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斷論

단군론 2 - 단군의 고전 본문

고전모음/최남선 단군론

단군론 2 - 단군의 고전

부르칸 2011. 8. 13. 13:17
2. 壇君(단군)의 古傳(고전)

壇君(단군)은 朝鮮(조선)人文(인문)의 肇祖(조조)로 닐컷게 된 것 만콤 그 傳說(전설)의 起原(기원)이 邃古(수고)에 屬(속)하얏스리니 이는 朝鮮人(조선인)의 民族的(민족적)成立(성립)이 아득한 녯적임과가치 무엇이든지 그 種姓(종성)의 榮耀(영요)를 爲(위)하는 說話(설화)가 잇지 아니치 못하얏슬 것으로써도 넉넉히 짐작할 바이다. 다만 前(전)하야는 記錄(기록)의 術(술)이 일즉 열리지 못하고 後(후)하야는 佛敎(불교)의 實德論的(실덕논적)融攝(융섭)과 儒敎(유교)의 常識論的(상식론적)斥否(척부)가 大(대) 又(우) 久(구)하얏슴을 말미암아서 外國(외국)에서처럼 古傳說(고전설)의 完形全傳(완형전전)이 거의 업슴은 學者(학자)로 하야곰 朝鮮(조선)의 歷史(역사) 及(급) 文化(문화)의 時間的(시간적)優越(우월)과 空間的(공간적)雄渾(웅혼)을 부지중 가 생각하게 함이 크지 아니치 못하엿다. 그러나 散珠(산주)를 收綴(수철)하고 隱形(은형)을 磨光(마광)하야 蕪穢(무예)한 史園(사원)에 向上(향상)의 一路(일로)를 通(통)하면 朝鮮(조선)이 決(결)코 稽考上(계고상)의 貧戶(빈호)가 아님을 안다. 傳說(전설)일법하야도 神話(신화)일법하야도 아모 보담도 못하지 아니한 人文(인문)起原(기원)의 어린 歷史(역사)를 가젓슴을 알면 그것이 마찬가지의 傳說(전설)이지마는 남보담 지나는 事實的背景(사실적배경)에 彩色(채색)되어잇슴을 알게 된다.

壇君傳(단군전)의 原形(원형)
最古態(최고태)가 어한것이지는 시방 무론 徵驗(징험)할 길이 업다. 시방 우리의 가진 바 그 直接表現的(직접표현적)最古徵憑(최고징빙)인 者(자)는 高麗國(고려국)義興華山(의흥화산) 曹溪宗(조계종)麟角寺(인각사)迦智山(가지산) 下(하) 普覺國尊(보각국존)으로 닐컷는 一然禪師(일연선사, 서기 1206-1289)의 撰(찬)인 “三國遺事(삼국유사)”에 거두은 그 一傳(일전)이니 三國遺事(삼국유사)는 그 名(명)과 가치 三國(삼국)의 遺文(유문)軼事(일사)를 收載(수재)한 것으로 金富軾(김부식)의 “三國史記(삼국사기, 서기 1145년 撰成(찬성))”를 後(후)하기 凡(범) 百許年後(백허년후)의 記錄(기록)이다. 三國遺事(삼국유사)는 필시 當時(당시)文籍(문적)의 淵業(연업)이든 佛門(불문)傳來(전래)의 材料(재료)로써 三國史記(삼국사기)의 闕漏(궐루)를 補述(보술)하기 爲(위)하야 撰輯(찬집)된 것이니 “史記(사기)”가 儒家的常識論(유가적상식론)에 繩縛(승박)되여서 무슨 標準(표준)에 依(의)한 劃一的(획일적)取捨(취사)를 加(가)함에 對(대)하야 “遺事(유사)”는 佛敎人的(불교인적)融通性(융통성)으로써 古撲純實(고박순실)하게 素材(소재)를 거두어 노핫슴이 어 탐탐한지를 모를 일이다. 後世(후세)의 服(복)으로써 古代(고대)의 事(사)를 觀(관)함은 “三國史記(삼국사기)”의 內容(내용)을 펵 疎略(소략)하게 만드럿지마는 佛敎(불교)方面(방면)에 流傳(유전)한 그 一部(일부)가 간혹 “遺事(유사)”의 中(중)에 徵考(징고)됨을 우리는 못내 다행해야 할적이 퍽 만히잇다.

“遺事(유사)”는 開卷第一을 “紀異(기이)”의 編(편)으로 하야
敍曰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拜, 仁義說敎, 則怪力亂神在所不語, 然而帝王之將興也, 膺符命, 受圖籙, 必有以異於人者, 然後, 能乘大變, 握天器, 成大業也, 故河出圖洛出書而聖人作, 以至虹繞神母而誕羲, 龍感女登而注(生?)炎皇娥遊窮桑之野, 有神童, 自稱白帝子, 交通而生小昊, 簡狄谷呑卵而生契, 姜源履跡而生弃, 胎孕十四月而生堯, 龍交大澤而生沛公, 自此而降, 豈可殫記,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時怪哉, 此紀異之所以慚諸篇也, 意在斯焉, 이라고 自己(자기)의 立塲(입장)을 밝힌 뒤에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關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堯의 避諱代用字)同時,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也, 父知子意, 下視三巵, 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遺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 神檀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 雨師雲師, 而主穀主命. 主兵, 主刑, 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常祈于神熊, 願化爲人, 時神遺靈艾, 一炷, 蒜二十枚日,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每於檀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則, 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武의 避諱 代用字)王卽位, 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唐斐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漢分置二郡, 爲玄菟, 樂浪, 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 臨, 樂, 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아하는 一篇(일편)을 魏滿朝鮮(위만조선) 以下(이하) 餘(여) 韓(한) 三國(삼국)等(등)의 建國(건국)說話(설화)와 한가지 收載(수재)하얏다. (引用文(인용문)中(중)의 單括弧內(단괄호내)는 原文(원문)의 割註(할주)요, 復括弧內(복괄호내)는 述者(술자)의 添入(첨입)한 것). 頭尾(두미)에 引用(인용)한 漢籍(한적)은 如何(여하)하얏든지 그 “古記(고기)”를 引用(인용)하매 自己(자기) 意見(의견)은 반드시 割註(할주)로 攙入(참입)한것만으로도 그 原文尊重(원문존중)의 意(의)를 보려니와 더욱 唐堯(당요)五十年(오십년)의 干支(간지)를 辨訂(변정)한 句語(구어)로써 遺事(유사)撰者(찬자)의 이 篇(편)에 對(대)한 態度(태도)가 어케 虔肅(건숙)한 것을 짐작할 것이다. “遺事(유사)”는 그 名(명)과 가치 三國(삼국)의 그것을 採收(채수)하면 그만이오 미상불 “史記(사기)”가 三國以前(삼국이전)의 古記(고기)에 밋침이 업슴은 상포동 그 名義(명의)에 泛濫(범람)하기를 避(피)한 것이겟지마는 “遺事(유사)”는 그대로 限定(한정)한 題號(제호)의 下(하)에 그 以前(이전)의 모든 建國傳說(건국전설)지를 綴拾(철습)하엿슴도 適足(적족)히써 撰者(찬자)가 다만 이것저것을 蒐羅(수라)하려한 以外(이외)에 다른 意思(의사)가 잇지 아니함을 삷힐일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