 치우의 자손이며 치우는 환웅시대의 풍백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즉, 단군조선 1000년 후에 대통을 이은 람국의 제후는 바로 풍백의 자손으로(風伯子孫) 다르게 쓰면 기백의 자손인데(箕伯子孫), 이를 간략하게 기록하여 箕子라고 쓰지 않았나 생각한다. 혹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아 몽골의 눈치를 보며 사서를 기록할때 풍백(風伯)의 자손이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었다라는 사실을 箕子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그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알리고자 하였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혹은 중국 사서에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을 곡해하여, 사대하던 조선시대에 箕伯子孫을 고쳐 箕子라고 썼을수도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