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기자연구여초 - 2 본문

고전모음/箕子硏究餘草

기자연구여초 - 2

부르칸 2011. 9. 27. 04:43

제1편 箕子世系와 箕子墓

제1장 箕子世系論

1. 箕子世系의 僞撰

箕子의 世系를 혹은 第四十二代 혹은 第四十一代라하야 그 說이 일정하지 못하니 이는 文聖王(?)으로부터 樂成王(?)지의 十九代는 틀림이 업스나 樂成王以後代에 와서 서로 糾錯되는 點이 잇서 一代가 줄고 늘고 한다. 東史에 이르되 敬孝王詢(?)으로부터 哀平王否(?)지의 年代及名諡는 가히 紀할수잇스되 그 父子兄弟의 次序는 가히 詳考할 길이 업다하엿다. 그 歷代諸王의 諡名에 잇서 箕子志를 東史에 對照하니 서로 錯誤되는 점이 만타. 이는 아마 箕子志의 誤일가한다. 東史에 據하면 朝鮮서 王號를 갓기는 箕子朝鮮 第三十二代의 赫聖王時代라고도하며 는 第四十二代(혹은 四十一代)의 箕準時代라고도 하야 그 說이 일정하지 못하다. 勝覽에 武康王이라함은 곳 箕準을 이름이니 대개 朝鮮이 箕準와서 비로소 王號를 갓게되엇다한다. 이리하야 魏略에는 『箕子後四十餘世朝鮮侯僭號王稱』이란 말이 잇다. 그러나 第三十二代의 赫聖王時代에 王號를 가진듯하다(혹은 武康王을 箕準의 子卓이라고도 하야 그 說일 일정하지 안타). 殷箕子東來說을 是認하는 자는 第三十二代赫聖王時에 비로소 王號가 잇섯다고 봄이 可할듯하다. 이로보면 赫聖王으로부터 文聖王지 三十三代의 王號는 전혀 假號로 보지 안흘수 업다.

東史에 이르되 殷箕子에 대한 王의 稱號와 그 諡號는 修山李氏의 紀傳에서 나왓슴으로 바르지 못함이 만타하야 箕子世家를 의심하야 다음과 가티 말하얏다. 殷人은 본이 諡號 엄거늘 하물며 文聖 두글자는 그 어대서 나왓스랴? 周의 亡한뒤에 나왓느냐? 이는 後人이 僞撰한 것이 분명하니라. 王號는 箕準時에 잇섯다 하며 혹은 赫聖王(第三十二代)에 잇섯다기도 하야 詳考할 바이 업고 武康王否의 諡號인즉 지금 益山五金寺西편 數百步에 잇스니 이는 雙陵으로 武康王箕準 는 善花嬪의 陵이라 하야 今人이 일커러오나 그실 航頭塚傍(항두총방)의 銘은 거의 後人이 僞撰한 것이요 이제와서 曲籍에 실엇다는 말을 듯지 못하엿거를 이를 어써 밋는다하랴. 『按箕子以來, 稱王稱諡, 出於修山李氏之紀, 然, 不經甚矣, 殷人無諡, 况二字謙, 出于周衰之後乎, 此後人之僞撰, 以作古紀明矣, 稱王在於箕準之時, 而其曰在赫聖王之世, 亦無所考, 但武康之諡, 則今益山五金寺西數百步, 有雙陵曰武康王箕準及善花嬪陵(善花準之夫人), 至今人稱之, 然, 航頭塚傍之書, 太半是後人僞撰, 則今於載籍無聞之, 世何可以必信乎, 或曰稱王稱諡, 後孫稱王之後追諡其或然耶 旣明稱號, 而又載卽位年數, 則獨不可考, 其世次何歟未可知也』(東史引用)라 하엿다. 涵虛의 『自周亡至後漢千餘年, 爲公孫康所纂, 箕子之統緖失傳焉』이란 말은 미들수 업스나 만일 이에 據한다면 朝鮮에 流布된 箕子世家는 전혀 僞撰으로 보지 안흘 업다. 이리하야 箕子志及諸史에 실린 箕子의 世系 는 그 王號와 諡名을 미들수 업스니 이는 後代에 와서 東儒들이 誕證한대 지나지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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