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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조선사독단 (50)
獨斷論
아래를 보면 알겠지만 원시알타이어에서 바람을 kiaju(기아주)라고 하였고 특히 터키 계통에서는 이를 shaman spirit으로도 사용하고 있음은 기자조선의 기자가 은나라 기자가 아니라 風神(풍신)을 표현한 것임을 알수 있다. 현대우리말에서는 안좋은 뜻인 '구린내'로 남이 있는게 안타까울뿐이다. Proto-Altaic: *ki̯àjúMeaning: wind, airRussian meaning: ветер, воздухTurkic: *KAj Proto-Turkic: *KAjAltaic etymology: Altaic etymologyMeaning: 1 shaman spirit 2 throat singingRussian meaning: 1 шаманский дух 2 горловое пениеSary-..
한서 지리리의 요동군에 왕검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한 신찬과 응초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서로 분분하다. 그 해석을 찬찬히 따져보다..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이 있는데 주석은 다음과 같다.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응소(應劭)을 말을 해석해보면 이렇다.조선의 임금 滿(만)의 도읍이다. 물이 험함에 의지하였으므로 험독이라 하였다.이는 요동군 험독현이 위만조선의 도읍이라고 말한 것으로서 많은 재야학자들이 위만조선의 도읍을 정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신찬(臣瓉)의 말을 해석해 보면 이렇다.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이곳이(此, 즉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 원래의(自是) 험독이다. 此는 항상 '이것..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련된 낙랑 정리 고구려 백제 신라 BC28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다 三十年 樂浪人將兵來侵 BC20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三十八年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BC15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四年 春夏 旱 饑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BC11 낙랑태수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樂浪太守使告曰…由是 與樂浪失和 BC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
한맥역사강좌 제 8회 (조선 1) 이라 이름한 뜻 o 조선이외에도 부여(夫餘), 진한(辰韓)·변한(卞韓)·마한(馬韓)·낙랑(樂浪)·대방(帶方)· 진번(眞番)·임둔(臨屯)·신라(新羅)·가락(駕洛)·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진(震)·발해 (勃海)·마진(摩震)·태봉(泰封)·고려(高麗) 등의 이름이 있음. o 이들 이름의 뜻을 말하고 조선의 뜻을 말하고자 함. o 이들의 연혁은 모두 단군(壇君)때부터 있던 칭호임. 1. 고구려·고려 등은 단군조선(壇君朝鮮) 중부(中部)의 이름. o 고려 : 고구려의 이름을 이은 자. - 「왕건이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다」 - 서희전 「우리나라가 고구려 故地에서 일어난 고로 국호를 고려라 하다.」 o 고구려는 고주몽성제 이전에도 있었다. - 「북부여왕을 “寧藁離王”이..
규원사화 삼국유사 紀年東史約(1849) 紀年兒覽(1778) 大東歷史(1905) 1)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曰壬儉城[i] 2)居牛首河畔十年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曰平壤卽第二壬儉城也.[ii] 3)御國三十餘年…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4)御國四十餘載,…乃益封夫餘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iii]), 使夫婁居壬儉城…[iv] 5)遷都樂浪忽, 使眞番侯監舊都. 6)避居於唐莊京, 入阿斯達[v] 1)降於太伯山頂[vi] 2)唐高卽位五十年[vii]…都平壤城, 始稱朝鮮. 3)移都於白岳山阿斯達[viii] 4)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1)檀君立都平壤 2)商武丁三十九祀, 入阿斯達 1)都平壤 2)後都白岳, 世號唐藏京 3)入阿斯達爲神 1)雄築室于太白山 2)都長安[今平壤] 3)一百二十七年都白岳 4)一千..
고대 중국어 전문가 문성재씨 주장 문성재 박사“새로 출토된 고구려 비석은 위각(僞刻)일 가능성이 크다.” '제2의 광개토대왕비'로 추정됐던 고구려비에 대해 고대 중국어 학자 문성재(우리역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박사가 의문을 제기했다. 고구려를 한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조작하는 증거로 만들어냈을 개연성이 크다고 했다. 비문 표현과 내용이 기존의 광개토대왕비와 비교해 가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주장이다. ◆'중국 문물보' 분석=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내는 '중국 문물보' 1월 4일자에 고구려 비석 발견 기사가 실렸다. 문 박사는 '문물보' 내용만 분석해도 비석의 실체와 그들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문물보'에서 이번 고구려비의 양식을 '규형비(圭形碑)'라고 규정했다. '규형비'..
기자조선은 단군조선 1000년 통치기간 후에 기자가 정권을 이어받아 다시 또 1000년을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조선을 이어받은 기자는 주나라에서 망명온 기자가 아니라 아마도 풍백 운사 우사 중 풍백의 자손이 아닌가 한다. 우선 箕의 뜻을 살펴보면존한자사전 【기】키; 삼태기; 쓰레받기; 별 이름; 바람 귀신(風伯); 다리를 뻗고 앉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바람귀신이라고 하는 풍백(風伯)인데, 환웅이 나라를 세울때 개국공신이었던 풍백과 한자가 일치한다는 점이다.강희자전 【書·洪範註】好風者箕星,好雨者畢星。바람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기성(箕星)이라고 합니다. 【註】箕伯,風師。기백(箕伯)은 풍사(風師)이다.위 한자의 뜻으로부터 꼭 사서에 나오는 箕子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箕의 ..
우리나라의 사료가 너무 부족하여 가끔가다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은 제가 알기로 앞쪽을 남쪽으로 보는 습성이 있다고 하죠. 우리나라도 고려중기와 중세조선을 지나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앞쪽을 남쪽으로 보는 습성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대에 앞쪽을 북쪽으로 보았던 것 같고, 그렇기에 하평양(下平壤)이 남평양(南平壤)이 되는 것입니다. (이하 글에서는 "앞쪽=위쪽"으로 봤다는 전제가 들어갑니다) 고구려 사람이 생각하는 앞쪽은 북쪽 고구려는 어떤 책력을 사용하였을까요? 해동역사에서 유환기문(游宦記聞)의 기록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해동역사 권17 성력지 고려국에는 구집력(九執曆)이 있다. 그 법은 하늘은 왼쪽으로 돌고, 해와 달 역시 왼쪽으로 돈다. 하루의 밤과 낮은 해..