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Tags
- 후한서
- 신라
- repeated measures ANOVA
- ANOVA
- 창평
- 기자조선
- 통계학
- 통계
- linear regression
- post hoc test
- 유주
- 우분투
- R
- 패수
- 낙랑군
- 고구려
- 풍백
- 지리지
- 단군
- 한서지리지
- 히스토그램
- spss
- t test
- 한서
- 기자
- Histogram
- 독사방여기요
- 선형회귀분석
- 태그를 입력해 주세요.
- categorical variable
Archives
- Today
- Total
獨斷論
부소량에 얽힌 상고사의 비밀 본문
지난번에는 부소량 백아강 오덕지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이제 각각에 대하여 논하여보고자 한다.
부소량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는 어떠한가?
부소량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는 어떠한가?
1) 말뜻
부소량(扶踈樑)이란 우리 옛말로서 '소나무땅' 또는 '소나무나라'라는 뜻이다.
원래 松木을 뜻하던 옛말은 '부소나무'였는데[1] 이것이 도치되어 '소부나무'가 되고 습관상 주격조사 '이'를 붙여 '소부이나무'가 되었고 '이'는 '나'의 영향을 받아 '소부리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ㅂ'이 'ㅸ'이 되고 더욱더 'ㅇ'로 변하니 '소우리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나라'를 뜻하는 말을 굳이 樑(량)으로 음을 빌어씀은 신지비사에서 이 부소량을 나라의 대들보가 되는 秤幹(칭간)으로 보았기때문이며 이는 그냥 음만 빌었씀이 아니라 음과 뜻을 같이 빌어썼음이다.
원래 松木을 뜻하던 옛말은 '부소나무'였는데[1] 이것이 도치되어 '소부나무'가 되고 습관상 주격조사 '이'를 붙여 '소부이나무'가 되었고 '이'는 '나'의 영향을 받아 '소부리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ㅂ'이 'ㅸ'이 되고 더욱더 'ㅇ'로 변하니 '소우리나무'가 되었다.
부소나무 > 소부나무 > 소부이나무 > 소이나무 > 소리나무 > 소우리나무아직도 우리는 소나무를 '소오리나무'라고 하기도 하는데 소나무의 옛말이 '부소나무'이기때문이다.
그리고 '나라'를 뜻하는 말을 굳이 樑(량)으로 음을 빌어씀은 신지비사에서 이 부소량을 나라의 대들보가 되는 秤幹(칭간)으로 보았기때문이며 이는 그냥 음만 빌었씀이 아니라 음과 뜻을 같이 빌어썼음이다.
2) 부소량의 역사
단군왕검이 주변 부족을 통합하여 탁리국(橐離國)을 세우고 부소량(扶踈樑)에 도읍하였는데 대개 시라무렌강(西拉木淪河) 상류 북쪽땅에 해당하며 요국(遼國)에서 평지송림(平地松林)이라 하였던 곳이다.
탁리국의 세력이 강력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이국(夷國)을 침략하여 장악하고 고대국가를 건설하여 백이(白夷)의 수도였던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국호를 센단「震檀(진단)」이라 고쳤으니 이것이 사서에 말하는 단군조선 또는 고조선이다. 국호를 '센단'이라 한 이유는 평양이 백산(白山)의 줄기에 있었기때문에 白의 뜻을 따라 '센'이라 하였고 '단'은 고대어로 '땅' 또는 '나라'를 뜻하는 말이었다.[2] 즉, '센단'이란 오늘날말로 말하면 백국(白國)이란 말이다.
이같이 단군왕검이 도읍을 옮긴 이유는 이국(夷國)을 정복하고나서는 더이상 북쪽땅 부소량에 도읍을 할 필요가 없기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옛날 탁리국의 땅보다 현재 장악한 이국(夷國)의 땅이 더 중요하기때문이며 이는 탁리국의 주변 부족은 같은말을 쓰던 흩어진 종족이었지만 이국(夷國)은 다른말과 문화를 갖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단군왕검이 이국(夷國)을 점령한지 몇십년이 지난뒤 도읍을 이국(夷國)의 수도였던 백산(白山)의 평양(平壤)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부소량은 성지(聖地)가 되어 이족(夷族)들은 들어갈수가 없었다.
건국한지 약 1000년이 지난뒤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가 망하였을때에 마지막 단군은 부소량의 봉금된 지역으로 숨어들어갔으므로 이곳을 또한 당장경(唐臧京)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말 '도장골'의 훈음병차이다. 우리나라 지명 중에 "도장골"이 많이 존재하는데 "도장골"이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안방처럼 아늑한 고을"을 말하는 것이며 '도장'이란 안방의 옛말이다.[3] 이렇게 주변이 모두 숲으로 둘러쌓였다면 나라가 망한 이후에 숨어들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라 생각된다.
탁리국의 세력이 강력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이국(夷國)을 침략하여 장악하고 고대국가를 건설하여 백이(白夷)의 수도였던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국호를 센단「震檀(진단)」이라 고쳤으니 이것이 사서에 말하는 단군조선 또는 고조선이다. 국호를 '센단'이라 한 이유는 평양이 백산(白山)의 줄기에 있었기때문에 白의 뜻을 따라 '센'이라 하였고 '단'은 고대어로 '땅' 또는 '나라'를 뜻하는 말이었다.[2] 즉, '센단'이란 오늘날말로 말하면 백국(白國)이란 말이다.
이같이 단군왕검이 도읍을 옮긴 이유는 이국(夷國)을 정복하고나서는 더이상 북쪽땅 부소량에 도읍을 할 필요가 없기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옛날 탁리국의 땅보다 현재 장악한 이국(夷國)의 땅이 더 중요하기때문이며 이는 탁리국의 주변 부족은 같은말을 쓰던 흩어진 종족이었지만 이국(夷國)은 다른말과 문화를 갖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단군왕검이 이국(夷國)을 점령한지 몇십년이 지난뒤 도읍을 이국(夷國)의 수도였던 백산(白山)의 평양(平壤)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부소량은 성지(聖地)가 되어 이족(夷族)들은 들어갈수가 없었다.
건국한지 약 1000년이 지난뒤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가 망하였을때에 마지막 단군은 부소량의 봉금된 지역으로 숨어들어갔으므로 이곳을 또한 당장경(唐臧京)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말 '도장골'의 훈음병차이다. 우리나라 지명 중에 "도장골"이 많이 존재하는데 "도장골"이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안방처럼 아늑한 고을"을 말하는 것이며 '도장'이란 안방의 옛말이다.[3] 이렇게 주변이 모두 숲으로 둘러쌓였다면 나라가 망한 이후에 숨어들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라 생각된다.
더불어말한다면 흔히들 말하는 아사달이란 아침땅이란 말도 아니고 첫땅이란 말도 아니요 朝鮮이란 말이 아사달에 해당되는 말도 아니니, 아사달이란 정확히 말하면 "부소량에 딸린 땅"이란 뜻이다.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단군왕검이 부소량을 봉금지역으로 선포한 후에 도읍한 곳이다. 고려사에 아사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는데
고려사중세국어에서 아우(弟)를 일컬어 아라고 하였는바 부소량에 있던 큰 산이었던 부소산의 아우산(小山)에 해당하는 곳이 아달이요 이를 阿斯達(아사달)로 음차함이다. 아마도 부소량을 봉금지역으로 선포하자 더이상 이곳에 도읍을 알 수 없었기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부소량의 딸린 땅에 임시적으로 도읍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有僧據讖云自扶踈山分爲左蘇曰阿思達
도참서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부소산으로부터 나뉘어 좌소를 이룬 곳이 바로 아사달이다
3) 부소량의 위치
부소량은 대개 요국(遼國)의 평지송림에 해당되는데 통설에서 말하는 위치보다는 약간 북쪽으로 잡았다. 오른쪽림에서 회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단족(壇族)이 아직 이국(夷國)을 침략하기 전에 점거하던 곳이며 그곳의 도읍이 바로 부소량이다. 그리고 부소량의 큰산 즉 부소산의 왼쪽으로 아사달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곳도 역시 언젠가 도읍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소량의 남쪽으로 이국(夷國)의 중심이 되는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람이(藍夷)가 있었고 한반도는 도이(島夷)의 땅이었다.
그리고 부소량의 남쪽으로 이국(夷國)의 중심이 되는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람이(藍夷)가 있었고 한반도는 도이(島夷)의 땅이었다.
4) 부소량의 역할
부소량은 부족국가가 주변 나라를 통합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대사회에서는 정권을 잡은 임금과 지방호족들이 서로 견제하며 나라를 꾸려가는데 만약 임금의 힘이 약하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이 강하게 되면 그 나라는 갈기갈기 찢어지게 되며 그 반대로 임금의 힘이 강하고 지방호족의 세력이 약하면 항상 독재자가 나오기마련이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항상 자신의 힘을 키워가야하는데 이때 중요한 곳이 자신이 원래 힘을 키웠던 부소량이다. 부소량은 만약 지방호족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져서 지방호족 가운데 하나가 왕권을 강탈한 경우에 도피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부소량은 夷族(이족)과 같이 정복당한 부족에게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또한 아직도 부소량에는 임금을 따르던 자들이 살고 있기때문이다.
역사상 부소량을 둔 국가는 몇개 있었는데
- 고구려의 부소량은 졸본으로 추모왕이 졸본에서 시작하여 주변 여러나라를 통합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였으며 이후에 도읍 즉 백아강을 환도성과 평양성에 두었었다. 하지만 졸본을 신성시하여 사당을 두었다.
- 백제는 그 근본이 고구려에 있었고 남의나라에 부소량을 둘 수 없는 까닭에 부소량이 없었으며, 신라는 건국초기에 정복사업을 크게 벌이지 못한 까닭에 금성에서 멀찍이 따로 도읍을 둘 필요가 없어서 부소량이 따로 없다.
- 고려는 개경이 부소량인데 서경(西京)인 평양을 백아강으로 삼지 못하여 부소량과 백아강이 같은 곳에 위치하는 비정상적인 정치제도를 갖게 되었다.
- 청나라의 부소량은 만주가 되고 백아강은 북평 지금의 북경이 될 것이다.
[1] 편의상 '나무'의 음운변화는 생략한다.
[2] '단'이란 지명어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주로 '불(벌)'과 '라'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단' 또한 역사상 중요한 지명어미이다. 삼국사기에 '단'을 주로 呑(탄)과 旦(단)과 頓(돈)으로 음차하였다. 呑의 예로는 首乙呑(수을탄)과 於支呑(어지탄)과 習比呑(습비탄)이 있으며, 旦의 예로는 乙阿旦(을아단)과 買旦忽(매단홀)과 阿旦城(아단성)들이 있으며, 頓의 예로는 德頓忽(덕돈홀)이 있다. 丹(단)으로 음차한 지명은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皆丹(개단)과 林丹(림단) 등이 있다. 漢國(한국)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단'이 사용된 지명을 바꾸어 屯(둔)을 사용하였는데 臨屯(임둔)이 그 하나의 예이다. 여기 震檀(진단)도 '단'을 지명어미로 사용한 하나의 예가 된다.
[3] 姜秉倫, 地名語에 殘在해 있는 古語에 대한 考察. 明知語文學, 19, 75-99 (199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